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한 손 창비시선 297
고영민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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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고영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집 [공손한 손] 중에서

 

 

 

   봄이다. 마른 흙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삐죽빼죽한 새싹들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상 한 귀퉁이를 밀고 나오고 누가 보든 말든 스스로 피어나는 꽃들은 이어달리기를 시작하는 봄, 어느 곳으로라도 바라보기 좋은 계절 봄이다. 벚꽃들이 막 피기 시작하는 꽃구름 동산을 걸어 다른 세계, 내가 아직 갈아엎기 전인 '노랗게 마른' 흙의 세계로 들어간다.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가질 나의 새로운 직장, 개나리색 빌딩으로 출근한 지 딱 40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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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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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봄으로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맨발이다 일순간 일제히 모든 시선이 여자가 끌고 온 여행가방의 테두리처럼 상처투성이인 그 발에 주목한다 사위는 적막을 껴입은 듯 고요하다 여행가방처럼 먼 길을 끌려다닌 여자의 그림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먼저 쓰러진다 누가 누구의 배후인가 눈물이 고인다 문제를 풀기 위해선 문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물도 그와 같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된 다는 것

 

   그 봄으로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가 등장한다 그 봄의 입구에는 19금(禁) 표시가 붙어 있다 누가 누구를 금지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봄이 이어진다 봄을 사용하기 위해선 봄 안으로 입장해야 한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

 

 

 

 

   봄밤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

 

  노천카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봄이고 밤이다

  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

 

 

 

 

  봄봄

 

 

  그 봄으로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망할 놈의 봄비

  망할 놈의 제비

 

  그 봄에 한 여자가 아프다

 

  봄이 두개라면?

  봄이 두부라면?

 

  그 봄에 한 여자가 웃는다

 

  자신이 끌고 다닌 바퀴 달린 가방처럼

  테두리가 사라지고 있는 영혼처럼

 

  다시 테두리로 되풀이되는

  다시 테두리만 되풀이되는

 

 

                       안현미 시집[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중에서

 

 

 

  안현미 시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에는 세 편의 봄이 있다. 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계절이 뚜렷한데 그중 봄에 관한 시편이 세 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목에는 세 편이지만 내용 중에는 하나 더 있다.(꼭 정확하지는 않다.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라는 김수영시인의 『달나라의 장난』에서 차용해온 긴 제목의 시는 이렇다.
 
 

 

  봄이고 밤이다. 목련꽃이 촛불처럼 피는 봄밤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장벽 설치, 중국의 티베트 독립 유혈진압 사태 등 지구 곳곳이 아픈 밤이다.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 이루어내야 할 국가의 새로운 장관은 색깔이 다른 사람들은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호통치는 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최첨단에서 꽃을 피우는 밤이다. 그리하여 절망할 수 없는 밤이다. 온몸으로 , 온몸으로, 힘을 주라, 힘을 주라, 꾹꾹 눌러쓰는 봄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 아아 봄은 갔다. 그러나 다시 봄은 온다. 와야만 한다. 그리하여 절망할 수 없는 봄이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온다. 분단과 분쟁의 이 미친 비바람 앞에서도 싸우라, 싸우라, 목련이여 설움이여! 나 자신의 절망이라는 검은 짐승과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 목련이여 설움이여!

 

 

 

 

 

 

   '콩콩두부家' 시절 가게 앞에 목련 두 그루가 있었다. 나무를 본 순간부터 설레었다. 끼니도 거르던 가난한 시절 수원 성곽길을 걸으면 집집마다 꽃등이 내걸리듯 목련이 피어있는 생김새 비슷비슷한 집들이 부러웠다. 혹시라도 나중에 나도 내 집을 갖는다면 목련 한 그루 꼭 심으리라 다짐하던 그 목련이 두 그루라니. 뒷마당 가득한 벚나무보다 두 그루 목련이 우리들 남은 생을 꽃등으로 우뚝 걸릴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역시나 목련은 꽃을 장하게 피워냈다. 저절로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촛불처럼 피는 봄밤이다'라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목련을 보면 여전히 그 시절이 오롯이 떠오른다. 긴 생에서 삼 년에 불과한 시간이었는데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시간이었고 목련이다. 목련이 피어나길 간절하게 기다리던 그 시절 자주 읽던 안현미 시인을 다시 읽었다. 새롭다. 나이를 먹고 생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는 건 시를 읽는 시야도 바뀌는 건가 싶다. 그때는 목련이나 봄에 마음을 뺏겼다면 지금은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등장하는 한 여자의 맨발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가방의 바퀴처럼 테두리가 닳아빠진 여자의 맨발이 이미지로 살아나는 것이다. 봄과 여자는 매번 같이 등장하는데 화들짝 피어나는 봄 앞에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여자의 모습이 중첩된다. 시인은 집집마다 등을 켜 놓은 듯 환해지는 목련에도 소멸해가는 아픈 상처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시인의 봄은 찬란한 만큼 아팠던 것이다. 그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을 시인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지구의 봄을 완성했다.

