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이고 미래다.‘
아니 에르노의 말을 곱씹으며 그들의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을 본다. 쓰러진 하이힐, 뒤집어진 니트, 바닥에 버려진바지, 브래지어를 밟고 있는 남성용 부츠, 어쩌면 거기에는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억이 아닌, 육체가 빠져나간 부재의자리가 쓰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지난밤을 빌려 오늘을 이야기했고, 욕망이 끝나고 남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흔적들 사이에서 상실의 전조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찍힌 시기에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을 앓았다. 자신의 경험을 이용하여 ‘삶‘을 쓴다는 이 작가는 몇 개월 동안 폭력적인 작업들이 벌어졌던 자신의 몸을(그녀의말처럼 지어내거나, 미화하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옮겼다.
종양이 자란 한쪽 가슴, 한 움큼씩 빠져나간 머리카락, 항암제를 부착하고 있는 체모가 없는 몸까지. 그곳에는 편재하 - P176

는 다음과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있고, 작가는 그것을 육체의 ‘부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거기놓여 있는 지극히 물질적인(옷, 가구, 주방, 문 등등) 요소들은 형체가 없어 손에 쥐기 힘든 모든 것들(사랑, 죽음, 욕망,
부재까지도)의 유일한 증거들이다.
나는 그녀와 그가 남겨놓은 이 사건의 현장에서 수사가나아가야 할 방향을 여러 번 잃었다. 이곳에서 사라진 것은육체인가, 사랑인가, 욕망인가. 여기에 남은 것은 부재인가죽음인가. 무엇을 증명하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생(生)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아니 에르노), 연인이 치러내는 전투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사람(마크 마리), 우리는그들이 무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비밀스러운 몸짓들을,
어느 날 아침, 행위가 지나가고 폐허처럼 남겨진 것들을 담은 사진 속에서 알아차린다. 이곳에서 지난밤의 사랑과 욕망은 중요치 않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붙잡는 그들의 ‘시도만이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계획에동참하고 만다. 육체가 빠져나간 이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글로 쓰인 사진을 눈과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과 뼈가 없이 이뤄지는 에로스를 받아들이면서, 단 한 번도 이겨 - P177

본 적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으로, 글로 뛰어넘기를 어느덧 소망하게 된다.
어느 폭염에 그들이 즐겨 듣던 음악과 풀밭 위에서의 식사, 브뤼셀의 호텔과 당신을 베니스로 데려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죽음과 함께 사는 여자의 미래가 온통 내 것이 되는 순간이 있다.
타인의 흔적은 그렇게 나의 현재가 됐다. 나는 그곳에 적힌 생을 오늘의 내 것처럼 산다. 그리고 오늘, 그들의 생을살아 버린 나의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한다. 어쩌면 도처에널린 죽음의 신호가, 욕망과 열정의 부재가 나를 기다리고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처럼, 혹은 그처럼 그 삶을 배우고,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을 마치면서, 이 사진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두 작가에게 이런 답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 유한한 운명을 지닌 모든것들의 가능성이라고, 하나의 순간에 갇혀 버린 상(像)이 언젠가 점과 선의 연속으로 이뤄진 시간을 탈출하여 무한히팽창해 나가는 꿈을 꾸게 만드는 희망이라고.
‘그러나 삶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 P178

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가 없으며, 형태도 없다.
- 삶을 쓰다‘ (아니 에르노) 서문 中에서글을 쓰는 일을, 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는 삶에게 자신의 인생을 빌려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가가 건네는 이 가능성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유용한 무언가가 되기를,
우리의 언어로 옮겨진 이 책의 용도가 그것이 되기를 꿈꿔본다.
2018년 9월, 클레르몽페랑에서신유진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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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7년, 글을 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이 책의 27페이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유방암'진단을 받은 아니 에르노가 1972년 유방암으로 죽은 프랑스의 자전적 소설가 '비올레뜨 르드윅'의 생존기간을 찾아내어 덧붙이는 문장이다. 저 구절을 읽는데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암 진단을 받고 저토록 명료한 의식이라니, 저토록 침착한 결론이라니. 그래서 찍을 수 있었고 객관적 서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에게 7년의 시간이 남아있다면, 무엇을 할까?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를 생각해 본다. 가정에 불과해서인지 절실한 물음이 되지 않는다. 답 또한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죽음은 멀고 내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음을 이성으로는 아는데 그것이 내 몫이 되는 것은 거부한다.

