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며 걷거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 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 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있었던 유대인들은 일종의 뜰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로 나누어 서라는 독일어 혹은 이디시어를 듣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자니 ‘메릴 스트립‘을 처음 만난 영화 ˝소피의 선택˝이 생각난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학살의 페이지들을 끝도 없이 읽는다.
무기력해진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나치의 유토피아들 가운데 이것 또한 독일의 애초 계획과 정확히 일치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현된 부분은 유대인 학살뿐이었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벨라루스에서도 ‘마지막 해결책‘이란 것은 그 원래 개념보다 더 과격화된 잔혹 행위들이었다. 당초 소비에트유대인들은 독일 제국 건설을 위해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더 먼 동쪽으로 쫓아버릴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임이분명해졌고, 동부에 있던 유대인 대부분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민스크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도 찾아볼 수 있었다.  - P452

이들은 흔히 엄청난 규모의 또 다른 폭력에 참여하는 것을 대가로 도망치거나 살아남은 유대인들, 아니면 강제노동을 위해 끌려간 유대인들로서, 후자의 경우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늦게 그리고 때때로 고향에서한참 떨어진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1943년 9월, 민스크 최후의 유대인 몇몇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있던 소비부르란 이름의 시설로끌려간다그곳에서 이들은 심지어 벨라루스에서조차 몰랐던 죽음의 시설을마주하게 된다.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모든 종류의 공포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P452

약 540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의 세력권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거의 절반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 살해되었으며, 대부분은 총에 맞아 그리고 일부는 독가스를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반대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대체로독가스에, 일부는 총탄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는 1941년 절반 기간에, 즉 독일의 점령이 시작된첫 6개월 동안 1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 있던 유대인들은, 동쪽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전부터 독일의 통제 아래 있었으나 동부 유대인들보다 더 늦은 시점에목숨을 빼앗겼다. 동쪽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적이랄 수 있는젊은 남성들이 전쟁 초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눈에 띄는 즉시 총살당하기 일쑤였다.  - P455

라인하르트 작전의 기원은 히틀러가 품은 열망에 대한 힘의 해석에 있었다. 소련군 전쟁포로를 대상으로 시행했던 가스 실험이 꽤나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았음을 알고 있던 힘러는 1941년 10월 13일무렵 자신의 부하였던 오딜로 글로보츠니크에게 유대인들을 처리할새 가스 시설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글로보츠니크는 나치의 인종주의적 이상을 위한 중대 실험지대였던 동방 총독부 루블린 지구의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지휘부 소속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구역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들어오기를, 그리고 그들을 식민 노동노예로 삼기를 고대하던 인물이었다. 소련 침공 개시 후, 글로보니크는 동유럽 종합 계획의 실행을 맡게 되었다. 비록 소련 침공 실패로몰살적 식민화를 위한 그의 거대한 기획 대부분이 뒤로 미뤄졌지만,
글로보츠니크는 그 일부를 자신의 관할 구역이자 각자의 고향으로부터 쫓겨온 약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있던 루블린 지구에 실제로 시행한다. 그가 원했던 바는 바로 "동방 총독부의 유대인은 물론 폴란드인들까지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 P457

바르샤바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폴란드인들 대부분 및 유럽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유대인 사회의 고향이자, 나치의 세계관상존재해서는 안 될 거대 도시였다. 1942년 봄을 기점으로, 바르샤바게토에는 여전히 35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수용되어 있었다.
바르샤바는 동방 총독부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행정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총독 한스 프랑크는 크라쿠프를 선호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고대 폴란드 황궁을 넘겨받아 스스로를 현대판 황족이라 내세우며 맡은 업무들을 처리했다. 과거 1939년 10월, 프랑크는 유대인들을 동방 총독부 내 루블린 지구로 들이는 것을 통해 유대인 "문제"
를 해결하려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1941년 12월, 그는 부하들에게
‘반드시 유대인들을 처리할 것"을 주문한다. 사실 프랑크는 이 시점까지도 이를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않았다.  - P469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유대인 대량학살의 각 단계가 실로 참혹했던만큼, 당사자인 유대인들은 직전의 순간보다 가까운 미래가 그래도조금은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곤 했다. 몇몇 유대인은 정말로동쪽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게토 안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일단 움슐락플라츠에 집결하면, 기차에 오르는 것이 음식, 물, 위생 시설 없이 땡볕 아래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믿었다고 뭐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움슐락플라츠를감시하는 것은 유대인 경찰들의 몫이었는데, 이들은 간혹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들 또는 결혼 상대로 삼을 법한 이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이 밝혔듯이, 유대인 경찰들은 때때로 현금과 더불어 "현물로" 값을 치를 것, 다시 말해 구해주는 대신몸을 맡길 것을 요구했다. - P477

트레블린카를 책임지던 독일인(본래 오스트리아인) 의사 이름프리트 에베를은 줄곧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학살률이 베우제츠와 소비부르에 있던 다른 학살 공장 책임자들보다 한발앞서길 바랐다. 심지어 학살할 인원수가 이미 공장의 최대 질식사 가능 인원을 한참 넘어선 1942년 8월에도 그는 끊임없이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받아들였고, 죽음의 행렬은 곧 공장 내부에서 외부로 퍼져나갔다. 가스실을 가득 채웠던 죽음은 가스실 밖 뜰의 대기 장소로,
여기서 다시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기다리고 있던 역 혹은 선로로,
심지어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점령 폴란드 지역 어딘가까지 퍼져나갔다. 어찌됐든 유대인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기차에서 탈출하는 소수가 있었는데, 이는 소비부르와 베우제츠로의 이송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 P481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바르샤바 게토로 돌아왔는데, 보통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모면했는지 알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은이송과 혼란은 또한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대인을 실은 기차들이 곧잘 멈춰서 있었던 탓에, 독일 군인들을 태우고 동부 전선으로향하던 기차들은 어렵지 않게 이 죽음의 열차들을 지나치거나 따라잡기 일쑤였다. 몇몇 구경꾼은 사진을 찍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죽음의 기차에서 나던 악취 때문에 먹은 것을 게워내기도 했다. 이들 군인 중 일부는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참여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서남부로 향하던 길이었다. 적어도 만약 그들이 알고자 했다면,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본 독일 군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 P481

에베를은 생각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해임되고,
1942년 8월 슈탕글이 그를 대신해 트레블린카 책임자 자리에 올라선다. 훗날 자신을 유대인 가스 학살 "전문가이자 자신은 그것을 "즐겼다"고 말한 슈탕글은 재빨리 트레블린카를 안정시켰다. 먼저 그는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유대인 노역자들을동원해 시체들을 화장시켰다. 죽음의 시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1942년 9월 초가 되자, 그것은 애초의 기획에서처럼 그야말로 기계돌아가듯 작동하고 있었다.
슈탕글은 특히나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던 부하이자 수용소 유대인들에게 "인형"이라(그의 허영과 빼어난 외모로 인해) 불리던 쿠르트 프란츠의 보조에 힘입어 그곳을 총괄했다.  - P482

프란츠는 유대인들이 살던구역을 관찰하기를 즐겼고, 자신이 특별히 훈련시킨 개들이 유대인을 공격하는 모습을 좋아했으며, 또 언젠가는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동물원을 만들 만큼 동물 관찰을 즐겼다. 독일인들은 수십 명의 트라브니키 인력의 보조를 받았는데, 이 인력들은 주로 경비병으로 활약하거나, 유대인을 모아 가스실에 집어넣고는 일산화탄소를 주입하는 것과 같은 전체 시설물 작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의 일부를 맡기도 했다. 시설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나머지 노동력은 유대인 노역자 수백 명의 몫이었다. 이들은 오직 대량학살 및 약탈과 관련된 일에 동원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남겨둔 인력으로서, 만약 한순간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즉시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배우제츠 그리고 소비부르와 마찬가지로, 트레블린카 역시 유대인 노동력으로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었고, 따라서 트라브니키 대원들의 일은 - P482

그리 많지 않았으며, 독일인들이 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트레블린카에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독일인들은 거짓 선전을 짜내느라 바쁜 상황이 되었다.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는 전부터 가스 학살에 관련된 보고를 비롯해 독일인들이 폴란드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각종 학살 소식을 동맹 영국과 미국에 전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그해 여름 영국과 미국에 독일 시민들을 대상으로앙갚음을 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폴란드 저항군을 이끌던 망명 정부군 소속 장교들은 트레블린카를 습격할 것을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독일은 가스 학살을 부인했다. 바르샤바 유대 경찰 수장이자 "재정착 위원이었던 유제프 셰린스키는 자신의 경우 트레블린카로부터 줄곧 엽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 P483

물론 이 시점에도 바르샤바 게토에는 우편 업무를 취급하는 곳이 있었고, 이는 몇 주 동안이나 돌아갈 것이었다. 이곳에서 모자를 쓴 채 일하던 이들은 밝은 오렌지색 노동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던 이송을 위해 끌려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손에는 트레블린카로부터 온 어떤 소식도 있을 턱이 없었다.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린카로의 이송은 1942년 9월 3일 다시 시작된다. ‘대작전‘에 따른 마지막 이송은 1942년 9월 22일에 이뤄졌으며, 여기에는 유대 경찰 및 그들의 가족까지 포함되었다. 유대 경찰들은기차가 역에 다다를 무렵이 되자, 차창 밖으로 과거 자신들의 임무나사회적 지위 등을 나타내던 모자와 완장 등을 내던졌다(유대 경찰들은 흔히 유대 명문가 출신이었다). 유대 경찰들은 먼저 가 있던 강제수 - P483

용소 유대인들로부터 제법 거친 환영을 받을 수 있었기에 이는 신중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트레블린카는 수용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죽음의 공장이었고, 이런 행동은 별 의미가 없었다. 유대 경찰들 역시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독가스에 중독돼 숨졌을 따름이다.

