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통
김종삼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스무 살 무렵, 학교 앞 카페의 벽에 걸려 시인이 되고싶던 나를 내려다보던 <물통>. 그것이 삶이든 시 쓰기든 인간에게 물 몇 통 길어다준 게 전부였다는, 이상하게 사무치는 고백으로 여러 청춘들에게 문학병을 선사했던 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가슴에 와 맺히는 건 그 겸허함보다 물 몇 통 길어다 바치는 일의 어려움이다. 아마 저 "물통"은, 여백이 더 많던 시인의 작품들처럼 비어 있기 일쑤였으리라. 이분은 나중엔 역력히 술을 억누르질 못했는데, 그 또한 이것과 관련돼 있겠지. 물 몇 통 얻기 위해 술병들 적잖이 쓰러뜨리는 일도 이런 시쯤 되면 적잖이 용납되겠지.
서풍 앞에서
황지우
마른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두 번의 직유로 간신히 몇 발짝 이어간 단 두 문장. 하지만 이 짧은 중얼거림은 제 실존적 결단의 힘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누름으로써 피로 얼룩져 거덜 난 시대를 구출하여 역사의 반열에 받들어 올린다. 오월 광주의 비극을 알리려다 고초를 겪은 시인의 이력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박해받는"에서 "박해받고 싶어하는"에 이르는 인식의 질적 전환에는 읽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전율이 들어 있다. 고난받고 싶다는 뜨거운 자발성에 닿기까지 그는 얼마나 피를 말렸을 것인가.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