   작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순순하게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저 결론을 얻기까지 많은 길들을 걷고, 많은 순간들을 질책하고 많은 이들에게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 후의 저 결론이기에 뼛속까지 작가인, 삶을 기록하는 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진정성을 믿는다.

 

   '사진의 용도'의 첫 인용문 조르주 바타유의'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 드는 생(生)이다.'를 읽으면서 이 책의 방향성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한편 어리둥절했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작가와 '에로티즘'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멀어 보였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자면 '천국'과 '지옥'의 연결고리만큼이나 '죽음을 앞둔'과 '에로티즘'도 같은 맥락이었다. 삶이었다. 사진 안에는 우리가 살아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담겨 있었다.

   책은 아니 에르노와 연인인 마크 마리가 같은 사진을 두고 각자 쓴 글들의 모음집이다. 몸이 빠져나간 옷들만 남은 사진 속의 적나라함은 그 안에 담긴 무수한 몸짓들과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움을 담고 있다. 그 은유만으로도 이미 에로틱하다. 본능에 충실한 두 사람은 몸의 언어를 구체화해서 한 편 한 편 글을 완성해간다. 사진들은 그냥 흑백의 사진에 불과한데 스토리를 읽고 나면 사진 속의 서사가 보인다. 사진 속의 풍경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진 밖의 사진을 바라보는 이가 주인공으로 나누는 대화와 갈망과 욕망이 구체화된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낸다는 것, 죽음을 극복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의 유한함과 살아 있음을 동시에 이토록 강렬하게 느끼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구나 느끼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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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장수 멘토가 이상해요? 저는 인생에서 사회적지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래부터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도 우리 애들한테나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고, 성공해야 서럽지 않다고닦달했으니까요. 어느 날 언니가 그걸 지켜보더니말했어요..
"빛이 안 나도 괜찮아. 하지만 따뜻해야 해."
어라, 그 말이 꽤 좋게 들렸어요. 그날 당장 집에 가서우리 애들한테도 그렇게 말했는데 제가 진심으로말하고 있더라고요. 언니는 배움은 짧지만 제 눈엔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 아는 게 많아 보였어요.
언니는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시할머니부터 모시고살았어요. 대가족의 맏며느리면서 시장에 와서장사하는데 저보다 훨씬 힘들 거예요. 언니는 체구도 - P116

고 맨날 아파요.. 그래도 언니는 내가 힘들다고 하면께 말해줘요.
상대방 입장에 서서 한번 생각해볼래?"
언니랑 있으면 평온해져요.. 내가 뭔 말을 하든 언니입으로 들어가면 더 괜찮은 걸로 변해서 나와요..
언니랑 이야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아니고 사는 게 더 쉬워지지도 않아요. 하지만 언니랑있으면 사는 것이 더 괜찮은 일이 돼요.
- P117

"쓰는 게 참 신기한 일이죠?"

네. 처음에는 무작정 썼어요.. 사실 나 같은 사람의하루하루가 무슨 쓸 가치가 있나 싶었는데요.. 집에돌아가면 뭔가를 쓸 거란 걸 나 스스로 아니까조금씩 마음가짐이 바뀌더라고요. 일하다가 잠깐 본구름이라도 조금 더 기억해두고 싶어지고 그랬어요.
사실 내 삶은 기록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고, 매일매일똑같고, 내일도 똑같은 날이 될 것이고, 쓸 가치도, 살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그런 생각을 안하게 되었어요.
- P120

우울증을 이겨낸 두 번째 방법은 동화책을 읽는거에요. 아이들 어렸을 때 자기 전에 옆에 누워서동화책을 읽어주곤 했어요.. 우울증이 심할 때 어려서아이들에게 읽어주던 책들을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어린애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던엄마의 마음이 찾아왔어요. 동화책 읽을 때 제 자식잘못되라고 읽어주는 사람 없잖아요. 자식 잘되길바랐던 내가 정작 이러면 안 되겠구나, 내가 이러면애들이 힘들겠구나, 그런 마음이 들 때는 어떻게 내가지난 몇 달간 그런 생각도 못하고 살았나 싶기도하고 그랬어요.
- P121

