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카슨은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생명이었다. 레이첼은 열아홉 살 때 실험실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쓸 거리가 생겼어." 생명은 그녀에게 단어를 줬다. 그녀만의 목소리를 줬다. 그녀는 과학을 시처럼 쓸 줄 알았고 그녀의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인가는 숨을 죽였다. 글을 읽는 동안 아름다움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글에는 마치 죽은 뒤 하늘로 높이높이 떠오르는 인어공주의 영혼을 닮은 수정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레이첼 카슨의 사적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3년에 일어났다. 레이첼은 오랫동안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신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길 고대했다. 1953년에 7월에 그 일이 일어났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로 성공을 거둔 카슨은 어머니와 함께 살 별장을 마련하게 된다. 그 별장에선 해변에 물개와 바다표범이 출몰하고 강어귀에서 고래가 뒹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창은 거대한 세계로 향하는 열린 문이었다. 레이첼은 별장으로 이사 오면서 도로시 프리먼과 스탠리 프리먼 부부를 만나게 된다. 프리먼 부부는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번갈아가면서 큰 목소리로 낭독할 정도로 좋아했고 레이첼이 이웃으로 온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레이첼과 프리먼 부부가 처음 만난 날, 초저녁의 햇살은 늦게까지 빛나고 달은 부지런히 썰물을 당겨 올렸다. 그날 그들은 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을 뿐인데 헤어지자마자 두 번째 만남을 고대하게 되었다.
레이첼과 도로시는 같은 것을 사랑했다. 자연, 바다, 고양이, 레이첼은 다시 만나면 도로시를 조수 웅덩이, 즉 썰물의 세계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썰물 때 드러난 조수 웅덩이를 지켜보는 것은 레이첼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중략)
수술 후 그녀는 방사선 치료로 인한 고열, 통증, 메스꺼움 때문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는 살충제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신체 세포의 생태를 교란할지도 모를 처치를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을 가진 의사"를 찾아야 했다. 방사선 치료는 종양은 작아지게 했지만 궤양은 악화시켰다. 이제 도로시와 레이첼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전에 도로시는 레이첼의 베개 밑에 레이첼에게 늘 위안을 주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적은 쪽지를 넣어두었다.
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
썰물 때 드러나는 작은 따개비와 조개껍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생명 전체의 위대함을 배웠던 카슨을 이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시도 드물 것이다.
레이첼은 자신에게 죽음을 포함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덜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그녀의 삶은 죽음 일보 직전의 초연함과 지혜가 될 터였다. 그녀는 하기로 계획했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주 가끔씩 아픔을 모두 이기고 정신이 살아나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되면" 책 생각을 했다. 이제 그 좋아하던 조수 웅덩이에 내려가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를 공격한 것은 홍채염이었다. 홍채염은 그녀에게 책을 읽을 수도 빛을 견딜 수도 없는 끔찍한 통증을 안겨줬다. 대략 2주간은 실명 상태에 있었다.
이 시련 끝에 1962년 1월, 마침내 레이첼은 『침묵의 봄』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고양이 제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제피는 작지만 따뜻한 몸과 혀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지난여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지 않고는 지빠귀의 노랫소리를 다시는 행복한 기분으로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어젯밤 모든 새와 모든 생물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한 생각이 깊은 행복감과 함께 물밀듯이 찾아왔어요. 지금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까요. 나는 그 책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그 책은 이제 자신만의 생명을 갖게 되었어요.
그녀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는 서사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무엇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줬나 찬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레이첼 카슨은 암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쓰는 동안 정작 자신은 암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어떤 것도 제가 포기하도록 심지어 포기할까 하고 한 번쯤 생각해 보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백 번쯤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감동할 마당에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일 것이다("해야 할 일이 뭔지 알면서도 손을 놓고 있다면 제게 미래의 평화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1957년 최초의 살충제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워싱턴에 살면서 도움을 줄 누군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카슨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누군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침묵의 봄』을 쓰는 과정이다. 『침묵의 봄』을 쓰는 일은 그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다' 혹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았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 중에서 『그녀는 그녀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p85~96
이 책을 읽다가 지난해 봄에 쓰다 말고 팽겨쳐둔 글이 생각났다.