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 P484

절뚝거리며 걷거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혼자 힘으로 걸어갈 수있었던 유대인들은 일종의 뜰과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로 나누어 서라는 독일어 혹은 이디시어를 듣게 되었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동쪽으로" 보내지기 전 소독을 해야 한다는 - P484

핑계로 발가벗겨졌다. 입고 있던 옷가지는 벗은 뒤 가지런히 정리되고 신발 역시 한데 모아 잘 엮어두어야 했다. 귀중품은 남김없이 내놓아야 했고, 여인들은 깊은 곳까지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이송 과정의 바로 이 지점에서 몇몇 여인은 강간 대상으로 뽑혔고, 소수의 남성은 강제노동 대상으로 골라내졌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곧바로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했던 반면, 강제노동에 동원된 남성들은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노예로 살아갔다."
모든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은 물론, 머리카락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가스실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들 각각은유대인 "이발사‘ 앞에 앉아 삭발당했고, 종교적 관습에 충실해 가발을 쓰고 있던 여인들은 그것마저 내놓아야 했다.  - P485

죽음이 거의 턱밑까지 차오른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여인들은 이 순간까지도 이발이 소독의 마무리 과정일 것이라 여겼고,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이렇게 확보된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독일인 철도 노동자들이 신을 스타킹을 만들거나, 독일 잠수함 선원들이 신을 슬리퍼의 안감으로 쓰일 것이었다.
첫 번째 여인들 그리고 다음으로 남자들로 이뤄진 두 집단은 모두발가벗은 채, 속수무책으로 굴욕을 당하며, 어떤 터널 안을 달려가야 했다. 그곳은 몇 미터 정도의 폭에 길이는 약 100미터에 이르는 터널이었는데, 독일인들은 이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불렀다. 터널 끝에서 유대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의 경사진 지붕 앞에 거대한다윗의 별이 그려진 어두운 방이었다. 히브리어 비문이 적힌 의식용 - P485

막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님께로 가는 문 마땅한 자는 응당 지나가리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입구에 서 있던 두명의 트라브니키 출신 경비병에 의해 거칠게 안쪽으로 밀어넣어졌기에 이를 발견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은 몽둥이를, 다른 한 명은 칼을 들고 있던 경비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유대인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그 뒤 유대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문을닫으며 자물쇠를 채우고는, "물을 틀어!" (바로 마지막 거짓말이자, 굳이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던 거짓말이었다. 그 대상은 이미 가스실에 갇힌 불행한 유대인들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있었던)라고 외쳤다. 그러면 세 번째 트라브니키 대원이 레버를 당겼고, 탱크 엔진에서 뿜어져 나온 일산화탄소가 가스실 안으로 쏟아졌다. - P486

20분쯤 지나면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가스실 뒤쪽 문을 열고, 유대인 강제노동자들이 시신을 치웠다. 타들어가는 열기와 죽음의 고통으로 시체들은 한데 엮인 채 팔다리가 뒤틀려 있었으며, 종종 쉽게부서져버릴 정도였다. 당시 트레블린카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칠 라이흐만이 회상했듯이, 그들은 "극악무도하게 뒤틀려졌다". 그들이 들어갔던 가스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시신은 그들이 흘린 피, 배설물과 함께 치워졌다. 다음에 들어설 유대인들이 극심한 공포에 휘둘리지 않도록 또 여전히 소독이라는 말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강제노역자들은 가스실을 깨끗이 치워야 했다. 그 뒤 그들은 시체들을 구분 - P486

하고, 유대인 "치과의사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시신의 얼굴이 바닥이 아닌 위를 바라보도록 눕혀두었다. 이 치과의사들의 작업은 바로시신에서 금이빨을 따로 빼내는 것이었다. 때때로 시신의 얼굴은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완전히 검은색을 띠기도 했고, 이를 꼭 깨문 상태로 사망해 "치과의사들이 안간힘을 써서 입을 벌리게 만들기도 했다.
금이빨 제거 작업이 끝나면, 유대인 노역자들은 시신들을 매장용 구덩이로 끌고 갔다. 유대인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시점부터 이들의 시체 처리까지의 전 과정이 끝나는 데는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의 겨울이 되자,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두 집단이 아닌 남자, 나이든여자, 젊은 여자의 세 집단으로 나누기시작했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가장 늦게 가스실로 보냈는데, 이는그들이 추위 속 젊은 여인들의 나체 보기를 즐겼기 때문이다.  - P487

그때쯤, 시체들은 땅에 묻히기보다는 불태워졌다. 화장을 위한 자리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지지대 위에 선로를 이용해 만든 폭 약 30미터의 거대한 석쇠가 있었다. 1943년 봄까지 트레블린카에서는 밤낮없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연료는 때때로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매장지에서 파낸 부패한 시체들 그리고 막 가스실에서 꺼낸 시신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지방조직이 많은 여성들의 시신은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잘 타올랐기에, 노역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시체더미 아래쪽에 두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임신한 여성들의 복부는 불타는 과정에서 터지기 일쑤였는데, 이 경우 안쪽의 태아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1943년 봄의 차가운 밤, 독일인들은 불길 근처에서 술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몸은 일종의 연료 - P487

로서, 또 다른 에너지원으로서 활용되었다. 처형자들은 불태움으로써그 어떤 범죄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겠지만, 그 과정에 동원된 유대인 노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뼛조각들을 온전히 남겨두고, 다른 이들이 훗날 찾을 수 있게끔 메시지를 적어 땅속에 묻어두었다. 48희생자들이 흔적을 남기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칠 라이흐만은 자신의 누이와 함께 트레블린카로 끌려왔었다. 그는 시설을 보자마자 자신이 가져온 짐 가방을 그 자리에 놓아버렸다. 누이는 그런그를 보고 왜 그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이제필요 없어"는 그가 누이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강제노동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옷가지를 분류하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P488

 "나는 누이가 입던 옷가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멈춰선 나는 그녀의옷을 집어들고,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자신이 할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누이의 옷가지 역시 어딘가로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타마라 빌렌베르크와 이타 빌렌베르크는 자신들의 짐 꾸러미를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녀들의 남자 형제이자 노역 대상자였던 사무엘은 함께 묶여 있던 누이들의 옷가지를 발견했을 때의 심경을 "마치 그녀들과 다시 포옹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여인들의 경우 모두 이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그들에게는 혹여살아남아 자신들의 말을 전해줄지도 모를 동료 유대인들과 이야기할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다. 루트 도르프만의 경우 그녀의 머리를 깎던 이발사로부터 그녀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안을 받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한나 레빈손은 자신 - P488

에게 배정된 이발사에게 꼭 탈출해 온 세상에 트레블린카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유대인들은 사전에 충분히 대비한 경우에만, 그것도 한정적으로만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언젠가그것을 물물교환 또는 뇌물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각자 비교적 휴대하기 편한 귀중품을 가지고 있다면 챙겨두고자 했다. 간혹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아차린 유대인들은 지니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열차 밖으로 집어던졌다. 박해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트레블린카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었던 광경이다. 이제 죽음의 시설물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유대인노역자들이 맡은 일 중 하나는 귀중품을 수색하는 것이었고, 찾아낸귀중품 중 일부는 물론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 P489

유대인들은이렇게 확보한 귀중품들을 시설물 안팎을 드나들 수 있었던 트라브니키 대원들에게 건넸고, 그 대가로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인근 마을에서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트라브니키 대원들은 유대인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귀중품을 현지 여성들 혹은 분명 바르샤바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매춘부들에게 주었고, 이 과정에서 성병에 감염된 이들은 다시 의사 출신 유대 노역자들에게 진찰을 받으러 찾아오기도했다. 이렇게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그리고 서로 밀접하게 이어진 순환의 현지 경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목격자는 이를 두고 귀중품을 휘감은 타락한 "유럽"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
이러저러해서, 1943년까지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강제노역자들은현재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비롯한 바깥세상 소식들을 접 - P489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약 10만 명 이상의 희생자들은 유대인이아니었다. 약 7만4000명의 비유대 폴란드인과 1만5000명가량의 소련군 전쟁포로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처형당하거나 과로로 숨졌다.
가스 실험에 동원된 소수의 포로들을 제외하면, 이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시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쏟은 에너지만큼은 결코 아니었지만, 집시들은 독일의 힘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학살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독일이 점령한 소련 땅에서 아인자츠그루펜에게 사살당했고(서류상 약 8000명), 벨라루스에서 있었던 보복 조치 당시 학살 대상 - P496

에 포함돼 있었으며,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쏜총에, 세르비아에서는 보복 작전 와중에 유대인들과 함께 총에 맞았다. 또한 독일의 꼭두각시 동맹 크로아티아에서는 강제수용소에서도죽임을 당했고(1만5000명가량), 독일의 동맹이었던 루마니아가 정복한 땅에서는 말 그대로 민족 청소의 대상이 되었으며, 1942년 1월 헤움노에서(4400명가량) 그리고 1943년 5월(1700명가량)과 1944년 8월(2900명가량으로, 이는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이미 배고픔, 질병, 학대로 사망한 뒤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를 마시는 운명을 맞이했다. 적게잡아 10만 명, 십중팔구 이보다 2~3배 많은 수의 집시가 독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 P497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10만 명이넘는 사람은 같은 이름으로 알려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고 길이 기억될 이름이자,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였으며, 동부를 덮친 더 커다란 암흑의 흔적이었다. 채100명이 되지 않는 유대인 노동자들은 라인하르트의 학살 시설물 내부를 목격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트레블린카의 경우는 그보다 더흔적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트레블린카에 있던 수용자들은 독일인의 명령으로 하지만 동시에스스로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엘 말레 라하임"은 매일 죽음을 맞이했던 유대인들을 위한 성가였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밖에 서서 이 - P497

를 듣고 있었다. 어느 유대인 노동자는 동쪽에서 온 트라브니키 대원들이 자신들의 "훌륭한 노래"에 "이상한 선물로 화답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덜 고상한 음악이자, 폴란드 민중가요였으며, 트레블린카노동자들의 마음속에 수용소 밖을 떠올려주고 탈출을 준비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이 노래들은 사랑과 어리석음을 따라서 삶과 자유를 생각나게 했다. 독일인들의 허드렛일을 하던 여인과 노동자들 사이의 결혼을 축하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
여인 수천 명의 머리를 깎아주었던 유대인 이발사들은 그중 아름다웠던 여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 P498

그 2주일 전부터, 미국 또한 유럽 전선에 뛰어든 상태였다. 앞서 태평양에서 일본 함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미국은 1944년 6월 6일이 되자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국을 비롯한 그 밖의 서방 연합군과 함께하는) 미군 약 16만 명이 노르망디 해변에 내려섰다. 미국이 가진 힘은 이미 저 불쌍한 독일군을 다름 아닌 미국산 트럭과 지프차로 둘러친 소련의 기계화 부대를 통해 벨라루스 깊은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독일이 구상했던 포위 작전은 더 완전하고, 빠르게 실현되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독일군 자신이 되어버렸다. 벨라루스에서 소련이 거둔 위업은 프랑스에서 밀고 들어오던 미국의 그것보다 더 놀라웠다. 독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장교들 또한 한수 아래였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소비에트의 공세가 벨라루스보다는 우크라이나 쪽에서 있을 것으로 봤다. 독일군 약 40만 명이 실종되거나, 부상당하거나, 아니면 죽임을 당했다. 이제 독일 중앙 집단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폴란드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502

비유대 폴란드인들은 독일과 소비에트 양쪽으로부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게 있어 두 대상은 별다를바 없었다. 침략자에게 저항하고자 했던 비유대 폴란드인들은 이따금어떤 침략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저항할지를 고르는 것이 가능했다.
반면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들에게는 독일보다는 소비에트를 반길 충분한, 아니 거의 모든 이유가 있었고, 이들 눈에 붉은 군대가 해방자로 비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1942년 여름의 이른바 ‘대작전‘
뒤, 살아남은 약 6만 명의 바르샤바 게토 내 유대인 중 상당수는 저항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또 어디에서 저항할지를 선택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싸우는 것뿐이었다. - P505

움직인 뒤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독일이 게토 습격을 감행한 1943년 4월 19일은 유월절 전날이었고, 다가오는 25일 일요일은 부활절이었다.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는 자신의 시 「꽃밭」에서, 게토 안 유대인들이 싸우고 또 죽어가는 동안, 장벽 너머 크라신스키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회전목마를 타고 있던 당시 기독교 축일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미워시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나는 죽음의 고독함을 떠올렸다." 게토 반란 기간 내내회전목마는 돌고 또 돌았고, 그것은 고립된 유대인의 상징이 되었다.
게토 장벽 너머 폴란드인들이 삶 그리고 웃음을 누리던 그 순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많은 폴란드인은 게토안 유대인들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또 다른 이들은 그그렇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들을 돕고자 했으며, 몇몇은 이를 실행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 P524