  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냥 살아지니까 살아온 시간이었단 생각이 든다.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쌓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은 사람의 준말일 수도 있다는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비가 내린다. '망할 놈의 봄비'는 아니다. 건조한 세상, 먼지 가득한 세상을 씻어내는 고마운 봄비다. 꽃은 저 홀로 피어나며 자리를 지키고 봄은 속절없이 흘러갈 것이다.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 인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다시 테두리로 되풀이되는' 삶을 지켜보는 시선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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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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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여자 --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몽양이 고명자에게

   이건 너무 늦은 충고인 것 같네만 60년 살아본 경험에서 나오는 얘길세.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 그중에 어떤 사람은 지나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무르네. 한때 자기 몸처럼 소중했던 사람이 짧은 인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금석처럼 굳세고 단단할 것 같은 관계가 어이없이 깨지기도 하네. 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의 인생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니까. 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인데 남이 어찌할 수 있겠나. 억지로 어찌하려다 보면 집착이 되고 그게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도둑질해가버린다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게. p661

   1945년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스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 지도자가 누군인지 헷갈렸다. 미 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 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할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 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P672

   이월부터 새롭게 출근하는 직장 근처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해서 걸려있는 교회가 있다. 처음에는 무슨 외교공관이거나 군부대 사무실이겠거니 지나쳤다. 요란한 극우 표현의 현수막들에 덕분에 교회임을 알게 되었는데 출퇴근마다 앞을 지나면서 [세 여자]를 생각했다. 우리 역사가 잃어버린 세 여자의 삶과, 몽양에 대해, 우리의 근대사에 대해 무지하고 몽매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의 덫에 갇혀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어 야만 할까? 봄 햇살 눈부신 3월 19일이다. 이곳에서 한 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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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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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묽어지는 나

  이상하다

  거품이 일지 않는다

  어제는 팔팔했는데

  괜히 기진맥진한 오늘의 나

  거품이, 거품이 일지 않는다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시인의 말

  매사 내가 고마운 줄 모르고 미안한 줄 모르며

  살아왔나 보다. 언제부턴가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렇게 됐다.

  인생 총량의 법칙?

  그렇다면 앞으로는 시를 끝내주게 쓰는 날이 남은 거지!

                2016년 가을

                        황인숙

  시집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중에서

 

 

 

 

  버드나무에도 물이 오르고, 산책길에 만나는 조팝나무도 아기 이파리들이 편지를 쓰고

  아파트 화단의 라일락도 주먹 쥔 손을 내미는데

  미세먼지 자욱한 공기질처럼

  무겁고 낮아지는 머릿속

  거품이 일지 않는다.

  묽어지고 있는 나

  무기력하게

  게으르게

  널브러진 휴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소진돼버리는 생의 비누의 거품'

  서늘하다.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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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8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이란 부족의 언어와 사고는 부족한 제 사유를 확장시켜준답니다.
저는 짧은 출근 버스에서 시 한 편이 주는 위로가 좋더군요^^
 
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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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카메라의 파노라마와 와이드앵글이 있다. 우선 외롭고 척박한 계곡이 있다. 틀림없이 햇살이 머리통 위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쬐는 곳일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 일하려면 꼭 모자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수리가 나는 하늘 아래로 서늘한 오두막이 있고 두 남자와 개 두 마리가 있다. 독수리는 영감을 주지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개는 밖에 잘 있다. 시간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이제 일을 하러 가거나 낮잠을 자러 가면 된다. 그런데 안토닌은 가지 않고 서서 꼬박 10분간을 망설인다. 10분이 중요하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10분은 이제 막 사형대에 올라 총살을 기다리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황제의 칙사가 뛰어와서 총살이 취소되었음을 알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10분간 도스토예프스키는 임사 체험을 했다. 그렇다면 10분 동안 안토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돈을 지불하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의 손을 움직여 돈을 꺼내게 만들었을까? 그냥 밥 한 끼 나눠 먹었을 뿐인데. 토니오 입장에선 돈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토닌은 이런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다고. 어쩌면 안토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토닌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 울지? 그제야 나는 안토닌이 두 세트의 나이프와 유리잔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식후의 포도주와 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느끼게 된다. 눈물은 외로운 계곡에 외롭게 사는 소몰이꾼이라는 삶의 '조건'이 이끌어낸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토니오도 나와 같은 것을 보았다. 토니오도 안토닌이 살아온 '시간'과 그의 삶의 '조건'을 봤다. 혼자서 대충 때운 수없이 많은 식사를 봤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던 많은 시간을 봤다. 그의 삶이 그에게 준 쓰라림을 봤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노동과 외로움을 깊이 존중했다. 토니오도 울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였다. 고독한 노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이 준 쓰라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함께 있는 것의 온기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냥 그렇게 있었던 순간이다. 순수한 순간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순간이다. 안토닌에게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서로 좋은 순간이다. 두 사람은 안았고 나는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의 승화 같은 것을 함께 느낀다. 오두막에선 이 모든 일이 말없이 진행되었다. "자네 애쓰고 살았네" 같은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두막의 침묵 속에서는 수많은 말이 오갔다. 가장 좋은 대화는 말없이도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대화고, 라디오로 치면 말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와 음색, 침묵을 알아듣는 것과 같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헤아리고 상상한다. 연결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고독한 이유다. 우리는 침묵 속의 상상을 팽개쳤다. 타인을 빠른 속도로 규정하거나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털어낼 존재처럼.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그는 어쩌면 왼손잡이일 수도 있다)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오로지 안토닌의 삶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다. 고독했지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지상에서 그 몸짓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안토닌. 우리는 안토닌을 영원히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중에서 『아홉째 날, 좋아하는 이야기』부분 p 253~255

