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으로 살다가 고요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나를 꽤 두껍게 둘러싸고 있는 세계다. 나는 내가 그런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에너지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나의 자아 깊은 곳의 에너지가 나를 마니로 가게 만들었다. 나는 은둔자, 몽상가, 이상주의자, 게릴라, 난민, 잔존 세력들이 걸었던 그 길로 마니에 갔다. 타이게토스 산맥을 넘으면 구불구불한 언덕들이 나타나고 이어서 그리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지붕의 둥근 성당들이 나타난다. 그다음에 눈에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니를 그리스의 다른 어떤 마을과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바로 탑들이다. 마니의 탑은 설명하자면 그냥 탑이다. 직사각형 돌탑. 아무런 장식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탑.  - P179

레이먼드 카버의 시 「캅카스」에 이런 구절이 있다.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캅카스에서는 노을이 전부라고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노을로는 부족하다.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캅카스는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이고, 날마다 영웅들이 태어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내가 이 시를 읽은 것은 마니를 다녀오고 7년 뒤였다. 처음이 시를 읽을 때 나는 마니를 떠올렸다. 그 뒤로는 언제나 이 시와 함께 마니를 떠올린다.
마니의 노을은 아름다웠지만 노을로는 부족했다. 폐허에 바람이 불면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지팡이에 의지해 "끙!" 어렵게 무릎을 펴고, "끙!" 소리를 신호 삼아 할머니 뒤를 따라서 뭐라고 불리든 보이지 않던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지 않던 사람들, 현실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느낄 어떤 이야기를기다리던 사람들이 "이놈들! 좋은 사람이 뭔지 제대로 맛을 보여주겠다!"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와 토대부터 무너지는 폐허 (폐허인지도 모르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된 세 - P185

상에,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모든 것에, 피도, 눈물도, 사랑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항을 선포하면 좋겠다. 우리는 이 폐허에서 무엇을 위해 살고 사랑하고 싸워야했지?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했지? 대답을 찾는사람들이 날마다 태어나고 제 몫을 해내다가 어느 아름다운 날의 노을처럼 장엄하게 지면 좋겠다. 황제의 이야기가 죽음 너머 기억되는 것은 그의 책임감과 희생과 헌신 때문이다. 사랑 안에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없다면 시간과 우연 너머 살아남는 것은 없다. 사실 그것을 빼면 우리 인생에 무슨 좋은 이야기가 남아 있겠는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책임감과 희생과 헌신의 경이로운이야기들의 연속된 흐름 속에 있을 수 있다. - P186

나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 중 포기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포기들이 발명 중이다. 고기 안 먹을래, 모피 안 입을래, 가죽 안 입을래, 비행기 안 탈래, 에어컨 안 켤래, 난방 안 켤래, 빨대 안 쓸래, 종이컵 안 쓸래, 자동차 안 탈래, 비닐봉투 안 쓸래, 농약 안 뿌릴래, 나무 안 벨래. 바다에 쓰레기 버리지 않을래. 이제 더 이상 새 옷은 사지 않을래.. 이렇게까지 다른 생명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것에는 감동적인 면이있다. 나와 타인, 나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꼭 다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꼭 따뜻해야 할, 꼭 친절해야 할 이유도 없다. 꼭 페르난도 페소아 시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의 한 구절 같다.
"나도 한 번은 사랑을 했지, 날 사랑하리라고도 생각했지, /그러나 사랑받지 못했지. / 꼭 받아야만 하는 법은 없다는/유일한 큰 이유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지."
"왜 내가 너를 사랑해야 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 P188

없어"가 맞는 대답이다. "왜 내가 다른 생명을, 미래 세대를 생각해야 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어." 이것 역시 맞는 대답이다. 외롭지 않고 싶다는 것은 우리 모두 열망하는 감정이지만 외롭지 않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가 외톱기를 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므로, 무관심, 무책임, 외면, 조롱, 무시, 냉소, 혐오가 많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는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구 생명이 겪고 있는 위기 때문에 뭔가 ‘포기‘하는사람, 뭔가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 P189

다정함도 온기도 사랑도 책임감도 없이 사는 것이어떤 것인지... 각자의 어두운 기억이 두텁게 쌓여가는이 세상에서, 결국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 ‘우리 모두의 것인 삶‘에대해 뭐라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감동적이다. 그래서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전에 하던 일을 더 이상하지 않게 되는-포기와 자제와 하지 않음 쪽으로의 변화를 살아내는, 그렇게 미래 세계의 일부가 되려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경이로워 보인다. 지구의 여러 문제에 우선 자신의 삶으로 대답하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고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줄 - P189

알기 때문에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사람들의 핏속에는 별빛이 흘러다닌다. 피부에는 별빛 가루가 뿌려져 있다. 이 사람들의 빛이 내게로 흘러온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말을 건넬 사람도, 기댈 곳도, 기대할 것도 없이 살게 된다. 나는 하늘의 별을 볼 때처럼, 심금을 울리는 희생과 헌신과 책임감의 이야기들에매료된다. 나의 욕망 중 가장 큰 욕망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욕망이고 나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본다. 나는 이 경이로운마음들과 함께 멀리 가보고 싶다. 더 많은 하지 않음, 포기를 발명하면서. - P190