서방 연합군 중 오직 폴란드 당국만이 유대인 학살을 멈추기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섰을 뿐이다. 1943년 봄까지 제고타는 숨어 있던 유대인 약 4000명을 돕고 있었고, 폴란드 국내군은 유대인을 갈취하는자들은 총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4일,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이 싸우고 있던 그때, 망명정부 수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모든 동포에게 요청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죽어가고 있는 저들에게 피란처와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십시오. 동시에, 지난 시간 너무나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온 전 세계에 밝힙니다. 나는 저들의 범죄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유대인과 폴란드인들 모두 알고 있었듯이,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 지휘부는 그동안 게토 구원에 자신들이 가진 인력과 무기를 모두 쏟아부었지만 그 목적을 이룰수 없었다. 적어도 이 시점의 그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여덟 번의 무장 작전 중 일곱 번은 당시 게토 전사들을 지원하던 바르샤바 폴란드 국내군에 의해 이뤄졌다.  - P525

1944년 여름, 바르샤바 같은 도시에서 저항활동이란 피할 수 없는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 형태와 방향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간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와 폴란드 국내군 지휘관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분명 폴란드 국민은 그 어떤 동맹국 수도 시민들보다 더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그들 지휘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전략적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점령 상황을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소비에트의 점령 위협까지 감안해 판단해야 했다. 7월에 이르자 독일군은 6월 말 붉은 군대가 실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소식이 바르샤바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독일군의 패배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분명 반길 만한 소식이었지만, 마찬가지로이내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접수할 것이라는 예상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폴란드 국내군이 독일군과 공개적으로 싸워 승리한다면, 그들은 붉은 군대가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독일군과 싸워 패배한다면, 곧 들이닥칠 소비에트에게 자신들은 손쉬운 상대이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밖에되지 않을 것이었다.  - P536

폴란드 장교와 정치인들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이 1939년에서 1941년까지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는것을 결코 잊지 않았고, 점령한 폴란드 동부에서 펼쳐진 소련의 정책들은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것이었음도 잊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의 강제이주에 대해서도, 카틴 숲에서 벌어진학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카틴 발견 이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렸고, 이는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또 하나의이유가 되었다. 스탈린이 스스로가 벌인 대학살을 폴란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끊는 빌미로 쓰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가 어떤 협상이든 선의를 가지고 임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또한 소련이 나치 독일을상대로 한 공동의 전쟁 동안 합법적인 폴란드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뒤 더 강력한 발언권을 지닐 그들이 과연 폴란드독립을 지지할 가능성이 있을까? - P537

영국과 미국의 관심은 그와는 결이 달랐다.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 어떤 형태의 폴란드 정부보다 더 중요한 동맹이었다. 미국과 영국 입장에서는 카틴 대학살에 대한 소련의 거짓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 스탈린을 설득하기보다는 폴란드에 타협을 종용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폴란드인들이 거짓, 즉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했다고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아울러 폴란드가 주권이 있는 정부라면 결단코 취할 수없는 조치, 즉 자국 영토의 절반인 동부를 소련에 넘겨주길 원했다.
이 문제에 있어 런던과 워싱턴은 종전 후 소련이 전쟁 이전의 폴란 - P537

드 동부 영토를 요구할 경우 이를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이미 1943년말에 합의해둔 상태였다. 스탈린이 과거 히틀러와 합의했던 소비에트의 서쪽 경계는 이제 처칠과 루스벨트에 의해 또다시 승인되었다. 런던과 워싱턴은 훗날의 소비에트-폴란드 국경으로 약간의 변경이 이뤄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보면, 폴란드는 소련뿐만 아니라 서방 동맹국들에게도 배신당한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에게 타협할 것을 요구하며, 폴란드인들의 손에 기대 이하의 결과물만을 쥐여주었다.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 양보된 것이었다. - P538

에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동맹국들 사이에서 고립된 런던의 폴란드 정부는 주도권을 바르샤바 폴란드 전사들에게 넘겼다. 폴란드의 주권을 지켜낼 희망이 거의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폴란드 국내군은 수도에서 들고일어나는 길을택했고, 이는 1944년 8월 1일에 시작될 것이었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는 템페스트 작전의 틀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공들여 계획된 이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폴란드 영토 해방에 폴란드군이 주 역할을 맡는 전국적 봉기를 그 골자로 하고있었다. 하지만 앞선 7월 말까지 템페스트 작전은 이미 틀어진 상태였다. 애초 계획상 폴란드 국내군은 폴란드 동부에서부터 붉은 군대에 밀린 독일군과 교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앞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린 까닭에 이 같은 합동 작전에 대해 소련과 사전에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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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에어컨 바람이 살갗에 닿으니 세포가 탱클탱클 살아났다. 재채기가 나고 정신이 깨어났다. 공부하는 신체로 모드 변환.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폈다. "무화과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잘 익어 달콤하다 떨어지면서 그 붉은 껍질을 터뜨린다. 나는 잘 익은 무화과에 불어대는 북풍이다. 나의벗들이여, 무화과가 떨어지듯 너희에게는 이 가르침이 떨어진다. 이제 그 열매의 즙을 마시고 그 달콤한 살을 먹어라! 온사방이 가을이고 하늘은 맑으며 오후의 시간이다. 활자가 두 눈에 달려든다. 영혼을 상승시키는 니체의 말 헤어져 있던 애인과의 상봉처럼 이리도 눈물겨울수가. - P145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아래
집안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씨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되는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게 정말 사는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_유하의 시 <달의 몰락> 부분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방

김정란의 시 <눈물의 방>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장석남의 시 <그리운 시냇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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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환영했는데, 이는 그것이 미군의 무장 속도를 늦추고 또 미국이전투를 벌이더라도 유럽보다는 태평양에서 벌이게 만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후에도, 히틀러는 일본이 소련보다는 미국과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1942년 초까지 소비에트 정복을 완수하고 그 뒤 태평양에서 그동안일본과의 전투로 약해진 미국을 상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역시 줄곧 일본이 남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쳐오고 있었다. 그가 품은 생각의 핵심은 히틀러와 똑같았다. 즉 ‘소련 땅은 내 것이니, 일본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뜨려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일본을 동아시아와 태평양에 묶어두길 원했고, 도쿄는 바로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P381

당초 독일의 침공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소련의 주요 도시들을차례로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의 식량 및 캅카스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는 전격적 승리를 거두었다면, 일본의 진주만 폭격 소식은 분명베를린에 좋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상에서라면, 진주만공격은 독일이 새로 얻은 식민지에서 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동안 일본이 미국의 시선을 끌어준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은 자신을 식량 및 자원을 자급자족하면서 영국의 해상 봉쇄 및 미국의 수륙 양동 작전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대륙 제국으로 만들 ‘동유럽 종합계획, 혹은 그것을 다소간 수정한 버전을 실행에 옮길 것이었다. 물론이것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그림이지만, 독일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던 순간만큼은 그래도 아주 약간의 현실성이있었다. - P382

1941년 12월, 히틀러는 자신이 처한 최악의 전략적 난국에 괴이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 스스로는 이미 장군들에게 1941년 말까지 "유럽 대륙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앞으로 다가올 영국 및 미국과의 세계적 수준의 분쟁에 대비하라고 이야기해둔 상태였다. 그러나그렇게 되기는커녕 독일은 두 개의 전선에서 그것도 3개의 패권국과맞서 싸워야 한다는 전략적으로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히틀러는 특유의 뻔뻔함과 정치적 민첩성을 발휘하여 애초의 전쟁계획에서 심각하게 틀어져버린 상황을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서와 언어에 맞게 각색해냈다. 비현실적인 기획, 서투른 계산, 인종주의적 오만함, 어리석은 벼랑 끝 전술 말고 대체 무엇이 독일을 영국, 미국, 소련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도록 만들었는가? 히틀러는 이 질문에 대한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유대인들의 음모‘였다 - P383

만약 히틀러가 자신이 했던 예언을 실현시키고자 했다면, 학살은 이 시점에서 그가 가진 단 하나뿐인 선택지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해양 제국이 아닌 대륙 제국이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보내버릴 불모지를 결국 손에 넣지 못했다. 마지막 해결책은 이미 여러 차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고, 힘의 방식, 곧 대량학살은 강제이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학살은 승리의 대체물조차 될 수 없었다. 전격적 승리가 애초 계획과 달리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유대인들은1941년 7월 말부터 이미 학살당해오던 터였다. 그러던 그들은 독일에맞서는 연합국들의 힘이 좀더 강력해진 1941년 12월부터는 모두 싹쓸어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히틀러는 여전히 좀더 깊은 감정적 요소들을 건드리고자 했고, 한층 더 악의에 찬 목표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던 독일 지도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다. - P386

세르비아는 아마도 이를 특히나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독일이 유럽 동남부에서 벌인 전쟁은 소련 땅에서 벌인 전쟁보다 약간 앞선 시점에서부터 치러졌고, 이것은 아주 뚜렷한 선례들을 남겼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인 1941년 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침공했다. 그 주된 목적은 자신의 영양가 없는 동맹인 이탈리아를 지원해 그들이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비록 독일이 순식간에 유고슬라비아군을 제압하고 크로아티아에 꼭두각시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이탈리아와 함께 점령한 세르비아 지역의 저항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 중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군 사령관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로서 ‘유대인 및 집시들만을 학살할 것이며,
그 비율은 독일인 1명당 유대인 및 집시 100명이다‘라고 명령했다. 이같은 방식으로, 세르비아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성은 힘러가 유대인들을 "빨치산으로서" 죽여 없애라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줄곧 사살당하고 있었다.  - P389

마지막 해결책의 다섯 번째이자 최종판은 말 그대로 대량학살이었다. 나치의 언어에서 재정착이라는 말은 이제 다른 말의 완곡한 표현이 되었다. 수년 동안 독일의 지도부는 유대인들을 특정 지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옮겨간 어느 곳에서든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해야만 할 것이고, 어쩌면 완전히 씨가 말라 더는 종족 번식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앞서처럼 그들을 죽여 없앤다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재정착은 비록 1940년 그리고 1941년에 들어선 유대인 정책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후 이른바 재정착 혹은 동부로의 재정착은 곧 대량학살을 뜻하게 된다. 아마도 재정착이라는 완곡어법은 기존 나치 유대인 정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것을 통해 나치가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해준 듯 보인다. 그 사실은 바로 독일의 정책은 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독일인들로 하여금 군사적 재앙이 자신들의 유대인 정책을 좌우해버린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위안할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 P390

그런 점에서 독일과 루마니아의 정책이 정반대로 갈라선 1942년은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독일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졌기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려들 것이었고, 루마니아는 똑같은 이유에서 그해말부터 약간의 유대인들을 살려두고자 할 것이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이제 미국 및 영국과 협상의 여지를 열어둘 것인 반면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그들의 죄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완전히 닫아버렸다. - P393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같은 날, 유대인 남성들은 우츠크성 뜰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P399

