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수는 강포수도 수동이도 없는 텅 빈 산막 안에 홀로 앉아, 낯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움직이지않았다. 머루덩굴의 집념과 최치수의 집념에는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 것일까. 귀녀의 집념이 머루덩굴을 닮았다면 치수의 집념은 덩굴에 휘감기면서 하늘로 뻗으며 제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소나무의 의지를 닮았다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유물천지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생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蟲類)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를 벗어나지못한다고들 한다. 인간의 죽음은 좀 사치스러워서 땅속 깊숙이 묻혀지고 혹은 풍습에 따라 영혼의 천상행(天上行)을 위해 편주(片舟)에 실어 물 위에 장사지내기도 한다.  - P56

그런가 하면 짐승들같이고기밥이 되는 일도 있고 짐승에게 창자를 찢기기도 하고 까마귀밥이 될 수도 있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 동안 집념의 조화(造化)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뒷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참는 비극배우의 일상(日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귀녀와 평산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패륜을 다스린다는, 양반의 권위 손상에 보복을 한다는, 적어도 그만한 이유를 박아놓은 집념을 앞세우고 지금 구천이를 쫓고 있는 최치수는 웃음 참는 비극의 배우일까. 그의 집념이 설령 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며 정열과 욕망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며 복잡한 인과관계가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풍토가 빚은 계율에의 복종이며 그 이행은 풍습의 괴뢰적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집념에는 다를 바가 없을 성싶기는 하다. 동학을 믿고서학을 믿는 교도들이나 성악설,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이나나라를 뒤엎고 권좌에 올라 만백성을 살리겠다는 혁명가나 그네들이 갖는 명확한 자각 혹은 사명감이 없었다 하더라도 풍습의 역사 - P56

는 길어서 설령 최치수의 심적 상태가 지금 완만(慢) 하지만 오히려 명확한 자각이나 사명감, 광신보다 지워버리기 어려운 것인지도모른다. 오래 묵은 때는 그것이 희미하여도 빠지기 힘든 것이다. 구천이를 발견한 후 이틀 동안 치수의 모습은 아주 발랄했으며 줄기차고 정력적으로 보이었다. 겨우 초당과 사랑 사이를 오가며 말벗도 없이 폐쇄 상태였으며 나태하고 병약하여 썩어서 괴어 있는 연못물 같았던 생활, 그렇게 살아온 최치수가 옷이 젖도록 땀을 흘렸으며 팽팽하게 긴장된 피부, 상기된 분홍빛 혈색, 눈은 햇빛을 받아보석처럼 빛나고 슬기와 아름답기조차 했던 그 모습에는 초조함이없었다. 권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냉소를 띠지도 않았다. 생명이 타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시간을 잊을 수 있었던 희열이 있었다. 지금까지 타고난 성격 때문에 보다 불행했었던 사나이가 겹겹이 싸인울타리 안의 고래등 같은 지붕 밑에서 잠이 오지 않는 한밤중이면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혼자 미치곤 했었는데 팽팽했었던 이틀을보내고 하산(下山)을 생각해보는 지금, 썩어서 고여 있는 연못물같은 망상이 다시 마약같이 핏줄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 P57

봉순네의 조부는 운봉(雲峰) 사람이었다. 구례(求禮) 순창(淳昌)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운봉에서 창극조의 명인들을 많이 낳았는데 명창 중의 명창이요 창극의 중시조(始祖)며 가왕(歌王)이라 일컬어진 오만하고 괴벽스런 송흥록(宋興祿)도 운봉 태생이다. 송흥록말고도 동생 송광록(宋光祿)과 그의 아들 송우룡(宋雨龍)에 양학천(梁鶴天) 등이 있어 모두 동편(東便)의 거장들이었다. 봉순네의 조부도 한때는 알려졌던 광대였으나 말로가 시원치 않았다. 봉순네의 기억에는 볼품없는 초라한 늙은이, 중풍이 들어서 팔을 못 쓰게 된 늙은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햇볕이 드는 마루에 하부죽한 입술을 떨며 어린 손녀를 상대하여 곧잘 얘길 해주곤 했었다. - P98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했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겠노라 허는 거 아니겠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하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다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하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버렸이믄 버렸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이 밖에도 조부는 괴팍하고 오만한 송흥록 못지않게 괴팍하고 기상이 센 기생 맹렬(孟烈)이, 그들의 곡절 많았던 정사 얘기며, 굶주리며 헐벗으면서도 끈으로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각고 끝에 명창이 되었다는 염계달(廉季達)의 얘기며…… - P96

