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아프리카 작가의 유목민적인 소설


˝모든 자서전은 스토리텔링이다. 모든 글은 자서전이다.˝ 2003년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소설가 J. M. 쿳시의 말이다. 소설과 더불어 자전적인 글을 써왔지만, 그러면서도 한없이 내성적인 작가의 말이기에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그의 발언은 자서전이라 하더라도 허구적 요소가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며, 허구적인글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글을 쓰는 주체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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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위원장 안데르스 올슨이 그를 2021년 수상자로선정하면서 ˝동아프리카에서의 식민주의 영향, 뿌리가 뽑혀 이주하는개인들의 삶에 대한 식민주의의 영향을 시종일관 연민을 갖고 천착했다˝고 한 것은 아주 적절한 평가다. 뿌리가 뽑힌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역사의 바람에 떠밀려 영국으로 망명했고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뿌리를 내리려 했던 그 자신에 대한 감정이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문학은 그의 삶과 불가분의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를떠남으로써 아프리카를 더 크고 더 넓고 더 겸손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학자로서도 그랬고 창작을 하는 작가로서도 그랬다. 그는 공간적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멀어졌지만 심리적으로는 아프리카에 더 가까이있었고, 이것이 그를 영어권 문학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따뜻하면서도예리하고,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이슬람 동아프리카 작가로 만들었다.
결국 ˝모든 글은 자서전이다˝라는 쿳시의 말처럼 구르나의 소설들은 일종의 기다란 자서전이다. 동아프리카 출신 이슬람 작가의 탈식민적 자서전으로 인해 영문학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그래서 이 겸손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던 그의소설들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해설(왕은철) 중에서

어디를 가나 그들은 유럽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와 있다는 것을알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군인들과 관리들을 보내,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만 관심 있는 적들로부터 지켜주러 왔다고 말하게 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른 무역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것같았다. 장사꾼들은 유럽인들에 대해 얘기하며 놀라워했다. 그들의잔인함과 무자비함에 기가 질려 있었다. 그들은 한푼도 내지 않고 최고의 땅을 가져가고, 이런저런 술수를 부려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일하게 만들죠. 그 사람들은 아무리 질기고 냄새가 나도 그냥 아무것이나 먹어요. 그 사람들 식욕은 메뚜기떼처럼 끝도 없고 품위도 없죠.
여기도 세금, 저기도 세금을 매기고, 어기는 자는 감옥에 처넣거나 매질을 하고, 심지어 목매달아 죽여요. 그 사람들이 세우는 첫번째 것은감옥이고, 다음은 교회고, 다음은 모든 거래를 지켜보고 세금을 매기기 위한 시장 건물이죠. 살 집을 짓기도 전에 그런 것부터 만드는 거죠. - P100

저녁때쯤 그들은 산 위쪽 기슭의 작은 정착지 가까이에서 멈췄다.
다음날 차를 따고 떠나기 전에 그곳에서 장사를 할 생각이었다. 칼라싱가는 개울둑 옆 무화과나무 밑에 차를 세웠다. 둑에 무성한 초록색풀이 무릎 높이로 자라 있었다. 유수프는 옷을 벗고 물로 뛰어들었다.
물이 너무 차서 소리를 지르면서도 몇 분 동안 버텼다. 오래지 않아 그는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칼라싱가는 그에게산꼭대기의 눈이 녹아서 개울로 흘러드는 거라고 말했다. 땅은 나무들과 풀들로 푸르렀다. 그들이 산그늘 속에 야영지를 마련할 때 대기는새들의 노랫소리와 흐르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유수프는 강둑을 따라조금 걷다가 개울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커다란 바위들 위로 올라갔다. 다른 둑 위에 서서 넓은 공터 너머로 짙은 바나나나무 숲이 있는 것을 보았다. 곧 그는 폭포가 있는 곳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비밀스럽고 마법적인 분위기였지만 따뜻하고조화로운 기운이 있었다. 거대한 양치류와 대나무들이 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물보라를 통해서 폭포 뒤 바위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 동굴이 있다는 암시였다.  - P106

"낙원이 이럴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좋지 않아?" 하미드가 물소리로가득한 밤공기 속에서 부드럽게 물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폭포들이 있다고 생각해봐. 유수프,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걸 상상해봐라.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을너는 아니? 낙원에는 네 개의 강이 있단다. 강들은 동서남북 여러 방향으로 흘러서 신의 정원을 사등분하고. 그래서 어디에나 물이 있는 거야. 누각 밑, 과수원 옆, 테라스 옆, 숲 옆의 길에도 물이 있는 거지."
"어디에 그런 정원이 있다는 거야?" 칼라싱가가 물었다. "인도에?
인도에는 폭포가 있는 정원이 많아. 그런 곳이 당신의 낙원이야? 그게아가 칸이 사는 곳이야?"
"신은 일곱 개의 하늘을 만드셨지." 하미드는 칼라싱가를 무시하고유수프에게만 얘기하듯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서서히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천국은 칠층에 있는데 그 자체도 칠층으로 나뉘어 있지. 가장 높은 곳이 제네트 알아든, 즉 에덴동산이야.
털북숭이 신성모독자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어. 제아무리 천 마리의사자처럼 으르렁거려도 안 돼." - P111

 그걸 법에 따라 산다고 하는구나."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말하는 방식과 어조를 통해 긴장의 순간이 지나갔으며, 대화가 더우스운 쪽으로 흘러갔으면 한다는 표시를 했다. 여하튼 우리가 저 젊은이에게 나쁜 인상을 줄 필요는 없잖아."
유수프는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젊은이라는 말이 그의 귀에는 고상하게 들렸다. 키가 크다거나 심지어 철학자로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멋지게 들렸다. 그는 약간 광대 같은 몸짓으로 만족감을 표했다. 세 사람은 그의 바보 같은 짓을 보며 웃었다. 그러면서 빚쟁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들을 전당잡혀야 했던 남자에 관한 얘기는 적당히 넘어갔다. 그러나 유수프는 후세인이 하미드에 관해 했던 얘기의 일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성공하고 싶은 그의 욕망과 아지즈 아저씨의 여행에 관한 그의 불안감에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실패에 대한 예감이깃들어 있었다.  - P12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신의 말씀을알지도 못한대."
그들은 오랫동안 그렇게 하려고 기다렸던 것처럼 그를 철저하게 심문했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마님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했느냐? 그녀는 어떻게 생겼니? 그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분의 신앙심이 깊다는 얘기 없었니?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상인이 사원에 가라고 하지 않았니? 아니, 상인은 그를 가게에서 일하도록 놔두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기도하지 않으면 벌거벗은 채로 창조주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않았니? 아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창조주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신의 말씀 없이 너는 어떻게 기도를 할 수있었니?  - P134

