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는 2003년 2월 18일, 지하철 화재사고로 시작되었다. 불이 난시각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한 시간 동안 열두 량의 객차가 불타고백구십이 명이 사망했다.
2003년 3월 12일, 세계보건기구는 비정형 폐렴 경계조치를 내리고같은 달 17일, 이 병을 사스(SARS)라 명명했다.
2003년 3월 20일,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했다.
2003년 3월 22일, 세계보건기구는 중국 일부와 홍콩, 베트남을 위험지역으로 지정했다.
2003년 3월 25일, 중국 간쑤성 허시회랑을 타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었다.
2003년 4월 1일, 홍콩 배우 리가 투신자살했다.
2003년 4월 2일, 한국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2003년 5월 8일, 전 세계 사스 감염자가 칠천여 명 사망자가 오백명을 넘어섰다.
2003년 5월 14일, 서희부대 제1진 2제대 오백 명이 대한항공 전세기를 타고 이라크로 출국했다.
2003년 6월 2일, 아시아 여덟 개 사찰에서 리의 천도재가 열렸다.
2003년 6월 13일, 이라크 나시리아에서 97km/h의 모래폭풍이 일었다.
2003년 6월 13일, 나시리아 알바라디병원 보수 공사를 나갔던 서희부대 제1진 2제대 야공중대원 열두 명과 그들의 경계 임무를 맡았던 특전사 세 명이 주둔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p84 ----[너무 아름다운 꿈]


2013년 4월 1일, 나는 황토고원으로 갔다.
고원의 허공 위에 꽃이 피었다고 했다.
꽃이 공중에 피다니, 그것은 비유입니까.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짐을 꾸린 것은 꽃을 따기 위해 열기구를 띄운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황토고원은 서쪽에 있었다. 나는 편서풍을 거슬러서 갔다.

----[너무 아름다운 꿈] - P83

황하 하구에서 한참을 거슬러올라 해발 천육백 미터의 황토고원에자리잡은 곳. 대륙 서쪽의 란저우는 전염병으로 술렁이는 베이징이나서울과는 다르게 노란 미세먼지막 속에서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의외로 공항에서의 검역도 철저하지 않았다. 21세기 전염체는 비행기바이러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전염병은 지역성이 강했다. 발병지역은 황사 피해지역과 일치했다. 중국 동부와 한국의 발병자가 많았고 그다음이 일본, 북아메리카 서부 순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국 서북부와 내몽고 등 황사 발원지역에서는 오히려 발병자가 적다는 것이었다. 모래에 익숙한 지역에서 항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냐는얘기가 있었지만 어느 단계에서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어느 단계에서변종 바이러스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맥을 잡지 못했다. 발병자 분포도가 지역성을 띤다고 해도 접촉 전염인 결막염과 호흡기 전염인 폐렴이 주 증상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무역풍을 탄 사하라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에는 큰 도시가 없었지만 편서풍을 탄 아시아 더스트가 도달하는 아시아 대륙 연안에는 인구 천만이 밀집한 대도시가 여럿이었다. 때문에 세계보건기구는 판데믹 선언을 고려중이었고, 사람들은 2013년에 출현한 신종 바이러스를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 P91

허시회랑은 란저우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둔황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었다. 한국 발음으로는 하서회랑. 하서는 황하 서쪽을, 회랑回廊은긴 복도형 구조를 뜻했다. 북쪽의 고비사막과 남쪽의 치롄산맥에 막혀 자연스럽게 좁고 긴 지형이 형성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서회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사막과 산맥 사이를 빠져나가는 길고 구불구불한 생물이 떠올랐다. 낮에는 태양빛을 흡수하고 어스름이 되면검붉게 변하면서 조금씩 서쪽으로 기어가는 생물, 해가 지거나 폭풍이 일면 그 통로엔 어둠이 들어찰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흙벽과 칠흑같은 통로, 리라면 그런 곳을 찾았을 것이다.
- P94

모두가 사막색 군복을 입고 있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공식적인행사가 끝나자 가족들과 점심을 먹는 시간이었다. 다들 야산 공원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마련해온 음식을 펼쳤다. 돗자리에 앉은 동생은다른 것은 안 먹고 계속 참외만 먹었다. 한 달 동안 상무대에서 생존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살아남는 법, 동티모르 파병 사고 사례와 총기 사고에 대한 교육, 그리고 전염병 예방 수칙, 서희부대의 주둔지는 이라크 나시리아였다. 한 제대의 파병기간은 육 개월, 그들은 2003년 10월에는 만 달러와 함께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동생은 내 휴대폰을 빌려 한두 군데 전화를 했다. 둘러보니 사막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짙푸른 나무 밑에 쪼그려앉아서 다들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삼 년이 지나고칠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그 풍경을 생각했다. 그날 매산리 나무 그늘 밑에서 참외를 먹고 전화를 하던 수많은 군인들 중에 모래폭풍과함께 사라져버린 열다섯 명은 누구누구였을까. 십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열다섯 명은 그날 어디어디쯤에서 사열대를 향해 서 있었을까. - P99

‘뜨거워, 아빠‘ 불이 난 지하철에 갇힌 사람들한테는 휴대폰이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은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좁고 긴 지하통로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숨이 막힌다는 말과 뜨겁다는 말이었다. 어머니한테 아이둘을 맡기고 볼일을 보러 가던 여자는 마지막 문자를 어머니한테 보냈다. ‘어머니, 애들 좀 잘 봐주세요. 지하철에 불이 났는데 아무래도죽지 싶어요.‘ 불이 난 시간은 오전 아홉시 오십삼분, 갇힌 사람들한테서 가장 많은 전화가 걸려온 건 열시 삼십분에서 사십분 사이였다.
열시 오십구분 사십삼초 이후로는 더는 어떠한 전화도 밖으로 걸려오지 않았다. - P100

눈병에 걸린 사람들은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어렸을때 돋보기로 들여다보던 눈 결정체 같기도 하고 햇빛을 머금은 먼지입자 같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붉게 충혈된 눈을 계속해서 비볐다. 가려움증은 실제로는 바이러스가 각막에 안착해 생기는 증상이었지만 사람들은 마치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이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처음에는 가려움증과이물감을 호소하다가 눈곱과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는 결막에 종창이생기면서 출혈을 일으켰다. 감염자들이 꽃 얘기를 하는 것은 이번 바이러스가 형태학적으로 꽃 모양이어서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감염자들이 정말로 바이러스의 실체를 목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결막염 출혈을 일으킨 환자들은 뒤이어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망자들의 호흡기 하부인 폐에서도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사인은 바이러스성 폐렴 합병증으로 발표되었다. 2013년에 출현한 바이러스는 코나 목 등 사람의 호흡기 상기도에서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플루엔자바이러스와 달랐고, 결막에서 증식하는 바이러스가 폐에서도 증식한다는 점에서 아폴로눈병을 일으킨 엔테로바이러스와도 달랐다. 백신은 없었다.  - P101

전염병과 황사의 관계에 대해 쥔은 오래 생각해온 듯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쥔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기전, 즉 순수한 조류인플루엔자였을 때 황사 입자와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 가설이 내 짐작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시 탁상달력을 집어들었다. 2013년 4월달력에 있는 사진은 리가 2000년 홍콩컨벤션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의 사진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리는 여전히 강건한 몸에 소년 같은 얼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2000년은 리가 은퇴를 했다가 복귀한 해였다. 삼 년 뒤에 죽었으므로 마지막 재기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때의 사진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리의 자살 소식을 듣고서야 아름답던 리가 어디선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간 걸 깨달았다는 미안함, 그 미안함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기도 했다.
리는 자주 무너졌다. 일을 할 때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처럼 완벽했지만 무너질 때는 모든 것을 놓았다. 리는 어떤 배우보다도 황색 언론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사생활과 스캔들이부풀려졌다. 리는 은둔과 은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때면리는 늘 최고였고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리에 열광했다. 리를 수식하는 대표어였던 슬프고 몽환적인 눈빛은 리가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 - P104

복할 때마다 철저하게 리의 것이 되는 것 같았다. 안착하지 못하는 결된 영혼, 잡히지 않는 생의 허무를 표현하려는 감독들은 누구나 리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사람들은 리한테 깊게 배어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유년 시절 때문이라고 했다. 리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생애 며칠도 안 될 만큼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가족얘기가 나오자 리는 말했다. ‘어려서는 딱 십 분만이라도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나에게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그 사실뿐입니다.‘ 리가 연기한 인물들은 그런 리의 삶을 닮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공동空洞 하나씩을 안고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파괴하다가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렸다. - P105

