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이름을 갖는다. 들판에서 밀의 환상을 봤던 소년은 이오시프 소볼레프스카였다. 그는 굶어 죽었다. 1933년, 기근에 시달리던우크라이나에서 어머니와 다섯 형제와 함께. 그때 살아남은 그의 형제 하나는 1937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에 죽었다. 오직 한 사람, 여동생 한나만이 끝까지 살아서 그와 그의 희망을 들려준다. 스타니스와프 비가노프스키라는 청년은 자신의 체포된 처, 마리아와 반드시재회하리라 내다봤다. "지하에서 말이야." 그들은 1937년 레닌그라드에서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총살되었다. 자기 결혼반지에 대해 쓴 폴란드 장교는 아담 솔스키였다. 그의 일기는 그가 1940년에 총살된 카틴 숲이 파헤쳐졌을 때 그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다. 아마 결혼반지도 숨겼을 테지만, 그를 쏴 죽인 병사들이 뒤져서 챙겨갔을 것이다.
1941년, 포위와 굶주림의 레닌그라드에서 간단한 일기를 남긴 열한 - P670

살짜리 러시아 소녀는 타냐 사비체바였다. 그녀의 누이 중 한 사람은얼어붙은 라도가 호를 건너 살아남았다. 타냐와 그 밖의 가족 전부는 죽었다. 1942년 벨라루스의 죽음의 구덩이에서 아빠에게 편지를썼던 열두 살짜리 유대인 소녀는 유니타비시니아츠카야였다. 그녀옆에서 편지를 썼던 그녀의 어머니는 즐라타였다. 모녀 모두 목숨을잃었다. 유니타의 편지 마지막 구절은 "이제 진짜 마지막 작별 인사예요. 입맞춤을, 끝없는 입맞춤을 보내요"였다.
모든 죽음은 숫자가 되었다. 이오시프에서 유니타의 죽음 사이에 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블러드랜드에 1400만 명 이상의 피를 뿌렸다. 살육은 스탈린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내린 지령에 따른 정치 프레임으로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300만명 이상의 목숨이 거둬졌다. 그리고 1937년과 1938년, 스탈린의 대공포가 이어졌다.  - P671

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둘을 떼어놓고 비교하기보다 우리 시대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식으로 비교하는 게 필수적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1951년에 시도하고, 두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이름 아래하나로 합쳐 봤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그녀에게 "잉여인간"이라는관념을 일깨워주었다. 홀로코스트 역사의 개척자인 라울 힐베르크는나중에 그녀에게 관료 국가가 20세기에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제거했던지를 보여주었다. 아렌트는 현대의 잉여인간에 대한 지워지지 않을 상을 제시했으니, 대중사회를 박살내고, 진보와 행복의 이야기 가운데 죽음이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런 상이 떠오른다고 했다. 학살의 시대에 대한 아렌트의 오래 남는 상을 풀이하면 이랬다. 사람들(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이 서서히 인간성을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먼저 대중사회의 익명성 속에서, 다음에는 집단수용소에서 이것은 강력한 이미지이며, 나치와 소련의 학살을 역사적으로 비교하기 전에 정확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 P672

그러나 집단수용소에서의 살육이라는 이 두드러진 예는 아렌트의 현대사회 개념과는 큰 관련이 없다. 그녀의 분석은 우리의 주의를 베를린과 모스크바로, 즉 전체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멀리 떨어진 국가들의 수도로 돌리며, 각각 그 시민들에게 벌인 짓에 주목하도록 한다. 그러나 소련 전쟁포로들은 두 가지 체제의 상호작용 때문에죽었다. 아렌트의 전체주의론은 현대 대중 산업사회 내의 비인간화에 주목할 뿐,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권력 열망이 역사적으로 중첩되었을 때의 효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 병사의 결정적 순간은 그들이 붙잡혔을 때였다. 그때 그들은 소련 상급 장교와 내무인민위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일군과 친위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그들의 운명을 한 현대사회의 진보적 소외 현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것은 두 세력의 충돌, 소련 영토에서 펼쳐진 독일의 범죄적 정책의 산물이었다. - P673

1941년 하반기에 겨우 며칠 만에, 독일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대량 사살했는데 그 숫자는 그들의 집단수용소에서죽어간 숫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가스실은 집단수용소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안락사" 프로그램을 위해 의료 살인 시설로 쓰려던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 동부의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가스차량이 등장했고, 헤움노에서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 땅의 유대인 학살에 가스 차량이 쓰였다. 그다음이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의 영구 가스 시설이었다. 가스실은 점령된 소련 땅에서 유대인 대량학살 정책을 위해 쓰이는 한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에서 - P674

