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벡이라는 도시로 진입하고 있다고 인지한 순간 느껴지던 그 떨림을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철골과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뤼벡 중앙역을본 순간부터였는지, 아님 역밖으로 나와 그 오래된 도시를 바라보던 순간, 그러니까 갈색 벽돌과 산화되어 에메랄드색으로 변해버린 뾰족한 박공지붕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봤을 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걷기가 어려웠다. 눈을 뗄 수 없었고, 발을 뗄 수 없어서, 심박수 증가, 심장 통증, 무릎 풀림, 현기증 같은 증상이 동반되었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게 ‘스탕달 신드롬‘인가 싶다. 그림이나 책을 보고 그랬던 적은 있지만 도시를 보고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즉각적이고 강렬한 육체적 반응은. 동행인 C선생님-더군다나 독문학자-께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흥분을 감출 만한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래서 호들갑을 떨었고, 바로 그게 뤼벡에서의 나였다. 첫 코스라고 할 만한 곳은 홀스테인 성문이었는데, 기이했다. 육중하고 견고하고 터프한가 싶었는데, 다가갈수록 우아하고 섬려하고 연약하게 보였다. 이상해서 계속 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C선생님은 물었다. "저거 기운 건가요?" "글쎄요." "착시일까요?" "글쎄요." (‘글쎄‘ 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것은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 - P136
파이프오르간과 바흐, 여기에는 이 교회의 웅장함에 걸맞은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한때 이곳의 연주자가 바흐였다. 유명해지기 이전, 젊은날의 바흐, 1705년, 성마리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북스테후데와이파이프오르간을 만나기 위해 바흐는 400킬로미터를 걸어와 뤼벡에 머무른다. 그리고 감격한 바흐는 늦게 돌아가 직장에서 잘린다. 한때 직장에 다니기 위해 매일같이 120킬로미터를 운전한 적이 있던나는 귀환하던 바흐의 400킬로미터에 대해 생각했다. 잘리기 위해 400킬로미터를 걸어갔던 무명의 바흐에 대해, 격정과 걱정이 뒤섞였을 그의 귀환길에 대해. 그리고 드디어 토마스 만의 생가에 만든 토마스 만 기념관에 갔다. 토마스 만의 형인 하인리히 만의 기념관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만에 대해서는 거의 읽은 적이 없는 내게 이곳은 토마스 만 기념관일 뿐이었다. - P138
그러니까 ‘부덴브로크=뤼벡‘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기념관에는 소설의 배경을 현실의 뤼벡에 대입해놓은 관광지도 같은 것이있다. 네 번쯤 읽은 이 소설을 다시 읽고, 다시 뤼벡에 와 이 지도를 들고 뤼벡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품위 있고 훌륭하지만, 아주 훌륭하지만 진부한 도시‘라고 토마스만이 말했던 이 도시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품위 있지만은 않고 진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반증이라고생각한다. 자기가 나고 자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뜯어먹으며 소설을 썼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고, 뤼벡을 걸으며, 내가 소설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것도 토마스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 P140
늦은 점심을 했던 식당도 나의 뤼벡 애호증을 강화시키는 데 한몫을했다. 우리가 옛 선원조합의 건물이었다는 그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시간의 먼지와 습기, 소금 냄새 같은 것들에 마음을 뺏겼고, 이름도 낯선 찬더zander라는 생선을 먹고는 기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손으로 가슴을 눌러야 했다. 그때 비단 조끼를 입은 노인에 가까운 남자가 긴 막대기를 들고 등장하더니 촛대가 20개쯤 달린 샹들리에에 일일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우리의 얼굴은 환해졌고, 그 남자는 촛불에 불을붙이는 중간 중간 우리와 미소를 교환했다. 나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던그 식당에서 우리만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준다는 게, 그리고 성가실 수 있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그 식당의 운영 모토가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남자가 촛불을 밝히는 긴 막대는 보면 볼수록 밤 딸 때 쓰던 막대와 비슷해 보였다. 가시 돋힌 밤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순간이 기억났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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