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어머니 없이는, 어머니 대지 없이는 어떤 가부장제도 존재할 수 없다(Ehrenreich/English, 1979:7~8). 자본주의가 대규모의 정복과 식민지 강탈에 기초하여 세계체제로 발전하고, 세계시장이 등장하면서(Wallerstein, 1974), 새로운 가부장은 착취하고싶은 대상을 외부화하거나 혹은 외부로 축출할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는 더 이상 경제나 사회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았다. 식민지는 ‘문명화된 사회의 밖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유럽 정복자와 침략자가 ‘침투한 그 ‘처녀지‘와 같이, 이들 토지와 주민도 ‘자연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야생의 야만적인 자연으로, 남성 문명인의 착취와 이용을 기다리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 P176

가부장과 자연 사이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이원성, 혹은 양극화를 통해 마침내 철저하고 영구적으로 파괴적인 힘을 발전시킬 수 있게되었다. 이제 과학과 기술은 남성이 자신을 여성에게서 만이 아니라자연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생산력이 되었다.
머천트는 유기체로서의 자연을 파괴한 것 - 그리고 근대과학과기술이 발전하면서, 남성 과학자가 새로운 고위 성직자로 성장한 것은 약 4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마녀사냥 기간 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적 공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나란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 P177

근대 유럽 가부장은 처음에는 아메리카, 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볼리비아, 멕시코, 페루의 광산에서 금과 은을, 다른영토에서 ‘원자재‘와 사치품을 추출해내면서 유럽 어머니 대지로부터자신을 독립시켰다. 한편 이들은 마녀와 함께 여성의 피임과 출산통제에 대한 지식을 박탈해가면서, 노동력 생산 면에서 유럽여성에게 의존했던 것에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또한 아프리카의 남성과 여성을 노예제 아래로 종속시켜서 아메리카와 카리브의 대농장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 P177

이런 ‘발전‘의 법칙은 언제나 모순적인 것이지, 점진적인 것이 아니다. 일부의 발전은 다른 쪽의 퇴보를 의미한다. 일부의 ‘진화‘는 다른 이들에게 ‘퇴화‘를 의미한다. 일부의 ‘인간화는 다른 이들의 ‘비인간화‘를 의미한다. 일부의 생산력 발전은 다른이들의 저발전과 퇴보를 의미한다. 일부의 발전은 다른 이들의 추락을의미한다. 일부의 부는 다른 이들의 빈곤을 의미한다. 한 방향으로의발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약탈적이고 가부장적인생산양식은 상호적이지 않고 착취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모두를 위한 전반적인 진보, ‘통화침투(낙수효과)‘를 통한 발전, 모두를 위한 발전은 가능하지 않다.
엥겔스는 진보와 퇴보 사이의 이런 대립적인 관계를 사유재산의등장과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 때문이라고 했다.  - P178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이, 지배계급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회 전체에게도 좋은 것이 되어야한다"(Engels, 1976:333).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 전략의 논리적 결함이다. 모순적이고 착취적인 관계에서, 착취자의 특권이 모두의 특권이 될 수는 없다. 중심부의 부가 식민지 착취에 기초한 것이라면, 식민지는 자신도 식민지를 갖지 않는 이상 부를 획득할 수 없다. 남성의 해방이 여성의 종속에 기초한 것이라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할 수 없다. 여기에는타인을 착취할 권리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을 위한 페미니스트의 전략은 이런 퇴보적 진보의 관계들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남성의여성에 대한 착취, 남성의 자연에 대한 착취, 식민주의자의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를 모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착취가 일부 사람들의 전진(발전,
진화, 진보, 인간화 등)을 위한 조건으로 남아있는 한, 페미니스트는해방 혹은 ‘사회주의‘를 말할 수 없다. - P179

마녀사냥이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단순히 새로운자본주의 세력에 직면하면서 쇠퇴한 구질서가 낳은 것이거나 시대를초월한 남성 가학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여성의 반란에 대해 새로운남성 지배 계급이 내놓은 반응으로 보인다. ‘쫓겨난‘ 가난한 여성, 즉, 생계수단과 기술을 박탈당한 이들은, 박탈한 이들에게 맞서 싸웠다.
마녀는 ‘마녀의 안식일에 주기적으로 만나는 조직된 분파였으며,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주인과 농노가 없는 새로운 자유로운 사회를 이미 연습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 여성이 마녀임을 부인하면서 다른 모든 혐의를 부인해도, 그녀는 고문을 받고 결국은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마녀재판은 꼼꼼하고 용의주도한 법적 과정을 따랐다. 개신교 국가들에는 교회 밖에 마녀재판을 전담하는 위원회와 판무관이 있었다. 사제는 법정과 계속협력했고, 판사에게 영향을 미쳤다. - P188

산파를 마녀로 기소하고 화형에 처하는 것은 근대 과학의 등장과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의술이 전문직이 되었고, 의학이 ‘자연과학‘으로발전했으며, 과학과 근대 경제가 발달했다. 마녀사냥꾼의 고문실은 실험실이었다. 이곳에서 인간의 몸, 주로 여성 몸의 조직, 구조, 내성 등을 탐구했다. 근대 의학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성 헤게모니는 부서지고, 망가지고, 찢기고, 훼손되다가 마침내 화형을 당한 수백만 여성의몸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는 계획적인 분업을 통해 조직적인 마녀 대학살과 테러를 진행했다. 교회에서 파견된 이들은 마녀를 식별해내고, 신학적논리를 제공하면서 심문을 주도했다. 국가의 ‘세속 부대‘는 고문을 수행하고 마지막으로 마녀를 장작더미 위에서 처형하는 일을 했다.
마녀의 처형은 근대 사회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지, 통념대로, 비합리적인 ‘어두운‘ 중세의 유물 때문은 아니었다.  - P192

여성과 자연에 대한 이 새로운 과학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배를 통해 이득을 본 계급은 발전하고 있던 개신교, 상인 자본가 계급, 광업기업가, 의류업계 자본가 등 이었다. 이 계급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능력에 대해 갖고 있던 자율성을 와해시키고 여성들이 더 많은 노동자를 낳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비슷하게 자연도 이 계급이 착취하여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거대한 저장소로 바꾸어 버렸다.
따라서 교회, 국가, 신흥 자본가 계급, 근대 과학자는 협력하여 여성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종속시켰다. 19세기의 연약한 빅토리아 여성은 이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조해낸 여성적 자연상을 따라 폭력적 수단을 통해 만들어낸 산물이다(Ehrenreich, English, 1979). - P202

이들 대농장주의 동력은 카리브제도에서 프랑스인 혹은 영국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득을 올리는 것이다. 스톨러는 여성에 대한네덜란드 식민지 정책의 변동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이동력이라고말한다. 식민지 기록에 따르면, ‘결혼 관계, 질병, 성매매, 노동 분규 등의 문제는 수익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첫 10년 동안기혼 노동자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큰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결혼 관계를 취득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Stoler, 1982:97).
확실히, 여성을 창녀로 만드는 것이 값싼 방법이었다. 그러나 결국북부 수마트라 여성 노동자의 거의 절반이 성병에 걸려 회사 비용으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하게 되자, 농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결혼을 장려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되었다. 이것이 1920년대와 3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첫 단계에서 이주 여성은 대농장에서 모든 힘든 일들을 충분히해냈다. 그러나 이들이 가정주부가 되어감에 따라 여성 주민은 농장의 임금노동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 P218

네덜란드 식민주의자의 경우, 이윤을 창출한다는 철저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자신의 고국에 있는 ‘문명화된 여성과 수마트라의
‘야만적‘ 여성에 대한 모순적인 가치관과 정책이 이윤을 보장해주는최고의 메커니즘을 이루었다. 두 집단의 여성에게 정 반대로 대조되는두 가지 가치관을 적용했지만, 이것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성매매는 여성을 창녀로 모집하는 것이 더 이상 이득이 되지 않을 때에만 공론화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네덜란드 가정주부의 등장을 주목해야 한다. ‘고국에서 가족과 가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 것은 네덜란드 식민지의 농장 노동자 사이에서 가족과 가정을 파괴한 것과 그저 일시적으로 겹쳤던 것이 아니라, 인과 관계로연결되어 있었다. - P219

많은 경우, 농장 경영자는 스스로 법을 정하여 완고하게 저항하는 여성을 잔인하게 벌주었다. 헤레로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카리브제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여성은 식민화 과정에서 무력한 희생자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식민지 생산관계 내에서 자신의 상대적인 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 힘을 자신의 입장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독일 농장 경영자의 말에서 주목할 점은 출산파업을 한 것은 헤레로 여성인데, 농장 경영자는 헤레로인(남성)만을 언급한다. 그들의 보고서에서도 식민지의 백인 남성은 종속민 여성이 매우 주체적이고 주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모든 ‘원주민‘은 ‘야만인‘이고 야생의 자연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야만적인 것은 ‘원주민‘ 여성이었다. - P225

가정성과 개인화 경향은 19세기와 20세기 자본주의중심부에서 좋은 여성, 즉 어머니와 가정주부로서의 여성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되는 데 확실히 큰 영향을 미쳤다. 가정이 여성의 영역, 소비와 ‘사랑‘의 사적인 영역이 되면서, 남성이 지배하는 생산과 축적의 영역에서 배제된 은신처가 되었다. 다음에는, ‘사랑‘과 소비에 주로 관심이 있고, 남성 ‘부양자에게 의존적이고 가정화되고 개인적 소유가 된 여성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이 어떻게 보편화되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이런 여성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처음에는 제대로 된부르주아 사이에서, 이후에는 이른바 소부르주아로, 그리고 마침내 노동계급 혹은 프롤레타리아까지 점차로 확대되었다. - P232

모두 알다시피, 여성과 어린이가 초기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상당규모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값싸고 가장 다루기 쉬운 노동력이었다. 어떤 노동자도 그토록 착취당하지는 않았다. 자본가는 아이가 있는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임금도 마다않고 일할 것임을 잘알았다. 자본가에게 여성은 남성보다 문제가 덜 되었다. 직인 협회나길드부터 내려온 조직화의 전통을 가진 기술직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아직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노동력은 저렴했다. 노동조직에서 여성은 일찍이 내쳐졌고, 아직 새로운 조직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협상력도 갖지 못했다. 자본가에게는 여성을 고용하는 것이 더이득이 되고 또 덜 위험했다. (1830년 무렵)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고상업 자본주의가 쇠퇴하면서, 여성과 아동 노동에 대한 지나친 착취가 문제가 되었다. 과로와 경악할만한 노동 조건 때문에 건강을 해친여성은 건강한 자녀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강한 노동자와 군인을 키워낼 수도 없었다. 19세기 동안 몇 차례의 전쟁을 겪고나서야 인류는이런 사태를 깨닫게 되었다. - P235

자본축적과정에서 가사노동의 기능은 페미니스트가 최근 광범하게 논의해왔다. 여기서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가정주부는자본가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외부화, 혹은 외부영역화한 것이라는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여성 노동이 자연자원처럼, 공기나 물처럼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가정주부는 이 숨은 노동자의 완전한 원자화와 파괴를의미한다. 이는 여성의 정치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의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정주부와 임금노동 부양자의 관계는 자유롭지 않은 노동자가 ‘자유‘ 프롤레타리아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는 가정주부의 자유롭지않음에 기초해 있다.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여성의 가정주부화에기초해 있다. - P245

따라서 힘이 약한 백인 남성도 자신의 식민지‘, 즉 가족과 가정에길들여진 가정주부를 갖게 되었다.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마침내 ‘문명화된 시민의 지위에 오르고, ‘문화국가의 온전한 구성원이 된것이 그 표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장에는 같은 계급 여성의 종속과가정주부라는 희생이 필요했다. 부르주아 법이 노동계급까지 확대되는 것은 무산자 가정에서도 남성이 지배자이자 주인이 된다는 것을의미했다.
식민화와 가정주부의 두 과정이 밀접하게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있다고 하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외부 식민지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
전에는 직접 식민지를 통해, 현재는 새로운 국제노동분업을 통한 착취가 없이는 남성 부양자가 부양하는 핵가족과 여성이라는 ‘내부 식민지‘가 수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 P245

구 국제분업은 식민지 혹은 식민지에서 원료를 생산하고, 이원료가 유럽과 미국, 나중에는 일본 등 산업화된 국가로 수송되고, 공산품으로 바뀌어 산업화된 국가들 자체에서 판매되거나 수출되는 것을의미했다. 이 국제분업 초기에 기계를 통해 생산된 상품, 특히 모두 기계로 제작한 직물이 강제로 식민지 시장에 던져지기도 했다. 그럴 경우, 공산품 직물이 더 저렴하기 때문에 지역 고유의 직물업이 몰락하게 되었다. 인도 직물산업이 영국의 공산품 의류가 들어오면서 파괴된것은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예이다(Dutt, 1970). - P248

