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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ㅣ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시집[당신은 첫눈입니까]중에서
우리가 통화하는 동안 눈은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동안 눈은 조용조용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는 그 마음에 대해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풀풀 날리는 공중'조차 가진 적 없는 우리의 지난한 날들을 "흩날리는 부질없음'의 소멸들을 나누는 중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봄의 시작이라 믿고 싶은 순간에도 내리는 눈은 아름답다. 어제는 나뭇가지에 눈을 띄운 아가들을 보고 경이로워했는데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지는 마음 기울기를 찬찬한 눈으로 보고 있다.
이 겨울 제대로 된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은 첫눈입니까
해 질 무렵이면 끌리듯 나서는 산책길은 춥고 조심스럽게 미끄러웠어.
그래도 뽀득뽀득한 눈길 밟는 소리는 느낌이 좋았어.
라디오에서는 경주에 첫눈이 온다던데, 당신은 첫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