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동시에, 작가와 그의 주인공을 동일시하는 공감은대단히 강렬한 열정이다. 그것은 페이지를 한달음에 넘기게만든다. 예술적으로는 별반 장점이 없는 것에 일시적으로나마더 날카로운 예각을 부여한다. 비픈과 리어던은 저녁 식사로 빵과 버터와 정어리를 먹었고, 기싱도 그랬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비픈의 코트는 저당 잡혔으며, 기상의 것도그랬을 것이다. 리어던은 일요일에 글을 쓸 수 없었고, 기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이 리어던인지, 풍금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 기인지 잊어버린다. 확실히 리어던도 기싱도 헌책방에서 기번의 책들을 샀으며, 안개속을 뚫고 한 권씩 집으로 날랐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유사성들을 계속 찾아내며, 소설과 편지를 뒤져 가며 그런 발견에 성공할 때마다 만족감을 느낀다. 마치 소설 읽기가 작가의 얼굴을 찾아내는 게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 P144

실로 기상은 배우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베이커가의 기차들은 그의 창문 아래로 증기를 내뿜으며 지나갔고, 아래층하숙인은 그의 방을 날려 보낼 정도로 심하게 코를 풀었으며, 하숙집 안주인은 무례했다. 식료품 가게 주인은 설탕을배달해 주지 않아 그가 직접 나르게 만들었으며, 안개에 목이 상해 감기가 든 그는 3주씩이나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펜을 들고 계속 써나가야 했으며, 이런저런 집안 걱정 때문에 마음이 비참하게 흔들렸다.
이 모든 일이 음울하고 단조롭게 계속되는 동안 그는 자신의 나약한 성품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파르테논의 기둥들과 로마의 언덕들이 여전히 안개와 유스턴 골목의 생선가게들 위로 솟아올랐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에 꼭 가볼 작 - P148

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테네에 갔고 로마를보았다. 시칠리아에서 죽기 전에 투키디데스를 읽었다. 그의 주위에서삶이 변하고 있었고, 삶에 대한 그의 시각도 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해묵은지저분함, 안개와 파라핀유, 술 취한 하숙집 안주인이 유일한 리얼리티는 아닐 것이었다. 추함이 진리의 전부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아름다움의 요소도 있었다.
과거는 그 문학과 문명으로 현재를 굳건히 만든다. 어쨌든장차 그가 쓸 책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이즐링턴이 아니라토틸라 시대의 로마에 관한 것이 될 터였다. 그는 부단한 사고 속에서 <두 가지 형태의 지성을 구분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지적 능력만을 존숭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색의 지도 위에 자신이 도달한 지점을 표시하기도 전에 자기 인물들의 경험을 그토록 공유해 왔던 그는 자신이에드윈 리어던에게 부여했던 죽음을 공유했다. <인내, 인내>라고 그는 죽어 가면서 곁에 서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불완전한 소설가였지만, 대단히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 P149

토머스 하디의 소설들


토머스 하디의 죽음으로 영국 소설에 지도자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첫손에 꼽을 만한, 우리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다른 작가가 없다는 뜻이다. 그 자신은 결코 그런인정을 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세속에 물들지 않고 소박한 노인은 지금 같은 때 넘쳐나는 미사여구에 고통스러울만큼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소설이라는 예술을 존경받을 만한 일로 만든 소설가가 한 사람있었다는 것이 틀림없는 진실이다. 하디가 살아 있는 동안은그가 종사하는 예술을 천하게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남다른 천재성 때문만은 아니 - P151