그러나 1970년대에 유럽, 미국, 일본의 대기업과 다국적기업의 경영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경기호황의 시기가 끝나고 있음을알게 되었다. 그동안 계속되는 경제 성장은 산업화된 국가의 국민에게 하나의 도그마로 홍보되었고, 국민은 이를 당연시했는데, 이제 그런 시대가 끝나게 된 것이다. 경영자들은 만약 이 경기 후퇴가 일시적위기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시대 전반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세계경제체제, 혹은 국제노동분업을 바꾸어 지속적인 성장이자본주의 국가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절박했다.  - P249

이 새로운 모델은 노동집약적인, 즉 노동비가 주로 많이 드는 생산과정은 식민지로, 이른바 개발도상국, 혹은 제3세계 등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공장 전체를이 국가들로 옮겨서 임금이 낮은 제3세계의 노동자가 서구의 대중을위한 공산품 소비재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개발도상국의농업에 신기술을 도입하여 근대화하고, 이를 통해 부유한 국가로 수출될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도록 했다(Fröbel et al, 1980).
제3세계 국가의 이런 부분적 산업화로 자유무역지대이거나 자유생산지대 혹은 세계시장공장들에 세워진 산업에 대해 제3세계 국가가 큰통제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한국, 싱가포르,
멕시코, 스리랑카, 태국 등에 자리한 공장은 대개 미국, 독일, 일본의 다국적 기업이었다. 특히 옮겨간 산업의 생산과정은 여전히 노동집약적이어서, 아직 높은 수준으로 합리화되지 않은 분야였다.  - P249

말레이시아에 있는 미국 반도체 회사인 인텔의 인사담당관은 이렇게말한다. ‘우리가 소녀들을 고용하는 것은 이들이 에너지가 좀 덜 들고,
좀 더 규율이 있으며, 다루기 쉽기 때문이다‘(Grossman, 1979; 2). 제3세계투자의 아이티 지부는 독일 투자자를 유인하기 위해 아름다운아이티 여성을 보여주는 홍보물을 만들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넣었다. ‘당신의 독일 마르크를 불려줄 더 많은 노동력이 여기 있다. 미화1달러만 있으면, 여성은 당신을 위해 8시간 동안 즐겁게 일할 것이다.
그녀의 수백 명의 친구도 그렇게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Fröbel et al,
1977:528, 영어번역은 저자).
이 광고에는 성차별주의가 분명하게 깔려 있다. 정부가 포주처럼젊은 여성을 외국 투자자에게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실,
성매매는 관광산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제3세계 국가에서 기업운영계획의 일부이기도 하다. - P257

여성을 개발에 포함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여성을 이른바 소득을유발하는 활동, 즉 시장지향적인 생산으로 진입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이 자신의 자급 생산을 확대하는 것, 토지에 대해 더 많은권한을 갖도록 노력하고, 좀 더 많은 음식, 더 많은 옷 등 자신의 소비를 위해 좀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발 전략에서 소득은 현금 소득을 의미한다. 현금 소득은 여성이 시장에 팔 수 있는 것을 생산할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 제3세계 가난한 여성 사이에서 구매력이 낮기 때문에, 그들은 구매력이 있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생산해야 한다. 구매력 있는 이들은 자국의 도시나 서구에서 산다. 여성노동을 개발에 포함시키는 전략은 수출 혹은 시장지향적 생산으로 향하게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제3세계 여성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구매할 수 있는 것을 생산하게 된다. - P259

이 전략의 또 다른 특징은 제3세계 여성을 노동자가 아니라 가정주부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으로 규정된다. 가정주부 이데올로기와 핵가족 모델이 진보의 표식으로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하는 모든 노동, 그것이 공식 부문이든 비공식부문이든 간에, 여성의 모든 노동을 보조적 일, 여성의 소득을 이른바 주된 부양자‘ 남편의 소득을 보조하는 소득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가정주부의 경제 논리를 통해 노동력 비용이 크게 줄었다. 이것이 국제자본과 그 대변인이 오늘날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전략은, 앞서 본 것처럼,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와 20세기에 처 - P259

음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가정주부는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를만들어 내기 위한 필수적인 보완제였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노동자가
‘일하지 않는‘ 가정주부를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통해) 감당할 수 있었던 반면에, 제3세계 남성 다수는 가정주부가 ‘일하지 않고 집에 머무를 수 있게 해줄 만한 지위를 절대 가질 수 없었다. 여성을 위해 소득을 유발하는 전략을 쓴다는 것은 제3세계 여성 대다수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이미지에 기초한 발상이다. 카리브제도에서는 남성 부양자 가장이 없는 가구가 전체의 3분의 1 이상이다(Reddock, 1984 참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특히 시골 지역에서 여성 가장의 가구, 여성이 경제를 책임지는 가구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Youssef/Hetler, 1984). 그 이유로 수출을 위한 환금작물 생산으로의 변화, 농업의 기계화, 가난한 사람 중토지 상실한 사람이 증가하면서 생긴 토지보유시스템의 변화 등을 들수 있다.  - P260

생산자로서의 여성과 어머니이자 소비자로서의 여성을 분리하는것은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신국제분업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다. 부유한 산업화된 국가에서 여성은 점점 더 ‘공식적 분야‘에서 쫓겨나면서, 주로 가족을 연상시키는 존재가 된다. 여성이 남편과 자녀를 위한 ‘재생산‘ 노동을 하고 소비하는 것이 그들의 ‘타고난‘
운명이 된다. 이에 반해 제3세계 여성의 소비자와 출산자로서의 역할은 바람직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소모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60년대 말부터 서구의 정부들, 특히 미국과 유엔조직들, 그리고 비정부기구들까지 내놓은 선언문을 살펴보면, 제3세계 여성을 잠재적인 ‘번식자‘ 와 소비자로 보는 것은 전 세계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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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매번 새롭고 다양해서 해마다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벌써 14회라니 그 무섭다는 중2의 나이가 되었네.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정선임작가의 요카타‘가 좋았다. 무엇보다 잘 읽혔고, (읽기 어려운 소설들이 많아지고 있다.) 무겁게 끌고 가지 않으면서 여운이 깊다.

흑점의 배경이 검붉은 빛에서 노을빛으로, 그리고 복숭앗빛으로 점차 옅어진다.
외출복을 입은 채 이부자리도 없이 누워 있다. 두 시간 전 일어나 집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 다녀왔다. 미사를 빼놓지 않고, 기도를 오래 드리는 내가 다들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겠지만엘리사벳 수녀의 끈질긴 권유에도 세례는 받지 않았다. 깨어 있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곳이어서 성당을 좋아한다. 이렇게 눈꺼풀 안쪽을 들여다보다 설핏 잠이 들기도 한다. 낱말 공부를 하다가도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으면 진이 나를 흔들어 깨우곤 한다. 눈꺼풀 안쪽의 색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본적은 없다. 아버지, 순덕이와 정순이, 남편들, 그리고 진에게도, 동이 완전히 트자 흑점은 더 선명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에서 시작되어 길게 늘어진 검은 실처럼 움직인다. 마치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누군가의 그림자 같다. - P205

고개를 돌리다 진이 벽에 오려붙여놓은 신문기사를 본다. 모르는 글자를 건너뛰어 ‘서연화‘ 이름 석 자를 찾는다. 이름 옆 괄호안 ‘100‘이라는 숫자를 쳐다본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웃고 있다. 방안에 거울을 두지 않은 지 오래다. 내 모습을 볼 기회가 없어서인지 사진은 볼 때마다 낯설다. 작은 사진인데도 눈가와입가에 주름이 선명하다. 바닷바람을 맞아 까맣게 탄 얼굴은 검버섯으로 뒤덮였다. 하얗게 센 머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굽은 등. 정말 영락없이 백 살의 노파다.
백 살이나 아흔여섯 살이나 그게 그거지. - P208

"바다는 똑같겠지. 바다는 변하질 않으니까. 그죠?"
이 말에도 굳이 대꾸하지 않는다. 라면을 다 먹고 고말순이 돌아간 뒤 다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미역 줄기를 찢는다. 난센스 퀴즈 코너가 끝나면 진행자는 상식이나 역사 문제를 내곤 한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해 준비한 퀴즈입니다. 대표적인 신여성이죠. 나혜석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1번 수원, 2번 부산,
3번 인천, 4번 밀양 정답을 아시는 분은 지금 문자를 보내주세요."
본래는 별 관심 없이 흘려듣지만 인천과 여성이라는 말에 귀를기울인다. 정답은 1번 수원이었다. 진행자는 답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혜석의 생애를 들려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죽었지만 파리며 독일이며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후지타의 서재 한쪽 벽면에 붙어 있던, 다다미 넉장 반 정도크기의 커다란 세계지도가 떠오른다. 후지타는 자신의 고향 나가사키의 위치를 알려주며 붉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뒤로 나는서재에 들어갈 때면 한반도와 나가사키 사이에 놓인 한 뼘 정도의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바다 너머의 끝도 없는 바다들을. - P213

과거의 기억은 짙은 해무가 낀 것처럼 부옇다. 머릿속에서는인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진처럼 윤곽만이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촉감으로, 냄새로, 통증 같은 것으로 몸이 선명하게 기억하는순간이 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도시락을 건네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발갛게 달아올라있던 볼의 열기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낮이었고 주위가 너무 환해 빨리 땅거미가 져 어두워졌으면 했던 마음도 갑자기 뺨이 불타듯 뜨거워져 손을 대본다. 다듬지 않은 미역처럼 거칠고 해삼처럼 흐물흐물하다. - P224

이상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석 줄짜리 시였다. 가운데 부분이 기억나질 않았다. 유독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닳아 있는 책 한 권을 찾아내 펼쳤다. 후지타가 자주 읽던 시집이었다. 종이 위 검은 점과 선의 행렬로만 보이는 그것들의 의미를 끝내 알지 못했다. 몰래 성경을 숨겨놨던 후지타는 전쟁이 길어질 무렵,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주 기도했다. 후지타가 재산을 처분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동네에 퍼져 있었다. 그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면서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날은 조금이었고, 마침 낙지를 잡기에 좋은 물때였다.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양동이를 들고 개펄로 나갔다. 개펄을마구 헤집으며 바지락을 했고, 낙지와 게와 같이 살아 있는 것들로 양동이를 가득 채웠다. 그러다 모두 쏟아버리고, 꿈틀거리는 낙지와 도망가는 게들을 지켜봤다. - P228

이상했다. 살아서 자꾸만 움직이는 것이.
양동이를 던지고 개펄에 털썩 주저앉아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노을빛을 닮은 눈꺼풀 안을 들여다보면서 흑점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개펄에서 걸어나오다 뒤를 돌아보니 푹푹 빠지며 걸어왔던 발자국도, 흉하게 파헤쳐진 자리와 들쑤셔진 자국도 사라져 있었다. 밀물이 밀려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죽은 것들도, 살아 있는 것들도 바다는 휩쓸어갔다. - P228

서재에 있던 책들은 남김없이 내다팔았고, 그후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바다가 데려간 것은 잊었고 내어준 것을 팔아 살았다. 가끔 이름이 불릴 때마다 구멍에 숨어 있다 잡혀 나온 게들처럼 당황했다. 하지만 또다시 구멍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었지. 요카타, 요카타.
만조다. 물이 들어오고 있다. 보행로 위에서 관광객 하나가 새우깡 봉지를 뜯어 마구 뿌리자 갈매기떼가 몰려온다. 새우깡은바닷물로 낙하하기 전에 갈매기 입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벼운 습자지 한 장 같은 오늘을 서둘러 뜯어내고 아침을 기다리고 싶다. 내일이면 오이소박이는 좀더 익어 맛있을 것이다. 해가 지기전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다시 눈을 감고 그림자를 쫓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 P229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익숙한 장소에서도 방향을헷갈릴 때가 많은데 혼자 여행을 간다는 건 당연히 길을 잃겠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또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우왕좌왕하다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곳에 도착할 테니. 다만 알고 있는 것은 다음에도기꺼이 길을 잃고 싶다는 거다. 쓰지 말걸 후회도 하다가 결국에는 소설을 써서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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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이름을 갖는다. 들판에서 밀의 환상을 봤던 소년은 이오시프 소볼레프스카였다. 그는 굶어 죽었다. 1933년, 기근에 시달리던우크라이나에서 어머니와 다섯 형제와 함께. 그때 살아남은 그의 형제 하나는 1937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죽었다. 오직 한 사람, 여동생 한나만이 끝까지 살아서 그와 그의 희망을 들려준다. 스타니스와프 비가노프스키라는 청년은 자신의 체포된 처, 마리아와 반드시재회하리라 내다봤다. "지하에서 말이야." 그들은 1937년 레닌그라드에서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총살되었다. 자기 결혼반지에 대해 쓴 폴란드 장교는 아담 솔스키였다. 그의 일기는 그가 1940년에 총살된 카틴 숲이 파헤쳐졌을 때 그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다. 아마 결혼반지도 숨겼을 테지만, 그를 쏴 죽인 병사들이 뒤져서 챙겨갔을 것이다.
1941년, 포위와 굶주림의 레닌그라드에서 간단한 일기를 남긴 열한 - P670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타냐 사비체바였다. 그녀의 누이 중 한 사람은얼어붙은 라도가 호를 건너 살아남았다. 타냐와 그 밖의 가족 전부는 죽었다. 1942년 벨라루스의 죽음의 구덩이에서 아빠에게 편지를썼던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는 유니타비시니아츠카야였다. 그녀옆에서 편지를 썼던 그녀의 어머니는 즐라타였다. 모녀 모두 목숨을잃었다. 유니타의 편지 마지막 구절은 "이제 진짜 마지막 작별 인사예요. 입맞춤을,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였다.
모든 죽음은 숫자가 되었다. 이오시프에서 유니타의 죽음 사이에 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블러드랜드에 1400만 명 이상의 피를 뿌렸다. 살육은 스탈린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내린 지령에 따른 정치 프레임으로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300만명 이상의 목숨이 거둬졌다. 그리고 1937년과 1938년, 스탈린의 대공포가 이어졌다.  - P671