"기분 나빠하지 마라." 그들의 두려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하미드가유수프에게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네가 가르침을 받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죄인이다. 너는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와 함께있었잖니.....
"그런데 어떻게 네 아저씨는 그토록 오랫동안 너를 그런 상태로 놔둔 거니?" 마이무나가 물었다. 책임을 같이 져야 할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유수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 그는 제 아저씨가 아니에요. 그는 칼릴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그는 그들이 슬퍼하게두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어쩐지 부적절한 것 같아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들이 충격과 두려움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혐오감을 느꼈다. 계산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연기 같았다. - P135

하미드는 테라스에 서서 겁먹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수프는 하미드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후세인의 말을 떠올리며, 하미드 스스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유수프는 산에 사는 은둔자가 높은 위치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어리석음에 고개를 젓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하미드의 두 어린 아들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아샤도마이무나도 거기에 없었다. 유수프는 칼라싱가가 나와서 그들처럼 내다보면 싶었지만 그도 거기에 없었다. 그는 그를 만나러 가서 그 여행에 대해 얘기해줬다. 칼라싱가는 여행의 중요성에 대해 열광적으로 얘기하며 그에게 이상한 충고를 했다. 매주 한 번씩 네 귀에 오일을 한 방울넣는 걸 잊지 마라. 곤충과 벌레가 알을 낳는 걸 막기 위해서다. 유수프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질척거리는 길로 화물차를 몰고 와서 차에서 뛰어내려 그들이 지나갈 때 극적으로 인사를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칼라싱가는 중요한 순간이면 늘 그렇게 인사를 했다. 어쩌면 떨어져 있는게 현명한지도 몰라. 유수프는 짐꾼들이 그의 터번과 꼬인 수염을 보고 비웃던 일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P153

그들이 높은 산자락에서 내려가면서 지형이 매일 바뀌었다. 땅이 점점 건조해지면서 정착지들의 규모가 더 줄어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들은 고원으로 내려와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먼지와 모래 구름이일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관목들이 엄청나게 비틀리고 휘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인 것 같았다. 짐꾼들은 자신들이 들어서는삭막한 곳을 바라보면서, 더이상 노래하지 않고 패기도 잃었다. 멀리거대한 동물들의 무리가 보이자 그들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멀리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두고 입씨름을 했다. 유수프는 처음 며칠 동안 속이 뒤집히고 기진맥진하고 열이 나면서 몸이 아팠다. 가시들이발목과 팔을 파고들었고 몸에는 벌레 물린 자국투성이였다. 그는 엄청나게 가혹한 땅에서 어떤 것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 P156

유수프는 그들이 왜 아지즈 아저씨를 사이드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해 보이고, 하루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했고 초연함을 유지했다. 기껏해야 지체되면 얼굴을 찌푸리거나 불운한 일이 바로잡히는 동안 굳은 자세로 서서 초조해하는 정도였다. 그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고 보통은 하루가 끝났을때 모하메드 압달라하고만 길게 얘기했다. 그러나 유수프는 그날의 여정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은 무엇이든 그가 알고 있다고 느꼈다. 이따금 유수프는 그가 짐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을 지켜보며 껄껄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가 저녁기도 후에 유수프를 매트로 부르더니 어깨에 한 손을 짚었다. "네 아버지 생각나니?" 그가 물었다.
유수프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지즈 아저씨는 잠시 기다렸다가 아무말도 못하는 유수프를 향해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 P157

아지즈 아저씨의 출발 준비를 유수프가 거들 때, 상인이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그를 제지했다. "너, 지난밤에 또 걱정했구나. 술탄이 한말 때문에 걱정되더냐?"
유수프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또 걱정했다! 그는 가망 없이 약점을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그들 모두가 밤에 그를 혼비백산하게 만든 개들과 짐승들과 형체없는 허공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말일까? 어쩌면 그가 자주 소리를 질러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P167

"저들이 행복해하는 걸 봐라." 그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 "물가로 가는 어리석은 짐승 무리 같구나. 우리 모두는 저렇다. 무지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편협한 존재들이다. 저들이 뭣 때문에 흥분하는지아니?"
유수프는 저 자신도 비슷한 기분이라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이 잠을 잘 수 있고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을 빌린 다음, 아지즈 아저씨가 유수프에게 말했다. "내가 처음에 이 도시에 오기 시작했을 때는 잔지바르 술탄의 아랍인들이 이곳을 운영했었다. 그들은 오만인이었다. 오만인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하인이었다. 오만인은 재능이 탁월한 사람들이지. 아주 능력이 많아. 자기들을 위한 작은 왕국들을 세우려고 이곳에왔어. 잔지바르에서 이곳까지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더 멀리까지 갔어. 마룽구 너머의 오지 숲까지 들어가고 거대한 강까지 갔어.
그들은 거기에도 왕국을 세웠지. 그래, 거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  - P174

그들은 타야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도시에는 좁은 길들이 미로처그럼 당황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길들은 작고 깨끗한 뜰과 광장으로 갑자기 이어졌다. 어두운 거리의 대기에서는 사람들로 가득한 방에서 나는 냄새처럼 친숙하고 오염된 냄새가 났다. 폐수가 개울을 이뤄 집의문턱 바로 옆에서 흐르고 있었다. 빌린 집의 마당에서 잠을 잘 때, 바퀴벌레와 쥐가 그들의 몸 위를 기어다니고 굳은살이 박인 발가락을 뜯어먹고 식량 자루들을 찢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음냐파라는 새로운 짐꾼들을 고용해 더 멀리까지 가지 않기로 계약된 짐꾼들을 대체했다.
그들은 며칠 후에 다시 출발했다. 타야리를 떠난 후에는 좋은 시간을보냈다. 약한 비가 걸음을 재촉했다. 몸이 서늘해지자 그들은 노래를부르기 시작했다. 여행에 지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조차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일부는 너무 아파서 노래든 농담이든 소용없었다.
그것이 걸핏하면 수풀로 잽싸게 뛰어들어가야 하는 그들의 괴로움을덜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동료들은 이제 침묵하는 대신 그들이 고통에 겨워 지르는 소리에 슬픈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봐라." 아지즈 아저씨가 유수프에게 말했다. 그의 변함없는 아득한 미소가 얼굴 구석에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우리의 용감한 빈 압달라를 봐라. 그의 몸이 얼마나 말도 안되게 약해지고 믿을 수 없게 되었는지 봐라. 더 약한 사람이 저렇게 맞았다면 회복 못하겠지만 그는 회복할 것이다. 문제는 저것보다 더 나쁘다는 거다. 우리의 본성도 너무 비열하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술탄이 화가 나서 하는얘기를 믿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부숴버리고 싶은 뭔가를 보는거다. 그가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만족시키는 데 동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우리 몸을 스스로에게맡길 수 있고, 우리 몸이 스스로의 행복과 기쁨을 돌볼 수 있게 할 수있다면 좋을 텐데 유수프, 너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다른 유수프가그랬던 것처럼 너도 밤에 꿈을 꾸고 그것을 해석해 우리를 구원할 수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지즈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 P215

