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경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한 것은 상상, 공상, 망상. 일곱 살 때부터 멈춘 적 없는 것은 책 읽기와 글쓰기, 세상 구경. 그것은 작가가 떠나지 않고 작가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꿈, 위로, 그리고 감옥이었다.
30년 넘게 매일 글을 쓰고 있으며, 1993년부터 라디오방송에서 글을 썼다. 일주일에 5권 이상 책을 읽는 다독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사람을만나면서 어휘력 부족이 단순히 국어능력 문제가 아니며 얼마나 일상에 커다란 불편을 가져오는지 깨닫는다.
지금 우리에겐 ‘어른다운‘ 어휘력이 필요하다. 작가는어휘력의 쓸모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 책에 담았다.
<월간 미술>에 유선경의 곁을 보는 시선들‘이라는 글을연재했으며, 또 다른 책으로는 《문득, 묻다》, 《꽃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소심해서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 등이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못하는 홍길동이 적지않다. 허균의 홍길동처럼 서자라서가 아니다. 마땅한 어휘를 떠올리지 못해서다. 아버지가 아버지고 형이 형인 것처럼 세상의 대상과사물, 현상 등에는 알맞은 어휘가 있는데 딱 짚어 부르질못 한다. 머릿속에 형체는 있으나 명칭이나 이름이 바로 나오질 않는다. 누가 머릿속 연상을 찍는 카메라는 발명 안하나 싶다. 자신이 느낀 기분이나 감상 등을 표현하고 싶지만 어떻게 옮겨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체온기처럼 기분이나 감상을 감지해 알려주는 기기는 누가 발명 안 하나 싶다. 아직 그런 기기가 없어 대충 이 두 가지 말을 가지고 돌려막는다. - P5
"하! 이놈의 건망증!"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 책은 일 년 전 한모씨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 시작되었다. "낱말이 떠오르지 않는 걸 두고 사람들이 자꾸 나이 들어 생긴 건망증이라고 하는데 저는 건망증이 아니라 어휘력 부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견해가 맞는지 틀리는지 구태여따지지말자. 건망증이라고 하면 외워야 한다 할 것이고 어휘력 부족이라고하면 어휘력을 키우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5
대한민국의 어른은 대체로 수능을 치르고 나면 따로어휘를 외운다든가, 어휘력을 키우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매일 보고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모국어 아닌가. 그래서일상에서 겪는 불편이 설마 모국어의 어휘력 부족 때문인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가장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불편이 글과 말귀가 어두워지는 것이다. 학습 능력은 둘째치고 소통에 상당한 불편을 겪는다.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과 말귀 못 알아듣게 말하는 사람이 만나 말해봐야 복장 터질 일밖에 없다. 어휘력이 부족해서일 뿐인데 ‘그 인간 문제있다‘로 비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물론 어휘력과 인격은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이 경우 어휘력 ‘부족‘보다 ‘잘못‘에 가깝다. 일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신의이런생각과 감정, 느낌 등을 표현하는 데 자신감을 잃는다. - P6
어휘로 생각하고 정리해 표현하지 않는 게 일상이되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자기가 파악할 줄 모른다. 자신(自身)의 생각에 대해서 자신(自信)이 없다. 간혹 성격에 따라 미운 일곱살처럼 공격적이 되는 수도 있다. 어휘력은 말발 센 게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휘를 마음대로 부리어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풀이하는데 그러려면 낱말을 양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필요하긴해도 낱말에 대해 ‘잘‘ 알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더 - P6
효과적이다. 여기서 ‘잘‘이란 다른 낱말과 함께 배치했을 때의미나 어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섬세하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뒤집어 얘기해서 어떤 말이나 글의 의미나 어감을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눈치‘가 부족하다기보다 ‘어휘력‘ 이 부족한 탓이 크다. 말인즉슨 맞는데 묘하게 거슬리는 말도 ‘인간미‘가 부족하다기보다 ‘어휘력‘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어휘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자 대상과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힘과 시각을 기르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야 ‘어른‘다운 어휘력이다. 이 책의 제목을 《어른의 어휘력》으로 삼은 배경이다. - P7
"책을 읽고 싶어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서 읽기 힘들어."