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둘을 떼어놓고 비교하기보다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식으로 비교하는 게 필수적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1951년에 시도하고, 두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이름 아래하나로 합쳐 봤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그녀에게 "잉여인간"이라는관념을 일깨워주었다. 홀로코스트 역사의 개척자인 라울 힐베르크는나중에 그녀에게 관료 국가가 20세기에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제거했던지를 보여주었다. 아렌트는 현대의 잉여인간에 대한 지워지지 않을 상을 제시했으니, 대중사회를 박살내고, 진보와 행복의 이야기 가운데 죽음이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런 상이 떠오른다고 했다. 학살의 시대에 대한 아렌트의 오래 남는 상을 풀이하면 이랬다. 사람들(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이 서서히 인간성을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먼저 대중사회의 익명성 속에서, 다음에는 집단수용소에서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며, 나치와 소련의 학살을 역사적으로 비교하기 전에 정확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 P672

그러나 집단수용소에서의 살육이라는 이 두드러진 예는 아렌트의 현대사회 개념과는 큰 관련이 없다. 그녀의 분석은 우리의 주의를 베를린과 모스크바로, 즉 전체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멀리 떨어진 국가들의 수도로 돌리며, 각각 그 시민들에게 벌인 짓에 주목하도록 한다. 그러나 소련 전쟁포로들은 두 가지 체제의 상호작용 때문에죽었다. 아렌트의 전체주의론은 현대 대중 산업사회 내의 비인간화에 주목할 뿐,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권력 열망이 역사적으로 중첩되었을 때의 효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 병사의 결정적 순간은 그들이 붙잡혔을 때였다. 그때 그들은 소련 상급 장교와 내무인민위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일군과 친위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그들의 운명을 한 현대사회의 진보적 소외 현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것은 두 세력의 충돌, 소련 영토에서 펼쳐진 독일의 범죄적 정책의 산물이었다. - P673

1941년 하반기에 겨우 며칠 만에, 독일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대량 사살했는데 그 숫자는 그들의 집단수용소에서죽어간 숫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가스실은 집단수용소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안락사" 프로그램을 위해 의료 살인 시설로 쓰려던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동부의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가스차량이 등장했고, 헤움노에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땅의 유대인 학살에 가스 차량이 쓰였다. 그다음이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의 영구 가스 시설이었다. 가스실은 점령된 소련 땅에서 유대인 대량학살 정책을 위해 쓰이는 한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 P674

그러나 의도적인 대량학살 프로그램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살인 공장과는 달리). 비록 일부 유대인이 정치범으로 수용소형을 선고받고, 또 일부는 노동자로서 그곳에 가긴 했지만, 집단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유대인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들은살아남은 유대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집단수용소가 유명해진또 다른 이유다. 그들은 수용소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일하다가 끝내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끝 무렵에 들어와 바로 해방된 사람들이. 유럽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라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 등지의구덩이, 가스 차량, 살인 공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아렌트가 본 대로, 아우슈비츠는 산업적인 집단수용소와 살인 공장의 보기 드문 조합체였다.  - P675

이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인을 수용했고, 다음에는 소련의 전쟁포로들을, 그러고 나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수용했다. 살인 공장이 기능에 추가된 뒤, 일부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은 노역을 위해 분류되고, 지칠 때까지 일하고, 가스실로 갔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아렌트가 주장한, 죽음으로 끝나는 진보적 소외의 이미지에 걸맞을 수도 있다. 그것은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쓴 글들과도 구색이 맞았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 등등의 글과 그러나 그런 체험담들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런 체험은 홀로코스트의 일반 진행 과정을 포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조차 그랬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죽었고, 수용소 내부 생활을 전혀 해보지 못했다.  - P676

그 수용소에서 가스실로의 이동은 아우슈비츠 복합 시설의 역사에서 적은 부분만 차지했기에, 이를놓고 홀로코스트의 대량학살의 일반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분명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주요 장소이기는 하다. 학살된 유대인의 대략 여섯 명 중 한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은 마지막으로 가동했던 살인 공장이며,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최고 수준까지 발휘한 시설도 아니었다. 가장효율적인 총살 부대나 아사 정책이 사람들을 더 빠르게 죽일 수 있었다. 트레블린카도 아우슈비츠보다 처리 속도가 빨랐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유대인 집단인 폴란드 유대인과 소련 유대인을 학살하는 주된 장소도 아니었다.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 P676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밖에 안 되었다.

아마도, 아렌트의 말처럼, 나치와 소련의 대량학살은 현대사회에내재된 뭔가 심층적인 어두움의 상징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현대성이나 그 밖의 무엇무엇에 대해 그런 이론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확실히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 P677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블러드랜드에 대하여 말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유럽의 대량학살 시대에 대해서는 이론이 실제를 넘어서고, 오해가 두드러진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참으로 많은 지식을 가졌던, 그러나 그 범위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2차 문건에 한정된)와 달리, 우리는 이런 ‘이론에 지식을 맞추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죽은 이들의 숫자는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정확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두 체제의 파괴성을 파악하기에는 넘칠 만큼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이나 전쟁포로를 죽이는 정책으로, 나치 독일은 블러드랜드에서 약 1000만 명을 학살했다(그리고 다른 지역까지 합하면 총 1100만명) - P677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블러드랜드에서 400만 명 이상을 죽였다(총 600만 명), 기근, 인종 청소, 수용소 장기 재소 등으로 빚어진 죽음(예측 가능했던까지 치면, 스탈린에게 죽은 숫자는 아마도900만 명, 나치는 1200만 명으로까지 늘어난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숫자는 완전히 정확하게 셀 수는 없다. 또한 적어도 수백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희생자로서, 두 체제 모두의 희생물이 되었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들의 손길 모두가 가장 많이 닿은 곳은 바로 블러드랜드였다. 오늘날의 지명대로 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연방의 서쪽 변방, 폴란드의 대부분, 발트 삼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나치와 소련의 힘이, 그리고 악의가 서로 겹치고 얽힌 땅이었다. 블러드랜드가 중요한 까닭은 희생자의 대부분이 그 땅 출신이라는 데만 있지 않으며, 다른 곳 출신자의 살육정책에도 그 땅이 중심지 노릇을 했다는 데 있기도 하다.  - P678

예를 들면독일은 54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그중 400만 명 이상이 블러드랜드 출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폴란드, 소련,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계 유대인이었다. 그 밖의 유대인들은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 왔었다. 블러드랜드 밖에서 온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헝가리유대인이었는데, 블러드랜드의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도 본다면, 이곳에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동유럽 유대인은 거의 90퍼센트가 된다. 좀더 소규모 유대인 집단은 서유럽과 남유럽에서 끌려와 블러드랜드에서 죽었다.
유대인 희생자들처럼, 비유대인 희생자들도 블러드랜드 태생이거나 그곳에 끌려와 죽은 사람들이었다. 전쟁포로수용소와 레닌그라드 및 다른 도시들에서, 독일은 4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굶겨 죽였다. - P678

고의적 기근의 결과 죽어간 사람의 대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은 블러드랜드 태생이었다. 아마 그외지역 출신의 숫자는 100만 명에 이를것이고, 그 대부분은 러시아계였을 것이다. 스탈린의 대량학살 정책의 희생자들은 소련 전역에서 골고루 나왔으니, 역사상 가장 큰 국가를 샅샅이 훑듯 했다. 그렇다 해도, 스탈린의 철권이 가장 강력하게꽂힌 곳은 소련의 서쪽 변경지대, 다시 말해 블러드랜드였다. 소련은 집단화 과정에서 50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는데, 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소련은 1937년에서 1938년의 대공포 시기에 68만1691명의 학살을 기록했는데, 그 다수가 폴란드계 소련인과 우크라이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서부 소련 거주자였고, 따라서 블러드랜드 거주자였다.  - P679

아렌트와 그로스만을 함께 보면, 두 가지 간단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첫째, 나치 독일과 소련의 합당한 비교는 그 범죄들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희생자들, 집행자들, 방관자들, 지도자들을포함한 모든 범죄 관련자의 인간성을 어떻게 봤는지를 따져야만 한다. 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결코 만족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은 확실한 실제보다 말잔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은 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반대가 차라리 말이 되기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정치적, 지적, 문학적, 심리학적으로 대량학살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로는 뭐가 있는가?‘ 그런 끝맺음은 잘못된 화음이다. 백조의 노래를 빙자한 사이렌의 노래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야 한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 - P682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1932년에는 스탈린이, 1941년에는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유토피아는 주에서 12주 동안 소련을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것은 그와 같은 시간에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큰 거짓말의 힘을 빌려 실행에 옮겨졌다.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 정치를 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는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또는 바람직하다고입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두 사람 다 유토피아를 뒤바꾼 형태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대량학살 정책을 ‘실질적인 승리‘로 대신 내세웠다. - P683

집단화도 ‘마지막 해결책‘도,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집단화가 우크라이나에서 저항과 굶주림을 불러오자, 스탈린은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독일군이모스크바에서 차단되고,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이 소련체제 건설이 지연되는 죄를 뒤집어썼듯이, 유대인들은 소련 체제 파괴의 실패가 빚어진 죄를 뒤집어썼다. 스탈린은 집단화를 선택하고, 히틀러는 전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그런 선택 - P683

의 결과 빚어진 최악의 상황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일은 훨씬더 손쉬웠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기근과 부농 및 소수 민족의 대량 총살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원래의 비전을 뒤틀었다. 히틀러 역시모든 유대인의 사살과 가스 학살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비전을 바꿨다. 집단화가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뒤, 스탈린은 그것이 계급투쟁의승리를 의미한다며 엉뚱한 의미 부여를 했다. 유대인들이 총탄과 독가스에 죽어갈 때, 히틀러는 그것이 전쟁 목표 그 자체를 달성한 것이라고 어느 때보다 더 명확히 선언했다. 전쟁에 지면서, 히틀러는 유대인 대량학살이야말로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 P684

스탈린은 유토피아를 재정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탈린주의 자체가 목표 수정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추동했던 유럽 혁명에서, 그 혁명이 불발하자 소련의 방어로 후퇴한 것이었다. 1920년, 붉은 군대가 공산주의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자, 스탈린은 ‘후퇴 계획‘을 마련했다. ‘일국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하나의나라, 소련에서 완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재앙을 가져오자, 그는 수백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어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정책 추진 과정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그 덕으로 무서운 국부이자 정치국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굳혔다. 1937년에서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를 부농과 소수 민족 박멸에 내세운 뒤,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1941년 붉은 군대의 퇴각 후, 그러고 나서 결국1945년에 승리한 뒤, 그는 러시아 민족주의에 기댔다.  - P684

히틀러에게도 그런 유토피아론 재창작 능력이 있었다. 굶주림 계획으로 수천만 명이 죽고, 일반 계획으로 굶주림 또는 강제이주의 결과수백만 명이 또 죽었다. 전쟁이 그의 사고를 크게 바꾸게 된 이상, 그런 일들은 나치가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부른 것의 일환으로 치부되었다. 전쟁에 이겨서 유대인 문제를 해소하기를 기다리기보다, 히틀러는 절멸 정책 자체를 전쟁 도중에 추진하기로 했다. 1941년 7월, 유대인 학살은 뚜렷한 결과가 없는 전쟁 한 달 뒤에 격화되었으며, 1941년12월 모스크바가 함락을 면한 다음에도 그리되었다. 특정 유대인들을 죽이는 정책은 본래 군사적 필요성이라는 말로 뒷받침되었고, 정치적, 경제적 기획과 일부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상황이 변하고 정치, 경제 기획들이 포기 또는 지연을 겪으면서 학살의 범위와규모는 급증했고, 유대인 말살 그 자체가 히틀러의 목표가 되었다. - P685

