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517
곽효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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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곽효환

   숲길도 물길도 끊어진 백두대간

   둥치마다 진초록 이끼를 두른

   늙은 나무들 아래에서

   더는 갈 수 없는 혹은

   길 이전의 길을 어림한다

   검룡소 황지 뜬봉샘 용소는

   강의 첫,

   길의 첫

   숲의 첫

   너의 첫

   나의 첫은

   어디서 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바람만 무심히 들고 나는

   어둡고 축축한 숲 묵밭에

   달맞이꽃 개망초꽃 어우러져

   꽃그늘 그득한데

   붉은 눈물 피다 만 것들의 첫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시집 [너는] 중에서

    유월의 첫날, 곽효환 시인의 첫을 읽는다. 첫! 이 익숙한 느낌이 뭐지 싶었는데, 허수경 시인의 『농담 한 송이』를 포스팅할 때 제목으로 썼던 첫이다. 시집의 첫 번째 시를 생각한 첫. 그래, 그런 첫도 있었다. 언제나 첫.

    "둥치마다 진초록 이끼를 두른/ 늙은 나무들 아래에서" 나무의 정령이 깃들어 있을 듯한 그런 원시림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여름 한라산에서 열대 우림을 만날 수 있다는 지인의 얘기에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내가 아침에 걸어온 숲길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반쯤 섞여있다. 유월의 숲길은 나무들의 왕성한 경쟁으로 고개를 들어야만 하늘을 볼 수 있다. 나무 사이가 너무 촘촘한 건 아닌가 잠깐 생각했다. 잦은 비 와, 아침 녘에 한차례 뿌리고 간 비 덕택에 나무들의 아랫도리는 젖어 있었다. 햇빛이 차단되는 물기 머금은 숲은 신령스럽다. "더는 갈 수 없는 혹은/ 길 이전의 길을 어림한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지점에서 발원지를 생각한다. 끝이다 싶은 곳에서 첫을. 나아가고 있을 때는 기억하지 않는 첫을. 반환점을 돌아가는 유월의 첫, "달맞이꽃 개망초꽃 어우러져/ 꽃그늘 그득한데/ 붉은 눈물 피다 만 것들의 첫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망연하다. 그 많은 첫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의 첫은 어디서 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유월을 살아봐야 한다. 그렇게 또 한 달이, 한 해가 끝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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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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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

                   김소연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길과

   교회의 문전성시와

   일요일과

   눈썰매와

 

   벚나무는 곧 버찌를 떨어뜨리겠지

   벌써 나는 침이 고이네

 

   거미처럼 골목에 앉아

   골목에 버려진 의자에 앉아

   출발도 없이

   도착도 없이

 

   벌거벗은 햇볕

 

             시집 [수학자의 아침]중에서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김소연시인 『그늘』의 첫 연, 저 구절은 울집 냉장고 문짝을 이 년이 지나도록 지키고 있다.

  왜 저 구절일까는 잊었다. 아마도 매일 걷는 길, 벚나무를 지켜보던 중이어서 와닿았으리라 짐작할 뿐.

  이제 그 길을 걸어 출· 퇴근하지 않는다. 아쉬워서, 그리워서 더욱 좋은 길이다. 가끔 걷고 싶을 때나, 다른 길을 걸었는데도 어쩐지 더 걷고 싶어질 때 일부러 찾아가는 길이다. 언제 어느 때 걸어도, 걷기 좋은 길을 집 근처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새삼 확인하고는 한다. 며칠 전 찾았을 때는 언덕엔 노란 금계국과 흰 개망초와 보랏빛 붓꽃들이 초록 초록한 풀들을 배경으로 하늘거리고 있어서 흡사 텔레토비 동산이거나 윈도 바탕화면 같았다. 자연스러운 것들이 어우러져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액자 속 풍경이다. 이 액자의 마법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풍경을 사계절은 물론, 원하는 어느 때나 마음껏 누리고 살 수 있는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 맞다.)