행복해지려고 그렇게 했다고?
좋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외로워 보이는군솔직히 말해도 될까?
네가 예전처럼 근사해 보이진 않아.
네가 행복하려고 한 선택 때문에
너는 내가 예전에 알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야
너의 행복이라는
그 헛소리를 다 뒤집으면 거기에 희망이 있어
그럴 마음이 들면 전화해
전화번호는 같아

_미상(「바뀌지 않는 전화번호」, 파르테논이 정면으로보이는 카페에서 본 시)

황금 파고다가 있고, 새벽마다 파고다를 스치는 바람이 황금의 소리를 전하고, 황금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 미얀마. 그 땅 속에 묻힌 지하자원이란 이름의 황금 보물들이 피를 부르고 있었다. 욕망이 같다면 동일한 운명이 기다린다. "저주가 같다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 이것은 보르헤스의 말이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 P211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자연이 아니고 돈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은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 속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일부 인간만이 남는다. 이 세상이 최선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잘 적응한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메인 서사다. 이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정신적 배경이다.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응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지구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왔다. 코로나바이러스,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살아 있고 죽이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살아있고 죽이는 언어를 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이 있다. 우리는 현실의 세계를 살지만 허구와 환상의 세계-이야기의 세계에도 살기 - P212

때문이다. 내면에 깊게 뿌리 내린 다음 우리가 그 안에서 굳어져 그것에 따라 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힘이다.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하는 이유? 하나의 이야기밖에 모른다면 하나의 삶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가 다른 삶이 가능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쨌든 이것들은 내가 마음 편히 깃들 이야기들이 아니다. 나의 좋은 부분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이야기이도록 놔둘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새로운운명을 마련해주고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얼마나 애타게 지구를 돈을 벌어줄 자원으로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아는 아미타브 고시의 지도가 가리키는 출구 쪽 화살표에는 ‘이제 이야기를 바꿔라‘라고 써 있다. 앞으로는 자연을 빼놓고는 미래에대해서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것을 자원으로 보는 이야기 속에는 어떤 탈출도 해방도없다. - P213

더그는 공원의 일부분이 되었다. 훌륭한 꿈과 끝까지서로에게 헌신하고 충실했던 사랑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었다.
「지도 끝의 모험』은 야생을 모험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친구와 사랑을 찾고 인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을 찾고 자신의 삶을 만들고 아직 우리가 가보지못한 길을 만들면서 살아간다는 고난이도의 인생 모험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듣고 나누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류가 달라질 미래를 믿지않는다. 사실은 달라질 자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보는 대로 세상을 본다. 하지만 미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 생각이고 꿈이다. 세상은 우리의 상상과꿈과 생각대로 만들어지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으면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으면 제일먼저 사라지는 것이 이야기꾼의 능력이다. 이야기는 "그 - P219

다음엔 어떻게 돼?" "그 일 다음엔?"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를 잃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에 따라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결국은 타인이 그린 지도를 따라 타인 ㅡ부동산 개발업자나 파워엘리트, 메인파워, 인싸, 인플루언서, 국회의원 등등의 뭐 그런 파워풀해 보이는 이름을 가진ㅡ이 쓰는 이야기에 따라 살게 된다. 문제는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따라 하고 있는 이야기 중 뭔가를 잊어버려야한다. 각자를 지배하는 메인서사ㅡ어느새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믿게 만들어버린ㅡ 의 환상을 깨야 한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 그래서 그 길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래야 삶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면서 다른 미래에 살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 P220

내 눈에 릭과 친구들의 희망과 열정은 이 불타는 지구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현실 유지가 아닌 없던 것의 창조에 바쳤다. 나는 이 열정을 공유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같은 꿈을 꾸는것에 대해선 극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 P220

에너지를 받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어떻게 에너지를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할수 있겠는가?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따라 사는 데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살 때 나는 어디에 힘을 써야 할지 모르는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 자신을 겨우 신뢰할 수 있었다. 나는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이야기의 초대라고 표현해왔다. 이제는 이 이야기의 초대에 따라길을 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 P221

나는 이제 귤을 먹을 때마다 자이로와 친구들을 생각하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이루었던 야쿠시마 섬의 한밤중마임을 생각하고 그날 떠 있던 달, 나의 오랜 친구인 달ㅡ내가 힘들 때마다 숱하게 바라보던 달, 구름을 뚫고 나오던 모습을 지치도록 바라보게 만들었던 달ㅡ을 거북이도 바라보고 길을 찾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달은 내속마음도 들어줘야 하고 거북이, 조개, 아주 많은 생물들이 길을 찾게 도와줘야 하니 정말 바쁘겠다는 생각을 하고, 알 하나하나가 들려줄 수 있는 생명의 신비와 고난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거북이 알은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존재다. 달이 그런 것처럼, 파도가 그 - P226