코로나의 시절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봄이다.
봄이면 당연하다는 듯
봄 편지
박남준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도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침 아기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둣빛 봄 편지
시집[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중에서
나무들이 물이 오르는 것이 보이고 꽃봉오리들이 맺히는 것을 감탄하면서 들여다보는 시절인데 설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곁에 실체를 드러낸 코로나 바이러스는 봄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가 싶더니 봄꽃처럼 폭발적으로 피어나 우리를 겨울 속으로 이끌었다. 이제쯤은 사라지겠지, 이젠 괜찮을 거야, 하는 조바심과 간절함들이 교차하는 동안 삼월이 와버렸고 마음도 몸도 여전히 추웠다. 그쯤에 펴든 책, 오랜 기간 책꽂이에 장식처럼 자리한 [침묵의 봄]이다. 언젠가 읽기는 해야 할 텐데 어렵지 싶어 미뤄두고 미뤄두었는데 얼마 전에 읽기를 마친 호프 자런의 [랩걸]의 재미가 그런 선입견을 버리게 했고 '이런 시절엔 이런 책이지' 했다.
이미 어떤 내용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고 그동안의 독서 편력을 감안할 때 쉬운 접근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결과는 이렇다.
읽는 동안 점점 몰입했고 무심한 행동, 무심한 일상들이 결국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아픈 자각이 왔다. 결국은 이 코로나의 시절, 즉 바이러스의 계절도 이미 예견된 [침묵의 봄]은 아닐까 하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모기가 싫다. 아니 무섭다. 어려서부터 물것을 심하게 타는 내 종아리와 팔뚝은 여름 내내 성한 곳이 없었다. 모기가 물리면 성이 나서 부어오르고 가렵다가 급기야 상처를 남기고 그 흉터는 다음 해까지 이어지다가 사라질 즈음이면 다시 여름을 맞는 반복이니 이쯤 되면 모기와의 관계는 천적이다. 여름 필수품으로 벌레 물린 데니, 기피제 등은 가방 안에 항상 준비되어 있다. 혹여 들이나 산에 나서려면 큼직한 에어로졸 흔히 모기약이라고 불리는 스프레이는 필수다. 그렇게 살충제를 가까이하고 사는 내게 DDT로 시작하는 책의 내용은 반성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 상황이 5~60년대라지만 지금, 바로 지금이라고 읽혀서 더욱 충격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멈춰있다.
[앞으로 올 사랑]도, [침묵의 봄]도 마무리는 아니다. [침묵의 봄]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 건 정혜윤의 글에서처럼 '어떤 사람이 되어간다'의 삶을 살아 간 레이첼 카슨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어떻게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책의 완결을 마칠 수 있었는지 절로 경외감과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는 그녀가 보내 준 경고를 무시하면 나는 대표로 벌받을 것이다.
그리고 '정혜윤'. 책으로 만날 때마다 거듭 찬탄한다. 내 전작 읽기의 도전은 그녀의 열정적인 독서와 쓰기 앞에서 읽는 것만도 따라잡기가 벅차다. 오죽하면 정혜윤 [퇴사는 여행]이라는 책도 저자의 이름만으로 사들였을까? '정혜윤 피디'가 기어이 cbs 라디오를 그만두고 여행자의 삶을 시작했나 보다고, 더 이상 살펴보지도 않고 덜컥 사들였으나 동명이인의 책이었다는 웃픈 일도 내게 일어나게 만든 그녀다. [앞으로 올 사랑]을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책 속에 담긴 자신의 작업의 긍지로 보아 그녀가 라디오를 그만 둘 일은 거의 없을 듯하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은 지금이라는 시대에 보내는 희망적인 사랑 이야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