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산문을 쓰겠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하면, 둘중 하나는 표정을 찡그리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응한다. 왜 사랑 타령을 하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멜로melo‘적인 사랑 타령이겠거니 지레 거부감을드러낸다. 식상해서 도저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겠다는표정임에 틀림없다. 멜로. 원래는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멜로드라마는 노래가 곁들여진 연극이 그 기원이다. 프랑스혁명이후부터 흥행하기 시작한 멜로드라마는 기존의 정통극과 달리 통속성과 오락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통속성과 오락성은 멜로드라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되었다. 스토리텔링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후로 대중이 가장 잘 몰입하고 가장 손쉽게 음미하는 소재가 되었다. - P11
나는 사랑에 무능력했던 나의 경험들이 사랑에 대한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간 이 - P12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위해서, 사랑을 멜로로 연결 짓고 식상해하던 습관이 사랑에 대한 결례라는 걸 우선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사랑의 내부에 매복해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이 겹겹이 덧씌워진 채로 사랑은 본래의 얼굴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왔던 것이다. - P13
세상에서 사람이 비루해지거나, 사람 앞에서 세상이비루해지는 걸 자주 목격했다. 사랑이 그 비루함을 어떻게든 구원할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랑의 뒤꽁무니를 좇는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끝나면 다른 사랑을 이어가면서, 사랑에 의해 사람이, 혹은 사람에의해 사랑이 마모되는류의 사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랑을 인간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녀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을 완성하는지를. 사랑의 무수한 결을 차곡차곡 조심스레 펼쳐서 잘 키워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길고,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인간의 삶은 너무 짧은 것 같았다. - P23
사람들은 여전히 둘을 비교했다. 누군가 비교를 하더라는 말을 전해주기도 했다. 누가 누구를 버렸는지를 궁금해하고, 누가 더 안 좋아지고있는지를 평가했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그가 보고 싶지 않느냐며, 지금 그와 함께 있다며, 그녀를 불러내려 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짓궂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두 사람을 묶어서 생각했다. 자세한 속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가까운 이들에게 무슨말이든 하고 나면, 돌아서서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했던 말들이 벌떼처럼 그녀를 에워싸고 윙윙댔다. 그녀는 자신이 뱉은 말들 속에서 벌에 쏘인 것처럼 앓았다. 퉁퉁 부은 붓기와 따끔거림이 그녀의 신체가 되어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입 밖으로 뱉어지는 이야기는 매번 어리석었다. 정교할 수 없고 정확할 수 없는 엉터리였다. 아예입을 다물면, 그만큼의 오해가 또 다른 편에 쌓여갔다. - P31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부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정희진, 「가족 밖에서 탄생한 가족: 가족의 탄생」, 「혼자서 본 영화, 교양인, 2018, p. 27.
편한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에 서줄 사람.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가족 같은 사람‘이라 칭한다. 타인이 가장 친밀히여겨질 때 ‘가족 같다‘는 표현을 쓸 만큼, 가족이란 말은 - P34
유대의 최대치를 표현한다. 날로 험해지는 세상에 비해 날로 나약해지는 개인은 어떻게든 보호를 받고 싶은데, 그럴 때 우선 떠올리게 되는게 가족밖에는 없다는 듯.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가족은 특별함을 일찌감치 지나쳐 온갖 문제가 산적한 집합체가되어 있다. 우리들 내면에 간직된 상처의 가장 깊숙하고거대한 상처는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 P35
옳은 방식이 미리 결정되어 있을 때, 우리가 그은 것을 모두에게 강제할 때는 그 삶 자체가 배척당한것일 수도 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p. 68,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이 당위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아는 능력을 보장해주면 좋으련만, 사랑이 지닌 위험으로 기울 때가 많다. 그래서 타고난 사랑의 능력을 훼손당하기도 하고,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불신하기도 하며, 미지에 대한 당연한 불안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압력과 폭력에서 기인된 트라우마가 심장 깊숙이 각인되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 개인의 서사가 두려움 없이 전달되고 이해되며 존중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 P39
