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름다운]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한 가지 더있다. 이 책의 제목은 많은 것을 연상시킨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 심장은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반응한다. 한인간으로서 고통받을 수 있다. 외로울 수 있다. 평생 헤어나오지 못하는 슬픔이 있을 수 있다, 이해받지 못할 수있다. 두려울 수 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모욕과 수치를 당할 수 있다,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을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실패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을.
프루스트의 말처럼 "인생에는 우리를 덮치는 다양한시련들과 그 일련의 사건들에서 일종의 아름다움이 나오는 순간"이 있고 나는 그런 순간을 사랑한다. 내 ‘존재의 순간‘의 절반이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아는 것은 의미가 아주 크다. - P90

내 인생 이야기에는 몇 달 만에 번 수십억 돈, 스포트라이트, 부동산, 주식, 엄청난 모험, 눈부신 성취는 없다. 대신 뭐가있을까?
제주도에서 만난 누군가의 자동차 뒷좌석에 레이첼카슨의 책이 놓여 있던 것을 보던 하루가 있다. "어, 이 책좋아하세요?" 책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친밀감을 느꼈다.
그 책은 바다의 가장자리였다. 내 침대 위에도 있는책이다. 이제 바다의 가장자리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그책을 발견한 날의 기억과 합해졌다. 그날 느낀 햇살의 열기, 밀물과 썰물의 흐름, 따개비, 해초들, 성산 일출봉에 오르던긴 머리의 중국인 관광객이 입은 원피스의 하얀색, 한라봉주스의 오렌지색과 함께 떠오른다. 이렇게 책은 지극히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선다. 책은 내 사적인 삶과 너무 섞여있어서 이제 책을 통하지 않고는 나를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 P105

내 인생 이야기에는 이 작가들의 말과 생각을 곱씹어보던날들이 있다. 내 인생 이야기는 이 작가들과 함께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작가들이 내 인생에 이야기의 씨앗을뿌린 것은 분명하다. 나의 사소한 몸짓, 미소, 거울을 보는동작, 시선, 목소리, 서글픔, 분투, 성취감, 선택의 순간들에이 작가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 작가들이 나를 자아바깥으로 빠져나와 다른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게 했다. 원래가던 길을 약간 벗어나 걸어본 샛길들, 오솔길들이 너무좋았다. 쉽게 현실에 지배당할 수 있었던 사람이 가능성, 자유와 독립, 해방, 저항, 진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진짜의미를 알고 싶어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 삶에서 써보고 싶어졌다. - P107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책과 자연을 사랑하는 라디오피디‘로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처음나를 말하는 이 방법을 생각해내고는 정말 기뻤다. ‘나‘ 자신을 학벌도 아니고 이력도 아니고 혈액형이나 별자리나 MBTI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로 설명할 수있다니. 이 생각을 한 날, 밤잠을 설칠 만큼 설렜다. ‘그래, 쭉이렇게 살아야지! 계속 가보자!‘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누구랑 같이 있든 "저는 책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에너지가 달라진다. 그 직전까지 어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지와 상관없이 사랑과 기쁨이, 많은 빛나는 문장과 기억들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걸맞은 사람으로 말하고 싶어진다. 나의 모든 ‘나‘ 중에서 ‘책과 자연을 사랑하는 나‘가 나를 가장 돌아보게 하고 자극하고 분발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P137

나는 해가 뜨기 세 시간 전에 숙소를 출발해 사막을 향해걸었다. 별이 어땠냐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법에걸린 세상 같았다. 그전까지 나는 경이로움을 몰랐던 것같다. 환희를 몰랐던 것 같다. 별이 얼마나 많던지 또 얼마나찬란하던지 어떻게 설명해도 부족하다. 별자리를 그으려면우리는 무심코 별 옆의 별을 본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별뒤의 별이 보였다. 별 뒤에 별이 있고 별 뒤에도 또 별. 나는맨눈으로 2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3차원의 세계를 본 것이고 헤아리려야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이를, 무한을 얼핏 본것이다.
우주는 정말 깊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별이무더기로 나타났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하늘이 변했다. 별똥별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수없이 떨어졌다. 나는순수한 경이 때문에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서있었다. 나는 목이 꺾일 정도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서서히빙빙 돌았다. 가슴이 뜨거웠다. 터질 것 같았다.
아타카마 사막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곳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별을모두 볼 수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날 그 하늘을봤다면 가장 슬픈 사람조차 "내 슬픔은 찬란해!"라고 느꼈을것이다. - P151

올리버 색스가 "나는 죽을 때가 되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고 싶어"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같았다(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해줄게."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친구들이 휠체어를 밀어서 색스에게 별을 보여주었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그날 밤을 잊지 못한 나는 친구에게 별 이야기를들려줬다.
"별은 진짜 아름다워. 거기선 별자리가 완전히 무한이야.상상하는 대로 만들 수 있어."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도 별자리를 만들자."
나는 이번에는 친구의 말에 압도되었다. 정신적인자극이었던 별이 뭔가 실천적인 자극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칠레의 별 이후 우리 인류에게는 영원할 몸짓인 하늘을 올려다보는 몸짓을 가진 인간족의 한 명이 되었다.
나는 매일 밤하늘을 본다. 매일 밤의 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조차 그날의 하늘을 불러온다. 그날 밤의 별은 두고두고 즐겁게 떠올릴 추억이 되었다.
"인간에게 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된다니까." - P152

