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벡이라는 도시로 진입하고 있다고 인지한 순간 느껴지던 그 떨림을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철골과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뤼벡 중앙역을본 순간부터였는지, 아님 역밖으로 나와 그 오래된 도시를 바라보던 순간, 그러니까 갈색 벽돌과 산화되어 에메랄드색으로 변해버린 뾰족한 박공지붕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봤을 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걷기가 어려웠다. 눈을 뗄 수 없었고, 발을 뗄 수 없어서, 심박수 증가, 심장 통증, 무릎 풀림, 현기증 같은 증상이 동반되었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게 ‘스탕달 신드롬‘인가 싶다. 그림이나 책을 보고 그랬던 적은 있지만 도시를 보고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즉각적이고 강렬한 육체적 반응은. 동행인 C선생님-더군다나 독문학자-께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흥분을 감출 만한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래서 호들갑을 떨었고, 바로 그게 뤼벡에서의 나였다.
첫 코스라고 할 만한 곳은 홀스테인 성문이었는데, 기이했다. 육중하고 견고하고 터프한가 싶었는데, 다가갈수록 우아하고 섬려하고 연약하게 보였다. 이상해서 계속 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C선생님은 물었다. "저거 기운 건가요?" "글쎄요." "착시일까요?" "글쎄요." (‘글쎄‘ 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것은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 - P136

파이프오르간과 바흐, 여기에는 이 교회의 웅장함에 걸맞은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한때 이곳의 연주자가 바흐였다. 유명해지기 이전, 젊은날의 바흐, 1705년, 성마리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북스테후데와이파이프오르간을 만나기 위해 바흐는 400킬로미터를 걸어와 뤼벡에 머무른다. 그리고 감격한 바흐는 늦게 돌아가 직장에서 잘린다.
한때 직장에 다니기 위해 매일같이 120킬로미터를 운전한 적이 있던나는 귀환하던 바흐의 400킬로미터에 대해 생각했다. 잘리기 위해 400킬로미터를 걸어갔던 무명의 바흐에 대해, 격정과 걱정이 뒤섞였을 그의 귀환길에 대해.
그리고 드디어 토마스 만의 생가에 만든 토마스 만 기념관에 갔다. 토마스 만의 형인 하인리히 만의 기념관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만에 대해서는 거의 읽은 적이 없는 내게 이곳은 토마스 만 기념관일 뿐이었다. - P138

그러니까 ‘부덴브로크=뤼벡‘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기념관에는 소설의 배경을 현실의 뤼벡에 대입해놓은 관광지도 같은 것이있다.
네 번쯤 읽은 이 소설을 다시 읽고, 다시 뤼벡에 와 이 지도를 들고 뤼벡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품위 있고 훌륭하지만, 아주 훌륭하지만 진부한 도시‘라고 토마스만이 말했던 이 도시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품위 있지만은 않고 진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반증이라고생각한다. 자기가 나고 자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뜯어먹으며 소설을 썼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고, 뤼벡을 걸으며, 내가 소설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것도 토마스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 P140