‘허 명창이 절로 되는 줄 아나? 어림없는 소리여. 명산대천에 가서십년 이십 년 피를 동우로 쏟아감서 목을 다듬는디, 그래가지고도 목을 못 얻은 사람이 있인게로 예삿일이간디? 참말이제 뻬를깎고 피를 쏟고 났이야, 어떤 명창은 절 기둥을 안고 돌믄서 소리를 지르는디 제 목소리 터지는 거를 천둥이 떨어진 줄 알고 까물어졌이야. 예삿일 아니랑게로‘
늙은이는 봉순네 철이 들기 전에 죽었다. 봉순네 부친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병들어 중도에서 업을 폐한 늙은이의 생애를 애석히여겨 눈물을 글썽이곤 했었다. 비록 창극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소질은 불행한 늙은이보다 부친에게 더 있었던 모양으로 이따금 목을 가다듬고 가조 일곡을 일창하는 모습을 봉순네는 여러번 보았으며 지금도 그 청담한 목청이 귀에 쟁쟁했다. - P97

치수는 장암선생이 하던 말을 생각해본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억만금을 주어도 남에게 매어 있길 싫어했었던 사냥꾼이라면 말입니다. 그 신선놀음의 사냥꾼은 지금 한 계집때문에 허깨비가 된 모양입니다. 허깨비도 좋고 신선도 다 좋지 않습니까. 산에 와도 사냥꾼이 못 되고 마을에 가도 사내가 못 되고서원에 들어서도 학자가 못 되고 만석꾼 땅문서는 있되 장자(長者)가 못 되고 어머님이 계셔도 아들이 못 되고 자식이 있어도 아비가못 되고 계집이 있을 때도 지아비가 못 된 위인이 개화당이 되겠습니까, 수구파가 되겠습니까. 가동들을 거느린 의병대장이 되겠습니까. 신선이 못 되면 허깨비라도 되어야겠습니다만 무엇에 미쳐서허깨비가 되오리까. 그럼에도 잡사(事)를 잊지 못하니..... 이적막한 산속에서 진실로 제 자신이 사람의 자식임을 잊지 못하는데어찌하여 영신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지요. 하온데 선생님, 이 무시무시한 생명의 울음이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은 산에서 한 발만,
사람 세상으로 나갈 것 같으면 사람이 아닌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어인 까닭이오니까. 기름이 잦아드는 등잔 같고 곰팡이 슨 서책 같고 벌레먹은 기둥 같고 사람들의 얼굴은 온통 물건으로만 보이니 말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여, 아니올시다. 미워하는 척했을 뿐입니다. 영신도 목숨도 실상이 아니며 다만 영원불멸의 세월만이 - P144

영신을 조롱하며 목숨을 딱해하는 것이겠습니까. 억만금을 주어도 싫다던 사냥꾼은 산에서 영신을 보았을 테지요. 계집을 달라고 애원하던 사내는 목숨이 있음을 알았을 테지요. 그는 세월에 눈가림당한 한 마리의 복 많은 망아지가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세월의 뜻을 아시고 세상과 하직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눈앞에는 흰 눈보다 잿빛 나뭇가지가, 그리고 푸른 소나무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기, 저기 노루가 한 마리뛰고 있습니다!‘
치수는 총의 안전 장치를 풀었다. 노루는 나목(裸) 사이에서 얼른거렸다. 그러나 주력이 강한 노루는 산등성이를 향해 뛰어오른다. 강포수도 총의 안전 장치를 풀고 노루를 쫓았으나 곧장 달리지않고 산등성이를 향해 이리저리 사선을 긋듯 하며 올라간다. 서두르지 않더라도 산등을 넘으면 틀림없이 노루는 한눈을 팔고 있을것이다. 강포수와 최치수가 산등성이를 넘지 않고 이켠에 몸을 숨긴채 산 너머를 내려다보았을 때 노루는 사정거리 밖에까지는 아니었으나 상당히 먼 곳에 가서 한눈을 팔고 있었다. 우뚝우뚝 선 나목들이 장애가 되어 위치를 옮기는데 무슨 생각을 했던지 노루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강포수 입에서 제기! 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각(地殼)에 밀폐된 깊은 땅속같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 P145

이동진의 얼굴은 술이 올라 불그레했다. 최치수가 술을 부어주는술잔을 내려다보며 이동진은 다시 중얼거렸다.
"상민들이 부러울 때가 있지."
"어려울 것 없다. 의관을 벗어버리면 될 거 아닌가. 머릴 깎으면중놈이 될 것이요, 칼 들고 푸줏간에 들어가면 백정이 될 것이요."
"말 말게. 기백 년 세월 동안 골수에 박힌 생각은 어느 나무에다 걸어놓고? 수백 수천의 잔뿌리가 골수에 박혀서 이것을 치면 저것이 솟아나고 저것을 치면 이것이 솟아나고 지금의 나라 꼴이 그 모양일세. 양반들 머리통하고 흡사하지. 그러니 하나를 알면 그것이전부인 줄 아는 상민들의 우직함이 부럽다 그 말 아닌가. 지켜야할 체통이 태산 같은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래 위 훑어보고, 그러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게 양반이며 글줄이나 읽었다는 그게 또우환이라. 쇠스랑이든 곡괭이든 들고 나설 수 있는 상민 천민이 얼마나 홀가분할꼬? 그네들은 짐승이 적을 만났을 때 그것을 습격하듯이 잽싸고 교활하고 용감하거든. 삼강오륜의 법은 몰라도 그네들은 뭐가 옳고 그른가를, 무엇을 막아야 하고 무엇을 몰아내야 하는가를 심장으로 느끼거든." - P154

