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의 급수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 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 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 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 간의 공통점과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 P141

확인해가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경지에 다다른 답사객은 언뜻 보기에 답사에의 열정과 성심이 식은 듯 돌아다니기보다는 눌러앉기를 좋아하고 많이 보기보다는 오래 보기를 원한다. 지나가는 동네 분과 시답지 않은 객담을 늘어놓고 가겟방을 기웃거리다가 대열에서 곧잘 이탈하곤 한다. 허나 그것은 불성실이나 나태함의 작태가 아니라 그 고장 사람들의 사는 냄새를맛보기 위한 고급자의 상용수단인 것을 초급자들은 잘 모른다. 고급자는 문화유산의 개별적·상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그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단계인 것이다. 하기야 사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수준이 개별적·상대적·총체적 차원으로 발전해가는 일이 어디 답사뿐이겠는가. - P142

답사 코스를 보면 그 자체에도 급수가 있다. 같은 절집이라도 경주 불국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정도라면 당연히 초급반 과정이 될 것이고 남원실상사, 안동 봉정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영천 은해사 등이라면 중급 과정이라 할 만하다.
초급과 중급의 차이는 대중적 지명도와 인기도, 사찰의 규모, 문화재보유현황, 교통과 숙박시설의 편의 등을 고려하여 분류될 수 있겠는데,
그러면 고급 과정은 어떤 곳일까? 그것은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다. 심심산골에 파묻혀 비포장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리다가 차에서 내려 다시 심릿길, 오릿길을 걸어서야 당도하는 폐사지. 황량한 절터에는집채란 오간 데 없고 절집 마당에 비스듬히 박힌 주춧돌들이 쑥대 속에곤히 잠들어 있다. 덩그러니 석탑 하나가 서 있어 그 옛날의 연륜을 말해주는 폐사지의 고즈넉한 정취는 답사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 산청의 단속사,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 - P142

터, 경주 암곡의 무장사터,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 강릉사굴산의 굴산사터.....…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선림원터다. 지금 우리는 거기를 찾아가고 있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의 속칭 탑골. 양양 낙산사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쯤 올라가다가 속초비행장(현 속초공항으로 꺾어 들어가는 강현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설악산을 바라보고 계곡을 따라, 계곡을 건너 20리(약8킬로미터)길을 오르면 둔전리 마을이 나온다. 진전사(陳田寺)가 있었다고 해서 진전리였던 것이 음이 변해 둔전리 (屯田里)가 되었다. - P143

마을에서 10분쯤 더 산길을 오르면 산둥성을 널찍하게 깎아 만든 제법 평평한 밭이 보이는데, 그 밭 한가운데 까무잡잡하고 아담하게 생긴삼층석탑이 결코 외롭지 않게 오뚝하니 솟아 있다. 산길은 설악산 어드메로 길길이 뻗어올라 석탑이 기대고 있는 등의 두께는 헤아릴 길 없이두껍고 든든하다. 석탑 앞에 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계곡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산자락 아랫도리가 끝나는 자리에서는 맑고 맑은 동해바다가 위로 치솟아 저 높은 곳에서 수평선을 그으며 밝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모든 수평선은 보는 사람보다 위쪽에 위치하며 빛을 반사한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까만 석탑은 거기에 세워진 지 천년이넘도록 그 동해 바다를 비껴 보고 있는 것이다. - P143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차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는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 P146

남아 있는 자료를 종합해보면 선림원은 애장왕 5년(804) 순응(順應)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순응은 당나라 유학 출신으로 가야산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애장왕왕비의등창을 고쳐주어 왕의하사금으로해인사를 세운 스님이다. 해인사를 802년에 세운 순응이 2년 후에 선림원을 세우고 다시 수도처로 삼았다.

그때 세운 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이 동국대 발굴팀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그 구조와 생김새는 진전사탑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선림원탑이 훨씬 힘찬 기상을 보여준다. 순응은 선림원을 세울 때 범종 하나를 주조하였다. 그 종은 선림원이 무너질 때 땅에 묻혀버렸는데 1948년 10월, 해 - P159

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 발굴되었다. 정원(貞元) 20년(804) 순법사가 절을 지으면서 만들었다는 조성 내력과 절대연대가 새겨져 있는 이좋은 상원사 범종·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었다.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대산은 치열한 전투지로 변하였고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월정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이 불리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이르자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렸다(현재 선림원 범종의잔편들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윈 도면을 참고해 만든 복원품이 전시되어있다). - P160

