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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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 길

              이산하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푹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비로소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그와 작별했다. 그는 윙크를 했고, 손하트를 날렸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최고라고 표시한 후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런 과한 애정공세를 받아도 되나, 당혹할법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사랑을 가득 담은 눈웃음을 날려주고 한술 더 떠 하이파이브에 악수와 깔깔로 마무리한다. 한 달 전의 그는 가끔 웃어주는 것과 악수가 전부였는데 한 달이 지나니 저만큼 좋아졌는데 이제 헤어진다. 묵묵한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큼직한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눌한 빠이빠이를 한다. 며칠 전 《악의 평범성》을 읽다가 마침 재활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가장 먼 길]을 읽어 주었다.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는데 그저 순한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울컥한다. 이 시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유다. 그는 밥을 먹지 못한다. 단지 영양을 취할 뿐이다. 콧줄로 경관식을 하는 그에게는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이다. '그는 언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을까? ' 이곳 재활 병원으로 온 지가 일 년도 넘었으니 그 과거가 어디쯤이었을지를 짐작조차 못하겠다. 하루 중 스무 시간 가까이 누워만 지내는 그가 머물고 있는 세계는 어느 곳일까.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 딛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왔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밝은 표정으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선배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연하게 느낀다. 왼손을 움직여 저런 동작들을 따라 한다. 점차 할 수 있는 동작들이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그는 말도 못 하고 경관식에 심한 편마비로 누워만 있기엔 너무나 젊다. 이제 육십을 갓 지났다.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와 재활치료와 운동의 병행이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물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생겨버린 일, 꾸준한 재활만이 답이다. 그에게 기적처럼 "숟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갈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밥에 진심인 편이다. 따뜻한 밥상이 주는 다정을 알고 그 밥 한 상이 차려지기까지의 노고를 안다. 그래서 오래 누군가에게 밥을 차려주는 일을 즐거이 했고 내 수고로움으로 배고픈 이가 잠시나마 행복해지기를 기원했다. 세상에 가치 없는 일이란 없지만 가치를 알아주기보다는 무시하는 이가 더 많은 듯해 보이는 그 일도, 지금의 이 일도 먹고사는 것과 관계된 그저 그런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알아주든 말든 내가 조금 힘들지라도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드시게 하는 일에 열심이다. 가장 근본적인 세 잘을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것.) 도와주려 애쓰고, 그것이 내 일이다. 나의 소명이다.

     스스로 뭐든 하려 하고, 인지도 멀쩡하고 편마비만 있을 뿐이어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힘들 게 없는 젊은 친구를 좋아해야 하는데 마땅찮게 여기는 것은 단지 밥을 깨작거리기 때문이다. 개인 사물함 가득한 간식거리를 즐기면서 쌀이 좋으니, 나쁘니, 맨날 똑같은 반찬이 번갈아 나와서 먹을 게 있니, 없니 하면서 매번 식사 때마다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그에게 대꾸 없이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챙겨주는 심사가 편치 않다. 그를 지적질 할 위치에 있지 못하지만 그에게 전해주는 식판 하나가 침상에 놓일 때까지의 과정을 안다.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과 동동거림이 담겨있다. 또한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배고파도 먹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다. 탄수화물의 문제가 지적되는 요즘이지만 밥은, 일차원적인 하나의 명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밥은 평등과 다정의 다른 이름이다. 밥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먹을 만큼만 감사히 먹자고 다짐한다.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안에도 온갖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귀한 한 톨의 쌀이 있고, 한 숟가락의 밥이 있다. 시집을 읽는데 우리의 근, 현대사를 통과하는 대하소설 열권을 읽는 묵직한 느낌은 나만 갖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보고 느끼는 건 누구나 같다.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인을 밟고 통과해온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이 시를 통해서 조금씩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다. 오로지 詩만이, 몸뚱이를 담보로 잡고 사는 사람만이 시인에게는 치료 약이었음을 알겠다.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의 표 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 이상의 부연은 부연일 뿐, 충분하다.

 

 

 

  산수유 씨앗

    전우익 선생의 휠체어를 밀며

 

  2003년의 뜨거운 여름

  전 선생이 사고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난 며칠 동안 그늘만 찾아다니며 휠체어를 밀었다.

  예전 봉화 청량사를 오를 때는 그의 등을 밀었다.

  선생은 질문이 곧 성찰에 이르는 길인 듯 줄곧 물었다.

  왜 한국에는 도연명 같은 혁명적인 시인이 없는가.

  왜 권정생 같은 동화작가가 다시 나오지 않는가.

  왜 쌀알 한 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가.

  왜 벼꽃이 피는 걸 개화라 하지 않고 '출수'라 부르는가.

  왜 포도나무는 자꾸 사막 멀리 뿌리를 뻗어가는가.

  왜 솔개는 바위에 부리를 부수고 발톱을 뽑아버리는가.

  왜 큰 것은 작은 것을 겸하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인간이 직립한 이후부터 비극이 생기는가.

   ……

 

  9년 전 세상을 떠난 선생의 질문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도 나오지만

  무슨 선거 때만 되면 노란 산수유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전 선생이 산수유 묘목을 밭에 심고 있는데

  이웃들이 그게 언제 커서 돈이 되겠느냐며 혀를 찼다.

  5년 후 심은 나무에서 노란 꽃이 몇 개 달리더니

  10년이 지나자 노란 숲으로 변해 향기가 마을에 진동했다.

  선생은 산수유 묘목을 가꿔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간혹 묘목 대신 씨앗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전 선생이 빙긋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씨앗과 묘목 중 어느 것을 받겠느냐고……

  나도 빙긋이 웃으며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토양이 너무 나빠 먼저 땅부터 완전히 갈아엎지 않으면

  아까운 산수유 씨앗만 버리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전 선생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뜨락의 그늘에 저녁 어스름이 깔린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자 모든 것들이 지워져간다.

  생사의 안팎이 이 한순간의 박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어제 씨앗이었던 저 나무들도 내일은 재로 변하리라.

  그 잿더미에서 쌀알 같은 벼꽃들이 피어나기도 하리라.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

  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자국을 남긴다.

 

            시집[악의 평범성]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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