그러나 의도적인 대량학살 프로그램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살인 공장과는 달리). 비록 일부 유대인이 정치범으로 수용소형을 선고받고, 또 일부는 노동자로서 그곳에 가긴 했지만, 집단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유대인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들은살아남은 유대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집단수용소가 유명해진또 다른 이유다. 그들은 수용소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일하다가 끝내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끝 무렵에 들어와 바로 해방된 사람들이. 유럽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라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 등지의구덩이, 가스 차량, 살인 공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아렌트가 본 대로, 아우슈비츠는 산업적인 집단수용소와 살인 공장의 보기 드문 조합체였다.  - P675

이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인을 수용했고, 다음에는 소련의 전쟁포로들을, 그러고 나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수용했다. 살인 공장이 기능에 추가된 뒤, 일부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은 노역을 위해 분류되고, 지칠 때까지 일하고, 가스실로 갔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아렌트가 주장한, 죽음으로 끝나는 진보적 소외의 이미지에 걸맞을 수도 있다. 그것은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쓴 글들과도 구색이 맞았다. 타데우시 보로프스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 등등의 글과 그러나 그런 체험담들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런 체험은 홀로코스트의 일반 진행 과정을 포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조차 그랬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죽었고, 수용소 내부 생활을 전혀 해보지 못했다.  - P676

그 수용소에서 가스실로의 이동은 아우슈비츠 복합 시설의 역사에서 적은 부분만 차지했기에, 이를놓고 홀로코스트의 대량학살의 일반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분명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주요 장소이기는 하다. 학살된 유대인의 대략 여섯 명 중 한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살인 공장은 마지막으로 가동했던 살인 공장이며,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최고 수준까지 발휘한 시설도 아니었다. 가장효율적인 총살 부대나 아사 정책이 사람들을 더 빠르게 죽일 수 있었다. 트레블린카도 아우슈비츠보다 처리 속도가 빨랐다. 아우슈비츠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유대인 집단인 폴란드 유대인과 소련 유대인을 학살하는 주된 장소도 아니었다.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 P676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밖에 안 되었다.

아마도, 아렌트의 말처럼, 나치와 소련의 대량학살은 현대사회에내재된 뭔가 심층적인 어두움의 상징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현대성이나 그 밖의 무엇무엇에 대해 그런 이론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확실히 팩트체크를 해야 한다. - P677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블러드랜드에 대하여 말이다. 실제로, 오랫동안 유럽의 대량학살 시대에 대해서는 이론이 실제를 넘어서고, 오해가 두드러진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참으로 많은 지식을 가졌던, 그러나 그 범위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2차 문건에 한정된)와 달리, 우리는 이런 ‘이론에 지식을 맞추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죽은 이들의 숫자는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정확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두 체제의 파괴성을 파악하기에는 넘칠 만큼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이나 전쟁포로를 죽이는 정책으로, 나치 독일은 블러드랜드에서 약 1000만 명을 학살했다(그리고 다른 지역까지 합하면 총 1100만명) - P677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블러드랜드에서 400만 명 이상을 죽였다(총 600만 명), 기근, 인종 청소, 수용소 장기 재소 등으로 빚어진 죽음(예측 가능했던까지 치면, 스탈린에게 죽은 숫자는 아마도900만 명, 나치는 1200만 명으로까지 늘어난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숫자는 완전히 정확하게 셀 수는 없다. 또한 적어도 수백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희생자로서, 두 체제 모두의 희생물이 되었다.
나치와 스탈린주의자들의 손길 모두가 가장 많이 닿은 곳은 바로 블러드랜드였다. 오늘날의 지명대로 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연방의 서쪽 변방, 폴란드의 대부분, 발트 삼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나치와 소련의 힘이, 그리고 악의가 서로 겹치고 얽힌 땅이었다. 블러드랜드가 중요한 까닭은 희생자의 대부분이 그 땅 출신이라는 데만 있지 않으며, 다른 곳 출신자의 살육정책에도 그 땅이 중심지 노릇을 했다는 데 있기도 하다.  - P678

예를 들면독일은 54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그중 400만 명 이상이 블러드랜드 출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폴란드, 소련,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계 유대인이었다. 그 밖의 유대인들은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 왔었다. 블러드랜드 밖에서 온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집단은 헝가리유대인이었는데, 블러드랜드의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도 본다면, 이곳에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동유럽 유대인은 거의 90퍼센트가 된다. 좀더 소규모 유대인 집단은 서유럽과 남유럽에서 끌려와 블러드랜드에서 죽었다.
유대인 희생자들처럼, 비유대인 희생자들도 블러드랜드 태생이거나 그곳에 끌려와 죽은 사람들이었다. 전쟁포로수용소와 레닌그라드 및 다른 도시들에서, 독일은 4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굶겨 죽였다. - P678