나는 이것이 적군도 아닌 아군의 손에 불탔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배신감 같은 것이 일어났다. 국군이 월정사 위쪽 상원사까지 불을 지르러올라갔을 때 방한암 스님은 법당 안에 들어앉아 불을 지르려면 나까지태우라 호령했고 이 호령에 눌려 군인들은 형식적으로 문짝만 뜯어 절마당에서 불태우고 내려갔다. 이렇게 상원사 범종(국보 제36호)과 세조가발원한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고리영희(李泳禧) 선생은 자서전인 『역정』(창비 1988)에서 국군이 설악산 신흥사 경판을 소각한 것을 말하면서 군인들은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 P160

할 것인가. 차라리 발견되지 않고 땅속에 묻혀 있었더라면 이 시대에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을까.
순응법사 이후 선림원에 주석한 스님은 홍각(弘覺)선사였다. 홍각선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사문(鳳林寺門)으로 말년에 선림원에 머물다886년에 입적한 스님이었다. 홍각선사의 사리탑과 탑비는 당대의 명작이었다. 특히 탑비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들어 금석학의 귀중한 유물로 되었고 돌거북 받침과 용머리 지붕돌은 하대 신라의 문화 능력을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잘생긴 석등과 조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리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무너져버린 것만도 안타까운데 그 폐허의 잔편들마저 또 상처를 받았다. 홍각선사의 사리탑은 어찌된 일인지 기단만 남고 팔각당은 오간 데 없으며, 탑비의 돌거북 받침대와 용머리 지붕돌은 완연하건 - P162

만 비는 박살이 나서 150여 자 잔편만 수습되었다. 석등은 지붕돌 귀꽃이 반은 깨져버린 상처를 입었고 조사당터엔 주춧돌만이 그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하늘 아래 끝동네 선림원터의 상처와 망실은 그 뒤에도 일어났다.
1965년 3월, 양양교육청에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오늘날의 문화재청)이 소속되어 있던 문교부(오늘날의 문화체육관광부)에 급한 전갈을 보냈다. 지금설악산 신흥사에 있다는 스님 두 명이 인부를 데리고 와서 선림원터 유물들을 모두 옮기고 있고, 진전사탑도 반출 작업 중이라는 것이었다. 문교부는 정영호 교수를 급파하였다. 그가 실상을 낱낱이 보고하자 문교부는 모든 유물을 원위치에 복귀시키고 이 유물들을 일괄하여 급히 보물로 지정, 보존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것을 반출하려던 무리가 스님이었단 말인가? - P163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으리라.

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소." 어린아이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와 애비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 교수가 사경을 헤매느라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들을 수 있었던 분은 부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수 있었다. - P165

영남대 교수 시절 이야기다. 미술대학 스케치 여행이 제주도로 결정되자 학회장 맡은 학생이 코스를 짜기 위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샘, 제주도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곳은 어디예요?"

이런 게 경상도식 질문이다. 그것은 누구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경우 답을 구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미술평론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조언하기를, 전시장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갈 때 그냥 가지 말고지금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딱 한 점만 골라본다면 전시회도 다시 보이고 그림 보는 눈도 좋아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 - P167

런데 한 점만 고르기가 무척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바꾸었다. "지금 본 그림 중에서 아무거나 한 점 가져가라고 하면 어떤 것을 가질까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가장 좋은 그림입니다." 그러자 아주쉽다고들 했다. 그러면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제주도의 한 곳을 떼어가라면 어디를 가질 것인가?
그것은 무조건 영실(靈室)이다.

"영실! 한라산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야."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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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행복 및 권리에 대한 헌의 이상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무의 핵심이 동물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데 있다는 생각과도 거리가 멀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그보다 훨씬 엄격하며, 지속적인 학대와 무관심처럼 다루기 벅찬 문제들도 의무의 영역에 속한다. 환경여성주의자인 크리스 쿠오모ChrisCuono가 설명하는 번영의 윤리는 헌과 비슷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훈련이라는 관계적 실천의 세계로 무언가 중요한 것, 모든 - P182

참여자를 개조하는 것이 들어온다. 헌은 언어에 대한 언어를 사랑했고, 메타플라즘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 P183

내 선생님처럼 훌륭한 어질리티 스승은 자기 학생이 개를 내버려둔 곳이 정확히 어디이며, 정확히 어떤 몸짓 · 행동 · 태도가 신뢰를 망치는지 알려줄 수 있다. 모두 말 그대로다. 처음에는 변화가 사소해 보인다.
타이밍은 너무 까다롭고 어렵다. 일관성은 너무 엄격하고, 선생님이 바라는 게 너무 많은 듯 보인다. 그러다가 개와 인간은 함께 행동하는 법과 티 없는 기쁨과 솜씨로 어려운 코스를 통과하는 법, 소통하는 법, 솔직하게 대하는 방법을 찰나에 불과한 순간일지라도 깨닫게 된다. 훈육된 자발성이라는 모순 어법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개와 조련사 모두가 활동을 주도하는 법과상대를 따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일관성 없는 세계에서 일관성을 충분히 지님으로써 육신 속에, 경주 속에, 코스 위에, 존중과응답을 빚어내는 공동 존재의 춤에 참여하는 것이 과제다. 그리고 모든 척도에서, 모든 파트너와 함께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기억하는 것. - P193