마지막 해결책의 마지막 판은 스탈린의 즉흥적 변조가 그랬듯 히틀러나 그의 체제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합리적 계획의한 단계라기보다 미학적 비전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원래의 정당화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우주적인 음모가 있으며 그것이 게르만의 미덕과 정면 충돌한다는 반유대주의 주문으로바뀌었다. 스탈린에게, 정치 갈등은 언제나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히틀러와 거의 정반대였다. 히틀러가 공화국을 혁명적 식민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반면, 스탈린은 혁명 마르크스주의의 시를 지속 가능한 일상의 정치로 번역했다. 스탈린의 계급투쟁은 언제나 소련 국가 노선으로서 일반에 표시되었다.  - P685

나치와 소련 체제의 비슷함을 두말없이 받아들인다면, 그 차이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보게 된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자유주의와민주주의에 적대한다. 두 정치 체제 모두, ‘당‘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뒤집혀 있다. 인정된 규칙에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여러 집단 가운데 하나를 의미하기보다, 그 규칙 자체를 정하는 유일한 집단이 된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모두 일당 독재국가였다. 나치나 소련이나 당이이데올로기와 사회 규범 제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나라였다. 그정치 이론은 국외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경제 엘리트는 특정집단이 잉여적이며 유해하다고 확신했다. 두 정부 모두, 경제기획자들은 농촌 지역에 필요 이상의 주민들이 거주한다고 봤다. 스탈린주의적 집단화는 잉여 농민들을 농촌에서 도시나 강제수용소로 보내 노동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들이 굶어 죽는다?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식민화 계획은 수천만 명의 인위적 기근과 강제이주를 추진했다. - P686

소련과 나치의 정치경제는 모두 사회 집단과 그들이 산출하는 자원을 통제하는 집단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스탈린의 농촌 대개혁 수단이던 집단농장은 1941년부터 독일 점령군 당국에 의해 활용되었다. 점령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소련의 도시들은 새로운 집단 구역, 즉 게토를 설치했다. 도시의 유대인 거주 게토는 비록 처음에는 이주를 앞두고 대기토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유대인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쓰였다. 명목상 유대인 자치기구인 유대인 평의회는 보통 "기부금" 징수와 강제노동 조직에 의존했다. 게토나 집단농장이나 지역민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치도 소련도 대규모의 노동집약수용소를 운영했다. 히틀러는할 수 있었다면 소련 수용소를 유대인과 그 밖의 명백한 적들을 관리 착취하기 위해 써먹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독일군이 소련 땅을 충분히 점령하지 못했다 - P687

스탈린도 히틀러 못지않게 재산 몰수와 인종 청소를 입에 올렸다. 그러나 민족 말살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당위성은 언제나 소련 국가의 수호나 사회주의의 진흥에 연결되어 있었다. 스탈린주의에서 대량학살이란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방어를 의미하거나 사회주의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 자체로 정치적 승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스탈린주의는 자체 식민화의 기획이었고, 상황이 허락되면 대외로 확장되는것이었다. 반면 나치의 식민주의는 빠르고 완전한 대 동부 제국의 정복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으며, 전쟁 이전의 독일보다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제국 운영에 앞서 수천만 명의 민간인을없애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독일은 대체로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소련은 보통 소련 국민을 학살했다. 소련 체제는 소련이 전쟁 중이 아닐 때 가장 살인적이었다. - P688

반면 나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겨우 수천 명의 사람을 죽였다. 정복 전쟁 중에는 역사상 그 어느 국가보다 더 빠르게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그 단위의 희생자를 낸 경우만 볼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비교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두 체제의 맛을 모두 봐야 했던유럽의 수억 명의 사람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 P688

지도자와 체제의 비교는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수억 명의 유럽인은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을 곱씹어야 했다. 그 체제들이 뭔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치명적 운명을 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1933년 초 독일의 실직 노동자들에게는 정말 중대했다. 사회민주당, 공산당, 나치당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말이다. 또한 같은 시간대에 굶어 죽어가고 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도중대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독일의 침공이 그들의 구원이 되지 않을까 꿈꾸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의 유럽 정치인들도 그랬다. 스탈린의 인민전선에 가입할까 말까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딜레마는 당시 폴란드에서 더 두드러졌다. 당시 폴란드 외교관들은 강력한 이웃인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인지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 P689

1939년에 독일과 소련이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폴란드 장교들은 어느 쪽에 항복할지를 선택해야 했고, 폴란드 유대인들(그리고 그 밖의 폴란드 국민)은 어느 점령지역으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일부 소련 전쟁포로들은 전쟁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위험 앞에서 독일군에 협력하는 문제를 놓고고심해야 했다. 벨라루스의 젊은이들은 소련 빨치산이 되느냐, 독일경찰이 되느냐를 고민해야 했다(결국 둘 중 하나로 취급되어 탄압받게 되지만). 1942년 민스크 유대인들은 게토에 남아 있느냐, 숲으로 달아나 소련 빨치산을 찾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1944년 폴란드 국내군 지휘관들은 독일군에게서 바르샤바를 자신들 스스로 해방시킬지, 아니면 소련군이 오기를 기다릴지 선택해야 했다. - P689

1933년 우크라이나 기근의 생존자 대부분은 훗날 독일의 점령을 겪었다. 1941년 독일의 수용소에서 아사를 면한 생존자 대부분은 스탈린의 소련으로 돌아갔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유럽에 남은 대부분도 공산 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결정적 시기에 유럽의 결정적 지역에 살았던 이 유럽인들은 싫어도 체제 비교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두 체제를 국외자의 입장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체제들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겹치고 섞이는 상황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치와 소련 정권은 때로는 동맹자였다. 폴란드를 동시에 침공했을 때처럼. 또 때로는 적으로서 서로 통할 수 있는 목표를 가졌다. 1944년스탈린이 바르샤바 봉기자들을 돕지 않기로 하고, 그리하여 독일군이 훗날 공산정권에 저항하게 될 사람들을 없애도록 했던 것처럼. 이것이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라고 불렀던 관계다.  - P690

유럽의 대량학살이 멈추고 수십 년이 지나자, 책임은 대부분 "부역자들의 발밑에 놓였다. 부역의 고전적 예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경찰 노릇을 했던 소련인들로, 그들의 임무 중에는 유대인 학살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부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극소수만이 뭔가 정치적 목표를 얼마간 띠고 그 일을 했다. 물론 일부 부역자는 점령 국가에 대해 정치적 동질감을 느끼긴 했다. 가령 소련의 점령에서 탈출했던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그들에게 1941년 리투아니아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봤다. - P698

점령기에 우크라이나 또는 벨라루스에서 독일 경찰로 일한 사람들 자신은 체제에서 거의 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들은 아주 밑바닥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유대인이 그들 밑이었고, 당연하게도 경찰이 되지 않은 일반 국민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친위대원, 당원, 병사, 독일인 경찰들에 비하면 자기 행동을 존중받지 못할 만큼 하찮았다. 이런 형태의 현지인 부역은 다만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는 의미 말고는 별게 없었다. 유대인을 쏘는 데 주저한 독일인은 그리 심각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경찰에 들어가지 않거나 대원을 그만둔현지인들은 반대로 독일인들에게는 전혀 해당 없는 대가를 각오해야했다. 굶주림, 강제이주, 강제노동 등등. 독일의 부역 제의를 받아들인소련군 포로는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 경찰을 위해 일한 소련 농민은 집에 남아서 수확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우리 가족은굶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소극적 기회주의였다. 이미 고약한 개인의 삶이 더 고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 P699

게토의 유대인 경찰은 소극적 기회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포함해 누구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소련 체제에서는 ‘부역자‘를 정의하기가 더 어렵다. 독일과 달리, 소련은 전시보다 평화시에 훨씬 더 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그리고 점령한 땅을 소련의 정식 영토로 병합하거나 그 형식적인 주권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점령 상태에 두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련의 그러한 정책은 "운동"과 "전쟁"으로 제시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동료 시민들을 굶겨 죽이도록 신호를 받았다.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내놓으라는 것이 "부역"이라고 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체제가 이웃끼리 학살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사례가아닐 수 없었다. 굶주림은 추잡하고, 야만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됐다. - P700

공산당원과 지역 공무원들은 그들이 잘 아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거나, 죽도록 몰아가야만 했다. 아렌트는 집단화 과정의 기근을 도덕적 소외의 시작으로 봤다. 강력한 현대 국가 앞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무력함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모든사람이 (식량 징수와 소비 모두에 있어서) 그 기근에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도덕적 통일성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체제를 따르는 까닭이 단지 스스로 선호하는 이데 - P700

올로기 때문이었다면 부역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블러드랜드에서 나치 부역자의 다수는 소련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 동쪽 지역, 민족 자결이 처음에는 소련, 다음에는독일의 지배에 밀려났던 그곳에서 일부 사람은 전에 소련에 부역했던 바로 그 이유로 독일에 부역했다. 소련 점령이 독일 점령으로 바뀌자, 소련군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은 독일 경찰로 탈바꿈했다. 1939년에서 1941년까지 소련에 부역했던 현지인들은 유대인을 죽임으로써나치의 눈에 죄인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빨치산 대원들은 앞서 독일과 소련에 모두 부역한 경력이 있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종종 별것 아닌 이유로 젊은이들이 소련 빨치산이 되거나 독일 경찰이 되거나로 갈렸다. 공산주의 학습을 받은 옛 소련 병사들이 독일의 살인 공장에서 일했다. 인종주의세뇌가 된 홀로코스트 일꾼들이 소련 빨치산에 들어갔다. - P701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버린 사람들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그 정치경제적 연관자 가운데 적절한 적용 시기나 열성파들이 없는이데올로기는 대량학살의 도덕적 해석이 된다. 말하자면 살해하는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범죄자를 단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는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는 편리하다. 경제의 중요성과 정치의 복잡성을 무시해버리고, 그런 요인들이 사실상 역사의 죄인들이자 나중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할 자들과 매한가지라고 치부해버리면 더편안할 수 있다. 더 유혹적이 될 만한 것은, 적어도 오늘날 서구인들 - P701

에게는, 희생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블러드랜드의범죄자와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희생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시는스스로는 범죄자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살인 엔진을 시동한 트레블린카의 직원은 나와 다르다. 방아쇠를 당긴 내무인민위원회 대원도 나와는 다른 인간이다. 그런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런 희생자와의 동일시가 더 많은 지식을주게 될지, 또는 그러한 살육자와의 분리가 윤리적으로 타당한 태도인지는 불분명하다. 역사를 도덕으로 치환하는 일이 그 누군가에게라도 도덕적인 일이 될 것인가? 확실하지 않다. - P702

사람의 주관적인 피해자 의식은 한도가 없어 보이며, 스스로 희생자라 믿는 사람은 대단히 폭력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경찰관 한 사람은 벨라루스의 모길료프에서 아기들을 쏴 죽였다. 소련군이라면 자기 아이들을 쏴 죽일 거라고 상상한 결과였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든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 P703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나치와 소련을 비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역사적 이해를 넘어선다고 보는 일은 그들이 놓은 도덕적 덫에 걸리는 것이다. 더 안전한 선택은 그들이 왜 대량학살을 벌였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고, 아무리 그것이 말도 안 되게 느껴진다 해도 그들에게는 말이 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하인리히 힘러는 100명의, 또는 500명의, 또는 1000명의 시체가 줄줄이 쌓여 있는 걸 보는 게 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의의미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의 영혼의 순수함을 희생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런 희생은 살인자를 더 높은 도덕적 수준으로끌어올린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어떤 식의 헌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무리 극단적이라 해도, 나치의 가치가 우리와 전혀 동떨어지지는 않았음을 그 표현은 알려준다. 즉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이다.  - P704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양심이 아돌프 히틀러라는이름을 가졌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지도자로 받아들인 독일인들에게, 믿음이란 매우 소중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은 그렇게 잘못 뽑기도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들의 믿음의 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이 있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당시의 독일인들을 선량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임을 알려줄 근거는 된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들은 윤리적인 사고를 했다. 비록 무시무시한 착오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스탈린주의 역시 정치뿐 아니라 도덕 체계였다. ‘무죄냐, 유죄냐‘는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도덕적 사고는 도처에 있었다. 어느 젊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은 굶주린 사람들에게서 곡물 - P704

을 빼앗는 일이 옳다고,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승리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에게는 도덕 감각이 있었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마르가레테 부버노이만이 카라간다의 굴라크에 있을 때, 동료 재소자가 그녀에게 "달걀을 깨지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토록 희생자의 규모가컸던 것은 그만큼 희망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량학살에 대한 낭만적 정당화도, 당장의 악이 미래의 선이 되리라는 이야기도, 완전히 틀린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아마 훨씬 더 나으리라. 아니면 더 온건한 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 P705