런 것처럼.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더 이상 황금 보물을 찾아 정복할 곳이 아니라 잃어버린 의미와 신비를 되찾는 곳이다. 나는 거북이 알과 맛있는 귤에 걸맞은 이야기를 따라가볼 생각이다. "이 이야기가 딱이야!"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에 돌려줄 것이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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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úlveda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세풀베다는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특히 환경과 소수 민족 등에 관한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많다.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난 그는 피노체트가 정권을 장악하자 당시 많은 칠레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오직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망명해야 했다. 수년간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글을 쓰고 환경 운동을 펼치다가 파리를 거쳐 독일로 이주했으며, 1997년 스페인 북부에 정착해 남은 생을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다. 2017년 5월, 27년 만에 칠레 국적을 회복했다. 세풀베다는 1989년 연애소설 읽는노인』으로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장편소설 『지구 끝의 사람들』(1989), 『귀향, (1994),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우리였던 그림자』(2009), 중단편 소설집 「외면」(1997), 「그림 형제 최악의 스토리』 (2004), 『알라디노의 램프」(2008), 
에세이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2010) 등을 발표했다. 동화책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2012),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 이(2013),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2015) 등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하며 <강렬한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위기와 가치들을 은유적으로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동화를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는 2019년 5월 발표된 그의 유작으로,
거대한 향유고래가 바다의 평화를 깨뜨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조화롭게살아가는 생명체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이 철학 동화는, 우리 현대인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보호하기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세풀베다는2020년 4월,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향년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래서 고래는 춤추듯 흔들리는 물결 사이에서
신을 엿보기 위해
물 위로 나갔다.
그러자 고래의 눈에 신이 보였다.

-오메로 아리드히스‘ 「고래의 눈」

고래의 눈은 인간들에게서 본 것을 멀리서도
포착한다. 고래의 눈은 우리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대플리니우스‘ 『박물지』

2014년 남반구의 어느 여름날, 고래 한 마리가 칠레 푸에르토몬트‘ 부근의 한 자갈해변으로 떠밀려 올라와 있었다. 길이가 15미터가량 되고 신기한 잿빛을 띤 향유고래였다. 하지만 그 고래는 해변에 널브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어떤 어부들은 길 잃은 고래일지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은 반면, 다른 이들은 사람들이 무심코 바다에 내버린 쓰레기로 인해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세계 남쪽의 잿빛 하늘 아래 드러누운 거대한 해양 동물의명복을 빌었다.
고래는 간조 때의 잔잔한 물결에 흐느적흐느적 흔들 - P11

리고 있었다. 거의 두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고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몇 사람이 배에서 뛰어내려 들고 있던 굵은 밧줄로고래의 꼬리지느러미, 혹은 꼬리를 묶었다. 잠시 후, 배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바다 거인의 몸을 끌고 느릿느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저 고래를 어떻게 하려는 거죠?」 양털 모자를 손에꼭 쥔 채 서서히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던 어부에게 내가 물었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거지요. 일단 저만(灣)의 남쪽 출구를 지나 넓은 바다에 이르면, 고래의 몸이다시 뜨지 않도록 배를 갈라 속을 다 비울 겁니다. 그러고 나면 대양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겠죠」 어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와 고래가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로 사라지자, 해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 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서 두 줄 - P12

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넌 여기 사니? 나는 인사를겸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대답하기에 앞서 자갈밭 해변에 앉았다. 나도 그 아이를 따라 옆에 앉았다.
「네, 맞아요. 나는 라프켄체니까요. 혹시 그게 무슨뜻인지 아세요?」 아이가 물었다.
<바다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슬퍼하는 거예요?」 아이가 궁금한지 물었다.
「고래 때문에, 저 고래는 어떻게 될까?」 아저씨 눈에는 그냥 죽은 고래로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그 이상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의 슬픔과 나의 슬픔은 똑같지 않아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가운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 아이는 자기 손보 - P13

다 더 큰 무언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금조개‘였다. 껍질은 울퉁불퉁해서 마치 돌멩이처럼 보였지만, 안은 진주처럼 하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걸 귀에 대고 있으면 고래가 말을 해줄 거예요.」라프켄체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어두운 빛깔의 자갈해변을 따라 잰걸음으로 떠나 버렸다.
나는 아이의 말대로 해보았다. 세계 남쪽의 잿빛 하늘 아래에서 어떤 목소리가 바다의 옛날 언어로 내게 말을 건넸다. - P14

인간은 나의 덩치를 보고 언제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막연한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을 무엇에다 쓸까? 태초부터 인간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인간이 처음 바다로 다가왔을 때부터 쭉 그를 관찰해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몸은 깊은 바다 밑을 알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물에 뜨는 것을 이용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인간이 약한 널빤지 네 개를 엉성하게 엮어 만든 것을 타고 어떻게 물 위에서 움직이는지 보았다. 우리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인간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반면 나는 그의 끈기에 놀라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이다.  - P19

