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각자 돌아갈 사람이 있어야만잘 어울렸어. 둘만 있으면 서로를 피했지.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같은 공간에 둘만 있는 게 힘들었거든. 지금 내 인생도 다르지 않아. 길을 건널 때도 비스듬히 건너고, 콘서트장에서도 구석 자리에 앉고, 국적이 두 개나 있는데도 제3국에살고, 사람들의 눈을 보지 않아." 나는 그녀가 내 눈을 보려고 애쓰는 걸 의식하면서 시선을 피해 버렸다. "난 누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해, 거짓말을 하진 않지만, 주는 것보다 받는게 훨씬 많은데도 항상 남는 게 없어.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구나. 나 자신이 건너편 이웃처럼 느껴져, 여기 있으면 거기 있고 싶고 거기 있으면 여기 있고 싶었지."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낸 시간을 말하는 거였다. "성녀가 나한테 항상 그랬지, ‘플로라, 넌 생각이 너무 많고 질문도 너무 많아. 인생은눈가리개를 하고 살아야 해. 앞만 보고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 Debarrasser. 전당포 주인처럼 살지 마. 보다시피 난 커틀러리를 없애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했단다. 그것밖에. 나머지는 전부 책에 넣어서 여기에 몰래 넣고 다니지."  - P117

나는 광장에서 바포레토 승강장으로 돌아갔다. 그날 처음으로 찰싹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거의 텅 빈 바포레토가 도착했다. 배에 올라 선미의 갑판으로 가서 계산대형 고물을 따라 놓인 동그란 나무 벤치에 앉았다. 엔진이 휘돌고 사공이 매듭을 풀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남학생들이 전차의 창문 없는 칸에서 그러는 것처럼 두 다리를 벤치에 올리고 광활한 밤을 바라보았다. 대운하 한가운데에서 깊은 밤 속으로 향하는 배가 빗질하듯 반짝이는 은빛 초록색 흔적을 남겼다. 엔진을 끄거나 노를 집어넣은 간첩선처럼 고대 무기고의 벽을 따라 조용히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저 앞쪽에는 석호에 여기저기 흩어진 가로등이 해수면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뒤쪽에서 달빛 없는 도시가 멀어졌고 늦은 밤 실안개 속에서푼타델라도가니와 저 멀리 산마르코성당의 까만 탑이 어렴풋이 보였다. 바포레토의 조명을 받은 베네치아의 화려한 궁전들이 하나씩 잠에서 깨어나 산 자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단테의 지옥 유령처럼 밤을 빗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 P124

바포레토는 산자카리아를 지난 후 급강하하듯 널찍하게돌아 석호를 거쳐 리도로 향했다. 속도가 두 배로 빨라진 배가 시끄럽게 통통거리며 나아갔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안개 자욱한 시로코 날씨가 수그러들었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 머리를 뒤로 젖혔다. 외할아버지의 농담을 흉내 내이제 베네치아는 다 본 거네, 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려끝없는 밤으로 가라앉는 베네치아를 바라보며 플로라 숙모,
를 떠올렸다. 내가 아는 모든 도시와 해변과 여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여름을 사랑한 이들, 한때 사랑했고 이제는 사랑하지도 추모하지도 않지만 지금 이 순간 같은 집, 같은 거리,
같은 도시, 같은 세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들을 전부 떠올렸다. 내일은 가장 먼저 해변에 갈 것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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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70페이지를 읽었는데 벌써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전쟁은 지략이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상대가 더 무능해서 이긴다. 이탈리아인들은 빌리가 영국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이집트는 물론 다른 곳에서도 계속 그와 일했다. 빌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없을 때가많았다.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에티오피아나 이탈리아에 머물거나 이탈리아 대표단으로 독일에 파견되거나 했다. 그는이탈리아의 이해관계에 더욱 필수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운송 전문가와 사막 수송대 연료 공급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어설프나마 그런 분야의 지식을 언제 어떻게 얻었는지 추측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이탈리아는 누구든 필요했다.  - P34

성녀는 가끔 혼잣말을 하고 자주 뭔가를 잃어버리거나 있어버리는 온화하고 울적한 할머니였다. 물건을 어디에 숨겼.
는지, 누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겼는지 잊어버렸다. 열쇠와 장갑을 잃어버리고 이름과 날짜, 빚지거나 싸운 일을 잊어버렸다. 말하는 도중에도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더듬거리다 아무 말이나 끼워 맞췄다. 메르게 말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결론도 없이 빠른 속도로 말하는 게 하던 말을 까먹었다는 확실한증거임을 깨닫지 못했다. 가끔은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려서그냥 실수를 인정할 때도 있었다. 별거 아니야. 흔한 일이잖아."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나중에 기억날 거야." 자신이 사는 이탈리아화된 비잔틴 세계에서는 말하는 도중에 재채기하면 거짓말이라는 뜻이고 잊어버렸다고 하면 속임수를 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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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이문재


처음으로
둥지를 트는 까치 부부처럼

큰 바다로 나갔다가
모천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봄여름 함께 잘 살다가
제 가지에서 떨어지는 단풍잎처럼