큰 고통이 큰 진보와 연관되리라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적 마조히즘이다. 말하자면 고통이 있음을 내재된 또는 곧 도래할 선의 징조로 아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내는 것은 미신적 사디즘이다. 내가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내게 계시된 더 높은 차원의 목표에 부응하는 거라고 여기는것이다. 스탈린이 정치국을 대표하고 정치국은 중앙위원회를,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을,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노동계급은 역사를 대표했으므로, 스탈린은 무엇이 역사적으로 필요한지에 대해 주장할 특권이있었다. 그런 지위는 그가 스스로에게 모든 책임을 면제해주고, 그의실패를 다른 이들에게 미룰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기근이 일정한 유형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바람직한 유형이나, 바람직해야 할 유형이냐이다. - P705

지금 우리의 추념 문화는 기억이 당연히 살육을 방지한다는 식이다. 그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이 죽었다면, 그들이 뭔가 자명한 가치때문에 죽었을 것이고 그것은 쉽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적절한 정치적 기억으로 갈무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자명한가치는 국가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수백만 명의 희생자는 소련이 위대한 조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또는 미국이 선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했다는 식이다. 유럽은 평화주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폴란드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전설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영웅을 가져야 했다. 벨라루스는 그 국민의 미덕을 증명해야했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의 운명을 실현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국가 정치와 국민 심리에 어느 정도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음에도,
나중에 만들어 붙인 정당화다. 그리고 진실된 기억과는 거리가 멀다.
죽은 사람들은 기억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억할 힘이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판단한다. 나중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한다. - P706

의미가 살육 행위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더 많은살육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아마도 역사의 목적이 나온다. 죽은 이의 숫자를 세는 것과그 계속적인 재해석 사이 어딘가에 대량학살의 역사만이 숫자와 기억을 통합할 수 있다. 역사 없이는 기억은 사적인 것으로 된다. 오늘날에는 개별 국가의 것으로 된다. 한편 죽은 이의 숫자는 공적인 것으로 된다. 국제적인 순교 행동, 복수 성전의 경쟁판에서 도구로 쓰인다. 기억은 나의 것이며 나는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숫자는 객관적이며 나는 좋든 싫든 그 숫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식의 사고방식은 내셔널리스트들이 한 팔로는 스스로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이웃을 후려갈기도록 해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고 또 공산주의가 끝장난 뒤, 블러드랜드 전역(그리고 그 너머의내셔널리스트들은 희생자의 숫자를 부풀리고, 그에 따라 스스로를무구한 존재로 포장하는 데 맛이 들렸다. - P707

12년, 두 체제 동안 1400만 명이 의도적 살육을 당했다. 지금은 이에 대해 우리가 통달은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알기 시작할 때다. 과장된 숫자를 반복하며, 유럽인들은 그들의 문화에 수백만 명의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을 집어넣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유령은 완전히 무력하다. 서로 경쟁적인 순교자 신화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순교자를 내세운 제국주의martyrological imperialism일 뿐이다. 1990년대의 유고내전은 부분적으로 세르비아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민족의희생자 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인식한 데서 비롯됐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러운 상황이 찾아온다.


죽은 자가 과연 어느 누구에게든 소속되는 것일까? 독일인에게 살육된 400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 가운데 약 30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이 300만 명의 유대인 모두는 폴란드인으로 치부되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그들 중 다수는 스스로를 폴란드인이라 굳게 믿었다. 유대인으로 죽은 사람들이 스스로 유대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 죽었다. - P714

또 이런 유대인 100만 명 이상은 스스로를 소련 국민이라 여기며죽었다. 전쟁 초기에 소련이 병합한 폴란드 절반의 땅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100만 명 가운데 다수가 살았던 땅은 지금 독립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속해 있다.
코벨 시너고의 벽에 엄마에게 보내는 글을 긁어 썼던 유대인 소녀, 그녀는 역사상 폴란드인일까, 소련인일까, 이스라엘인일까, 우크라이나인일까? 그녀는 폴란드어로 글을 썼다. 그날 시너고그의 다른 유대인들은 이디시어로 썼다. 디나 프로니체바의 유대인 어머니는 어떨까? 키예프(지금은 독립 우크라이나의 수도인)의 바비야르에서 도망치라고 딸에게 러시아어로 말한 그녀는? 코벨과 키예프의 유대인 대부분은, 동유럽 유대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도, 폴란드인도,
우크라이나인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이 과연 정말로 이스라엘이나, 폴란드나, 우크라이나나, 아니면 소련을 위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715

그들은 유대인이었으며, 폴란드 또는 소련의 국민이었다. 그들의 이웃은 우크라이나 또는 폴란드 또는 러시아계 주민이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네 나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 네 나라의 역사가 따로따로 떼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다. 역사란 각 개인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P715

이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령 정확한 숫자를손에 넣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을 고려해야 한다. 정확한 숫자가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각각의 사망 기록은 하나의 독특한 삶에 대해 그 존재를 제시하지만, 내용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대규모 학살에심층 조사를 실시한 경우는 홀로코스트로, 57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 가운데 540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숫자도, 다른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추상적인 ‘570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570만 배‘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은 뭐랄까, 한 사람의 유대인이 570만 번 죽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 P716

셀수 없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도브시아 카간은 코벨 시너고그에 있던 소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 코벨에서 죽은, 우크라이나에서 죽은, 동유럽에서 죽은, 유럽에서 죽은 모든 유대인은 독특한 삶의 소유자였다.
기억의 문화는 어림수를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에 대한기억은 그 수가 어림수가 아닐 때, 다시 말해서 마지막 단위가 0이아닐 때 쉬워진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의 경우, 트레블린카에 78만863명의 서로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마 쉬워질 것이다.
그 마지막 3명은 가스실에 들어간 뒤 옷이 한데 뭉쳐져 수거된 타마라 빌렌베르크와 이타 빌렌베르크 자매, 그리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 P716

전 그녀의 머리를 깎는 남자와 부여잡고 울었던 루트도르프만이 될수 있다. 아니면 바비야에서 사살된 3만3761명의 유대인 가운데마지막이 되는 한 명을 상상해보자. 가령 디나 프로니체바의 어머니를! 비록 그곳에서 사살된 모든 유대인 하나하나가 곧 하나하나이지만 말이다.
블러드랜드의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기억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포함해야만 한다. 포위 속에서 굶어 죽은 100만 명의(100만 배의 하나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각각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군에게 살해된 310만 명의 (310만 배의 하나의) 소련 전쟁포로 각각,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소련 체제 아래 굶어 죽어야 했던 330만 명의(330만 배의 하나의) 우크라이나 농민 각각도 이들의 숫자를 완전히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을 나타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선택을 해야 했던 농민 가족, 구덩이에서 서로의 몸을 덥혀주려 애쓰던 포로들, 레닌그라드에서 가족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타냐 사비체바 같은 아이들. - P717

1937년에서 1938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기에 사살된 68만1692명 각각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두 명은 마리아 유리에비치와 스타니스와프 비가노프스키일 수 있다. "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던 부부 말이다. 1940년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사살된 2만1892명의 폴란드 포로들도 저마다의 삶이 있었다. 마지막 두 명은 자신의 딸을 꿈에 봤던 아버지, 도비에슬라우 야쿠보비치와 총탄이 자신의 머리를 꿰뚫던 날 자신의 결혼반지에 대해 글을 남긴 남편, 아담 솔스키일 수 있다. - P717

나치와 소련 체제는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단지 추정치가 되어버렸고, 나머지 일부는 우리의 정밀한 추계를 통해 복원될 수 있다. 우리 학자들로서는 이 숫자들을 찾고, 이를 통해 일정한 전망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로서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들로 돌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그럴 수 없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단지 우리의 세상을 마구 뜯어고쳤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마저 개조했다는 뜻이 되리라. - P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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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너희들의 아버지인 내가 후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비친 것인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내가 지금 여기서 사라져 간 시대를 비웃고 연민하듯 너희들도 나의 케케묵은 마음가짐을 비웃고 연민할지 모른다. 나는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은 나를 발판으로 삼아 높고, 멀리나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몹시 쓸쓸하다. 우리들은 그저 이렇게 말만 하며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너희들과 나는 피의 맛을 본 짐승처럼 사랑을 맛보았다. 가자, 그리고 우리들 주위의 쓸쓸함을 제거하기 위해 일하자. 나는 너희들을 사랑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이것은 어버이로서 너희들에게 보답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 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나의 감사를 받아달라는 것뿐.
죽어 넘어진 어미를 먹어 치우면서 힘을 기르는 사자 새끼처럼 힘차고 용감하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로나아가거라..
내 일생이 아무리 실패작이더라도, 내가 아무리 유혹을이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의 발자취에 불순한어떤 것을 너희들이 발견할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 꼭 그렇게 하겠다. 너희들은 내가 죽어 넘어진 곳에서 새로운 - P182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너희들은 나의 발자취에서 어렴풋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불행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의 축복을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의 여정에 오르거라. 앞길은 멀다. 그리고 어둡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거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앞에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가거라. 용감하게, 아이들아! (1919)
- 루쉰의 산문 <아이들에게> - P183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면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것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 이상 숨지 못하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따라 마냥 흔들리고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김기택의 시 <태아의 잠 1〉 부분 - P187

관계 역전의 상태에서 가정의 달 5월을 맞았고 ‘어버이날‘ 카드에는 예의 그 칭찬 메시지가 가득했다. 큰 상을 한 번 받았더니 카드 형식은 시시했다. 나는 딸의 사랑을 간구하는 가엾은 엄마가 되어, 요새 왜 그거 ‘좋은 부모상‘ 안주냐고 묻고 말았다. 물어보면서도 상 이름이 그렇게 진부하지 않았는데 싶어갸웃했는데 "아, 자식사랑상?" 한다. 딸아이는 요즘 자기가 소홀했다며 곧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제는 귀갓길에 딸에게 전화가 왔다. 학교 수업 준비물로 1.5리터 물병이 필요하니사 오란다. 알았다니까 "그럼 나는 그동안 자식사랑상을 준비할게" 한다. 현관문을 열자 딸아이가 돌고래처럼 솟구쳐 오른다. "엄마한테 상장을 안 준지 6개월이나 됐더라." 삐뚤삐뚤 손글씨 대신 의젓한 명조체로 만든 ‘5월 자식사랑상‘. "위 어른은여섯 달 동안 항상 자식을 위해 많고 많은 노력을 하고, 항상 친절히 대했음으로 이 상장을 수여합니다." - P190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김행숙의 시 <다정함의 세계>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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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1905년부더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물러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 남부는 미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북한공산당은 1948년 북한 지역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1950년 봄, 스탈린은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를 ˝주 방어선˝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밖에 놓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1월에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가 남한 군대를 쉽사리 밀어버릴 수 있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행운을빈다고 하고, 소련제 무기를 북한에 보내주었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무력 대결처럼 보일점이 많았다. 미국은 빠르고 확고하게 대응했으며, 일본과 그 밖의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동원, 북한을 본래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버릴수 있었다. 9월, 트루먼은 NSC-68을 승인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전 세계에서 봉쇄한다는 미국 대전략(조지 케이 수립한 아이디어였다)의 비밀스럽고 공식적인 승인이었다. 10월, 중국이 북한 편에서 참전했다. 1952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북한 및 공산주의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군 탱크가 소련제 탱크와 싸웠고, 미군 전투기가 소련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두 전선에서의 전쟁이 될 확전을 두려워했던 것같다.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위성국가 지도자들을 불러모아유럽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도록 했다. 1951년과 1952년, 붉은 군대의 병력은 두 배로 늘었다.