글이 적힌 종이는 두 가지 시간을 살게 한다.
하나는 과거, 하나는 미래. 나는 그처럼 출판할 목적이 아니라 혹은 좋아요 버튼이 목적이 아니라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둘 글을 쓰는 사람에게 애정이 있다. 돈과 시선과 관계되지않은 자기만의 창조적인 일을 해보는 것 자체가 자율적인인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쓰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표현할 단어를 모색하게 된다. 오늘 있었던 일을, 감정의 복잡함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자기가 결정한다. 어떤 문장으로 끝맺을지도 자신이 결정한다. 내적인 자유다. 독립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한 모네가 수련과 정원 호수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를 그리면서 "여기서는 적어도 남들과 닮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네. 내가 경험한 것만 표현하면 되니까"
라고 한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삶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 우리는 쓰면서어렴풋하게, 그래 바로 이거야 혹은 이것인가 봐 같은 자기만의 해답 비슷한 것을 ‘감 잡을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이 좋은 것이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었음이 밝혀질 날을 기다린다. 그렇게 종이 위에 쓴 것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 P123

달이 그들을 지켜보기 전에 그들이 먼저 달을 찬양했다.
간월도(看月島) 란 이름은 섬에 달이 뜨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굴을 바구니에 담아 돌아갈 때 소나무 가지 끝에는 학이 앉아있고 그 위로 차가운 달이 떠오르곤 했다. 하루 종일 정직한노동을 한 사람들의 등판 위로 보름달은 찬 바다에서 갓 나온 싱싱한 굴을 닮은 젖빛을 뿌려대곤 했다. 지상에서의 삶이 고달플수록 그들은 달을 사랑했다. 떠오르는 달과 함께나는 새는 그들을 몽상에 젖게 했다. "날아다니니까 좋지?
자유롭잖아."
- P156

 19일 날 아침에 제 마음으로는 성호가 죽었겠다라로 생각을 했어요."
그는 자신이 나쁜 아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19일 날 아침, 물에 손을 넣어보고 나서는 제 마음속에서는 포기했으니까요. 여기서는 어떤 건강한 사람도 살 수없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빠가 아들을 포기할 수도 있을까? 이성적으로는 그래야만 해도? 아주 오랜 시간 세월호 부모들을 괴롭힐 문제였다.
20일이 되자 성호가 올라왔다. 그때 그는 열여덟 살이된 아들의 얼굴을 처음 봤다. 4월 28일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성호의 컴퓨터로 로그인되어 있던 아들의 트위터를 봤다. 마지막 트윗은 4월 16일 오전 10시 1분.
"살려달라고요."
성호가 엄마한테 보낸 마지막 문자는 그보다 조금 늦은10시 6분이었다.
"문자를 보냈거든요. 살아서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한테는."
- P175


추모 공간에 아이들이 모여 있으면, 같이 재밌게놀면서 분명히 덜 외로울 것이고… 어쩌면죽은 아이들이 덜 외로운 게 아니라 그곳에 간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덜 외로워지는 것에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네, 우리 아이들이 외롭지않으면 좋겠어요.
- P177

네, 성호도 거기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걸 매일지켜보고 있어야 되거든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나는 세월호 앞에서 4층 우현 선수에 있는 그 창문을보면 저걸 깨버렸어야 되는데 그 생각밖에 안 들어서...
우리 애들이 4층 우현 선수에 있는 그 창문가에 다모여 있었던 거야. 그래서 처음에는 배를 보는 것자체만으로도 힘들었어요. 계속 맴돌면서 조금씩조금씩 다가갔는데. 배 옆까지 가는 데 한 달 이상걸렸어요,
- P179

타워의 1만 장 유리 중에 산산조각 나지 않은 딱 한장의 유리창이 있어요, 딱 한 그루 불타지 않은 나무와함께 그 유리창은 회복력과 희망의 상징이에요.. 깨지지않은 유리창이 있는 이곳은 처음 도착한 구조대와 시민들이 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많은이야기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희생자는 훨씬 많았을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이곳에와서 그런 것에 대해서 뭐라도 생각을 할 것이라는사실에 위안을 받아요. 사건 당시 건물에 17,000명이있었어요. 이곳엔 17,000명의 생사가 걸린 이야기가너무나 많아요. 9·1!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그 당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연민을 보여준 방식,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자기 삶을 던졌던 것, 같이격려하면서 한 발이라도 내디딘 것, 뭐라도 좋으니도움이 되려고 했던 것, 함께 슬퍼했던 것의 의미는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을 거예요.
- P193