인간은 곧 바다에서 움직이는 법을 익혔다. 달빛 고래인 내가 다른 고래로부터 ㅡ그 고래는 또 다른 고래로부터 ㅡ조수와 해류의 비밀을 귀띔받았던 것처럼,
인간도 자신이 터득한 지식을 널리 알림으로써 바다로 나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큰 배를만들었을 뿐 아니라, 돛이라고 하는 가벼운 천으로 바람을 모으는 기술을 터득했다. 머지않아 인간은 자기에게 방향을 일러 주는 하늘과 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과감히 어둠을 가르고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수평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가끔 끝없이 펼쳐진 고독한 바다에서 마주쳤다. 나, 달빛 고래가 숨을 내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가 - P20

면, 뱃전에 기대고 선 인간들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기 하얀 고래가 나타났다!> 하고 외치곤 했다. 그들의눈빛에서 위협이 아니라, 놀라움과 감탄이 느껴졌다.
나는 인간들의 배에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를 존중했고, 그들 또한 바다에서 사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고, 바람과 해류를 따라 몰려오는 추위, 또는 더위와 더불어 시간은 돌고 돌았다.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인간들은 자신의 불확실한 운명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썼고, 고래들은 짠맛이 나는 자신의 세상을 가르며 어디론가 나아갔다. - P22

나. 달빛 고래는 바다에서 산다. 내가 사는 곳은 하루해가 떠오르는 육지와, 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해가 잠기는 수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온 세상이 하얀 저 먼 곳에서 얼음장 같은 해류가 흘러와 물이 굉장히 차갑다. 그리고 바다는 밤이 길어지면 커지고, 낮이끝나지 않을 듯 보이면 작아지는 소금 빛깔의 거대한암석으로 변한다.
내가 사는 바다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육지에는 인간들이 거의 없다. 대신 해변 가까이까지 울창한 숲이 들어서 있다. 나는 바다를 헤엄쳐 가다가 다른 종들이 이르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까지 내려가곤 한다. 커다란허파를 가진 덕분에 나는 숨 쉬러 올라가지 않고도 오랜 시간 동안 물속에 머물 수 있다.  - P25

내 세계는 침묵과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 밑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불평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투덜거리거나 악을 쓰지도 않는다. 몸집이 가장 큰 존재들만이 가끔 바다 밑의 정적을 깨뜨린다. 향유고래종에 속하는 나는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대왕고래와 - P27

참거두고래는 한밤의 적막을 달래 주는 일련의 화음창법 노랫소리를 통해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몸놀림이 빠른 돌고래들은 무리 지어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휘파람 소리로 모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바다밑 깊은 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반면 수면 가까운 곳에서는 바람 소리,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갈매기와 가마우지 울음소리가 쉴 새 없이 날 뿐 아니라, 바다에 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존재, 즉 인간의 목소리도 가끔 들린다. - P28

조금 전에 본 것처럼 크고 웅장한 배였다. 그런데 돛에 바람을 잔뜩 실은 배는 빠르게 물살을 헤쳐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배를 따라잡았다. 인간들이 바다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짝짓기하기 위해서든, 새끼를 낳는 암컷이나 갓 태어난 새끼를 보살피기 위해서든 우리 고래들은 한데 모이면 원을그리며 움직이다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등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꼬리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쳐 나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허파의 공기를 뿜어내면서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 소리나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만남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만남의 기쁨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 - P35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를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니 영 기분이 언짢았다. - P37

그러나 인간들이 모두 바다의 사람들 같지는 않다. 우리 고래들과 돌고래들은 저 먼 곳에서 온 다른 인간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허락을 구하지도, 그렇다고 나중에 고마움을 표하지도 않고 숲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제멋대로 가져가는 낯선 인간들 말이다. 고래잡이배 선원들은 배은망덕과 탐욕에 찌든 세상에서 온인간들의 전형이다. - P52

나는 할머니 고래 넷이 시신을 싣고 섬으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섬과 해안 사이의 물길에 고래잡이배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맞섰다. 그 덕분에 내 몸에는 더 많은 작살이 박히고말았지만, 이제 견딜 만해진 통증 외에 다행히 다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고래잡이배를 먼바다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내게 닥친 시련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끈질기고 집요한 인간들을 볼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당연히 그들이 어디서 오는 건지, 바다나 육지 어느 곳에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지, 언젠가 그들이 탐욕을 채우는 모습을 보게 될지 궁금해졌다. - P107