리는 이미 협곡의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좁고 긴 통로를 빠져나와절벽 위에 선 것인지, 절벽에서 내려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래폭풍의 전조인지 대기는 탁했다. 누군가 골짜기에 혼자 앉아 우는 것처럼 바람 소리가 점점 휘어졌다. 리는 고대의 조각상처럼 몸에 얇은 대의 하나만을 걸친 채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얇은 천이 신체에 흡착돼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가 강박적으로 가꾸어온 몸이었다. 한 발만 방심해도 그대로 무너질것 같은 아슬아슬한 몸. 스스로에게 혹독하지 않고는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리가 서 있었다. 몸의 양감과 흡착된 옷이길항을 일으켜 리의 신체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을 뿜었다. 카메라는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리를 비추었다. 우리도 전혀 움직이지않고 리를 마주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절벽 위에 선 리한테서그동안 리를 통과해간 모든 인물들을 보고 있었다. 리는 길 위에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리는 사막 너머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빙글빙글돌다가 주저앉는 리, 짙은 화장을 한 리, 사랑에 답하지 않는 리, 이글거리는 화염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리, 환호 속에 갇힌 리, 몸부림치듯이 키스하는 리, 오도 가도 못 하는 리, 자신이 파괴한 것을 두눈으로 보아버린 리, 두려움에 떠는 리,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리엄마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리, 긴 야자수 길을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리, 뒤돌아보지 않는 리. - P112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몇 초 뒤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가 붙어 있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절벽에 따개비처럼 드문드문 붙어 있는 것은 검은 목관이었다. 사람 몸 하나 크기의 검은나무관이 선반처럼 절벽에 박혀 있었다. 우리는 숨을 멈추고 리가 남긴 세계를 바라보았다. 절벽을 내리달리던 화면은 이어서 홍콩 컨벤션센터로 넘어갔다. 열기 속에서 리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긴장 속에서 바람 소리만 듣다가 익숙한 곡이 흘러나오자 좌석 여기저기서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리는 환한 조명 아래에 서 있었다. 환호속에 둘러싸인 리가 땀에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리는 팬들에게 인사말을 하는 중이었다. 사막 너머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관중 너머를 바라보던 리가 인사말 끝에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멍, 나는 침을 삼켰다. 美인지 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리가 환호 속에서 마무리짓는 것은 꿈 얘기였다. 우리는 다 같이 리의 마지막 말을들었다.
꿈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진실이 아니야. 그 꿈을 깨야지. 꿈을 깰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알아? 바로 뛰어내리는 거야.‘
영화의 제목은 ‘공중화‘였다. - P114

눈에 병이 생기면 허공에서 꽃이 보인다. 그것은 아시아 더스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증상이었다. 쥔과 나는 동시에 숨을 뱉었다. 경전에서는 분명히 비유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유로 그쳐야 할 일이 2013년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비유라고요? 뭐에 대한 비유라는 거죠?"
"어디 봅시다. 이건・・・・・・ 무명에 대한 설명 다음에 오는 구절이네요. 무명에 대한 비유인 거죠."
모니터로 몸을 숙였던 남자가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무명은 고통이 시작되는 첫번째 조건입니다. 모든 고통은 무명 때문에 일어나죠. 허공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 때문에 보이는 것이죠." - P115

"열기구야."
쥔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열기구는 점점 높이 떠오르며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바람을 탄 열기구는 비닐봉지처럼 가뿐하게날아오르고 있었다. 쥔과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열기구는 모래구름 속에 숨는가 싶더니 다시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 숨으면서 바람에 실려 올라갔다. 그때마다 쉼 없이 반짝거렸다.
우리는 넋을 잃은 채로 열기구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열기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바람을 타면 열기구는 곧 좁고 긴 통로로 들어설 것이다. 그곳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회랑, 기약도 없이 긴 길이었다. 부딪쳤다 다시 솟구치며 흙벽을빠져나가면 마침내는 깎아지른 절벽일 것이다. 절벽은 발 없는 주검들을 위한 곳이었다. 한때는 굴곡이 선명했던 존재들에게 자기 몸만큼의 공간이 주어진 곳, 어둠도 폭풍도 태양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곳. 절벽 앞에 펼쳐진 것은 망망대해 같은 끝없는 사막이었다.
우리는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허공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 P119

형제자매들은 모두 떠났다.
동요의 내용대로라면 목요일의 아이는 길 위에 있을 것이고 일요일의 아이는 친구와 있을 것이고 토요일의 아이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소녀는 햇빛이 원을 그린 소파에 혼자 앉아 떠나간 형제자매들을걱정한다. 얼굴이 예쁜 월요일의 아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걱정하고 토요일의 아이가 생활비를 버느라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스러운 금요일의 아이가 마음을 다치는 건 아닌지, 빛이나는 화요일의 아이가 시기를 받는 건 아닌지, 혹 그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소녀가 그들을 걱정하는 건 수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수요일의 아이는 근심이 많다.

---- [수요일의 아이] - P123

지금은 사무소의 임시 경리직이지만 소녀는 언젠가는 시설관리공단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가로등관리팀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다. 소녀는 얼마 전에 공단에서 가로등원격관리제어시스템을 들여놓은 것도알고 있다. 마을의 가로등을 관리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열심히 일을 해 가로등관리팀의 팀장이 되면 소녀는 가로등의 조도를 대폭 개선해 밤거리를 좀더 어둡게 만들고 가로등 옆에는 취객을 위한오바이트 통도 만들 생각이다. 한밤이나 새벽 거리에 홀로 서서 속에있는 것을 끌어올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행위다. 그러려면 가로등이든 가로수든 전봇대는, 뭔가 지탱할 게 필요하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명언을 코팅해 붙이듯이 소녀는 가로등마다 문구를 붙일 것이다. 저를 잡고 토하세요.
- P129

며칠 전부터 골목에 다른 공기가 떠돈다. 한 시간에 5. 4회꼴로 일어나는 지진의 진동도 아니고 천둥을 예고하는 양이온도 아니다. 뭔가 엄청난 일의 전조를 품고 있는,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지만 저절로 알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공기다. 불행하게도 소녀는 동네를 떠도는그 공기를 모두 느낄 수 있다.
마을은 가시거리가 이 킬로미터 이하인 무거운 연무가 한 달 이상걷히지 않고 있다. 공기 중엔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가득했고 바람은전혀 불지 않았다. 구청에서는 대기오염도와 그에 따른 행동요령을하루에 두 번 일괄문자로 전송했다. 뉴스에서는 오존중대경보가 내려진 지역과 호흡기 질환 사망자 수를 시간별로 내보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이런 날 호흡기 환자가 외출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 P132

뛰어가다가 바닥에 거꾸로 세워져 있던 못을 정통으로 밟았다. 못이발바닥 중앙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소녀는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코가 시원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순간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소녀의 몸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에 뚫리는 느낌. 온 존재가 비틀리며 하늘과 땅의비밀을 알아버린 느낌.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며 착지한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었다.
못은 콧물이 막고 있던 통로 대신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그건 못을 밟고 나서 갑자기 열린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것이 못을 계기로 터져나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 P134

둘은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하나, 둘,셋. 둘은 동시에 발판을 향해 뛰어내렸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혈관 같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자 콧물은 없고 뇌수만 있는 뇌가 펼쳐졌다. 사람의 가장 순수한 기억이 저장된다는 대뇌 깊은 곳. 그곳은 코가 뚫린 채로 살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소녀는 탄성을 질렀다. 착지와 동시에, 혈관에 가득 찬 콧물들이 소녀와 소년의 살을 뚫고 뿜어져나왔다. - P153

장마철이었으니 그날 저녁도 비가 내렸을 것이다.
스물세 살의 임신부는 우산을 받쳐들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반값으로 정리중인 생선차로 달려가 뱃고등어 한 손을 샀다. 어쩌면 비는 멎고 해가 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 비린 봉지를 들고돌아서던 임신부는 허공에서 반짝하고 사라지는 빛 하나를 목격했다.
광활한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임신부의 발목으로 또르륵,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눈 풀린 생선과 하늘을 뒤덮은 물비린내. 떠나버린생선차와 고요한 담벼락.
내 짐작 속 정황들이다. 그날의 바깥 풍경은 이랬을 것이라고 나는오랫동안 뱃고등어와 비 내리는 골목과 흙탕물이 튄 엄마의 흰 양말을 상상해왔다. 이 속에서 분명한 것은 없다. 

----[눈을 감고 기다리렴]  - P157

졸음은 눈썹과 눈썹 사이로 왔다. 할머니는 내 이마에 굴이 있기때문이라고 했다. 굴이 있어서 그 안으로 햇빛도 들어오고 잠도 들어오는 거란다. 아침에 신발을 신다가 끄덕끄덕 졸고 있으면 할머니는손으로 내 이마부터 쓸어내리며 잠이야 가라, 어여 나가라, 주문을읊었다.
퇴근길에 청주를 샀다. 할머니 기일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마트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자가다가왔다. 상단전이 열리셨군요.  - P158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외로울 때와 몸이 아플 때를 조심하라고. 세상의 모든 사기는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이 만든 틈새로 꿀처럼 스며든다고 했다. 할머니는 첫 월급을 받으면 성형외과에 가서 미간의 자국부터 없애라고 했다. 우리 은영인 이마가 움푹해서 허황된 무리들이늘 탐을 낼지 모른다. 이 자국을 없애야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잘 살지. - P171

해가 날 듯하다가 오후부터 잔비가 내렸다.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절을 시작했다. 지장전 불단에는 딸랑이와 요구르트와 아기덧신이 놓였다.
부모 인연 지중하여 업연 따라 태에 드나 세상 인연 부족하여 빛을보지 못한 영가, 아미타불 법력으로 태안지장 원력으로 법당 열어 부릅니다 마음 다해 부릅니다.
법당 바닥에서 한여름의 습한 냉기가 올라왔다. 천도문이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어미 가슴 활짝 열고 지극참회 발원하면 못 이룰 일 무엇일까. 다시 한번 돌아보아 참회발원 하옵소서 아이들아 미안하다 정말정말 미안하다.
엄마는 좌복 위에 엎드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는고개를 돌려 뜰에 앉은 동자상을 내다봤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삼도의 강이 있어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간 핏덩이들이 모래밭에서 고사리손을 모아 탑을 쌓는다고 했다. 돌 하나를 들고 어미를 생각하고,또 돌 하나를 들어 아비를 생각하며 탑을 쌓는다.  - P184