늦은 점심을 했던 식당도 나의 뤼벡 애호증을 강화시키는 데 한몫을했다. 우리가 옛 선원조합의 건물이었다는 그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시간의 먼지와 습기, 소금 냄새 같은 것들에 마음을 뺏겼고, 이름도 낯선 찬더zander라는 생선을 먹고는 기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손으로 가슴을 눌러야 했다.
그때 비단 조끼를 입은 노인에 가까운 남자가 긴 막대기를 들고 등장하더니 촛대가 20개쯤 달린 샹들리에에 일일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우리의 얼굴은 환해졌고, 그 남자는 촛불에 불을붙이는 중간 중간 우리와 미소를 교환했다. 나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던그 식당에서 우리만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준다는 게, 그리고 성가실 수 있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그 식당의 운영 모토가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남자가 촛불을 밝히는 긴 막대는 보면 볼수록 밤 딸 때 쓰던 막대와 비슷해 보였다. 가시 돋힌 밤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순간이 기억났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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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하면 늘 그 전율, 그 근거 없는 끈끈한 친밀감,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는 끔찍한 느낌, 거기에 더해 정확히 언제 가엾게 움츠러든손을 풀고 거두어들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찾아온다. 하지만 돈 데번포트는 그간 경험으로 배운 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그 정맥이 튀어나온 손은 내 손에 닿자마자 재빠르게 뒤로 빠졌다-아니, 재빠르게는 아니고, 놓으면서 사분의 일 초 동안 살짝 느려지는 방식으로 신속하게 미끄러지는 애무였다. 마치 공중곡예사들이공중에서 헤어질 때 아쉬워하는 듯 나른하게 서로의 손끝을 놓아주는것처럼. 그녀는 또 토비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나에게도 옆으로 흘끗던지는 미소를 보내주고 뒤로 물러났으며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일충의천장이 높고 창문이 많은 방으로 무리 지어 들어갔다. 스타 스타 중의 스타 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꼬를 찬 채 서로의 뒤꿈치를 밟듯이 걸어가는 사슬로 함께 묶인 죄수들 같았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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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베를린 일기‘라는 걸 쓰지 못했다. 대신 영수증을 모았다. 빈 노트에 그날의 영수증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는게 나한테는 일기 쓰기 비슷한 것이었다.
이렇게 영수증을 모으면 좋은 점이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하루에 얼마를 썼는지 대강 알 수 있고(약간의 반성도 할 수 있다), 어디에 갔었는지 떠오르고, 무엇을 샀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와 함께 다녔는지도알 수 있다.
물론, 영수증에 누구와 함께 다녔는지에 대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건 이상해서 영수증에 찍힌 상호명과 주소, 구매 품목, 가격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머지들도 떠오르는 것이다.
‘그날‘ ‘거기‘를 갈 때 ‘날씨‘가 어땠는지, ‘동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동행이 있었다면 그날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둥둥 말이다. 그날, 거기, 날씨, 동행, 대화 등이 갖추어지면 얼추 일기가 구성될 수 있는 것 - P83

이다. 그래서 일기를 쓰지 못하는 사람인 나는 일기 대신 영수증을 스크랩했던 것이다.
365일 그런 걸 하지는 않는다. 여행지에서만 그런다. 소비 패턴을 파악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비일상 가운데의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서.
2016년 나는 7월부터 9월까지 대략 3개월 동안 베를린에 있었는데, 한달인가를 남겨놓고 스크랩하는 것을 그만둬버렸다. 뭔가 알 수 없이 바빠져서 스크랩하는 게 버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스크랩은 밀리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때 일기가 밀리면 그랬던 것처럼 아예 하지 않는 쪽을택해버렸다.
하지만 영수증을 버리지는 못했다. 종이봉투에 넣어두었고, 그걸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는 정리를 해야겠다 싶어서 영수증을꺼내서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선(거의 모르는) 독일어를 더듬더듬 읽어가는 것이다.
정리 안 된 내 영수증 일부를 읽는 것으로 베를린 생활의 세부를 기억해내보기로 한다. 모든 걸 적을 수는 없으므로 하나의 영수증에 세 가지 단서만을 적기로 하겠다. - P84

내가 궁금한 건 이거다. 클라이스트는 죽고 나서 자신이 엄청난 비난과 오명에 시달리리라는 걸 예상했을까? 비그리스도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묻히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을까? 클라이스트 가문에서 죽은 그를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알았을까? 그것까지 그의 죽음프로젝트 안에 있었을까?
그가 죽기 전에 했던 기행이라 불릴 만한 이런저런 일들과 남겨놓은글들을 보면 그랬을 법도 하다. 그런데 또한 그가 남겨놓은 글들에서 그토록 미움받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죽기 전날, 그러니까 11월20일에 그의 누이에게 쓴 편지가 있는데 자신을 제발 용서해달라고 더이상 미워하지 말라고 간청한다. 클라이스트는 어쩌면 자신의 죽음으로써 그간 자신의 과오와 잘못과 불화를 다 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딱한 사람. - P99

나는 그의 누이가 클라이스트를 용서했을 것 같지 않다. 죽음으로써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사람을, 더군다나 자신을 사랑하는 게 분명한 그 사람을, 용서할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나는 이 남자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상상할 수 없다. 그게 클라이스트라서가아니라 모든 사람의 외로움이라는 게 그렇다.
상상할 수 있으나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상상할 수밖에 없다.
죽은 지 100년 후 비로소 묘비가 놓였다고 한다. 클라이스트 가문에서 세웠다. 그리고 다시 100년 후 클라이스트의 묘비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어떤 일로 훼손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렇다. 묘비가 복원된 건 2011년, 그가 죽은 날인 11월 21일이었다. - P99

