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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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이규리

     깜빡 눈감을 때 연두와 눈뜰 때 연두가 같지 않고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내가 있었음과 당신의 없었음은

     또 어떻게 말할까

     늦은 오후에 후둑 비 떨어진다

     비와 비

     그 사이가 바로 연두

     말하려다 만다

     연두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일처럼

     사랑도 그러했는데

     다 듣고는 믿지 않을 거면서

     당신들은 말하라 말하라 다그친다

     설명하라 한다

     할수록 점점 다른 뜻이 되어가는

     절망 배신 희생 죽음 따위와 뭐가 달라

     그들 생애엔 순간을 포함하지 않았으리

     비루하지도 않았으리

     연두가 어떻게 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지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그 결별들을 다 어떻게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중에서

      만원 버스 안에서 흔들리다가 겨우 자리 잡고 앉아서 만나게 된 연두~

      10시의 내가 11시의 나에게,

      달라지고 있고 달라져 가고 있다고

      봄이 오고 있다고

      경칩인 아침, 속닥속닥한다.

      산수유,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바람, 살랑살랑한 저녁이다.

      2021년 3월 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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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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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가는 표용적인 인종인가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 [p16]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p29]

   2, 소설가가 된 무렵

   삼십여 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봄날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이따금 원고지와 오래도록 애용해온 몽블랑 굵은 만년필이 그리워지지만). 그리고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이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苦役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57]

   3, 문학상에 대해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에서 노벨 문학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작가가 되고 싶을까? 내가 노벨 문학상을 타고 싶을까? 노벨 문학상이 대체 뭔데? 너무나 많은 이류 작가에게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 읽을 마음도 나지 않는 그런 작가들에게. 애초에 이 상을 타려면 스톡홀름까지 찾아가 정장을 차려입고 연설을 해야 한다. 노벨 문학상이 그런 수고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단연코 노다.'[p72]

   문학상에 대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지금까지 나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려고 해왔습니다. 상을 타고 타지 않고는 작품의 내용과는 많은 경우, 기본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제고 그러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자극적인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던 대로 우연히 문예지에 실린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그 작은 칼럼을 보고, 이제 슬슬 문학상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 얘기해둘 적당한 때인지도 모른다,라고 문득 마음먹었습니다. 계속 얘기하지 않고 있으면 묘한 오해를 살 가능성도 있고, 그걸 어느 정도 올바르게 정정해두지 않으면 그 오해가 '견해'로 정착될 우려도 있으니까.

   그렇기는 하나 그런 사안에 대해 (그냥 속물적인 사안이라고 할까요) 생각하는 바를 얘기하기가 상당히 어렵군요. 경우에 따라서는 솔직하게 말할수록 더 거짓말 같고, 또한 오만하게 비칠지도 모릅니다. 던진 돌멩이가 더 강하게 내게로 되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가장 득책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분도 분명 어딘가에 계실 것이다, 하고.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가 행해온 작업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하물며 결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형태로든 보강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는 '좋은 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성가심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올그런은 메달을 휙 내던져버리고 챈들러는 스톡홀름행을 아마도 거부할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입장에 처했다면 실제로 어떻게 했을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처럼 문학상의 가치는 사람 사람마다 각각 달라집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입장이 있고 개인의 사정이 있고 개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한 묶음으로 취급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문학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도 단지 그것뿐입니다.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률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p82~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그가 어떤 소설가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공이 탄탄한 작가였다는데 새삼 감탄한다.

  다 읽고 나면 소설을 쓰는 쪽에 가까워지려나하고 시작했는데, 웬걸 더 멀어졌을 뿐이다. 필사하듯 밑줄 긋고 옮겨 적는 부분만 한 가득이다. 역시 소설보다는 잘 읽히는 하루키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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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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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시집[당신은 첫눈입니까]중에서

 

   

 

​   우리가 통화하는 동안 눈은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동안 눈은 조용조용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는 그 마음에 대해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풀풀 날리는 공중'조차 가진 적 없는 우리의 지난한 날들을 "흩날리는 부질없음'의 소멸들을 나누는 중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봄의 시작이라 믿고 싶은 순간에도 내리는 눈은 아름답다. 어제는 나뭇가지에 눈을 띄운 아가들을 보고 경이로워했는데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지는 마음 기울기를 찬찬한 눈으로 보고 있다.

   이 겨울 제대로 된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은 첫눈입니까

 

   

 

 

 

   해 질 무렵이면 끌리듯 나서는 산책길은 춥고 조심스럽게 미끄러웠어.