한 여인은 아내로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남겨남편이 자신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들 아이의 운명을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두 소녀는 함께 "너무나 살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복수해줘. 복수해줘"라며 삶에 대한 갈구를 남겼다. 또 다른젊은 여인은 조금 더 체념한 듯 "나는 내가 스무 살에 죽는다는 것을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상태다"라고 적었다.
누군가의 부모는 자신들을 위해 아이들이 카디시를 올려주기를, 또유대교의 관습을 잘 지키기를 부탁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전한 어느 딸의 메시지는 이랬다. "사랑하는 엄마! 이제 난 더 못 살거예요. 저들은 우리를 게토 밖에서 이곳으로 끌고 왔고, 우리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해요. 엄마가 우리와 이곳에 함께 있지 못하다는사실이 참 안타깝네요. 한편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지만요. 사랑해요, 엄마. 그동안 제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 - P400

민스크는 나치의 파괴적 본성을 가장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곳이다. 독일 공군은 민스크가 항복을 선언한 1941년 6월 24일까지줄기차게 폭격을 퍼부었고, 심지어 독일 국방군은 그로 인한 불길이잦아들 때까지 도시 입성을 미뤄야 할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7월 말까지 교육 수준이 높은 현지인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유대인들을 도시 북쪽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민스크에는 이제 게토, 강제수용소, 포로수용소, 대량학살을 위한 구역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곳은 결국승리의 대체물로, 즉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시연하는 일종의 무시무시한 죽음의 극장으로 바뀐다. - P404

041941년 가을 민스크. 당시 그곳의 독일인들은 모스크바가 여전히굳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기념일인 11월 7일, 독일인은 단순한 대규모 사살보다 뭔가 더 극적인 것을 내놓기로 했다. 그날 아침, 그들은먼저 게토에 있던 유대인 수천 명을 체포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이 마치 소비에트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런 것인 양,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오게끔 해둔 상태였다. 그러고는 체포한 이들을 길게 늘어서게 한 뒤, 그들 손에 소련 깃발을 쥐여주며 소련의 혁명가를 부르라고 강요했다. 유대인들은자신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을 수밖에없었다. 이들 6624명의 유대인은 트럭에 실려 민스크 너머 투친카 근 - P404

처에 있던 과거 소련 내무인민위원회가 창고로 쓰던 장소로 끌려갔다. 그날 저녁, 고된 강제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가족 모두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그곳에는 우리 가족 8명, 아내, 아이셋, 나이 드신 어머니, 내 형제들, 가운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테러 그 자체는 생소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과거, 1937년에서1938년에도 사람들은 내무인민위원회의 검은 차량에 실려 민스크에서 투카로 끌려갔다. 하지만 스탈린의 대숙청 작업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그때도, 내무인민위원회는 언제나 사람들을 하나둘씩 어두운 밤을 틈타 끌고 가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 P405

이와 달리 독일은 많은 대중에게 알리고자, 여러 의미를 담아, 또 선전 영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낮에 수많은 사람을 보란 듯이 끌고 갔다. 이렇게 연출된 가두 행진은 곧 ‘공산주의자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나치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치의 사고방식,
‘유대인 제거는 중앙 집단군의 후방 지역 안정화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도 일종의 승리‘라는 생각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공허한 승리의 표현은 좀더 명백한 자신들의 패배를 숨기기 위해 고안한거짓말로 보일 따름이었다. 중앙 집단군은 1941년 11월 7일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당연히 이를 달성하지못한 상태였다. - P405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처럼, 스탈린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히틀러는 연합국이 유대인을 위해 싸우고있다고 말했고, 따라서 (국민이 이 주장에 동조할까 우려하던 연합국은자신들이 억압받는 국가들(하지만 특히 유대인은 아닌)을 해방시키고자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히틀러의 선전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이후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소련 역사를 빚어냈는데, 그 대답은 바로 독일 학살 정책의 모든 희생자는 "소련 국민이지만 이 소련 국가 구성원의 최대 다수는 바로 러시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선전 부장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는 1942년 1월 "러시아인민, 모두 평등한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 대중 가운데 첫째, 이들야말로 독일 침략자들과의 투쟁에서 오는 짐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는 선언을 통해 이를 명백히 밝혔다. 셰르바코프가저 말을 내뱉기까지 독일인들은 이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동쪽에서 벨라루스 유대인 약 19만 명을 비롯해 100만 명에 이르는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다. - P408

1942년 하반기, 독일의 대 빨치산 작전은 유대인 대량학살과 따로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1942년 8월 18일 벨라루스 내 빨치산들을 그해 말까지 "완전히 몰살시킬 것"을 명령했다. 물론 그 기한까지 유대인 역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었다. 총살의 완곡한 표현인 ‘특별 조치"라는 말은 유대인과 벨라루스 시민들에 대한 보고서 양쪽 모두에서 등장한다. 둘 - P430

의 시행에 대한 기본 논리는 순환적이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 한번 살펴보자. 먼저 유대인들은1941년부터 애초에 "빨치산으로서 죽여야 할 대상이었는데, 이때만하더라도 아직 제대로 된 빨치산들의 위협은 없던 시점이었다. 그 뒤1942년 일단 그 같은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자, 이들과 관련된 민간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몰살시켜야 할 대상이 되었다. 빨치산과 유대인의 동일시는 오직 두 집단 모두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끝난다는 하향 궤적의 수사를 통해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 P431

1942년 가을에서 1943년 초까지, 독일은 게토 및 빨치산과 관련 있다고 판단된 모든 마을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1942년 11월에 있었던 늪지열 작전 당시 디를레방거 부대는 그때까지 바라나비치 게토에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 8350명을죽이고는 389명의 "노상강도"와 1274명의 "노상강도 용의자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러한 학살을 이끈 이는 바로 동방자치정부 나치 친위대 상급 장교 및 경찰 지휘부를 맡고 있던 프리드리히 예켈른으로, 앞서 우크라이나 카네츠포딜스키에서 있었던 대량 사실과 라트비아리가 게토에서의 이른바 정리 작업을 조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1943년 2월의 이른바 2월 작전은 슬루츠크 게토에 대한 청소 작업, 다시 말해 유대인 약 3300명에 대한 사살과 함께 시작되었다. 슬루츠크 서남부 지역에서 독일인들은 9000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2E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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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점령한 땅에서 폴란드의 교육받은 계층을 이미 싹쓸이했다고 착각한 독일과 달리, 소련은 이를 실제로 상당 부분 달성하고 있었다. 독일 동방 총독부 관할 구역에서는 폴란드의 저항세력들이 점점 세를 불리고 있었지만, 소련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소련의치밀한 조직망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체포되거나, 추방, 경우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소련의 지배에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폴란드는 약 500만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터전이었고, 그들 대다수는 이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들이 소련이라는 새로운 지배 체제에 만족해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차 대전 사이 폴란드 내에서 불법 조직으로 낙인찍혀 활동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방법에도가 튼 이들이었다. 이제 그들에게 불법이라고 낙인찍었던 폴란드는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표는 자연스레 소련이라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 P268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들은 이제 소련이 설치한 각종 제도에 맞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주도적인 민족주의자 몇몇은 양차 대전 사이에 독일 군사정보부를 비롯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나치정보기관인 SS 보안방첩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스탈린이 짐작했던 것처럼 그들 일부는 여전히 베를린을 위해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새롭게 병합된 폴란드 동부에서 이뤄진 네 번째 강제이주의 주요대상이 우크라이나인들이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들에 앞선 강제이주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주로 폴란드인들을 세 번째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뤄졌었다. 네 번째 강제이주는 1940년 5월에 이뤄졌고, 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이었던 1만1328명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특별 정착지로 보내졌다. 다음 달 19일의 마지막 강제이주는 2만2353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들 대다수는 폴란드인이었다. - P269

진지한 인물이었던 그는 이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폴란드는 이제 독일에 맞서 싸울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것이고 참스키의 임무는 사람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설 장교들을 찾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로의 여정 동안 그의 마음속은 먼저 신에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폴란드를 지켜달라는, 율리우시 스와바츠키의 자학적인 폴란드 낭만주의 시구들로 가득 찼다. 그러고는 너무나 순수한 동료 폴란드인들에게 말을 건네며, 그는 치프리안 노르비트가 망명길에 고국에 대한 바람을 담아적은 가장 유명한 시구를 떠올렸다. "나는 바라네. 옳은 것에는 예라고 그른 것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을 흔들림 없는 등불을." 민족과 국적이 뒤섞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자 점잖고 지적인 인물이었던 찹스키는 자신과 조국이 처한 상황을 낭만적 이상주의의 언어로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위안을 얻고 있었다. - P271

그 순간 두 사람이 느꼈던 슬픔, 즉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던 시간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동맹국으로서 독일과 소련은1939년 9월에서 1941년 6월 사이 추정상 20만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했고, 약 100만 명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냈다. 폴란드인들은 앞으로 몇 달 또 몇 년 내에 수만 명이 죽음을 맞이할 소련 강제수용소와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힌 채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를 운명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에 앞서 이미 수만 명의 유대인이 배고픔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터였다. - P273

이것은 그야말로 근대성에 대한 공격이자, 특정 지역과 사회에 자리하던 이른바 계몽의 화신에 대한 공격에 다름 아니었다. 동유럽에서특정 사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은 바로 지식인 계급을 뜻하는 "인텔리겐차"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히 조국이 고난에 처했거나 타인의 손에 떨어졌을 때 그런 조국을 이끌어가는 자들로 여겼다. 아울러 저술, 연설,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모국의 문화를 잘 지키는 것 또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 여기던 자들이었다. 독일어에도 이와 똑같은 단어가 똑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기에 히틀러가명확하게 내린 명령이 "폴란드 인텔리겐차의 절멸"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련 코젤스크 심문관들의 수장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을 이야기했고, AB 악치온이 펼쳐질 당시 어느 독일 심문관은 곧 사형당할 노인에게 "폴란드인들만의 사고방식을 보이라고 명령했다. 그 대상들은바로 폴란드 문명의 화신이자, 그것만의 특별한 사고방식을 나타낸다고 여겨진 지식인 계층이었다. "
두 점령국의 손에 자행된 대량학살, 그것은 바로 폴란드 인텔리겐차가 자신들의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비극의 증거였다. - P274

1941년 6월 22일은 유럽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날 중 하나다. 이날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개시된 독일의소련 침공은 단순한 기습 공격, 독소 동맹관계의 변화, 전쟁의 새로운국면 따위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의 시작점이었다. 독일 국방군(그리고 그 동맹군)과붉은 군대의 교전은 1000만이 넘는 군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물론여기에 더해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 역시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비행 중에 폭격으로, 또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목숨을 잃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독일은 이 기간에 약 1000만명 이상을 계획적으로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500만 명을 웃도는 유대인과 300만 명이 넘는 전쟁포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 P277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 소련과 나치 독일은 유럽 대륙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대 강대국이었지만, 좀더 넓은 차원에서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그때까지 두 국가는 유럽의 판을새롭게 싸오고 있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미 전 세계의 판을 짜오던 세력이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양쪽 다 자신들의 동맹에 저항하던 대영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단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대영제국과 그들의 해군력이 만들어놓은 세계 체제는 나치든 소련이든 당장에 뒤엎을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길을 택하는 대신 다른 길, 즉 비록대영제국과 영국 해군이 위용을 떨치고 있지만 일단은 자신들 눈 - P282

앞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혁명 과업을 완수하며, 제국을 만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서로 동맹이든 아니면 적이든, 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나치 지도부 앞에는 강력한 영국의 존재라는 현실이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 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똑같았다. 즉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 P283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국가를 지향했다. 아울러 스탈린의 이름이 철을 의미하는 스틸Steel에서 따온 것이라는점, 그리고 히틀러 또한 철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대에 특정 자원이 갖는 중요한 의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농업을 자신들의 혁명 완수를 위한 핵심 요소로 파악했다. 두 사람 눈에, 자신들의 체제는 식량 생산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부터 좌우되지 않는 경제적 자립을 일궈낼 것이며,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것이었다. - P283