어쩌면 영이는 지영이나 희영이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애로 자라서나와 같은 시기에 초경을 하고 취직을 하고 사랑을 하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놓았던 시간대와는 또다른 해가 지고 노을이 붉은 수많은 저녁을 가졌을 것이다. 영이가 삼도의 강을 건넜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모든 것을 기억해낸 열다섯 살이후로 나는 한순간도 영이와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실 사물함에 넣어놓은 체육복 속에도, 수능 보러 가던 날의 필통 속에도,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오다 올려다본 이십대의 숱한 골목 끝에도 항상영이가 있었다. 그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이는 그냥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영이가 떠도는 구만리장천의 어느 한지점이라면, 광활한 공간에서 파동으로 존재할 영이에게 나는 모든채널을 열어 말할 것이다. 중력이 지배하는 어떤 행성에도 내려앉지말고 가라고. - P186

눈썹과 눈썹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려는 찰나 버스가 길을 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물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버스가 앞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 전에 물을 수 있을까. 버스 쪽으로 걸어가는엄마의 등 위로 햇빛이 자글거렸다. 빛 때문인지 엄마 등이 신기루처럼 멀어져갔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나 가졌을 때 뭘 제일 먹고 싶었어? 엄마 나 낳을 때 많이아팠어? 엄마 혹시나 가졌을 때・・・・・・ 밤나무골에서 자장가 부른 적있지 않았어?
이마 위로 햇빛이 쏟아지자마자 나는 개망초 꽃더미에 발이 걸려그 자리에 푹 엎어지고 말았다. 푸른 망초 대 사이로 알록달록한 실뱀한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빛깔이 너무 고와서 나는 엄마 몰래가슴을 쳤다. - P187

협곡의 여름은 찌는 듯했다.
벌레들이 찌르듯이 울었다. 나는 누나를 불렀다. 물가의 돌에 쪼그려앉은 누나의 치마 끝이 계곡물에 조금씩 젖어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누나, 치마가 젖어, 일어나 아니면 누나, 치마가 젖어, 끝을 당겨서 종아리 뒤로 넣어.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숲은 수천 종의생물이 들끓는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내 목소리는 금세 묻혀버렸다. 늘어진 이끼들이 발목을 감았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것 같은 계곡물소리, 풀 비빈 손으로 누군가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습한 냄새가 차올랐다. 숨이 막히고 귀가 따가웠다. 나는 숲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갇힌 걸 안 순간 누나가 일어났다. 치마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나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강한 여름볕이 누나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숲이 모든 작동을 멈췄다. 정적. 다시 여름벌레들이 일제히 끓어올랐을 때 누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전곡숲] - P191

실종자 가족들은 간혹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했지만 우리가 썩어가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체 하나가 던져지면 숲은 노골적으로 신호를 보냈다. 냄새, 한번 맡은 뒤로는 절대 잊을 수 없고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냄새. 풀냄새같은 것. 살냄새 같은 것. 똥냄새 같은 것. 그런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숲냄새라고밖에는 말할 방법이 없는 어떤 향에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냄새를 신호탄으로 숲은 다른 리듬으로 움직였다. 땅 밑에서부터 하늘을 가린 우듬지까지, 숲은 하나의 아가리가 되어 사체를 귀신같이 해치웠다. 숲이 우적거릴 때마다 절벽의 절리들이 관자놀이처럼움직였다. 일 년의 반이 한여름인 숲은 배가 부른 곤충들로 잉잉거렸다. 곤충들은 어디에서나 교미했고 숲의 모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끈질기게 알을 깠다. - P195

"토막을 내버릴 거야." 담임한테 뺨을 맞고 온 날 누나가 샌드위치패널 벽에 손톱을 짓이기며 말했다. 누나가 그 말을 한 몇 주 뒤에 실제로 숲에서는 토막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숲에 제 발로죽으러 들어가는 사람들 외에 누군가를 죽인 뒤에 숨기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에 미세한 동요를 던져주었다. 사라지고 찾는 일 외에 숲에서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그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육상부 하계합숙을 마치고 왔을 때 숲은 여름의 정중앙을 통과하고 있었다. 검푸르게 독이 오른 잎사귀들로 숲은 무겁고 습했다. 응달의 나무를 타고 오른 이끼들이 가지 끝까지 발아했다. 누나는 계곡가에 앉아 하릴없이 리코더를 불다 멈추다 했다. 분무기를 뿌린 것처럼숲은 증기로 빽빽했다.  - P198

그들은 이십만 년 전인 중부 홍적세 후기에 있었다.
한 손에는 불을 한 손에는 돌을 들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고 턱은앞으로 튀어나왔다. 낮은 이마에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몸에는 짐승가죽을 둘렀다. 몸집은 지금보다 훨씬 작았지만 주먹도끼로 멧돼지의급소를 단숨에 찌를 수 있는 다부진 근육이 있었다. 눈빛은 예리한 생기로 번뜩였다.
덥수룩한 머리는 가발로, 짐승 가죽은 호피무늬섬유로 대체할 수있었다. 어깨는 구부정하게 들어올리고 턱은 내밀고 걸어다니면 되었다. 다만 작은 몸집과 눈빛만은 재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축제였으므로 야생동물과의 대치나 굶주림으로 날이 선 모습보다는 밝게 웃는편이 좋았다. 구석기축제에 투입될 구석기인의 모습이었다. 전역을하고 돌아오자 마을은 축제 준비로 들썩이고 있었다. - P209

눈을 뜬 것은 빛 때문이었다. 숲의 우듬지층이 조용히 일렁이면서빛무리가 흩어져내렸다. 숲이 반짝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었다. 숲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후텁지근하면서도 졸린 바람.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콧등에 걸려 있다. 선풍기 바람은 누나의 콧등을 지나 나를 향해 불어오는 중이었다. 바람은 마늘 절구와 돌조각을 지났다. 누나가 손질해놓은 간이탁자를 지나고, 매미가 울던 계곡가의 누나, 리코더를 털어서 침을 빼던 누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과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들을 훑으면서 바람은 천천히, 너무도 느리게 돌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바람이 나에게 당도하고 숲이 모든 작동을 멈추었을 때, 나는 퇴적 알갱이들이 골짜기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현무암 파편과 잘고 흰 모래 들이, 적갈색 점토 입자들이 협곡을 채우며 꽃씨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숲에 누워서 반짝이며 명멸하는 그것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 P220

미숙이가 집을 나가던 날은 아침부터 강에서 습한 바람이 올라왔다. 창문만 열어도 콧속과 겨드랑이가 금세 축축해지는 날이 며칠째이어졌다. 그날 별다른 징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중부 내륙지방에 안개가 짙게 끼겠다는 예보가 있었고 점심즈음 미숙이가 자두씨를 삼켜 소금물을 타주고 토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한여름의 안개도 장폐색을 일으킬 수 있는 과일씨도, 위험하지만 살다보면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눅눅한 구름이 대기를 눌러왔다. 미숙이가 일 년중 제일 못 견뎌하는 장마 뒤끝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만 되면 미숙이는 생기를 잃고 비루먹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간밤 강가] - P223

수컷들을 보내고 난 밤, 미숙이는 하늘을 향해 오래 울었다. 발정기가 되면 미숙이의 하울링은 더 잦아졌다. 서늘한 강가에서 땅을 파듯우는 나이든 암캐의 목소리는 감당하기에 쉬운 소리가 아니었다. 좀체 짖는 법이 없는 미숙이지만 한번 울음을 시작하면 그 소리는 사람마음을 후벼놓는 데가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나도 같이 앓았다. 우우-우우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굵고 짙은 울부짖음. 나는 미숙이의 소리를 들으면서 짖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울부짖는다는 말이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았다.
설원을 달리지 못해서 답답한 것일까, 새끼를 가질 수 없어서 저렇게 허허로운 것일까, 이리저리 짐작해보기만 할 뿐 미숙이가 울부짖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이고 미숙이는 개였다. 나보다생의 선을 더 달린, 다른 종이고 다른 성인 미숙이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 P235

문에는 아직 상품코드와 용량과 소비전력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내외부 재질은 고급 엠보싱이라고 했다. 미려하고 잡기 편한손잡이, 편리한 이동바퀴, 신개발 자동닫힘 도어. 지금은 유명 보일러 회사와 합병된 한 중소기업에서 한때는 유력상품으로 생산했던 그것.
화분에 물을 주듯, 때맞춰 환기를 시키듯, 영희는 일주일에 한 번 그안에 냉기를 불어넣는다. 신발과 노트와 뼛가루가 함께 살아 있는 곳,
영희는 아직 그 안에 살고 있다.