          

 

      이 이야기는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중에서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의 부분을 옮기고 덧붙여둔 글이다. '존 버거'의 글은 오래전에 읽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책인데 '알라딘'에서 구입할 때 할인이 1도 없어서 의아했던 책이다. '글로 쓴 사진'이란 제목이 무얼 뜻하는지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잊었다. '정혜윤'을 통해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시 파노라마와 와이드 앵글에 잡힌 사진을 본다. 그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10분을 카메라를 통해 응시한다.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과 토니오를. 그리고 그전의 안토닌과 토니오의 시간을, 또 그전의 두 사람의 시간을, 그 전전의, 전 전 전의 시간을 생각한다. 어떤 일이 생기기까지 거기에 축적된 시간의 역사를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정혜윤은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냥 죽어버린 1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 그 사람의 주변, 그 사람의 세계가 함께 죽어가는 것이라고, 한 사람의 역사로서 호명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들을 읽는다. 그래서 이 책을 쉽게 읽을 수가 없다. 하루하루의 날들을 하나씩 떼어서 거기에 나오는 책들의 세계에 다시 발을 디디면서 계단을 오르듯 읽게 된다. 이 아홉째 날의 챕터는 '사랑하는 00과 함께 살기'다. 그리고 인용한 글은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인데 그 개들은 소를 치며 사는 안토닌의 개들이다. 안토닌의 24시간을 함께 하는 개들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안토닌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저녁식사와 안토닌의 침묵 속에 담긴 무수한 언어들을 듣는다. 개들의 시선을 그저 받아 적은 것처럼 존 버거는 담아냈다. 그렇게 담아내는 작가와 그 시선을 풀어쓰는 작가 사이에서 글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바라본다. 원래 그랬던 건지 그 옷을 입혀서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놀랍다.

     이 아홉째 날의 마지막 이야기는 경북 칠곡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대구에 사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 장덕준씨다. 그는 하루 5만 보를 걸었다 한다. 일을 하면서 5만 보라~! 세상에, 그 걸음수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루 열세 시간 달려 다니면서 음식을 날라도 2만 몇 천보다. 그 걸음에도 절인 배추처럼 녹초가 되곤 하는데 물류센터에서 5만 보의 걸음은 충분히 가늠된다. 산길을 걷고, 들길을 걷는 5만 보와는 차원이 다른 살인 무기로 변하는 걸음이다. 그런 걸음들이 계속된다면 몸의 기능들은 지쳐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착했던, 부모님께는 친구 같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에게 애틋한 오빠였던 그도 한 가지 사안만큼은 아버지와 자주 싸우곤 했다 한다. 세월호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죽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돈 받고 합의하고 말지 왜 저렇게 하느냐고 유족들을 비난했다.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내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죽어버렸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그 질문,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장덕준씨가 어떻게 일하고, 어쩌다 죽음에 이르렀는지 동료들의 증언과 도움이 필요했지만 밥줄이 달린 동료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희망은 다른 데서 왔다. 같이 아파하는 시만들과 아버지와 함께 세월호를 비난했던 아버지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국회에 가고 쿠팡에 진실을 요구하는 길을 함께했다.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모들은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편안한 숨이다. 그들에게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드물 것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테니까.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 - 피난처뿐이다. p264

 

      이 부분을 읽는데 마음이 미어진다. 더 이상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을 쉴 수 없는 부모님들의 사진이 파노라마로 보인다. 아직도 진행형인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사진도 덩달아 주말의 명화의 영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랑은 같이 싸워주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엔딩 자막으로 올라간다. 사랑한다면 같이 무기를 들고 싸워주는 것,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겠다. 여운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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