가축 파수견은 사냥감이나 물건을 물어오는 솜씨가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이들의 생물사회적 성향과 양육은 높은 수준의 복종 경연대회에서 틀어주는 사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게 하는 공모자 중 하나다. 하지만 이들이 복잡한 역사 생태학 속에서 독립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인상적이다. 암양의출산을 돕고 갓 태어난 새끼 양을 핥아 씻기는 가축 파수견 이야기는 그들 자신이 지켜야 할 양들과 결속하는 능력을 한 편의드라마로 만든다. 그레이트 피레니즈 같은 가축 파수견은 양들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낮을 보내고, 밤에는 순찰을 돌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지켜볼 것이다. - P199

였을까?
이 개들 중 일부는 준비가 덜 된 그레이트 피레니즈였다.
내무부는 목축업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늑대를 투입했다. 가축 파수견을 다루는 아이다호 농무부 사람들과의 협력도 없었고 내 추측으로는 중년 후반의 백인 여성이자,
품종 기준에 맞는 멋진 개들을 보여줄 박식한 피레니즈 브리더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무부와농무부는 기술과학 문화에서는 서로 동떨어진 세계다. 늑대들은 공원 경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늑대, 가축, 개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아마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야생 관련 업무를담당하는 공무원들이 길 잃은 늑대를 125마리 이상 죽였고 목축업자들이 최소 수십 마리 이상을 불법적으로 쏘아 죽였다. 야생보호론자, 관광객, 목축업자, 관료, 공동체들이 분열되었다.
아마 이것도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곳에서, 처음부터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반려종의 관계가 더 잘 구성될 필요가있었다. - P212

개들은 사회성 동물이라 영토를 방어하는 습성이 있다. 늑대 역시 사회성 동물이며 영토를 방어한다. 안정적이고 규모가충분히 큰 집단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가축 파수견이었다면 북 ㅁ부회색늑대의 가축 사냥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늑대가 자리를 잡은 뒤에야 피레니즈를 들여오거나 경험이 전 - P212

혀 없는 개들을 너무 적은 수로 들여오는 것은, 두 갯과 종 모두와 야생을 목축 윤리와 함께 엮는 상황에서는 기필코 재앙을 불러오고야 말 조합에 해당한다. 야생의 수호자들 Defenders of Wildlife이라는 단체는 늑대에게 가축을 내주고 있는 목축업자들을 위해 피레니즈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늑대들은 개를 늑대 자신이소유한 부동산에 침입해온 경쟁자로 보고 적극적으로 추적해죽이는 것처럼 보였다. 늑대들이 개들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을만한 실천 양식은 없었다. 늑대가 번성하는 와중에 목축업자와보호론자가 동맹을 맺고 있을지도 모르는 형편이라면 가축 파수견이 효과적인 행위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다.
또 어쩌면 늑대는 피레니즈가 밤에 집 안에서 보호를 받는 동안코요테를 다스릴지도 모른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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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카옌 페퍼Ms. Cayenne Pepper가 내 세포를 몽땅 식민화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말하는 공생발생symbiogenesis의 분명한 사례다. DNA 검사를 해보면 우리 둘 사이에 감염이 이루어졌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카옌의 침에는 당연히 바이러스 벡터가 있었을 것이다.
카옌이 거침없이 들이미는 혓바닥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우리가 함께 속하는 자리는 척추동물이라는 문門, phylum에머물 뿐 다른 속屬, genera 및 분화된 과자/가족 families, 심지어 아예다른 목目/질서 orders 속에서 살아가지만 말이다.
우리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갯과/사람과, 애완동물/교수, 암캐/여성, 동물/인간, 선수/훈련사. 우리 둘 중 하나는 목덜미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했고, 다른 하나는 증명사진이 박힌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지녔다. 우리 중 하나는 20대를 거 - P115