두 번 보내던 해에비스마르크에게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을 상표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직접 답장을 보내 허락했고, 이 절인 청어 요리가 비스마르크 청어가 되었던 것.
비스마르크 마케팅의 승리다. 비스마르크라는 동명의 이름을 가진 빵과 비스마르크 피자도 아마 이런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독일에서가장 즐겨 마시던 맥주인 라드베거는 ‘비스마르크가 즐겨 마시던 맥주라는 게 여전히 마케팅 포인트였다.
‘비스마르크 청어‘ ‘비스마르크 청어‘ ‘비스마르크의 청어‘ 이런 검색어를 넣어 검색하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청어』라는 책도 있다. 프랑스 정치가 랑 뤼크 멜랑숑이 쓴 독일 비판서라고 하니 이 제목이 어떤 내용을 상징하는지 알 것 같다.
비스마르크라는 이 강력한 상징! - P103

그러면, 글을 쓰지 못한다. 글을 쓰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고, 기분이 좋지 않으므로 글을 여전히 못 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분이 계속해서 좋지 않아지는 그런 순환 반복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면,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써야 한다. 애쓰더라도 잘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필사적이 되고 싶지 않고, 애쓰지 않고 싶기 때문에 나는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내가 얼마나 감정적인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얼마나 쉽게 그 감정이 흔들릴 수 있는 나약한 사람인지도 잘알고 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의지나 통제에 따라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 감정을 살살 달래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게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엉망으로 살았다. 내 감정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다녔고, 책을 한 줄 읽지도 못했고, 산책을 하지도않았다. - P133

그 상태를 간신히, 간신히 벗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문장을 적었고, 또 한 문장을 적었고, 계속해서 썼다.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품었던 소망, 내가 하고 싶었던 유일한 일인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계속쓸 수 있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나로서는 난생처음이었고, 그전까지운동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정말 그렇다)하는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다.
누가 알려준 게 아니다. 매일같이 글을 쓰다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고, 알게 되었으니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살아온 시간에 대한 반성과 - P133

반동의 일환으로써,
그래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내 감정에 아부하면서 ‘나 좀 잘 봐줘, 제발, 응? 거의 이런 자세라고도 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제대로 된 글을. 마음을 움직이거나 하다못해 마음을 건드리는.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글을 쓸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제력과 규칙과 질서가 필요하고, 나는 내가 그렇게 지속적으로 단조롭게 살아야만 평생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 P134

내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던 작가 중의 하나가 토마스 만이다. 뤼벡은토마스만이 태어나 자랄 때까지 살았던 곳이고, 토마스 만의 소설에는 뤼벡으로 추정되는 곳이 많이도 나온다. 그러니 나로서는 뤼벡에 가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뮌헨과 프라하에 가보라는 말을 들을수록 반동 심리에선지 뤼벡에 가고 싶어졌다. 한 군데 더 가고 싶은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드레스덴이었고, 왜 그랬을까? 그 끌림을 단 몇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정리하자면 뭐 이런 거였다. 뤼벡> 토마스만, 드레스덴 > 파괴된 바로크.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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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그라, 파테, 추어탕(추어를 간 것에 한해)
...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재료 집약적이고 빡빡하거나 걸쭉한 종류의 식감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어린 시절 내가엄마한테 요구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제발 눌러 담지 좀 마." 밥도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눌러 담아 밀도가 빽빽해진 걸 보면 식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던 거다.
베를린의 음식 역시 빵만큼이나 엄청난 실용성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엄청나게 큰 접시에 엄청난 양, 그리고 엄청난 밀도의 음식이 나온다. 접시에는 여백이 없다. 음식에는 공기가 없고, 색깔은 한가지 톤이고.
사람으로 치자면 무뚝뚝하고 거대한 느낌의 음식이다. 그것을 앞에두고 나는 먹기 전부터 기가 질리고 말았던 것이다.
‘무섭다‘ 혹은 ‘두렵다‘의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누가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면 독일 식당에는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기가 통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 나는 베를린의 베트남 식당에 가곤했다. - P63

그건 내가 먹어본 두번째로 맛있는 쌀국수였다. 가장 맛있게 먹었던쌀국수는 파리 생마르탱 운하 근처의 미로처럼 생긴 골목에 있던 집의것이었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하도 좁아 모르는 사람과 등이 닿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게, 그래서 모르는 사람과 말을주고받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분위기, 불타버린 가게를 그대로 두었던 쌀국숫집이 있던 골목, 그 동네의 분위기도.
미스터 하이의 쌀국수에 내가 감탄하자 I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바로 참된 맛이에요."
‘참된 맛‘, 베를린에서 I와 대화를 하는 동안 내가 내내 듣게 될 표현이었다. ‘MSG 같은 조미료나 인스턴트 재료를 지양하고 정성껏 맛을 낸것‘을 I는 ‘참된 맛‘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내가 한 번인가 갔던 달렘도르프역 앞의 베트남 음식을 파는 임비스 같은 데는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다시 말했다. 거기는 ‘참된 맛‘과 거리가 멀다는 거다. - P67

