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시인.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집 읽는 걸 지독하게 좋아하다가, 순도100퍼센트 내 마음에 드는 시는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했다. 그 생각을 했던 도서관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쁜걸음들 속에서 혼자 정지한 듯한 시간이 좋다. 혼자가 아닌 곳에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디론가 외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곳에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보다 내 마음에 드는 시를 꼭 쓰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놓는다. 소망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 내겐 심심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심심하기 위해서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심함이 윤기 나는 고독이 되어갈 때 나는 씩씩해진다. 조금 더 심심해지고 조금 더 씩씩해지기 위하여, 오직 그렇게 되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눈물이라는 뼈와 산문집 마음사전』을 펴냈다.

사람을 잘 사귀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단 생각이 든다. 잘다가가고, 잘 대해주고,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고 잘 논다. 유쾌하고 단순하게 깔깔거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다. 나는 누군가에게 잘 다가가질 못한다. 잘 대해주지도 못한다. 자주 연락할 줄도 모르고 자주 만날 줄도 모르고 잘 놀 줄도 모른다. 사람은 언제나 어렵다. 사람 앞에서 나는 언제나 서툴다.
그나마 내가 친해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먼저 내게 다가와준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가왔던 사람들 몇몇은 더 즐거운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고 또 멀어져갔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과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고마워하는 마음과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도 많아졌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오래 교차될 때, 나는 그리움이란 직물을 직조해낸다. 혼자만의 방에서, 이직물에 풀을 먹이고 다림 - P7

질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귀는 나만의 방식이다. 그 직물을 무릎담요처럼 덮고서 나는 시를 썼다.
사람을 만나러 나가지 않는 대신에, 사람의 삶을 엿보는 일을은밀하게 즐겼고 혼자 상상하며 그 삶을 완성해보곤 했다. 친구들의 시를 엿보며 그 상상력을 은밀하게 훔치곤 했다. 사람을 만나서 나의 결핍을 채우는 대신에, 내 결핍의 영역에 존재할 은밀한 상처들을 해석하는 일을 해왔다. 나혼자 잘 살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반드시, 선물로 내밀 만한 것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 그랬다. 건네받은 선물은 많은데 건네줄 선물이 궁색했던 나에겐, 이 방법밖에 없었다. - P8

이번 선물은 시옷의 낱말들이다. 사람이, 무엇보다 사람의 사랑이, 사랑의 상처가, 실은 그 선물이, 그리하여 사람의 삶이, 삶의 서글픔이, 그 서글픔이 내는 한 줄 시가 된다. 세상을 바꾸려는 손길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선이 되는 그런 시에다 옷을 입히듯 나의 이야기를 입혀보았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과 사이좋게 사귀는 모습을 보고 싶어 - P8

서였다.
나는 떠올리는 것으로써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에게 세 걸음 이상 다가오지 않아준 배려 깊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아준 한결같았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혼자서 설레어한다. 세 걸음 이상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우정을 다하는 아직 만나본적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설레어한다.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신대철, 박꽃」에서 - P9

사라짐첫눈이 왔다. 눈이 내리던 밤에 나는 사람들과 술집에 있었다.
창밖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골똘하게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아, 하고 신음과도 같은 짧은 탄성을 뱉었다. ‘아‘ 속에는 얼마나 많은 아련한 추억들이 담겨 있을까. 추억 한 자락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할 가냘픈 그 깊은 탄식이 들릴 때, 이 첫눈을 보고있을 많은 이들의 입술이 떠올랐다. 모두의 입술 속에서 일제히,
조용히 새어나오는 탄식과 그 탄식을 먼발치에서 받아내며 떨어지는 희디흰 눈송이들. 어떤 눈송이들은 지금쯤 우리집 장독대위로 소복소복 떨어져 내릴 테고, 어떤 눈송이들은 지금쯤 바다위로 떨어져 내려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 P17

보이니?
눈 오는 숲은 일요일이다.
영원히 계속될 듯.
하지만 마침내 그칠 것이다.
그때 눈은 숲의 내부로 스며든다.