슬러 올라가는 혈통서가 있고 다른 하나는 증조부모의 이름조차 모른다. 우리 중 하나는 유전자가 폭넓게 혼합된 결과물인데
"순종"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그 못지않은 잡종인데도 "백인"
이라 부른다. 이런 각각의 이름은 인종 담론을 표시하며 우리둘 모두는 우리의 육신으로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우리 중 하나는 젊음과 생기가 타오르는 정점에 있고 다른하나는 열정적이지만 변곡점을 넘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카옌의 조상이 메리노 양을 치던 곳, 선주민족에게서 몰수한 땅에서어질리티(민첩성) agility"라는 이름의 팀 경기를 즐긴다. 식민화가 완료된 상태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목축 경제의 구성원으로살던 메리노 양들은, 19세기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California GoldRush 49ers 붐을 타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수입되었다. 역사의 층위, 생물학의 층위, 자연문화 natureculture의 층위에서 우리가 즐기는 게임의 이름은 복잡성이다. 자유에 목마른 우리, 정복의 후예이자 백인 정착민 식민지의 산물인 우리 둘은, 운동장에서 장애물을 뛰어넘고 터널을 기어 통과한다.
우리의 유전체는 이론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 P116

더 닮았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중 하나는 나이가 많아서, 다른하나는 수술을 받아서 생식하지 않는 여성/암컷fcmale이지만, 우리 둘의 접촉은 분자로 기록된 생명의 암호가 되어 이 세계에자취를 남길 것이다. 카옌은 붉고 얼룩덜룩한 오스트레일리아셰퍼드의 축축한 혓바닥으로 내 혀의 조직은 물론 그 속에 있는열망하는 면역계 수용체를 날름날름 핥았다. 누가 알겠는가? 나를 남과 구분하며 신체 내부와 외부를 묶는 화학 수용체chemicalreceptor가 카옌의 유전 메시지를 내게 옮겼거나, 카옌이 나의세포계에서 무언가를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금지된 대화를 나눠왔다. 우리는 입으로 정을 통해왔다. 우리는 사실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로 묶여 있다. 우리는 불통에 가까운 대화로 서로를 훈련하는 중이다. 우리는 구성적으로 본바탕이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다. 우리는 서로를 살fesh 속에 만들어 넣는다. 서로 너무 다르면서도 그렇기에 소중한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저분한 발달성 감염을 살로 표현한다. 이 사랑은 역사적 일탈이자 자연문화의 유산이다. - P117

<반려종 선언>은 개인적인 기록이고, 반밖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영토를 급습하는 학문적 시도이며, 전 지구적 전쟁이임박한 세계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정치적 행위이자, 원칙적으로 끝없이 계속되는 작업이다. 나는 개가 잘근잘근 씹어놓은 근거와 훈련되다 만 논의를 내놓아서, 내가 속한 시공간에서 학자및 개인으로 아주 관심이 많은 이야기를 다시 써보려 한다. 이글은 대부분 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문제인 만큼, 이 이야기가 독자들을 삶을 위한 개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심지어 개를 싫어하거나 고결하고 숭고한 문제에 몰두하느라 바쁜 사람이라도, 우리가 살게될지도 모를 세계에서 중요한 주장이나 이야기를 이 글에서 찾아낼 수 있길 바란다. 개 세계의 실천 양식과 행위자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기술과학 연구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나는 독자들이 개에 대 - P118

한 글쓰기가 왜 페미니즘 이론의 한 갈래가 되며 또 그 반대 방향의 경우도 마찬가지인지 알게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내가 처음 쓴 선언문은 아니다. 1985년에 발표한<사이보그 선언>에서 나는 기술과학 속 현대의 삶이 내파implo-sions" 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을 통해 이해하려 했다. "인공두뇌유기체인 사이보그는 정책 및 연구 프로젝트에 침투해 있던 기술 인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상상, 우주 개발 경쟁, 냉전으로 점철된 1960년에 생긴 이름이다. 나는 축복도 저주도 하지 않는대신 우주 전사는 꿈도 꾸지 못할 목표를 아이러니하게 전유하려는 정신, 곧 비판적 정신을 통해 사이보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동거와 공진화 coevolution 그리고 종의 경계를 넘어 구현된 사회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금의 선언문은 적당히꿰맞춘 두 형상 사이보그와 반려종-중 어느 쪽이 현대의 생활 세계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정치와 존재론에 더 생산적으로 관여하는지 묻는다. 사이보그와 반려종 각각의 형상은 서로정반대라고 할 수 없다. 둘 다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적인 것과 - P119

