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여자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나는 당시의 규칙들을 기억한다. 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던 그 규칙들 말이다. 설사 상대가 경찰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마라. 문 아래로 신분증을 밀어 넣으라고 해라. 곤경에 처한 척하는 오토바이운전자를 도와준답시고 길가에 정차하지 마라. 자동차 문을 잠그고계속 가라, 누군가 휘파람을 불어도 절대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마라. 밤에 혼자 빨래방에 가지 마라.
나는 빨래방을 생각한다. 빨래방에 갈 때 입었던 옷들, 반바지, 청바지, 운동복,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것들, 내 옷들, 내 비누, 내 돈,
내가 번 돈, 그런 통제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빨간 옷을 입고 짝을 지어 같은 거리를 걷고 있지만아무도 우리를 보고 음담패설을 퍼붓지 않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만지지 않는다. 아무도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 P48

목표를 향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있지. 무정부 시대의 자유는 무엇을 행할 자유였어. 하지만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거야. 그것을 얕보지 마. - P49

우리 앞 오른편에는 우리가 드레스를 주문하는 가게가 있다. 어떤이들은 그 옷을 ‘해빗‘이라고도 부르는데, 아주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벗어던지기 힘든 것이 습관이니까. 가게 바깥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간판이 달려 있는데 황금색 백합 모양이다. 가게 이름은 ‘들판의 백합들‘이다. 백합 밑에 보면 글씨가 페인트로 지워진 부분이 보이는데, 그건 가게의 이름마저도 우리에게 지나친 유혹이 될수 있다고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가게들은 간판 모양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
‘백합들‘은 예전엔 영화관이었다. 학생들은 그곳을 몹시 자주 찾았다. 봄이 오면 ‘백합‘ 영화관에서는 험프리 보가트 페스티벌이열렸는데, 그때 상영한 영화들에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들, 로렌 바콜과 캐서린 헵번이 나왔다. 그녀들은 앞에 단추가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는데, 그 의상은 ‘타락‘이라는 단어를 은근히 시사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들은 단추를 풀고(undone) 타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49

꽃받침 쪽 재생되어 가는 부분의 색깔. 빨간색은 같지만 둘 사이엔 전혀 연관성이 없다. 튤립은 피로 물든 튤립이 아니고, 빨간 미소도 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해 줄 말이 전혀 없다. 튤립은 교수형을 당한 시체들을 믿지 않는 이유가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두 개체는 각자 유효하며 실존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유효한 사물들이 널려 있는 들판을 지나나는 내 길을 찾아가야만 한다. 매일매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그런 구분들을 하느라 대단한 노력을 쏟아붓는다. 구분하고 분별할필요가 있다. 마음속에선 아주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다. - P65

내 곁의 여자에게서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녀는 울고 있는 걸까? 여기서 운다고 해서 어떤 식으로 내게 잘 보일 수 있는 거지? 그런 걸 알아줄 만한 여유가 내게는 없다. 내 두 손이 바구니 손잡이를으스러져라 불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무엇이든 절대로 그리 순순히 내주지 않을 테다.
예사라는 건, 여러분이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야. 리디아 아주머니는 말했다. 지금은 보통으로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그렇게 될 거야. 예사가 될 거야. - P65

방금 눈앞에서 뭔가 벌어졌는데, 도대체 뭐지? 고지의 둥근 곡선위로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모르는 나라의 국기를 본 것 같다. 공격을 의미할 수도, 협상을 의미할 수도, 아니면 뭔가의 경계, 영역을뜻하는지도 모른다. 동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몸짓. 내리깐 푸른눈꺼풀, 뒤로 젖힌 귀, 곧추세운 털, 희번덕거리며 드러낸 이빨, 그는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걸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를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보았길 바란다. 그는 침범하려 한 건가? 내 방에 들어갔을까?
아, 그만 나도 모르게 ‘내 방‘이라고 불러 버리고 말았다. - P89