----[울고 간다] - P255

그렇지, 병원 문을 밀고 나오면서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안쪽으로 구십 도 가까이 꺾는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고는 손등뼈로 가슴팍을 세 번 정도 두드린다. 정확히 십이 개월 하고도이 일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병원 아래층의 보습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이 옆 문구점으로 우르르 들어간다. 영희는 건물 입구에 서서 제자리뛰기를 두 번 정도 한다. 가슴에서 콩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두번째 착지를 하고 나자 그소리는 귓바퀴에 와서 멈춘다. 이 또한 일 년 하고도 이 일 전부터 들어온 소리다. - P256

"이거 ‘장‘에다 좀 넣어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장‘이라는 단 한 음절, 이용 받침의 울림과동시에 임모씨의 퀭한 동공이 영희의 눈에 멈추었다 거두어졌다. 순간 영희는 쇳덩어리에 깔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냉장의 진동음이 어마어마한 망치가 되어 영희의 뒤통수를치고 있었다. 임모씨가 떠나도 냉장고를 결코 버릴 수 없음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명령이든 애원이든 냉장고를 버리지 말라는 말을 직접 했으면 그렇게 아찔하진 않을 것이었다. 영희는 진심으로 임모씨가 얄미웠다. 그날 이후로 영희도 임모씨도 냉장고에 관한 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임모씨는 자신처럼 생겨먹은 사람은 어떻게살아야 하는지, 자신처럼 생겨먹은 영희에게 어떤 기타정보도 남기지않고 죽었다. 영희는 국산 금잔디를 입히는 대신 임모씨의 발가락뼈하나까지 모두 불태웠다. 마트에서 은나노 밀폐용기를 산 것은 화장
‘터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그곳에 임모씨의 유골을 쏟아붓는 동안영희는 천식 환자처럼 기침을 했다. 통 위에는 임모씨가 평소 아끼던자색 보자기를 씌웠다. 영희는 그 통을 냉장고에 넣은 채 냉장고 하나만을 가지고 방을 옮겼다. - P270

며칠 더 골똘히 생각하면 냉장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외출은 못 할 것이다. 열쇠집늙은이가 정말 귀신이 되어 쏘아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자한테 냉장고를 맡겨놓고 정말 먼 데로 가버릴까. 영희는 머리를 형클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이제는 더 미룰 기한도 없었다. 이대로 한두 시간 지나가면 남자는 서서히 곤란한 표정으로 바뀔 것이다.
남자가 공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영희는 살금살금 걸어가 냉장고 전원을 연결한다. 820W/H의 소비전력이 갑자기 큰 진동음을몰고 온다. 임모씨도 철수도 진동음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얻는 순간이다. 영희는 왼쪽 주먹을 말아쥐고 손목을 구십 도로 꺾는다. 손등뼈로 냉장고 문을 두드려본 뒤 영희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착한이불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접어 그 안으로 구깃구깃 들어간다. 대낮인데도 냉장롱 불빛은 진한 주홍빛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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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엔 사건 사고가 많았다.
인천발 멜버른행 여객기가 남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되었고 무기를들고 탈영한 병사들이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해안에서는 난류를 타고온 밍크고래가 연이어 그물에 걸려나왔다. 아침에 지하계단을 내려가사무실 문을 열면 날개 달린 개미 수천 마리가 바닥에 엎드려 퍼덕거리고 있었다. 하루 업무는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개미 더미를 쓰레기봉투에 털어넣는 일로 시작되었다.
전임자의 책상은 그대로였다. 보던 문서는 서너 쪽이 넘어간 채로펼쳐져 있었고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가른 플러스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만두었다기보다 잠깐 화장실에 간 사람의 책상에 가까웠다.
전임자의 것일 휴대폰 배터리는 충전이 완료된 채 여전히 꽂혀 있었고 반쯤 남은 핸드크림, 전임자가 마지막으로 뽑은 형태 그대로 멈추었을 티슈의 선까지 고스란했다.
---- [전임자의 즐겨찾기] - P41

나는 양쪽 전화를 동시에 끊어버렸다. 끊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이없이 생기고 어이없이 죽는지,
생물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그 생물들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연구자를 골탕 먹이기라도 하듯 늘 마음대로 몰려다니고 마음대로 죽어버렸다. 거기에 가설을 세우는 일은 피로했고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 P49

장마는 끝을 보였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날이 저무는 속도에 맞추어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정은 나를 낳지만 않았으면 천하를 얻었을거라고 했다. 어려서 들은 말이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그 말은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침잠하는 날은 더 그랬다.
나는 내수면연구소가 있는 흑천으로도 정이 있는 해안으로도 가지 않았다. 식사 때를 두 번 지나치면서 잠을 잤고, 일어나보니 다시 날이저물고 있었다. 세번째 전화가 온 건 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흑천도 해안도 아닌 송의 번호였다. - P52

몇천 미터 깊이의 심해에는 마그마가 굳어지면서 생긴 뜨거운 물이 바닷물과 반응해 검은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블랙스모커가 있다.
블랙스모커 근처에 사는 생물들은 태양에너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지구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기체만을 먹고 산다. 지구에서 햇빛이없이 생명체가 살아가는 곳은 단 두 곳, 심해의 블랙스모커와 도청 밑지하연구소뿐이었다. - P62

정은 한번 다녀가라고 하루에 열두 번 정도 전화를 했다. 턱뼈가 부서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도 했고 코가 주저앉았다고도 했다. 나는정이 이제 좀 적당히 살기를 바랐다. 정은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들은 것도 많고, 들은 것이 많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정은 몇몇 친구들이 미니홈피에 손녀 사진을 올리는 것까지 부러워했다. 그것은 수천만원짜리 밍크고래를 손에 넣고 싶은것보다 더한 욕심이었다. 노년에 손녀 사진을 쓰다듬으며 살기 위해선 젊은 날 많은 걸 억제해야 된다는 걸 정은 몰랐다. 남편을 잡아먹고 싶어도 참고, 한탕 크게 하고 싶어도 참고, 자식이 발목을 잡으면잡힌 채 산 자만이 나중에 그런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 P63

"소초에 있으면서 한 번도 숙면을 취해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밤 근무가 없을 때 잠을 더 못 잤던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에요."
"그래? 고래도 그래. 니네 수영이 누나 자료가 그러더라. 고래는 폐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깊은 잠에 빠지면 물속에서 질식할 수가 있다.
그래서 고래는 절대 깊은 잠을 자지 않는다."
안쓰럽기도 하고 화제도 돌리고 싶어 한 말이었지만 탈영병의 표정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초소에 서서 수평선만 보고 있으면 눈보다 귀가 예민해져요. 햇빛은 수면 위에서 자글자글 끓고 바다는 조용한데 그 밑은 말할 수 없이소란스러워요. 몇천 미터 심해에서 찰랑거리는 수면까지 밑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게 들려요. 그러다 태풍이 오고 바다가 정말로 뒤집어지면 바다 밑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해져요. 심해에서부터 수면까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게 들려요. 그런 게 들리기 시작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나는 무언가에 넋이 나간 듯한 탈영병의 옆모습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이 얼마나 예쁜지 만져보고, 몸의 모든 접힌 부분을 들추어 냄새를 맡아보고, 배도 한번 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탈영병을 처음 본 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65

"고래 숨소리가 들려요. 습기 찬 공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소리, 고래가 분기를 뿜어요.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 입자들이 해변까지 날아와요. 물 위로 솟구칠 때요, 바다 한가운데서 섬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같았어요. 머리를 내밀고 사과만한 눈으로, 아니, 거의 수박만했던 것도 같아요, 고래가 저를 봐요. 눈이 얼마나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지몰라요. 저는 고래한테 단박에 빠져버렸어요. 왜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래 얘기를 해왔는지 저절로 알았어요. 이마엔 미열이 돌고, 심장은 시끄럽고, 다른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들려서 자꾸 문제 일으키고."
그건 열병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스스로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탈영병은 전임자 얘기가 빠진 순수한 고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임자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비커에 떨어뜨린잉크 한 방울이 아무런 번짐 없이 또르륵, 바닥에 닿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 P66

정에게 와사비는 자존심의 정점 같은 것이었다. 해안 변두리에서자잘한 회나 뜨며 살지라도 그 회만은 최고로 정성스럽게 갠 와사비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정은 늘 청하를 팔팔 끓인 물에 와사비를 개었다. 그것을 손목이 시큰해질 때까지 개고 개어야 톡 쏘는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고 했다. 녹색 광택이 빛나던 솔표 와사비분말은 내 유년을 장악하는 거대한 징표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무리 정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코끝을 치고 올라오는 와사비향은 어쩔 수 없었다.
주말에 연구소 관사에 남아 부화동 수온을 점검하던 수많은 여름마다나는 컵라면에 와사비를 풀어 먹었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눈에 먼저들어온 것도 솔표 분말이었다. 정은 앞니 하나가 나간 상태였다. 전화로 듣던 것처럼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 P68

고래의 젖엔 다디단 지방이 많아서 한 모금만 먹어도 하루에 이 센티씩 큰다고 했다. 고래는 지느러미를 젖히고 가슴근육을 움직여 아기에게 젖을 뿜어줄 것이다. 아기는 고래의 아기가 먹는 반의 반의 반만 먹어도 배꼽이 볼록 튀어나와 금세 쌔근거릴 것이다. 고래는 아기를 등에 태우고 가슴지느러미로 노를 저어 따뜻한 바다로 데려다줄것이다. 고1은 고래에게 ‘내 아기에게 젖을 줘‘라고 말했다.
그날 밤 작은 어진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은 고1과 고래, 검은 바다와 아기, 해변의 모래들과 해안 초소 위의 경계병이었다. 경계병은 해안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낚시꾼도 취객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경계병은 해변으로 뛰어내려갔다. 여학생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해안에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좌초한 고래의 지느러미를 젖히고 신생아를 유기한 고등학생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혹등고래도 오랫동안 그 앞바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 P72