초등학생이라면 영락없이 책 읽기 싫어 둘러대는 핑계라 하겠지만 10여년전부터 친구들에게 꾸준히 듣고 있는말이다. 마흔 넘으면 ‘내가 왜이럴까‘ 싶은 게 도대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변화라곤 나이 먹은 거밖에 없으니 부정적인변화의 원인을 나이 탓으로 모집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나중에 기억나지 않는 것도 나이 먹어 그런 거라 무감하게 대꾸했다. 책을 펼치고 딴생각으로 빠지기는 모든 세대에 공통이나 중년에 접어들면 딴생각의범위가 광활해진 의무와 책임만큼이나 공활해진다. 나이탓이 영 허튼소리는 아니다. 그렇게 10여 년 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게 확실하게벌어질 일은 ‘더 나이 먹고 늙어 죽는 것뿐이라는 진실을깨우쳤다. 속절없는 나이 타령만 하다간 될 일도 안 되겠다017 - P17
싶기도 했다. 안 되는 일을 죄다 나이에 책임을 떠넘기는스스로가 좀 뻔뻔한 듯도 싶었다. 10년 전에 책 읽기 힘들다던 친구는 서서히 책 읽기를 포기하고 있고, 내가 제사날로 찾은 원인은 이러했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래."
친구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대학나와 30여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휘력 부족이라는 소견‘ 따위나 듣다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휘력이 부족하면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드니까 책장이 넘어가질않고, 책장이 넘어가질 않으니까 졸린다. - P18
원시인류는 사냥, 수렵, 채집 등으로 먹을거리를 구하고 맹수 등의 공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관찰하고 경계해야했다. 눈 두 개가 가운데 몰려 있어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데 적합하지 않으니 고개나 몸의 방향을 쉴 새 없이 바꿔가며 두리번거렸으리라. 그 초원이 오늘날에는 인터넷에 있다. 눈 두개가 가운데 몰려 있어 휴대전화의 좁은 화면을 보는 데 적합하니 고개와 몸의 방향은 절로 고정된다. 먹잇감을 찾아 손가락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눈동자가 두 발인 양 쫓아간다. 그때는 실재였고 현재는 가상이지만 뇌는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며, 인간의 뇌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산만하다. 인류는 먹고 사는 데 노력을 소진하느라 책 읽는 데 쓸노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책과 무관하게 살았으며 현재도 대체로 그러하다. - P20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는 지금 이 순간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한다. 담을 수 있을 만큼만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다. 자신의 그릇이 작아 상대의 말을 제대로 주워 담지 못한 채 흘려버리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진심이나 진실을 깨달았을 때면 이미 늦어 과거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밉다.
책을 읽는 행위란 나에게, 내가 사랑하거나 사랑할 이들에게 당도할 시간으로 미리 가 잠깐 사는 것이다. 아직 살아 - P25
보지 않은 시간이라 당장 이해하기 힘들어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군.‘ 하는 식의 감(感)을 얻는다. 신비로운 일이다. 정신 밭에 뿌려둔 감(感)이라는 씨앗은 여하튼 어떻게든 자란다. 그러다 문득 내게 당도해버린 시간을 통과할 적에 떠오른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니고 혼자지만 혼자가아닌 것 같은 기분, 서툴게 더듬어 찾아가면 오래 전 내정신 밭에 뿌려둔 씨앗 자리에 뼈가 자라고 살이 붙어 서있는 형상과 마주한다. - P26
내게는 열아홉에 읽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그러했다. 모르는 낱말로 가득해 나름 자부한 독해력에 혐의를 두게 했다. 정신에 균열이 가 불편했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허무한 아이가 더 허무해져버렸다. 이상하리만치 잊히지 않았다. 흡사 나쁜 남자에게 매혹당한 순진한 소녀 같았다. 다시 읽지 않았다. 그저 한 선배에게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소감을 남기며 열아홉 살답게 겁도 없이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가지라고 선포한 ‘행복을추구할 권리‘ 를 무시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200년 - P26
넘게 절절이 그리는 심정을 말로 표현하라면 ‘행복추구권‘이 아닐까. 우리가 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왜 아직도 추구해야 하는지, 맘껏 누리는 것도 아닌 고작 추구 따위가 왜 권리인지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분통이 터졌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렀다. 내 인생의 표석이 십대의끝자락에 이해하지 못한 채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말했다》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최근의 일이다.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 했으나 이것이 삶의 진실일지 모른다는 감(感)을 모태삼아 뼈가 자라고 살이 붙은 어떠한 형상이 돼 묵직한 무게감으로 내 삶을 밀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왔으나 이해하지 못했기에 딱히차라투스트라라고 하기 힘든 그 형상은 내가 인생 자락의고비에 놓일 때마다 뜨거운 회초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 P27