그때 우리가 그렇게 살았던가? 하지만 우리는 평상시처럼 살았다. 다들 대개는 그렇기 마련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심지어 지금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살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시하며 살았다. 무시한다는 건 무지와 달리,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즉시 변화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데워지는 목욕물처럼 자기도 모르게 끓는 물에 익어 죽어 버리는 거다. - P101

"고맙습니다."
기분상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흘려야 한다. 그는 느릿하게, 아쉽다는 듯이, 손을치한다. 그의 입장에선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사 결과를 위장할 수도 있고, 내가 암이나 불임이라고 보고해서 나를 ‘여성‘들과 함께식민지로 추방시킬 수도 있다. 지금 듣고 본 일은 없었던 일로 쳐야하지만 어쨌든 내가 맡게 된 이상 지금 우리 사이의 공기 중에는 그가 지닌 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떠돌고 있다. 그는 은근슬쩍 내 허버지를 가볍게 툭툭 두들기더니 장막 뒤로 물러난다.
"다음 달에 봅시다."
나는 장막 뒤에서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손이 떨린다.
나는 왜 겁에 질린 걸까? 경계를 넘어서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덥석 사람을 믿어 버린 것도 아니고, 위험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안전한데도,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건 선택 그 자체다.
탈출구, 구원의 길. - P110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내 자아는 지금부터내가 구성해야만 하는 물건이다. 연설을 짜맞춰 구성하듯이. 지금부터 내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무엇이다. - P119

시간이 남는다. 이건 내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일들 중 하나다. 어마어마한 양의 채워지지 않은 시간, 아무 내용도 없는 기나긴 괄호들 하얀 소리로 존재하는 시간 수를 놓을 수만 있다면, 베를 짜든뜨개질을 하든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다. 화랑에 들어가 19세기 전시관을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19세기는 하렘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수십 개에 달하는 하렘의 그림들, 긴 의자에 축 늘어져 기댄 뚱뚱한 여자들이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거나 벨벳 모자를 쓰고서 공작새 깃털을 부채 삼아 부치고 있고 뒤에는 내시가 보초를 서고 있는 그림들. 한 번도 하렘에 가보지 못한 남자들의 손으로 그린, 앉아 있는 육신에 대한 수많은 탐구들, 이 그림들은 에로틱하다고 여겨졌고 나도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다.  - P123

나는 씻기고, 솔질하고, 배불리 먹인 포상용 암퇘지처럼 기다린다.
80년대 언제쯤인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을 위한 공이 발명된 적이 있다. 돼지용 공은 커다란 색색의 공이었는데, 돼지들은 납작한 코로공을 굴리며 놀곤 했다. 양돈업자들은 이 운동이 돼지의 육질을 향상시킨다고 말했다. 돼지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생각할 거리가 될만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심리학 개론』에서 읽었다. 이 이야기와 할 일이 있어 스스로 전기 충격을 받는 우리에 갇힌 쥐들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옥수수 한 알을 나오게 만드는 버튼을 쪼도록 훈련받은 비둘기들 이야기도. 비둘기들은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은 한 번 폴 때마다 옥수수가 한 알씩 나왔고, 두 번째 그룹은 두 번에 한 알씩 옥수수가 나왔으며 세 번째 그룹은 정해진 원칙이 없었다. 담당자가 옥수수 배급을 끊으면 첫 번째 그룹은 상당히 일찍 포기했고, 두 번째 그룹은 그보다 약간 늦게 포기했다. 하지만 세 번째 그룹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버튼을 쪼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해야 옥수수가 나오는지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 P124

숲속으로 소택지 속으로 침전하듯 내 몸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발 디딜 만한 곳이 어딘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내 영토는방심할 수 없는 땅이다. 나는 귀를 대고 미래의 풍문을 들어야 하는대지가 된다. 찌르는 듯한 아픔 하나하나, 미미한 고통의 중얼거림,
허물 벗은 살갗의 잔물결, 조직의 부종과 축소, 육신이 흘리는 침, 이모든 것이 계시이고, 내가 알아야만 하는 지표들이다. 매달 나는 겁에 질려 핏자국을 찾아 헤맨다. 피가 비치면 실패라는 뜻이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고 또한 나 자신의 좌절이기도 하다. - P131