우크라이나의 식량은 소련의 완전무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스탈린의 계획에서만큼이나 나치의 동부 제국 계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요새지대는 곧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였다. 독일군 작전 참모진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1940년 8월, 우크라이나가 "농업적으로나 공업적으로 소련에서 가장가치 있는 지역"이라고 결론 내렸다. 1941년 1월 민간 계획을 책임지고 있던 헤르베르트 바케는 히틀러에게 "우크라이나 점령은 우리를모든 경제적 걱정거리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히틀러가 원한 것은 "이제 그 누구도 지난처럼 우리를 배고픔에 허덕이게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복은 독일을 영국의 해상 봉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고, 그곳에대한 식민화는 독일을 미국과 같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만들어줄것이었다. - P289

독일의 기획자들이 파악했듯이, 집단농장이란 수백만의 사람을굶겨 죽이는 것이었고, 따라서 다시금 써먹어야 할 방식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이번에는 수백만이 아닌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일 작정이었다. 과거 소련의 집단화는 초기에는 비효율성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결과에 따라, 그리고 비현실적인 식량 생산 목표 때문에, 그다음에는1932년 말과 1933년 초의 의도된 악의적 착취의 결과로 우크라이나에 기아를 몰고 왔다. 이와 달리 히틀러의 집단화는 사전에 짜놓은아사 계획으로, 그 대상은 바로 달갑지 않은 소련 주민들이었다. 독일의 기획자들은 이미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 유럽 지역을 다룰 때 약2500만 명을 먹여 살릴 만큼의 식량 수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소련의 농촌 인구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약 2500만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파악했다. 해결책은 너무나 단순한 것, 즉 전자가 살기 위해 후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계산한 바에따르면,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식량은 독일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딱 - P290

적당한 수준이지만 그 외의 동쪽 인민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모자랐다. 그런 점에서 이들 동쪽 주민은 정치적 통제와 경제적 균형을 위한수단으로 치부되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1941년 5월 23일까지 공들여 만들어낸 굶주림 계획, 소련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 및 그 후 정복지의 소련시민들을, 특히 대도시 지역의 시민들을 굶김으로써 독일군과 독일(및 서유럽) 민간인들을 먹여 살린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지역의 식량은 러시아와 나머지 소련 지역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처럼 북쪽으로 운송되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나머지 유럽 지역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서쪽으로 운송될 것이었다. 독일이 보기에, 우크라이나(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는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되는 "식량 과잉 지역"이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와 반대로 "식량결핍 지역"이었다.  - P291

기아, 그리고 식민화는 토의되고, 합의되고, 고안되고, 할당되고, 양해된 독일의 정책이었다. 굶주림 계획의 기본 틀은 1941년 3월까지수립되었다. 이에 관한 일련의 "경제 정책 세부 지침들은 5월에 나왔다. 다음 달인 6월, 비문 등을 삭제한, 흔히 "녹색 서류철‘로 알려진지침서 1000부가 독일군 장교들 사이에 나돌았다. 침공 직전 힘러와괴링은 어땠을까? 힘러는 장기적 관점에서 동유럽 종합 계획의 인종 - P292

적 식민지 부분을, 괴링은 단기적 관점에서 굶주림 계획의 기아 및 파괴라는 전후 기획의 중요한 부분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독일의 의도는 동부 유럽을 토착 인구 말살을 전제로 하는 농업 식민지로 탈바꿈시킬 파괴적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이 했던 모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셈이었다. 일국사회주의는 독일 인종을 위한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로대체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계획이었다. - P293

잔혹하다는 것은 효율적이라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그리고 독일의 계획은 현실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악랄한 것이었다. 독일 국방군은 굶주림 계획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윤리나 법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히틀러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전쟁 시 민간인들에 관련된 법이나 규칙 등을 따라야 할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였고,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단 한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침공 첫날부터 과거 폴란드에서 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었다. 침공 이튿날, 독일군은 민간인들을 전장으로 끌고 와 인간 방패로 쓰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련군은 잡는 즉시 사살해야 할 빨치산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항복을 시도하는 이들 역시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붉은 군대에서는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제복 입은 여군들은 단지 여성이라는이유로 먼저 살해당했다. 대규모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기아 유발 정책은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독일이 처한 문제였다. 더 많은 땅을 공략하는 것이 오히려 식량 재분배문제 처리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 P298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일에 늦어도 석 달 안에 "전격적 승리"를 따내고자 빠르고 과감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연이어 후퇴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개시된 지 2주차에 접어들었을 무렵 독일은 이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동부 전역은 물론 대부분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1941년 7월3일의 일기에서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믿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8월 말까지 독일은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지역일부, 남아 있던 벨라루스 지역을 추가로 병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전쟁의 속도는 애초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며, 핵심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소련 지도부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남아있었다. 어느 독일 군단장이 1941년 9월 5일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적었듯이, "전격전의 승리도, 러시아 군대의 괴멸도, 소련의 붕괴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 P301

1939년11월 스탈린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에 따라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핀란드를 공격함으로써 핀란드인에 대한 적개심을 만천하에드러냈다. ‘겨울 전쟁‘이라 불리는 이 기간에 핀란드인들은 붉은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그들의 명성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1940년 3월, 핀란드 땅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영토를 스탈린에게 넘겨주어 레닌그라드를 둘러싼 일종의 완충지대로 만드는 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핀란드인들은잃어버린 땅을 되찾고자 또 자신들이 ‘연속 전쟁‘이라 부르게 될 전쟁을 통해 소련에 복수하고자 했고, 1941년 6월 히틀러 곁에는 이 핀란드 동맹군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손에 넣을 생각도, 그곳을 핀란드인들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레닌그라드를 아예 지도상에서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레닌그라드에 사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도시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 P308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 지역을 핀란드인에게 넘겨줄수 있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1941년 9월, 북부 집단군이 레닌그라드 남부의 도시들을 포위·포격하는 군사 작전에 돌입함에 따라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를 북쪽에서부터 봉쇄해 들어갔다. 비록 독일군 지휘관들이 소련 도시들에 대한 히틀러의 극단적인 계획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레닌그라드를 말려 죽여야 한다는 데는 동감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 병참감 에두아르트 바그너가 아내에게 적은 편지를 살펴보자. 그는 이 군사 행동으로 인해 총 350만 명에 달하는 레닌그라드 주민은이제 스스로의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 P309

동쪽 땅에 설치된 수용소의 구조는 슬라브족이든 아시아인이든아니면 유대인이든 독일이 이들의 생명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를그대로 드러냈고, 바로 그것이 그 같은 대규모 기아를 감히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전쟁 기간에 붉은 군대 포로들이 갇혀 있었던 독일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은 575퍼센트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직후 8개월 동안의 사망률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았던 게 틀림없다. 반면 독일이 서방 연합군 포로들을 가둬두었던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은 5퍼센트에 못 미쳤다. 1941년 가을 어느 하루 동안 사망한 소련군포로들의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목숨을 잃은 영국군과미군 전쟁포로 전체 숫자와 맞먹었다. - P325

그러나 이 같은 잔혹함은 소련의 사기를 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소련의 의지를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정치 장교,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가려내는 작업은 무의미했다. 이미 붙잡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소련을 그다지 약화시키지 못했다.
실제로 대규모 기아 정책과 신원 선별 및 조사 작업은 붉은 군대가더욱 맹렬히 저항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배고픔에몸부림치다 죽을 것이 빤하다면, 군인들은 싸우는 길을 택할 게 틀림없다. 붙잡히면 그 즉시 총살임을 잘 알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그리고 정치 장교들이 항복을 선택할 리 만무했다. 독일이 점령한지역에서 어떤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지가 알려짐에 따라, 소련 시민들은 기존 소련의 통치에 대해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P330

독일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에 비춰보면, 소련 침공은 말 그대로 완벽한 실패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전격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어야했건만, 1941년 늦가을까지도 승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독일이 처한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던 소련 침공은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점령한 (예컨대) 벨기에가 나치 독일에게 있어 좀더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소련의 인구는 초기 계획상쓸어버려야 할 대상이었지만, 정작 소련에서 들여올 수 있었던 가장중요한 경제적 자원은 바로 이들의 노동력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복한소련 땅은 나치가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있어 대안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우랄산맥 너머로 혹은 수용소로 추방될 것이었다. 그러나1941년 여름 소련이 보여준 방어력은 이 같은 마지막 해결책을 다시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 P331

독일인들은 굶주림과 공포로 가득 찬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중 최소 100만 명을 따로 뽑아 자신들의 군대 및 경찰력을 보조하는 인원으로 썼다. 애초에는, 소련이 무너지면 이들의 도움을 통해 소련 영토를 좀더 손쉽게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소련을무너뜨리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이 길어지자, 이 소련인들에게는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점령지역에서 시행하고자했던 대량학살을 보조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앞서 수용소의 포로였던 이들 보조자에게는 삽이 쥐어졌고,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쏴 죽일장소에 도랑을 파라는 명령이 뒤따랐다. 다른 이들은 유대인을 쫓던경찰 조직에 편성되었다. 몇몇 포로는 트라브니키에 있는 훈련소로 보내져 경비병 훈련 과정을 밟기도 했다. 나치에 봉사하도록 재훈련 받은 이 소련 시민 및 참전 군인들은 1942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시설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앞으로 100만 명이 넘는 폴란드 유대인이 독가스를 마시고 숨져갈장소였다. - P333

히틀러가 꿈꾸던 것들은 소련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완전히박살나버렸다. 하지만 그의 유토피아는 불합격이라는 판정보다는 다시금 고쳐 만들어지는 길을 밟게 된다. 히틀러는 그야말로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의 뜻을 짐작하고 실현시키는 능력이야말로 그 주변의심복들이 각자 한 자리씩 꿰차고 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1941년의절반이 지난 시점이자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히틀러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 어려워진 바로 그 시점에, 괴링, 힘러, 하이드리히 같은 이들의 과업은 바로 히틀러의 천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치 정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그의이상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음의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 명을 몇 달 내로 굶겨 죽일 굶 - P337

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전격적 승리는 끝내 없었다. 비록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기아에목숨을 빼앗겼지만, 굶주림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동유럽 종합 계획 또는 전후 식민화 계획은 무엇이 됐든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P338

유토피아가 시들해지자, 정치적 미래는이러한 환상들에서 그나마 실제로 뽑아낼 수 있는 것들에 달려 있게되었다. 괴링, 힘, 하이드리히 세 사람은 엉망이 돼버린 폐허 속에서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차지하고자 앞다투어 움직였다. 나치 정권의 경제 전반 및 굶주림 계획을 맡았던 괴링은 최악의 상황에놓였다. "제국의 2인자이자 히틀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그는 독일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동쪽에서는 거의 아무런역할도 맡지 못했다. 전후의 거대한 기획에 있어 경제 문제 처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동시에 눈앞의 전쟁을 어떻게든 계속할 자원 마련이 좀더 시급한 일이 됨에 따라 괴링은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던 괴링과 달리 하이드리히와 힘러는 마지막 해결책의 재공식화, 즉 애초 계획과 달리 전쟁 중에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식의 수정을 통해 좋지 못한 전선 상황 - P338