이 추모관은 자기희생의 이야기가 가득한 곳이에요.
그래서 이 추모관은 사랑이고 이타심이에요. 저는세월호 소식을 알아요. 대부분의 희생자가 살 날이훨씬 많았던 아이들이란 것을 알아요. 그래서 더더욱그 아이들을 명예롭게 하고 아이들의 삶을 우리들의이야기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 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P194


그런데 잠시만… 과연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까? 나는 못 끝낼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려고 할 때마다 항상 이건 아니라는 느낌에 시달렸다. 어느 아름다운 날에 정신 사나운 악몽 같은 일이 우리처럼 따뜻한 몸을 가진사람들에게 ‘현실‘로 일어났다. 이 이야기의 유일한 위안은인간이 다른 인간을 구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뿐이다.
세월호라는 단어는 아직도 내 가슴에 너무나 생생하다.
나에게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호라고 말하는 순간거의 모든 사람의 시간이 잠시 멈춘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이미 우리 가슴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로 떠난다. 거의 모든 사람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힌다. 그냥 그 단어만말해도 그렇다.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은 잊히는데 왜 이 이야기는 우리를 멈춰 세우는가? 이 이야기에는 뭐가 있는가?
세월호 1주기가 지나고 유족들과 함께 광주 5·18 유족들을 만나러 간 일이 있다. 그때 세월호 부모님들은 우선 5·18유족들에게 사과를 하고 - "저희가 너무 오랫동안 5·18에무관심하게 살았습니다.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비통하게 가족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저희의 무관심을 사과드립니다. 저희가 너무 오래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 P195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라, 아직 구할 수 있을 때!
크게 봐서는 이것이 유족들의 이야기다. 진실이 그토록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다. 현실을 더 낫게 고치기 위해서다. 아이들을 만나면 부모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너는 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구했어.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그날 너를 구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오리오 파머에게 배울 것이 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존재다. 우리도 그처럼 이 세상의모든 취약한 것, 위기에 처한 것을 구해내고 말리라는 강철같은 의지로, 마음 약해지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꿋꿋하게나아가야 한다. 우리를 꿋꿋하게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는많은 것들과 함께, 아무 할 일이 없다는 한가한 목소리에 맞서면서 빨리 올라가야 한다. 나는 성호의 말을 자주 생각한다. "살아서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들려준 두 개의 유리창, 이 이야기의 핵심은 모든게 달라질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이 슬픈 운명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과 다른 상황은 가능했다.
- P200

성호와 오리오 파머와 소방관들 모두 그렇게 죽지 않을 수있었다. *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모두 그렇게 죽고 싶지는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삶으로 돌아가서 이 세상의 슬픔과기쁨을 맛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유일한 희망의 말은 모든것이 변해야 한다‘이다. 깨버려야 할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않을 것이다‘, ‘아무 할 일이 없다‘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비극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이제라도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찾고, 구할 수 있는 것 - P201

을 구하기 위해서 계속 주위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각자의자리에서 ‘반복‘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나라에서벌어지는 일을 깊게 슬퍼할 줄 아는 내 친구는 ‘골든타임놓쳐본 나라의 국민으로서 말한다"는 표현을 몇 번이고 쓰면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고 하는중이다. 이제라도 너무 늦지 않게 구해내기 위해서.
- P202