이제 육신은 스스로를 다른 형태로 재배열했다. 나라는 존재는 중심이 되는 대상을 둘러싸고 응집된 구름 같은 형상이 되어버렸다.
이 형상은 서양배와 비슷한 모양인데 나 자신보다 오히려 더 단단하고 현시적이다. 핵은 투명한 껍데기에 싸여 빨갛게 빛나고 있다. 그핵 안에는 밤하늘처럼 거대하고 어둡고 굴곡이 진 공간이 하나 있다. 이 공간은 검은색이 아니라 검붉은색에 가깝지만,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빛의 미세한 점들이 그 속에서 불어나서 반짝거리고 터져 시들어간다. 달마다 달이 뜬다. 거대하고, 둥글고, 무거운 달이 징조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절망이 기근처럼 내게 다가오는 걸바라본다. 핵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또다시 되풀이해 느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파도에 파도가 이어진다. 짜고 붉은 파도가 시간을 기록하며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밀려온다. - P132

망원경을 거꾸로 보는 것처럼 아주 작은 창문이다. 크리스마스카드에 있던 것 같은 창문, 낡은 창문이다. 바깥은 밤이고 얼음이 있고, 안에는 촛불과, 빛나는 나무와 가족이 있고, 심지어 종소리,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썰매의 종소리, 오래된 음악까지 귓전에 들려온다. 하지만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작지만 아주 또렷한 창문으로 보이는 그 모습은 내 딸이다. 내게서 멀어져 가는 내딸, 어느새 노랗고 빨갛게 변색하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두 팔을나를 향해 뻗은 채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멀어져 가는 그 애다.


종소리에 잠이 깬다. 코라가 내 방문을 두들긴다. 나는 깔개 위에일어나 앉아,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소매로 닦는다. 무수한 꿈 중에서도 이것은 최악의 악몽이다. - P135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린다. 식구(household). 그게 우리다. 사령관은 이 식구들의 가장이다. 우리는 이 집(house)을 받들고(hold)있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소유할지어다, 받들지이다.
배의 균형을 잡는 화물창(hold)처럼. 화물창은 텅텅 비어 있다.
코라가 처음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리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들어온다. 그들 역시 종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지만, 불만스런표정이다. 설거지와 다른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이곳에 참석해야 한다. 식구들이 이 자리에 모이는 것은 모두의 의무다. 어떤 식으로든 결국 전부 의례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한다.
리타는 슬쩍 들어와 내 뒷자리에 서려 하다가 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다. 이렇게 그녀의 시간을 낭비하는 건, 전부 다 내 탓이다. 내탓은 아니지만 내 몸 탓이다.  - P142

그들은 항상 승리만을 보여 줄 뿐, 패배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다.
나쁜 소식을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 남자는 배우인지도 모른다.
다시 앵커가 화면에 등장했다. 그의 매너는 친절하고 자상하다.
스크린 속에서 바깥에 있는 우리를 내다보며 똑바로 쳐다보는 그 모습, 햇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에 하얀 백발과 솔직해 보이는두 눈, 현명해 보이는 눈가의 주름살, 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이상적인 할아버지 상 같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온화한미소가 시사하듯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곧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내가 약속한다.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믿어야만 한다. 착한 아이들처럼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믿고 싶은 일을 말해 준다. 몹시, 대단히 설득력이있다. - P146

이름이란 건 전화번호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거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이름은 중요한 문제다. 나는 그 이름의 기억을 숨겨놓은 보물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와 파낼나만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이름이 묻혀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의 진짜 이름에는 마력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부적 같은 마력이 밤마다 내 싱글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으면 그 이름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떠다닌다. 손에 닿을락 말락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떠다닌다.
- P149