"싱거운 소리 그만 하게. 송충이 죽음 보고 곡하는 수작이지."
"허허, 이 사람아."
"양반이 썩었고 체통만 태산 같고 하지만 그놈의 체통이 있어서짐승으로 떨어지지 않아! 그것들이 천민으로 떨어지기까지는, 흥오히려 짐승 편이 슬기롭지. 제 먹이를 위해 혼자 피투성이 싸움이라도 하지만 우중이라는 것은 수가 많아야, 무리를 지어서 비로소그 속에 끼여들어 칼이든 쇠스랑이든 휘두르며 피맛을 보고 너부죽한 아가리를 벌리며 웃는 게야. 비겁하고 천한 것들이 옳고 그르고를 알어? 용감하고 잽싸고 심장으로 느껴? 흥, 혼자 일어서서 저도 당당한 인간임을 과시하고 양반한테 대항해오는 놈이 있다면 내 천 석쯤 떼어주지." - P154

"있다면 어떡헐 텐가? 무엇이든 지나치면 옹졸해지는 법, 물론 상민들이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닐세. 선비들이라고 모두가 다 지조 있는 인물이 아닌 것같이. 개중에 슬기 있는 놈도 있어서, 오늘같이어지러운 세상에는 쓸모없는 글자로써 꺼멓게 먹칠이 된 식자(者)의 머리보다 천만 가지의 이치는 모르더라도 한 가지 이치에 눈을 뜬 상민들의 외곬으로 치닫는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뜻이야. 내 예를 하나 들어서 말하지. 상민으로서 의병의 선봉장을 맡았던 김백선 말이야. 아까 자네가 말했듯이 유생 출신 의병장의 십인 몫을 한 김백선 그가 유생 출신의 어떤 의병장들보다 잘 싸운것은 한 가지 이치에 투철했던 때문이요, 안승우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심장보다 두뇌로 일처리를 하려 했던 때문이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서 왜군한테 패하고 돌아온 김백선이 분을 못 참고 안승우에게 칼을 빼어 들이대었다 해서 엄한 군율로 다스린 의암선생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는가? 강직한 성품 탓이라고만 할수 있을까? 결국은 서재인(書齋人)이고 식견의 결과에 지나지 않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의병의 수효가 탐이 나는 마당에서유생 출신 의병장 열 사람 몫은 넉넉할 인물을 개죽음을 시켰다는것은." - P155

의암 유인석은 강원도 사람으로서 전통적인 유학 사상을 고수한거유(巨儒)이며 관직을 탐하지 않는 청빈하고 지조 높은 선비다.
1895년 왕비 시역(逆)에 대한 보복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봉기한의병들의 중의에 따라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전국 사림(士林)에게 개화 신법(法)의 반대와 외세 배격의 격문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지방 관헌들을 피로써 숙청하고 왜병에 항쟁했던 것이다. 그 유인석이 그때 선봉장으로서 선전(善戰)하였던 평민 출신의 김백선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 패퇴하게 되자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여 마지막 노모를 한 번 보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조차 물리치고 군율에 의해 김백선을 처형했던 것이다. 김백선의 죽음은 충주 황강(黃岡)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이되기도 했었다. 그것을 두고 이동진이 말한 것이다.  - P155

무리를 잃고 무인지경에 홀로 남은 그림자, 갈밭에 기어드는 한마리의 눈먼 뱀이었을까. 그러나 윤씨부인의 자제력은 놀랍고 훌륭했으며 헌칠한 몸을 훨씬 당목 치마저고리의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배어났으나 눈빛은 힘차게 빛나며그의 언동은 분명했다.
어느때부터였던지 강을 내려다보는 마을 언덕에 터전을 잡았던 영천(川) 최씨의 일가, 문벌과 재물로써 백 년을 넘게 이 지방에 군림해왔으며 특히 드센 여인들 손으로 이룩했고 지켜왔었던 최씨집안의 마지막 사내, 이 사내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상제는 하나, 여식 혼자였다. 사람들 속에는 평산이 있었다. 그는 평소 외면하여 인사도 없이 지내던 김훈장에게 전과 달리 공손하게 몸을 굽히며 무슨 이런 변이 있겠느냐고 말을 걸었다. 김훈장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한숨을 지으며 참으로 해괴한 일이라하며 맞장구를 칠 판인데 삐뚜름하게 자빠진 갓 모양 하며 술에 절은 듯한 김평산의 작은 눈을 보자 입맛을 다시며 몸을 비키는 것이었다. 버림받은 평산의 눈은 다시 바쁘게 남의 눈을 찾아 헤매다가 귀녀 모습에 가서 부딪쳤다. 이때만은 눈밑의 군살덩이가 푸룩푸룩떨었다. 애통해하는 많은 노비들, 그 중에서도 귀녀의 슬퍼하는 모양은 유별하였다.  - P184