정확히 이 시기(1951년에서 1952년)에, 소련 유대인들은 미국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탈린에게 상당히 들었던 것같다. 베를린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폴란드에서 실망하고, 한국에서전쟁을 겪은 스탈린은 다시 한번적어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던 그의 상상속에서는)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처럼, 1950년대에도 소련을 국제적 음모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그주체가 더 이상 베를린, 바르샤바, 도쿄(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는 아니더라도. 그러나 워싱턴(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의 음모는?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함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1930년대 말에 위협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P 643, 645


7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두 페이지도 못되는 분량의 ‘한국 전쟁‘을 만난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경찰력 및 디를레방거 특무단이 이것의 실행에 들어간 것은 1944년 8월 5일과 6일로, 양일간 그들 손에 살해당한 민간인의 숫자만 약 4만 명이었다. 그들의 군사적 목표는 서부 중앙 볼라 인근까지 행군해 작센 공원에 있던 독일 지휘부를 한숨 돌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을 자기네 맨 앞에 세워 일을 시키고, 그 와중에 여성과 아이들을 인간 방패로 삼거나 심지어 여인들을강간하면서, 볼가 거리에 폴란드 국내군이 설치해둔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있었다. 또한 앞서 동쪽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솔린과 수류탄을 써서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하나 모조리 파괴했다. 볼라가는 과거게토였던 지역 남쪽과 닿아 있었고, 실제로 최남단부를 통과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파괴 작업은 인근 지역까지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 P547

디를레방거 여단 병사들은 세 곳의 병원을 그곳 환자들과 함께 불살라버렸다. 한 병원에서는, 부상 입은 독일인들이 폴란드인 의사 및간호사들의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은 디를레방거 병사들에게 폴란드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물론 어림없었다. 디를레방거 여단 병사들은 폴란드인 부상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날 저녁이 되자그들은 줄곧 그래왔듯이 간호사들을 야영지로 끌고 갔다. 그들의 관습에서는 매일 밤 그들이 고른 여인들은 일단 장교들 손에 가차 없이폭행당하고, 뒤이어 여러 병사의 윤간이 이어진 뒤 이내 살해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그러한 기준에서 봐도 특이한 날이었다. 플루트 연주가 흐르며 교수대가 설치되었고, 의사 그리고 발가벗겨진 간호사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었다. - P547

영국 언론들은 많은 경우 영국의 동맹국이 수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보도보다는, 오히려 폴란드인들은 위험하고 다루기 힘든 이들이라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과 아서 케스틀러 두 사람은 이에 항의했는데, 오웰은 봉기를 도와야 하는 동맹국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영국인들의 "부정직함과 비겁함"을 지적했고, 케스틀러는 스탈린의 무반응을 "이번 전쟁에서 가장 파렴치한 행위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미국의 비행기가 소련 영토에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날아가 독일 거점을 폭격하고 폴란드인들을 돕는 등의 공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요청에 퇴짜를 놓은 1944년 8월 16일 바로 그날, 미국 외교관들은 유럽 동부 및 동남부 일대를 공중에서 폭격하는 ‘프랜틱 작전‘에 폴란드 지역 목표물들을 추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임무 수행을 위해 동맹 미국이 보낸 연료 보충 요청을 거절했다.  - P552

어느 폴란드 국내군 병사는 자신의 시에 "우리는 그대를, 붉은 역병을 기다린다 우리를 이 흑사병에서 구해주기를"이라고 적었다. 독일 국방군 또한 바흐와 마찬가지로 힘러의 정책에 반대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비스와강에서 붉은 군대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바르샤바를 일종의 요새로 사용하길, 아니면 적어도 그곳 건물들을 방공호로 이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바흐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고, 군은무시되었으며, 힘러의 바람대로 유럽의 수도 가운데 하나였던 도시는파괴되었다. 소련이 입성하기 하루 전에도, 독일은 바르샤바에 남은마지막 도서관을 불사르고 있었다. - P555

유럽의 다른 어떤 수도도 바르샤바처럼 참담한 운명을 맞은 곳은없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파괴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1944년 8월에서 9월에만 폴란드인 비전투원 약 15만 명이 독일인들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슷한 숫자의 바르샤바 비유대 폴란드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게토 내부 처형지에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독일인들의 폭격으로사망했다. 목숨을 빼앗긴 유대인들의 숫자는 절대 수에서 이보다 높았고, 사망률은 훨씬 더 높았다. 바르샤바 유대인의 사망률은 90퍼센트 이상으로, 약 30퍼센트인 비유대인의 사망률을 한참 넘어서는 수치였다. 민스크나 레닌그라드 같은 동부 도시들만이 바르샤바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대체로 보면, 전쟁 전 약 13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의 주민 절반가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 P555

1945년 1월에서 5월에 이르는, 종전 직전의 몇 개월 동안, 독일 강제수용소의 사망자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이 기간에만 굶주림과 방치로 약 30만 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 죽어가던 수감자들을 해방시킨 미군과 영국군은 자신들이 나치즘의 공포를 목격했다고 믿었다. 그들의 사진작가와 촬영기사들이 베르겐벨젠과 부헨발트 등지에서 찍은 사체 및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히틀러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바르샤바 유대인 및 폴란드인들이, 그리고 바실리 그로스만과붉은 군대의 병사들이 인지하고 있었듯이,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이야기였다. 오히려 최악은 바로 바르샤바 폐허 속에, 트레블린카 벌판에, 벨라루스 습지대에, 바비야르 구덩이들 사이에 있었다.
붉은 군대는 이 모든 지역을, 그리고 피에 젖은 땅 전역을 해방시켰다. 모든 죽음의 장소와 망령의 도시들은 스탈린이 히틀러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 철의 장막 뒤편의 유럽으로들어갔다.
소련군이 비스에서 발이 묶인 그 시점에 그로스만은 트레블린카에 대해 적고 있었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독일이 바르샤바 봉기와 폴란드 국내군을 진압하는 모습이었다. 바르샤바 잿더미속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냉전은 시작되고 있었다. - P561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 이르렀을 때, 스탈린은 어떤 모습으로 폴란드를 재건할 것인지 이미 계산이 서 있었다. 국경선을 어디로 그을지, 그 주민으로서 어떤 사람들을 강제로 살도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을 강제추방할지 다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폴란드는 공산국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인종적으로 단일한 나라가 비록스탈린은 자신이 구상한 동유럽 제국에서 대량학살 정책만큼은 구상하고 있지 않았지만, 폴란드는 인종적 순수성이 지켜지는 지역의중심이 되어야 했다. 독일은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되고, 폴란드는 폴란드인들만의 나라가, 그리고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역은 우크라이나인들만 사는 땅이 될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소수 인종을 대표하기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나라의 소수 인종들을 청소하도록 시킬 작정이었다.  - P565

1945년 2월 영·미 동맹자들과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었고, 그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을 법하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받았던 땅, 다시말해서 폴란드의 절반과 발트 연안국들, 루마니아 동북부를 다시 갖겠다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스탈린은 독일을 징계하는(분단시키는 대가로, 공산화를 전제로, 폴란드 땅의 분단 점령을 상당 부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좀더 서쪽으로 국토가 이동하면서,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을 경계로 하는 독일 땅을 먹어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스탈린의 구상대로 정해진 폴란드의 경계 내에는 적어도 수천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있었다. 그들을 추방하고 재진입을 막는 일은 폴란드 공산 정부의 과제로 주어졌다. 그들은 독일인을 꺼리는 다수의 폴란드인의 태도에 힘입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폴란드 정치인의 자연스러운 숙원이었던 ‘폴란드인들만의 폴란드‘ 이념에서도 덕을 봤다. - P566

3월까지, 붉은 군대는 스탈린이 폴란드에 병합시키려했던 독일 땅의 전부를 점령해놓은 상태였다. 5월에는 붉은 군대가베를린에 입성했고, 유럽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소련군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동부 독일을 유린했는데, 그 정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다. 붉은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독일 정부는 약 600만 명의 독일인을 소개시켰는데, 이는 스탈린의 폴란드 구상(인종적, 지리적 모두) 실현에 보탬이 되었다. 그들중 다수는 독일의 항복 뒤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성공한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는 1945년 2월에 조지 오웰이 거의 마지막 목소리를 냈다. 독일계를 추방하는 계획은 "중대 범죄"이며 "결코 시행되지 못할것"이라고. 그는 틀렸다. 이번에도, 그의 정치적 상상력은 그의 오판을가져왔다. ‘ - P569

강간의 규모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서면서 더 커져갔다. 그이유는 따지기 어려웠다. 원칙적으로는 평등주의적인 소련이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존중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에 대한실제 경험과는 별개로, 붉은 군대 병사들은 소련 체제의 산물이었다.
그것도 대개 그중 가장 악랄한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약 100만명의 강제수용소 수형자가 전선에서 싸우게끔 풀려났다. 모든 소련병사는 그들의 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를 짓밟은 독일의 어리석음에치를 떠는 듯 보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집조차 그들의 집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병사들은 때때로 그들이 "자본가들만 공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시각에서는 보통 독일 농부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했다. 그러나 그처럼 명백히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독일인들은 소련에 쳐들어와 강도질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소련 병사들은 독일남성들을 모욕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기도 했다. - P571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독일 여성들에게 자행된 폭력은 무시무시했다.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지키려 나선 남자들은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했다. 사실 그녀들을 지켜줄 남자도 별로 없었다. 대부분 전사했거나(이 전선에서 벌어진 작전으로 약 500만 명의 독일 남성이 죽었다), 독일군에 차출되었거나, 비상향토방위군에 차출되었거나, 소련군에게잡혀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가정에 남아 있던 남자들은 대개 노인아니면 장애인이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여성이 강간당했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가 나중에 자라서 알게 된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누이동생 대신 소련군에게 몸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누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윤간도 아주 흔했다. 거듭되는 강간으로 몸이 망가져서 죽는 여성도 많았다! - P572

히틀러는 전쟁을 ‘의지의 문제‘로 내세웠으며, 따라서 언제나 패배를 부정함으로써 실제 결과를 좋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으로 독일 민족이 단련된다고 여겼다. "독일이 강대국이 되거나, 멸망하느냐다." 그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특이했다. 그는 게르만 민족이위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자체의 퇴락한 부분을 정화하는 제국의 시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쟁이 계속될수록, 그리고 승리할수록 게르만은 더 위대해질 것이었다.
만일 게르만이 패배시킨 적의 피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실망을 안겨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다.
히틀러는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주었으나, 게르만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게르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생존할 이유가 없다. 히틀러에게, 게르만이 견뎌야 할 모든 고통은 - P574

그들 스스로의 나약함의 업보였다. "게르만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좋다. 멸종할지어다." 14히틀러 스스로는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민간인들의 목숨만은 지킬 만큼 실용주의적 태도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동부 독일의 민간 지도자인 가울라이터 Gauleiter들은 나치당의 열혈 당원으로, 히틀러에게 가장 충성하는 지지자들이었다. 중요한 세 지방에서, 가울라이터들은 민간인 소개에 실패했다. 프로이센을 맡고 있던 가울라이터는 에리히 코흐였는데, 그는 우크라이나 총독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내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만한 우크라이나인이 있다면 그를 쏴버려야 한다." 이제(1945년 1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그의 독일 관구에 밀려드는 중이었는데, 그는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포메라니아에서는 프란츠 슈베데코부르크가 독일 피란민들의 홍수를 막으려 시도했다.  - P575

독일군 후퇴 과정에서도 고난이 있었다. 독일인들이 소련군을 피하다가 죽은 숫자보다 독일군을 피하다가 죽은 소련과 폴란드 주민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비록 그런 죽음이 의도적인 살육 정책의 산물은 아니었지만(따라서 이 분야의 연구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피란과 소개, 강제노역 등은 직간접적으로 수백만 명의 소련 및 폴란드 민간인의 죽음을 가져왔다(그리고 독일의 의도적인 대량학살 정책이여기에 1000만 명의 죽음을 추가했다).이 전쟁은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실제 독일 민간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끝났다. 피란과 추방에서 빚어진 죽음에 대해서는 따라서 나치 체제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독일민간인들은 달아나야 한다는 걸 알 만큼 전쟁 중의 독일 정책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피란을 독일 국가는 제대로 채비하지 못했다. 여러 소련 병사는 분명 최고사령부의 용인과 스탈린의 기대에 따른 짓들을 자행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먼저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붉은 군대가 독일에 진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인종적 순수성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스탈린만이 아니라 히틀러 스스로의 인종 정책에서도 불가피성을 띠고 있었다. 민족 추방 자체는승자와 패자의 국제적 합의의 결과였다. - P583

동부 폴란드에서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내몰아서 그 인구 구조를바꾸려는 시도는 전쟁이 현재진행형인 때부터 일찌감치 이뤄졌다. 소련은 1940년과 1941년, 이 땅을 처음 점령했을 때 수십만 명을 축출했다. 그중 다수가 폴란드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강제수용소를 거쳐 이란,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연합군에 합류해 서부 전선에서함께 싸웠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끝날 무렵 폴란드 땅을 직접 밟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고향 집에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좋았다. 독일군은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옛 폴란드 동부에서 약 13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때 지역 경찰의 협조를았다.  - P586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은 천천히 또 단속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국가에서 변모해갔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념적 장식일 뿐이고, 국경과 소수 민족에 대해 전통적인 안보관을 견지하는 대규모 다민족제국이 되어갔다. 스탈린은 혁명 시기의 보안 기구를 물려받고, 유지하고, 지배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안보 문제에 대한 우려는 1937년에서 1938년, 그리고 1940년의 대량학살로, 또한 1930년에 시작되어스탈린 생전 내내 계속된 강제이주로 이어졌다. 전쟁 중에도 강제이주는 계속되면서 소련 이주 정책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적대 계급 구성원으로 여겨진 개인을 강제이주시키던 전통적인 소련의 방식에서,
변경지대에서의 인종 청소와 인구 재구성으로전쟁 이전 시기에 강제수용소로의 강제이주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품었다. 소련 경제의 성장, 그리고 소련 인구의 교정, 1930년대에는 소련이 인종을 기준으로 다수의 국민을 추방하기 시작하면서, 그목표도 소수 인종을 민감한 변경지대에서 내지로 보내는 것으로 바뀐다. 이 ‘국민 이주‘는 개인에 대한 징벌로 보기 어려웠건만, 그들은 - P591