9월의 토요일 아침이라, 나는 내 빛나는 이름을 걸치고 있다. 이제는 죽은 어린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 두 개를 안고 뒷좌석에 앉아 있다. 봉제 토끼 인형은 낡은 데다 사랑을 듬뿍 받아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나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다. 감상적인 기억이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토끼 인형 생각에 넋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여기서, 세레나의 몸속에 들어갔다나온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중국산 깔개 위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터뜨릴 수는 없다. 여기서는 안 된다. 지금은 안 된다. 우는 건 나중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 P149

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다. 스스로 묘사한다.
그는 안도의 한숨처럼 숨죽인 신음소리를 토해 내며 마침내 사정한다. 세레나 조이도 마침내 큰소리로 참았던 숨을 토한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사령관은 우리들의 합체된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차마 우리 위로 쓰러질 수는 없었던 거다. 잠시 숨을 돌리고물러서더니 다시 지퍼를 올린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돌아서 방을 나가면서, 우리 둘이 병든 노모인 것처럼 과장되게 조심을 하며등 뒤로 문을 닫는다. 이건 어쩐지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감히 웃음을 터뜨릴 용기가 내겐 없다.
세레나 조이는 내 손을 놓는다.
"일어나도 좋아."
그녀는 말한다.
"일어나서 나가"
그녀는 내가 10분간 휴식을 취하게 해 줘야 한다. 발을 베개 위에올려놓고 휴식을 취해야 아기를 가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동안 말없이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그 목소리에서는 혐오감이 묻어난다. 내 살을건드리기만 해도 욕지기가 나고 병이 옮을 것 같다는 식의 진한 혐오감. 나는 그녀의 몸에 얽혀 있는 육신을 훌훌 풀고 일어난다. 사령 - P168

관의 정액이 다리 가랑이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돌아서기 전에 나는그녀가 파란 치마를 매만지고 두 다리를 꼭 모으는 모습을 본다. 그녀는 머리 위의 덮개를 바라보며, 저주할 때 쓰는 인형처럼 빳빳하고 반듯하게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다.
이 일이 누구한테 더 끔찍할까? 그녀일까, 나일까? - P169

다시금 이불을 걷고, 잠옷 바람에 맨발로 살금살금 일어나서 어린처럼 창문가로 간다. 바깥이 보고 싶다. 새로 내린 눈(雪)의 젖가슴위에 달이 걸려 있다. 하늘은 맑지만 탐조등 불빛 때문에 잘 보이지않는다. 하지만 희미해진 하늘 위에 달은 확실히 둥둥 떠 있다. 새초승달, 소원을 비는 달, 오래된 암석으로 된 은 덩어리, 여신, 눈 깜박임. 달은 돌이고 하늘은 치명적인 무기로 가득 차 있지만, 아, 그래도 어쨌든 얼마나 숨 막히게 아름다운가.
보지금 여기 내 곁에 루크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의 품에안겨서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걸 듣고 싶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 단순히 소중한 존재 이상이 되고 싶다. 나는 내 옛 이름을 되풀이해 부르고 또 불러본다. 내게 한때 가능했던 일들, 한때 다른 이들이 나를 바라봐주던 그 시선을 떠올리기 위하여.
뭔가를 훔치고 싶다. - P172

닉이 말한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사무실에서."
"무슨뜻이에요?"
내가 말한다. 그는 사령관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나를 만난다고?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나하고는 볼일이 끝나지 않았던가?
"내일입니다."
그는 겨우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말한다. 어두운 거실에서 우리는 천천히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마치 어떤 힘이나, 조류에 의해 서로에게 이끌렸고 똑같이 강력한 어떤 손들이 우리를 떼어내는것처럼,
나는 문을 찾아서 차가운 도자기 손잡이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 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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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때 체육관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잤다. 래커 칠을 한 나두 바닥 위엔 한때 그곳에서 열리던 경기들을 위한 직선이며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농구 그물은 없었지만 링은 여전히 제자리에달려 있었다. 실내를 빙 둘러 관중석으로 쓰던 발코니가 있었는데그곳에 있으면 추잉 껌의 달콤한 흔적과 관전하는 소녀들의 향수 냄새, 그 속에 어우러진 자극적인 땀 냄새의 흔적이 희미하게 코끝에닿았다. 사진을 보면 여자아이들은 처음에 펠트 스커트를 입다가,
나중에는 미니스커트를, 그다음에는 바지를 입었고, 훨씬 더 훗날에는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하고 머리에 요란한 초록색으로 군데군데물들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댄스 파티도 열렸을 법한 곳이었다. 음악의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무른다. 덧쓰고 지우고 그 위에 다시 덧쓴 양피지의 글씨처럼 영영 들리지 않은 소리들 - P11