죽음을 당한 사람은 물론 죽인 사람도 다 함께 지금은 지하 명부(冥府)에 가 있을 것이므로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들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나 집안 하인들은 모두 또출네의 소행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또출네가 최치수를 살해하지 않았으리라는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용이말고도 두 사람이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윤씨부인이었다. 다른 한사람은 봉순네였다. 용이와 마찬가지로 윤씨부인의 의혹은 삼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친 여자가 삼끈을 준비했다가 살해하는, 그 치밀한 살해 방법을 과연 생각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처음 윤씨는 환이를 눈앞에 떠올렸다. 끝내 그들을 추적할 것이며 종말을 보고야 말 최치수를 그들 쪽에서 먼저 손을 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관선사의 서신에서 환이가 은신처로부터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은 후 윤씨부인은 그 무서운 망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다음, 마음에 짚인 인물은 강포수였다. 그들 사이에 있을 거래나 약속 같은 것은 알 길이 없지만 강포수가 떠날때 노자밖에 준 것이 없었다는 김서방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믐밤 산속 화전민 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울었다는 그간의 상세한 동태를 알게 되어 의심을 풀 수밖에 없었다. - P209

마을 초가지붕에서는 여기저기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해는 넘어 산허리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타는 듯 붉은 놀이 들판 가득히 퍼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들의 얼굴을 물들였다.
한복이는 이날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날 아침 두만네가 타이르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콩가루를 묻힌 찰밥을 싸고 엽전 다섯닢을 얻어 허리끈에 묶고, 또 새로 삼은 짚세기를 신고 여벌로 주는 새 짚세기는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한복아, 니 소달구지 만내거든 태우달라 
캐라."
두만네는 저만큼 걸어가는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한복아, 또 오니라아."
영만이 소리쳤다.
그 후에도 한복이는 철새같이 평사리에 나타나곤 했다. 타작마당에서 당한 그 봉변을 잊었는가. 그 봉변을 잊지 못하고 겁내면서도
나서 자란 마을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더 컸었는지모른다. 한복이 나타날 때마다 마을 아이들 눈에서 적의는 줄어들었다. 철이 바뀌어도 한복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이들은 들먹였다. 어른들도 말을 했다. 하기는 한복이 마을에 오면 두만네 집에서만
잠을 자고 밥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야무네 집에서도 하루이틀쯤 그를 재워주었고 먹여주었으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막딸네도 한복이를 불러다 점심쯤은 먹여주었다. 어린 방랑자. 철새같이 옛 둥우리를 잊지 못해 찾아오는 한복이를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엾게 생각했다. 이제 그는 달구지 신세를 질 줄 알았고 오다가 날이 저물면 장터, 빈 좌판 위에 잠자는 궁리도 생기게 되었다. - P256

길상이는 언더막길을 내려가면서 연신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 일이 생각나서 웃는 것이기는 했으나 웬일인지 길상이는 마음이 달뜨고 세상이 온통 훤한 것 같아서 즐거웠다. 가물가물 젖어드는 것같은 햇빛, 축축한 봄의 입김이 사방에서 길상의 가슴을 간질러주는 것 같았다. 아직은 끝이 누우렇고 옹그러든 채였으나 까치들이앉아 있는 보리밭에도 봄 기운은 완연했다. 아이들이 불을 놓아 꺼멓게 그을린 논둑길, 꾸불꾸불한 논둑길은 마치 뱀 같았으나 그 길을 가는 농부들, 보리를 밟고 있는 농부들의 흰옷이랑 머리를 동여맨 베수건이 정답고 화사하게 보였다. 햇볕 바른 언덕에 꾸부정하게 자라난 뽕나무 밑둥에는 흙이 녹아서 허물어지고, 겨우 뽕나무의 뿌리가 나머지 흙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참말이지 봄이 왔구나." - P261

