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얽매임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
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나는 11월을 편애한다. 가을 앞에 붙은 ‘늦‘이라는 말도, 앙상한 나무와 아예 모질지는 못한 바람도 아낀다. 본색을 더 드러내면, 나와 나의 고양이가 태어난달이라는 이유도 덧붙일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이 비슷하고 같은 병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얼굴도 닮아가고있다.
숫자 11의 생김새를 골똘히 보면, 나무 두 그루 모양이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만으로 서 있는 만추의나무. 그 잎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나무 바로 밑 둥치로 떨어져 모인다. 그래서 나는달력 위 11이라는 숫자의 발치에 둥근 그늘 같은 것을그려 넣는 낙서를 하기도 한다.
고요한 하강과, 존재의 밑바닥에 고여드는 그늘과, 그늘을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을 가진 11월에 파울첼란의 시를 다시 읽는다. 읽을수록 그의 옆은 빈자리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고르자면 ‘무(無)‘를 누일 수 있을까. 그들은 둘이었으나, 첼란이 강 위로 몸을던진 순간 말없이 하나가 되었다. 11월의 잎과 땅처럼.
11월에는 내 고양이의 등을 더 자주 쓰다듬는다. 너에게는, 나에게는, 앞으로 11월이 몇 번 남았을까 물어보면서. 창턱에 엎드려 맞은편 숲을 응시하다 고개를돌리는 열세 살 고양이는 물론 답이 없지만, 큰 눈동자의 고동빛만은 한층 깊어진다. 늦가을은 진실로 깊은 가을이다. 그 깊이의 출발지가 넉넉한 그늘인 것은 알겠고, 종착지가 어디일지는두고 보는 것이다.
이제 11을 살며시 눕혀보면, 하늘을 보고 나란히누운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는 나무가 그러하듯거리가 있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을 ‘파울첼란‘이라고 지어준다. 그 옆은 누굴까. 이십대에 잠시 사랑에 빠졌던잉에보르크 바흐만도 아내 지젤 레스토랑주도 선뜻 옆자리에 두지는 못하겠다. 쉰한 살에 센강에 몸을 던져자살했을 때, 그는 온전하게 혼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0년 11월에 태어난 파울 첼란은 쇼아(shoah)로부모를 잃은 후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 나왔다. 그러나그가 시로 전했듯 "살았다는 것은 틀린 말, / 숨결 하나가 ‘저기‘와 ‘거기 없음‘과 ‘이따금씩‘ 사이를 눈먼 채 /지나갔을 뿐"이었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고통 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첼란에게는 사랑보다 비극이 더 무거웠을 것이라 짐작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폭력이 뒤섞인 세계에서 헛되게말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늘‘ 속에 머물기를 택했다.
너의 말에 의미를 주고 거기에 그늘을 드리우라.
거기에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라. (......) 진실로 말하는 이는 그늘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걸어 말하는 이는 당연히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점점 짧아지고 침묵의 비중이커진다. 각각 다른 두 편의 짧은 시에서, 나는 유서와도같은 구절을 찾았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그리고
물 위를 떠다니는 말은 어스름의 것
파울첼란, 「말하라 너도」, 「죽음의 푸가』, 민음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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