고의적 기근의 결과 죽어간 사람의 대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은 블러드랜드 태생이었다. 아마 그외지역 출신의 숫자는 100만 명에 이를것이고, 그 대부분은 러시아계였을 것이다. 스탈린의 대량학살 정책의 희생자들은 소련 전역에서 골고루 나왔으니, 역사상 가장 큰 국가를 샅샅이 훑듯 했다. 그렇다 해도, 스탈린의 철권이 가장 강력하게꽂힌 곳은 소련의 서쪽 변경지대, 다시 말해 블러드랜드였다. 소련은 집단화 과정에서 50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는데, 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소련은 1937년에서 1938년의 대공포 시기에 68만1691명의 학살을 기록했는데, 그 다수가 폴란드계 소련인과 우크라이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서부 소련 거주자였고, 따라서 블러드랜드 거주자였다.  - P679

아렌트와 그로스만을 함께 보면, 두 가지 간단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첫째, 나치 독일과 소련의 합당한 비교는 그 범죄들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희생자들, 집행자들, 방관자들, 지도자들을포함한 모든 범죄 관련자의 인간성을 어떻게 봤는지를 따져야만 한다. 죽음은 해답이 아니라 주제다. 그것은 소란의 실마리가 되리라. 결코 만족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은 확실한 실제보다 말잔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은 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반대가 차라리 말이 되기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정치적, 지적, 문학적, 심리학적으로 대량학살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로는 뭐가 있는가?‘ 그런 끝맺음은 잘못된 화음이다. 백조의 노래를 빙자한 사이렌의 노래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야 한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 - P682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1932년에는 스탈린이, 1941년에는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유토피아는 주에서 12주 동안 소련을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것은 그와 같은 시간에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큰 거짓말의 힘을 빌려 실행에 옮겨졌다.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 정치를 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두고 적들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며,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는 자신들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또는 바람직하다고입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두 사람 다 유토피아를 뒤바꾼 형태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대량학살 정책을 ‘실질적인 승리‘로 대신 내세웠다. - P683

집단화도 ‘마지막 해결책‘도, 무오류의 존재라고 내세워진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집단화가 우크라이나에서 저항과 굶주림을 불러오자, 스탈린은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독일군이모스크바에서 차단되고,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부농,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이 소련체제 건설이 지연되는 죄를 뒤집어썼듯이, 유대인들은 소련 체제 파괴의 실패가 빚어진 죄를 뒤집어썼다. 스탈린은 집단화를 선택하고, 히틀러는 전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그런 선택 - P683

의 결과 빚어진 최악의 상황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일은 훨씬더 손쉬웠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기근과 부농 및 소수 민족의 대량 총살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원래의 비전을 뒤틀었다. 히틀러 역시모든 유대인의 사살과 가스 학살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비전을 바꿨다. 집단화가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뒤, 스탈린은 그것이 계급투쟁의승리를 의미한다며 엉뚱한 의미 부여를 했다. 유대인들이 총탄과 독가스에 죽어갈 때, 히틀러는 그것이 전쟁 목표 그 자체를 달성한 것이라고 어느 때보다 더 명확히 선언했다. 전쟁에 지면서, 히틀러는 유대인 대량학살이야말로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 P684

스탈린은 유토피아를 재정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탈린주의 자체가 목표 수정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추동했던 유럽 혁명에서, 그 혁명이 불발하자 소련의 방어로 후퇴한 것이었다. 1920년, 붉은 군대가 공산주의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자, 스탈린은 ‘후퇴 계획‘을 마련했다. ‘일국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하나의나라, 소련에서 완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재앙을 가져오자, 그는 수백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어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정책 추진 과정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그 덕으로 무서운 국부이자 정치국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굳혔다. 1937년에서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를 부농과 소수 민족 박멸에 내세운 뒤,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1941년 붉은 군대의 퇴각 후, 그러고 나서 결국1945년에 승리한 뒤, 그는 러시아 민족주의에 기댔다.  - P684