주마등의 끝엔 탈영병이 있었다. 박제철을 들여다보던 탈영병이 큭큭 웃는다. 나는 탈영병과 마주 앉아 와사비에 밥을 비벼 먹는다. 담요를 덮어주자 탈영병은 몸을 웅크린다. 탈영병은 미열이 있고, 탈영병은 고래 얘기를 한다. 탈영병의 얘기를 듣는 나는 그 시간들이 조금고통스럽다. 쓰레기봉투 옆에 앉아 있는 나는 그 시간들이 탈영병과함께 보낸 짧은 여름이 어떤 선물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그 며칠의시간 때문에, 물속이지만 이제 정말로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앉은 채로 나는 꿈을 꾸었다. 블랙스모커가 피어오르는 심해, 지구상에서 햇빛 없이도 생명체가 살아가는 유일한 곳, 고래의 젖을 먹고세상에서 제일 큰 아기가 된 사람의 아기가 기분이 좋은 날이면 블랙스모커까지 헤엄쳐 내려오는 꿈. 크릴새우를 훑어먹고 대왕오징어와싸우며 심해를 떠돌던 아기가 잠깐씩 와서 쉬어가는 곳. 나는 그곳에앉아 잠이 들었다. - P76

여객기와 별도로 고래 연구자들에게 그날은 중요했다. 혹등고래는홀로 이동하는 고래였기에 백여 마리가 집단으로 좌초한 건 이례적인일이었다. 호주의 고래연구소는 이 이례적인 현상을 밝히는 데 필요한 시간과 예산과 인력을 연말까지는 산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혼획을 가장한 불법포획이 만연하면서 해안의 밍크고래 개체수는크게 줄었다. 일부는 좌초한 고래를 위해 전국적인 구조체계를 갖추자고 주장했고 일부는 민족의 오랜 식단인 고래고기의 대중화를 위해포경을 재개하자고 주장했다. 시간이 가면서 문어통발에는 문어와 밍크고래 외에도 다양한 것이 걸려나왔다. 모 항공사의 로고가 찍힌 기내 의자를 봤다는 어부도 있고 메밀베개 껍데기를 봤다는 어부도 있었지만 원래 바다는 쓰레기장이라고도 불릴 만큼 안 떠다니는 게 없었다. - P78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더라는 얘기를 듣고 정은 딸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무한대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최보살은 정의딸이 어디에 있든 물에 흠뻑 젖어 떨고 있으니 양지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굿을 해야 된다고 말했다.
정은 작은 어진에 줄을 만들었다. 그 위에 딸의 배냇저고리와 원피스와 교복치마를 내다 걸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빛이 그것들을오래 소독하고 말렸다. 해안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끔씩 튀어올라 그것들을 구경했다.
하천을 헤엄치는 동자개는 여전히 가슴지느러미 가시를 뒤로 젖히며 빠가빠가 울었고 가슴지느러미를 가진 모든 어미들이 그 소리를들으며 같이 운다는 얘기도 그해 여름에 퍼져나간 소식들 중 하나가되었다. 깊은 산 계류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울이 되고 시내가 되어바다로 흘러갔지만 민물고기는 바다의 염분을 견디지 못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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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서 높새바람이 불어오던 늦봄에 누나는 왔습니다. 엄마는말했습니다. 동생이 잘못되면 니 책임이야. 그래서 누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버스에 얌전히 앉아 곧장왔습니다.
마을로 들어오다 누나는 군인을 보았습니다. 학교도 보았습니다.
탑도 보았고, 산과 강도 보았습니다. 얼굴에 파리가 앉은 노인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누나를 째려보았습니다. 누나는 무서워서 동생의 손을꼭 잡고, 마구 뛰어서 왔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고깃국을 끓여줍니다. 국물 위에 뜬 비계에 털이송송 박혔습니다. 비계를 집어먹은 동생은 밤새 토합니다. 동생이 게워내는 걸쭉한 덩어리를 누나는 한 손으로 받아냅니다. 다른 손으로는 동생의 머리를 누릅니다. 더 토해봐, 빙섀야. 사람 잠도 못 자게다음날부터 누나는 학교에 다닙니다. 

----[비밀동화] - P9

높새바람이 마을을 통과합니다. 갈참나무 사이로 고온건조한 바람이 불어갑니다. 백엽상의 온도계 눈금이 올라가고 지붕들 위로 뜨겁고 가벼운 불씨들이 떠다닙니다. 머리에 풀잎을 꽂은 군인들이 피터팬처럼 불씨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동생이 누나를 부릅니다. 누나아아앙아아아아. 누나를 부르는 소리는 탑과 운동장과느티나무를 돌아 마을 곳곳으로 퍼져갑니다.
누나는 알지 못하지만 학교는 몇 년 뒤에 폐교가 됩니다. 누나가 덧셈뺄셈을 하던 칠판에는 군인들이 WXY를 그려넣고 동생이 맴을 돌던 이순신 장군 옆에서는 키 큰 풀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오랜 후에 누나는 폐교를 찾아와 울게 됩니다. 돌을 껴안고 울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 P10

어쩌면 누나는 잠깐 잠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공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빠가 엎드린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돌려 자리에 눕는 게 보입니다. 누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 있기 때문에 그것은곁눈 시야로,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곧이어 엄마가 팬티를 올립니다. 누나는 자리에 누워 골목의 발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지만 엄마 아빠한테선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압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나는 종종 그날을 회상하게 됩니다. 단칸방에서 어린 남매를 키우던 젊은 부부의 너무 고요한 교합을, 상체를일으키고 속옷을 올리던 단 두 동작, 그 숨죽인 움직임이 주던 기이한슬픔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나는 어린아이였고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날 밤 천장을 보고 누운 누나의 얼굴에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 P16

단칸방에 찾아온 무수한 밤들 중 한 날에 회수는 생겨났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던 때에 회수를 가진 엄마는 살기 싫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습니다. 조금 기운이 나면 엎드려서 웁니다. 조금 더 기운이 나면 누나한테 시비를 겁니다. 누나가대답을 늦게 하거나 방문을 열어놓거나 비누에 머리카락을 묻히면 냄비들을 모두 꺼내 납작하게 밟아버립니다. 누나를 사등분으로 접은뒤 싱크대 속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다 정상으로 돌아오면 엄마는누나 볼에 미친 듯이 입술을 비빕니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가 흙을묻혀오고 머리카락을 떨어뜨려도 마구 따라다니며 칭찬을 합니다. 누나는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엄마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됩니다. 자신을칭찬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선 금세 기가 죽는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칭찬을 끌어내기 위해 기를 쓰며 살게 됩니다.
- P17

희수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엄마가 열무단을 들어 누나 등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열무는 단단합니다. 열무의 흙들이 누나의 머리카락을 파고듭니다. 열무가 다 흩어지자 엄마는 자리에 주저앉아 웁니다. 누나와 희수는 가만히 앉아 엄마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립니다. 엄마는 꺼이꺼이 웁니다. 누나는 희수가 휘젓다만 허공에 말풍선을 띄우고 ‘꺼이꺼이‘라고 씁니다. 엄마가 우는 건자기 때문이라고 누나는 생각합니다.
한 번씩 꺼이꺼이 울고 나면 엄마는 며칠 동안 웅크리고 누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빠는 밥상을 펴놓고 앉아 일을 하다가 희수를 업어달래고, 희수가 잠들면 누나에게 줄 밥을 볶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노려보다 베개를 던지며 소리를 지릅니다. - P18

토요일입니다. 백엽상에서 맴을 돌다 정글짐으로 건너갔던 희수가긴 돌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누나는 친구들과 곤충채집 숙제를 해야합니다. 누나는 죠리퐁 한 봉지를 뜯어 희수에게 쥐여줍니다. 천천히먹어.
그래도 희수는 자꾸 누나를 따라오려고 합니다. 누나야, 나도 갈래.
나도 고기 잡을래. 우리 고기 잡으러 가는 거 아니야, 빙섀야. 누나는긴 돌 위에 희수를 밀쳐 앉힙니다. 야, 빨리 가야 돼, 친구가 누나를재촉합니다. 누나앙, 나도 갈래. 희수가 징징거리며 다시 일어섭니다.
아! 누나의 책가방을 잡던 희수가 나동그라집니다. 흙바닥 위로 죠리퐁이 쏟아집니다. 누나아앙아 누나는 친구들과 서둘러 다리를 건닙니다. 누나아앙아아 돌아보니 희수가 등을 구부리고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죠리퐁을 한 알 한 알 봉지에 주워담습니다. 주워담다가다시 누나 쪽을 보며 웁니다. 울다가 다시 쪼그리고 앉아 죠리퐁을 주워담습니다. 그러다 다시 엉덩이를 들고 누나를 부르며 웁니다.
여름 해는 깁니다. 긴 돌 위에는 희수가 없습니다.  - P23

절터 위로 낙엽이 지고 눈이 오고 또 봄이 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드디어 무릎을 펴고 절터에서 캐낸 것들을 정리합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금줄을 두른 사람들이 카메라에 대고얘기합니다. 출토된 기와편이나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이 10세기경에 세워졌다고 얘기합니다. 발굴된 유물이 모두 13세기 중반의 것이고 그 이후의 유물은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절은그즈음에 폐사된 뒤 한 번도 복원된 적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금당지와 강당지의 흙이 모두 불에 탔고 퇴적물에 목탄의 흔적이 있으며 마을이 몽고군과의 접전지역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들은 절이 몽고 침입시 몽고군에 의해 전소되었다고 정리합니다. - P33