기술적인 것, 탄소와 실리콘, 자유와 구조, 역사와 신화, 부자와빈자, 국가와 주체, 다양성과 고갈, 근대와 근대 이후, 자연과 문화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함께 묶어준다. 게다가 사이보그나반려동물은 종의 경계를 더 잘 관리하면서 범주 이탈자의 번식을 막는, 순수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슬리기 짝이 없을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이보그와 평범한 개의 차이는 중요하다.
나는 1980년대 중반 레이건의 스타워즈 시대에 페미니즘작업을 하기 위해 사이보그를 전유했다. 지난 천년이 끝날 무렵, 사이보그는 비판적 탐사에 필요한 실마리를 엮어내는 일을 웬만한 양치기 개보다 잘해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살 만한 자연문화의 느린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물 없이 불가능한 지구 살림을 탄소에 기반을 둔 예산으로 통치하겠다고 두 번째 부시 정권이 위협하는 지금, 과학학 및 페미니즘의 이론적 도구를 제작하는 일을 거들 마음으로, 기분 좋게개에게 다가가서 개집의 탄생을 탐사할 생각이다.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면 사이보그가 되자 Cyburgs for earthly survival!" 라는 주홍글씨를 충분히 오래 달고 살아왔으니, 이제는 개 스포츠를 즐기는슈츠훈트 Schutzhund 여성이 아니면 절대 떠올릴 수 없는 구호를 - P120

내 로고로 만들 생각이다. "빨리 뛰어! 꽉 물어!"
이 이야기는 기술과학 못지않게 생명권력biopower 및 생명 사회성 biosociality과 결부된다. 훌륭한 다윈주의자가 으레 그렇듯, 나도 진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핵) 천년왕국주의 (nucleic) acidic -millennialism의 양태로 분자적 차이를 논하는 나의 이야기는, 신식민주의적 "아프리카 탈출을 감행한 미토콘드리아 이브 Mitochon-drial Eve의 설화보다 (남성) 인간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스스로를 다시 창조하려는 찰나에 난입한 최초의 미토콘드리아 암캐 설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암캐들은 반려종의 역사를, 그러니까 오해 · 성취 ·범죄 그리고 재생 가능한 희망이 한가득 들어 있는, 아주 세속적이며 끝없이 계속되는 이야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내 이야기는 말 그대로 개에게 홀딱 빠진과학자 겸 페미니스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여기서 개들은 예사적 복잡성을 통해 중요해진다. 개들은 무슨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아니다. 개들은 기술과학 속에 물리-기호적 육체로 현 - P121

전한다. 개들은 이론의 대리물도 아니고 사유의 대상이 되려고있는 것도 아니다. 개들은 함께 살기 위해 있다. 인간 진화의 공범자인 개들은 태초부터 에덴에 있었고 코요테만큼 영악하다. - P122

내가 화이트헤드를 사랑하게 된 건 생물학을 통해서였지만내가 경험한 페미니즘 이론의 실천에서는 그의 철학이 훨씬 중요했다. 이 페미니즘 이론은 유형학적 사고, 이항적 이원론, 다양한 취향의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모두를 거부하며 창발, 과정,
역사성, 차이, 구체성, 동거, 공共구성co-constitution 및 우연을 다루는 방법들을 풍부하게 제공한다. 상당수의 페미니스트 저자들이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모두를 거부해왔다. 주체, 객체, 종류,
인종, 종, 장르, 젠더 모두는 관계의 산물이다. 이 글은 다정하고선한 "여성적인"-세계를 찾지도 않고 권력의 생산성과 유린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페미니즘의 탐구는 오히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누가 행위를 하고 있으며 무엇이 가능할지, 어떻게세속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책임감 있게 대하면서 덜 폭력적인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이해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 P124

스트래선은 "부분적 연결", 즉 참여자들이 전체도아니고 부분도아닌 패턴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소중한타자성의 관계라고 부른다. 내가 볼 때 스트래선은 자연문화의민족지학자로서, 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개집에 초대해도 불편해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직감이 든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세계에 있는 것이 누구이며 그것이무엇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두 층위의 시간, 즉 화학적으로 세포마다 DNA 속에 새겨진 심층의 시간, 그리고 좀 더냄새나는 흔적을 남기는 최근의 행위들로 이루어진 시간 속에서 반려종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데 아주 효과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철학적 미끼다. 구식 용어로 표현하면 <반려종 선언>은 무수한 실제 사건들이 이룬 포착의 합생에 의해 가능해진, 친족관계에 대한 주장이다. 반려종은 우연적 기초 위에 놓여 있다. - P126