히틀러에게도 그런 유토피아론 재창작 능력이 있었다. 굶주림 계획으로 수천만 명이 죽고, 일반 계획으로 굶주림 또는 강제이주의 결과수백만 명이 또 죽었다. 전쟁이 그의 사고를 크게 바꾸게 된 이상, 그런 일들은 나치가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부른 것의 일환으로 치부되었다. 전쟁에 이겨서 유대인 문제를 해소하기를 기다리기보다, 히틀러는 절멸 정책 자체를 전쟁 도중에 추진하기로 했다. 1941년 7월, 유대인 학살은 뚜렷한 결과가 없는 전쟁 한 달 뒤에 격화되었으며, 1941년12월 모스크바가 함락을 면한 다음에도 그리되었다. 특정 유대인들을 죽이는 정책은 본래 군사적 필요성이라는 말로 뒷받침되었고, 정치적, 경제적 기획과 일부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상황이 변하고 정치, 경제 기획들이 포기 또는 지연을 겪으면서 학살의 범위와규모는 급증했고, 유대인 말살 그 자체가 히틀러의 목표가 되었다. - P685

마지막 해결책의 마지막 판은 스탈린의 즉흥적 변조가 그랬듯 히틀러나 그의 체제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합리적 계획의한 단계라기보다 미학적 비전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원래의 정당화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우주적인 음모가 있으며 그것이 게르만의 미덕과 정면 충돌한다는 반유대주의 주문으로바뀌었다. 스탈린에게, 정치 갈등은 언제나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히틀러와 거의 정반대였다. 히틀러가 공화국을 혁명적 식민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반면, 스탈린은 혁명 마르크스주의의 시를 지속 가능한 일상의 정치로 번역했다. 스탈린의 계급투쟁은 언제나 소련 국가 노선으로서 일반에 표시되었다.  - P685

나치와 소련 체제의 비슷함을 두말없이 받아들인다면, 그 차이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보게 된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자유주의와민주주의에 적대한다. 두 정치 체제 모두, ‘당‘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뒤집혀 있다. 인정된 규칙에 따라 권력을 추구하는 여러 집단 가운데 하나를 의미하기보다, 그 규칙 자체를 정하는 유일한 집단이 된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모두 일당 독재국가였다. 나치나 소련이나 당이이데올로기와 사회 규범 제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나라였다. 그정치 이론은 국외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경제 엘리트는 특정집단이 잉여적이며 유해하다고 확신했다. 두 정부 모두, 경제기획자들은 농촌 지역에 필요 이상의 주민들이 거주한다고 봤다. 스탈린주의적 집단화는 잉여 농민들을 농촌에서 도시나 강제수용소로 보내 노동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그들이 굶어 죽는다?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식민화 계획은 수천만 명의 인위적 기근과 강제이주를 추진했다. - P686

소련과 나치의 정치경제는 모두 사회 집단과 그들이 산출하는 자원을 통제하는 집단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1930년부터 스탈린의 농촌 대개혁 수단이던 집단농장은 1941년부터 독일 점령군 당국에 의해 활용되었다. 점령된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소련의 도시들은 새로운 집단 구역, 즉 게토를 설치했다. 도시의 유대인 거주 게토는 비록 처음에는 이주를 앞두고 대기토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유대인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쓰였다. 명목상 유대인 자치기구인 유대인 평의회는 보통 "기부금" 징수와 강제노동 조직에 의존했다. 게토나 집단농장이나 지역민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치도 소련도 대규모의 노동집약수용소를 운영했다. 히틀러는할 수 있었다면 소련 수용소를 유대인과 그 밖의 명백한 적들을 관리 착취하기 위해 써먹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독일군이 소련 땅을 충분히 점령하지 못했다 - P687

스탈린도 히틀러 못지않게 재산 몰수와 인종 청소를 입에 올렸다. 그러나 민족 말살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당위성은 언제나 소련 국가의 수호나 사회주의의 진흥에 연결되어 있었다. 스탈린주의에서 대량학살이란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방어를 의미하거나 사회주의의 완성을 의미했다. 그 자체로 정치적 승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스탈린주의는 자체 식민화의 기획이었고, 상황이 허락되면 대외로 확장되는것이었다. 반면 나치의 식민주의는 빠르고 완전한 대 동부 제국의 정복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으며, 전쟁 이전의 독일보다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제국 운영에 앞서 수천만 명의 민간인을없애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독일은 대체로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소련은 보통 소련 국민을 학살했다. 소련 체제는 소련이 전쟁 중이 아닐 때 가장 살인적이었다. - P688

반면 나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겨우 수천 명의 사람을 죽였다. 정복 전쟁 중에는 역사상 그 어느 국가보다 더 빠르게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그 단위의 희생자를 낸 경우만 볼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비교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두 체제의 맛을 모두 봐야 했던유럽의 수억 명의 사람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 P688