그들은 말없이 몇 분 동안 앉아 있었다. 유수프는 삶의 얼레가 자신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레가 저항을 받지 않고 돌아가게 놔뒀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곳을 떠났다. 그는 부모에 대또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가슴이 멍해져 오랫동안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부모가 자신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지, 아직도 살아 계신지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그 답을 알아내고 싶은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이 상태에서 떠오르는 다른 기억들에 저항할 수 없었다. 버림받았을 때의 모습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그들 모두가 그가 스스로를 방치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삶은 사건들로이뤄져 있었다. 그는 파편들 위로 고개를 들고 있으려 했고 더 가까운지평선에 눈길을 주며 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해 부질없이 알려고 하기보다 무지를 택했다.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속박에서 그를 풀려나게 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P229

우선 그는 너의 아저씨가 아니야. 그는 칼릴을 생각하면서 자신이느끼는 우울함과 갑작스러운 자기연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면 그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칼릴처럼 신경질적이고 호전적이고, 사방으로부터 포위되고, 의존적이고 미지의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 그는 손님들과 주고받는 칼릴의 끝없는 농담과 불가능해 보이는 그의 쾌활함을 떠올리고 실제로는 그것이숨겨진 상처를 감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향으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떨어진 곳에 사는 칼라싱가처럼, 그리움에 애가 타고 잃어버린 완전함에 대한 생각에서 위로받으며, 악취나는 이런저런 곳들에 갇혀 있는 그들 모두처럼. - P229

유수프는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칼릴에게 자신이여행중에 아주 자주 살이 말랑말랑한 동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껍질에서 막 열린 공간으로 나왔는데, 혐오스럽고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잡석들과 가시들 속으로 난 길을 맹목적으로 짓이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지의 곳 한가운데를 맹목적으로 통과하는 그들 모두가 그런 상태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느꼈던 공포는 두려움과는다른 것이었다고 말했다. 진짜로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고, 꿈속에서죽음의 가장자리 너머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고 그런 공포를 극복해가면서 그토록 원하는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 P235

유수프가 돌아갔을 때 가게는 닫혀 있고 칼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매트는 잠자리를 위해 벌써 깔려 있었다. 유수프는 몸을누이며 칼릴이 돌아오면 물어볼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인내심을 갖고그를 기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혼자 있게 되어서 기뺐다. 그런데 기다림이 길어지자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둥근달이 4분의 1쯤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너무 가깝고 무거워 보여 쳐다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가장자리가 검은 구름들이 달무리 옆에서 쏜살같이 달리면서 뒤틀린 형태로 바뀌었다. 검은 구름들이 그의 뒤쪽 하늘을 가득 채우더니 별들을 가려버렸다.
그는 폭풍의 따뜻한 도리깨질이 몸을 때리는 통에 갑자기 잠에서 깼다. 그 주위로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거세지는 바람이 테라스를 때려댔다. 달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떨어지는 물이 밝은 회색빛을발해 어둑한 수풀과 나무들을 비추면서 그것들을 바다 밑의 거대한 둥근 돌처럼 보이게 했다. - P285

음지 함다니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냐?"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고는 더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것처럼 말을 멈췄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어. 그녀가 줬지. 그녀가 그걸 줄 수 있다고 누가 말해줬을까? 나는 네가 얘기하는 자유가 뭔지 알아. 내가 태어난 순간 가지고 있던 자유지. 이 사람들이 넌 내 것이다. 나는 너를 소유한다고 할때, 그것은 비가 지나가는 것이나 하루의 끝에 해가 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들이 좋아하든 말든 다음날 아침해는 다시 뜬다고. 자유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모두 남용하지만, 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쓸모없어질 때도 여전히 너를 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네가 태어난날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니? 이것은 나한테 하라고 주어진 일이야. 저 안에 있는 사람이 이것보다 더 자유로운 것을 나한테줄 수 있겠니?"
유수프는 그것이 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지혜가 담겨있는 건 틀림없었지만 그것은 인내와 무력감의 지혜였다. 그 자체로찬탄할 만한 것일지 모르지만, 약자를 못살게 구는 자들이 여전히 사람을 깔고 앉아 더러운 방귀를 뀌어대는 한 그렇지 않았다. 유수프는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전에는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지금쯤 아마 그랬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는 노인을 자신이 슬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92

 그러면 그녀는 미소 지으며 한 손으로 그의 볼을 만져발그레하게 물들일지 몰랐다. 당신은 몽상가라고 말하면서, 이보다 더완전한 그들만의 정원을 만들겠다고 약속할지도 몰랐다.
그는 부모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을것이었다.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수년 전에 그를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그가 그들을 버릴 차례였다. 그가 붙잡혀 있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느꼈던 안도감은 이제 끝났다. 그는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고자했다. 자유롭게 평원을 돌아다니면서 언젠가 그들한테 들러 그런 삶을시작하도록 어려운 교훈을 가르쳐준 것에 고맙다고 할지도 몰랐다. - P305

"계획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게 될 거다. 네가 나를 위해 가장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아보자꾸나." 아지즈 아저씨가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이런 여행들에 지쳐가고 있다. 네가 나를 위해 그걸 좀 해줄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는 옛친구 차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조심해라. 너희 둘 다. 칼릴! 너도, 북쪽 국경에서 독일인과 영국인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얘기가 있다. 어제 오후 시내에 들어갔다가 상인들에게서 들은 얘기다. 언제라도 독일인들이 자기 군대를 위해 짐꾼으로 쓰려고 사람들을 납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바짝 차려라. 그들이 오는 걸 보면 즉시 가게를 닫고 숨어라, 너희도독일인들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들었잖느냐? 좋아, 어서 하던 일해라." - P315