높새바람이 전언을 실어옵니다. 누나는 돌축대에 혼자 앉아 귀를기울입니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와 절이 불에 타던 날, 큰스님들은담담하게 열반에 들어 사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개‘자에도 못 간 젊은 승려들은 새까맣게 탄 몸 그대로 절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절에 살면서 예불을 드리고 향을 피우고 마을을 돌며 탁발을 합니다. 돌축대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바라보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물을 마십니다.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소리없이 걸어가며 저물 무렵이면 줄을 지어 지붕 없는 절터로 돌아옵니다. 한데에서 오래 살아 머리 위에선 풀이 자랍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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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
최은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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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와함께 한주간을 보냈다. ‘눈으로 만든 사람‘,‘목련정전‘을 또 읽었고, 장편‘아홉번째 파도‘를 읽었고 첫 소설집‘너무 아름다운 꿈‘을 읽고있는 중이다. 거꾸로 만나는 작가의 그간의 글들이 서늘하고 뭉클하면서 단단하다. 모든 편들의 글에서 화자가 되었다가 독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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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길이는 4.8킬로미터였다. 산 끝에 절벽이 있었고 도로는 그위로 나 있었다. 절벽길 아래는 바다였다. 십여 년 전에 생긴 이 해안도로엔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탑이 있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날, 사람들은 탑을 세우고 그 앞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기한을 백 년으로 할지 천 년으로 할지 이견이 있었지만 캡슐 개봉 시기는2100년으로 정해졌다.
60킬로미터에 가까운 해안선을 갖고 있는 이 도시에서 해안도로는일부 구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떠오르는 해를 보고싶을 때 다른 곳이 아닌 해안도로로 달려갔다. 기념공원 앞에 차를 세우고 해송 사이로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탑 앞에서 소망을 되뇌는것도 잊지 않았다. 가로등과 키가 비슷한 설치대에는 바다와 해를 표현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는 시의 심벌이었다.
해는 해안도로의 전 구간에서 나부꼈다. 전망이 좋은 바위 위에는 해 - P6

안 초소가 있었고 기암 괴석들 사이에는 아주 작은 해변이 있었다.
바다에 사는 새들이 해풍과 함께 도로 위를, 이상한 바위들과 초소와탑 사이를 날아다녔다.
수온이 다른 해류들이 만나 일정한 방향으로 쉼없이 움직이는 곳이었다. 바다의 성질을 간직한 석회암이 산속에 동굴을 만드는 곳이었 그곳에서 해는 매일 떴다. 매일 지기도 했다. 도로는 산과 바다사이의 절벽 위를 달렸고, 북위 37도 동경 129도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해안도로의 북쪽 끝에서 출발하면 차로 십 분이 걸리는곳. 걸으면 한 시간 뛰면 삼십 분 그렇게 도착할 수 있는 해안도로의남쪽 끝에 어항이 있었다. - P7

송인화는 아직까지 유리골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코끼리산에서 건너다보거나 어라항 회센터 앞에서 올려다본 게 전부였다.
산비탈에 겹겹이 올라앉은 집들은 산언덕의 칠부 능선까지만 이어져있었다. 그 위는 텃밭과 공터였다. 공터로 남아 있는 유리골 정상은오래전에 사형장 터였다. 몇백 년 전, 동해안 수군의 죄수들은 포진이있던 코끼리산 뒤편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 유리골 정상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척주 사람들은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사형당한 죄수들의 원혼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송인화는 유리골 정상을 볼 때마다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숨을 쉬었을 죄수들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오래전의 사형장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골 정상은 지금 지진해일 대피소로지정되어 있었다. 어라진 일대의 골목골목에는 지진해일 대피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그 화살표들은 모두 유리골 정상을 향했다. 척주시 재난안전대책본부가 관리하는 긴급대피장소, 오래전 숱한 사람들의 목이 꺾였던 곳. 그 유리골과 코끼리산을잇는 산중턱에 바다를 보고 서 있는 상이 하나 있었다. - P30

척주를 떠나기 전날 밤이었을 것이다. 송인화는 은남 마을로 가 하경희 옆에서 하룻밤을 잤다. 밤새 울었던 것도 같고 아버지 장례식 때못 잔 탓에 밤새 잠만 잤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더이상 진료소에 못놀러온다는 게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슬퍼서 밤새 마음이 쓰렸던 기억은 났다. 은남 해안가에 놀러갔다가 화장실을 찾아 보건진료소로들어갔던 중학생 때 이후로 하경희는 송인화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타인이었다. 송인화는 보건진료소의 집기부터 종이 한 조각까지그 안에 있는 것들이 그냥 다 좋았다. 장래희망이 보건진료소 직원으로 바뀔 정도였다. 동진아파트에서 탈출해 은남 바다에서 사는 게 인생 목표라고 하경희한테 정기적으로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바다와 진료소에 무턱대고 마음을 빼앗긴 외로운 여자애를 하경희는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기특해하기도 했다. - P52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꽃냄새가 송인화를 감싸왔다. 송인화는 지하에서 내내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다가 송인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라일락 덩어리들이 햇빛을 끌어모았다가 튕겨내며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겨울에 보면 저게 라일락 나무인 걸 또 까먹겠지, 송인화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조금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의료원 앞 사거리 일대를 막처럼 덮고 있는 이 슬픔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송인화는 미세한 통증만을 느꼈다.
해가 지는지 빛이 한 겹씩 사라져갔다. - P57

"부모 잡아먹고 서방 잡아먹고 자식까지 잡아먹을 년"
송인화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복장에서 내장을 다 훑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 잡어만도 못한 년. 냄새나는 년. 부모 자식 서방 다아아아아아 죽일 년."
노인은 정확히 송인화의 눈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들은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송인화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송인화는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몸의 반응은 몇 초 후에 왔다.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송인화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폐의약품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번들거리는얼굴을 닦지도 않고 보란듯이 약들을 분리했다. 허선생이 흥분하는노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P72

해가 지기 시작하자 공동 복장 위의 구름이 색을 바꾸었다. 붉은구름들은 해일처럼 빠른 속도로 코끼리산을 타넘었다. 등대에 불이들어온 걸 신호로 방송수신탑에도 불이 켜졌다. 뒤이어 유리골의 집들도 하나둘 불을 밝혔다. 태양광이 사라지자 여래상도 어둠 속으로모습을 감추었다. 송인화는 자신과 서상화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지는것을 느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맞은편 어둠을 바라보았다. - P74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제일 안쪽 평상에 앉자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듯 물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저만치 계곡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소나무 줄기가 평상 바로 옆을 지나며 위로 뻗어 있었다. 젖어 있어서인지 나무줄기에서는 송진 냄새가 짙었다. 소나무잎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닿을 듯 가까이에서 흔들렸다.
"좋다...."
숲을 보던 송인화가 말했다. 감자전과 도토리묵이 나올 때까지 둘은 물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계곡을 내려다봤다. 음식이 상에 놓이자송인화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턱을 쓱 닦았다. 그제야 윤태진은 송인화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좋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송인화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집었다. 그러더니 "미쳤나봐" 하면서 또 턱을 닦았다.
평상 난간 아래쪽에는 다육이가 심어진 기다란 장화 화분이 있었다. 닭백숙에 넣는 황기 냄새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고 테이블을 덮은흰 종이 위로 작은 벌레들이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갔다. 모자를 벗으며 단체 등산객들이 들어왔고 옥수수 찜통에서 올라온 김들이 쉬지않고 창유리에 서렸다. 손을 뻗으면 닿는 테이블 맞은편에는 송인화가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둘 다 알지 못하던 때였다. 양손에 젓가락 하나씩을 들고 감자전을 가르는 송인화를 보면서 윤태진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옆에서 이렇게 이유 없이 눈물을 글썽여준다면, 그러면 흔들리지 않고 갈 수도 있겠구나,
- P116

윤태진은 침대맡에 놓인 갈색 약통에서 알약 네 개를 꺼냈다. 송인화와 헤어지고부터 수치가 다시 나빠져 먹기 시작한 호르몬제였다.
윤태진은 M자가 쓰여 있는 흰색 정제를 내려다보면서 그동안 자신의몸에 들어왔던 약들을 떠올렸다. 눈두덩이 붓고 염증이 심해서 먹었던 스테로이드 경구약 돌출된 안구에 결막 출혈이 올 때마다 맞았던스테로이드 주사제 대가처럼 따라온 부작용으로 밤마다 근육이 비틀리던 일, 피를 뽑아 호르몬 검사를 하고 수치 확인을 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윤태진은 일반인들보다 두세 배는 강하게 정신줄을 잡고 있어야 일반인들과 엇비슷한 생활이 가능했다. - P121

널찍한 탕 냄비 두 개가 각각 테이블에 올려졌다. 이창규와 김순영이 왼쪽 테이블에, 김승희와 송인화와 서상화가 오른쪽 테이블에 앉았다. 육수가 끊자 주인이 살아 있는 낙지 두 마리를 들고 왔다. 뜨거운 냄비 속에 들어가자 낙지는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무와 야채를휘저으며 요동치던 낙지는 밖으로 다리를 뻗어 냄비 손잡이를 휘감았다. 그냥 두면 냄비 밖으로 기어나올 것 같았다. 송인화는 입술을 물며 낙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좋았다. 저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저렇게 살아 있는데, 왜 꼭 익혀 먹어야 할까. - P143

오징어 철이었다. 울릉도 근해로 나가있던 오징어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송인화는 일주일에 한 번은 아침잠을 포기하고 어항으로 나갔다. 채낚기 오징어 입찰이 한창인 어판장을 지나 2호집으로 가면주인이 오징어 내장을 받아뒀다 탕을 끓여줬다. 방금 죽은 오징어의내장은 짠내도 없어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았다. 오징어내장탕에 맛을 들인 이후로 송인화는 씹는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오징어를 잘 먹지 않았다.
새벽 어판장의 외침 소리를 들으면서 칼칼한 내장탕을 먹다보면 이동네 어딘가에서 서상화가 아직 아침잠을 자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예전엔 버리는 고기라고 안 먹었는데 이제는 비싸서 못 먹는다며 곰칫국 얘기를 하던것도 떠올랐다. - P171