나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대리모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했다.
사이보그는 불가피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핵이후 세계 속에서, 영구적인 전쟁 장치 apparatus와 그로부터 생긴 초월적이고 현실적인 거짓말들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의 기술과학 기법과 실천 양식을 존중하고 그 내부에서 살아갈 수 있게해주는 비유 내지 형상이었다. 사이보그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평범한 활동이 이루는 자연문화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기가자기 자신을 낳는다는 험악한 신화에 반대한다. 또한 존재의 필멸성을 삶의 조건으로 포용하면서, 그 모든 우연적 규모에서 세계를 실제로 채우고 있는 창발적이고 역사적인 잡종체들의 존재에 민감하다.
하지만 사이보그적 재형상화는 기술과학의 존재론적 안무에 필요한 수사학적 작업을 전부 해낸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는 - P128

사이보그를 더 크고 이반적인queer 반려종 가족에 속한 동생으로여기게 되었다. 이 가족에게 재생산 생명공학정치는 의외의 일로, 심지어 좋은 사건이 되기도 한다. 개와 어질리티 경주를 즐기는 미국의 백인 중년 여성 한 명은 철학 연감이나 자연문화민족지의 항목을 뽑는 경쟁에서 전자동화된 전사나 테러리스트및 그들의 형질변환 친족transgenic kin과 맞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 밖에도 (1) 자기 형상화는 내가 할일이 아니고, (2) 형질변환체는 적이 아닐뿐더러, (3) 길들인 갯과 동물을 털북숭이 아이로 만드는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서구세계의 투사와는 반대로, 개는 인간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 개의 매력이 있다. 개들은 투사 대상도,
의도를 구현한 물체도, 다른 무언가의 텔로스도 아니다. 개는개다. 즉, 인간과 의무적이고 구성적이며 역사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를 맺는 종이다.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은 없다. 기쁨·발명·노동·지성·놀이로 가득한 만큼, 낭비·잔인함·무관심·무지함 · 상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동-역사의 이야기를 잘 들려줄 방법과 자연문화적 공진화의 결과를 물려받을 방법을 배웠으면 한다. - P129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다. 인간의 삶을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반대로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 한, 쌀이나 꿀벌, 튤립 및 장내세균총같은 유기체적 존재자들을 다 포함하는 범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 나는 반려종의 키워드를 적어서, 이 용어를 발음할 수 있게해주는 언어적·역사적 발성 기관에서 동시에 공명하는 네 개의음조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다윈의 딸로 도리를 다하기 위해나는 진화생물학의 역사와 그 범주인 개체군, 유전자 흐름의 속도, 변이, 선택, 생물학적 종에서 비롯된 음조를 강조한다. "종"
이라는 범주가 생물학적 실체를 뜻하는지 아니면 편의상 만든분류학적 상자를 나타낼 뿐인지를 둘러싼 지난 150년간의 논쟁이 음조의 상음과 저음을 이룬다.  - P133

그래서 나는 <반려종 선언〉에서 소중한 타자의 관계 맺음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짝을 이루는 이들은 이 관계를 통해 육체와 기호 모두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다. 뒤에 나오는 진화, 사랑, 훈련, 종류 및 품종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이 이 행성에 자신과 함께 출현한 무수히 많은 종과 더불어 - P146

시간, 신체, 공간의 그 모든 척도 속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설명은체계적인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다. 그 대신 색다르고 시사적이며 신중하기보다는 과격하고, 명석판명한 가정보다는 우연한근거를 따른다. 여기서 개는 반려종이 이루는 거대한 세계에서는 하나의 행위자에 불과하다. 이 선언이나 자연문화의 삶에서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 대신나는, 마릴린 스트래선이 말한 "부분적 연결"을 찾고 있다. 이와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영원한합일 communion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번역이 필요하다. - P147

은유적으로라도 개를 털투성이 아이로 간주하게 되면 개와아이 모두 품위가 떨어지며, 아이들은 물리고 개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2001년에 와이저는 개 열한 마리와 고양이 다섯 마리를 데리고 살았다. 그녀는 성인이 된 이래 늘 개들을 소유하고 번식시키면서 대회에도 출전시켜왔다. 이와 함께 인간 아이를 셋 길렀으며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삶의 전부를 좌파적 경향의 페미니스트로 살아왔다. 와이저의말에 따르면 자신의 아이들, 친구들, 동지들과 인간 언어로 나누는 대화는 대체할 수 없다. "(내 생각에) 개들이 나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들과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눠본 적은 없다. 반면내 아이들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진정한 "동물"의 느낌은 없으므로 나와 그토록 다른 종의 "존재",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감격스러운 현실을 단 한 순간도 만지게 해줄 수가 없다." (그레이트 피레니즈 토론 리스트, 2001년 11월 14일)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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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관점이 나 자신이 처한 역사적 위치탓에 별종에가깝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스푸트니크호의 발사가 미국의 국가 과학 교육 정책에 미친 영향 덕분에 나같은 아일랜드계 천주교 신자 여성이 생물학 박사가 될 수 있었다. 나의 몸과마음은 페미니즘 운동뿐 아니라 2차 대전 이후의 군비 경쟁과냉전에 의해서 역시 구성되었다. 현재의 패배보다 정치가 발휘하는 모순적 효과에 주목하면 희망을 품을 이유가 더 많아진다.
체제를 옹호하는 미국 기술관료technocrats를 생산하기 위해 설계한 정책이 반체제자를 양산해내기도 한 것이다. - P68

