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úlveda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세풀베다는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특히 환경과 소수 민족 등에 관한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많다.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난 그는 피노체트가 정권을 장악하자 당시 많은 칠레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오직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망명해야 했다. 수년간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글을 쓰고 환경 운동을 펼치다가 파리를 거쳐 독일로 이주했으며, 1997년 스페인 북부에 정착해 남은 생을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다. 2017년 5월, 27년 만에 칠레 국적을 회복했다. 세풀베다는 1989년 연애소설 읽는노인』으로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장편소설 『지구 끝의 사람들』(1989), 『귀향, (1994),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우리였던 그림자』(2009), 중단편 소설집 「외면」(1997), 「그림 형제 최악의 스토리』 (2004), 『알라디노의 램프」(2008), 
에세이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2010) 등을 발표했다. 동화책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2012),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 이(2013),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2015) 등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하며 <강렬한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위기와 가치들을 은유적으로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동화를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는 2019년 5월 발표된 그의 유작으로,
거대한 향유고래가 바다의 평화를 깨뜨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조화롭게살아가는 생명체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이 철학 동화는, 우리 현대인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보호하기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세풀베다는2020년 4월,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향년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래서 고래는 춤추듯 흔들리는 물결 사이에서
신을 엿보기 위해
물 위로 나갔다.
그러자 고래의 눈에 신이 보였다.

-오메로 아리드히스‘ 「고래의 눈」

고래의 눈은 인간들에게서 본 것을 멀리서도
포착한다. 고래의 눈은 우리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대플리니우스‘ 『박물지』

2014년 남반구의 어느 여름날, 고래 한 마리가 칠레 푸에르토몬트‘ 부근의 한 자갈해변으로 떠밀려 올라와 있었다. 길이가 15미터가량 되고 신기한 잿빛을 띤 향유고래였다. 하지만 그 고래는 해변에 널브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어떤 어부들은 길 잃은 고래일지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은 반면, 다른 이들은 사람들이 무심코 바다에 내버린 쓰레기로 인해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세계 남쪽의 잿빛 하늘 아래 드러누운 거대한 해양 동물의명복을 빌었다.
고래는 간조 때의 잔잔한 물결에 흐느적흐느적 흔들 - P11

리고 있었다. 거의 두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고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몇 사람이 배에서 뛰어내려 들고 있던 굵은 밧줄로고래의 꼬리지느러미, 혹은 꼬리를 묶었다. 잠시 후, 배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바다 거인의 몸을 끌고 느릿느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저 고래를 어떻게 하려는 거죠?」 양털 모자를 손에꼭 쥔 채 서서히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던 어부에게 내가 물었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거지요. 일단 저만(灣)의 남쪽 출구를 지나 넓은 바다에 이르면, 고래의 몸이다시 뜨지 않도록 배를 갈라 속을 다 비울 겁니다. 그러고 나면 대양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겠죠」 어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와 고래가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로 사라지자, 해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 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서 두 줄 - P12

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넌 여기 사니? 나는 인사를겸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대답하기에 앞서 자갈밭 해변에 앉았다. 나도 그 아이를 따라 옆에 앉았다.
「네, 맞아요. 나는 라프켄체니까요. 혹시 그게 무슨뜻인지 아세요?」 아이가 물었다.
<바다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슬퍼하는 거예요?」 아이가 궁금한지 물었다.
「고래 때문에, 저 고래는 어떻게 될까?」 아저씨 눈에는 그냥 죽은 고래로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그 이상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의 슬픔과 나의 슬픔은 똑같지 않아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가운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 아이는 자기 손보 - P13

다 더 큰 무언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금조개‘였다. 껍질은 울퉁불퉁해서 마치 돌멩이처럼 보였지만, 안은 진주처럼 하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걸 귀에 대고 있으면 고래가 말을 해줄 거예요.」라프켄체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어두운 빛깔의 자갈해변을 따라 잰걸음으로 떠나 버렸다.
나는 아이의 말대로 해보았다. 세계 남쪽의 잿빛 하늘 아래에서 어떤 목소리가 바다의 옛날 언어로 내게 말을 건넸다. - P14

인간은 나의 덩치를 보고 언제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막연한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을 무엇에다 쓸까? 태초부터 인간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인간이 처음 바다로 다가왔을 때부터 쭉 그를 관찰해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몸은 깊은 바다 밑을 알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물에 뜨는 것을 이용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인간이 약한 널빤지 네 개를 엉성하게 엮어 만든 것을 타고 어떻게 물 위에서 움직이는지 보았다. 우리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인간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반면 나는 그의 끈기에 놀라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이다.  - P19