   그래도 뽀득뽀득한 눈길 밟는 소리는 느낌이 좋았어.

   라디오에서는 경주에 첫눈이 온다던데, 당신은 첫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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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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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                              이원하

​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시집[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중에서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은 노을이 지는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은 "울기 좋은 때" 맞다.

  약간은 센치해지는 설날 오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을 읽는다.

  제주 올레 초기가 주로 서귀포 쪽 바다였다면 함덕 쪽 바다들은 2015년 이후에 만나기 시작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조용한 하도리 바다와 길,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다의 목소리"에 빠져 "하늘에 이불이 덮이"는 길 위를 서성였다. 허기와 쓸쓸함과 종일 끌고 다닌 발이 무거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화는 울린다. '어디야? 얼릉 와. 저녁 먹어야지' 내 제주의 거점은 매번 성산포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찾아가고 싶은 다정한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성산포 성산리의 민박집.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 듯 반짝거리는 마당을 지나 이층 데크에서 매번 "혼자 울기 좋은 때"임을 알려주는 식산봉 위로 저녁이 가볍게 내려앉는다. 내가 오늘 찾아간 길들과 풍경과 말들을 조잘조잘 대면서 또 한 명의 산 언니네 부부와 '냉장고 안 들어간 오리지널 한라산 한 잔'을 콜콜콜 따른다. 식탁에는 숨비소리 거칠게 공수해온 '참소라'와 함께 걷던 친구들의 이름이 그득할 것이다. 그립다. 안녕하신지 전화만으로 안부를 묻기에는 허허롭다. 하여 여기에 숨겨둔다. 무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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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첼 카슨은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생명이었다. 레이첼은 열아홉 살 때 실험실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쓸 거리가 생겼어." 생명은 그녀에게 단어를 줬다. 그녀만의 목소리를 줬다. 그녀는 과학을 시처럼 쓸 줄 알았고 그녀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인가는 숨을 죽였다. 글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글에는 마치 죽은 뒤 하늘로 높이높이 떠오르는 인어공주의 영혼을 닮은 수정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첼 카슨의 사적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3년에 일어났다. 레이첼은 오랫동안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신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길 고대했다. 1953년에 7월에 그 일이 일어났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로 성공을 거둔 카슨은 어머니와 함께 살 별장을 마련하게 된다. 그 별장에선 해변에 물개와 바다표범이 출몰하고 강어귀에서 고래가 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창은 거대한 세계로 향하는 열린 문이었다. 레이첼은 별장으로 이사 오면서 도로시 프리먼과 스탠리 프리먼 부부를 만나게 된다. 프리먼 부부는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번갈아가면서 큰 목소리로 낭독할 정도로 좋아했고 레이첼이 이웃으로 온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레이첼과 프리먼 부부가 처음 만난 날, 초저녁의 햇살은 늦게까지 빛나고 달은 부지런히 썰물을 당겨 올렸다. 그날 그들은 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을 뿐인데 헤어지자마자 두 번째 만남을 고대하게 되었다.

  레이첼과 도로시는 같은 것을 사랑했다. 자연, 바다, 고양이, 레이첼은 다시 만나면 도로시를 조수 웅덩이, 즉 썰물의 세계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썰물 때 드러난 조수 웅덩이를 지켜보는 것은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중략)

 

 

  수술 후 그녀는 방사선 치료로 인한 고열, 통증, 메스꺼움 때문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는 살충제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신체 세포의 생태를 교란할지도 모를 처치를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을 가진 의사"를 찾아야 했다. 방사선 치료는 종양은 작아지게 했지만 궤양은 악화시켰다. 이제 도로시와 레이첼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전에 도로시는 레이첼의 베개 밑에 레이첼에게 늘 위안을 주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적은 쪽지를 넣어두었다.

 

    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

  썰물 때 드러나는 작은 따개비와 조개껍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생명 전체의 위대함을 배웠던 카슨을 이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도 드물 것이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죽음을 포함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덜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삶은 죽음 일보 직전의 초연함과 지혜가 될 터였다. 그녀는 하기로 계획했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주 가끔씩 아픔을 모두 이기고 정신이 살아나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되면" 책 생각을 했다. 이제 그 좋아하던 조수 웅덩이에 내려가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를 공격한 것은 홍채염이었다. 홍채염은 그녀에게 책을 읽을 수도 빛을 견딜 수도 없는 끔찍한 통증을 안겨줬다. 대략 2주간은 실명 상태에 있었다.