20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상력에 영향을 줄, 정체성 및 경계에관련된 신화 하나를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의 논의는 조안나 러스Joanna Russ, 새뮤얼 R. 들레이니 Samuel R. Delany, 존발리John Varley,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James Tiptree Jr.,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 본다 매킨타이어 Vonda Mc-Intyre 같은 작가들에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꾼인 이들은 하이테크 세계에 체현된다embodied는 것의 의미를 탐사한다. 이들은 사이보그를 위한 이론가다. 몸의 경계에 관련된 개념들과 사회 질서를 탐구한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 Mary Douglas(1966, 1970)는 몸의 이미지가 세계관과 정치 언어에 얼마나근본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 P69

뤼스 이리가레 Luce Irigaray 및 모니크 위티그와 같은 프랑스페미니스트들은 서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몸에 관해쓰는 to write the body 방법을 알고 있으며 체현의 이미지, 그리고 특히 위티그의 경우에는 몸의 파편화와 재구성의 이미지로부터에로티시즘과 우주론, 정치를 직조해내는 방법을 안다. 수전그리핀Susan Griffin, 오드리 로드Audre Lorde, 에이드리엔리치AdrienneRich 같은 미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영향 때문에 우리가 친근한 신체적·정치적 언어로 허용할 수 있는 언어의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된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유기체적인 것을 옹호하면서 기술적인 것과 대립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상징체계 및 그와 연관된 생태여성주의 및 페미니스트 이교 신앙 paganism 속에넘쳐나는 유기체주의는, 20세기 후반에 적합한 ‘대립 이념‘이라는 샌도벌의 용어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기계나후기 자본주의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만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사이보그 세계의 일부다. - P70

미국 국경 안에서 시스터 아웃사이더는 같은 산업에서 분열과 경쟁을 유도하고 착취하기 위해 조작당하는 여성들의 인종적·민족적 정체성의 한복판에 놓인 잠재력이다. 유색인 여성은 과학 기반 산업에서 선호되는 노동력이며 전 세계의 성 시장, 노동 시장, 재생산 정치의 만화경을 일상으로 도입하는 현실의 여성들이다. 성산업과 전자제품 조립 공장에 고용된 젊은 한국 여성들은 고등학교에서 모집되고 집적회로를 만드는 교육을 받는다. 읽고 쓰는 능력, 특히 영어 능력은 다국적 기업에 이처럼 "값싼" 여성 - P71

노동을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만든다.
"구술적 원시성" 같은 오리엔탈리즘적 전형과는 반대로,
유색인 여성에게 읽고 쓰는 능력은 특별한 징표이며, 미국에서는 흑인 여성과 남성들이 읽고 쓰기를 배우기 위해 목숨을 걸어온 역사를 통해 습득한 능력이다. 글쓰기는 식민화된 집단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글쓰기는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원시적 사고방식과 문명화된 사고방식을 구분하는 서구 신화에서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해왔고, 더 최근에는 일신론적·남근적·권위주의적·단독적인 작업, 즉 유일하고 완벽한 이름을 경배하는서구의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 를 공격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거쳐, 문제의 이분법들이 붕괴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P72

글쓰기의 의미가 걸린 씨름은 현대 정치투쟁의 주요 형식 중 하나다. 글쓰기 놀이의 해방은 더없이 진지한 문제다. 미국 유색인 여성의 시와 이야기들은 글쓰기, 곧의미화의 권력을 쟁취하는 문제와 반복적으로 관련되지만 이때의 권력은 남근적이거나 순수해서는 안 된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 곧 언어 이전, 글쓰기 이전, (남성)인간의 등장 이전, 옛날 옛적의 총체성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 도구를 움켜줌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 P72