계속해서 이주 대상자들이 자기 고향 땅에서 멀리 떠나면 더 나은 소련 국민이 된다는 주장을 했다. 대숙청 시기에는 1937년에서 1938년사이에 25만 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다른 한편 수십만 명이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기도 했으며, 그곳에서 이주자들은국가와 스스로의 개혁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되었다. 심지어 새로 병합된 폴란드, 발트 연안, 루마니아 주민들에게 이뤄진 1940년에서1941년의 강제이주는 소련 입장에서는 ‘계급투쟁‘의 일환이었다. 엘리트층의 가족들은 카틴 숲을 비롯한 여기저기서 학살당했으며, 그들의 아내, 자식, 부모들은 카자흐의 스텝 지대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그들은 소련 사회에 통합되든지, 죽든지 해야 했다. - P592

대부분은독일인들의 피란과 강제이주는 의도적인 대량학살 정책이 아닐지라도 전후 인종 청소의 핵심을 이루었다. 1943년에서 1947년까지 모든 내전과 피란, 강제이주, 재정착 사태는 돌아온 붉은 군대가 촉발하거나 주도한 것으로, 그 결과 70만 명의 독일인과 최소 15만 명의 폴란드인, 그리고 약 25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죽었다. 최소한도로 볼때, 캅카스, 크림반도, 몰도바, 발트 연안국들로부터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이 실시된 직후 또 30만 명의 소련 국민이 희생되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반소 민족주의 세력들은 강제이주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또 10만여 명이 인종 청소 과정에서 숨지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
상대적으로 볼 때, 독일인 전체 숫자에 비해 강제이주된 독일인의수는 최후의 한 명까지 이주 대상이 된 캅카스와 크림반도 주민들에비하면 훨씬 적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끝 무렵에 피란 또는강제이주를 겪은 독일인은 폴란드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삼국인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 독일에 의해 이뤄진 이주민의 숫자가 전쟁 끝 무렵 소련의 점령으로 이뤄진 이주민의 숫자에 더해지면, 그런 차이는 사라지고 만다. 1939년에서 1947년의 기간 - P595

에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발트 삼국인들은 독일인들만큼(또는 살짝 더, 어떤 경우에는 살짝 덜) 강압적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한편 다른 모든 민족은 독일과 소련의 강압을 겪었지만, 독일인들은(일부 예외가 있더라도) 소련 쪽에서만 강압을 겪었다.
전후 시기에, 독일인들은 폴란드인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위협을 겪었다. 그들 또한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야만 했으므로, 그래도 독일인과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발트 삼국인, 캅카스인, 크림반도 사람들보다는 훨씬 적게 죽어갔다. 피란, 추방, 강제이주의 직간접적 결과로 숨진 독일인과 폴란드인의 비율은 10분의 1 미만이었다. 반면 발트 삼국인과 소련인들은 5분의 1을 넘었다.  - P596

일반적으로, 더 먼 동쪽으로 갈수록, 그리고 소련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을수록 결과는 더 비참했다. 이는 독일인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독일인들은 대부분 살아남았다. 그러나 더 동쪽으로 강제이주되거나 소련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독일인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동쪽으로 간 사람들보다 나았고, 그들을 반기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멀고 낯선 소련 공화국들로 가는 편보다 나았다. 또한 선진 독일(비록 폭격과 전쟁으로 쑥밭이 되었을지언정)로가는 게 소련의 황무지로 가서 이주자들이 직접 개척해야 하는 상황보다 나았다. 그리고 점령지 가운데 미국과 영국 관할지로 가는 게 내무인민위원회 지부의 통제를 받는 카자흐스탄이나 시베리아 땅으로가는 것보다 나았다. - P596

그것은 모스크바가 각 공산당을 지휘하고 그 정책을 조정하는 수단이 될 것이었다. 그자리에 모인 공산당 지도자들은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고즉 진보 진영과 반동 진영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새로운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진영을 이끌도록 운명지어졌고 미국은 퇴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든 결점(최근 나치 독일이 여실히 보여준)을 물려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건드릴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은 진보 진영의 최종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도.
공산주의자들은 진보 진영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해야 하며, 이는 소련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각자 국가별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려는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
그러고 나서 즈다노프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이후 몇 차례 일으킨 심장마비의 첫 번째였다. 아마도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지는 않았다. - P603

1948년 1월, 스탈린은 유대인 한 사람을 죽였다. 솔로몬 미호옐스, 그는 ‘유대 반파시스트 위원회‘ 회장이자 모스크바 이디시어 극장의 감독으로 스탈린 연극상 수상작 심사를 위해 민스크에 파견 와 있었다.
도착한 그는 어느 농촌의 집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소련 벨라루스 공화국 경찰의 라브렌티 차나바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나바는 그와 목격자를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미호옐스의 시체를 조용한도로에 내버려, 트럭에 치이도록 했다.
민스크 사람들이 독일의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본 겨우 몇 년뒤일 뿐이었다. 묘한 점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뜻으로 또 한 명의 소련 유대인을 민스크에서 죽인 장본인인 차나바는 경찰이자 역사가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벨라루스 빨치산 운동에 대한 역사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그 책에서 독일 점령기에 유대인이 겪은 특별한 고통 - P607

과 투쟁에 대해서는 일체 기술하지 않았다. 유대인 빨치산에 대한 소련 역사서가 한 권 집필되기는 했으나, 발행 금지되었다. 전쟁 중 민스크에서, 유대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고통받았다. 그러나 소련에 의한 해방은 유대인의 고통의 끝이 아닌 듯했다. 소련 내 홀로코스트의역사책도 아직은 쓰기 시작할 때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미호엘스는 스탈린이 피하고 싶어하던 쟁점을 건드렸다. 그는 스탈린의 측근이면서 유대계인 사람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가령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나 역시 정치국원이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클리멘트 보료실로프의 부인들과 더 고약했던 점은 전쟁 중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해 스탈린과 소통하고자 그와의 면담을 추진했다는것이다.  - P608

독일인의 손으로 학살된 유대계 소련인의 숫자는 국가 기밀이었다. 독일인들은 대략 100만 명의 소련 태생 유대인들을 죽였는데, 여기에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소련에 병합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유대인 약 160만 명이 추가된다. 루마니아인들도 주로 전후에소련으로 편입될 땅에서 유대인들을 죽였다. 이 숫자들은 분명 민감했다. 그것들이 유대인들의 매우 특별한 고난을(설령 다른 소련 민족들의 운명 역시 녹록지 않았더라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소련 인구의 2퍼센트도 안 되었고, 러시아인은 절반 이상이었다. 독일인들은 점령한 소련 땅에서 러시아계 민간인보다 더 많은 수의 유대계를 죽였다.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족속으로 따로 분류되었다. 러시아인보다는 더 많이 학대받은 우크라이나계나 벨라루스계, 폴란드계등의 슬라브족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소련 지도부도 그 점을 알고 있었으며, 독일군이 점령했던 소련 땅의 소련인들도 알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결코 소련 전쟁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612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 지도부가 소련 국민의 정신세계를 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검열 체제는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지만, 소련의 규범이 유일한 규범이 되어야 할 상황, 또는 소련적 삶이 가장나은 삶으로 여겨져야 할 상황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소련 바깥의삶을 경험해봤다. 그 전쟁 자체가 ‘조국(러시아든 소련이든 간에)‘의 범위 안에 국한될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은 민족과 연관되어 있었고, 그종결은 한 나라가 아닌 세계 전체의 모양을 바꿨다. 특히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은 소련이 유대인 문제를 망각하기로 한 결정을 불가능하게만들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조차 소련에 사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후자는 유대인의 민족국가를 세우는 땅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민족국가를 가진다면, 그것은 중동의 영국 제국주의를 끝장내고, 소련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 역시 뒤흔들리지 않겠는가? - P618

야쿠프 베르만이 버텨낸 것은 그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볼레스와프비에루트,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이자 삼두정치에서 유일하게 비유대인이었던 인사의 비호 덕분이었다. 언젠가 스탈린은 비에루트에게 그가 베르만과 민츠 가운데 누구를 더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다. 비에루트는 덫에 걸리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 비에루트는 스스로를 스탈린과 베르만 사이에 놓았는데, 이는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에서처럼 서로를 물고 뜯지 않았다. 치욕을 겪은 고무우카조차상대를 깎아내리는 발표문을 내거나 정치재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40년대 말에 집권하고 있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1930년대에 자신의 동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대개알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은 신호를 보냈다. 그에 따라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서로를 적당히 비판했다. 그러자 대량학살이 이어졌고, 공산당 자체가 끝장나버렸다.  - P639

그러나 베르만 민츠, 비에루트는 굳건히 버텼다. 그들이 제대로 된폴란드인이라고,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라고, 제대로 된 애국자라고못 미더워하는 국민과 의심스러워하는 스탈린 모두에게 계속 주장하면서 비록 유대인들은(공산주의자건 아니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도록 강요받았으나, 당시 폴란드에서 시오니스트와 코즈모폴리턴에 대한 공공연한 숙청은 없었다. 그의 친구 비에루트에게 양보하고 또 충성하면서, 베르만은 폴란드의 주된 체제 위험 요소는 유대인이 아닌 폴란드인의 내셔널리즘 우경화라는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51년 7월에 고무우카가 결국 체포되었을 때, 그를 체포하러온 두 명의 보안요원은 (고무우카의 기억에 따르면 유대계였다. - P640

1950년에서 1952년 사이, 폴란드인들이 숙청에 대해 미적거리는 동안 냉전은 군사적 대립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력에 대한 스탈린의 우려를 극대화시켰다.
1950년대 초, 소련은 세계대전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치에서있는 듯 보였다. 소련을 포위하는 듯싶었던 세 대국, 즉 독일, 폴란드, 일본은 모두 완전히 허약해져 있었다.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가되었다(그 국방장관을 소련 장교가 맡고 있는), 소련군은 베를린에 진주했고,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독일의 소련 점령 구역은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탈바꿈했고, 독일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일찍이 독일의 발트해 연안 영토였던 동프로이센 땅은 공산 폴란드와 소련 스스로에게 분할 흡수되었다. 1930년대에는 소련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일본이 패배하고 무장해제되었다. - P641

다만 그쪽에서는 소련이 승리에 기여한 내용이 별로 없었고, 점령에서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일본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비록 패배했지만, 일본은 동아시아의 정치를 바꿔놓았다. 1937년일본의 중국 침략은 결국 중국 공산당에게 좋은 일만 만들어주었다. 1944년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육전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는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국민당 정권에는 치명타를안겼다. 일단 일본이 항복하자, 그 군대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이 기회를 잡았다. 30년 전 러시아 공산당과 상당히 비슷하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스스로는 대제국을 세울 목표에 실패하고, 이 - P641

웃 나라에 공산혁명이 일어날 기회를 준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1949년 10월에 선포되었다.
워싱턴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세계 공산혁명의 연속으로 봤지만, 스탈린에게 이는 희소식이지만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처럼 스탈린의 종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지만, 스탈린은 그 당에 개인적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야심 있고 예측 불가능한 라이벌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정책을 만들며, 스탈린은 이제 소련이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라는 위 - P642

치를 유지하는 목표에 열중해야 했다. 이런 우려는 먼저 한반도 문제에서 공산국가 하나가 막 수립된 땅과 관련해서 일었다. 1905년부더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물러났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 남부는 미국에 의해 분할점령되었다. 북한공산당은 1948년 북한 지역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41950년 봄, 스탈린은 한반도 남부를 침공하고 싶어하는 북한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를 "주 방어선" (일본과 태평양 지역의) 밖에 놓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이 1월에 그렇게 밝혔기 때문이다. 미군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가 남한 군대를 쉽사리 밀어버릴 수 있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행운을빈다고 하고, 소련제 무기를 북한에 보내주었다. 북한은 1950년 6월25일에 남침했다. 스탈린은 심지어 수백 명의 한국계 소련인을 중앙아시아에서 차출해 북한 편에서 싸우도록 했다. 13년 전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이주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을. - P643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무력 대결처럼 보일점이 많았다. 미국은 빠르고 확고하게 대응했으며, 일본과 그 밖의 태평양 지역에서 병력을 동원, 북한을 본래의 경계선 밖으로 쫓아버릴수 있었다. 9월, 트루먼은 NSC-68을 승인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전 세계에서 봉쇄한다는 미국 대전략(조지 케이 수립한 아이디어였다)의 비밀스럽고 공식적인 승인이었다. 10월, 중국이 북한 편에서 참전했다. 1952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공산주의 북한 및 공산주의중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군 탱크가 소련제 탱크와 싸웠고, 미군 전투 - P643

기가 소련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스탈린은 아마도 두 전선에서의 전쟁이 될 확전을 두려워했던 것같다. 1951년 1월, 스탈린은 동유럽 위성국가 지도자들을 불러모아유럽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도록 했다. 1951년과 1952년, 붉은 군대의 병력은 두 배로 늘었다.

