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까. 제육체의 일부를 입에 물려갓 태어난 목숨의 허기를 달래주는 사람.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던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던 허수아비와 마음을 갖고 싶어하던양철나무꾼과 자신감이 없어 용기조차 없는 줄 알고 살아간 사자를 합쳐놓은 것 같은 사람. 그릇이면 그릇, 솥이면 솥, 움푹 파여 있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만 하는 물건만을 관장하는 사람. 이 사람도 누군가의 젖을 물고 오직 응애응애 울며 채워달라고채워달라고 보채던 아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 P64
나 걸어갈 때 발밑에 쌓이던 가시들 아무래도 내가 시계가 되었나 봐요 내 몸에서 뾰족한 초침들이 솟아나나 봐요 그 초침들이 안타깝다 안타깝다 나를 찌르나 봐요 밤이 오면 자욱하게 비 내리는 초침 속을 헤치고 - P65
백살 이백살 걸어가보기도 해요
저 먼 곳에 너무 멀어 환한 그곳에 당신과 내가 살고 있다고 아주 행복하다고
김혜순, 「생일」에서 - P66
침묵은 무엇을 지키는 데에 쓰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행사하는데에도 쓰인다. 침묵은 경청과 묵살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포함한다. 침묵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때는 가장 신중한 방패지만, 타자가 행할 때는 가장 뾰족한 창일 수 있다. 나의 침묵은 방패처럼 나를 보호해주지만, 너의 침묵은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를 수있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우선 말해볼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그러므로 실은 우리를위해서, 매사에 번번이 계속해서. - P70
친구는 살아오면서잃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잃은 것에 대해 말할 게 없는 사람이다. 친구는 잃었다는 상실감이 충격이 될 만큼 무엇을 가진 적이 있던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쥔 적이 없어서 잃을 것도 없지만 온통 잃어버린 것투성이인 것 같은 사람이다. 어쨌거나 지쳐 있다는 것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초라한 두 사람이 함께 스웨덴의 상하이로 간다. 가서 나는 이 시구를 읽어줄 것이다.
지친 것들에게도 도리가 있다. 벼락 맞아 꺾인 도리, 뼈만 남은도리, 풍경을 뼈로 완성한 도리. 같은 노래를 반복해 부르지 않는도리.
허연, 산맥, 시호테알렌」에서 - P91
날이 어둑해지자 뿔뿔이 앉았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벽난로앞에 모여 앉는다. 한 사람은 우비를 입고 마당에 나가 모란꽃을툭툭 치고, 한 사람은 술안주를 내오고, 한 사람은 휴대폰을 받느라 들락거리고, 한 사람은 팔짱을 끼고 유리문에 기대어 장대비가 오는 바깥을 바라본다. 모두의 귓속에는 빗소리가 스민다. 예순에서 스물 몇까지, 서로 다른 나이를 살고 있는 우리 대여섯 사람은 계절마다 한 번쯤은 만난다. 서로 말은 궁하지만 마음은 족하다는 이 모임. 크게 불편한 사람도 없고 크게 재미 보는사람도 없는, 헐렁하지만 어딘가 다정한 모임. 아침부터 만났지만, 점심과 저녁 두 끼를 함께 먹었지만, 날이 어둑해지고서야 대화가 대화를 신속하게 잇기 시작한다. 여전히 앉은 자리 간격은꽤 넓은 편이지만, 모종의 한솥밥 냄새가 그때부터 풀풀거리기시작한다. 오늘의 첫 주제는 몽골. - P93
내 세대는 부모에게서 늘 한국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요즘 젊은이들은 전쟁 체험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전쟁 체험을입에 달고 사는 세대와 전쟁 얘기를 직접적으로 들어본 적 없는세대 사이에 존재하는 내 세대. 그런 까닭에 이상하고도 외롭게,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지나가는 세월의 길목에서 서성이는 내 세대. 1950년대는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과도 같다.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버린 그때와 지금을 이어줄 단어는 외국이라는 말밖에 - P95
싱겁고 느슨한 모임 속에서 느리게 반응하고 성기게 대화하며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꽤 먼 곳으로 꽤 가파른 곳으로 떠밀려 온 것만 같다. 대화의 간격 속에 묻어 나온 세월의간격이 까마득해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기증이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두리번거린다. 무언가 한참이나 잘못된 듯싶어 절망스럽기도 하고 절망이 아무렇지 않기도 하다. 이상한 것이 손 안에 쥐어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통 비슷한것이 슬프지만 슬픔이 전부는 아닌 괴이한 물질. 이것은 세월의 선의일까? - P96
아, 어쩌면 누군가가 여기에다 부려놓은 고통을 내가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많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조은, 「소용돌이」에서 - P97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세심한 배려와 살가운 표현에 능숙한 성격이 나는 언제나부럽다. 좋은 마음을 전하려 어어, 하는 사이에 기회는 물 건너가고,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가 아무 표현도 못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기가 일쑤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을 그래서 시에다 적고는 한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월과 침묵」 에서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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