이 겹겹이 포개져 있고, 스타일 위에 스타일이 겹치고, 나지막히 깔리는 드럼 소리, 허허로운 흐느낌, 휴지로 만든 꽃다발, 마분지로 만든 악마들, 춤추는 사람들 위로 빛의 눈발을 흩뿌리며 빙빙 돌아가는 유리의 공들.
방 안에는 옛날의 섹스와 고독과, 형체도 이름도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기대가 있었다. 그 갈망이 기억난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던 어떤 일을 기다리던 그리움이 그러나 그때 그 순간 그네들의 손이 옴폭 팬 등허리를 만지고, 저 뒷마당에서, 주차장에서 들썩거리는 육신 위로 희미한 영상이 명멸하던 소리 죽인 TV 시청실에서 우리 몸에 그 손들이 닿은 후로 모든 것이 딴판으로 달라져 버렸다. - P12

우리는 미래를 갈망했다. 우리는 어쩌다 터득하게 되었을까? 영영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갈구하는 이런 재능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버린걸까? 갈망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기 중에 감돌고 있다. 서로 이야기도 나눌 수 없도록 멀찍이 간격을 두고 일렬로배치해 둔 군용 간이침대 위에서 잠을 청할 때면 허기는 공중을 떠돌다 무심코 표면으로 자주 떠올랐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플란넬 시트를 깔고 군용 담요를 덮고 자는데, 담요는 구시대 것이어서 아직도 U.S.라는 글자가 찍혀 있다. 옷은 곱게 개켜서 침대 밑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놓아두었다. 조도는 낮추었지만 소등은 하지 않았다.
순찰을 도는 사라 ‘아주머니‘와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는 가죽 띠에 달린 가죽 끈에 가축용 전기 충격기를 매달아 덜렁거리며 다녔다.
하지만 그들에게 총은 없었다. 제아무리 ‘아주머니‘라도 총을 덥석 맡길 만큼 신뢰받지는 못했다. 총을 지닐 수 있는 건 ‘천사‘ 중에 - P12

서도 특별히 뽑은 간수들뿐이었다. 그 간수들도 호출 없이는 건물안으로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고, 우리 또한 산책할 때가 아니면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다. 산책은 하루 두번,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축구장을 도는 것인데, 경기장 주위엔 철조망이 달린 사슬 울타리가둘러쳐져 있었다. 천사들은 등을 돌리고 철조망 바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다른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이 쳐다봐 주기만 한다면 말을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뭔가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아직 몸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꿈꾸는 환상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의자 하나, 탁자 하나, 등 하나, 머리 위 하얀 천장에는 화환 모양의 부조 장식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덕지덕지 석고 칠을 한 텅빈 공간이 보였다. 그곳은 얼굴에서 눈알을 뽑아낸 자리 같았다. 틀림없이 전에는 그 자리에 샹들리에가 있었을 것이다. 밧줄을 걸 수있을 만한 물건은 그들이 모조리 들어내 버렸다.
창문 하나, 하얀 커튼 두장.창문아래 작은 방석이 놓인 걸상 창문이 살짝 열려 있을 때면 (어차피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는다.) 바람이통해 커튼이 흔들린다. 나는 의자나 창가 자리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이런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 유리창에 비친 햇살이 마룻바닥으로 툭 떨어지곤 한다. 좁고 긴 나무 널이 깔린 마룻바닥은 공들여닦아서 광택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다. 마룻바닥에는 천을 땋아 만든 타원형 바닥 깔개가 하나 있다.  - P17