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먹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히틀러가 1941년 8월부터 말하기 시작했듯이 이 전쟁이 유대인과의 전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말살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1941년 7월 31일 하이드리히는 괴링으로부터 마지막 해결책수립에 관한 공식 권한을 받아냈다. 이 기획에는 여전히 앞서의 강제이주 계획에 대한 조정 및 유대인들을 정복한 소련의 동쪽 땅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키겠다는 하이드리히의 계획이 들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 해결책의 조율을 위해 반제에서 회의를 열고자 했던 1941년 11월까지도, 하이드리히는 분명 그러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할 수 없는 유대인들을 없애야 할 것이다. 육체노동을 감당할수 있는 유대인들은 점령한 소련 땅 어딘가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하이드리히의 생각은 당시 독일 정부 내에서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사고 있었다.  - P339

스탈린 덕분에 영토를 넓힌 지 딱 반년 뒤, 리투아니아는 자신들의후원자로 보였던 이들 소련에게 정복당했다. 1940년 6월 스탈린은리투아니아와 그 외 발트 국가들, 즉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장악하고는 서둘러 이들 지역을 소련에 병합시켜버렸다. 이 합병 작업 후소련은 리투아니아에서 수많은 리투아니아 엘리트를 비롯한 약 2만1000명에 달하는 사람에게 강제이주 명령을 내렸다. 리투아니아 수상과 외무장관 역시 추방된 수천 명 중 하나였다. 리투아니아 정치및 군사 지도자들 중 몇몇은 수용소를 탈출해 독일로 도망치기도 했는데 - P344

흔히 사전에 베를린에 선이 닿아 있던 이들이거나 아니면 침략군인 소련에 줄곧 적의를 품고 있던 이들이었다. 독일은 리투아니아에서 온 정치적 망명자들 중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선호했으며, 이들중 몇몇을 훈련시켜 자신들의 소련 침공에 함께하도록 했다.
따라서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쳤을 때 리투아니아는 매우 독특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맨 처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으로 이익을 봤고, 그 뒤 소련에게 정복당했으며, 이제는 독일의 손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소련의 무자비한 점령을 겪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같은 변화를 반기는 분위기였고, 이들 중에는 극소수의 리투아니아 유대인도 있었다.  - P345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내무인민위원회의 처형에 대한 앙갚음으로서의 유대인 학살은 소련이 유대인 국가라는 나치의 시각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또한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앞서 스스로 소련에 협력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얻은 변절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기회였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점령한 자뿐만 아니라 몇몇 점령당한 이들에게도 요긴한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 P353

하지만 이 같은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달 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 소비에트가 남긴 폭력의 흔적들은 나치 친위대와 그 지도부에게 있어 아주 유용했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이전부터 ‘삶은 이데올로기들 간의 충돌이며, 법의 지배에관한 전통적인 유럽식 이해는 동쪽의 인종적·이데올로기적 적들을무찌르는 데 필요한 가차 없는 폭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내내 고수해왔었다.  - P354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소비에트 폭력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독일은 심지어 자신들만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스스로를 과거소비에트가 벌인 범죄의 상처들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고 있다는 식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귀가 따갑도록 표방한 것들에 비춰보면, 두 번의 점령을 받은 이들 지역에서 독일이 찾아낸 것들은 그들로하여금 어떤 특정한 느낌을 받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과거 이들이 훈련받고 또 목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지던 것들, 즉 추정상으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조종한‘ 소비에트의 범죄에 대한 일종의 확인이었다. 소비에트가 벌인 잔혹 행위들은 독일의 나치 친위대원, 경찰, 군인들이 이내 벌이게 될 유대인 여성 및 아동 학살 정책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는 아주 좋은 구실이될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범죄 행위들을 겪은 지역 주민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교도소 수감자들에 대한 소련의 학살은,  - P355

스탈린의 정보원들이 내린 판단은 정확했다. 결정적으로 일본은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일 참이었고, 이는 곧 시베리아에 대한 공격 옵션이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뜻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남쪽으로 뻗어갈계획은 1937년까지 이미 구상이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1940년9월, 그들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략함으로써 확실해졌다. 앞서히틀러는 동맹 일본을 자신의 소련 침공에 끼지 못하도록 했다. 이제그 침략이 실패에 이르자, 일본 역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붉은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던 1941년 12월 6일, 일본의항공모함대는 미국 태평양 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진주만을 향하고있었다. 어느 독일 장군은 12월 7일 당시 모스크바를 둘러싼 전투 상황을 담은 편지를 집으로 보냈는데, 그는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 "우리는 시시각각 각자의 헐벗고 굶주린 몸뚱어리를 지키기 위해, - P379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인 적들과 싸우고 있소"라고 적었다. 바로 그날,
일본 전투기들의 물결은 미군 함대를 습격, 정박 중이던 전함 몇 대를파괴하고 미군 2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튿날 미국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11일, 나치 독일 역시 미국과의 전쟁을 선언했는데,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하여금 독일과의 전쟁을 거리낌 없이 선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스탈린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약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겨룰 생각이라면,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소련과 대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더 이상 전선이 양쪽으로 분산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미국 공격은 미국을 소련의동맹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일본이 독소전에 중립을 취했던 관계로, 머지않아 미국의 보급선들은 일본 잠수함들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소련의 태평양 항구에 들어갈 것이었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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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P 189, 190




스탈린은 소련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는 점도 신경 써야 했다. 만주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였던 곳을 빼앗아 만든 일본 식민지였다. 이러한 식민지는 더 늘어날 기세였다.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이 가장 긴 나라이자 정치가 불안한 국가였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 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 P135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1930년에 집단화에 따른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트로츠키 지지자와 여러 외세 사이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자들의 포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안에있는 협잡꾼, 간첩, 파괴 공작원과 살인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정책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역사의 정당한 흐름을 느리게 하려는 반동 국가들의 책임이었다. 5개년 계획의 결함처럼보이는 일은 외세 간섭의 결과였다. 따라서 가장 심한 죄업은 반역자들의 몫이었고, 비난의 대상은 언제나 바르샤바, 도쿄, 베를린, 런던또는 파리였다. - P137

스탈린은 스페인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즉시 예조프를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가 보기에 정치재판과 인민전선은 같은 궤를 타고 있었다. 인민 전선은 모스크바의 전선이 바뀔 때마다친구와 적을 다르게 정의했다. 비공산주의정치세력에 제공되는 모든 기회가 그렇듯이, 이것은 본국과 외국 모두에서 상당한 경계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의 무장 파시즘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외세에 대한 전쟁이면서, 동시에 좌파및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투쟁이었다. 그는 간첩과 배신자를 충분히색출해 사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스페인 정부를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국가인 동시에 미래상이고, 한 나라의 정치체제이자 국제주의자의 이데올로기였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언제나 국내 정책이었고, 소련의 국내 정책은 언제나 대외 정책이었다. 이는 소련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 P142

오웰의 생각처럼, 소련과 유럽 파시즘의 공개적인 충돌은 본국에서과거의 반대자와 잠재적 반대자를 피로 숙청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소련의 이 작전은 국내의 숙청 재판 시작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와마드리드에서도 개시되었다. 스페인 파시즘과의 부딪침은 소련에서의경계 강화를 정당화했고, 소련에서의 숙청은 스페인에서의 경계 강화를 정당화했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 전선이 아무리 ‘우리는 다수의 연대 세력이다‘라고 선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사회주의 반대 세력이라고 믿는 이들을 스탈린이 막무가내로 숙청하기로 마음먹었음 - P142

을 드러냈다. 오웰은 공산주의자들이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모스크바에 신세를 진 스페인 정부가 트로츠키파 정당을 금지하는 모습을 봤다.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충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머나먼 도시에서 벌어진 이 추잡한 싸움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스탈린은 바르셀로나가 제5열 파시스트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지리적 특성과 지역 정치 현실에 아랑곳없는 스탈린주의자의 융통성 없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또한 일부 서구 좌파와 민주주의자에게 파시즘 외에도 적이 있음을 가르쳐준, 오웰의 전쟁 회고록 카탈로니아 찬가』에 등장하는 감동적인 장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 P143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 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 P144

부농이란 스탈린 혁명에서, 집단화와 기근에서,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굴라크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농민들이었다. 사회 계층으로서의 부농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용어는 그 자체에 정치적 함의가 담긴 분류의 산물이었다. 1차 5개년 계획에서 ‘부농을 청산‘하려는 시도는 대량학살로 이어졌지만, 계급이 파괴되기는커녕 오명과 억압을극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계급을 이루었다. 집단화 기간에 추방당하거나 도망친 수백만 명은 부농으로 간주된 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이러한 계급 분류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소련 지도부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로운 적을 만든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1937년 2월과 3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 총회에서는 다수의 연사가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도출했다. "외국 분자들이 도시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를 더럽히고 있다. 부농은 소련 체제의 "중대한 적"이다.  - P148

집단화 과정에서 ‘부농의 저항이 많았던 우크라이나는 살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레플렙스키는 명령 00447호를 확대해, 기근 이후 소련의 영토 보전에 위협적인 존재로 비치던 소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대상에 포함시켰다. 우크라이나에서 약 4만530명이 민족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1933년 독일에 식량 원조를 요청했던 우크라이나인들도 체포되었다. 1937년 12월 (이미 두 배로 늘어나 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할당량이 달성되자, 레플렙스키는 ‘더 많은 할당량을 바랍니다‘라고 보고했다. 1938년 2월, 예조는 이공화국의 총살 할당량에 2만3650명을 추가했다. 종합해보면, 1937년과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 위원들은 부농 박멸 작전에서 소련령 우크라이나 주민 7만868명을 총살했다. 수용소행 대비 총살의 비율은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특히 높았다. 1~8월까지 약 3만5563명이 사살되었고, 단 830명만이 수용소로 갔다.  - P156

스탈린은 자신의 정책을 대안이 없는 유일한 해답인 듯 내비쳤지만, 그는 지도자들이 향후 계획을 논의하며 미래를 내다보는 체할 수있게 했던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다른 어떤 대체 이념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관한 과학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의 자연은 경제였고 연구 대상은 사회 계급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레닌주의적인 해석에서조차, 인간은 자신의 계급 배경 때문에 혁명에 저항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서는 뭔가가달라지고 있었다. 평범한 국가 안보 문제가 마르크스주의자의 언어와 융합해서, 영영 다른 언어로 바뀌어버렸다. 정치재판에서 고발당한 사람들은 외세 때문에 소련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무리간접적이고 약하게 표현해도, 고발문에 따르면 그들의 죄목에는 계급투쟁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본국을 에워싼 대표적인 제국주의국가들을 돕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 P158

1936~1938년의 나치 테러는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는데, 개인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처벌하는 대신 정치적으로규정된 사회 집단을 ‘그 존재 자체‘ 때문에 처벌하는 식이었다. 나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집단은 ‘반사회적 집단‘이었다. 그 뜻은 나치의 세계관에 저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때로는 정말로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실체는? 동성애자,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중독자로 의심되는 사람, 또는 일할 의지가 없는 이들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나치 세계관의 기본 전제들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도 여기에 속했다. - P159