내 손이 닿지 않는 데까지
낙망하지는 말아다오.
어쨌든 지금은
순수한 현재,

황인숙, 「흰눈 내리는 밤」에서 - P23

이렇게 소중한 것이 함부로 지지 않도록, 잘 지킬 수는 없는것인가 하고. 그녀는 밤새 연꽃에 우산을 씌워준 채 비를 맞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소중한 걸 지킨다는 게 무언지 종내에는 알게 될까. 그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걸 종내에는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길까. 그녀는 철들지 않고 살아온 날들에곱표를 한다. 이 시를 읽고 또 읽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P40

남천은 자기 몫의 온도가 부족할 겨울을 대비하는 것이다. 우선,
잎을 버릴 계획을 세운다. 잎을 다 버려야 아주 적은 에너지만으로도 건조하고 추운 겨울을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잎을 버리기 위해 나무는 잎자루에 떨켜를 만든다. 떨켜는 잎이 광합성해서 만든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이 줄기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막는다. 그럴 때 나뭇잎에 축적된 오도가도 못하던 영양분이 색소변화를 일으키고 낙엽을 물들이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단풍 드는 날」에서 - P44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상상력이 정확하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옳다. 보이는 세계와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음악은 (…) 붙들려 있는 듯싶다가 다시 떠나는 무엇이다. 지속되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줄 달아나버리는것. (…) 소멸되는 빛 속에 간직된 불안정한 동요.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에서 - P46

상반되는 두 쌍의 동사가 세 번 나오는 이런 문장이 있다. 붙들려 있다와 떠나다, 지속되다 흘러가다, 소멸되다와 간직되다.
이 여섯 낱말은 음악이라는 모호한 물리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음악은 명명백백한 세계가 아니다. 경계에서 창조되는 경계의 세계다. 붙들렸는가 싶으면 떠나고, 지속되는가 싶으면 흘러가고, 소멸된 줄 알았던 것들이 간직돼 있다는 것을 우리 - P46

상상력는 음악을 들으며 느낀다. 서로 모순된 단어를 두 개씩 세 쌍을나란히 배열해야만 설명될 수 있는 세계 음악은 바로 그런 세계이고, 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가 바로 그 세계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느끼곤 한다. 붙들렸는가 싶으면 떠나버리고, 지속되는가 싶으면 흘러가버리고, 소멸됐는가 싶으면 간직되어 있는 신비한 어떤 것을 그 느낌이 만져질 듯 만져질 듯 우리 주변을 감싼다. 그때에 우리는 기쁘면서 애달프고, 허무하면서 뿌듯하다.
이 이상한 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 음악의 세계다.
과녁의 정중앙에 화살이 날아가 꽂힌 듯한 정확함 때문에, 음악을 듣는 우리 마음은 된통 애잔해지는 것이다. - P47

주법은 진동의 미세한 입자를 시간 속에 끼워 넣으며 악기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를 건드릴 뿐인데 이 건드림, 이 건드림이 직조해내는 무늬, 진동의 미세한 입자들이 뿜어내는 숨과 그 숨의 웅숭그림이 천변만화해내는 세계,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뒤표지에서 - P47

악기는 악기의 몸과 악기 바깥의 세계 그 경계를 연주자가 건드려줄 때에 연주된다. 주법은 음이라는 미세한 입자를 흔들어시간 속에 퍼뜨려놓는다. 입자는 흔들리며 파도처럼 공간으로퍼져나간다. 그때 비로소 음악이 들린다. 경계에 도사린 무수한숨결을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지각할 수가 있다. 음악이 경계의숨결을 무늬로 그려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감지 가능한 많은 세계를 다 놓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 P48

문자는 그 자체가 기호이자 그림이다. 그게 문자가 지닌 일차적인 매력이다. 그런데 한자는 기호보다 그림 쪽에 약간 더 치우쳐 있다. 그 점 때문에 나는 서예도 좋아하고 전각도 좋아한다.
잘하진 못하지만, 혼자서 입춘대길을 써서 해마다 현관문에 붙여놓을 정도는 된다. 벼루를 꺼내 먹을 오래 갈아 준비해놓고 화선지를 펴 문진을 올려놓은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붓을 드는 느린 동작들이 좋다. 찬찬히 찬찬히 좋은 구절을 고전 속에서 찾아내어 천천히 천천히 한 획 한 획을 긋는 일은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찬찬함과 천천함 덕분에 내가 사람다워지는 느낌이 난다. - P53

그릇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피어올랐다. 마룻바닥을빼곡히 메운 채 동그랗게 포개진 그릇들 사이에 나도 동그란 그릇처럼 쪼그려 앉아 그 얘기를 들었다. 엄마의 움푹 팬 물건을바라보려니 허기가 졌다. 어째서 엄마가 애지중지해온 물건들은이토록 움푹 패어 있어 무언가 채워넣게 생긴 걸까. 채워 넣고채워 넣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을 엄마의 하루하루가 난데없이몰려와서, 그릇만 물끄러미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허기가 포만감처럼 밀려왔다. 엄마를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까. 엄마라는 이름에 담긴 슬픔들이 국그릇 엎어지듯 쏟아졌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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