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은 하나의 물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물(物) 자체로 보는것이 아니라 그 물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상(像)을 갖고 이야기한다. 유식하게 말해서 오브제(objet)가 아니라 이미지 (image)로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미술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이미지를 극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가를고민해왔다. 그런 중에 옛사람들이 곧잘 채택했던 방법의 하나는 시각적 이미지를 시적(詩的) 영상으로 대치시켜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도 엄두를 못 내는 이 방법을 조선시대에는 웬만한 선비라면 제화시(題畵詩) 정도는 우리가 유행가 한가락 부르는 흥취로 해치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침묵의 물체는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그것은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것이다. - P73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풍 부석사(浮石寺)이다.
우리 어머니가 택한 것은 운문사 정경이었고 나는 부석사를 꼽았었다. - P75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하여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는 것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 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조화하여 두 모습으로 나님이 없고,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됨"이라는 원융 (圓融)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람배치가 부석사인것이다. 그러니까 부석사는 곧 저 오묘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이미지를건축이라는 시각매체로 구현한 것이다. 이 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이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일 것이다. 부석사는 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에 자리잡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鳳凰山)중턱이 된다. 이 자리가 지닌 지리적, 풍수적 의미는 그것으로 암시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국토의 오지라는 사실에서 사상사적, 역사적 의미도 간취된다. 부석사 아랫마을 북지리에서 이제 절집의 일주문을 들어가 천왕문, 요사채, 범종각,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조사당과 응진전(應眞殿)까지 순례하는 길을 걷게 되면 순례자는 필연적으로 서로 성 - P76
격을 달리하는 세 종류의 길을 걷게끔 되어 있다. 절 입구에서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은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부석사의 본채는 정연한돌축대와 돌계단이라는 인공의 길이다. 그것은 엄격한 체계와 가지런한 질서를 담고 있으며 그 정상에 무량수전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면 자연의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치달리는태백산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것은 곧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상처받지 않은 위대한 자연으로 돌아온것이다. 무량수전에서 한 호흡 가다듬고 조사당, 응진전으로 오르는 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길이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여운인 것이다. 인공과 자연의 만남에서 인공의 세계로, 거기에서 다시 자연과 그 여운에로 이르는 부석사 순례길은 장장 시오리이건만 이 조화로움 덕분에 어느 순례자도 힘겨움없이, 지루함없이 오를 수 있게 된다. 지금 나는 저 극락세계에 오르는 행복한 순례길을 여러분과 함께 가고있는 것이다. - P77
나는 항시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고 최순우 관장의 「무량수전」 한편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왔다. 혹자는 이 글을 일러 너무 감상적이라고, 혹자는아카데믹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감상적이면 뭐가 나쁘고 아카데믹하지 못하면 뭐가 부족하다는 것이냐고 되받아쳤다. 나는 그날 낭랑한 나의 목소리를 버리고 스산하게 해지는 목소리에 여운을 넣어가며 부석사 비탈길을 오르듯 느긋하게 읽어갔다. 박물관 인생이라는 외길을걸으며 우리에게 한국미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고인의 공력을 추모하면서,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 - P98
음을 더욱 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사무치는‘이라는 단어의 참맛을 배웠다. 그렇다! 내가 해마다 거르는 일 없이 부석사를 가고 또 간 것은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P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