어떻게 하면 사랑이란 걸 잘 줄 수 있는지를,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궁리한다. 사랑을 잘 주는 일은그래서 곧잘 자기계발서의 주요 아이템이 되어왔다. 특히 구애의 기술에 대해서는 매뉴얼이 차고 넘친다. 자신의 사랑이 잘 전달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매뉴얼이 머릿속에 그럴듯하게 장착되어 있다. 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받는 자의 제대로 된 행동인지, 잘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지침들은 거의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결여와 반대에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결여 없이 시작되는 노력과 궁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자는 사랑에 대하여굳이 궁리하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 P73
상처를 남기고 종결된 사랑은 대개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놓여 있다.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종결된 사랑은 별로없다. 사별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아름답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는 이 역시 별로 없다. 이미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버려진 사랑을스스로의 발화로 인해 보다 더 초라하고 보다 더 추악한것으로 재편하면서까지 자신의 실책을 덮어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지나간 사랑은 봉인해야 옳다. 입을다무는 게 낫다. 마치 처음 포옹을 하던 그 순간처럼,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온전히 포갬으로, - P83
그녀는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어디까지 용서해야하고, 어떻게 용서를 해야 하는지, 용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지, 처절하게 질문을 해본 적이 누구나 있다는 사실을말이다. 용서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종교적인 차원에서의용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공허한 넋두리일 뿐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심리치유자이며 작가인 스캇 펙은 이 용서라는 개념을 용인이라는 개념과 대비하여 설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흐릿한 이해를 앞세운 후 잘못을 저지른 자를 외면하고 체념하는 것을 용인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며 잘못을 분명히 해두는것을 앞세운 후에 그자를 다시 포용하는 것은 용서라고. - P100
사랑에 위기가 올 때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게 된다. 한계랄 것도 없고 직시랄것도 없다. 뻔하디뻔한, 좁디좁은 자신의 그릇. 그 초라한 됨됨이 앞에서 원래의 자신보다 좀더 큰 그릇이 되려고, 그걸 억지로 해보려고 애를 쓰느라 남모르게 힘이 든다. 사랑에 위기가 올 때에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척을 하느라 힘들어한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돌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왜 나를 괴롭히면서까지이해와 관용을 한없이 펼쳐야 하는가. 나는 어쩌다가 매번 그런 역할만을 맡는가. 한숨에 회한이 섞인 채로 이렇게 되뇌게 된다. "도대체 왜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 P101
용서받은 자가용서한 자의 미덕을 닮아가는 경우보다 용서한자가 용서받은 자의 악덕을 닮아가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사람을더 많이 만날수록, 경험이 더 쌓일수록, 세월이 더 흐를수록 용납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흐지부지 용납하고 있는사람이 되어간다. 도대체 어디까지 용서해야 옳을지를 고민할 때에 그녀는 멈칫한다. 용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거둔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마저자기 자신으로부터 스르르 빠져나가버리는 사태가 두려워서다. 무엇보다 용서하는 주체의 ‘용서-하다‘라는 말의 자격을 그녀는 갖고 있지 않다고 여긴다. 용서라는 말이 용서를 하고 싶어 한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받고 싶어 한 누군가에 의해서 발명된 말 같아서다. - P104
지우개 가루를 호호 불어버리는 그 시간동안에, 그녀는 그리움으로 인하여 괴롭지 않았다. 그리워만 하느라 애가 닳던 시간들은 이미 저 너머로 가 있었고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상태에서 조금 비켜나 있을 수 있었다. 실물도 없이 사진도 없이, 다만 기억만으로 그리운 얼굴을 완성할 수 있었던 그녀의 경험을 무엇이라 이름 붙이면 좋을까. 가려운 부위를 벅벅 긁는 시간과 닮은 것은아닌지, 치통 같은 것에 복용했던 진통제와 닮은 것은 아닌지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지루함을 게임이나 오락영화같은 것으로 때우는 것과 닮은 것은 아닌지. 보고 싶은사람과 연결되어 문자를 주고받거나 화상 채팅을 하는것하고는 어느 정도 비슷한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때 이후로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선으로 그리는 데에 따른 두려움 같은 게 사라졌다. 그림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냥 그리고 싶으면 마음껏 그릴 수있는 자유가 생긴 셈이었다. - P108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았을때도 그녀는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두고 수련이 피어 있는 모네의 정원을 상상할 수도 있고, 모네의 정원에 기웃대는 빛의 다양한 실체를 보며 경이로위할 수도 있다. 모네가 인상주의 화가로서 어떤 경지에도달했는지, 모네의 예술적 집념이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련> 연작이 주는 경이로움은화폭에 표현된 것에 국한될 리가 없다. 모네의 수련은 단지 짚 더미이거나 양산을 쓴 여인이거나 바람에 살랑이는 들판이어도 된다. 하지만 하필 수련이, 눈이 멀어가는 - P110
