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아그라, 파테, 추어탕(추어를 간 것에 한해) ...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재료 집약적이고 빡빡하거나 걸쭉한 종류의 식감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던 어린 시절 내가엄마한테 요구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제발 눌러 담지 좀 마." 밥도그렇고 반찬도 그렇고 눌러 담아 밀도가 빽빽해진 걸 보면 식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던 거다. 베를린의 음식 역시 빵만큼이나 엄청난 실용성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엄청나게 큰 접시에 엄청난 양, 그리고 엄청난 밀도의 음식이 나온다. 접시에는 여백이 없다. 음식에는 공기가 없고, 색깔은 한가지 톤이고. 사람으로 치자면 무뚝뚝하고 거대한 느낌의 음식이다. 그것을 앞에두고 나는 먹기 전부터 기가 질리고 말았던 것이다. ‘무섭다‘ 혹은 ‘두렵다‘의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누가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라면 독일 식당에는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기가 통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 나는 베를린의 베트남 식당에 가곤했다. - P63
그건 내가 먹어본 두번째로 맛있는 쌀국수였다. 가장 맛있게 먹었던쌀국수는 파리 생마르탱 운하 근처의 미로처럼 생긴 골목에 있던 집의것이었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하도 좁아 모르는 사람과 등이 닿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게, 그래서 모르는 사람과 말을주고받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분위기, 불타버린 가게를 그대로 두었던 쌀국숫집이 있던 골목, 그 동네의 분위기도. 미스터 하이의 쌀국수에 내가 감탄하자 I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바로 참된 맛이에요." ‘참된 맛‘, 베를린에서 I와 대화를 하는 동안 내가 내내 듣게 될 표현이었다. ‘MSG 같은 조미료나 인스턴트 재료를 지양하고 정성껏 맛을 낸것‘을 I는 ‘참된 맛‘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내가 한 번인가 갔던 달렘도르프역 앞의 베트남 음식을 파는 임비스 같은 데는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다시 말했다. 거기는 ‘참된 맛‘과 거리가 멀다는 거다. - P67
베를린에 있는 동안 내가 의식했던 사람은 릴케였다. 내가 산책로로임의 지정한 루트 중 하나에 (내가 살던 집에서 1킬로미터쯤 되는 거리) 그가 살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 살로메와 살던 집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루와 그녀의 남편 칼 안드레아스의 집. 릴케는 이 집에 얹혀살았다. 릴케는 부부가 살던 집마당에 헛간 같은 수준의 가건물을 지어 더부살이를 했다고 들었다(이분도 참 대단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야 어쨌든 지금 이 집 벽에는 ‘릴케가 살았던 집‘이라는 표식만 있다. 루살로메나 그녀의 남편 칼 안드레아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나는 이 산책 루트로 자주 산책을 했고, 그러다보니 이 ‘릴케의 집‘을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릴케와 루 살로메와 그들의 인생 족적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에 릴케가 살았던 것은 1898년부터 1900년까지 2년 동안이었다(이 집 벽에 쓰여 있다). 이 사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떤 필요를 느끼곤 했다. 어떤 질서도 없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던 단편적인 사실을 연대기별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의 생애에 대한 글들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 P78
1900년, (홧김에 결혼한 것으로 보이는) 클라라 베스트호프와의 사이에서 릴케는 딸을 얻는다. 이 셋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1902년 이후로 셋은 본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혼인 관계는 유지한다(이혼하려면 경제적 문제와 행정적 문제가 복잡했다고 한다). 릴케는 루 말고도 여러 여자와 이런저런 관계들을 맺는다. 릴케가 죽은 후, 루 살로메말고도 피아니스트, 출판업자, 화가 등이 릴케 회고록을 썼다. 릴케의 전기 작가인 볼프강 레프만은 릴케의 이 여자관계에 대해 이런 분류를 하고 있다. 항성과 혜성. 루 살로메 같은 인생의 여인은 항성이고, 잠깐 잠깐 스쳐지나간 여자들은 혜성이다. 천체에서 위치를 바꾸지 않는 별인 항성과 밝게 타오르다 소멸해버리는 별인 혜성. 재미있는 분류다. 그리고 유용하다. 이 ‘항성‘과 ‘혜성‘이라는 체제를적용해보면 폴리아모리를 이해할 수 있는 거다.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없는 사람들을 광대한 천체를 가진 이들은 여러 항성과 여러 혜성을 동시에 품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항성이 되기도 하고 혜성이 되기도 한다. 내게 항성이었던 사람은 누군가에는 혜성이 되기도 할 것이고. 억울할 것도 없고 으스댈 것도 없는 것이다. 아, 인생이란.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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