우리가 동시에 뒤돌아보던 모습은 내 마음 속에 한 장의사진처럼 남아 있다. 이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단어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여치를집어들던 작은 몸짓 하나만 말하려고 해도 그의 전 생애에걸친 사랑 이야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 몸짓을 보면서 나는 한때 지상에 태어나 살았으나 이제는 없는 한 아이의 존 재를 느꼈다. 이제는 곁에 없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이렇게 우리 몸을 통해 무수히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 한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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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가 오텔리아에게 써 보낸 메시지에서 어렴풋이 감시할 수 있듯이, 그는 사람하기 쉽지 않은 남자였을 것이다. 연애가 서툴고 늘 외로움을 체화하며 살아가던 남자. 글을 쓰기위해 지기 안으로 침잠해야만 했던 남자, 지나치게 술을 많이마시던 남자, ‘당신이 아니라면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라고는하지만 끝내 결혼이라는 제도를 부정한 남자. 그러니 당신이아니라면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라는 문장은 애초에 의미를상실한다. 사랑하는 남자의 우유부단함을 인내심으로 견디며기다리던 오필리아에게 먼저 이별을 고한 것도 페소아였는데,
하필이면 사후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는 바람에.
국민 시인의 유일했던 연인으로서 원치 않은 세간의 관심을오랜 세월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두 사람의 아름답고낭만적인 이야기만이 소비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랑하는 남자로부터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만 따줄게‘ 같은 말을 들어야했지만 정작 온 국민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아이러니,  - P187

사랑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 것일까. 폐소아의 메시지위에 새겨진, 오펠리아가 연애편지에 쓴 문장을 읽다 보면 그녀가 안쓰러워 화난 내 마음마저도 누그러지는 기분이다.
"나는 당신의 입맞춤에 감사하며, 당신에게 많고 많은 포옹을 보내며, 항상 당신의 것~Agradeço muito muito os teus beijos e envio-te tambémmuitíssimo, e muitos chi-corações muito apertados, da tua, esempre muito tua.
- 오펠리아 케이로스 - P190

오히려 나야말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
의 첫 문장을 마음에 항상 새겨두기로 결심한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것을, 나는 항상 내가 거쳐온 길이복잡하다고만 생각해왔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아무리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분명히 감사해야 마땅할 특수한 환경이었다. 특히나 리스본에서 보낸 1년 동안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은 말이다. 처음으로 언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경험, 첫 대서양, 첫 그을림, 첫 유럽, 첫 다인종 친구들, 그리고처음 느끼는 자유와 본능의 감각, 그 모든 것들이.
- P200

환상을 안겨주는 것은 언제나 ‘일상‘ 의 장소들이었다. 여행을 가면 더더욱 그랬다. 현지의 주택가나 공원, 동네 서점에서머물다 보면 그 이전까지의 과거는 다 삭제된 채, 오래전부터그곳에 살고 있었고 그 장소들이 내 삶의 일부였다는 작각에빠진다. 나는 내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낯설음 속의 감미로움을 즐긴다. 그와 반대로 관광 명소에 가면 내가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실감만 더 강하게 느낄 뿐이다. 어쩌면 떠나은 곳에그대로 벗어두고 오고 싶었던 그런 본래의 모습 말이다.
- P202

편애하는 보사노바에서 특히 그렇지만 포르투갈어로 쓰인 노래 가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사우다지saudade‘가 아닐까 싶다. 사우다지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서인데 한 나라 고유의 특성이 대개 다른 나라언어로 명료하게 번역되기 힘들 듯이, 사우다지도 딱 떨어지게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그리움, 향수. 애수, 추억, 갈망.
이 모든 것을 합한 그 무엇.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고 나서 느끼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그리움뿐만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는, 계속 곱씹게 되는 감미로운 사랑의 감정과 그 안에서 우러나는 달콤한 슬픔, 상실의 고통은 힘겹겠지만 사우다지와 함께라면 먹먹해진 마음은 부드럽게 어루만져질 것이다.
- P206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통상적인 안내 멘트가 아니었다. 그가진심 으 로 매번 손님들에게 절실하게 ‘호소‘를 해왔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카메라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만반의 준비를 하던 우리 모두가 무안하고 미안해졌다.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인 ‘fatum 에서 유래한 파두, 마이크 하나없이 생목으로 숙명의 고뇌를 승화시킨 애절한 노래를 듣는다.
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겠다. 그의 긴 당부가 끝나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무대에 집중한다. 이윽고 우수에 젖은 기타 선율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 P207

파디스타의 감정에 듣는 사람도 휘말려서 마음이 붕 뜬다.
가사를 이해하는 못 하는 일단 들어보면 저절로 이해되는 감정이 있다. 곡 하나하나가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만같다. 말미에는 번뇌를 받아들이며 사는 인간의 강인함이 물씬 느껴지며 얹했던 속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파두를 제대로 부르고 표현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생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이깊은 침묵 속에서 생생하게 듣는 파두에 울컥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 P209