하이패스 단말기가 없으면 고속도로나 유료도로의 톨게이트마다 정차해야 하는 것처럼 어휘력이 부족하면 말이나 글에 지체구간이 생기고 늘어진다. 표현하고 싶은 용어나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설명하느라 정작 하려던말이나 글을 중단하고 곁가지 서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말이나 글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이미용어나 낱말을 아는 사람에게는 쓸데없고 지루하다. 정확한 어휘를 구사해야 하는 이유는 해석의 여지를줄이기 위해서다. 시나 소설 등의 문학에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애매모호한 표현은 여운과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 그 모호함에서 비롯된 해석이 제각각 달라 벌어지는 논의 - P35
조차 의미 있다. 그러나 언론기사나 논문, 논술이나 프레젠테이션, 자기소개서 등 정보나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글에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어휘와 표현을 써서 읽거나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한다면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을수 없다. 글쓰기가 업(業)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없을 정도로 정확한 어휘와 표현을 찾는 것이 목표다. 이룰수 없는 목표를 바라보고 하염없이 헤맨다. 뜻이 통하면 됐지 구태여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 있느냐 묻는다면, 이과정에서 겪은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바로, 찾아 헤매는 동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점점 더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마치 생각만 어휘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어휘도생각을 찾아와 중간 어디쯤에서 극적으로 만나 부둥켜안는것 같다. 분명 내 자아에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 - P36
베아트리스는 맛이 궁금해 안달하고 마침내 버질이 소개한다. "배를 작게 잘라내면 속살은 새하얗지. 안에 전등이켜진 것처럼 하얗게 빛난다고. 그래서 과도 하나와 배 하나만 있으면 어둠이 무섭지 않아." "배를 씹을 때 입 안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감각도 정말로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어. 어떤 배는 아삭아삭하기도 해." 베아트리스가 배 맛을 상상하기 위해 묻는다. "사과처럼?" 당신이 배맛을 안다면 손사래를 치며 부정할 것이다. "아니라니까. 사과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니까!" 버질도 그랬다. 앞서 배의 모양을 설명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배의 맛에대해 찬찬히 알려준다. - P39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끝내 묻고 만다. "그럼 배맛은 뭐랑 비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팽팽하게 쌓아올린 배에 대한 설명은 이 지점에서 와르르 무너진다. ‘우리는 이미 반쯤 아는 것을 듣고 이해한다.‘고 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은 과연 진실일 수밖에 없을까. 결국 버질도 포기한다. "배 맛은 뭐랑 비슷하냐면, 뭐하고 비교할 수 있냐면…… 모르겠어. 말로는 표현할수가 없어. 배 맛은 배 맛 그 자체야. 어떤 맛으로도 비교할수 없어." 베아트리스는 안타깝다. "너한테 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버질도 같은 심정이다. "그래, 나한테 지금 배가 있다면 당장 너한테 맛을 보여주었을 거야." 둘은 침묵한다. - P40
버질은 베아트리스가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한참 설명했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을 끝내 알릴 수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버질의 이야기에 푹 빠져 머릿속에 온갖 형상을 열심히 그려봤지만 최종적으로 몰랐다. 언어의 한계다. 상상의 한계다. 인식의 한계다. 이 한계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가 되어 상대가 전하는 의미를 두드려 펴 늘이거나 - P40
머리 혹은 사지를 가차 없이 잘라낸다. 흔하디흔한 과일 하나 설명하기도 이렇게나 힘든데 나는 알고 당신은 모르고, 나는 겪고 당신이 겪지 않은 일에대해서라면 오죽할까. 그래서 대화가 각자 말을 하거나, 그저 그런 진부한 언어의 나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그럼에도 나만 겪은 일을 당신에게 알리고, 당신이 겪은 일을 내가 알 길은 언어밖에 없다. 언어는 강철보다 견고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두드려 금 가게 하고, 틈이 생기게 하고, 마침내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언어의 한계를 서로 달리 살아온 삶의 경험과환경에서 비롯된 거라 믿어 소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휘를 선택할 때 조금은 더 친절해질 수 있다. 상대의 처지에 적절한 낱말을 찾게 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에 등장하는 ‘배‘가 상징한것은 ‘홀로코스트‘ 였다. - P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