나는 해변에서 아주 작은 돌 하나를 기념품으로 들고 왔다. 돌고래 모양 돌이었다. 이 돌도 내게는 탤리즈먼이다. 그저 내가 슬픈 일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칼새가 있나없나 몇 번이나 답사를 하고, 그날 아침 칼새를 발견하고
"혜윤 작가님, 칼새! 칼새!" 나보다 더 고래고래 소리를지르고, 내가 기운을 낼 수 있도록, 내가 미소를 짓도록 돕던 우도작은도서관 사람들과 나는 그 순간 ‘우리‘였다. 그 순간우리는 작은 공동체였다. 칼새와 애도 공동체.
그 돌고래 돌을 볼 때마다 낯선 사람에게 베풀어진 환대를, 따뜻하고 친밀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슬픔과 경이로움과 따뜻함이 함께 있던 순간. 엄마의 죽음으로 크게놀란 내가 다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의 영역으로 들어설수 있었던 순간. 그 순간에 만들어진 칼새 별자리. 이것은 탤리즈먼(돌멩이) 이야기면서 별자리 이야기면서 뷰티웨이 이야기(우도작은도서관 사람들=주술사, 나는 칼새와그들 덕분에 아름다움의 상태로 되돌려졌다. 다시 뭔가를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시작할 힘을 갖는 것,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다. 슬픔은 선물이 되었다. 이 이야기안에는 내가 힘을 내는 두 가지 방식이 모두 들어 있다. 하나는 자연의 경이로움, 하나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경이로운 일들. - P162

배리 로페즈를 비롯해서 많은 작가들 덕분에 내 삶에일어난 일이 있다. 책을 사랑한 덕분에 사랑이 가리키는방향이 많아졌다. 용기와 기쁨과 감탄과 경이를 가리키는이름들이 많아졌다. 칼비노는 이야기의 도덕적 기능은이야기하고 듣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원한다면 책 속의 누구라도, 이야기 속의 누구라도, 사랑과 용기와 기쁨의 대상인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엷은울음참매도 섀클턴도 될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자아 바깥, 책 바깥에서는새들이 아기를 기르고 나무가 이파리를 키우며 장차사랑스러움이나 아름다움이나 신기함으로 불리게 될 많은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한 이야기꾼이 될수 있다. 서로를 위한 이야기꾼이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일이아름다운 일이 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함께 어둠을 건너자! - P167

읽기는 스스로에게 ‘기회 주기‘이자 ‘씨앗 뿌리기‘다. 책한 권이 삶의 전환점이자 어떤 일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페이지마다 삶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가질수 있다.
더 고무적인 것은 읽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뭔가가 바뀐다는 점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그냥 어떻게 살기로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뭔가달라져야 할 것 같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삶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읽기 전에는 없던 가능성, 다르게 보고다르게 관계 맺을 가능성이 생긴다(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관계‘ 맺기는 해방이다). 운명이 살짝 방향을 트는 순간이다.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책 속에묻어놓은 우리 마음은 언젠가 기억에서 올라와 더 좋은선택을 하게 돕는다. 책 속에 묻어놓은 마음은 봄이 되면 꽃을 피운다. 파울 첼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에 대한 기다림도 진실하다". - P176

읽기는 우리 인류의 특별한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책을필요로 하지 않는 날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어떤일인가를 겪을 것이다. 어떤 일을 겪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고 삶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크고 작은 상처투성이고 살기 위해 계속 힘을 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책은 바로 이럴 때 필요하고 이런 마음에스며든다.
우리는 읽는다. 외롭고 괴롭기에, 우리는 읽는다. 도움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읽는다. 희망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읽는다. 길을 찾길 원하므로. 읽기는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가슴에 아름다움이 있는 채로 살아낼 수 있다. 독자인 우리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읽은 책 너머, 쓰인 책 너머, 아직 읽히지 않은, 쓰이지 않은 우리의 삶이 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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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일 2007. 2. 14.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선고 전날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산책한다. 내일의 판결을 머리로 그려보고, 결론에 자신 있는지를 검증한다. - P47

좋은 변호사 2007. 3. 1


성공을 장담하는 변호사는 좋은 변호사가 아닙니다. 재판을 해보면 판사도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명쾌하게 결론 나는 사건도 있지만, 선고하는 그순간까지 결론이 왔다 갔다 하는 사건도 많습니다. 그런데 일부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성공을 장담하며 사건을 수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무실은 결코 좋은 변호사 사무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재판이라는 것은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길 가능성이 높을 수는 있겠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있는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 P50

말 대신 계약서 2007. 3. 31.


