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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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                              이원하

​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시집[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중에서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은 노을이 지는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은 "울기 좋은 때" 맞다.

  약간은 센치해지는 설날 오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을 읽는다.

  제주 올레 초기가 주로 서귀포 쪽 바다였다면 함덕 쪽 바다들은 2015년 이후에 만나기 시작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조용한 하도리 바다와 길,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다의 목소리"에 빠져 "하늘에 이불이 덮이"는 길 위를 서성였다. 허기와 쓸쓸함과 종일 끌고 다닌 발이 무거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화는 울린다. '어디야? 얼릉 와. 저녁 먹어야지' 내 제주의 거점은 매번 성산포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찾아가고 싶은 다정한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성산포 성산리의 민박집.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 듯 반짝거리는 마당을 지나 이층 데크에서 매번 "혼자 울기 좋은 때"임을 알려주는 식산봉 위로 저녁이 가볍게 내려앉는다. 내가 오늘 찾아간 길들과 풍경과 말들을 조잘조잘 대면서 또 한 명의 산 언니네 부부와 '냉장고 안 들어간 오리지널 한라산 한 잔'을 콜콜콜 따른다. 식탁에는 숨비소리 거칠게 공수해온 '참소라'와 함께 걷던 친구들의 이름이 그득할 것이다. 그립다. 안녕하신지 전화만으로 안부를 묻기에는 허허롭다. 하여 여기에 숨겨둔다. 무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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