크게 소리를 질러보려다 그만두고 대신 길상이는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본다. 정초에는 그렇게 많은 연이 푸른 하늘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모를 줄 끊긴 연 생각이 났다. 찾지 못한 연은 높이 올라가서 수미산에 닿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길상은 떠내려가는 구름이 못 견디게 좋았다. 하늘 빛깔도 좋았고 맴을 도는 소리개의 쭉 뻗은 날갯죽지, 그 날갯죽지에 올라앉아서 꿈을 꾸었을 때처럼 넓은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 용솟음친다.
길상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 길상은 목소리가 굵게 터져나오는 이 시기가 자신에게 있어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눈은 더욱 크고 서늘해졌으며 긴 목이 좀 둥거워졌고 양어깨가 벌어졌으며 다리에는 힘줄도 생긴 이런 변모가 인생에서의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봄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 화창한 봄날씨가 좋았던 것이다. 이 소년에게 또 하나의 이유는 최참판댁의 서희가 상복을 벗은 데있었는지도 모른다. 옥색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었던 서희, 제법 늘씬하게 큰 봉순이도 서회를 따라 무색 옷을 입고 입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암담하고 비애에 가득 찬 집속에 마음을 가두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기나긴 겨울이었었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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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을 묵고 떠날 줄 알았는데 최치수는 연곡사에서 사흘 밤을 보내었다. 사흘 동안 우관은 외떨어진 암자에서, 최치수는 칠성당 가까운 처소에서 좀체 밖으로 나오질 않았으며 서로 대면하는일도 없었다.
홀로 앉은 우관은 상좌 명신이 끓여다 놓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더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최치수의 얼굴은 사방에서 우관의 망막을 어지럽힌다.
실눈을 뜨고 웃던 얼굴이, 수백 수천의 얼굴이 암자 가득히 들어차 우관을 향해 괴물체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흡사 지옥도를 보는 느낌이다. 우관은 감았던 눈을 떴다. 문살이 뚜렷한 장지가 밝게 눈부시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을보다 한걸음 앞서 산사의 가을은 도라지꽃에서부터 시작된다. 엷은 장지(障紙)를 통하여 느껴지는 바깥 풍경, 우관은 하늘과 숲과 사찰의 여러 건물, 바위와 오솔길이 일시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곳 그자리에 모든 것은 미동도 없이 거리(距離)를 굳게 지키며, 지렛대와도 같이 완강한 거리를 지키며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한치도 다가설 수 없는, 결코 접근을 용서치 않는 삼엄한 공간.  - P22

하나의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였음에도 이미 최치수에게는 엄연한 사실로서 굳어버린 것이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추리를 확정지을 만한 일을 밝혀내지못하였으나 여전히 하나의 사실로서 굳어버린 일이었다. 그는 그것이 추리였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목마른 나그네가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는 이상으로 추리가 빚은 형태는 치수에게있어 명명백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치수는 공상가는 아니다. 망상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었다. 그는 추리의 세계에서 갈 수 있는 한의 가장 좁은 길을 헤치고 들어가보았으며 추리에 동원된 지나간 일의 기억은 운명적이랄 수밖에 없을 만큼 선명하였었다.  - P26

왜 치수는 막연하게 기약도 없이 산속을 헤매려 왔던가. 분노하고, 추상같이 마을이 떠들썩하게, 그게 싫었던 것일까. 자기 혼자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자기 혼자서 손상된 권위를 찾았다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권위 의식, 그러나 전부를 투신할 정열을 잃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우관선사에게 사실을 규명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결정적인 포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끝장을 내기 전에는 그 문제는 괴로운 숙제다. 끝장을 낸다는 것은 의무이기도 했었다. 싸움터에서 등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으면서 적병을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념, 굳어져버린 관념이란 고질, 거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윤씨부인과 구천이, 우관선사와 김개주, 문의원과 월선네와 바우와 그의 아낙을 엮어서 형태가 만들어진 있을 법한 사실, 그 사실로 인하여 지금 추적하고 있는 구천이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될지 그것은 치수 자신도 알 수없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확증을 회피하고 연곡사를 떠나왔으나 확증을 얻음으로써 구천에 대한 응징이 보다 가혹해질는지 응징을 포기하게 될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40

구천이를 도망가게 한 짓이 실수 아닌 고의였었다는 것을 안 이상, 의당 수동에게 어떤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동정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 한마디 내뱉은 이외, 치수의 얼굴에서 노여워하는 기색조차 볼 수 없었다. 구천이 찾는 데 정신이 팔려 그랬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닦달을 하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요, 그 괴팍한 성미에 배신한 종 하나쯤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치수는 수동의 행위를 용서한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보면 그 일을 까맣게 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럴수록 수동이는 오히려 두려움을 갖는다. 죄책감도 컸었다. 설령 상전이 너그럽게 용서한다 치더라도 수동이는 자신의 행위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천에 대하여 절도를 잃은 연민과 숭배의 감정은 그러나 또다시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상전을 배신 안 하리라 장담 못한다. 그럼에도 수동의 뼛속 깊이 박힌 종으로서의 상전에 대한 충성심에는아무런 동요가 없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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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만 결코 늙음이나 질병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칠성이는 똥이 말라붙은 소 엉덩이를 다시 한 번 갈겼다. 임자도 아닌 주제에 왜 이러냐고 악다구니를 하듯이 소는 움모어하고 운다.
솜뭉치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는 하늘은 더없이 평화스럽다. 들판을 오는 농부들의 모습에서도,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뗏목, 개천가에는 어미소를 따라다니는 송아지, 모든 것은 다 평화스럽다.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지 않으려는 농부들은 또한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지 않으려는 자연과 더불어 이 한때는 평화스런 것이다.
두만네 집앞에까지 온 간난할멈은 삽짝에 기대어 숨을 돌린다. 개가 쫓아나왔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맷돌 돌리는 소리가 마당에서 났으며 삽짝에 가까운 까대기 겸 외양간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집안은 맷돌 돌리는 소리뿐 아이들도 없는가, 개는 꼬리를 내리고 후퇴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응석부리는 어린애같이 누가 나와서 부축해주기를 바라던 간난할멈은 할 수 없이 잔기침을 하며 마당에 들어섰다. - P116