침대 하나. 싱글, 적당히 딱딱한 매트리스에 자투리 털들을 모아넣은 하얀 침대보 침대에서는 그저 잠만 잘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는다. 아니면 잠도 못 자든지.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애쓴다. 지금은 다른 모든 물품들처럼 생각도 군용식량처럼 배급해야 한다. 생각하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일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는 되도록이면 끝까지버틸 작정이다. 푸른 붓꽃의 수채화 액자에 왜 유리가 끼워져 있지않은지, 창문은 왜 활짝 열리지 않으며 어째서 안전유리가 끼워져있는지 나는 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탈주가 아니다. 어차피 멀리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뭔가 날카로운 흉기를 손에 넣기만 하면우리가 우리 몸에다 활짝 그어버릴 또 다른 탈출구가 겁나는 거다. - P18

그래도 의자, 햇살, 꽃들. 이런 것들을 쉽사리 무시해선 안 된다.
나는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고 있고, 숨 쉬고 있다. 꼭 모아쥐고있던 두 손을 펴고 햇살을 받아본다. 내가 있는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특혜의 장소다. 흑백 논리를 사랑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말대로. - P19

리타가 커피를 끓여 주면(사령관들의 집에는 아직도 진짜 커피가 있다.) 우리는 리타의 식탁에 둘러앉아아, 물론 내 식탁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리타 역시 식탁의 주인이 아니지만) 맘껏 수다를 떨 수도 있을 텐데, 각양각색의 통증이나 질병을 호소하며 다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며,
도대체 말을 안 듣는 말썽꾸러기처럼 우리의 몸이 부려 대는 갖가지장난들을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 서로의 이야기에, 그래, 그런 마음알아라는 표시로 고개를 구두점처럼 끄덕거려 보일 수도 있을 텐데.
특효약을 서로 알려 주고, 서로 자기가 더 아픈 데가 많다고 궁상맞게 경쟁이라도 하듯 한탄을 늘어놓고, 처마에 앉은 비둘기들처럼 보드랍고 서글픈 단조)의 음색으로 소곤소곤 불평을 늘어놓을 텐데, 아, 무슨 말인지 알아라고 우리는 말하겠지. 아니면 연세 드신 분들한테서 요즘도 가끔 들을 수 있는 그 야릇한 표현처럼, 어디서 온얘긴 줄 알겠군이라고 하든가. 마치 목소리 그 자체가 아주 먼 곳에서 방금 도착한 여행자인 양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그래. - P23

콧수염이 있는 수호자가 작은 행인용 문을 열어 주고 뒤로 멀찌감치 둘러서면, 우리는 문을 통과한다. 멀어져 가는 우리 뒷모습을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아직 여자를 건드릴 수 없는 이두 남자가 눈으로 여자를 애무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 풍만한 붉은 스커트가 내 몸 주위로 흔들리게 한다. 이건 울타리 너머에서 약 올리거나 절대로 먹을 수 없는뼈다귀를 개의 눈앞에서 흔드는 거나 마찬가지짓이다. 그런 짓을하는 내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저 아이들의 잘못은 아닐 테니까. 저 아이들은 너무 어리다.
그러다 나는 자신이 수치심조차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 - P44

는다. 나는 그 힘을 즐긴다. 개뼈다귀처럼 활기 없는 권력이지만, 그래도 힘은 힘이다. 우리를 보고 그들이 딱딱하게 발기를 해서 남몰래 페인트칠한 울타리에 대고 몸을 문질러야만 할 지경이 된다면 좋겠다. 나중에 밤이 되면, 부대의 침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겠지. 지금 그들에게 남은 욕망의 배출구라곤 자기 자신밖에 없지만 자위는신성 모독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잡지도, 영화도, 대체물도 없다. 꼿꼿하게 차렷 자세를 취한 채로 목책 옆에 서서 멀어져 가는 우리의 형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두 남자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나, 그리고 나의 그림자가 있을 뿐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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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땐 걸음도 빠르고 차도 빨리 몬다. 그렇다고 위험을 자초하지는 않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위험한 세상이라는 걸 알기때문이다. 커다란 손이며 어깨를 보면 만만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눈은 의외로 그 속에는 관조적인, 거의 망설이는 듯한 의문이 담겨 있다. 여자들과의 연애에 능한이유를 눈에 담긴 이 의문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약속을 해야만 해. 그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약속이 없으면 누구에게나 삶은미 미마 그렇다고 자신이 믿지도 않는 약속을 한다면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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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를 위한 비명(碑銘)