우연의 일치를 멜로드라마에나 어울릴 만큼 극단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소설이 장난감도 논증도 아니며인간 남녀의 삶에 대해 거칠고 과격하나마 진실한 인상을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아마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페이지마다 울려 퍼지는 폭포 소리이다. 그것은 그의 후기작들에서 그토록 큰 비중을차지하게 될 힘의 첫발현이다. 그는 이미 세밀하고 숙달된자연관찰자임을 입증한다. 나무뿌리에 내리는 빗소리와 경작지에 내리는 빗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나무마다 다르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는 좀 더 넓은 의미의 자연, 힘으로서의대자연을 의식하고 있다. 그는 자연 안에서 인간의 운명에공감하거나 그것을 조롱하거나 무심한 방관자로 남는 어떤영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그런 감각이 있었다. 올드클리프 양과 시더리아에 관한 서투른 이야기가 기억에남는 것은 신들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연 앞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P153

여성은 더 약하고 육욕적이며, 더 강한 자에게 매달려 그의시야를 흐리게 한다. 하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들에서 삶은이 요지부동의 틀 너머로 얼마나 자유롭게 넘쳐흐르는가!
밧세바가 짐마차에 실린 화초들 사이에서 작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어여쁜 모습에 미소 지을 때, 우리는 이미그녀가 얼마나 심한 괴로움을 겪을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괴로움을 주게 될지 알아차리거니와, 이렇게 우리가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 하디의 능력을 입증해 준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인생의 모든 신선함과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매번 그런 식이다. 그의 인물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그에게 무한히 매력적인 존재들로 보인다. 그는 남성들보다 여성들을 더 친절하게 배려하며, 그녀들에게 어쩌면 더 깊은관심을 갖는 듯하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헛되고 운명은가혹할지언정, 그녀들 안에 삶의 열기가 남아 있는 한 그녀들의 걸음은 활달하고 웃음소리는 감미롭다. 그녀들에게는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의 장엄한 침묵 가운데 잠겨드는, 또는 일어나서 구름의 움직임과 꽃피는 숲속의 싱그러움과 하나가 되는 힘이 있다. - P160

하지만 웨섹스 소설들의 장대한 구조를 감안한다면, 이인물, 저 장면, 이 깊고 시적인 아름다운 어구 등 사소한 점들에 연연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하디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그보다 큰 무엇이다. 웨섹스 소설들은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으로 된 작품이다. 그 범위가 워낙 광대하다 보니불가피한 결점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것들은 그저 실패이고 또 어떤 것들은 지은이의 천재성의 그릇된 면만을 드러낸다. 하지만 웨섹스 소설들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후에그 전체에 대한 인상을 추려 보면, 그 효과가 웅대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우리는 삶이 부과하는 옹색함과 왜소함에서 해방된다. 상상력은 한껏 확대되고 고양되며, 유머 감각도 십분 만족되어 실컷 웃게 되고, 지상의 아름다움을 실컷 들이마시게 된다. 또한 우리는 비감하고 사색적인 한 영혼의 속내로 들어서게 되는 바, 이 영혼은 가장 슬픈순간에도 엄정한 강직함으로 자신을 버티며 가장 분노로 내몰린 순간에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디가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단순히 특정 시기와 장소에 국한되는 삶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강력한상상력과 심오하고 시적인 천재성을 가진, 온화하고 인간적인 영혼이 바라본 세계와 인간 운명의 비전이다. - P170

루이스 캐럴


루이스 캐럴 전작집이 넌서치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자그마치 1,293쪽의 두툼한 책이다. 그러니 변명의 여지가없다. 루이스 캐럴은 이제야말로 최종적으로 완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전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이번에도 또 실패다. 루이스 캐럴을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보면 옥스퍼드의 성직자이다. 또는C. L. 도지슨 신부‘를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보면 요술쟁이 요정이다. 이 책은 우리 손안에서 두 쪽이 나버린다. 그 - P171