모두 바빠서 날뛰는 계절이다. 꿀벌은 알을 까고 누에는 애기잠에서 깨어나 물신물신 크다가 다시 한잠으로 접어들었고, 그러고나면 뽕잎 따는 손이 바빠질 것이다. 목화씨를 뿌리고 논에는 풀을베어넣고 삼밭의 삼은 무릎만큼 자라고 날따라 뜨거워지는 햇볕에모든 생물은 생장을 향해 달음박질이다. 비만 좀더 와주면 푸성귀밭의 진딧물을 씻어줄 것을. 마을 아낙들은 보리타작까지, 누에치기도 그러려니와 끝장을 내야 하는 봄길쌈에 매달려 있었다. 보리타작도 멀지는 않았다. 파아란 떡보리를 맛보았으니. 햇볕 바른 곳에서부터 보리는 익어갈 것이다.
간난할멈은 별당 뜰로 들어간다. 마루에 윤씨가 오도마니 앉아있었다. 그러나 간난할멈은 윤씨 모습을 보지 못하고 연못가에 가서
"임자가 없이니 마당에는 풀만 우묵장성이네."
군지렁거리며 엎드려 풀을 뽑는다. 해당화가 연방 피고 진다. 분홍 꽃잎이 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P154

"어머니가 그랬는데 그것 다 나 준댔어. 구슬이랑, 가락지랑, 비녀랑 그것 다 나 준댔어."
길상은 말이 없다. 서희는 실망한다. 요즘 서희는 엄마 데려오라하면서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츰 엄마의 일은 뭔지 모르나 불가한 것이며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잡고 울부짖었고 누구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싶을 때그는 겉돌려가며 방금 길상에게 한 것처럼 더듬어보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보다 그에게 더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길상아."
"예."
서희는 공연히 불러보고 나서 등에 볼을 대고 구름을 본다. 구름은 강 건너 산봉우리에서 자꾸 피어올랐다. - P164

어느덧 사방에 땅거미가 지고 맞은켠 섬진강 너머, 꺼무끄럼해진 산에 이승한 저녁안개가 내리덮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송판으로 얽어놓은 굴뚝에서도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모두흩어진다. 배고픈 아이들은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제가끔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새끼를 여러 배 뽑아내어 이젠 형편없이 늙어버린 두만네의 개 복실이는 삽짝에 오도마니 나앉아 있더니 허둥지둥 뛰어가는 거북이 동생 한복이를 보고 우우 하며 짖어댄다.
막딸네한테 직사하게 악담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평산은 저녁이다 되었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함안댁은 급히 부엌으로 쫓아들어가고 거복이는 아비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뒷걸음질쳐 집 밖으로 뺑소니를 친다. 호박은 분명 제 한 짓이 아니나 전죄가 있었기때문에 막딸네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숨어 들었지만 억울타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노릇이며 아비가 추달을 한다면 호박의 경우는 물론 전죄까지 잡아뗄 수는 있지만 우선 매가 무섭다.  - P184

귀녀는 순간 막연해지는 모양이었다. 평산도 내심 막연함을 느끼었다. 황금의 더미가 소리도 없이 무너져서 흐트러져가는 것 같았고 희한한 꿈을 깨고 난 늙은이가 뼈다귀 같은 천장의 서까래를 바라보는 허무한 마음, 그러나 절망은 아니었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좀더 안간힘을 쓰기만 하면, 뭔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귀녀와 평산은 꿈이 무너질 것 같은 허망함에서, 그 공통적인 심리 때문에 그들은 말로보다 더 강하게 손을 잡았음을 느꼈다. 손을 잡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는 기대만이 이들의 허망한 순간을 구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되는 수가 있다. 너하고 나하고 의논이 맞기만 하면, 알겠나? 좀기다려보면은 되는 수는 반드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알겠나?
내가 주선할 테니 니는 어떡허든 애만 배면 된다. 종년이 그만큼 큰마음을 먹었다면 끝장을 내야지, 아암." - P188