  이 시련 끝에 1962년 1월, 마침내 레이첼은 『침묵의 봄』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고양이 제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제피는 작지만 따뜻한 몸과 혀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지난여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고는 지빠귀의 노랫소리를 다시는 행복한 기분으로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어젯밤 모든 새와 모든 생물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한 생각이 깊은 행복감과 함께 물밀듯이 찾아왔어요.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까요. 나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 책은 이제 자신만의 생명을 갖게 되었어요.

  그녀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는 서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무엇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줬나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레이첼 카슨은 암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정작 자신은 암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어떤 것도 제가 포기하도록 심지어 포기할까 하고 한 번쯤 생각해 보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백 번쯤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감동할 마당에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일 것이다("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1957년 최초의 살충제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워싱턴에 살면서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카슨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침묵의 봄』을 쓰는 과정이다. 『침묵의 봄』을 쓰는 일은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았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 중에서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p85~96

 

    이 책을 읽다가 지난해 봄에 쓰다 말고 팽겨쳐둔 글이 생각났다.

 

    코로나의 시절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봄이다.

  봄이면 당연하다는 듯

    봄 편지

                    박남준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         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중에서​

 

 

  나무들이 물이 오르는 것이 보이고 꽃봉오리들이 맺히는 것을 감탄하면서 들여다보는 시절인데 설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곁에 실체를 드러낸 코로나 바이러스는 봄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가 싶더니 봄꽃처럼 폭발적으로 피어나 우리를 겨울 속으로 이끌었다. 이제쯤은 사라지겠지, 이젠 괜찮을 거야, 하는 조바심과 간절함들이 교차하는 동안 삼월이 와버렸고 마음도 몸도 여전히 추웠다. 그쯤에 펴든 책, 오랜 기간 책꽂이에 장식처럼 자리한 [침묵의 봄]이다. 언젠가 읽기는 해야 할 텐데 어렵지 싶어 미뤄두고 미뤄두었는데 얼마 전에 읽기를 마친 호프 자런의 [랩걸]의 재미가 그런 선입견을 버리게 했고 '이런 시절엔 이런 책이지' 했다.

이미 어떤 내용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고 그동안의 독서 편력을 감안할 때 쉬운 접근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결과는 이렇다.

 

 

 

 

  읽는 동안 점점 몰입했고 무심한 행동, 무심한 일상들이 결국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아픈 자각이 왔다. 결국은 이 코로나의 시절, 즉 바이러스의 계절도 이미 예견된 [침묵의 봄]은 아닐까 하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모기가 싫다. 아니 무섭다. 어려서부터 물것을 심하게 타는 내 종아리와 팔뚝은 여름 내내 성한 곳이 없었다. 모기가 물리면 성이 나서 부어오르고 가렵다가 급기야 상처를 남기고 그 흉터는 다음 해까지 이어지다가 사라질 즈음이면 다시 여름을 맞는 반복이니 이쯤 되면 모기와의 관계는 천적이다. 여름 필수품으로 벌레 물린 데니, 기피제 등은 가방 안에 항상 준비되어 있다. 혹여 들이나 산에 나서려면 큼직한 에어로졸 흔히 모기약이라고 불리는 스프레이는 필수다. 그렇게 살충제를 가까이하고 사는 내게 DDT로 시작하는 책의 내용은 반성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 상황이 5~60년대라지만 지금, 바로 지금이라고 읽혀서 더욱 충격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멈춰있다.

   [앞으로 올 사랑]도, [침묵의 봄]도 마무리는 아니다. [침묵의 봄]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 건 정혜윤의 글에서처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아 간 레이첼 카슨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어떻게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책의 완결을 마칠 수 있었는지 절로 경외감과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는 그녀가 보내 준 경고를 무시하면 나는 대표로 벌받을 것이다.

  그리고 '정혜윤'. 책으로 만날 때마다 거듭 찬탄한다. 내 전작 읽기의 도전은 그녀의 열정적인 독서와 쓰기 앞에서 읽는 것만도 따라잡기가 벅차다. 오죽하면 정혜윤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도 저자의 이름만으로 사들였을까? '정혜윤 피디'가 기어이 cbs 라디오를 그만두고 여행자의 삶을 시작했나 보다고, 더 이상 살펴보지도 않고 덜컥 사들였으나 동명이인의 책이었다는 웃픈 일도 내게 일어나게 만든 그녀다. [앞으로 올 사랑]을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책 속에 담긴 자신의 작업의 긍지로 보아 그녀가 라디오를 그만 둘 일은 거의 없을 듯하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은 지금이라는 시대에 보내는 희망적인 사랑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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