적이 아닌 모습의 사이보그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여러 결과가 생겨난다. 우리의 몸들, 즉 우리 자신인 몸들은 권력과 정체성의 지도다. 사이보그도 예외는 아니다. 사이보그 신체는 순수하지 않다. 에덴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보그 신체는 통합적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기에 종말 없는 또는 세계가 끝날 때까지) 적대적 이원론들을 발생시키며, 아이러니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에서 느끼는 강한쾌감은 더 이상 죄가 아니고, 체현의 한 양상이 될 뿐이다. 기계는 생명을 불어넣거나 숭배하거나 지배할 대상 it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이고, 우리의 작동 방식,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를 책임감 있게 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다. 현재까지(옛날 옛적에), 여성적 체현은 주어진 것, 유기체적인 것, - P83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고 어머니의 역할과 그것이 은유적으로확장된 활동 영역에서 발휘할 수 있는 솜씨를 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배정받은 자리를 벗어날 때만 기계에서 강력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고, 이 또한 따지고 보면 여성에게 적합한 유기체적 활동이었다는 핑계를 대야만 했다. 사이보그는 부분성,
유동성, 때로는 성과 성적 체현의 측면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젠더는 심오한 역사적 폭과 깊이를 지녔어도,
결국에는 보편적인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
무엇이 일상의 활동과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묻는 이데올로기적 질문에는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접근해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최근, 일상의 삶에 묻혀서 어떤 이유에서든그 생활을 유지하는 쪽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잠재적으로 우월한 인식론적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 P84

어느 정도는 솔깃한 주장이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여성의 활동을 드러내며 이것이야말로 삶의 기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유일한 the 기반이라고? 여성들의 무지, 지식과기술로부터의 배제와 실패는 어떻게 봐야 할까? 남성들의 일상적 능력, 물건을 만들거나 분해하며 다룰 수 있는 지식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다른 방식의 체현은 어떻게 다뤄야할까? 사이보그 젠더는 전면적 복수를 행하는 부분적 가능성이다. 인종·젠더· 자본은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이보그 이론을 요청한다. 사이보그에게는 총체적 이론을 생산해내려는 충동이 없지만, 경계 및20 - P84

경계의 구성과 해체에 대한 친숙한 경험은 있다. 파급력 있는행위를 위해, 과학기술에 대한 한 관점과 지배의 정보과학에 도전하는 방법을 하나 제시할 정치적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신화 체계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미지를 덧붙이면, 유기체와 유기체적인 것, 전체론적 정치는 부활의 은유에 의존하며 재생산을 위한 성이라는 자원을 반드시 소환한다. 나는 사이보그가 재생과관계가 더 깊고, 출산과 재생산의 기반 대부분을 의심한다고 말하고 싶다. 도롱뇽의 경우 다리를 잃는 것과 같은 상처를 입은뒤 재생하는 과정에서 신체 구조가 재생되고 기능이 복원되는데, 이때 다쳤던 부위에 다리가 두 개 돋아나는 등, 기묘한 해부학적 구조가 생겨날 가능성이 늘 있다. 다시 자란 다리는 괴물같고 덧나 있으며 강력할 수 있다. - P85

우리는 모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부활이 아닌 재생을 요구하며, 우리를 재구성하는가능성에는 젠더 없는 괴물 같은 세계를 바라는 유토피아적 꿈이 포함된다.
이 글에서 사이보그 이미지는 두 개의 핵심 주장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보편적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고안하면, 아마도 언제나, 지금은 확실히, 현실 전반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둘째, 과학기술의 사회관계에 대한 책임은, 반과학적 형이상학과 기술의 악마학을 거부함으로써,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 - P85

서 일상의 경계를 능숙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는것을 뜻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을 만족시킬 수단이나 복합적 지배의 기반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heteroglossia 를 향한 꿈이다. 이것은 신우파의 초구세주 회로에 두려움을 심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우주 설화를 구축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언어이다. 나선의 춤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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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 여성 가장 가구, 연속적인 일부일처, 남성의 도주, 독거하는 노년 여성, 가사 노동의 테크놀로지, 가사 노동의임노동화, 가정 노역장의 재출현, 가정 기반 사업과 재택근무, 전자화된 가내 공업, 도시의 홈리스, 이주, 모듈화된건축, 강화된 (시뮬레이트된) 핵가족, 강도 높은 가정 폭력.

시장: 신기술로 제작된 신상품이 범람하는 가운데 새로 마케팅 대상이 된 여성들의 지속적 소비 노동(특히, 산업화된국가들과 산업화 중인 국가들이 대량 실업의 위험을 모면하려 경쟁하게 되면서, 딱히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넓히려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기존의 대중 시장을 무시한 채 부유층을 노린 광고 전략과 짝을 이루는, 양극화된 구매력 부유층 하이테크 시장 구조에 대응하는 비공식 노동 및 상품 시장의 중요성 확대 전자금융을통한 감시체제: 경험의 시장적 추상화(상품화)의 강화, 그로부터 등장한 실효성 없는 유토피아적 공동체 이론이나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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