우리 가게의 방식은 우리가 정한다. 손님에게 기본적으로절절하게 대하지만 불필요하게 숙이고 들어가거나 맞출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에게는 돈벌이보다 소중한 다른 가치가 있다. 그 소중한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자부심을 지켜나가고 싶다. 이런 완고함을 가진 가게들에 속수무책으로 매료되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날 밤 나를 가장 설레게 하고 그 뒤로도 여운을 남겨준 한 순간은 브루노 코스타가 우리에게 파두 음악을 듣는 법‘에 대해 울컥한 목소리로훈계해줄 때였다. 사실 그는 얼마나 이 말이 하기 싫었을까.
대체 언제쯤이면 이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될지, 아니 그런 날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는 게 아닐지, 그러니 이런 고집을 지켜나가는 것이 부질없지는 않을지, 나름대로 얼마나 고민을 숱하게 했을까.
- P210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 분위기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하자.
지금 이 순간을 사진이나 온라인이 아닌 우리의 마음과 기억속에만 남기자.

진실은 심금을 울린다. 그 덕분에 오늘 밤 파레이리냐 다 알파마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있던 우리 모두는 마치 해변가 모닥불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앉은 어린아이들처럼, 그 순간의기쁨을 함께할 수 있었다. 파두 공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그래서 단 한 장도 없다.
- P230


결과적으로 내가 간직하게 된 그의 유품은 아주 오래전에 그가 색연필로 그린 풍경화 한 점과 그의 인감도장이다. 마지막 뒷정리를 하는 와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한때는그가 꼭 손에 쥐고 있어야 했던 물건이지만, 지금 내가 둘러보고 있는 누군가의 학위 수료증이나 자격증처럼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엄마의 유품으로는 여성용 롤렉스 시계를 가지고 있다. 리스본에서 살 무렵,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자동차로 세 식구가 유럽 여행을 다닐 때 아빠는 베니스에서 엄마에게 그 타원형 가죽끈 시계를 선물했다. 지극한 사랑의 징표를받은 엄마의 눈빛을 여전히 기억한다. 나도 곁에서 더불어 설레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엄마는 그 시계를 몸의 일부처럼 20년 넘게 차고 다녔다. 그사이 두어 번 가죽끈을 교체해야만 했다. 암 투병 중에 엄마가 그 시계를 풀어 내게 몰래 남겨주었을때, 나는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마쳤음을 알았다.
- P231

리스본에는 저마다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성당이 많지만따터 시간을 내서 제대로 본 곳은 없다. 다만 에스트렐라 대성만은 꼭 한번 들르고 싶었다. 별‘이라는 뜻을 가진 ‘Estrela‘
다는 단어가 사랑스럽기도 하거니와 성당 전체가 하얀색 외관인 것도 좋다. 하물며 바로 앞에는 에스트렐라 정원 Jarlim diasHistrea )이 있다. 툭툭을 타고 가는 길에 새하얀 둥근 돔과 한 쌍의 종탑이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어느새 우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 앞에 도달한다.  - P231

 우리는 트램 위에올라타고, 자리에 앉아 창밖 세상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저마다 자신의 때가 되면 트램에서 내린다. 누구는 더 먼저 내리고 누군가는 더 나중에 내린다. 다만 모두가 언젠가는, 한 사람도빠짐없이 내려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를테면 약속 같은 것이다.
- P237

어쩌면 그가 이주민이라는이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몸놀림이 빠른 그는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오는 손님을 결코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낯선 억양이지만 힘차고 또..
한 목소리로 손님이 원하는 주스와 커피 종류를 묻는다. 부  스테이션의 음식이 떨어지면 재빨리 셰프에게 요청해서 새것으로 채워다 놓는다. 식사 중인 손님들이 언제고 도움을 - P241