산속 고갯길로 들어서자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포장만 되어 있을 뿐 댓재는 구불구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경사 높은 산길이었다. 운전이라면 도가튼 송인화였지만 핸들을 이리 꺾고 저리 꺾으며다리에 힘을 주다보니 금세 목이 뻣뻣해져왔다. 와이퍼 때문에 시야도 어지러운 상태였다. 맞은편에서 가끔씩 대형 트럭이 내려올 때마다 송인화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속도를 늦췄다. 저곳만 돌면 정상이 보이겠지 하면 다시 굽은 길이었고 저곳만 돌면, 하고 올라가면또 길이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몸이 다 굳은 다음에야 송인화는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작은 휴게소 건물 하나와 댓재‘라 새겨진 대형 비석이 있었다.
송인화는 차에서 내려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한여름인데도 댓재정상엔 차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어왔다. 비석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덕왕산 댓재-두타산‘이라 쓰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비석 너머로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져 있고 구름이 닿을 듯 낮게 내려와 있었다.  - P178

"무더위 속 소나기, 동해안 비‘
휴대폰 화면에 날씨 알림이 떠 있었다. ‘동해안 비‘라는 말을 보고송인화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들어도 가슴 아픈 지명, 동해안.
송인화는 우산도 가방도 놔둔 채 울면서 운동장 너머 밭으로 걸어갔다. 감자밭을 지나고 콩밭을 지나 대마밭으로 걸어갔다. 송인화는키 큰 대마 줄기를 휘저으며 밭 한가운데로 갔다. 빽빽하게 치솟은 대마잎에 몸을 묻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이파리들이 모든걸 잊게 해줄 듯 아찔한 향을 내려보냈다. 송인화는 층층이 펼쳐진 잎들에 얼굴을 묻고 몇 년 동안 어디서도 풀어내지 못한 울음을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 P184

아빠가 모는 덤프는 브레이크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고장이 나도 바로 수리되는 게 아니었다.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바로 수리가 되었지만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루에 맞춰야 되는 물량이 빡빡해 시간은 잘나지 않았고 그러면 아빠는 정비가 접수될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차를 몬다고 했다. 덤프 운전을 오래 한 아빠는 브레이크가 말을 안들을 때마다 임시로 처방하는 아빠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래도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비가 와서 노면이 흙탕뻘이 되는 날은 저 아래 크러셔 건물까지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고도 했다.
서상화를 광산에 데려간 뒤로 아빠는 광산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때 봤던 얼굴 까만 아저씨 있지, 거기 슬러그 쌓여 있던 자리에말이야, 하면서, 서상화가 기억하는 35 광구의 풍경은 열한 살 여름방학 때의 며칠과 그후에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혼합돼 있었다. 하지만 광산을 떠돌던 분위기만은 단 며칠이었다고 해도 서상화가 직접느낄 수 있었다. - P223

흰색 안전모와 노란 안전모는 같은 공간에서 작업 배차를 받고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똑같이 동진시멘트라는 곳으로부터 작업 지시를 받았지만 소음과 분진이 심한 곳에 배치되는 것은 거의 노란 안전모들이었다. 흰색 안전모들은 안전과에서 얼마든지 방진마스크를 갖다 쓸 수 있었지만 노란 안전모들은 분진이 많은 곳에 배치되는데도한 달에 열다섯 개 이상의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작업복과 귀마개와 안전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란 안전모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건 목캔디뿐이었다. 그런 걸 감수하고 일을 해도 아빠가 받는 임금은 흰색 안전모의 반도 안 되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댈 수 없는 금액이었다.  - P224

아빠와 동료들이 주춤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자신들이 먼저 먹는게 당연하다는 듯 흰색 안전모들이 식판을 들고 앞으로 가서 섰다. 밥을 먼저 먹지 말라는 건 서상화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도 좀처럼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서상화가 아빠의 얼굴에서 본 것은 멸시받는 게 만성이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매일매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격적 모독을 당한다는 것. 그게 내 가족이라는 것. 그 사실이 사람의마음을 얼마나 휘저어놓는지를 서상화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먼저느껴버렸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서상화는 광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지않았다. 아빠는 나이 어린 정규직한테 쌍욕을 듣고 오는 날도 있었고덤프에서 돌을 떨어뜨렸다고 주먹질을 당해 입술이 터져서 오기도 했다. 출근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기 싫어 서상화는 학교도 일찍 갔다.
술만 먹으면 아빠가 중얼거리던 ‘하청 주제‘라는 말을 크러셔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 P225

고용노동부의 판정은 아빠가 방진마스크와 귀마개와 안전화를 펼요한 만큼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다는 말이었고 터무니없었던 임금대신 정당한 보수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한 덤프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지 않은 덤프, 내리막길에서 시동이 꺼지지 않는 덤프.
하지만 판정의 여운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노동부 판정이 나온 다음날, 동진시멘트는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하청업체는 아빠와 동료들을 전원 해고했다. - P228

여의도불꽃축제 때였다. 밤하늘에서 연이어 터지는 불꽃은 서상화가 봤던 어떤 광경보다도 멋졌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질때마다 심장도 같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눈물이 날것도 같았다. 서상화는 입구에서 집어온 행사 포스터를 펼쳤다. 거기에는 불꽃놀이를 주최하는 화약 제조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서상화는 불꽃이 뿜어져나오는 듯한 모양의 대문자 H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열한 살 서상화가 35 광구 대기실에서 수없이 따라 그렸던 로고였다.
울지 않으려고 눈을 올려 떠도 꼭 한줄기는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
안경 코받침에 한참 숨어 있다가 콧방울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눈물 불꽃이 터지는 한강에 앉아 있자 35 광구는 실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만 같았다. - P245

문서 더미가 발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몇 겹을 더 뚫고난 뒤였다. 안쪽 구석으로 보따리 두 개가 보였다. 황금색 보자기에싸인 뭉치를 보자 저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태진은 다가가 보따리를 풀었다. 한 보따리에 여섯 권씩 총 열두 권이었다. 그 안에 척주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그중 한 권을 집어서 펼쳤다. 누가 봐도 한 사람의 필체였다. 윤태진은 다른 한 권을펼쳤다. 주소도 생년월일도 없어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이름들이 아래로 길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또다른 서명부를 펼쳤다. 서명란에서명이 없었다. 한 사람이 속도를 내서 친 것으로 보이는 동그라미만이 서명란을 채우고 있었다.
척주 사람 96.9퍼센트의 이름이 적혔다는 서명부 뭉치 앞에 윤태진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엉터리로 작성된 서명부 - P254

였다. 정부가 척주를 원전 건설 후보지로 선정하면서 주민 수용성의근거로 삼은 그 서명부에서는 조작을 위한 어떤 고심도 치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 P255

파도가 잔잔했다. 바다와 하늘 색깔이 구분이 안 되는 걸 보니 가을한복판으로 들어선 듯했다. 약사여래상 앞의 대형 기도단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삼은사에서 약사재일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최한수는 주지스님 방에 들어가 있었고 오병규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최한수의 부친은 오랫동안 삼은사 신도회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척주에서 최한수가 오병규보다 유일하게 더 대접받는 곳이 삼은사였다.
윤태진은 약사여래상 앞에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사람들을보다가 약사전 쪽으로 걸어갔다. 삼은사는 불교 주류 종단으로부터통속적이고 기복적이라는 말을 듣는 작은 종단의 사찰이었다. 하지만본찰인데다 기도처로 유명해 신도 규모는 여느 대형 사찰 못지않았다. 약사전에서 기도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어진에 너울성 파도가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P268

윤태진은 마이크 소리가 웅웅대는 경내를 벗어나 유리골 축대를 따라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다 요즘 너무 자주 피운다는 생각이 들어 유태진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무리를 하면 안 됐다. 피곤해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안 되고 약 먹는 걸 걸러도 안 됐다. 골탕에 빠진 이후로 윤태진은 단 한순간도 몸에서 자유로워져본 적이 없었다.
지병이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하나였다. ‘안 아팠으면 좋겠다.‘
해가 지면서 어항 방파제 쪽에서 피노을이 몰려왔다. 저무는 빛속에 서서 윤태진은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두 덩어리의 암흑에 대해생각했다. 다시는 그 검은 굴 속에 갇히지도, 그 검은 웅덩이 속에 빠지지도 않으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윤태진은 붉은빛을 받고 있는약사여래상을 돌아봤다. 인간을 가장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약이었고 순간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약이었다. 척주 땅에서 시멘트보다 강하고 시멘트보다 독한 것. 완치 가능성 없는 인간들의 비명을 길들일 가장 강력한 진통제 - P274

몇 미터 허공 위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광산에서 공장으로공장에서 다시 함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아래에 서서 윤태진은시간을 확인했다. 저쪽의 어항 방파제 불빛이 다른 세상의 것처럼희미하게 흩어졌다. 동진 부두에는 불빛이 없었다. 덤프에 폐타이어를 싣고 있는 로더에서만 간혹 빛이 번쩍이다 사라질 뿐이었다. 해무가 끼는 날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을 듯했다.
부두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던 폐타이어 조각들이 로더의 작업으로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일본 선박이 쏟아놓고 간 폐타이어와 석탄재는덤프에 실려 35광구 야적장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석회석과 섞여 시멘트로 변신하고 나면 다시 항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라항 뒤편에 배경처럼 펼쳐진 동진 부두에 서서 윤태진은 몇 시간째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로더가 물건을 옮기며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촉감이 연상되는 냄새가 건너왔다. 끈끈하다고밖에는 할수 없는 고무 녹는 듯한 냄새.  - P280