나는 마지막으로 해안과 섬 사이의 물길을 따라 헤엄쳐 갔다. 해변에 모여 있는 라프켄체 사람들은 말없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할머니 고래들이 죽은 자의 시신을 섬으로, 앞으로 꿈도 꾸지 못할 위대한 여행을떠나기에 앞서 들르는 만남의 장소, 응길 첸마이웨로데려가 달라고 청하기 위해 <트렘풀카웨!>라고 다시 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등에 아홉 개의 작살이 꽂힌 채, 다른 고래잡이배를 찾으러 넓은 바다로 나갔다. 인간들이 무서워 벌벌 떨며 모차 딕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달빛 향유고래인 나의 임무는 그들을 쫓아 바다에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 인간들을 계속 쫓아다녀야 할 저주받은 운명.
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힘.
나, 바다의 가차 없는 정의.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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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라는 말은 느낌이 좋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기거나 생각을 비우고, 잠시 멈추어서 주위를 둘러보고,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닫기도 하는 호젓한 풍경이 떠오른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그런 데 시간을 쓰기로 작정을하고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니, 적어도 산책하는 동안은느긋한 마음일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집 앞의 소박한 산책로는 작은 공원과 연결된다. 왕복해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지만 오히려 그게 장점인 듯하다. 점심을 먹은 동네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다. 하긴 요즘 세상에 차도와 떨어진 길이 얼마나 귀한가. 이 동네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 산책로였다. 이사를 오면서 나도 산책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 P237

나의 산책길 풍경은 다채롭다. 작은 동물들이 바스락거리고, 중노년 여성들이 두 개 이상의 사투리가 섞인 대화를 나누고, 사슬 목걸이를 하고 덩실대는 미국 청년들이있는 곳이다. 호젓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다. 나는 계속해서 바란다. 저 미국 뒷골목 청년들이 어서철이 들어서 주변 사람들을 보아가며 자기 생활을 즐기면좋겠다. 어린이가 소음을 내면 ‘나도 한때 저랬지‘ 하며 너그러이 이해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구든 잡채에 대해서는 좀 큰 소리로 말하면 좋겠다. - P246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어린이한테는 ‘무심히‘ 하면안 된다고. ‘별 뜻 없이‘ 하면 안 된다고. 어린이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아니다. 특별 대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어린이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상대가 어린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비건인 친구와 외식을 하려면 비건 식당에 가야 한다. 당연하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과 식당에 가려면앉기 편한 식당을 찾아야 한다.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라면 주문에 시간이 걸려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어느 자리에 어린이가 있다면 그를 ‘무심히‘ 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한테야 "빨리 가세요" 할 수 있어도 (사실은 안 되지만), 어린이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 보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호자도 없는 어린이한테는.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일부러 누구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방해하거나 - P252

다투는 것도 아닌 이상, 나는 무해하다고. 대체로 무심하면 무해하고, 무해하면 된 거라고. 그런데 어린이를 가까이에서 보면 무심한 것도 잘못일 때가 적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대형 마트 입구에 카트의 손잡이를 닦으라고 소독제와 휴지가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소독제는 분무기에 들어 있어서 그걸 뿌리고 휴지로 닦으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귀찮아서 그냥 가고, 어떤 사람은 꼼꼼히소독했다. 나도 카트를 하나 꺼내려고 다가가면서 보니 어떤 분이 카트 손잡이에 호쾌하게 분무기를 뿌리는데, 바로 옆에서는 조그만 아이가 그분에게 매달리며 뭐라고 뭐라고 종알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아빠의 바람과 달리, 어린이 얼굴에 약이 뿌려지는 셈이었다. 순식간의 일이고 이미 끝나버린 데다 내가 용기가 부족해서 그분에게 뭐라고 말을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 P253

어린이가 있을 때 무심해지면 안 된다. 마지막에 탄 승객이 어린이일 때는 버스 기사님들이 좀 더 시간을 두고 출발했으면 좋겠다. 헬스장 광고에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신체 노출이 많은 거야 그렇다 쳐도, 같은 건물에 어린이가다니는 학원이 몇 개나 된다면 그런 사진이 담긴 광고판을 - P253

입구에 세워두면 안 된다. 담배를 피우더라도 어린이가 지나가면서 있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연기가 어린이에게 직접 가지는 않게. 식당에 어린이가 있으면, 암만 반주가 과했더라도 욕을 안 해야 한다. 일행이라도 그를 말려야 한다. 방송이나 영상도 어린이 시청자가 있다면 고려를...... 세상에 어린이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내 결론은 우리가 무심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한테도 어른끼리도 어린이끼리도. - P254

쉬운 말이 좋다. 쉽게 쓸 수 있으면 쉽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한 명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좋은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느라 작가가 고생하더라도,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읽고 ‘해석‘하는 대신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데 힘을 쓰는 게 좋다고 믿는다. 그렇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렵게 써야만 한다면 어렵게 써야 한다. 복잡하게 설명해야 하는 건 복잡하게 설명해야 한다.  - P261

그러니 ‘노키즈존‘이 없는 세상은 그저 이상일 뿐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노키즈존‘은 사라져야 한다. ‘어린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어린이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쩔 수 없다 해도,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차별이다. 이 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노 휠체어 존‘이, ‘노 시니어 존‘이, 또 ‘노 무슨 무슨 존‘이 생길 것이다. 사실 문제상황을 가정한다면 차별과 배제는 제일 쉬운 해결책이다.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풀고 싶다. 평등을 찾아가는 길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
나는 ‘노키즈존‘이라는 ‘쉬운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 말과 함께 그 개념도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지면 좋겠다.  - P264