 땅은 사람들의 발자국들로 헤집어져 있었고 혼란스러움이 대기를 떠돌았다. 그는 수피나무 그늘 너머에서 똥무더기 여러 개를 발견했다. 개들이 벌써 그것을 조금씩 먹고 있었다. 개들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깃 보았다가 곁눈질로 경계했다. 그들은 몸을 살짝 틀어 자신들이 먹는 것을 그의 탐욕스러운 눈길로부터지켰다. 그는 너무 놀라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더러운 것을 먹는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개들은 똥을 먹고 사는 자를 보았을 때 즉각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비겁이 산후의 점액으로 뒤덮여 달빛에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그것이 숨쉬는 것을 보았는지를떠올렸다. 그건 버림받은 것에 대한 첫번째 두려움의 탄생이었다. 지금, 개들의 품위 없는 굶주림을 보면서, 그는 그것이 뭐가 될지 알 것만 같았다. 그가 정원에서 문의 빗장이 걸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여전히 행진하는 행렬이 눈에 보였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고 따끔거리는 눈으로 그 행렬을 뒤쫓았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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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자주,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슬픔이 가득 담긴 소년의 눈, 역설적인 ‘낙원‘.
유수프는 낙원을 만나게 될까? 낙원이 있기는 한 걸까?
이제 100페이지, 더딘 걸음으로 그의 여정을 따라간다.

유수프에게 그것은 몇 년에 걸쳐 사로잡혀 살면서 얻게 된 평정심을 깨뜨리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지즈 아저씨의 가게에서 불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볼모로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즉 아버지가 진 빚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가 아지즈 아저씨에게 저당잡혀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수년에 걸쳐 너무 많은 돈을 빌렸고, 그것이 호텔을 팔아서 갚을 수 있는 수준 이상이라는 것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혹은 그의 아버지가 운이 없었거나, 자기 것이 아닌 돈을 어리석게 써버렸는지도 몰랐다. 칼릴은 그에게 그것이 사이드가 일하는 방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결과 그에게는 뭐든 필요해질 때, 그 필요한 일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이드에게 돈이 급해지면, 몇 명의 채권자를 희생시켜 그 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 P70

 그들의 음성이나 특유의 성향 - 어머니의 웃음, 마지못해 짓는 아버지의 웃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그를 안심시켰다. 그가 그들을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들을 점점 덜 그리워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과 헤어진 것이 그의 삶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곰곰이 생각해보았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슬퍼했다. 그는 그들에 대해 알아야 했거나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던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를 겁에 질리게 했던 격렬한 싸움들. 바가모요를 떠난 후 물에빠져 죽었을 두 소년의 이름. 나무들의 이름. 그런 것들에 대해 그들에게 물어볼 생각만이라도 했더라면, 스스로 너무 무지하다고 느끼거나그토록 위험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그는 주어진 일을 했고, 칼릴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완수했으며, 그 ‘형‘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허락을 받을 때면,정원에서 일했다. - P71

"키자나 음주리 "아름다운 소년이로군. 모하메드 압달라가 유수옆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얼룩덜룩하고 비늘이 덮인 듯 느껴지는 손으로 그의 턱을 잡고 말했다. 유수프는 고개를 흔들어 놓여났다. 턱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이리 와 너, 사이드께서 아침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신다. 너는 우리와 같이 가서 장사를 하며 문명과 야만의 차이에 대해 배우게 될 거다. 지저분한 가게에서 노는 대신에………… 이제 좀컸으니 세상이 어떤지 돌아볼 때가 되었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유수프의 악몽 속에서 어슬렁거리던 개들이 떠오르는 약탈자의 얼굴이었다.
유수프는 공감을 바라며 칼릴에게 갔지만, 칼릴은 그를 가엾게 여기지도 그의 운명을 함께 슬퍼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장난처럼 팔을 때렸다. 유수프는 몹시 아팠다. "너, 여기 정원에 앉아 놀고싶지? 저 미치광이 음지 함다니처럼 카시다 노래나 하고 싶지? 정원은거기에도 많아. 사이드한테 괭이를 빌릴 수도 있을 거다. 야만인들과거래하려고 몇십 개는 가지고 다닐 테니까. 야만인들이 괭이를 좋아하거든. 왜 그런지 누가 알겠니? 그들은 싸움도 좋아한다더라.  - P76

 그들은이틀 낮과 하룻밤을 기차로 이동했다. 기차는 자주 서고 속도도 별로높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지에 야자나무와 과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가장자리의 초목들 사이로 작은 농장들과 농원들이 보였다. 기차가 멈출 때마다 짐꾼들과 보초들은 무슨 일인지 보려고 플랫폼으로 우르르 내려갔다. 그중 일부는 전에도 이 경로로 이동해본 적이 있어서 역무원들과 플랫폼 상인들과 안면이 있는 터라 지체 없이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전해줄 메시지와 선물을 건네받았다. 이른오후의 더위로 정적이 감돌 무렵 도착한 어느 역에서, 유수프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오후 중반쯤 되자 기차가 카와에서멈췄다. 그는 긴장한 채 조용히 기차 바닥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그를알아보고 그의 부모를 당황하게 만들면 어쩌나 싶었다. 나중에 지대가점점 높아지면서 그들의 여정은 동쪽을 향했고, 나무들과 농장들은 더드물어졌다. 초원들이 이따금 울창한 잡목림으로 이어졌다. - P81

산밑의 공기는 쌀쌀했고, 햇빛은 유수프가 전에 보지 못한 자주색을띠고 있었다. 이른아침에는 산봉우리가 구름에 가려졌지만, 해가 더강해지기 시작하면서 구름들이 사라지고 얼음으로 덮인 봉우리가 드러났다. 한쪽으로는 평평한 평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뒤쪽으로 가축을 키우고 동물들의 피를 마시는 먼지 빛깔의 전사 부족이 산다고 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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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먼저 그의 이름은 유수프였다. 그는 열두 살 때 갑자기 집을떠났다. 그는 그때를 하루하루가 전날과 똑같은 가뭄철이었다고 기억했다. 예상치 않은 꽃들이 피었다가 죽었다. 이상한 벌레들이 돌 밑에서 종종걸음으로 나와 뜨거운 햇빛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태양은 멀리 있는 나무들이 대기 속에서 떨게 만들었고 집들이 부르르하며숨을 헐떡이게 만들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구름이피어올랐고 낮시간에는 날카로운 정적이 감돌았다. 계절의 막바지에는 그런 순간들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 P9