  벚나무 마루길에는 어느새 버찌 까맣게 떨어진 채 밟히고 있었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천 개의 눈으로 밟히는 버찌를 바라볼 벚나무 생각에 버찌를 밟지 않고 지나려고 잠깐 색시걸음을 걸었다. 그러나 그 숱한 버찌들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나무도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천 개의 눈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꽃이 아니었다면, 열매가 아니었다면 무슨 나무인 줄 모르는 나무들 많다. 벚나무를 모를 리 없고, 느티나무 모를 리 없지만 때죽나무, 쥐똥나무, 이팝나무, 층층나무쯤 되면 자신 없다. 올해 처음 알았다. 꽃만큼이나 예쁜 잎을 가진 라일락을. 새롭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게 꽃에 취하고 혹하는 사이가 지나고 나면 과실이 아닌 대부분의 나무들은 잊힌다. 감탄하며 보았던 문화유산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잊듯이. "골목에 버려진 의자에 앉아/ 출발도 없이/ 도착도 없이" 잊어버리고 다시 만나면 처음 보는 것처럼 감탄을 연발하리라. 나무는 내가 그러시거나 마시거나 제 할 일을 부지런히 할 테지.

  밤새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무섭게 내렸다. 거센 비를 견딘 나뭇잎들, 여린 꽃들이 아침이 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심한 풍경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저 천연덕스러움을 닮고 싶은 아침이다. 쥐똥나무 향기, 더욱 짙어졌다.

  내 생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천이십일년 오월이 가버린다.

  고마웠다. 쉰 일곱 번째의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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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발음하기
이임숙 지음 / 창조문예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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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이임숙

 

 

   푸르고 슬픈 기억이여 너를 놓아 줄 수가 없구나

   한때의 척박한 사랑을 옹졸한 고뇌를 누렇게 색이 바랜

   치사한 이율배반을 옆구리에 낀 채 잘도 살아왔구나

 

   빗살무늬토기처럼 흠집 많은 과거를 들추었더니

   오글거리는 열매들 말라서 비틀어진 열매들

   찰랑거린다 눈 밝은 세상을 차분차분 걸어오느라

   숨 한 번 제대로 쉰 적 없어도 불꽃으로 나부댈

   새싹 고스란 고스란 돋는다 이미 그렇게

 

                     시집[를 발음하기] 중에서

 

 

   작년, 작년, 작년 같은 작년들을 쉼 없이 흘려보낸 지금에서야 이 시집을 마주한 일주일이었다.

   지나온 세월의 너비가 처음 보던 남한강처럼 넓고 유장하다. 애써 감추려는 시인을 닮았다. 2006년, 이임숙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렇게 오른손 손가락만큼이나 뵈었을까, 함에도 "눈 밝은 세상을 차분차분 걸어"온 그 걸음 온전히 알 듯한 세월이었다. 시인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게는 쭈욱 "새싹 고스란 고스란 돋는"분이셨다. 아셨으면 좋겠다.

 

 

 

   '를' 발음하기*

 

   '를'은 '을'과 자매지간이지만 입천장을 떨게 한단다

   그렇지만 조바심이 일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야

   그는 받침 없는 곳에서 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지

 

  '을'이 받침 있는 섬돌을 믿고

   방자하게 입을 떼다가

   황급히 혀를 말아 쥐고 입 천장을 짚지 않았다면

   아무도 누구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었을 텐데

   받침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차이가 나지

 

   가슴 울리는 떨림이 있었는가

   처음부터 그 떨림 다 보고 있었는가

   귀가 멍멍해지도록 아득한 그 소리 듣고 있었는가

   영원을 믿고 믿지 않고의 차이는

  '을'과 '를'의 발음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데서

   시작된 것이겠지

 

   홀로 된 네 소리를 듣고 있으려면 나는 벌써부터

   가늘게 가늘게 버들피리 불던 그날 그 소리가

   무엇을 어떻게 떨치고 나온 소리였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 거야

 

   떨림이 없다면

   아무도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작이 아니라면, 가슴이 없었다면

 

    *'를' 발음과 '을' 발음이 정확하게 되지 않은 아이가 있다.