나는 어린이가 미워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어른스럽게 대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운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고 그런 걸 마주하면 불편한 게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까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생겨난 미움을 잘 처리하고 새 얼굴로 어린이를 보고 한 번 더 어린이를 다독이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그런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이론서에서 읽은 적은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안다.
오래전, 전단 광고 덕분에 만난 또 다른 어린이가 있다. 상담을 오신 어머니 곁에서 그 어린이는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겨울방학에 할 일이 늘어난 게 마음에안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의외로 나와 호흡이 잘 맞아서 - P286

사춘기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고 공부도 하고 친구 문제도 이야기했다. 그 어린이는 나와 다투다시피 한 적도 있지만 내게 안겨 울기도 했다. 내가 미울 때도 많았을 텐데,
서툴렀던 나를 참아준 고마운 어린이였다.
그 아이가 이번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본격적인 입시 준비가 시작된 뒤로 통 만나지를 못했는데 코로나19로 뒤숭숭한 가운데 시험을 맞이하는 것이 늘 마음 쓰였다. 시험 전날 안부를 전하면서 일부러 무심한 투로 "시험잘 보고, 끝나고 어디 가서 놀지 말고 집에 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선생님, 항상 보고 싶어요. 끝나고 좋은 마음으로 연락드릴게요"라는 답이 왔다. 걱정하는나를 안심시키는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이제야 겨우 어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그때 그 어린이는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구나.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는 연말이다. - P287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

윤동주, 「개 1」 전문 - P295

내 마음을 파고들어 본다. 내 마음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존경하는 어른들이 있으면서도 툭하면 ‘이 시대는 진정한 어른이 부족하다‘ ‘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아쉬움을 부풀렸다. 내가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참조할 세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거리를 미리 만들어둔 것 같다.
어린이한테 어른은 절대적인 존재다. 어린이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전적으로 어른 손에 달렸다. 물질적인 면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그렇다. 어린이는 어른이 사는 모 - P303

습을 보면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운다. 세상은 어떻게돌아가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운다. 어린이는 모르는게 있으면 어른한테 물어본다. 어린이끼리 해결되지 않는갈등을 어른이 중재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화해시키거나떼어놓는다. 훈육하고 위로한다.
정확하게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어른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권위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어린이가 어른에 속해 있는게 아니라 어른에게 기대어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른 뒤에 숨지 말고, 그분들한테 기대어서. - P304

한편으로 나는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처럼 좋은 어른이, 지금 당장 되고 싶다. 김장하, 박막례, 채현국, 김영만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제부터 안간힘을 써보려고 한다. 내가 마치 그런 어른인 척하고 사는 것이다. 따뜻하게, 힘 있게, 현명하게, 재미있게.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부조리를 잊지 않은 그 ‘젊은 어른‘처럼, 솔직하고 진지한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되고싶다. 아니, 꼭 되고야 말겠다. - P306

나이가 드는 건 좋은데 노인이 되는 건 두렵다. 나는 생활의 경험을 쌓고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지금이 과거 어느 때보다 좋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노인이 된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눈이 침침하고 근력이 부족하고청력이 떨어지는 신체상의 노화도 걱정이지만, 사회적으로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떠올리면 겁부터 난다. 모든 신기술에 꼴등으로 적응해온 나는 키오스크와 태블릿 주문에 익숙해지는 데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따라잡을 자신도 없고, 초연해질 배짱도 없다. 나는 도태될 것이다. - P307

이제 내 꿈은 수박 한 통을 해치우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저녁에 아파트 벤치에 앉아 산책 나온 동네 강아지들의 인사를 받는 할머니도 되고 싶다. 도서관에 ‘큰글자도서‘를 제일 많이 신청하는 할머니가, 철마다 버스를 타고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할머니가 되겠다. 병원에서 검사실을 잘못 찾고 의사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는 할머니도 되겠지. 그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 2053 년의 ‘요즘 문화‘에 쩔쩔매는 할머니가 되겠지만 그때 가서 쩔쩔매자. 일단 머리가 까맣고 후드티를 입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노후준비는 수박 먹는 양 늘리기, 블루베리랑 파프리카 챙겨 먹기다. 나중에 만 보를 함께 걸을 친구들과 계속 술 먹기, 동네 강아지들 이름 많이 알기다. 잘하면 끝까지 살아남을것 같다. - P310

몇 번이나 마주 보고 울었고, 그보다 천 배는 많이 함께 웃었던 친구. 그날 친구가 베풀어준 도움은 모두 소중했다. 무엇보다 나랑 같이 있어주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고, 그런 친구를 둔 내가 자랑스러웠다. 곰 인형들을 기증해준 것도 물론 고맙고.
친구가 많다는 말을 들은 날, 나는 재연이한테 했던 말중에 하나를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꼭 필요한것 같긴 하다고. 근데 언제 누구와 만날지 모르니까, 독서교실 구경의 날 만난 내 친구처럼 착하고 멋있게 자라고 있으라고. 어린이들이 친구를 원하는 만큼,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친구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한 수고를 할 가치는 충분하다. 친구 덕분에 나도 계속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게 되니까. - P318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할 때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순식간에 판단하고 행동하는 분도 있지만 나는 어린이한테 화장실 순서를 양보할 때조차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도 계속 손톱만한 용기라도 내보려고 한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내 생각에는 ‘친절‘만큼 구체적으로 세상에 윤기를 더하는 행동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나의 친절을 이용하거나 나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럴 테면 그러라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줄 친절이 줄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지는 게 되니까. - P325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 P327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자라서 더 나은 어른이 된다.
어딘가에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어린이가 있다.
어른이 어린이를 보듯이 어린이도 어른을 본다. 어른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운다.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가올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더 나은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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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살갗을 가진 얼굴도 있다
녹아 흐르면서 시작되는 삶도 있다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무탁자에 생긴
아주 작은 홈