송인화는 외투를 여미고 속도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선가로등은 어두컴컴했고 시커멓게 솟은 코끼리산에서는 바람 소리만들려왔다. 송인화는 뒤꼭지가 이상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의류수거함 뒤쪽으로 무언가가 후다닥 지나갔다. 고양이일 거야. 송인화는걸음을 좀더 빨리했다.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랐다. 일행들과 헤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 송인화의 머릿속으로 수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 P297

해초와 문어, 눈이 커다란 물고기, 무지개색 고래 한마리. 서상화가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 앞에 서서 몸을 숙였다. 유릿조각을 모아서붙여놓은 고래 눈은 색이 바랜 담벼락 그림에서 유일하게 쨍하고 빛나는 것이었다. 고래한테로 몸을 숙인 서상화가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깔이 바뀌는 유리 눈을 들여다봤다. 이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다 한 번씩 고래와 눈이 맞는다고 하던 하경희의 말이 생각나 송인화는 웃었다.
은남보건진료소에서 길을 따라 죽 들어간 바닷가 끝 집이었다. 높지 않은 담에도 파묻힐 만큼 작은 슬레이트 지붕집이었지만 여름이면피서객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고 간다고 했다. 벽과 창호문 곳곳에 그려놓은 해바라기와 붓꽃과 새 들 때문이었다. 하경희가 남편과 몇 달에 걸쳐 만들었다는 마당의 나무 데크 위에 앉으면 바다와 돌섬과 마을 저쪽 끝의 등대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 P306

해가 넘어가면서 바다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송인화는 맥주를 마시며 하경희가 해준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경희의 아이가 저 자잘한 갯바위들마다 이름을 다 붙여놓았다는 이야기. 어느 겨울 돌섬 위의 갈매기들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야기. 갈매기 소리가 소거된 바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이상했었다는 이야기. 돌섬 뒤로 가끔씩고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
서상화는 별거 아닌 송인화의 말에도 테이블을 치며 웃고, 빨아들일 듯 눈을 맞추다가, 가만히 바다를 바라봤다. 서상화가 고개를 돌려바다를 볼 때마다 귓바퀴 안의 점이 도드라졌다. 복약상담을 하던 봄내내 보아온 점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담 옆의 가로등이 켜지자 점은 귓바퀴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대신 서상화의 얼굴엔 또 안경그림자가 만들어졌다. - P309

송인화는 다시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에서 내려와 송인화의 맨발을 감싸쥐었다. 서상화의 손이 맨살에 닿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관통해갔다. 발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둘은 웃음을 멈추고 잠시숨을 몰아쉬었다. 서상화가 고개를 들어 송인화를 봤다. 상체가 올라왔고, 안경이 뺨에 와닿는 동시에 서상화의 혀가 입을 열며 들어왔다.
파도가 잠시 그대로 멈춘 듯했다.
얼굴을 떼고 닿을 듯한 거리에서 다시 본 서상화의 눈에는 송인화와 송인화 뒤로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송인화는 손을 올려 천천히 서상화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이 얼굴에서 떨어져나올수록 서상화의 눈에 물기가 번져갔다. 서상화의 눈 속 바다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며 송인화는 울지 마, 중얼거렸다. 안경을 벗어도 울지 마. 목을 감싼 서상화의 손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더 깊숙이 들어왔다. - P312

서상화의 안경을 본 뒤로 송인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받지 못한 서상화의 마지막 전화가, 전화가 왔던 10월 15일 저녁 일곱시 사십삼분이라는 시간이 그 시간에 서상화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시시각각 송인화를 흔들었다. 서상화는 광산 흙과 바닷물이 엉켜서 질척대는 부둣가에 서있었다. 서상화는 붉은 흙으로 뒤덮인 광산의 어느 능선으로 걸어올라갔다. 서상화는 어둠이 내린 해변가에 서 있었고, 서상화는 햇빛이다 사라져버린 방파제 저쪽으로 자꾸만 걸어갔다. 그날 저녁 일곱시사십삼분 속에서 서상화는 매일 모습을 바꾸면서 찾아왔다. 그러다눈이 충혈된 채 조퇴를 하겠다는 오후로 되돌아갔고, 불안한 호흡으로 송인화 옆에서 걷기를 반복했다.
그날도 맑고 추운 날이었다. - P341

송인화는 바다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꺼번에 맞으며 고개를들었다. 광구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새천년도로의 곡선이 보였다. 코끼리산과 유리골, 어항이 손에 잡힐 듯했다.
새벽이 오는 척주 바다를 보면서 송인화는 언젠가 서상화가 했던말을 떠올렸다. 아주 맑은 날엔 35 광구 꼭대기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했다. 야간작업을 하다보면요. 오징어배 불빛이요, 수평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촘촘하게 정말 장관이래요. 광산 사람들은 그불빛을 보면 그래요.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라고.
송인화는 수평선을 따라 펼쳐진 불빛들을 보면서 소리내어 말했다.
"상화야, 저기,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
불빛들을 지우며 수평선 끝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라왔다.
송인화는 밝아오는 바다를 보면서 비로소 목을 놓고 울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없는 세상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P357

는 흥미 있는 말을 들을 때나 장난기가 발동할 땐 눈밑애교살에서부터 반응이 왔다. 초롱초롱하게 뜬 눈 아래로 웃음기가 삭 번져가면 송인화는 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 상화는 이모티콘도 꼭 자기 같은 캐릭터들만 골라서 썼다. 상화와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 창을 펼치면 척주를 몇 바퀴나 돌고도 남을 길이였다. 메시지 창안에서는 서상화가 보낸 이모티콘들이 여전히 꺅 소리를 내면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보고 싶다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꺅과 엉엉을 반복하며 그 안에서 움직일 것이었다. - P360

송인화는 척주 시내를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기계적으로 간판들을 읽으면서 걷기도 했고 땅만 보면서 걷기도 했다. 걷다보면 소망의 탑 사진이 붙어 있는 네모난 지중변압기가 나와 송인화는 그 앞에 한참씩 서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물회를 시키고는 커버가 씌워진 벽걸이 선풍기만 올려다보다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어느날은장학문구사와 다이소와 현대서점과 봉황관광을 보면서 걸었고 어느날은 미스터피자와 홈플러스와 홍채안경원과 남양유통 앞을 지났다. 별미식당, 월드스튜디오, 녹십초알로에, 예당피아노, 제일조은약국, 김내과, 보광당, 김밥천국, 배스킨라빈스, 백두대간호프, 영동농원, 장뇌건강원……… 송인화는 그런 간판들이 붙은 건물들 사이를계속 걸었다. - P360

뉴스와 신문에는 이십 년 가까이 멕소닐을 밀수해온 사이비 종교집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일 킬로그램으로 칠십만 명 이상을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할 수 있는 멕소닐이라는 약이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올 때 어떤 극적인 효과를 주는지도회자됐다. 멕소닐의 최대 제조국에 대한 얘기, 의료용이 아닌 마약용으로 쓰일 때의 유통 경로, 제약회사의 판촉 경쟁으로 인한 의사들의과다 처방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공비 침투 때 이후로 척주가 이렇게 TV에 많이 나온 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폐타이어 배로 밀수한 약이 동굴에 보관돼 있었다는 게 밝혀지자사람들은 그게 이십일세기에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약과 함께시신 몇 구가 나왔는지, 동굴에서 단체로 무얼 했는지, 그런 자극적인 얘기들 속에서 척주의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송인화는 뉴스에 나오는 그 얘기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P361

나뭇잎들은 이제 거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송인화는 아직도 은행잎이 남아 있는 곳 하나를 알고 있었다. 보건소 은행나무 옆에 서 있는 소나무였다. 은행나무보다 키가 작은 그 소나무위에는 가을에 떨어져내린 은행잎들이 여전히 노란 색종이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눈이 내리고 다시 눈이 녹는 동안에도 소나무 위의 은행잎들은 거짓말처럼 그대로 있었다. 송인화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상화의 이름을 불렀다. 푸른하늘은하수를 잘하는 상화. 샤파 연필깎이를 십년 동안 고쳐 쓴 상화, 임연수김밥을 좋아하는 상화. 보건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던 상화, 괘종시계보다 키가 큰 상화, 여덟 평짜리 약국에서 소아용 시럽을 따르며 살 수도 있었을 상화의 이름을. - P363

눈이 그치고 하늘이 갠 날 송인화는 오십천을 따라서 걸었다. 대기가 찼지만 햇빛이 많은 날이었다. 시멘트공장에서 동진 부두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멀리 강 끝에서 부서졌다. 십팔 년 전에도 일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걷던 길이었다. 송인화는 강을 따라 걷다가문득 뺨이 따뜻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강물 위에 빛들이 내려앉아 자글거리고 있었다. 걸어갈수록 빛 무리가 왠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송인화는 걸음을 조금 빨리해봤다. 빛무리도 같은 속도로따라왔다. 송인화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빛무리도 속도를 늦추며 따라왔다. 송인화가 걸음을 멈추자 빛 무리도 멈춰 섰다.
송인화는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송인화는 어른거리며 따라오는 그 따뜻한 것이 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송인화는 뺨으로 흐르는 것들을 그대로 둔 채 강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 P36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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