세상의 두 문(門)이
열린 채 있다.
네가 어스름 속에서
열어 두고 가 버린 문.
그 문이 덜컥덜컥 딛히는 소리를 들으며
우린 어렴풋한 것을 나른다.
초록빛을 네 영원 속으로 나른다.

1953년 10월



프랑수아를 위한 비명: 프랑수아는 첼란의 첫아들 이름이다. 첼란이 날짜를 기입한 시는 이 시가 유일하다.

열쇠를 번갈아가며


열쇠를 번갈아가며
너는 집을 연다. 그 안에서는
침묵으로 은폐된 것의 눈(雪)이 휘날리고 있다.
네게서, 눈(眼)에서 입에서 혹은 귀에서
솟는 피에 따라
네 열쇠가 바뀐다.

네 열쇠가 바뀌면 말이 바뀐다.
눈송이와 더불어 휘날려도 좋은 말.
너를 앞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따라
그 말 주위에 눈이 뭉친다.

돌 언덕


내 곁에 너는 살고 있다. 나같이
움푹 꺼진 어둠의 뺨속
돌 하나로,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우리가 쉼 없이 구르는 곳,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

오 이 취한 눈,
여기서 우리처럼 길 잃고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이따금씩
놀라며 하나로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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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와 본 적은 없지만 그 광장을 아니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나는 마음으로 알고 있었다. 물건에 볕이 드는 걸 막기 위해차양까지 달린 정식 매대를 갖춘 이들도 있었다. 벌써부터 더위가기승이어서, 동유럽의 평원과 숲에서 밀려드는 각다귀 같은 열기에날이 절절 끓었다. 잎사귀의 더위. 지중해의 더위와 같은 확신은 찾아볼 수 없는, 암시로 가득한 더위, 이곳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가장 확실에 가까운 건 할머니다.
다른 장사치들-전부 여자다은 직접 기른 것을 바구니나 양동이에 담아 온 변두리 마을 사람들이다. 당연히 매대가 없고, 집에서챙겨 온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서 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그 사이를 이리저리 거닌다. - P82

나는 그 사이를 이리저리 거닌다. 나이도 천차만별, 체격도 각양각색, 눈동자의 색도 모두 다르다. 똑같은 머릿수건을 맨 여자들은찾아볼 수 없다. 파를 썰거나 징글징글한 잡초를 제거하거나 붉은무를 뽑을 때, 가끔씩 쑤시는 허리가 고질병이 되지 않도록 허리를보호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저들이 젊었을 땐 엉덩이로 충격을 흡수했는데, 이제 그 역할을 도맡아야 하는 것은 어깨다.
나는 의자도 없이 서 있는 어떤 여자의바구니를 들여다본다. 그속엔 흐릿한 금빛의 패스트리와 자그마한 파이가 가득하다. 모양은체스의 말, 그 중에서도 캐슬과 비슷하다. 총안이 있는 곳을 위로 향하게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세울 수 있는 캐슬 크기는 하나에 십센티미터쯤 된다.
캐슬을 하나 집어 들고서야 실수를 깨닫는다. 패스트리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다. - P83