"대단한 욕심이군 그래."
어처구니없다는 듯 뇌다가 준구는
"아아니 이 사람아 자네 저년을 건드렸군 그래." 하고 껄껄 웃는다. 치수도 따라서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어젖힌다.
"썩 재미있지 않소?"
"허허어 참, 그년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대단하게 들었구먼."
"만석꾼 살림이 눈앞에 얼른얼른했을 게요."
"자네도 죄가 많네."
치수는 웃던 웃음을 멈추었다. 껄껄 하던 웃음은 맥이 차츰 빠져서 허허허 하다가 눈에 독기가 번득 섰다.
"그년을 내가 건드려요? 안 건드리고 바라보는 재미가 어떻다고 건드립니까?"
"뭐?"
더 이상 부언하지 않고
"집념이요."
"......?"
"계집의 집념에는 사내가 따를 수 없지요. 욕심도 많지만, 그렇지않을 때도...... 조그만한 욕심, 조그만한 원한, 미움만으로도 살인하는 일이 허다하죠."
"그게 무슨 소린가?"
"최씨 집안의 살림은 여자 집념의 상징 아닙니까?" - P214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나귀 등에 흔들리며
‘오래 사는구나‘
문의원은 아까부터 그 말을 되고 있었다. 돌이는 빈 나룻배가 올라가지 않나 하며 강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고삐를 잡고 간다.
지나간 고는 다 꿈과 같고 당장의 고초 역시 보내고 나면 꿈이될 것이외다. 참으시요, 하며 윤씨부인에게 말한 그 꿈, 지나간 칠십 년을 꿈으로 친다면 문의원은 참으로 긴 꿈속에 있었던 셈이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의생으로서의 칠십 평생, 아니 오십 평생, 약수(藥水)가 무효하여 죽은 생명이나 늙어서 가버린 생명, 액질에 넘어진 생명, 그 숱한 생명말고도 흉년에 죽고 민란에 죽고 동학전쟁에다 서학교도들의 학살, 그 소용돌이 속에서 문의원은 무참한 죽음들을 목도했었다. 최참판댁과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윤씨부인과의 인연도 하나의 죽음을 지켜본 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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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밖의 대화도 맹랑하지만 골방 안의 풍경도 맹랑하다.
"배고파 죽은 혼신아! 손님에 죽은 혼신아! 임병에 죽은 혼신아! 괴정에 죽은 혼신아! 칼맞아 죽은 혼신아! 목매어 죽은 혼신아!
가다오다 죽은 혼신아!"
거리굿이라 하며 음식을 차려놓고 수없이 혼신을 불러대는 봉순이 정말 영신이 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낭랑한 목소리며, 흥분에 번쩍번쩍 빛나는 눈이며, 손짓 몸짓이 단순한 아이들 소꿉놀이라고만할 수가 없다. 너무 진박(眞拍)하여 처연(凄然)한 귀기마저 느끼게한다.
봉순이의 이런 장난은 어미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무당놀이뿐만아니라 광대놀음도 혀를 내두를 만큼. 봉순이는 서희보다 두 살 위인 일곱 살이다. 가널가녈하게 생긴 모습이나 성미도 안존한 편인데 어떤 내부의 소리가 있었던지 광대놀음, 무당놀음이라면 들린것 같은, 한번 들은 것이면 총기 있게 되는 것도 그러려니와 목소리도 매우 아름다웠다. 아마도 그것은 숙명적인 천부의 자질인 성싶고 슬픈 여정의 약속이 듯도 하다 - P42