지도자와 체제의 비교는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수억 명의 유럽인은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을 곱씹어야 했다. 그 체제들이 뭔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치명적 운명을 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1933년 초 독일의 실직 노동자들에게는 정말 중대했다. 사회민주당, 공산당, 나치당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말이다. 또한 같은 시간대에 굶어 죽어가고 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도중대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독일의 침공이 그들의 구원이 되지 않을까 꿈꾸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의 유럽 정치인들도 그랬다. 스탈린의 인민전선에 가입할까 말까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딜레마는 당시 폴란드에서 더 두드러졌다. 당시 폴란드 외교관들은 강력한 이웃인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게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인지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 P689

1939년에 독일과 소련이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폴란드 장교들은 어느 쪽에 항복할지를 선택해야 했고, 폴란드 유대인들(그리고 그 밖의 폴란드 국민)은 어느 점령지역으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일부 소련 전쟁포로들은 전쟁포로수용소에서 굶어 죽을 위험 앞에서 독일군에 협력하는 문제를 놓고고심해야 했다. 벨라루스의 젊은이들은 소련 빨치산이 되느냐, 독일경찰이 되느냐를 고민해야 했다(결국 둘 중 하나로 취급되어 탄압받게 되지만). 1942년 민스크 유대인들은 게토에 남아 있느냐, 숲으로 달아나 소련 빨치산을 찾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1944년 폴란드 국내군 지휘관들은 독일군에게서 바르샤바를 자신들 스스로 해방시킬지, 아니면 소련군이 오기를 기다릴지 선택해야 했다. - P689

1933년 우크라이나 기근의 생존자 대부분은 훗날 독일의 점령을 겪었다. 1941년 독일의 수용소에서 아사를 면한 생존자 대부분은 스탈린의 소련으로 돌아갔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유럽에 남은 대부분도 공산 국가의 국민이 되었다.
결정적 시기에 유럽의 결정적 지역에 살았던 이 유럽인들은 싫어도 체제 비교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두 체제를 국외자의 입장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체제들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겹치고 섞이는 상황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치와 소련 정권은 때로는 동맹자였다. 폴란드를 동시에 침공했을 때처럼. 또 때로는 적으로서 서로 통할 수 있는 목표를 가졌다. 1944년스탈린이 바르샤바 봉기자들을 돕지 않기로 하고, 그리하여 독일군이 훗날 공산정권에 저항하게 될 사람들을 없애도록 했던 것처럼. 이것이 바로 프랑수아 퓌레가 "적대적 공모belligerent complicity"라고 불렀던 관계다.  - P690

유럽의 대량학살이 멈추고 수십 년이 지나자, 책임은 대부분 "부역자들의 발밑에 놓였다. 부역의 고전적 예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경찰 노릇을 했던 소련인들로, 그들의 임무 중에는 유대인 학살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이데올로기적 이유에서 부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극소수만이 뭔가 정치적 목표를 얼마간 띠고 그 일을 했다. 물론 일부 부역자는 점령 국가에 대해 정치적 동질감을 느끼긴 했다. 가령 소련의 점령에서 탈출했던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그들에게 1941년 리투아니아 해방을 가져다줬다고 봤다. - P698

점령기에 우크라이나 또는 벨라루스에서 독일 경찰로 일한 사람들 자신은 체제에서 거의 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들은 아주 밑바닥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유대인이 그들 밑이었고, 당연하게도 경찰이 되지 않은 일반 국민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친위대원, 당원, 병사, 독일인 경찰들에 비하면 자기 행동을 존중받지 못할 만큼 하찮았다. 이런 형태의 현지인 부역은 다만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는 의미 말고는 별게 없었다. 유대인을 쏘는 데 주저한 독일인은 그리 심각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경찰에 들어가지 않거나 대원을 그만둔현지인들은 반대로 독일인들에게는 전혀 해당 없는 대가를 각오해야했다. 굶주림, 강제이주, 강제노동 등등. 독일의 부역 제의를 받아들인소련군 포로는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 경찰을 위해 일한 소련 농민은 집에 남아서 수확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우리 가족은굶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소극적 기회주의였다. 이미 고약한 개인의 삶이 더 고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 P699

게토의 유대인 경찰은 소극적 기회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포함해 누구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소련 체제에서는 ‘부역자‘를 정의하기가 더 어렵다. 독일과 달리, 소련은 전시보다 평화시에 훨씬 더 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그리고 점령한 땅을 소련의 정식 영토로 병합하거나 그 형식적인 주권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점령 상태에 두지 않았다. 말하자면, 소련의 그러한 정책은 "운동"과 "전쟁"으로 제시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동료 시민들을 굶겨 죽이도록 신호를 받았다.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내놓으라는 것이 "부역"이라고 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체제가 이웃끼리 학살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사례가아닐 수 없었다. 굶주림은 추잡하고, 야만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됐다. - P700