이상한 기분을 가진 적 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가게는 멀리 있고

심부름을 다녀오면 사라져버릴 사람과
남아 있을 빈 의자

한 손에 달콤한 사탕이 들려 있다 해도

다음에 다시 만나,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왔다가 사라지고 왔다가 사라지는

창밖에
다 녹을 만큼만 눈이 내렸다

빛도 어둠도 없이
막아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화를 냈다
우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걸 몰랐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은 계속해서 참았다

모두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두에게

아주 무거운 상자
무릎이 아픈 사람이 자주 무릎을 만진다

빛은 찌르는 손을 가졌는데
참 따듯하다

여름 끝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
무엇을 보려고 해도
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도 두 발도
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껏 울창해져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 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
녹아버리는 것
밟히는 것

그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겐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조율


이 줄은 누구의 것일까

유리문을 열면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의 처음이 늘 하얗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참혹처럼

‘무너지게 될 거야‘ 누군가 한 말을
‘무뎌지게 될 거야‘라고 들었다

뭉치가 죽었어
화장 비용이 없어서 아직
방에 같이 있어

멈추려는 숨 때문에
개의 코는 마지막까지 길어졌을 텐데
그런 개를
따뜻한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가 마른 웅덩이 같다

겨울이라 땅을 파고 묻을 수도 없어
방에 같이 있어

한겨울의 가장 따뜻한 방

이 줄은 무엇으로 엮은 것일까

체에 걸러도 남는 마음 때문에
구멍을 더 촘촘하게 짜는 사람이 있고

잿더미 속에서도
눈을 뜨고 옆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

개는 가장 작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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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삼층 석탑, 오리온 별자리, 새하얀 구름, 사이다 병뚜껑 따는 소리, 수평선, 개의 모든 것, 일곱 살 어린이와 하는 악수, 어린이이마에 맺힌 땀, 옥수수 삶는 냄새, 부처님 오신 날 무렵 거리의 연등, 반짝이는 모든 것, 작은 털장갑, 편의점 건너편나무 그늘, 가을이 왔다 싶은 아침, 옛날 동시, 「릴케의 로댕, 벚나무 낙엽이 깔린 길, 봄에 나뭇가지에 나는 새잎, 색종이, 코뿔소, 잡채, 오이지, 잠옷, 비누, 보온병, 양산, 국자, 전시회, 지도, 국어사전......
어린이 옆에서 어린이가 하는 걸 같이 하면 이상하게도어린이와 비슷해진다. 아름다움의 목록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더 자주 찾아내서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아니, 내가 말을 잘못 했다. 아이들과 아름다운것의 목록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끝도 없이 이어지도록,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 P146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시키고 경제가 책을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 - P151

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맹세코 부끄럽지 않다. 그걸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시에 대해 잘 알고, 어쩌면 쓰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약간은 문학적 허영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매우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거의 비밀인 것처럼 시를 좋아해왔다. 꽤 오랫동안.
청소년일 때부터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 적는 공책이 따로 있었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너무 부끄러워서 비명을질렀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적었다. 한용운 - P152

의 「복종」이나 조지훈의 「낙화」, 김수영의 「」, 김남조의[편지] 같은 시, 용돈이 생기면 이름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샀다. 아는 시인이 많아져서 언젠가부터 공책을 접었다.
대신에 외우기 시작했다. 한 연이라도, 한 행이라도.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정철의 「사미인곡」을 너무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외워버렸다. 지금도 마지막 부분은 외울 수 있다. - P153

대학에서는 이전 교육과정 내내 이름 한 번 들어본 적없는 여성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 시의 내용도 표현도 낯설어서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시 읽는 법을 아예 다시 배워야 했다. 이전의 시들로 아름다운 언어를 배웠다면, 새로 배운 시들로 날카롭게 찌르는 언어를 배웠다. 나는 둘 다 좋아했다.
한글 프로그램을 쓸 줄 알게 된 다음, 나는 시를 실컷 옮겨 적었다. - P153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윤동주, 「반딧불」 전문 - P155

솔직히 요즘 나오는 시집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기에 가장 신선한 언어가 담겨 있다는 건 알기에 알쏭달쏭한채로 계속 읽는다. 한편으로 나처럼 옛날 문법으로 시를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인들이 옛날 시도 계속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부끄러워서 말 못 해온 독자들이있다면 털어놓듯이 말해버리자. 시를 좋아한다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을 설치던 밤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출근 가방에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인의 시집을 챙겨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지금 교실 칠판 한구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중에서