    발음되지 않은 것이 그 발음뿐일까만 듣지 못하고 내는 소리들은 어눌하고 갑갑했다. 얇고 미세한 울림으로만 감지되는 소리들, 태초의 빛이 그러했을 것이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읽노라면 매번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그래서 애써 모른 척하고 싶어지는.

   이 세월에 담긴 시인의 마음을, 시선을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데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니 무릎이 꺾인다. 이 시가 아니었다면 '그까짓 을'이 '고까짓 를'도 이토록 중요하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꼭 '조사'에만 해당할까만은 '를'을 앞세운 그 먹먹하고도 결기 세운 마음을 생각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겨우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한 명의 독자로서.

 

   내가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얄팍한 것들은 티끌보다 작고 가벼우며 그때 까불다 지은 죄들은 들보보다 무겁다. 하여'복음'은 나 같은 사람에게 맞춤하다. 내게는 시인의 사는 모습 그대로가, 마음 길이 '福音'이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지만/ 내 마음대로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가끔은 만사 제치고 떼쓰고 싶어진다. 시인도 알 것이다.

   훌쩍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우리는 여전할 것이다. 사람, 안 변한다. 혹시 모른다. 왼손 손가락만큼 만나서 숲길을 걷고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작은 꽃들에게 눈 맞춤할지도. 또 혹시 모른다. 찻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같이 바라볼지도.

   그래도 지금, 내가 항상 감사해 한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

 

 

 

  복음

 

   위층 사람과 마트 가는 길,

   할아버지 한 분이 찬송가 부르시네

   예수 천당! 붉은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교회라면 질색 팔색인 위층 사람에게

   저 할아버지 믿는 구석은 하나님인데

   죽고 나면 믿을 구석 있느냐고 물어보았네

 

   있구 말구요, 보험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그거면 우리 애들 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거예요

 

   애들 말고 당신, 했더니

   나야 어찌 되든 애들만 잘 살면 되지

   죽고 난 다음인데 어쩌겠어요

 

   어딘가로 푹 빠져들어가는 이 느낌

   나는 진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죽고 난 다음인데 어쩌겠어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겠지만

   내 마음대로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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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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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수명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이 시는 어디에도 우산을 감추고 있지 않다. 나와 너는 단지 손을 잡았을 뿐이다. '나'는 '너'의 왼쪽에서 '나'의 오른손으로 '너'의 왼손을 잡고 걷는다. 단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몸의 균형은 깨어질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비가 내 왼쪽 몸에는 내리고 오른쪽 몸에는 내리지 않은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이다. 이 시는 우리가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기왕의 진부한 육체(세계)가 어떻게 다른 육체(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해설, 신형철}

 