인간은 곧 바다에서 움직이는 법을 익혔다. 달빛 고래인 내가 다른 고래로부터 ㅡ그 고래는 또 다른 고래로부터 ㅡ조수와 해류의 비밀을 귀띔받았던 것처럼,
인간도 자신이 터득한 지식을 널리 알림으로써 바다로 나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큰 배를만들었을 뿐 아니라, 돛이라고 하는 가벼운 천으로 바람을 모으는 기술을 터득했다. 머지않아 인간은 자기에게 방향을 일러 주는 하늘과 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과감히 어둠을 가르고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수평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가끔 끝없이 펼쳐진 고독한 바다에서 마주쳤다. 나, 달빛 고래가 숨을 내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가 - P20

면, 뱃전에 기대고 선 인간들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기 하얀 고래가 나타났다!> 하고 외치곤 했다. 그들의눈빛에서 위협이 아니라, 놀라움과 감탄이 느껴졌다.
나는 인간들의 배에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를 존중했고, 그들 또한 바다에서 사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고, 바람과 해류를 따라 몰려오는 추위, 또는 더위와 더불어 시간은 돌고 돌았다.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인간들은 자신의 불확실한 운명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썼고, 고래들은 짠맛이 나는 자신의 세상을 가르며 어디론가 나아갔다. - P22

나. 달빛 고래는 바다에서 산다. 내가 사는 곳은 하루해가 떠오르는 육지와, 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해가 잠기는 수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온 세상이 하얀 저 먼 곳에서 얼음장 같은 해류가 흘러와 물이 굉장히 차갑다. 그리고 바다는 밤이 길어지면 커지고, 낮이끝나지 않을 듯 보이면 작아지는 소금 빛깔의 거대한암석으로 변한다.
내가 사는 바다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육지에는 인간들이 거의 없다. 대신 해변 가까이까지 울창한 숲이 들어서 있다. 나는 바다를 헤엄쳐 가다가 다른 종들이 이르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까지 내려가곤 한다. 커다란허파를 가진 덕분에 나는 숨 쉬러 올라가지 않고도 오랜 시간 동안 물속에 머물 수 있다.  - P25

내 세계는 침묵과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 밑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불평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투덜거리거나 악을 쓰지도 않는다. 몸집이 가장 큰 존재들만이 가끔 바다 밑의 정적을 깨뜨린다. 향유고래종에 속하는 나는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대왕고래와 - P27

참거두고래는 한밤의 적막을 달래 주는 일련의 화음창법 노랫소리를 통해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몸놀림이 빠른 돌고래들은 무리 지어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휘파람 소리로 모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바다밑 깊은 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반면 수면 가까운 곳에서는 바람 소리,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갈매기와 가마우지 울음소리가 쉴 새 없이 날 뿐 아니라, 바다에 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존재, 즉 인간의 목소리도 가끔 들린다. - P28

조금 전에 본 것처럼 크고 웅장한 배였다. 그런데 돛에 바람을 잔뜩 실은 배는 빠르게 물살을 헤쳐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배를 따라잡았다. 인간들이 바다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짝짓기하기 위해서든, 새끼를 낳는 암컷이나 갓 태어난 새끼를 보살피기 위해서든 우리 고래들은 한데 모이면 원을그리며 움직이다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등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꼬리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쳐 나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허파의 공기를 뿜어내면서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 소리나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만남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만남의 기쁨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 - P35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를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니 영 기분이 언짢았다. - P37

그러나 인간들이 모두 바다의 사람들 같지는 않다. 우리 고래들과 돌고래들은 저 먼 곳에서 온 다른 인간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허락을 구하지도, 그렇다고 나중에 고마움을 표하지도 않고 숲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제멋대로 가져가는 낯선 인간들 말이다. 고래잡이배 선원들은 배은망덕과 탐욕에 찌든 세상에서 온인간들의 전형이다. - P52

나는 할머니 고래 넷이 시신을 싣고 섬으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섬과 해안 사이의 물길에 고래잡이배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맞섰다. 그 덕분에 내 몸에는 더 많은 작살이 박히고말았지만, 이제 견딜 만해진 통증 외에 다행히 다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고래잡이배를 먼바다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내게 닥친 시련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끈질기고 집요한 인간들을 볼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당연히 그들이 어디서 오는 건지, 바다나 육지 어느 곳에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지, 언젠가 그들이 탐욕을 채우는 모습을 보게 될지 궁금해졌다. - P107

나는 마지막으로 해안과 섬 사이의 물길을 따라 헤엄쳐 갔다. 해변에 모여 있는 라프켄체 사람들은 말없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할머니 고래들이 죽은 자의 시신을 섬으로, 앞으로 꿈도 꾸지 못할 위대한 여행을떠나기에 앞서 들르는 만남의 장소, 응길 첸마이웨로데려가 달라고 청하기 위해 <트렘풀카웨!>라고 다시 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등에 아홉 개의 작살이 꽂힌 채, 다른 고래잡이배를 찾으러 넓은 바다로 나갔다. 인간들이 무서워 벌벌 떨며 모차 딕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달빛 향유고래인 나의 임무는 그들을 쫓아 바다에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 인간들을 계속 쫓아다녀야 할 저주받은 운명.
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힘.
나, 바다의 가차 없는 정의.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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