정확히 이 시기(1951년에서 1952년)에, 소련 유대인들은 미국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탈린에게 상당히 들었던 것같다. 베를린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폴란드에서 실망하고, 한국에서전쟁을 겪은 스탈린은 다시 한번적어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던 그의 상상속에서는)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처럼, 1950년대에도 소련을 국제적 음모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그주체가 더 이상 베를린, 바르샤바, 도쿄(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는 아니더라도. 그러나 워싱턴(그리고 런던을 그 배후로 하는)의 음모는?
스탈린은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함을 공공연히 피력했고, 1930년대 말에 위협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 P644

이때 소련 유대인에 대한 정치재판이 또 이어질 거라고 믿지 않기란힘들었다. 1952년 8월, 13명의 소련인이 미국 첩자라는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기보다 이른바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시오니즘이 그 이유였다. 고문 결과 그들은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미국의 스파이라는 자백을 했고, 비밀 재판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1952년 12월에는 프라하에서 11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재판을 받았다. 대개 모스크바의 경우와 똑같았는데, 다만 대공포 시대를 연상시키는 공개 정치재판을 받았다. 이제는 폴란드 정권조차사람들을 이스라엘 스파이라며 잡아들이고 있었다. "
1952년 가을, 또 여러 명의 소련 의사가 조사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즈다노프나 셰르바코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밖의 유력한 소련 또는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임종 시 치료를 맡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스탈린의 주치의였는데, 그는 1952년 초 스탈린에게 은퇴를 권고했다. 스탈린의 공개적이고 반복적인 지시에 따라, 이들은 무섭게 얻어맞았다. 그러자 일부는 고문자들의 구미에 맞는 대사로 이뤄진 자백서를 썼다. 하필 솔로몬 미호엘스의 조카였던 - P649

미론 봅시는 스탈린주의적인 로봇 같은 말들로 자백서를 썼다. "생각을 거듭한 결과, 제가 지은 죄의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반드시제 사악한 일의 전모를, 소련의 특별한, 지도적인 국가 일꾼들의 건강을 해치고 수명을 줄이려던 음모의 끔찍한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는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단 자백서가 확보되자, 나이 먹어가던 어떤 남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듯했다. 스탈린은 대개 주먹을 날리기 전에 계획을 잘 짜곤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서두르는 듯 보였다. 1952년 12월 4일, 슬란스키를 처형한 이튿날, 소련 중앙위원회는 "의사들의 음모"를 포착했으며 그 주요 역할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맡고 있다고 발표했다. 음모자들 가운데 한 명은 스탈린의 주치의이고, 그는 러시아인이었다. 그 외에는 유대계 의사들로 음모자 명단이 채워졌다.  - P650

이제 스탈린은 자신의 정치생활을 끝내라고 권고해줬던 주치의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적 두려움과 정치적 우려가 한데 얽혀 있다는 또 다른 증좌를 보였다. 그는 딸 스베틀라나에게 문자 그대로 의존했다. 1952년 12월 21일, 그의 일흔세 번째 생일에 그녀와 함께 춤을 출 만큼.
그 12월, 그는 자기 자신의 사신을 숙청하기를 바랐던 듯하다. 공산주의자는 불멸의 영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믿었다. 생산양식의 변화에서 드러난 대로, 프롤레타리아의 세력화에 반영된 대로, 공산당에 의해 대표되고, 스탈린에 의해 정제된 대로, 그리고 그럼으로써 결국 스탈린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역사! 삶이 다만사회적 구성의 산물이라면, 죽음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리고 모 - P650

든 것이 용감하고 굳건한 의지의 변증법에 따라 역전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의사들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대신 유발했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경고한 사람은 카운슬러가 아니라 살인자였다. 필요한 것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솔로몬 미호옐스는 기껏해야 리어왕의 역할을 했다. 어리석게도 너무 빠르게 권력을 내준 그것도 잘못된 후계자들에게 그랬던 지도자였다. 이제 미호옐스는 무력한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그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소련의 몰락을 꾀했고, 제2차세계대전의 역사를 다르게 쓰려 했으며, 잘못된 미래를 꿈꾸었다. 따라서 사라져야 마땅했다. - P651

이제 73세의 병든 노인이 된 스탈린은 누구의 권고도 받아들이지않고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갔다. 1952년 12월, 그는 "모든 유대인은내셔널리스트이며 미국의 정보원이다"라고 발언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도 편집증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달에 이렇게도 말했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이 미국에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전설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보기 드문 통찰력으로, 스탈린은 냉전(심지어 그것이 끝나고 나서도 수십 년 동안 유지될)의 주요한 신화 가운데 하나를 정확히 예견했다. 사실은 연합국 중 어디도 유대인 구출에 별 힘을 쓰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중요한 살육 공장을 보지도 못했다.  - P651

스탈린은 그가 한때 가졌던 힘, 그가 꾸며낸 세상으로 실제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는 힘을 잃었다. 그는 안보 총책임자를 위협해야 하는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단지 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말이다.
그의 부하들은 스탈린이 증거로 여겨질 수 있는 자백과 우연의 일치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의 관료적 우선순위 문제에, 심지어 어떤 점에서는 법률에 가로막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대 반파시즘 위원회 멤버들에게 실형을 부과했던 판사 한 명은피고들에게 항소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했다. 소련 유대인들의 기소과정에서, 보안 총책임자들은 때때로 부하들과 실갱이를 벌였다(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피고들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에 납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문 과정은 비록 야만적이었으나 언제나 원하는 대로의 증거를 뽑아낼 순 없었다. 고문이 행해졌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스탈린이 직접 실시를 종용한 경우에만 행해졌다. - P657

사표시가 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스탈린의 죽음 뒤 약 40년을 더 지속했다. 그러나 그 보안기구는 다시는 인위적 기근이나 대량 사살을 실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도 나름대로 야만적인 인간들이었으나, 스탈린식의 대중 테러는 삼갔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탈린의 후계자가 된 니키타흐루쇼프는 예전에 그 자신이 수용소로 보낸 우크라이나 죄수들을대부분 석방했다. 대량학살을 막을 힘이 없어서 막지 못했다는 것은흐루쇼프를 두고 할 말이 아니다. 그는 1937년에서 1938년까지 누구보다 앞장서서 테러를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앞장서서 우크라이나를 재정복했다. 그보다 그는 소련이 더 이상 종전처럼 굴러갈수 없음을 알았다고 봐야 하리라. 그는 심지어 1956년 당 전체 회의연설에서 스탈린의 범죄 일부를 폭로하기도 했다. 비록 공산당 간부들의 고난에 초점을 두고, 더 많은 숫자의 학대받은 집단(농민, 노동자, - P658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었지만 말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남았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더 이상 정치재판(1930년대 대공포의 전주곡이었던)을 넘어 대량학살로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폴란드를 제외하고) 농업을 집단화했다. 그러나 결코 농민이 소작물을 사적으로 활용할 권리를 엄금한 적은 없었다. 소련과는 달리, 위성국가에서는 인위적 기근도 없었다. 흐루쇼프 치하에서, 소련은 1956년에 공산 위성국가인 헝가리를침공했다. 비록 그곳의 내전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고, 소련의 개입으로 정권 담당자가 교체되어야 했지만, 유혈 숙청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1953년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 공산 동유럽에서의도적으로 살해당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의 ‘대량학살 시대‘, 그리고 1945년에서 1947년까지의 ‘인종 청소 시대‘에 비하면 희생자수는 미미했다. - P659

해 사실상 검토하지 않았다.
1950년대처럼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냉전기에도 이스라엘에대한 불신을 심었다. 1953년 1월 소련 언론의 기사에서 따온 주제로,
1967년 폴란드 언론은 서독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이스라엘에 심었다고 보도했다. 정치 카툰은 이스라엘군을 독일 국방군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자국의 존재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희생에 따라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뒤집어 봐야 마땅한 것이었다.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엔,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이행하는데, 국가사회주의가 그 한 예였다. 당시 제국주의 진영의 수장은 미국이며, 이스라엘과 서독은 그 발톱이었다. 이스라엘은 민족 희생에 대한 특별한 역사적 주장거리가 있는 소국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주춧돌 가운데 하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 P662

바르샤바 거주민들은 움슐락플라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기차역에서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움슐락플라츠, 그곳은 바르샤바 유대인들이 겨우 26년 전에 트레블린카로 떠나가야 했던 곳이다. 적어도 300만 명의 유대인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폴란드를 떠났다. 이러한 공산주의 반유대주의의 에피소드 이후에는 약 3만 명이 남았다. 폴란드 공산당과 그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은 1968년이나 그 이전 시기의 희생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폴란드인들을 올바른 주장(인종적 순수성과 영웅주의)에서 엇나가게하려는 자들이었다.
1968년 폴란드의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수만 명의 삶을 바꿨으며, 많은 지적인 동유럽 남녀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를 끝장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에는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그 당시스탈린주의 경제 모델의 잠재력은 공산 폴란드에서 소진되었으며, 이는 다른 공산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집단화는 농업경제를 전혀 촉진시키지 못했다. 빠른 성장은 오직 강제적인 산업화 가능했다. - P665

비록 1968년 3월 폴란드 학생들이 휘두르는 경찰봉에 쓰러졌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동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개혁하려고시도했다. ‘프라하의 봄‘ 동안 공산정권은 언론의 자유를 매우 높은수준까지 허용했으며, 그에 따라 경제개혁의 지지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측 가능했다시피, 민간의 논의는 정권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났다. 소련의 압력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르 둡체크 체코 공산당 서기장은 집회와 토론이 계속되도록 했다. 그해 8월, 소련군(폴란드, 동독, 불가리아, 헝가리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소련의 선전 내용은 폴란드 지도부의 반유대주의 실험이 원칙에벗어난 게 아니라고 확정했다. 소련 언론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개혁가들이 실제로 또는 허구로 유대인 핏줄이라는 데 크게 주목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폴란드에서는 비밀경찰이 저항운동 멤버들가운데 유대인 혈통인 사람들을 특히 예의주시했다. 1985년 미하일 - P666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개혁자로 권좌에 올랐을 때, 그의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은 구체제를 지키는 데 러시아 민족주의-반유대주의를 동원하려 했다."스탈린주의는 동유럽 유대인들을 독일의 희생자라는역사적 위치에서 끌어내고 공산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음모가 그들의배경에 있는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음모의 주역들로 못 박는 일은 아주 쉬웠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히틀러의주된 범죄를 구별해내고 정의하기를 꺼린 까닭은 수십 년 뒤 그들이히틀러의 세계관을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 P667

모스크바, 프라하, 바르샤바의 스탈린주의적 반유대주의는 별로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과거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는 소련 인민들의 고통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러시아인과 슬라브족이야말로 최대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했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충성스러운 슬라브족(그리고 다른 민족들 추종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와희생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슬라브족의 무죄와 서방의침략이라는 구도는 냉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물론 그것은 서방제국주의 진영의 이스라엘과 미국에 유대인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역사에서 침략자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필요로 했지만 말이다.
공산당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한, 홀로코스트는 그 실체를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수백만 명의 비유대 동유럽인이 전장에서, - P667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포위된 도시에서, 촌락과 시골에서 죽어간바로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비유대인의 고난에 역점을 두는 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스탈린에서 시작해 사회주의권이 끝날 때까지,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서방 세계에서 독일 육군을무찌르는 데 붉은 군대가 세운 공을, 또한 독일 점령기에 동유럽 인민이 겪은 고통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 만했다. 여기에 한가지만수정이 가해졌다. 홀로코스트를 일반적인 고난 속에 묻어버리고, 동유럽에서 한때 중심적이던 유대 문명을 외적인 것으로 몰아내는 것. 냉전기 동안, 서방 세계에서의 자연스런 반응은 스탈린주의의 막대한고난이 소련 국민의 몫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역시 사실이었다. - P668

그러나 소련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유일한 진실, 또는 완전한 진실이라고 할 순 없었다. 이러한 기억의 경쟁 가운데, 또 다른독일의 대량학살 정책이었던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주의적 대량학살은 서로 다른 역사로 분기되었다. 비록 시간과 공간에 있어 서로 공통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소련 체제가 저지른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과 같이, 홀로코스트 역시 블러드랜드에서 자행되었다. 대전 이후 유럽 유대인들의오랜 고향은 공산국가의 영토가 되었고, 죽음의 공장과 킬링필드 역시 그리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반유대주의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스탈린은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축소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국제적인집단 기억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독일과 서유럽 유대인들의 경험에 중점을 두었고, 희생자 가운데 소규모 집단들, 아우슈비츠(학살된 유대인 중 겨우 6명에 1명 정도와 관련 있던)에 집 - P668

중되었다.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장막은 서방과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 P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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