칸주 한 벌, 셔츠 하나, 쿠란 한 권, 어머니의 낡은 묵주가 전부였다. 그녀는 묵주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낡은 숄에 싸고 끝을 잡아당겨 묶어두툼한 매듭을 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유수프가 짐꾼들처럼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매듭 속으로 지팡이를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적갈색 사암으로 만들어진 묵주를 마지막에 은밀히 건넸다.
오랫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거나, 어쩌면 다시는 그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 물어본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가야 하는지, 일이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차역에서 유수프는 성난 표정의 검은 새가 그려진 노란 깃발외에, 은빛 테두리의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또다른 깃발을 보았다. 그들은 고위층 독일군 장교들이 기차로 이동할 때에만 그 깃발을 달았다. 아버지가 그를 향해 몸을 숙여 악수를 했다. 그러고는 다소 길게무슨 말인가를 했고 마지막에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중에 유수프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신에 대한 말이었던것 같다. - P30

유수프는 손님에게서 돈을 받는 법과 손가락 사이에 꼭 끼게 지폐를 쥐는 법도 배웠다. 칼릴은 그에게 코코넛기름을 국자로 재는 법을 가르치면서 손이 떨리지 않게 잡아주었고 긴 철사로 기다란 비누를 자르는 법도 보여주었다. 유수프가 잘 따라서 하면 그는 인정의 의미로 활짝 웃어 보였고, 그러지 못하면 몹시 아프게 때렸다. 때때로 손님들 앞에서도 그랬다.
손님들은 칼릴이 하는 모든 것을 보고 웃어댔지만, 그는 신경쓰지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의 억양을 두고 끊임없이 그를 놀렸고, 그를흉내내면서 왁자하게 웃었다. 동생이 말을 더 잘하도록 자신을 가르치는 중이라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충분히 말을 잘할 수 있게되면 통통한 음스와힐리* 아내를 얻어 경건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테라스에 있는 노인들은 통통한 젊은 아내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칼릴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말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손님들은 그가 발음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단어와 구문을 반복하게했다. 칼릴은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발음하면서 같이 웃었다. 그의 두눈이 즐거움으로 환하게 빛났다. - P46

그들은 아지즈 아저씨가 저녁 늦게 그날 번 돈을 가지러 올 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그를 보았다. 그는 칼릴이 건네준 돈자루를 흘깃 들여다보고, 칼릴이 하루의 매상을 기록한 공책을 훑어보고는 더 자세히살피기 위해 둘 다 가져갔다. 이따금 그를 더 자주 볼 때도 있었지만,
지나치는 길에만 그랬다. 그는 늘 바빴다. 아침에는 시내로 가는 길에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가게를 지나쳐갔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테라스에 있는 노인들은 아지즈 아저씨가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유수프는 이제 그 노인들의 이름을 알았다. 바 템보, 음지 타임, 알리 마푸타. 그러나 그는 그들을 하나의 현상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자신이 눈을 감으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상상했다. - P49

 유수프는 이제까지 그렇게 바다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의 거대함에 말을 잃었다. 물가의 공기는 상쾌하고 알싸한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똥과 담배와 원목 냄새로 가득했다. 자극적이면서 썩는 듯한 냄새도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초 냄새였다. 해변에는 끌어올린 아우트리거 보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참 위쪽에는 선주인 어부들이 차양 밑과 요리중인 불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조류가 일몰두 시간 전쯤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자 칼릴은 그들 사이에 태연히 앉더니 유수프를 자기 옆에 끌어다앉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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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1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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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낙원‘을 읽기 시작한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세계로 진입하게된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한 걸음이라 뭐라 규정할 순 없지만 ‘유수프‘와함께 고향을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열두살은 모험이 두려울 것이다. 앞으로 유수프가 만나는 세상이 내가 만났던 세상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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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 대도
가꾸는 삼십 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 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 대.
사십 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의 시 <사십 대>

p148. 149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학벌 세탁에 드는 자원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몰락한 중산층이 되어 월백만원에이르는 재수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생계 노동에 나서야 하기에 책상에 붙어 앉아 미적분을 풀 시간이 없었고, 두 아이 양육과 살림만으로도 생체 에너지는 고갈됐다. 그 모든 한계를 떨치고 일어날만큼 공부에 한이 맺혀 있지도 않았다. 지금 책장에 꽂힌 책만 다 읽기에도 남은 인생이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내가 왜 굳이 또 그걸.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운이 좋은 고졸 사람이었다. 비교적 문턱이 낮은 자유기고가 직업에 입문해 열일했고 전세자금도 올려줬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글쓰기 관련 강의도 나간다. 학력 문제는 계속 따라다닌다. 내가주로 강의를 나가는 곳은 시민단체다. 나랏돈을 받아 운영되다 보니강사료 지급 기준이 박하고 엄격하다. 다른 통로로 최저 강사료를마련해주기 위해 활동가가 애를 먹기도 한다. 작년에 모 대학 특강을 갔을 때는 강사료 지급기준에 석박사 학력 기준은 있어도 고졸학력 기준은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단다. - P115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것과 관련해 꽤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잊고 살아도 세상은 잊지 않으므로 ‘그것‘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 P116

그들의 변신 욕망이 어떤 가치를 낳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억압하느냐 해방하느냐. 하나는 분명해보인다. 묵묵한 살아냄보다 무구한 조작이 우세할수록 삶은 꼬인다는 것, 이장욱 시인의시구처럼 "나는 오해될 것"이고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라는사실이다.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한다. - P118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들은 이름, 감각, 느낌, 음악, 이야기・・・・・ 나에게 존재를 위해 금가루 뿌리는 일이란 음악이 내미는손을 잡는 것,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 느낌을 나누는 것. 그리호사 누리며 살기로 한다. - P119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평생 살아간다. 가끔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정이 든 게다. - P121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허물어진 어깨를 훑고 가던 쓸쓸한 바람이 다시 분다. 긴 강을 건넌 기분이 든다. 다행히 줄초상은나지 않았다. 사실 ‘굿‘이라는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3년동안 문득 조마조마했다. 그럴 때마다 280 인 분의 거룩한 식사를 생각했다.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 뜨겁게 자각되었다. 삶을 옹호하는 본능일까. 주위에 더 눈길을 돌리고 더 아우르며 마음 다해 살 수 있었다.
내게 삶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런 난해함을 삶의 일부로 껴안고살아간다. 또다시 내 앞에 물살 거센 긴 강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긍정하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 점쟁이의 말은 충분히 불우했으되 나의 몰락과 미망을 도와준 바람의 말이었다고 말하게 된 지금에서야, "과거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내것으로 삼는다. - P127