팔순 생신상 받으시고
생전 처음이라는 외할아버지처럼

저 멀리 초겨울 첫눈에게 눈짓하는
춘삼월 마지막 눈발처럼

시집 [혼자의 넓이] 중에서



방진복을 입고 근무하는 오늘. 움직이기만 하면 동작보다 먼저 소리가 서걱서걱 존재감을 드러냈고, 흘러내리는 페이스 쉴드, 귀를 쪼이는 마스크, 한참 지나면 나 여기 있다고 신호를 보내 듯 내려온 신발 싸개는 자꾸만 발에 밟힙니다. 머리도 아프고 움직일 때마다 눈치 없는 팥죽 땀은 쏟아져 내립니다. 이런 날들을 한결같이 지내온 방역의 최전선에 서 있는 당신들을 생각합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K- 방역, 우리가 선진국이라 믿고 있던 그들이 선진국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준 K-방역의 주인공인 당신들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입니다. 처음의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춘삼월이 문밖에 있습니다. ˝초발심˝ 을 망각하기에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처음으로‘ 그 시작을 놓쳐버리기에 실패를 거듭하겠지요. 시는 쉽고 쏙쏙 들어오는데 행간의 의미는 넓고도 깊네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고단한 하루였습니다. 이제 막 달에 걸음을 뗀 우주인처럼 입었던 방진복 때문이겠지요. 바이러스를 씻어버리려고 퇴근하자마자 씻고 책꽂이 한편에 놓인 [혼자의 넓이]에서 무수한 혼자들과 여럿을 만나며 길고 고단한 오늘 하루를 접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요. 고단한 세상의 모든 이들이여 잠시나마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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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의 방법
               박은정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아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이빨은 단단해졌다
  말을 해도 말이 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되물어보던 허기처럼
  형광등은 깜빡이고
  인형은 얼굴도 없이 던져졌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시집[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중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 중에 속된 표현을 써서 ‘이빨 깐다‘고도 하는데 이 시 속의 단단해진 ‘이빨‘이 그 ‘이빨‘일까 하면서 읽었다. 쓰는 이가 행간에 무엇을 담아두었든 읽는 이의 몫으로 돌아오는 시가 좋다. 어수선하고 참담한 심경으로 폭격을 맞은 키예프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이빨˝을 까는 세계 정상들의 입을 바라다본다. 어수선하고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인 선별검사소에서 PCR 검사를 할 때도 어떤 여자분은 방역요원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은 내 뒤에서 앞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이동을 하시며 누군가와 마주치기만 하면 당신의 상황을 하소연하기 바빴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을까 봐 온갖 ˝이빨˝들이 난무한다.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 이 코시국 상황 타령도 전쟁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밤이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쓰게 그저 웃는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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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책을 마저 읽으면 영화로 다시 봐야겠다고...

  이 울화통이 치미는 장면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다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누르고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격렬한 저항이었다.
르그리는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세냐고 외치며 욕설을내뱉었고, 큰 소리로 공범자를 불렀다.
"루벨!"
루벨이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루벨이 마르그리트의 한쪽 팔과 다리를 누르고 있는 사이에르그리는 다른 쪽 팔다리를 잡고 그녀를 큰대자로 침대 위해엎드리게 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느라고 거의 탈진 상태가 된마르그리트는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두사내는 방에서 찾아냈거나 미리 지참하고 온 밧줄 내지는 긴천 조각을 써서 몸부림치는 마르그리트를 결박했다.
그러나 침대에 결박당한 뒤에도 마르그리트는 계속 고함을지르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르그리는 쓰고 있던 가죽 모자를 벗어 거칠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꽁꽁 묶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재갈까지 물린 탓에 마르그리트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몸싸움을 벌인데다가 호흡까지 힘들어진 탓에,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게 품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루벨은 침대 옆에 그냥 서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결박당하고 재갈을 물린 상대에서도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르그리는 마침내 자기 뜻을 이뤘고, "그녀의 의향을 무시하고 자기욕정을 채웠다.
- P110

행위를 끝낸 후 르그리는 졸개에게 마르그리트를 풀어 주라고 명했다. 성폭행이 자행되는 동안 줄곧 같은 방 안에 있던 루벨은 침대로 와서 신중한 동작으로 그녀를 묶은 끈을 풀어 주었다.
결박이 풀리자 마르그리트는 침대 위에 쓰러진 채로 흐느끼며 흐트러진 옷으로 자기 몸을 가렸다.
허리띠를 다시 조이고 부츠 끈을 맨 르그리는 일어서서 침대 위로 손을 뻗었고, 그곳에 떨어져 있던 가죽 모자를 집어올렸다. 마르그리트의 재갈로 쓰였던 모자는 따스하고 축축했다.
종기사는 펼친 가죽 모자를 자기 허벅지에 털며 마르그리트를 내려다보았다.
"마담, 만약 방금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한다면,
당신에게 오는 건 불명예밖에는 없을 것이오. 남편이 이걸 알게 된다면 거꾸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소. 그러니까 아무 말도하지 마시오, 나도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까."
마르그리트는 시선을 떨구고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마침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한순간 르그리의 얼굴에 안도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마르그리트는 고개를 들어 분노에 찬 눈으로 르그리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오래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쓰디쓴 어조로 덧붙였다.
르그리는 침대 위의 그녀를 쏘아보았다. "마르그리트, 나를상대로 장난칠 생각은 하지 마, 당신은 여기 혼자 있었고, 내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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