공산당원과 지역 공무원들은 그들이 잘 아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거나, 죽도록 몰아가야만 했다. 아렌트는 집단화 과정의 기근을 도덕적 소외의 시작으로 봤다. 강력한 현대 국가 앞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무력함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모든사람이 (식량 징수와 소비 모두에 있어서) 그 기근에 관여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도덕적 통일성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체제를 따르는 까닭이 단지 스스로 선호하는 이데 - P700

올로기 때문이었다면 부역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블러드랜드에서 나치 부역자의 다수는 소련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 동쪽 지역, 민족 자결이 처음에는 소련, 다음에는독일의 지배에 밀려났던 그곳에서 일부 사람은 전에 소련에 부역했던 바로 그 이유로 독일에 부역했다. 소련 점령이 독일 점령으로 바뀌자, 소련군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은 독일 경찰로 탈바꿈했다. 1939년에서 1941년까지 소련에 부역했던 현지인들은 유대인을 죽임으로써나치의 눈에 죄인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빨치산 대원들은 앞서 독일과 소련에 모두 부역한 경력이 있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종종 별것 아닌 이유로 젊은이들이 소련 빨치산이 되거나 독일 경찰이 되거나로 갈렸다. 공산주의 학습을 받은 옛 소련 병사들이 독일의 살인 공장에서 일했다. 인종주의세뇌가 된 홀로코스트 일꾼들이 소련 빨치산에 들어갔다. - P701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버린 사람들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그 정치경제적 연관자 가운데 적절한 적용 시기나 열성파들이 없는이데올로기는 대량학살의 도덕적 해석이 된다. 말하자면 살해하는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범죄자를 단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따라서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는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는 편리하다. 경제의 중요성과 정치의 복잡성을 무시해버리고, 그런 요인들이 사실상 역사의 죄인들이자 나중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할 자들과 매한가지라고 치부해버리면 더편안할 수 있다. 더 유혹적이 될 만한 것은, 적어도 오늘날 서구인들 - P701

에게는, 희생자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이 블러드랜드의범죄자와 방관자들이 대면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과 같은 배경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희생자와 자기 자신의 동일시는스스로는 범죄자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살인 엔진을 시동한 트레블린카의 직원은 나와 다르다. 방아쇠를 당긴 내무인민위원회 대원도 나와는 다른 인간이다. 그런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그런 희생자와의 동일시가 더 많은 지식을주게 될지, 또는 그러한 살육자와의 분리가 윤리적으로 타당한 태도인지는 불분명하다. 역사를 도덕으로 치환하는 일이 그 누군가에게라도 도덕적인 일이 될 것인가? 확실하지 않다. - P702

사람의 주관적인 피해자 의식은 한도가 없어 보이며, 스스로 희생자라 믿는 사람은 대단히 폭력적으로 행동할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경찰관 한 사람은 벨라루스의 모길료프에서 아기들을 쏴 죽였다. 소련군이라면 자기 아이들을 쏴 죽일 거라고 상상한 결과였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든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 P703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나치와 소련을 비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역사적 이해를 넘어선다고 보는 일은 그들이 놓은 도덕적 덫에 걸리는 것이다. 더 안전한 선택은 그들이 왜 대량학살을 벌였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고, 아무리 그것이 말도 안 되게 느껴진다 해도 그들에게는 말이 되었음을 아는 일이다. 하인리히 힘러는 100명의, 또는 500명의, 또는 1000명의 시체가 줄줄이 쌓여 있는 걸 보는 게 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의의미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의 영혼의 순수함을 희생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런 희생은 살인자를 더 높은 도덕적 수준으로끌어올린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어떤 식의 헌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무리 극단적이라 해도, 나치의 가치가 우리와 전혀 동떨어지지는 않았음을 그 표현은 알려준다. 즉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이다.  - P704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양심이 아돌프 히틀러라는이름을 가졌다고 말했다. 히틀러를 지도자로 받아들인 독일인들에게, 믿음이란 매우 소중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은 그렇게 잘못 뽑기도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들의 믿음의 힘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악은 선에 의존한다는 간디의 말이 있다. 모여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헌신적이며 그 일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당시의 독일인들을 선량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임을 알려줄 근거는 된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들은 윤리적인 사고를 했다. 비록 무시무시한 착오를 저질렀지만 말이다.
스탈린주의 역시 정치뿐 아니라 도덕 체계였다. ‘무죄냐, 유죄냐‘는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도덕적 사고는 도처에 있었다. 어느 젊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은 굶주린 사람들에게서 곡물 - P704