    "어쩌면, 비는 내리는데 우산은 하나? '나'는 '너'의 왼편에서 함께 우산을 들고 걷습니다. 그래서 왼쪽 어깨만 젖네요. 나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내 몸을 스쳐가는 어색하고 애틋한 느낌들 때문.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노는 것만 같고, 어색해서 아래만 보고 걷자니 발걸음조차 따라 어색해지고, 이런 식으로 어느덧 내 육체 전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위는 시집에 실린 신형철의 해설이고 아래는 문예지에 수록된 시를 읽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 있는 해설인데 약간은 다르다. 전문을 다 읽으면 많이 다르다. 시 읽기는 읽을 때의 상황이나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서 내 변덕인가 싶었는데 전문가인 신형철 선생도 그런 모양이다. 시는 읽는 사람이 누구든 읽히고 싶은 데로 읽히는 건가 싶다. [느낌의 공동체]에는 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시들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이수명 시인의 시집들을 바로 구매했다. 어느 노트엔가 빼곡히 필사도 했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옮겨 적은 부분은 수첩 한 권이다. 나 때문에 다치게 된 친구의 병간호로 병원의 보호자 침대에 엎드려 그 책을 필사하던 밤 풍경이 오롯하게 살아난다. 그때 난 절망에 사로잡혀있었던가. 내 다른 시선으로 피해를 본 그 친구에게 많이 미안했는데 탓하지 않는 친구 탓에 상대적으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의 여러 모습과 진정성에 생각이 많던 여름이었다. 손때묻고 낡은 [느낌의 공동체]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지금도 날궂이하는 그 친구의 발목을 생각하면 미안함이 여전히 몽글몽글해진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연일 비가 내린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숲길을 통과해왔다. 비를 머금은 숲은 눅진했고, 달큼하고 상쾌한 향기가 어스름을 감싸고 있었다. 나무들의 정령이 웅크리고 있는 듯 물컹물컹한 공기가 산허리에 가득해서 어둠이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오래오래 숲길에 머물고 싶었다. 오락가락한 비에 빨래를 널었다 걷었다 하고, 종일 종종걸음을 걷고, 심장이 쪼그라들게 놀라기도 한, 하루치의 노곤함이 나무에게로 옮겨가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 숲길에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깨어나는 발자국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 시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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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 457
김승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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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틀거리다

              김승희

   꿈틀거리다

   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라는 말 안에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이라는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

   매미도 껍질을 찢고 꿈틀꿈틀 생살로 나오는데

   어느 아픈 날 밤중에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

   꿈꾸는 것은 아픈 것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중에서

 

   김승희 시인께 경도되던 시절이 있었다. 88년 "33세의 팡세"를 읽고 혹해서 당시에 출간되어 있던 시인의 시집, 산문집을 모조리 독파했고, 신간 소식이 들리면 부지런히 구입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시집이 5권, 산문집이 4권이다. 거의 초기에 해당하는 시절의 작품집들인데 이제 70이 된 시인의 열한 번째 신간 시집 앞에서 약간 망설였다. 오래 뵙지 못한 스승을 만나러 가는 기분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만난 시인의 첫 번째 시가 『꿈틀거리다』이다. 이 시를 읽을 때 곁에는 늦은 시각임에도 잠들지 못하고 계속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자주 속을 썩이고 힘들게는 하지만 결코 밉지는 않은 어르신이 있었다. 옆에서 끊임없이 뽀스락거리는 어르신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읽어드렸다.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서 듣는다. "꿈틀거리다/ 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라는 말 안에/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이라는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이상했다. 눈으로 읽을 때는 지치고 무거웠던 마음이 소리 내어 읽어보니 가벼워진다. 꿈틀꿈틀, 꿈의 형상이 그려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꿈꾸는 것은 아픈 것"까지 읽는데 망연히 듣고 있는 어르신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괜찮아, 괜찮아' 해주는 느낌이 들었다면 너무 과한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하게 덥혀졌다. 시 한 편을 사이에 둔 어르신과 나의 잠깐의 교감,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했더니 시집 한 번 나 한 번 쳐다보신다.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에 어르신은 벌써 딴 세계로 넘어가셨다. 눈을 끔벅끔벅, 누가 돈을 훔쳐 갔다고 딴 말씀을 중얼중얼 하신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에 발을 걸치고 사시는 어르신의 저쪽 세계가 어딘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루 중에 몇 시간은 저쪽 세계에 안부를 묻듯 다니러 가실 때 바짝 긴장해야 한다. 꿈틀꿈틀, 어르신의 저쪽 세계, 어느 꿈속에서 서성서성 헤매고 있을지 모르기에 잠드실 때까지 잠깐의 방심도 금물이다. 자태도 곱고, 손짓, 발짓이 고와서 재주 많았을 이 분이 지나온 시절을 그려본다. 지금, 이 분의 꿈은 무엇일까?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마지막 연이 숙연하다.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문다.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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