이 시기 소련의 테러는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비할 데 없이 치명적이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는 소련에서 명령 00447호 때문에발생한, 18개월 동안 약 40만 명이 처형당하는 일에 비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1937년과 1938년, 나치 독일에서는 267명이 처형되었지만, 소련에서는 부농 박멸 작전에서만 37만8326명이 처형당했다. 마찬가지로, 인구 규모 차이를 고려하면, 소련 국민이 부농 박멸 작전에 - P160

서 처형당할 확률은 나치 독일에서 독일 국민이 범죄자로 몰려 사형당할 확률의 700배에 달했다.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소수 민족이라면 "무릎을 꿇리고 미친개처럼 쏴 죽여야 한다. 이것은 나치 친위대 장교가 아닌,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민족 박멸 작전‘을 실행하던 공산당 지도자의 말이었다. 1937년과 1938년에는 소련인 25만 명이 민족 때문에 총살당했다. 5개년 계획은 소련이 사회주의하에서 민족 문화를 꽃피우게 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소련은 그 어느 곳보다 민족적 박해가 심한 곳이었다. 인민전선조차 소련을 관용의 고향으로 묘사했지만, 스탈린은 소련을 구성하는 민족 가운데 다수를 대량 살육하라고 지시했다. 1930년대 후반기에 가장 박해받은 유럽의 소수 민족은 주로 이민 때문에 수가 줄어든) 약 400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이 아니라, (주로 처형 때문에 수가 줄어든) 60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계 소련인이었다.‘
스탈린은 민족 대학살의 선구자였고, 폴란드계는 소련의 소수 민 - P165

족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피해자였다. 부농처럼, 폴란드계 소수 민족도 집단화 실패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에 대한 근거는1933년 기금 기간에 창안되어, 1937년과 1938년 대공포 시대에 적용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회 대표인 프세볼로트 발리츠키는 대규모 기아가 그가 "폴란드 군사 조직"이라 부른 간첩 도당의 도발이라고 설명했다. 발리츠키에 의하면 이 ‘폴란드 군사 조직‘은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침투한 다음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수확 과정을 훼방놓도록 후원했고, 굶어 죽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시체를 반소련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말하는 ‘우크라이나 군사 조직‘ 역시 똑같이 악랄한 행위를 한, 기근에 대한 책임을 함께 걸머질 도플갱어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영감을 얻은 발명품이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령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그 어디에도 폴란드 군사 조직이란 없었다.  - P166

1933년 여름, 발리츠키는 ‘폴란드 군사 조직‘이 소련에 무수한 간첩을 보냈고, 이들이 조국 폴란드에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공산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는 불법이었고,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당연한 피란처라 생각했다.
폴란드 군사 정보부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을 활용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으로 넘어갔던 대부분의 폴란드 좌파는 정치적 망명자일 뿐이었다. 소련 내 폴란드 정치 망명자 체포는 1933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극작가인 비톨트 반두르스키는 1933년8월에 투옥당했고, 폴란드 군사 조직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 폴란드 공산주의와 폴란드 간첩 간의 이러한 연결 고리가 심문 절차에서 문서화되면서, 더 많은 소련 내 폴란드 공산주의자가 체포되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 예지 소하츠키는 1933년 모스크바 감옥에서 투신 자살하기 전에 자신의 피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까지 당에 충성하다" - P167

1937년 8월 11일,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회가 "폴란드 군사 조직의 간첩 연결망 완전 청산"을 수행하도록 하는 ‘명령 00485호‘를 공표했다. 명령 00485호는 부농 박멸 작전 개시 직후에 공표되었지만, 훨씬 더 과격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계급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적을노린 명령 00447호와는 달리, 00485호는 특정 민족 집단을 국가의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작전 효과를 위해부농 박멸 명령 또한 범죄자까지 타깃으로 지정했고, 다양한 유형의민족주의자와 정적들까지 포함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명령의 계급 분석은 불분명했다. 집단으로서의 부농은 최소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화 계획에 대한 소련 국가들의 적대감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동지애라는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를 폐기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 P171

어떻게 태어나 이제껏 살았느냐가 처형 사유였는데, 폴란드 문화나가톨릭교에 대한 호의는 국가 간 첩보활동에 동참했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기껏 경범죄 정도의 잘못 때문에 중형을 받아야 했다.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수용소 10년형을 받거나, 설탕을 충분히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당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근거로도 보고서를 작성하고, 앨범에 기록하고, 서명하고, 선고하고, 총살해 시체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 P175

레닌그라드 주민과 폴란드계는 당시 이렇게 많은 이가 처형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저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죄수호송차, ‘영혼 파괴자‘나 ‘검은 까마귀‘라 불리던 감옥 트럭을 생애 마지막으로) 보게 될까 두려워할 뿐이었다. 어느 폴란드계의 기억에따르면, 사람들은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 검은 까마귀에게 물려갈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산업화와 집단화 때문에 폴란드계는 방대한 나라의 곳곳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제 그들은 공장, 막사나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수많은 사례 중 하나를들어보자면, 모스크바 서쪽 근교에 있는 쿤체보의 소박한 목조 주택에서 숙련공 여럿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폴란드계 기계공과 금속공학자도 있었다. 두 사람은 1938년 1월 18일과 1938년 2월 2일에각각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군체보의 세 번째 희생자인 예브게니야바부시키나는 폴란드계도 아니었다. 그녀는 충성심 강하고 전도유망한 유기 화학자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폴란드 외교관의 세탁부였다는 이유로함께 처형당했다. - P178

폴란드 박멸 작전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곳에는 폴란드계 소련인 60만 명 중 약 70퍼센트가 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 박멸 작전으로 5만5928명이 체포되고, 그중4만7327명이 사살되었다. 1937년과 1938년, 우크라이나에서 다른민족 대비 폴란드계의 체포 확률은 12배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를 휩쓸었던 기근이 ‘폴란드 군사 조직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발리츠키는 수년 동안 폴란드인을 박해했고, 그의 옛 부관이자 후임자인 이즈라일 레플렙스키는 발리츠키가 제거된 뒤부터 늘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소용없었다. 그 역시 1938년 4월 체포되어 우크라이나에서의 폴란드 박멸 작전이 끝나기도 전에 처형당하고 말았으니까. (후임자인 A. I. 우스펜스키는 1938년9월 스스로 실종되는 기지를 발휘했지만, 결국 발각당해 처형되었다.) - P181

1937년 당시 일본은 당면한 위협 대상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벌인 일은 부농 박멸 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의위협은 소련 내 중국계 소수 민족을, 그리고 만주에서 돌아온 소련철도 노동자를 탄압하는 구실도 되었다. 일본의 간첩 행위 역시 약17만 명에 달하는 한국계 소련인 전체를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일을 정당화했다. 이후 한국은 일본에 점령당했고, 따라서 한국계 소련인은 일본과 관련된 일종의 집단 이주 민족 - P189

이 되었다. 중국 서부 지역인 신장에서,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성차이는 직접 테러를 감행해 수천 명이 죽게 만들었다. 중국 북쪽의 몽골인민공화국은 1924년 창설되었을 때부터 계속 소비에트의 위성 국가였다. 소련 군대는 1937년 동맹인 몽골에 진입했고, 몽골 당국은1937~1938년에 직접 테러를 저질러 2만474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모든 일은 일본을 겨냥한 행위였다.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 P190

대공포는 곧 3차 소비에트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1917년을기점으로 정치 체제에 변화를 불러왔고, 집단화가 193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면, 1937~1938년의 대공포 시대는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심문을 통해서만 적의 정체를밝힐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로 만들었다. 외국 간첩과 국내음모에 관한 그의 판타지는 고문실마다 들렸고, 심문 조서마다 적혔다. 소련 국민으로서 1930년대 후반의 상위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말하려면, 그의 판타지의 등장인물이 되어야 했다. 스탈린의 더 큰
‘이야기‘를 위해, 소련 국민 개인의 ‘이야기(삶)‘는 종종 끝장나야 했다. - P193

그러나 농민과 노동자 집단을 단순한 숫자로 바꿔버리는 일은 스탈린의 기분을 돋워주었고, 대공포 시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스탈린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당연하게도), 1938년 11월, 대규모 작전의중단을 명령하면서, 스탈린은 내무인민위원회 대표를 또다시 교체했다.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의 후임자였는데, 예조프는 그 뒤 처형당하고 만다. 수많은 내무인민위원회 최고 간부들도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는데, 사실 이러한 숙청은 스탈린 정책의 핵심이었다. 야고다를 예조프로, 예조프를 베리야로 교체함으로써, 스탈린은 자신이 안보 기관의 정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로 당을 견제하고 당으로 내무인민위원회를 견제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소련의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폭군이 자신의 궁궐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것으로권력을 증명하는 폭군정치가 되었다. - P193

소련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억압 기구를 이용해 민족 살육 작전을수행한다민족 국가였다. 내무인민위원회가 소수 민족을 죽이고 있던당시, 내무인민위원회 핵심 장교 대부분은 소수 민족이었다. 1937년과 1938년 상당수가 유대계, 라트비아, 폴란드계이거나 독일계였던내무인민위원회 간부들은 히틀러와 나치 친위대가 (당시까지) 시도한모든 행위를 뛰어넘는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학살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위와 목숨을 지키려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들은 국제주의(초민족주의)라는 윤리를 만들었고이는 일부 간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대공포 시대가계속되면서 그들도 속속 처형당했고, 대부분 러시아계로 교체되었다.
이즈라일 레플렙스키, 레프 라이흐만과 보리스 베르만처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폴란드 박멸 작전을 실행한 유대인 장교도 체포 후 처형당했다. 이것은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었다. 대공포 시대의대량 살인이 시작되었을 때, 고위 내무인민위원회 장교 약 3분의 1은 유대계였다.  - P194

대공포 시대가끝날 무렵,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과다 비율을 차지한 소수 민족은 스탈린이 그 가운데 하나인 조지아계뿐이었다.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정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계급투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재판에서 내려진 혐의처럼 소련으로 이주한 민족이 소련의 배신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경제 체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에 따라 외국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 P195

대공포 시대에 소련 지도부는 독일에 살던 유대인의 2배에 달하는 소련 국민을 처형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를 제외하면, 히틀러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러한 대량 처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전쟁 이전의 독일에서는 누구도 이런 일을 실행에 옮기지않았다. 제국 수정의 밤 이후에야, 유대인은 비로소 대규모로 독일의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나마도 학살이 목적은 아니었고, 당시 히틀러는 유대계 독일인들을 위협해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이 시기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유대인 2만6000명은 대부분 얼마 지나지않아 석방되었다. 1938년 후반에서 1939년까지 1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독일을 떠났다. - P199

또한 히틀러는 독일을 재무장하는 한편 전쟁 없이 최대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시민 600만명과 막대한 경화를 제공했다. 뮌헨 회담은 히틀러에게 시민 300만명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수산업 대부분을 선사했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국가로서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없애버렸고, 그에 따라 히틀러의 목적이 독일 민족에만 국한된다는 환상은 모조리 사라졌다. 체코 영토는 ‘보호국‘으로 독일 제국에 추가되었고, 슬로바키아는 나치의 감독을 받는 허울뿐인 독립국이 되었다. 3월 21일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합의를 강요했지만이번에도 거부당했다. 3월 25일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에게 폴란드 침공 준비를 명했다. - P203

