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매번 새롭고 다양해서 해마다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벌써 14회라니 그 무섭다는 중2의 나이가 되었네.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정선임작가의 요카타‘가 좋았다. 무엇보다 잘 읽혔고, (읽기 어려운 소설들이 많아지고 있다.) 무겁게 끌고 가지 않으면서 여운이 깊다.

흑점의 배경이 검붉은 빛에서 노을빛으로, 그리고 복숭앗빛으로 점차 옅어진다.
외출복을 입은 채 이부자리도 없이 누워 있다. 두 시간 전 일어나 집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 다녀왔다. 미사를 빼놓지 않고, 기도를 오래 드리는 내가 다들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겠지만엘리사벳 수녀의 끈질긴 권유에도 세례는 받지 않았다. 깨어 있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곳이어서 성당을 좋아한다. 이렇게 눈꺼풀 안쪽을 들여다보다 설핏 잠이 들기도 한다. 낱말 공부를 하다가도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으면 진이 나를 흔들어 깨우곤 한다. 눈꺼풀 안쪽의 색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본적은 없다. 아버지, 순덕이와 정순이, 남편들, 그리고 진에게도, 동이 완전히 트자 흑점은 더 선명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에서 시작되어 길게 늘어진 검은 실처럼 움직인다. 마치붉게 물든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누군가의 그림자 같다. - P205

고개를 돌리다 진이 벽에 오려붙여놓은 신문기사를 본다. 모르는 글자를 건너뛰어 ‘서연화‘ 이름 석 자를 찾는다. 이름 옆 괄호안 ‘100‘이라는 숫자를 쳐다본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며웃고 있다. 방안에 거울을 두지 않은 지 오래다. 내 모습을 볼 기회가 없어서인지 사진은 볼 때마다 낯설다. 작은 사진인데도 눈가와입가에 주름이 선명하다. 바닷바람을 맞아 까맣게 탄 얼굴은 검버섯으로 뒤덮였다. 하얗게 센 머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굽은 등. 정말 영락없이 백 살의 노파다.
백 살이나 아흔여섯 살이나 그게 그거지. - P208

"바다는 똑같겠지. 바다는 변하질 않으니까. 그죠?"
이 말에도 굳이 대꾸하지 않는다. 라면을 다 먹고 고말순이 돌아간 뒤 다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미역 줄기를 찢는다. 난센스 퀴즈 코너가 끝나면 진행자는 상식이나 역사 문제를 내곤 한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해 준비한 퀴즈입니다. 대표적인 신여성이죠. 나혜석거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1번 수원, 2번 부산,
3번 인천, 4번 밀양 정답을 아시는 분은 지금 문자를 보내주세요."
본래는 별 관심 없이 흘려듣지만 인천과 여성이라는 말에 귀를기울인다. 정답은 1번 수원이었다. 진행자는 답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혜석의 생애를 들려준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나혜석은 행려병자로 죽었지만 파리며 독일이며 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후지타의 서재 한쪽 벽면에 붙어 있던, 다다미 넉장 반 정도크기의 커다란 세계지도가 떠오른다. 후지타는 자신의 고향 나가사키의 위치를 알려주며 붉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뒤로 나는서재에 들어갈 때면 한반도와 나가사키 사이에 놓인 한 뼘 정도의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바다 너머의 끝도 없는 바다들을. - P213

과거의 기억은 짙은 해무가 낀 것처럼 부옇다. 머릿속에서는인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진처럼 윤곽만이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촉감으로, 냄새로, 통증 같은 것으로 몸이 선명하게 기억하는순간이 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도시락을 건네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발갛게 달아올라있던 볼의 열기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낮이었고 주위가 너무 환해 빨리 땅거미가 져 어두워졌으면 했던 마음도 갑자기 뺨이 불타듯 뜨거워져 손을 대본다. 다듬지 않은 미역처럼 거칠고 해삼처럼 흐물흐물하다. - P224

이상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석 줄짜리 시였다. 가운데 부분이 기억나질 않았다. 유독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닳아 있는 책 한 권을 찾아내 펼쳤다. 후지타가 자주 읽던 시집이었다. 종이 위 검은 점과 선의 행렬로만 보이는 그것들의 의미를 끝내 알지 못했다. 몰래 성경을 숨겨놨던 후지타는 전쟁이 길어질 무렵,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주 기도했다. 후지타가 재산을 처분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동네에 퍼져 있었다. 그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면서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날은 조금이었고, 마침 낙지를 잡기에 좋은 물때였다.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양동이를 들고 개펄로 나갔다. 개펄을마구 헤집으며 바지락을 했고, 낙지와 게와 같이 살아 있는 것들로 양동이를 가득 채웠다. 그러다 모두 쏟아버리고, 꿈틀거리는 낙지와 도망가는 게들을 지켜봤다. - P228

이상했다. 살아서 자꾸만 움직이는 것이.
양동이를 던지고 개펄에 털썩 주저앉아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노을빛을 닮은 눈꺼풀 안을 들여다보면서 흑점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개펄에서 걸어나오다 뒤를 돌아보니 푹푹 빠지며 걸어왔던 발자국도, 흉하게 파헤쳐진 자리와 들쑤셔진 자국도 사라져 있었다. 밀물이 밀려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죽은 것들도, 살아 있는 것들도 바다는 휩쓸어갔다. - P228

서재에 있던 책들은 남김없이 내다팔았고, 그후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바다가 데려간 것은 잊었고 내어준 것을 팔아 살았다. 가끔 이름이 불릴 때마다 구멍에 숨어 있다 잡혀 나온 게들처럼 당황했다. 하지만 또다시 구멍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었지. 요카타, 요카타.
만조다. 물이 들어오고 있다. 보행로 위에서 관광객 하나가 새우깡 봉지를 뜯어 마구 뿌리자 갈매기떼가 몰려온다. 새우깡은바닷물로 낙하하기 전에 갈매기 입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가벼운 습자지 한 장 같은 오늘을 서둘러 뜯어내고 아침을 기다리고 싶다. 내일이면 오이소박이는 좀더 익어 맛있을 것이다. 해가 지기전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다시 눈을 감고 그림자를 쫓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 P229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익숙한 장소에서도 방향을헷갈릴 때가 많은데 혼자 여행을 간다는 건 당연히 길을 잃겠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또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우왕좌왕하다가 목적지가 아니었던 곳에 도착할 테니. 다만 알고 있는 것은 다음에도기꺼이 길을 잃고 싶다는 거다. 쓰지 말걸 후회도 하다가 결국에는 소설을 써서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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