베를린에 있는 동안 내가 의식했던 사람은 릴케였다. 내가 산책로로임의 지정한 루트 중 하나에 (내가 살던 집에서 1킬로미터쯤 되는 거리) 그가 살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 살로메와 살던 집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루와 그녀의 남편 칼 안드레아스의 집. 릴케는 이 집에 얹혀살았다. 릴케는 부부가 살던 집마당에 헛간 같은 수준의 가건물을 지어 더부살이를 했다고 들었다(이분도 참 대단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야 어쨌든 지금 이 집 벽에는 ‘릴케가 살았던 집‘이라는 표식만 있다. 루살로메나 그녀의 남편 칼 안드레아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나는 이 산책 루트로 자주 산책을 했고, 그러다보니 이 ‘릴케의 집‘을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릴케와 루 살로메와 그들의 인생 족적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에 릴케가 살았던 것은 1898년부터 1900년까지 2년 동안이었다(이 집 벽에 쓰여 있다). 이 사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떤 필요를 느끼곤 했다. 어떤 질서도 없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던 단편적인 사실을 연대기별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의 생애에 대한 글들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 P78

1900년, (홧김에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클라라 베스트호프와의 사이에서 릴케는 딸을 얻는다. 이 셋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1902년 이후로 셋은 본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혼인 관계는 유지한다(이혼하려면 경제적 문제와 행정적 문제가 복잡했다고 한다). 릴케는 루 말고도 여러 여자와 이런저런 관계들을 맺는다. 릴케가 죽은 후, 루 살로메말고도 피아니스트, 출판업자, 화가 등이 릴케 회고록을 썼다. 릴케의 전기 작가인 볼프강 레프만은 릴케의 이 여자관계에 대해 이런 분류를 하고 있다. 항성과 혜성.
루 살로메 같은 인생의 여인은 항성이고, 잠깐 잠깐 스쳐지나간 여자들은 혜성이다. 천체에서 위치를 바꾸지 않는 별인 항성과 밝게 타오르다 소멸해버리는 별인 혜성.
재미있는 분류다. 그리고 유용하다. 이 ‘항성‘과 ‘혜성‘이라는 체제를적용해보면 폴리아모리를 이해할 수 있는 거다.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없는 사람들을 광대한 천체를 가진 이들은 여러 항성과 여러 혜성을 동시에 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항성이 되기도
하고 혜성이 되기도 한다. 내게 항성이었던 사람은 누군가에는 혜성이 되기도 할 것이고.
억울할 것도 없고 으스댈 것도 없는 것이다.
아, 인생이란.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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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1979년생.
2012년 소설가가 되었다.
2015년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와 장편소설 「거짓말」을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 여행은 더. 그러다 2007년 분주하지 않은 방식으로첫번째 외국 여행을 했다. 뮌스터, 카셀, 뒤셀도르프, 베니스에머물렀다. 2011년 파리에 스튜디오를 빌려 한 달을 살면서 ‘사는 여행‘에 눈을 떴다. 2016년 석 달을 베를린에 살았다.

7월 1일, 나는 인천에서 에어프랑스를 타고 샤를 드골로 가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 비행기였고, 열 시간 후쯤 샤를 드골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시간 후쯤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렇다. 내 최종 목적지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으로 가는 항공권을 알아보기 전까지 나는 한국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수도이고, 또 글로벌 아트 신의 주요 영토(?)이고 등등.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글로벌 아트 신‘이 창출해내는 수요라고 해봤자 인기있는 관광지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하잘것없을까 싶지만.....
대한항공을 타고 가기로 하고 해당 사이트에 접속을 했는데, 첫번째 난관, ‘베를린‘이라고 목적지를 입력하니 쇠네펠트와 테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쇠네펠트보다는 테겔이 큰 공항인 것 같아 테젤을 선택. 그다음에는 어느 도시를 경유해서 갈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베 - P7