거의 곧바로, 두 체제는 폴란드 파괴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끌어들여 소련과 싸우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자, 폴란드에 대한 나치와 소련의 말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히틀러는 폴란드란 베르사유 조약이 낳은 ‘비현실적인 창조물‘이라 했고, 몰로토프도 그 조약의 ‘추악한 후손‘이라고 규정했다. 공식적으로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협약은 단순한 불가침 조약일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동유럽내 나치 독일과 소련의 영향권을 정하는 비밀 의정서에도 합의했는데, 이 영향권에는 아직 독립국이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 P205

리투아니아,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들어가 있었다. 역설적인 사실은 폴란드가 불가침 조약이라는 명목 아래 독일과 비밀 계약을 맺었다는거짓 주장을 바탕으로, 소련 시민 10만 명 이상을 죽인 사건을 스탈린이 바로 얼마 전에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폴란드 박멸 작전은 독일-폴란드 공격의 대응책으로 설명되었다. 그러고는 이제 소련은 독일과함께 폴란드를 공격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합병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얻은 병력 및 무기를 이용해 폴란드 북쪽,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했다. 히틀러가 마침내 자신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 P206

1939년 8월과 9월, 스탈린은 동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도까지 보고 있었다. 그는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입지를 개선할 기회를찾아냈다. 이제 스탈린은 서쪽에서는 독일이 폴란드와 함께 자국을침공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경우, 제2전선을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련은 동맹국 몽골과 함께) 1939년 8월 20일 (몽골과 만주국 사이에 있는 분쟁 국경 지대 내의 (괴뢰 만주국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1939년 8월 23일, 베를린과의 관계를 회복한 스탈린의 정책은 도쿄를 노린 정책이기도 했다. 소련의 공격이 있고 사흘 뒤에 체결된 독일과 소련 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은 독일과 일본 간의 방공협정을 무효로 만들었다. 전장에서의 패배 이상으로, 나치-소비에트동맹은 도쿄에 정치적 격변을 일으켰다. 당시의 일본 정권은 붕괴했고, 다음 몇 달 동안 다른 여러 정부도 같은 길을 걸었다. - P206

독일이 일본 대신 소련을 동맹으로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지도부는 이미 북쪽 대신 남쪽으로, 소비에트 시베리아 대신중국과 태평양 쪽으로 확장한다는 데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베를린 간의 연합이 결성되면, 붉은 군대는 병력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최정예 부대를 단순한 자체 방어를 위해 북쪽 만주국에 배치해야 하고, 남쪽으로의 진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동아시아에 대한 재량권을 주었고, 일본은 히틀러가 새 친구를 빨리 배신하기만 바라게 되었다. 일본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준비 상황을 감시할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에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첩자, 스기하라 지우네가 임명되었다. - P207

1939년 9월 15일에 붉은 군대가 일본 군대를 물리쳤을 때, 스탈린은 자신이 바라던 결과를 온전히 달성할 수 있었다. 대공포 시대의민족 박멸 작전은 일본, 폴란드, 독일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이들이 연합해 소련을 포위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대공포 시대에 살해된 68만1692명은 이러한 포위 작전의 가능성을 줄이진 못했지만, 외교와 군대는 그 가능성에 영향을 주었다. 9월 15일이 되자 독일은 폴란드군의 전투 능력을 사실상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폴란드 연합의 소련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독일-일본 연합의 소련 공격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스탈린은 독일-폴란드-일본의 소련포위라는 공상을 독일-소련 연합의 폴란드 포위와 그에 따른 일본 고립이라는 현실로 바꿔버렸다. 소련 군대가 일본에 승리한 후 이틀이 - P207

지난 1939년 9월 17일, 붉은 군대는 동쪽에서 폴란드를 습격했다. 붉은 군대와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중간지대에서 조우해 공동 승리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9월 28일,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폴란드에 관한두 번째 협약을 맺었는데, 이번에는 국경과 친선 관계를 다룬 조약이었다.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독일의 공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20분,
폴란드 비엘룬시 한복판에 돌연 폭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어떤 사전 경고도 없이 이뤄진 공습이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군사전략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곳을 끔찍한 실험의 장소로 택했다. 현대식 공군력이 정밀 폭격으로 민간인 대부분을 공포에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것,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물론 가능했다. 교회, 시너고그, 병원, 이 모든 것이 불 속으로 사라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탄약과 총 70톤가량의 폭탄이 거의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숨진 이들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린 채 피란길에 올랐고, 도시를관리할 독일 행정관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시체가 더 많았다. 서부 폴란드의 수많은 마을과 도시도 같은 운명을 - P211

맞았다. 무려 158개나 되는 삶의 근거지가 폭격에 희생되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있던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들을 보며 "에이, 설마 우리 편 비행기겠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1939년 9월 10일은 유럽의주요 도시 중 하나가 처음으로 적국 공군에게 아주 체계적이고 정밀한 폭격을 당한 날로 기록되었다. 이날 바르샤바 습격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는 17세밖에 안 된 독일 소년도 있었다. 그달 중순까지 폴란드 정규군은 대부분 무릎을 꿇었고, 수도만 겨우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9월 25일, 히틀러는 바르샤바가 항복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날 약 560톤의 폭탄과 72톤의 소이탄이 퍼부어졌다. 정식 전쟁으로 인정받을 수 없던 이 전쟁의 초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이자 유럽의 역사적 수도 하나가 폭격에 무너져 내렸고 도합 2만5000명의시민(그리고 6000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9월 내내 독일 국방군을 피해 달아나던 피란민들의 긴 행렬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독일전투기 조종사들은 이들 위로 유유히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관총을 쏴대는 일에 재미가 들려 있었다. - P212

10월 4일,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은 새로운 공동 국경지대를 정한 추가 협약에 합의했다. 폴란드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후 독일은 남은 폴란드 지역을 무력으로 합병하고, 나머지 지역은 동방 총독부를 세워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이곳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이라는 불청객들을 집어넣는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이 될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동부 어딘가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같은 곳에따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총독부의 수장이된 히틀러의 전 변호사 한스 프랑크가 분명하게 밝혔듯 식민지 주민들은 1939년 10월 말에 공표된 두 가지 질서에 따라야 했는데, 하나는 앞으로 모든 치안은 독일 경찰이 책임진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행동이든 독일과 독일인의 이해에 반하는 행동을 한 폴란드인은 독일 경찰이 그를 즉결처분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프랑크는 폴란드인들이 이내 "폴란드에 미래 따윈 없음"을 깨닫고 독일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 P227

보여주로기의 관점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힘러는 이 기획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만만치않은 일이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인의 땅이었고, 폴란드에는 소수민족이라고 부를 만큼의 독일인도 없었다.  - P233

이런 식으로 스타로빌스크의 폴란드인 수감자 3739 명이 살해당했다. 유제프 찹스키의 지인과 친구들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찹스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식물학자, 임신한 아내에게 자신의 두려운기색을 숨기려 애쓰던 경제학자, 자신이 드나드는 카페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일로 이름난 바르샤바의 어떤 의사, 희곡과 소설을 외워사람들에게 암송해주던 한 중위, 유럽연합의 가능성에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하던 변호사, 이외에도 모든 기술자, 교사, 시인, 사회복지 - P245

사, 기자, 의사, 군인들이 있었다. 전부 이곳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오직 찹스키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그는 다른 수용소에 있던 몇몇 사람과 함께 또 다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마침내 살아남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1939년에서 1940년에 소련이 폴란드인 수용소를 설치하는 코젤스크의 옵틴수도원을 무대로 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꼽히는 이 결정적 장면은 젊은 성자와 수도원의 대심문관이 신이라는 존재 없이 도덕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를 두고 나눈 이야기다.
만약 신이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1940년, 소설 속의 이대화가 실제로 바로 그 장소에서 이뤄졌다. 수도원을 책임지던 수도승 몇몇은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심문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이들은 바로 저 질문에 대한 소련의 대답을 몸소 보여주는 자들이었다. 소련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만이 인간의 진짜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반대로 여러 폴란드 장교는 비록 의식하진않았지만 이와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어떤 짓도 허용되는 이곳에서는 신이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안식처다. 그들은 수용소를예배당으로 여겼으며, 또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 P246

말로 앞으로 있을 스탈린주의의 엄청난 문명적 탈바꿈의 징조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수도원 대심문관의 자리를 현실에서 이어받은 코셀스크 심문관들의 우두머리는 이를 아주 섬세하게 포착했는데, 그의 표현처럼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철학의 문제였다. 결국 소련은 자신들의 것을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동부 폴란드에 소련이 쏟아부은 비용과 자행한 행동들에 대한 비난 역시 아주 간단한 대꾸로무마시킬 수 있었다. ‘지금 그 지역이 어느 나라 땅이지?‘ 수용소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소련 문명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십 년 뒤 당시 그들의 말쑥하고 깔끔한 모습과 자부심을 떠올렸던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농부들의 기억에서처럼, 그들은 여느소련인들처럼 살지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적어도 이토록 갑작스레 또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소련인들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다른소련인들과 마찬가지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죽음뿐이었다. 여러 폴란드 장교는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군인들보다 더 강하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무기를 빼앗긴 터였으며, 보통 두 사람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다른 한 사람에게 사살당해 누구도 그 시신을찾을 수 없을 법한 장소에 묻혀 있었다. 이로써 그들은 비로소 소련역사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소련인과 함께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영원한 침묵으로 말이다.  - P248

수감자들은 학살 장소로 끌려가면서 트럭 밖으로 노트나 일기장을 던졌는데,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그것을 주워 가족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이것은 일종의 폴란드식풍습이었던 터라 그들이 지나간 길에서는 쉽사리 수많은 노트를 찾아볼 수 있었다. 소련의 세 수용소에 있던 죄수들과 달리 이 노트의주인들은 자신들이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코젤스크, 오스타시코프, 스타로빌스크에 갇혀 있던 이들도 수용소를 떠날 때 버스 밖으로 노트를 던지기도 했으나 그곳에는 소련이 우리를어느 장소로 보내는지 모르겠다" 등의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과 독일의 차이였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동쪽의 소련은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전체적으로 비밀스러운일 처리를 바랐다. 이와 달리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의 독일은 신중한 일 처리를 원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심지어 그러려던 때조차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했다. - P264

AB 악치온의 희생자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을 스스로, 혹은 가족들이 담담히 받아들이도록 하고자 애썼다. 죽음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저마다 죽음을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에치스와 하브로프스키는 "폴란드땅을 적신 피는 폴란드를 더 강하게 하리라. 자유롭고 위대한 폴란드의 복수를 키워내리라"라고 적었다. 자신을 심문하던 자들을 비난했던 리샤르트 슈미트는 이와 달리 어떤 앙갚음도 없기를 바랐다. "아이들에게 복수하라 말하지 마시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뿐이니 마리안 무신스키는 그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모두 사랑해." - P265

AB 악치온으로 죽어간 이들 중 몇몇은 앞서 소련에 포로로 끌려간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소련과 독일이 대 폴란드 엘리트 정책을 서로 비슷하게 맞추거나 조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상이된 이들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소련은 계급투쟁 혹은 계급전쟁이라는 구실을 대 자신들의 체제에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독일 역시 열등한 인종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긴 했으나 어찌됐든 새로 얻은땅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양국의 정책은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었다. 차이라면 그에 동반되는 강제이주 그리고 대량학살이 더 많고 적은의 정도 차이뿐이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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