노년의 화가 앞에 펼쳐져 있었고 수면에 고요히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네는 잘 보이지 않는 시력으로 수련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지금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그것.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에 수런거리고 있는 그것. 그것을 그 큰 화폭에 담아내기까지, 250점에 가까운 연작을 계속해서 그려내기까지 수련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만한 그림들을 그릴 그만한 시간이 모네에게는 있었다. 이것은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풍경을 그려낸 시간을 그린 것에 해당된다. <수련> 연작이 인상주의를 넘어서서 추상의 세계를 여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를 받는 것도, 모네가 자신의 황량하고 드넓은 시간을 드넓은 화폭에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 P111
외로움이 윤기 나는 상태라는 실감은 그녀에게 그리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외로울때면 쉽게 손을 뻗어 아무에 가까운 사람과 애인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고, 외롭다는 사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아무 말이든 나누어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혼자서 식당에 찾아가 밥을 먹는 일이 도무지 어색해서 차라리 끼니를 굶던 시절도 있었다. 연락처 목록을 뒤져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지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을것 같은 나날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히는 게 두려워 누군가가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확인을 해야 안도가 되는 나날도 분명 있었다. 누군가와 연결이 되어야만 겨우 안심이 되던 그 시절들에 그녀는 사람을 소비했 - P119
리베카 솔닛이 제안하는 산책도 구애가 필요치 않다. 구애의 절차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행위이다. 평범하디평범한 행위인 산책. 걷는 것. 나란히 걷는 것. 같은 길 위에 서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마주 보는 것이 아닌 것. 구애의 방식보다 더 깊고 정확한 구애 같다. - P151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곁에 두되, 다른 노선은 정녕 없는 걸까.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연료로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서로 보태기 위한두 사람. 거대하고 획일화된 악습들의 연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관성을 멈추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두 사람. 시스템의 바깥에서 자기 자신의 내적 질서와 부합되는 새롭고 자그마한 시스템을 함께 모색하는 두 사람, 이인삼각처럼 헛둘헛둘 발을 맞추는 것에 사랑을 사용하면 좋겠다. 목표를 향해서 헛둘헛둘 뛰어가는 게 아니라, 목표를 지워버린 채로 출렁이는 불안의 요동에 리듬을 맞춰그렇게 하면 좋겠다. - P155
가장 아껴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용기 있게 말해야 할 단어가 ‘우리‘라는 단어라고 이제 나는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어떨 때는 남용되거나 오용되고 어떨 때는 의미를 소실한 듯 사어처럼 들리기도 하는 단어이다. 드넓은 복수형으로 쓰이지 않고 단 두 사람으로 쓰일 때에만 겨우 제 뜻을 표상해내는 듯 유약해진 단어이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민감한 단어이다. 이 유약하고 민감한 단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민의 방향이 대체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병률은 이런단어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하게 다룰 때가 더러 있다. "우리라는 말도 이제 힘이 없습니다"라고 적고야 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병률이 이 문장을 적어둔 자리의 맥락 속에서 이 씁쓸하고 쓸쓸한 문장은 야릇한 힘을 얻는다. 애써 우리를 우리라고 위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과 우리를 우리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우리일 수밖에 없다는 안전한 결속, 어느 한쪽에 의해서 보이지 않게 행해질지라도 괜찮을 듯한 든든 - P178
같은 게 배어 나오고야 만다. 그는 어느덧 이렇게 문장을 다스려 가장 단정하게 다룰 줄 아는 시인이 되어 있다. 시인은 문장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가장 능란해야옳지만, 능란한 문장을 쓴다는 걸로 가장 좋은 시인이 될수는 없을 것이지만, 문장을 정말로 능란하게 다루려면그 문장의 깊이만큼 깊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문장을 한 걸음 앞에 던져놓고서, 그 문장과 닮은 사람이 되기위해 문장을 쓴다. 그래서 문장은곧 서약과 다름없다. 이병률이 한번도 직접적으로 적어둔 적은 없지만, 바다는 잘 있습니다』곳곳에는 서약을갈음하는 문장들이 불씨처럼 숨어 있다. 자신이 쓴 시와더 겹쳐지고 더 닮아가는 그가 가장 분명하게 다짐을 해둔 문장을 오래 들여다본다. - P179