을 빼앗는 일이 옳다고,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승리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에게는 도덕 감각이 있었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마르가레테 부버노이만이 카라간다의 굴라크에 있을 때, 동료 재소자가 그녀에게 "달걀을 깨지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토록 희생자의 규모가컸던 것은 그만큼 희망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량학살에 대한 낭만적 정당화도, 당장의 악이 미래의 선이 되리라는 이야기도, 완전히 틀린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아마 훨씬 더 나으리라. 아니면 더 온건한 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 P705

큰 고통이 큰 진보와 연관되리라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적 마조히즘이다. 말하자면 고통이 있음을 내재된 또는 곧 도래할 선의 징조로 아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스스로 풀어내는 것은 미신적 사디즘이다. 내가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내게 계시된 더 높은 차원의 목표에 부응하는 거라고 여기는것이다. 스탈린이 정치국을 대표하고 정치국은 중앙위원회를, 중앙위원회는 공산당을,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노동계급은 역사를 대표했으므로, 스탈린은 무엇이 역사적으로 필요한지에 대해 주장할 특권이있었다. 그런 지위는 그가 스스로에게 모든 책임을 면제해주고, 그의실패를 다른 이들에게 미룰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기근이 일정한 유형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바람직한 유형이나, 바람직해야 할 유형이냐이다. - P705

지금 우리의 추념 문화는 기억이 당연히 살육을 방지한다는 식이다. 그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이 죽었다면, 그들이 뭔가 자명한 가치때문에 죽었을 것이고 그것은 쉽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적절한 정치적 기억으로 갈무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자명한가치는 국가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수백만 명의 희생자는 소련이 위대한 조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또는 미국이 선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했다는 식이다. 유럽은 평화주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폴란드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전설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영웅을 가져야 했다. 벨라루스는 그 국민의 미덕을 증명해야했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의 운명을 실현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국가 정치와 국민 심리에 어느 정도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음에도,
나중에 만들어 붙인 정당화다. 그리고 진실된 기억과는 거리가 멀다.
죽은 사람들은 기억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억할 힘이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판단한다. 나중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한다. - P706

의미가 살육 행위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더 많은살육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여기서 아마도 역사의 목적이 나온다. 죽은 이의 숫자를 세는 것과그 계속적인 재해석 사이 어딘가에 대량학살의 역사만이 숫자와 기억을 통합할 수 있다. 역사 없이는 기억은 사적인 것으로 된다. 오늘날에는 개별 국가의 것으로 된다. 한편 죽은 이의 숫자는 공적인 것으로 된다. 국제적인 순교 행동, 복수 성전의 경쟁판에서 도구로 쓰인다. 기억은 나의 것이며 나는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 숫자는 객관적이며 나는 좋든 싫든 그 숫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식의 사고방식은 내셔널리스트들이 한 팔로는 스스로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이웃을 후려갈기도록 해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고 또 공산주의가 끝장난 뒤, 블러드랜드 전역(그리고 그 너머의내셔널리스트들은 희생자의 숫자를 부풀리고, 그에 따라 스스로를무구한 존재로 포장하는 데 맛이 들렸다. - P707

12년, 두 체제 동안 1400만 명이 의도적 살육을 당했다. 지금은 이에 대해 우리가 통달은 못할망정 조금이라도 알기 시작할 때다. 과장된 숫자를 반복하며, 유럽인들은 그들의 문화에 수백만 명의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을 집어넣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유령은 완전히 무력하다. 서로 경쟁적인 순교자 신화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순교자를 내세운 제국주의martyrological imperialism일 뿐이다. 1990년대의 유고내전은 부분적으로 세르비아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민족의희생자 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인식한 데서 비롯됐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러운 상황이 찾아온다.


