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얼음의 살갗을 가진 얼굴도 있다 녹아 흐르면서 시작되는 삶도 있다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무탁자에 생긴 아주 작은 홈
이상한 기분을 가진 적 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가게는 멀리 있고
심부름을 다녀오면 사라져버릴 사람과 남아 있을 빈 의자
한 손에 달콤한 사탕이 들려 있다 해도
다음에 다시 만나,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왔다가 사라지고 왔다가 사라지는
창밖에 다 녹을 만큼만 눈이 내렸다
빛도 어둠도 없이 막아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화를 냈다 우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걸 몰랐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은 계속해서 참았다
모두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두에게
아주 무거운 상자 무릎이 아픈 사람이 자주 무릎을 만진다
빛은 찌르는 손을 가졌는데 참 따듯하다
여름 끝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 무엇을 보려고 해도 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도 두 발도 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껏 울창해져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 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 녹아버리는 것 밟히는 것
그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겐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조율
이 줄은 누구의 것일까
유리문을 열면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의 처음이 늘 하얗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참혹처럼
‘무너지게 될 거야‘ 누군가 한 말을 ‘무뎌지게 될 거야‘라고 들었다
뭉치가 죽었어 화장 비용이 없어서 아직 방에 같이 있어
멈추려는 숨 때문에 개의 코는 마지막까지 길어졌을 텐데 그런 개를 따뜻한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가 마른 웅덩이 같다
겨울이라 땅을 파고 묻을 수도 없어 방에 같이 있어
한겨울의 가장 따뜻한 방
이 줄은 무엇으로 엮은 것일까
체에 걸러도 남는 마음 때문에 구멍을 더 촘촘하게 짜는 사람이 있고
잿더미 속에서도 눈을 뜨고 옆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
개는 가장 작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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