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에 참석한 국민대 최종욱 교수가 우리는 "하버마스의 한국이 아니라 한국의 하버마스가 필요한 것"이라고 뼈있는 논평을 쓴 것을 읽은 것은 뒤의 일이었는데, 그때 내 머릿속에 전통의 원형질을 지켜준 문화유산의 보고로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안동이었다.
"약무호남(若無湖南) 무시조선(無是朝鮮)‘이라는 말이 있다. ‘호남이 없으면 그것은 조선이 아니다‘라는 뜻인데 그것은 남도의 풍부한 물산(物産)과따스한 인정, 멋진 풍류를 두고 하는 말인 줄로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악무안동 무시조선‘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안동이 없다면그것은 조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니 그때는 무엇보다도 정신과도덕을 두고 하는 말임에 모두가 동의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남도답사 일번지에서 느낀 귀한 감정이란 따뜻한 고향의 품, 외갓집을찾는 편안함. 정겨운 이웃과 함께 하는 친숙함이었다. 이에 반하여 영남답사일번지라 칭할 북부 경북의 안동문화권에서는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적인 엄숙성, 전통의 저력, 공동체적 삶의 힘 같은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니, 그곳에 갈 때면 나를 정신적으로 성숙시켜준 모교를 찾아가는 그리움 같은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남도답사 일번지는 화려한 원색의 향연을 벌이는 화창한 남도의 봄과 어울릴 때 제격이었듯이, 영남답사 일번지는 처연한 만추의 안동을 찾았을 때 더욱 깊은 감회를 새기게 된다. - P67

아닌게아니라 경상도 말씨는 거세고 시끄럽다. 이것이 남쪽으로, 또 바닷가로 갈수록 심해서 악센트는 강하게 앞쪽으로 쏠려, 아주머니를 부를 때 아지매‘라고 하면서 ‘아‘를 짧고 강하게 부른다든지, 말끝마다 ‘씨했다‘ ‘니지기면다‘라는 강한 말을 붙이는 걸 들으면 기겁을 할 정도고 오죽하면 부산 자갈치시장 같다는 말이 나왔겠나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북부 경북의 니꺼형 말씨는 그렇지 않다. 단어 또는 문장상에서 악쎈트를 뒤쪽으로 주므로 힘도 있고 설득력도 있다. 고평평의 교형, 평평평의서울말과 달리 평고평의 니껴형에는 무엇보다도 리듬감과 여운이 있다. 우리가 간혹 경상도 말인데 정말 듣기 좋다고 느끼는 경우는 모두 북부 경북사람말씨다. 이를테면 KBS 제1FM 「즐거운 한마당」에서 한동안 최종민 교수(안동)가 보여준 친숙함, MBC 라디오 칼럼에서 홍사덕 의원(순흥)이 보여준 명쾌함, 역사학자 조동걸 교수(영양).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의성)의 강의를 들으면 느끼는 당당함,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안동)의 말씨에 서린 넉넉함등이 모두가 니꺼형 말씨의 고운 모습이다. 언젠가 영양에서 길을 묻는데 "그리 가믄 머얼데이"라고 말한 아저씨의 평고평의 여운있는 말씨가 답사에서 돌아오도록 내내 내 귓가에 기쁘게 남아 있었다. - P69

안동이 어떤 곳인가를 노래한 시로는 임동면 박실 태생의류안진이 쓴 「안동」(「누이, 세계사 1997)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게 안동이다.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차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수(首)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대구(對句) 받듯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이런 정신적인 것의 이야기가 안동의 문화유산마다 어려 있어 ‘들을 안동이지 볼 안동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어느 정도는 겸손이며, 어느정도는 변명이다. 그게 안동이다. - P90

참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갑자기 하늘이 넓게 열리며 산속의 분지가 나타나고 저 앞쪽 멀리로는 돌축대, 돌담을 끼고 늠름히 서 있는 봉정사 만세루가 아련히 들어온다. 어찌 보면 만세루가 오히려 은행나무, 감나무 사이로 어리어리비치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만세루 눈길에 이끌리어 거기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옮기게 된다.
만추의 안동, 참나무 갈색 낙엽이 단색조로 차분히 누렇게 물들고 있을 때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에 햇살이 부서지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누구라 따갈 이없는 늙은 감나무에 홍시가 빠알갛게 익어 그 가을빛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것은 비취빛 고려청자 매병에 백학이 상감되어 있는 것만도 황홀한데 그 학 머리에 붉은빛 진사(辰砂)로 점을 찍어 단정학(丹頂鶴)을 새겨놓은 것 만큼이나 눈과 마음을 상큼하게 열어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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