죽은 자가 과연 어느 누구에게든 소속되는 것일까? 독일인에게 살육된 400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 가운데 약 30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이 300만 명의 유대인 모두는 폴란드인으로 치부되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그들 중 다수는 스스로를 폴란드인이라 굳게 믿었다. 유대인으로 죽은 사람들이 스스로 유대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 죽었다. - P714

또 이런 유대인 100만 명 이상은 스스로를 소련 국민이라 여기며죽었다. 전쟁 초기에 소련이 병합한 폴란드 절반의 땅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100만 명 가운데 다수가 살았던 땅은 지금 독립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속해 있다.
코벨 시너고의 벽에 엄마에게 보내는 글을 긁어 썼던 유대인 소녀, 그녀는 역사상 폴란드인일까, 소련인일까, 이스라엘인일까, 우크라이나인일까? 그녀는 폴란드어로 글을 썼다. 그날 시너고그의 다른 유대인들은 이디시어로 썼다. 디나 프로니체바의 유대인 어머니는 어떨까? 키예프(지금은 독립 우크라이나의 수도인)의 바비야르에서 도망치라고 딸에게 러시아어로 말한 그녀는? 코벨과 키예프의 유대인 대부분은, 동유럽 유대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도, 폴란드인도,
우크라이나인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이 과연 정말로 이스라엘이나, 폴란드나, 우크라이나나, 아니면 소련을 위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715

그들은 유대인이었으며, 폴란드 또는 소련의 국민이었다. 그들의 이웃은 우크라이나 또는 폴란드 또는 러시아계 주민이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네 나라에 소속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 네 나라의 역사가 따로따로 떼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다. 역사란 각 개인은 환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P715

이 모든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령 정확한 숫자를손에 넣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을 고려해야 한다. 정확한 숫자가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각각의 사망 기록은 하나의 독특한 삶에 대해 그 존재를 제시하지만, 내용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은 이의 숫자를 셀 뿐 아니라 죽은 이 한 명 한 명을 개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대규모 학살에심층 조사를 실시한 경우는 홀로코스트로, 57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그 가운데 540만 명이 독일의 손에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숫자도, 다른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추상적인 ‘570만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570만 배‘로 여겨져야 한다. 그것은 뭐랄까, 한 사람의 유대인이 570만 번 죽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 P716

셀수 없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하나하나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도브시아 카간은 코벨 시너고그에 있던 소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 코벨에서 죽은, 우크라이나에서 죽은, 동유럽에서 죽은, 유럽에서 죽은 모든 유대인은 독특한 삶의 소유자였다.
기억의 문화는 어림수를 쓰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에 대한기억은 그 수가 어림수가 아닐 때, 다시 말해서 마지막 단위가 0이아닐 때 쉬워진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의 경우, 트레블린카에 78만863명의 서로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마 쉬워질 것이다.
그 마지막 3명은 가스실에 들어간 뒤 옷이 한데 뭉쳐져 수거된 타마라 빌렌베르크와 이타 빌렌베르크 자매, 그리고 가스실에 들어가기 - P716

전 그녀의 머리를 깎는 남자와 부여잡고 울었던 루트도르프만이 될수 있다. 아니면 바비야에서 사살된 3만3761명의 유대인 가운데마지막이 되는 한 명을 상상해보자. 가령 디나 프로니체바의 어머니를! 비록 그곳에서 사살된 모든 유대인 하나하나가 곧 하나하나이지만 말이다.
블러드랜드의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기억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포함해야만 한다. 포위 속에서 굶어 죽은 100만 명의(100만 배의 하나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각각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군에게 살해된 310만 명의 (310만 배의 하나의) 소련 전쟁포로 각각,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소련 체제 아래 굶어 죽어야 했던 330만 명의(330만 배의 하나의) 우크라이나 농민 각각도 이들의 숫자를 완전히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을 나타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선택을 해야 했던 농민 가족, 구덩이에서 서로의 몸을 덥혀주려 애쓰던 포로들, 레닌그라드에서 가족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타냐 사비체바 같은 아이들. - P717

1937년에서 1938년, 스탈린의 대공포 시기에 사살된 68만1692명 각각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 두 명은 마리아 유리에비치와 스타니스와프 비가노프스키일 수 있다. "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던 부부 말이다. 1940년 내무인민위원회에게 사살된 2만1892명의 폴란드 포로들도 저마다의 삶이 있었다. 마지막 두 명은 자신의 딸을 꿈에 봤던 아버지, 도비에슬라우 야쿠보비치와 총탄이 자신의 머리를 꿰뚫던 날 자신의 결혼반지에 대해 글을 남긴 남편, 아담 솔스키일 수 있다. - P717

나치와 소련 체제는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단지 추정치가 되어버렸고, 나머지 일부는 우리의 정밀한 추계를 통해 복원될 수 있다. 우리 학자들로서는 이 숫자들을 찾고, 이를 통해 일정한 전망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우리로서는, 그런 숫자들을 사람들로 돌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그럴 수 없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은 단지 우리의 세상을 마구 뜯어고쳤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마저 개조했다는 뜻이 되리라. - P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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