"기다린다 이제 밥을 기다리는 일과/주문을 기다리는 감정의 경중은 같다"는 그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감정은 한 방향으로 돌고 도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모은다"는 그, 그래서 지탱이 가능해짐으로써 또다시 새로워지는 그. 지금 이병률은 인간의 한 생애에서 가장 괜찮은 순간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그는 사람들이 으레시인에게 기대해온 열정이나 낭만의 상태가 아니다. 그의시는 대단한 결기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냉소나 환멸로 손쉽게 치환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하지 않으냐눙치려 들지도 않는다. 낙담의 자리에서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 "힘을 모으는, 은은하고도 든든한 모습으로 그는 서 있다(「생활이라는 감정의 궤도). - P180
그는 "발을 땅에 붙이고서는 사랑을 따라잡을 수가없다"(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는 걸 알고 있는사람이다. 사랑이 이 지상으로 내려와서 우리 곁에 넉넉하게 머물러주기를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리는 시인들과사랑이 우리 곁에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 P180
든 온몸으로 입증하려는 시인들이 많고 많은 와중에, 이병률은 우리들 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사랑과 가까워지는 것에 힘을 모으는가보다. 한 발짝 물러선 것이 아니라 들어올려서 나는 이런 사람이 쓴 새 시집을 가장 먼저읽은 사람이 되었다. 행운이라 할 만하다. 나는 항상 가장 나쁠 때에 가장 운이 좋았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 이 넉넉한 쓸쓸함」 부분 - P181
우리 시대의 유일무이한 리얼리스트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시인 최승자는 잘 알려져 있다. 이성복, 황지우와 더불어시의 해체를 도모한 3인방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 누구보다 독하고 끔찍한 시를 온몸으로 썼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고,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병원에서 지낸 세월이 태반이었던, 아슬아슬한 우리 시대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불행한 시인의 대명사처럼 최승자를 인용했고, 문학에서 페미니즘을 논할 때마다 최승자를 여전사처럼 앞세웠고, 새로운 여성 시인에게서 독한 목소리를발견할 때마다 ‘최승자‘라는 어머니의 뒷줄에 세우고 ‘최승자처럼 쓴다‘며 계보‘를 매겼다. - P182
최승자가 쓴 시도 잘 알려져 있다. ‘아픈‘ 최승자의 ‘독한‘ 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미 죽어 있다"고 말했던 최승자의 독한 탄식에 충격을 받았고 감동을 받았다. 그의 독한 어법은 사랑받았고 예찬받았다. 모든 예찬속에서 진정한 승자처럼 보이는 최승자의 삶은 그럼에도불구하고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널리 알려진 모든 것이그러하듯이, 최승자의 시는 실제로 읽히는 일보다 풍문으로 퍼져가는 일을 더 많이 겪었다. 실제로 읽힐 때에도읽혀왔던 방식으로만 읽힐 뿐, 새롭게 읽히는 적은 드물었다. 그간 최승자에게 바쳐졌던 찬사와 걱정 들은, 그가이 세계에 일체의 편승도 하지 않았다는 염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염결함을 알아보는 이는 많았어도, 그염결함을 잘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최승자의 시세계에 전적인 탑승을 하지 않음 [못함]으로써, 이 세계에 편승하고 있었던 우리의 염결하지 못함을 되려 염결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P183
사랑했던 그대여 나는
김치수와 김현을 비롯한 많은 비평가는 최승자 시의 키워드를 ‘사랑‘이라고 파악했다. "미흡한 사랑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존재의 쓸쓸함〉"이며, "이별의 아픔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불가능을 겪은 경험"이며, "운명론적 불행"이라고 해석했다.
잡탕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부분 - P184
만장하신 여러분 나를 죽이고 싶어 환장하신 여러분 오늘 내가 죽는 쇼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십년 후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염통을 달고 이 장소로 나와주십시요.
「무제2」 부분
이 위의 시에서 상정한 10년 후는 대략 1994년이었다. 최승자는 "죽는 쇼"를 그때 끝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나서 가까스로 시를 쓰며 연명해왔을지도 모르겠다. 연명이라는 말에도 최승자에게 가혹한 요청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담긴 것 같아서 고쳐 적어본다. 최승자는 자주 아프지만 자주 회복했고, 회복할 때마다 시집을 출간해왔다. 어쩌면 시집 출간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회복되어갔는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다시 "십년후 똑같은 시각에/똑같은 염통을 달고/ 이 장 - P206
소로" 우리들이 나간다면, 최승자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가 더 이상 죄 짓기를 거절하고, 최승자처럼 차라리 아프기를 각오한다면 말이다. 최승자는 "우리가 천사처럼 보이지않는 것은/세상 환영에 속아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ㅅ도 아니고 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ㅅ이 될 수 있고 詩가 될 수 있을까. - P207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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