요청할지 모르니 테이블들을 주의 깊게 살피지만, 시선 처리가 부담스럽지 않게끔 조심하고, 먼저 손님에게 다가가 친절함을 내세우진 않는다.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는 뒤따라가서 끝까지 배웅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그러고는 이내 돌아와, 그들이 사용한 테이블을 빈틈없이 말끔히 정리한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일을 하느냐에서 격차를 깨닫고 나면, 세상엔 ‘단순 업무‘란 사실상 없고, 타인의 일하는모습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직원이 성의를 다해 능수능란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매일아침 내가 누리던 사사로운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흘 밤을 묵고 체크아웃을 하는 마지막 날, 그는 평소에 식사를마친 나를 배웅하면서 항상 그 특유의 억양으로 "땡큐, 맴"이라고 인사를 했더랬다. 한데 오늘은 인사말이 조금 길다.
"땡큐 베리 머치, 맴, 씨 유 투모로."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너무나 당연하다.
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짝 미소 지으며 내일 또 보자니,
곧이곧대로 오늘 리스본을 떠난다고 말해줄까 잠시 생각도해보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
"땡큐, 씨 유 투모로"
- P242

순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장소로 나를 데려가고 싶었다. 그 바람대로 나는 리스본에서 겸허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반년에 걸쳐 인간이 가진썩 아름답지 못한 일련의 모습들을 목격하며 차갑게 굳어가던 내 심장은 그들이 나눠준 온기 덕분에 조금씩 부드럽게 풀려갔다. 환멸이 자칫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려던 내 마음을 그들이 제자리로 되돌려놔 주었다. 소박하고 천성이 고운 리스본 사람들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가 고통에 둔감해지고 싶어 일부러 죽어가던 나의 감각을 다시 조용히 깨어나게 해주었다. 나를 위로해주려고 애쓰지도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크나큰 위안이 되어준 것이다. 그간의 일기에 등장한사람들도,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도 여럿이다.
- P243

가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나는 매년 6월이 되면연보라색 자카란다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만개한 모습이 보고싶어질 것이다. 여름날이 오면 긴초 해변의 그르렁대는 파도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질 것이다. 9월이 되면 올리브나무밭에서 윤기 나는 검정색 올리브를 손수 수확하는 기쁨을 꿈꿀 것이다. 날이 추워지면 한겨울에도 온기를 나누어주던 리스본의 눈부신 행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행여 마음이 지치기라도 하면 선량한 리스본 사람들이 내게 다정하게대해준 순간들을 떠올리며 힘을 낼 것이다.
- P246

리스본에서 보낸 시간들은 통제할 수 없는 그 당연한 사실을 우아하게 직시하고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야만 나는그들을 마음껏 그리워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 내가 그들을 놓아주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을 테니까. 소멸과생성, 끝과 시작은 하나의 몸이고, 끝이 있기에 우리는 순간순간의 찬란함을 한것 껴안을 수 있다. 혹은 나는 모종의 ‘의미‘
를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모 자식 관계로 만나게된 의미, 죽음이라는 결론이 이미 나와 있는데도 삶을 한껏 껴안고 가야 하는 의미, 상대와 나를 용서하는 일의 의미 .… 그를 찾기 위해 나는 차분히 많은 것들을 응시하고, 소화시키고,
어떤 형식으로든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해야만 했다. 지금의나는 한결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이다. 스스로 확신하게 된 몇가지 덕분이기도 하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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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주 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불안은 점점 커지면서 연제나 그 자리에 있다."
반항적이고 내향적 외톨이이자 아웃사이더인 페소아의 글에는 체념, 자의식, 고독이 어려 있다. 자신이 창작해낸, 수십가지 이명들은 외롭기 때문에, 나를 아무도 이해해줄 것 같지않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싫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만들어준분신이자 친구가 아니겠는가. 그는 열일곱 살에 남이공에서리스본으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고 고집스럽게 오로지 리스본에만 머물렀다. 그가 여행이나 여행기를상상력의 부재라며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진심이라기보다 좌절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한 반발로 읽혔다. 혹은 성장기 시절 그 어디에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인간의
"결코 변하지 않을 내 것‘을 향한 집착이 아니었을까. 이것은나의 주관적인 동질 의식일 뿐일까.
- P45