사방을 팽팽하게 메운 진한 어둠과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섬진강쪽에서의 바람이 맞부딪쳐 무시무시한 격투를 벌이는 것만 같은밤에, 가랑잎에 발목이 묻히는 잡목숲을 헤치고 구천이와 별당아씨가 어디론지 종적을 감춘 뒤 사흘 만에 최참판댁에서는 바우할아법의 상주 없는 장례가 있었다. 며칠 동안 상식(上食) 때면 뒤꼍에마련한 빈소에서 목이 쉰 간난할멈이 풀무 젓는 소리로 곡을 하였으나 그가 운신을 못 하게 되면서부터, 상식이야 아무나가 했을 테지만 가엾은 노파를 대신하여 울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납덩이같이 덮쳐씌운 침묵 속에서 집안 하인들은 물밑을 헤엄치는 고기떼 모양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밤 누가 도장문을 열어주었는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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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土地』 제1부를 『현대문학』지에 연재중이던 1971년 8월, 암이라는 진단에 의해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수술 전날 병실 창가에서동대문 쪽으로부터 남산까지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았다. 참 긴 무지개였었다. 아마 나를 데려가려나 보다, 하고 나는 혼자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날 회진 온 의사에게 물었다. 수술은 몇 시간이나 걸리느냐고 세 시간쯤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대수술이군요, 하고 되었다. 삶에 보복을 끝낸 것처럼 평온한 마음이었다. 휴식으로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했다. 야릇한 쾌감 비슷한 것도 있었다.
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 진실이 손에 잡힐 것만같았고 그것들을 위해 좀더 일을 했으면 싶었다. 고뇌스러운 희망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土地』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가중되는 망상(妄想)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 나는 주술(呪術)에 걸린 죄인인가. 내게서 삶과 문학은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달리 할 일도 있었으련만,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련만......
전신에 엄습해오는 통증과 급격한 시력의 감퇴와 밤낮으로 물고늘어지는 치통과, 내 작업은 붕괴되어가는 체력과의 맹렬한 투쟁이었다. 정녕 이 육신적 고통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 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自意)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사슬을 물어 끊을수도 없다. 용기가 없는 때문인지 모른다. 운명에의 저항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각까지 내 스스로는 포기하지 않으리.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악마의 간계에 의해 ‘우스‘의 정직한 한 사내를 전능자 하나님이악마의 손에 넘겨준 『구약』의 「욥기」를 독자들은 기억하리라 믿는다.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게 된 그 불운한 사내는 일시에 모든 것을 잃고 자식도 가산도 다 잃어버리고 끝내는 그 자신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惡瘡)에 시달리며 신음하는데, 환부(患部)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금파리로 긁어내는 욥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부끄럽다.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詭)을 발하지 아니하고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하고 말한 욥을 생각하면 그의 발 아래 꿇어앉고 싶어진다. 시험은 끝나고 모든 잃은것을 찾은 욥을 염두에 떠올리며 위안을 받을 적에 나는 슬프고 내자신이 가엾어진다. 이 미물(物) 같으니라구.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餘白)은 두렵다. 타협이라는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한다.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殘)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性)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戰慄)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雜事)에서 손을 떼고 일에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

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그 어느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분명 환난을 겪는 옵에게는 행복의 비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土地』 제1부를 쓰던 삼 년 동안의 내 심경이며 그것을 적어본 것이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973년 6월 3일 밤
作者

신판(版) 서문


사정에 의해 1989년 가을부터 나는 인지를 발부하지 않았고 ‘토지』의 출판은 중단 상태로 들어갔다. 문학을 포기할 생각도 해보았고 서점에 『토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심한 혐오감에 빠지기도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은 꽤 오랫동안 나를 침잠하게 했으며 내 문학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인가를 깨닫게도 했다.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하며 출판 중단을 비난하는 내주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고 시간을 응시하며 겨울나무가 바람에몸을 흔들며 고엽을 떨어뜨리듯 나 역시 새봄을 맞기 위하여 분노의 쓰레기를 떨꾸려고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가곤 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무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작년 가을부터 종결편인 『토지』 5부의 연재를 시작했으며 주변의 비난을 수용하여 『토지』 출판의 재개를 결심했다. 젊고 맑은 감성들이 모여서 하는 솔출판사를 선택하여 이 책이 나가게 되었는데 바라건대 조약돌처럼 이 강산 사방에 깔려 있는 문화라는 허상
속에서 진정한 문화에의 회귀에 성과 있기를 빈다.

1993년 6월 8일
박경리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극성스럽게 새를 쫓던 할망구는 와삭와삭 풀발이 선 출입옷으로 갈아입고 타작마당에서 굿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추석은 마을의 남녀노유,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강아지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새들에게, 시궁창을 드나드는 쥐새끼까지 포식의 날인가 보다.
빠른 장단의 꽹과리 소리, 느린 장단의 둔중한 여음으로 울려퍼지는 징 소리는 타작마당과 거리가 먼 최참판댁 사랑에서는 흐느 - P11

낌같이 슬프게 들려온다. 농부들은 지금 꽃 달린 고깔을 흔들면서 신명을 내고 괴롭고 한스러운 일상(日常)을 잊으며 굿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최참판댁에서 섭섭찮게 전곡(錢穀)이 나갔고, 풍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실한 평작임엔 틀림이 없을 것인즉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놓고 쌀밥에 식구들은 배를 두드렸을 테니 하루의 근심은 잊을 만했을 것이다.
이날은 수수개비를 꺾어도 아이들은 매를 맞지 않는다. 여러 달만에 솟증 풀었다고 느긋해하던 늙은이들은 뒷간 출입이 잦아진다. 힘 좋은 젊은이들은 벌써 읍내에 가고 없었다. 황소 한 마리 끌고 돌아오는 꿈을 꾸며 읍내 씨름판에 몰려간 것이다.
최참판댁 사랑은 무인지경처럼 적막하다. 햇빛은 맑게 뜰을 비쳐주는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새로 바른 방문 장지가 낯설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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