우리는 우리를 안을 수 있다. - P156

아이들에게 학교는 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공공의 장소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느니, 교사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정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 만일그런 위험이 감지된다면 시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옳다. 비난은 학교에도, 시민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난 자체에서 기쁨을 느낄 만큼 내면이 허술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열일곱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성인이 되기 전 가장 두렵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안정된 곳에서 보냈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이 정말 ‘행운‘이라는 점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학교마저 삭막하고 암울하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운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학교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도록 부단히 애쓰는 한편, 그늘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제 나와도 된다고, 여기는 안전하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 P172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서 ‘규범‘에 대해 배운다. 규범은 우리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때 지켜야 할 약속으로서, 이 안에 관습, 도덕, 법, 예절 등이 포함된다고 배운다. 즉 법도 인간이 만든 규범의 한 가지다. 이 말은 새로운 법이 필요할 때, 옛날 법이 절대적인 것인 양 거기 구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법이 우리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이상, 삶이 언제나 먼저다. 법과 제도는 우리 삶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신분제를 없애는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비록 삶의 환경이 다르더라도 우리 각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똑같은 권리를 인정받는다. 그게 인권이고,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 그 위에 인간이 있고 삶이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의 연대는 규범보다 먼저다. - P214

이 글을 쓰는 오늘, 방금, 2024년 7월 18일, 기쁜 소식을 들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대법관 김선수)가 사실혼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낸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건강보험의 피부양자제도가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소득 요건과 부양 요건 등이 동일한 상황에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가족 결합의 변화하는 모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 요구됩니다"라는 판사의 부연이 내 귀에 큰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이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가는 아주 큰 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이 판결이 있기까지 힘쓴 당사자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축하를 전한다. 당연한 것을 위해 싸운 만큼, 마음껏 기뻐하고 그 권리를 누리시길 바란다. 또한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어준 데에,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에 더 큰 자유를 준 데에. 오늘은 기쁜 날이다. 우리 세계가 더 넓어졌다. - P215

가슴을 찢어놓는 것은 언제나 행복의 낱말들이다. 사랑, 축하, 벚꽃, 여행 같은 말들. 소박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그렇게 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곤 했다. 예를 들면 내가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하던 시절에 그랬다. 한 번 거래한 적도 없는 은행의 독촉 전화를 받느라 사무실을 뛰쳐나가던 시절에는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게 두려웠다. 가족이 두려웠다.
그 무렵 어느 날, 친구가 대여섯 살 된 아이의 손을 잡고걸어가는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장면이 눈이 아플 만큼 부러웠다.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나의 좌절과 슬픔이 남의 희망과 기쁨을 해칠 것 같았다. 적어도 나 자신은 해쳤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럭 - P216

저럭 이겨냈으며 그보다 더한 일들을 겪기도 했다. 이제는확실한 행복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저 아래에 그때의 서늘함이 남아 있다. 웃을 때 조심하게 된다.
봄은 왜 매번 갑자기 올까. 마음이 아직 겨울에 있는 사람에게 봄은 어려운 계절이다. 밝은 데가 너무 많다. 어디를 가든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루한 일을 보러 시청 같은 데를 가는 길에도 아득한 꽃향기를 맡게 된다. 얼었던 땅을 기어이 뚫고 자란 봄나물을 씹으면 서글퍼진다. 자연은 내 마음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않는 것이다. 다 잘 돌아가는데 내 자리만 없다는 생각에 무서울 만큼 외로워진다. 슬픔의 핵심은 외로움이다. 누가 같이 있어주면 외로움은 덜어진다. 그렇게 슬픔을 이겨내는 한 걸음을 뗄 수 있다.
- P217

언젠가 한 어린이가 책을 읽다가 장례식은 왜 3일이나하는 거냐고 물었다. "시간을 두고 슬픔을 나누는 거야"라고 설명했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슬픔을 왜 나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했어요.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많아지잖아요."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진짜로 나누어 갖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는 식으로 - P217

대답했던 것 같다. 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슬픔은 실제로 있어서 한번 생기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슬픔을 둘이 나누면 두 조각이 되고, 또 나누어서 네 조각이 되고, 그렇게 작아지다가 어느 만큼이 되면이제 가지고 있을만해지는 것이라고.
개인의 작은 고통을 다루어보기만 해도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기쁠 때 조금은 슬픔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슬픔 속에서도 조금은 웃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봄은 슬픔과 함께 온다. 함께 기억할 일이 너무 많다. 조금 더 힘이 있는 쪽이 조금 더 짊어지면서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 좋겠다. 봄에 슬픈 사람들을 내버려두지도, 어서 이겨내라고 다그치지도 않을것이다. 다만 그들을 꽃이 만든 그늘로 초대하고 싶다. 나도 그 밝은 그늘에 함께 있고 싶다. 웃으면서도 울겠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울고 싶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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