한시절 편안하고 맵시있게 입었더라도 옷은 낡고 체중은 는다. 그리하여어느 날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의 시점이 온다.
연심의 변심 혹은 절심은 언제나 비약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지만생물성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어디든 데려다주는 날개이자 비바람을 막아주던 존재가 불편하고 갑갑해지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엄마가 그랬고 연인이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동료가 그랬다. 어떤 음악이 어떤 책들이 그랬다. 세월이 그렇게 했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 식물도감 동물도감 속 개체들처럼 사람 역시 멋진 자기 유지를 위해 색을 바꾼다. 인연의 옷을 갈아입는다. - P130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 P141

사랑하는 것들과 결을 맞추는 연습.
그리고 얻어온 것들의 본래 자리를 기억하는 노력.
궁극에는 돌려보내야 할 것들과 이별하는 훈련. - P153

생의 빈틈이나 존재의 허전함을 사람으로 채우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고 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말 없는 그것들이 품은 살 같은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를 본다. 나는 사람과 관계 맺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저 연연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리 사는 영혼이문득 가여운 거다. - P154

그럼에도 그것이 이삼십 대에는 치열함의 미덕으로 소용됐을지언정, 사십 대에는 좀 넉넉한 시간의 옷이 필요한 것 같다. 빈틈없이날카로운 잣대는 늘어진 뱃살 드러나는 쫄티처럼 이제 내게 안 어울린다. 갑갑하고 각박하다. 남 보기에도 안 좋고 나도 불편하다. 야무지게 살려니 체력도 달린다. 오래된 핸드폰처럼 일 하나 처리하면 어느새 배터리가 한 칸만 남는다. 아무래도 다른 삶의 방식으로살아야 할 때인가보다. 게으름을 지혜의 알리바이로 삼지는 말되 게으름이 아닌 느긋함으로, 조급함이 아닌 경쾌함으로, 주변의 것들과어우러지는 행복한 삶의 속도를 만들어나가야겠다. 올라갈 때 못 본그 꽃, 내려올 때 볼 수 있도록. - P160

그해 겨울 용산참사 노제가 열리던 날도 그랬다. 민들레처럼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그칠 줄 몰랐고 남일당 앞 스피커 차에서는 <민들레처럼>이 연신 울려 퍼졌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온몸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구슬픈 가락 따라 눈사람이 된 유족과 검은 영정 사진이 무겁게 흘러갔다. 거침없이 피어나 짓밟힌 사람들. 고조되는 목소리.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오."
언젠가 봄은 온다고들 말하지만, 당사자에게 겨울은 너무 길고춥다. 구체적인 아픔을 무화시키고 봉합해버리는 상투적인 결말이거슬렸다. 우리는 봄을 기다리기보다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나는 법을 노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마디마디 분절되어 살갗에 닿던 민들레처럼 말이다. - P163

데이트 생활자의 겨울 근래 들어 근무 태만이다. 혼자 노는 기술을 알아버렸다. 이를 테면, 파울첼란의 시집을 사고는 카페에 갔다가 독일풍으로 뮌헨 빵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된장녀 짓을 일삼으니 지루하진 않다. 늘 그랬다.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바늘 하나로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눈송이 하나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러니 이 헛됨을 누리면서 견딜 수 있는 한 번의 기쁨, 한 번의 감촉,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필요하다. 합정동에 두고 온 그대 생각 남일당에 두고 온 민들레처럼 학림다방에 두고 온 종이학. 팔뚝에 저장된 체온 같은 것들…………. 나의 무제한적인 부, 눈과 함께 서리서리 쌓인 시간의 기억들. 그것으로 겨울을 나고 일생을 버틴다.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으니까. - P166

안 보이는 사람의 나라가 있다. 삶에 대한 상상력이 직업에 대한정보력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람의이야기는 사라져간다. 남성, 이성애자, 서울 출신, 명문대 졸업, 전문직 종사자로 표상되는 소위 정상적 삶의 서사는 매스컴으로 구전으로 맹렬히 유통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수록 삶의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장애여성 강사처럼 자기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말할 기회가 드물고, 겨우 말한다 해도 오해나 동정을 산다. 그런데 남에게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위치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을 단정하는 내 ‘꾸준한 고집‘으로 눈앞에서 놓쳐버린무수한 타인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듣기를 시도한다. 저마다 처지와 형편과 고민을 말하고 듣고 상상하는 동안 서로의 존재 정착을도우리라. - P170

여하튼 통속적이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에서 변주되는 그숱한 삶의 유형으로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다. 어쨌거나 다살아간다.
세상에는 무수한 삶이 있다. 이 말은 세상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다는 뜻이다.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래서 보고도 모르는. - P174

뼈아픈 후회의 말들. 누군가가 자기 삶을 걸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얼마나 쓸쓸한가. 구슬처럼 흩어진 나날들 어언 20년 세월이다. 주말마다 집회 및 행사에 가느라 휴일 없이 살아온 그다. 대기업·정규직 ·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판에서 여성활동가의 입지는 좁다. 조직 내부의 부조리한 문화에 가슴앓이 다반사다. 높고 큰 벽, 정면돌파하기에는 선배의 기초 체력이, 권력의지가 약했다. 원래 목표 지향적 감각이 여성에게는 부재하다. 그래서 하루하루는 바빴으나 청춘 시대는 허술해진 형국이 되어버린 거다. 매일 일해도 평생가난할 수 있듯이. - P230

일명 ‘힘에의 의지‘로 니체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설명한다. 온몸이 귀가 되어 니체의 철학을 빨아들이던 선배는 그럴수록 어머니의 지혜에 탄복했다.
나도 신기했다. 서해안 작은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분이다. 나쁜짓이라도 하는 게 낫고 그러면서 하나라도 배워야 한다는 믿음. 그깨달음의 높은 돛대에 오르기까지 어머니는 얼마나 모진 풍파를 겪으셨을까.
선배는 선거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더이상 젖지 않는 자, 불타지 않는 자의 모습은 없다. 지금은 환희에 젖고의욕에 불탄다. 내부 상황은 어지럽지만 해보고픈 일 해나가겠다며악행론을 폈다. "정말 그렇더라. 내가 조직에서 고립됐을 때 그들의악행 덕분에 대학원에서 공부할 결심도 했고, 또 내가 채용직 활동가라는 관례를 깨고 선거에 나가는 악행을 저질러서 조직에서 여성운동을 해볼 기회가 마련됐고, 악행이 꼭 악행이 아니더라고." 고개를끄덕이던 나는 니체 깔대기로 마무리했다. "그래서 니체가 창조하는자만이 비로소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한다고 했지." - P232