틀린에 가기 위해서는 파리나 런던, 모스크바, 비엔나, 프랑크푸르트, 뮌헨, 암스테르담, 헬싱키, 두바이 등을 거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 역시 베를린행 항공권을 예약하다 알았다.
잠시 머물다 가기에 어떤 도시가 가장 이상적일까? 아니면 며칠 머물기에 적당한 도시는 어디일까? 둘 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가장 이상적‘ 이라는 건 사람에 따라 너무나 다를 것이며, ‘적당한‘이라는 형용사 역시부적절하다. 5년 전 나는 ‘그런‘ 도시로 ‘모스크바‘를 선택한 적이 있다.
원래는 모스크바에서 3일인가 스톱오버를 하려고 했었다. ‘스톱‘이면서 ‘오버‘다.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의 어느 곳에서 잠시 머물기, 단기 체류. 그 ‘스톱오버‘라는 개념을 그때 처음 알았는데 그게 이상하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스톱‘이면서 ‘스톱‘으로 있지 못하는 그 상태가, 그 불완전함이, 그 약간의 구속과 자유가 같이 있는 상태가. - P8

나는 파리에서 한 달을 머물 예정이었고, 내가 자발적으로(그리고 독립적으로) 선택한 거의 첫 여행이었다. 경비가 충분하지 않았고(아니, 빚을 낸 참이었다. 항공권에서부터 숙소 비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행 경비를그렇게 충당하기로 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그래서 파리행 직항을 타지 않고 다른 도시를 경유하기로 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3일을 보내기로하고 문제의 ‘스톱오버‘라는 개념을 활용하기로 했던 것인데,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언어 문제. 러시아에서는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말을 들었고, 알파벳이 아닌 키릴문자로 표기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모스크바 스톱오버‘를 ‘모스크바 환승‘으로 바꿨다. 그러니까 단기간 체류가 아니라 단시간 체류. - P8

결과적으로 너무 잘한 일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의 직원들은 내가 세상에서 만나본 사람들 중 손에 꼽을 만하게 불친절했다. 어떤 악의가 있다고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 여권을 펴는 것이나 항공권을 확인하는것조차 귀찮아했고, 다소 신경질을 부렸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게 또웃겼던 것이 나한테 부리는 신경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신경질의 대상이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모스크바 공항인지, 아니면 모스크바라는 그 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단단히 삐뚤어져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그런 삐뚤어짐을 귀여워해줄 수도 있지만그때는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고,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잘못될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없었다. - P9

모스크바 공항은 황량했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여기서 나 하나쯤이야 잘못되는 건 아주 간단한 일로 보였다. 모종의 위험한 기운. 그런게 흐르고 있었다. 2011년 9월의 모스크바 공항에는 이게 나의 기우가아니었던게 실제로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귀찮아 하면서 동시에 신경질을 부리던 한 직원이 탑승 게이트를 잘못 알려줘서. 그래도 길게 늘어진 초록색 톤의 바카디 광고는 무척이나 근사했다. 제대로 된 탑승 게이트를 찾아 헤매던 중 멈춰서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으니까.
당시는 기분이 꽤나 좋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게 웃긴다. 모스크바 공항의 그 이상한 황량함과 사람들의 기괴한 불친절이. 그래서 그때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아는, 혹은 알게 된 사실을 그 모스크바적 상황에 덧붙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핀란드에 가면 ‘클럽 모스크바‘라고 하는 카페(운 - P9

10영자는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구현된 분위기가 내가 보았던 그 ‘러시아적 분위기‘일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든가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간파리에서 한 달을 ‘살았다‘. 6구와7구 사이에 있는 동네에 스튜디오형 숙소를 빌려서 장을 봐서 요리 비슷한 것을 해먹고, 꽃을 사서 꽂고, 빨래도 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가끔은 향을 피우거나 초를 켰다. 그리고 미슐랭에서 만든 세 종의 지도를 용도와 크기별로 사서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내가 좋아했던 스폿 몇 군데를 반복해서, 프레지덩 윌슨에서 이에나로 이어지는 거리, 들라크루아아뜰리에가 있는 광장, 파시의 작은 백화점, 자드킨 뮤지엄이 있는 거리, 오스카 와일드가 죽기 전에 묵었던 삼류 호텔(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언저리, 몽소 공원 근처, 다니엘 뷔랑의 설치가 있는 팔레 루아얄 뜰, 가라테를 연마하는 중년 남자가 있는 튈르리 공원의 그곳,
세르주 갱스부르 집이 있는 거리, 센강변의 볼테르 거리, 갈리마르 출판사앞 100년 된 굴집...... 이런 식으로,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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