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역시 계속해서변화를 맞이했다. 탈모 그리고 전신 체모 탈락, 상처, 수술하고 몇 주 후에는 겨드랑이에 림프액으로 채워진 커다란 오렌지 같은 것이 있어서 가슴에 닿지 않게 팔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2차 성징을 겪는 소녀처럼 얇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털이 다시 나왔다. 후각은 극도로 예민해져서멀리서도 모든 냄새를 알아차렸다. 평소에 감지할 수 없던것까지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고, 개처럼 세상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내 이모를 보러 간 Y요양원에서 티브이 앞에 모여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얼굴에 한 겹 내려앉은 음식 냄새, 산패한 냄새, 오줌 냄새를 본 것 같았다. 나는 냄새를 만질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끔찍하지 않았다. 열심히 암 환자의 일을 수행했고, 내 몸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실험처럼 지켜보았다. (나는 내가 삶과 글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경험을 묘사로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 P92
사진에는 항상 시선을 붙잡는 디테일이 있다. 대관보다 마음을 더 동요시키는 디테일, 예를 들면 타일 위에 구불거리는 스타킹, 둥글게 말은 양말, 짝을 잃은 한 짝, 쇼윈도에 진열한 것처럼 마룻바닥에 컵이 납작하게 놓인 브래지어. 여기서는 창문 앞에 있는 흰색 뮬이 그렇다. 이미 여름 더위는 시작됐다. 그것이 계속 이어져이 되고 폭염이 끝난 후에는 수천 명의 노인들이 죽어 일요일에도 묻히게 되겠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저 아름다운 여름일 뿐이었다. 하얀 하늘 아래 세상은 비현실적으로 곳곳이 반짝일 것이고, 늘 그랬듯이 도덕성은 더욱 속에 녹아 버릴 것이다. - P112
여름은 지나간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에, 마치 가을에는 젊음이 끝나 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모든 것을 당장 경험해야 했던 열여덟 살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사로잡혀버렸다. 우리는 정원에서 열린 창문 너머로 브라이언 페리든 존, 폴라레프, 비틀즈를 들었다. - P113
이 노래들은 언제나 M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다른 노래들이 내게는 다른 남자들을, 그에게는 다른 여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노래들을 엄청나게 질투해야 할것이다. 쇼핑센터에서, 미용실에서, 우연히 그중 하나를 듣는 것만으로도, 구체적인 어느 날은 아니겠지만, 하늘의 변화와 대기의 온도, 세상의 다양한 사건들, 일상의 행동과 여정의 반복, 아침 식사부터 지하철 플랫폼의 기다림이 있는시간으로 나를 데려가기에 충분하다. 그것들은 어느 소설속에서처럼 녹아 버리고 만다. 단 하나뿐이던 긴 하루로, 춥거나 뜨거운, 어둡거나 밝은, 채색된 한 가지 감정, 행복 - P114
과거 속에서 노래는 확장되어 나가고 사진은 멈춘다. 노래는 시간의 행복한 감정이며, 사진은시간의 비극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한평생을 노래와 사진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과 연관된 어떤 노래를 떠올릴 수 있을까? 열심히찾아봤지만 기억을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빈 옷장이나 단순한 열정‘을 쓸 때였다, 라고 말할 만한 노래는 전혀 없다. 내게 글쓰기란 모든 감각의 정지 상태다. 다만 그것을 탄생시키고, 일으킬 뿐이다. - P115
창문 양쪽으로 거실 책꽂이의 첫째 칸이 보인다.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랑스 문학, 외국 문학, 사회학서적들이 있다. 모두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됐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시립도서관처럼 배치한 객 책들 사이에서 뒤지는 즐거움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 집, 부모님 댁에는 비슷한 책들끼리 혹은 주제별로 나란히 꽂혀 있다. 토마스 만은 프루스트와 가까운 곳에, 피츠제럴드는 헤르만 헤세 옆에. 시간이 가고, 세르지에 자주 드나들면서 거기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내가 소유한 책들 대부분은 여전히 상자 안에 있기 때문에, 나의 이상적인문학 공간‘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 P118
사진 속에 우리의 육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나눈 사랑도 없다. 그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 장면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고통.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것을 원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진의 ‘필사적인 의미, 우리는구멍을 통해 시간의, 무(無)의 불변의 빛을 엿본다. 모든 사진은 형이상학적이다. - P124
우리들의 사진을 볼 때면, 나는 내 육체의 소멸을 본다. 그러나 그곳에 더는 내 손이나 얼굴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걸을 수 없다는 것, 먹을 수 없다는 것, 성교를 할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소멸이다. 나는 몇 번이고 내 사고가 다른 곳에서 계속될 수 있다면 죽음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당신은 곧 죽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다고 했잖아. 이제정말로 그렇게 됐네, 자기야."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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