한 번뿐인 인생. 잘 벌어 잘 먹고 잘 쓰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기의 세계관에 맞게 추구하면 될 일이다. 헌데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돈의 세례 속에서 평생 살 수 있는 인생이 많지도 않거니와돈은 속성상 충족을 모른다. 바닷물처럼 마실수록 갈증만 일으킨다.
돈의 만족보다 삶의 만족을 이루기가 더 쉽다. 이른 나이부터 안빈낙도하기는 어렵겠지만, 일찌감치 돈에 정신을 묶어두는 것도 서글프다. 마흔일곱에 겨우 벼슬에 오른 두보는 어지러운 정국과 부패한 관료 사회에 실망하여 시를 짓고 술을 마셔가며 시름을 달랬다고전해진다.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두보를 보아도 그렇다. 부귀영화에 이 한 몸 던져 행복하려는 사람이 있고, 헛된 영화에 이 한 몸 얽맬 필요가 있으랴 노래하는 이가 있다.
둘 다 자기 선택이겠으나 젊은 날의 경험과 감각이 판단의 중요한근거가 됨은 분명해보인다.
인생의 꽃 시절은 짧고, 삶은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지속된다. - P238

프리랜서로 일할 때 여기 가라면 여기 가고 저기 가라면 저기가서 일해주고 오는데, 내가 몸 파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창녀의 직업과 크게 다른 노동을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다"고 했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생"이라는 대목에선 우리들은 저마다의 처지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을 사고파는 일의 쓸쓸함은 정녕 피할 수 없는가. 분업화되고 파편화되는 삶의 양식에, 합리성과 효율성과 생산성에 저항해야지. 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말아야지. 팔 때 팔더라도 알고 팔려야지. 팔리기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버둥거리는 노동절 전야. - P244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들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웅크린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리는 중얼거림이
그 옛날의 흔해 빠진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 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 P244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미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정액처럼 표지 위에 얼룩져 있다.

신간 코너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재고 도서로 쌓였다가 다시 무수한 손을 거쳐지루한 세일 기간 동안 싸구려로
드디어 제값으로 팔리기 위해 나와 앉은 헌책들

- 이영광의 시 <헌책들> - P245

윤여정은 이 영화 개봉 즈음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도 나처럼 부모 밑에선 소중한 딸 아니겠냐. 그런 생각을하면서 착잡해졌고 우울해졌다. 사람들은 왜 할 일이 많은데 저런일을 하느냐고 손가락질한다. 그런데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오지만,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을 거다.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겠더라."
윤여정은 또한 영화를 하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았을 세계를 안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의 내밀한 연기 덕분에 나역시 평소 모자이크 처리되고 음성변조된 채 가십거리로 소비되는한 존재의 생활 세계를 경험했다. 한 사람의 속사정에 다가갔다. 영화 제목만 봤을 땐 ‘죽여주는‘이란 수식어가 직업적 숙련도를 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성적 쾌락과 죽음 대행,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소영이 하는 일이란, 산 사람 살게 하고 죽으려는 사람 죽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단골 고객 증언대로 소영은 천사였을까. 그렇다면 아마도 그건 지상의 가장 낮고위태위태한 자리에서 일생을 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P248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다. 나는울컥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슬프고 구차한가요" 문자를보냈다. 답이 왔다. 마음만 남루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우연히, 혹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말했다. "돌봄은 우주를 돌고돈다고 하죠."
니체가 남을 동정하고 연민할 때는 섬세한 기예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런 거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쟤한테 받은 건 얘한테 줘도 되니까. 지금 받고 이따 줘도 되니까. 돌봄의 우주적 순환원리가 수건돌리기처럼 재밌고 흥미로운 이 세계의 운동으로 이해됐다. 그러고보니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처럼 나에게 답지하는 온정의 손길로 나는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학력 자본 화폐 자본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내가 밥 먹고 사는 건 누군가의지극한 돌봄 덕분이었구나, 깨달았다. 신세 한탄 그만하고 나의 돌봄은 어디를 어떻게 향해야 하는가를 연구해야겠구나 마음 다잡았다. 그런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글픔은 긴 속삭임처럼 - P256

흘러다녔다. 난방비 폭탄이 나온 관리비 고지서 앞에서는 그토록 아름다운 이론도 힘을 잃는다. 본디 이데아적 세계는 감각의 세계 앞에서 무기력하다.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면서 꺼지지도 못하는 질긴이생. 바늘방석 같은 사랑 때로는 망각의 잠을 청하고 싶은. - P257

다 가진 삶의 기준이 결혼, 직장, 아이인가. 그 나름도 실속 있는삶이지만 단 하나 삶의 모델을 좇아 60억 인구가 한 방향으로 뛰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또 직장 다니면서 가정 꾸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갑갑한 삶을 사는지, 그나마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두리번거리지도 못하고 삶의 에너지를 다 써야 한다는 팍팍한 현실을 상기시켰다. 일찍부터 타협하고 사는 노회한 젊음은 매력 없으니, 진짜 소설을 쓰려거든 지금처럼 불안하게 살라고 말했다. 그도 알고 있을 원론적인 얘기를 건네고, 나도 알고 있는 원론적인 말들을 들었다. 수다는 공회전이 본질이다. 전화를 천천히 끊고는 남사스러워서 하지 못한 말은 문자로 띄웠다. 실은 그날 전화한 날, 나눈물바람 했다고 자기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삶이 누구에겐 부러워 죽겠는 삶이기도 하다고 쓸쓸한 고백, 아니 수줍은 자백………….
황지우 시인의 말대로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 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 P262

내 직업 ‘작가‘도 학자와 더불어 문을 숭상하는 한국 사회 유교적 전통의 수혜 직군이다. 가난해도 대접받는 편이다. 그런데 글 쓰는 직업에도 위계가 있다. 자유기고가와 르포르타주 작가로 일하는내게 사람들은 예사롭게 묻는다. "시나 소설은 안쓰세요?" "등단하셔야죠. 저 순문학 세계에 이르는 길 어디쯤에 비소설 분야 문필하청업자 자리가 있지 싶다.
장르는 갈래다. 장르 자체가 작품의 고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권력에 빌붙어 합리적 생존성만 따지는 의사나 법조인이 있고, 약자에게 다정한 폭력을 휘두르는 문인과 교수가 있다. 특정 직업에 덧씌워진 환상을 벗겨내고, 그 일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다른 존재를 억압하진 않는지, 어떤 관점을 내포하는지 해부학적으로 따져야 한다.
‘나는 볼 수 있다‘고 말하는 누드모델처럼, 보여질 때조차도 보는 사람이 예술가다. - P266