것을 도로 이어 붙이려면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도지슨 목사에게는 삶이라는 것이 없다. 그는 이세상을 어찌나 가볍게 지나가버렸는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순순히 옥스퍼드로 녹아들어갔기에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모든 관습을 받아들였고, 얌전하고좀스럽고 경건하고 익살맞다. 만일 19세기 옥스퍼드 교수들에게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야말로 그 본질이었다. 그는 너무나 착해서 누이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너무나 순수하여 조카도 그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루이스 캐럴의생애에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수도 있다고 조카는 언뜻 비쳤을 뿐이다. 도지슨 씨는 대번에 그런 그림자를 부인한다. <내 삶에는 아무런 시련이나 고생이 없었다>라고 그는말한다. 하지만 이 물들이지 않은 젤리에도 완벽하게 단단한수정이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니, 어린 시절은 보통 천천히 시들기 때문이다. 소년이나 소녀가 자라 남자나 여자가 된 후에도 어린 시절의 부스러기는 남는다. 어린 시절은 때로는 낮에, 좀더 흔히는 밤에 돌아온다. 하지만 루이스 캐럴에게는 그렇지않았다. - P172

그럼에도 헨리 제임스의 위대함은 우리에게 그토록 명확한 세상, 너무나 분명하고 독특하여 우리가 만족한 채로 있지 못하고 그 비상한 지각들로 더욱 실험하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작가가 따라다니며 일일이 가르치는 것이나 그의 의도,
그의 조바심으로부터는 자유롭기를 원한다. 이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프루스트의 작품으로 향한다. 그에게서 우리는 대번에 공감이 확장되는 것을, 너무나 드넓게 확장되어 애초의 대상마저 잃게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우리가 모든 것을 의식하게 된다면, 어떻게 무엇인들 포착할수 있겠는가? 헨리 제임스의 세계가 디킨스와 조지 엘리엇의 세계에 비해 물질적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모든것이 생각에 열려 있어서 수십 가지 의미의 음영을 받아들일수 있다면, 프루스트의 세계에서는 조명과 분석이 아예 그런경계 너머로 실려 간다. 무엇보다도, 미국인인 헨리 제임스에게는 그 세련된 도희성에도 불구하고 낯선 문명 가운데서편치 못한 그 자신이 예술의 힘으로도 결코 완벽하게 극복심리 소설가들  - P181

프루스트를 읽는 어려움의 상당 부분은 이처럼 부단한 우회에서 온다. 프루스트에게서는 개개의 중심점을 둘러싸고너무나 동떨어지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물들이 모여들므로 그런 집적 과정은 점차적이고 복잡다단하며, 그 사물들이 이루는 최종적 관계는 극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들에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다. 관계는 다른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날씨, 음식, 옷, 냄새, 예술, 종교,
과학, 역사, 그 밖에 무수한 다른 영향들과의 관계이니 말이다. - P183

심리 소설을 쓰는 작가는 이런 왜곡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분석하고 구별하는 지성은 공감이 든 분노든 간에 항상그리고 거의 대번에 감정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무력화된다.
그리하여 인물들 속에 종종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요소가 생겨나는 것은 아마도 보통의 감정적 물살보다 너무나 많은 것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라고 우리는 거듭 물으며 어쩌면 미친 사람들이나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미심쩍게 대답하게 된다. 반면 프루스트에게서는 접근 방식이 똑같이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생각하는 것과 그들에 대해 생각되는 것, 작가 자신의 지식과 생각 등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마음을 다 들여 이해하게 된다. - P190

그러나 프루스트와 도스토옙스키, 헨리 제임스 등 느낌과생각을 따라가는 데 전념하는 모든 작가들에게는 항상 작가로부터 넘쳐흐르는 감정이 있다. 마치 그렇게 미묘하고 복잡한 인물들은 책의 나머지가 생각과 감정의 깊은 저수지일 때만 창조될 수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작가 자신이 나서지 않을 때에도, 스테판 트로피모비치나 샤를뤼스 남작 같은 인물들은 비록 언명되지는 않았다 해도 자기 자신들과 같은 재료로 된 세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음을 되새기고 분석하는 작업은 항상 의심과 질문과 고통의, 어쩌면 절망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적어도 그런 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악령』을 읽은 결과인 듯이 보일 것이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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