하기야 그들 입장에선 우리 모녀는 꽤나 뜬금없고 신기한손님일 것이다. 멀리 동양의 한 나라에서 날아와, 바닷가에서수영도 하지 못할 이런 비수기에, 투숙하는 손님도 아니고 카지노를 하러 온 것도 아닌데, 굳이 에스토릴까지 와서 말없이늦은 짐심을 먹는 두 사람. 관광차 온 듯한 들뜸과 설렘도 느껴지지 않고,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 이 시기에 이 멀리까지있을지 궁금할 법도 하다. 안경 쓴 수줍음 많은 저 여자아이에겐 아빠가 있을까. 이혼 후 둘이 사는 걸까. 아니면 아이 아빠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건 아닐까? 저 봐, 엄마와 딸의 분위기가 어쩐지 묘하게 차분하잖아. 물론 그들은 유서 깊은 호텔에서 일하는 자부심을 지닌 직업인이기에 그러한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눈빛에서 우러나는 호기심만큼은 숨기기가 힘들다.  - P112

체크인을 하고 몸 컨디션이 상대적으로 나은 이른 오후에엄마를 모시고 자주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지나 온천장으로 향했다. 내가 화장실을 들르는 동안, 엄마가 먼저 목욕하러들어가 있겠다고 했다. 뒤늦게 탈의하고 수증기로 김이 가득서린 대욕장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넓은 대욕장 중간쯤에 엄마 혼자 자리를 잡고 몸을 씻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엄마의 뒷모습에 내 가슴이 쿵쿵 뛰었다. 너무 말라서 척추뼈가그대로 도드라졌고, 상체가 머리 크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모자로 가리고 지내던 민머리는 머리카락이 삐뚤빼뚤 나기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와서 아무 말 없이 엄마 옆자리에 앉았다.
"경선아, 엄마 너무 징그럽지?"
엄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 P114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이득과 손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살 것만 같다. 누구는 그런 성질을 두고 어눌하다 하겠지만나는 지금 그런 다정한 너그러움을 그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긴초 해변은 언덕 멀리에서 볼 때부터 사람의 영혼에 강하게 호소하고, 마음을 뒤흔든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자연 그대로의 해변이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뛴다.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여러 명의 서퍼들이 거친 파도를타고 있다. 아무렴 이곳은 세계 서핑 챔피언십 대회를 주최한적도 있다. 바다는 역시 파도지! 누가 뭐래도 파도가 거친 바다가 진짜 바다인 것이다.  - P120

바다까지 가는 내리막길에는 바위들 사이로 처음 보는 야생 꽃과 다육식물 들이 반기고 모래는 얼마나 깊고 입자가 고운지, 마치 몸의 곡선대로 푸욱 들어가는 템퍼 매트리스 위를뒤뚱뒤뚱 걷는 기분이다. 하늘은 여전히 화창하고 물결은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반짝반짝 빛난다. 가족과 연인, 친구 들은모래사장 곳곳에 피크닉 매트를 깔고 쉬고 있고, 개와 강아지는 주인을 따라 해변가를 기분 좋게 산책한다.  - P121

가게에 선보일 상품의 기준은 자연스레 정해졌다. 최저30~40년의 역사가 있는 브랜드나 제품일 것. 사람들의 향수와 추억을 소환할 것, 제작 과정에서 수작업으로 만드는 부분이 반드시 남아 있을 것. 포장은 그대로 하거나 예전 스타일을기본으로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되고 품질이 좋을 것. 제품이 지닌 본래의 매력은 최대한 그대로 두면서 그녀만의 감각으로 정갈함과 세련됨을 보완했다. 참신한아이디어 하나가 폐쇄 일보 직전의 일터들을 재생시키고, 전국 각지의 생산자들에게 살아갈 자부심을 안겨준 것이다.  - P137

"돈 달라는 말이 그렇게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고."
외할머니는 내가 아는 가장 선하고 인자하신 분이고 엄마네 집은 당시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엄마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어쩐지 속으로 조금기기도 해서, 모하게 감미로운 감정에 빠졌다. 그러니까 어면에서 나는 엄마를 닮았다. 라는 동질감의 확인, 어른에게의지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이, 어른보다 더 어른의 감정을하리 알아채는 어린이 어른을 귀찮게 하거나 상처 주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어린이,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해결해보리고 하는 어린이, 그게 잘 안 되면 혼자 숨어서 무너지는 어린이. 그러고는 꾸역꾸역 소화시켜 어떻게든 추스리는 어린이.
말을 하지 않는 어린이.

미술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리스본을 두고 "망자들의 특별한 정거장" 이자 "이곳에서 망자들은 다른 도시에서보다 더 과감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하는데, 자꾸 이렇게 엄마에 대한 일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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