나는 밥벌이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거기에 붙들릴까 염려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무너질까 두려워할때 발생하는 것이 ‘불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강고해질까봐 두렵다. 김수영의 시구대로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그런 어리석음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인생이다.
밥을 위한 삶 가치를 추구하는 삶. 이분법적으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노동과 삶이 분리된 처지가 사람에게는 폭력적이다. 하나만 골라서 극단을 취하기는 어쩌면 만만할 것이다. 둘사이의 경계에서 긴장을 견디는 게 삶의 기예일 것이다. 그게 어려워 김수영도 제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노상 주문을 외웠고, 자기미움으로 온통 시를 도배해놓았겠지. 내가 무슨 돈, 지위, 명예 같은권력의 표상을 탐하는 자도 아니고, 어떤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을 - P269

말리고 내일을 위해서 잠을 지야 하는 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데도 사는 일이 간단치 않다.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해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먼지 낀 잡초 위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들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 P271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김수영의 시 <구름의 파수병> - P272

 은근히 긴장됐다. 동료와수다를 떨다가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럽고 부담스럽다고 말했더니 그가 시니컬하게 한마디 던진다. "철학하려고 하지 말고 글쓰기를 해. 뭐가 문제야?" "알았어" 냉큼 답했다.
뜨끔했다. 나는 은근히 철학을 겸비한 글쓰기를 하려고 욕심내고있었다. 한 번에 다 이루려는 전형적인 초보자의 조급증. 그는 나쁜글, 좋은 글 사례나 많이 모아두라고 했다. 노가다가 진리니 3D 모드로 일해야지 다짐했다. 잠시 망각했는데, 나는 생산 모드에 돌입했을때 철학하지 않았다. 몸 써서 일했다. 농부처럼 허리 굽혀 씨 뿌릴 때무언가 자라났다.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좋은 무엇‘을 말로써 가르칠수는 없다. 하다못해 아들과 대화할 때도 애초의 훈화 목적은 빗겨 가기 마련이다. 타자를 변화시키는 힘은 계몽이 아니라 전염이다. 자꾸까먹는다. 긴긴 겨울밤 존재의 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마냥 뒹굴던 농한기가 가고 농번기가 온다. 글쓰기 강좌라는 농사를 앞두고, 내좋은 봄날의 캐롤송 <하얀 목련>을 부른다. 몸이 깨어나도록.
‘글쓰기의 최전선‘ 첫 번째 수업을 마치고 생각했다. ‘인터뷰랑이랑 비슷하네.‘ 어차피 낯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각과 느낌 - P275

을 섞고 ‘글‘이라는 생산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랬다. 일주일이 후딱 갔고 수업이 기다려졌다. 글쓰기 수입이 전생처럼 익숙했고천직처럼 재미났다. 이는 거, 모르는 거 있는 거 없는 거 다 탈탈 털어서 나누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얼결에 나도 많이 배웠다. 마지막 수업 때는 연천으로 엠티를 떠났고 밤 산책에서 반딧불의 향연을 보는 호사를 누렸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스크린이 눈앞으로 내려온 느낌이랄까. 시야에 일렁이는 반딧불의 움직임은 진정 몽롱하고 아득했다. 좋은 글과 좋은 추억 가득했던 짜릿한 시간들. 마지막수업을 끝내고 생각했다. ‘강의 연애랑 비슷하네‘
예정된 일이었지만 허탈하고 허전했다. 궁상맞게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 그 노래까지 떠올랐다. 남녀상열지사에 따르는 표준적인 이별 감정은 아닐진대 라디오에서 슬픈 노래만 나오면 눈물이 찡흘렀다. 토요일이 길었다. 그 무자비한 청의 시간이 가고 한 달 정도 지나자 서서히 평상심으로 돌아왔다. 이런 내가 비정상은 아닌가보다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배울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 지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 무언가 다른것에 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배우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처음은 얼마나 무서운가. 첫사랑, 첫 아이, 첫 친구, 첫 스승, 첫 동료, 처음이라서 서툴고 두렵고설레고 그리고 애틋한 그 무엇. 한 존재의 급진적 변화를 끌어내는첫 바이러스들, 급류 같던 몇 군데 ‘첫‘ 인연을 통과하고 ‘글쓰기의최전선‘ 동료들을 만나며 나는 믿게 됐다. 인간은 처음 인연에 매몰된 만큼 성장한다. - P276

허수경의 시 구절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명함과 소속이 없으면 이리저리 치인다. 직장 다니는 여자가 살림하는건 당연시되지만 살림하는 여자가 공부하는 건 수시로 이유를 추궁당한다. 학위와 등단과 취직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서, 그냥 글 쓰고싶은 삶이어서 나는 긴 세월 난감했다.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겪었다. 내가 책을 냈다고 했을 때도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이거였다. "어느 출판사예요?"
사람이나 책이나 이름 대면 알 만한 반듯한 명패가 방패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불확실성의 살아가기로 버티려면 아버지들의 말씀을 반사시킬 질문 카드라도 한 장 준비해야 할까보다.
"근데 그게 왜 궁금한 거죠?" - P280

어디 살림만 그러겠는가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책 한 권을어렵사리 읽어도 돌아서면 내용을 까먹지 않던가. 두툼한 책 한 권에서 단어 하나 내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수학 문제도 몇 번을 풀어야 자신 있게 답을 쓴다. 수년간 다달이 부은 보험을 해약하면 푼돈만 남는다.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 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만지면 마음이 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버린다. 떨어진단추를 달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메운다. 해드는 오후 마루에 앉아 빨래를 반에서 반으로 접으며 미련과 회한을접는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 P285

공부든, 육아든, 농사, 간이든, 장사는 본디 사는 일은 간단치 않다. 나와 세상의 협응이 쉬울 리 없다. 그런데도 유독 출판, 사유와 집필 노동의 성과물에는 그 자체로도 번듯한 지위가 부여된다.
판매량에 비례해 사회적 위상이 수직으로 상승한다. 지식 노동 전반에 관한 우대 풍토는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와 생산성이 최고라는 산업사회 이데올로기가 만나서 형성된 독특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내 비록 무명작가지만 이번에 책을 내고 더욱 실감했다. 저자에게 부여된 과도한 권위와 선망을.
책을 내는 것, 그 자체가 선업일 수 없다. 특히 요즘은 특정 집단의 이익과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한 출판도 많고 쉽다. 그 경계와 판단은 모호하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책이 나왔을 때 주변에서 축하도 좋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인가를 따져묻고 토론하는 인문적인 풍토가 형성되면 좋겠다. ‘책 낳는 일‘이 권력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해체하는 일이 되도록 말이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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