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옥타비오 파스, 시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가 모두 ‘눈‘이다. 눈에 대한 나의 마음이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다. 눈이 왜 좋냐면 희어서, 깨끗해서, 고요해서, 녹아서, 사라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번째 눈……… 열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보다가 문득 이런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
숲 어귀에 닿을 때까지 인적은 없고, 세상은 점점더 창백해진다. 내 입술 안에서는 그와 나눴던 말들이고스란히 되풀이되지만,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그 말들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데시벨보다 낮은 소리가 사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그런데 그 마음을 페소아는 다르게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페르난두 페소아, 「기차에서 내리며」,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2018)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상대방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대화하는 편인데, 헤어져돌아오면 얼굴은 그새 감감해지고 그의 목소리만 귓전에 남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숨이 끊어지고도 끝까지남는 감각이 청각이라더니, 그래서일까 짐작해본다. 반대로 어떤 이의 목소리를 아무래도 떠올릴 수 없어서 괴로울 때도 있다. 전화를 걸거나 다시 만나면 해결될 마음이지만,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형편도 있으니까. 그럴 때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은 얼굴에 비해 결코 사소하지 않다. 목소리는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을다 가진, 사무치게 쓰다듬고 싶은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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