계약서는 그대로 두고 말로 약속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없습니다.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격언이 있지만, 살다 보면 계약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몇 가지 법률만 알아도 억울한 일을 덜 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간혹 법정에서 "법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법을 떠나 상식적으로 상대방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라는 말을 듣는데, 부질없는말입니다.
법을 아는 것도 상식을 넓히고 힘을 기르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사전에 법을 제대로 알고 대처하는 것만이 넋두리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특히 착한 사람들은....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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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제18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부산지방법원 창원지방법원·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 부산·경남 지역 법관으로 공직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판사 시절, 양형 기준을 강화하여 공직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판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겐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을 이행하게 한 후 그 결과를 양형에 반영했다. 민사 재판에서는 원고와 피고 각각 실리와 명분을 찾아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협상과 조정에 무게를 두었고 형사 재판 중 단 한 번도 사형 선고를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19일 헌법재판관 임기를 시작하여 2025년 4월 18일 퇴임했다.
정상에 오르지 않는 등산을 좋아하고 나무 이름에 해박하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券書行萬里路지향하는 엄청난 독서광이자 산책광이다. - P-1

"이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것이다." 김장하선생의 말씀은 제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침이 되었습니다. 2025년 4월 19일, 저는 38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에게 재판권을 위임한 사람도 재판을 받은 사람도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좋은재판을 하기 위하여 시민들과 소통하였고 책을 읽었습니다. 공자의 말씀처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망에 빠지기 쉽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기 쉽기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운 바를, 생각한 바를 글로 썼습니다. - P5

요구하기 위해 쓴 글도 있고 성찰하기 위해 쓴 글도 있습니다.
이제 무직이 되어 여유가 생겼으므로 인생과 함께 글을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그동안 썼던 글들을다시 읽고,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골랐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인생에 조언할 만큼 지혜롭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판사나 재판관으로 있으면서 생각하였던 바를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의 인생이 풍요로워질 것이고, 어쩌면 여러분의 인생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한국민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하니까요. - P6

평생 책 한 권 내는 것을 꿈꾸었던 저에게는 이 책의 발간이 큰 의미가 있음이 명백하지만, 여러분께는 어떠한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입니다. 호의를 갖고 썼던 글을 책으로 내놓습니다. 판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판사들은 무슨 책을 읽는가? 궁금한 분들, 특히 저의 생각이 궁금한 분들은 한번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5년 8월
문형배 - P7

나는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 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배제되고 있는 동안(1983~1986년) 대학교를 다녔다. 그때 열심히사법 시험 공부를 하였다. 헌정 질서가 파괴되건 말건,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것에 저항권을 행사하건 말건.
그렇다고 20대 초반의 들끓는 피를 가지고 있던 내가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었고 당장 도서관 공부를 방해하는 최루탄이있었다. 나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시험을 끝내놓고도 얼마든지 시간은 있다고.
1986년 2차 시험을 끝내고 그 무렵 유행하던 공장 체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민중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은 주장이나 실천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기득권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 P13

내가 원했고,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결정할 수 있고, 또내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판사. 국민으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와 못 미더운 시선을 받은 적도 있지만 법원만큼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는 국가 기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불의가 법을 유린할때 그건 불법이다. 불의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그건 정의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 반성할줄도 아는 판사들의 법원.
안치환의 노래는 종반부로 치닫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않았네. 길은 멀은데 가야 할 길은 더 멀은데. 비틀거리는 내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어이 가나 길은 멀은데." - P18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하다.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 - P20

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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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


깃털이 작게 날았다
그걸 본 사람이 있었다

얼음으로 된 절벽이 아니라고 해도
절망할 수 있다

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계속 끓고 있어서

벌레는 갉아 먹는다
제 몸이 될 것들을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할 때
바깥이 생겼다 - P9


나는 이제 꺼내놓을 것들을
꺼내놓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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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하다


물을 버린 나무들이 동네 건달 같다

여름내 가죽을 뚫고 나온 햇송아지의 뿔,

강가의 왜가리들이 내년에 쓰려고

물속에서 한쪽 다리를 들고

거기다 표를 한다

오래도록

울타리 팥배나무에게 젖을 물리던 해도

붉은 산을 넘어가는 저녁,

나에게는 아직 많은 가을이 있지만

이번 가을은 이게 다라고

나도 마음에다 표를 한다 - P14

가을 서사


나는 이파리처럼 가벼워서 두고 가기 좋으나 그래도 해질 때 바닷가 술집에라도 데리고 가면 나의 시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며......

그전에 선배 시인이 죽어 화장장 불가마에 들어가는 걸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의 시는 계속 세상을 떠돌았다. 시처럼 가여운 것도 없다.

사람들이 무작정 가을 산에 와 죽으니까 군(郡)에서 자살수상자 신고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래도 어디든 죽음은 제집에 들기 마련이다.

나의 지구에서 가을 하나가 떠나간다. 어둑한 길을 걸어 당도했는데 그래도 그는 나를 두고 간다. 잘 가라 가을.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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