켄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맞은편 벤치에 가서 앉는다. 육십 년 전에 자신의 지식을 내게 나눠 줬던 남자.
비록 그것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지만.
그는 어린 시절이나 부모님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마어렸을 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뉴질랜드를 떠나 유럽으로 오지 않았을까 짐작만 했을 뿐이다. 그의 부모님은 부자였을까, 가난했을까?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지금 이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게같은 질문을 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었을 것이다.
거리는 결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뉴질랜드의 웰링턴, 파리,
뉴욕, 런던의 베이스워터 로드, 노르웨이, 스페인, 그리고 내 생각엔 버마나 인도에도 잠깐 머물지 않았을까 싶다. 저널리스트, 학교교사, 댄스 강사, 영화의 단역 배우, 기둥서방, 가게도 없는 책 장수, - P84

크리켓 심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위에 거론한 것들 중에 몇 개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게 노비 광장에서 마주 앉은 그를 그리는 내 나름의 초상화다. 파리에서는 신문에 삽화를 그렸는데, 이건 확실하다. 그가 좋아했던 붓의 종류-손잡이가 유난히 긴 붓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발사이즈는 삼백 밀리미터였다.
그가 보르쉬 (고기와 각종 야채를 넣고 끓인 러시아식 수프-역자) 그릇을 내 앞으로 민다. 그러더니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숟가락을 닦아서 내게 건넨다. 검은색 격자무늬의 손수건이 낯익다. 수프는 맑고, 맛이 깊고, 붉은색이 나는 야채 보르쉬인데, 근대가 갖고 있는 천연의 단맛을 조금 중화시키기 위해 폴란드식으로 사과식초를 약간 넣었다. 나는 조금 먹다가 그릇을 다시그에게 밀고 숟가락을 돌려준다. 말은 한 마디도 오가지 않는다. - P85

그것들을 내게 직접 건네준 적은 없다.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만말하고 아파트의 벽난로 선반 한쪽에 올려뒀다. 차곡차곡 쌓인 여권 중에서 골라 가기도 했다.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 마르셀 프루스트, 『스완네 집 쪽으로,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 파티』.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 헨리 밀러, 『북회귀선』.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 다 문학을 설명하는 것의 효용을믿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그에게 물어본 적도 없다. 그역시 내 나이나 경험에 미뤄 볼 때 이런 책들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모른다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없다. 프레데릭 트레브스, 엘리펀트맨.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파리에서 출간된 영문판). 우리 사이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책을 통해 배운다―또는 배우려 한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다. 그 과정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그림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고난의 성자 요한. - P93

그는 사 년 전에 총살당했다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를 스페인어로 읽어 주었고, 그걸 우리말로 번역해서 들려주었을 땐, 열네 살짜리 주제에 인생이 무엇이고 뭘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믿었다.
세부적인 몇 가지들을 제외하고, 아마 이런 말을 그에게 했거나, 아니면 은연중에 드러난 나의 무모함이 거슬렸던 모양인지 그가 이런얘기를 했다. 세부적인 것들을 살펴야 해! 나중이 아니라 맨 먼저!
그의 말투엔 언젠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어도, 그 자신이 세부적인 것에서 후회로 남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후회가 남은 게 아니라 대가를 치러야 했던 실수. 그는 살면서 후회하지 않은 많은 것에 대가를 치렀다. - P94

스타일을 파악하고 비평의 기본을 처음으로 배운 것은 에지웨어로드에 있는 올드멧 뮤직홀의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였다. 러스킨,
루카치, 베런슨, 벤야민, 뵐플린은 모두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내 비평의 기본은 올드멧에서 생겨났다. 이층 관람석에서 요란스럽게 환호하고 가차 없이 야유를 보내는 관중에 싸여 그 삼각형의 무대를내려다보면서 갖춰졌다. 그들은 스탠드업 코미디와 아다지오 곡예,
가수들과 복화술사를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평가했다. 우리는 테사 오세아가 극장이 떠나가도록 갈채를 받는 것도 보고, 쏟아지는야유에 눈물로 머리카락을 적시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도 봤다.
공연엔 스타일이 있어야 했다. 청중의 마음을 하룻밤에 두 번은사로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쉼 없는 개그 퍼레이드가좀더 신비로운 뭔가로 이어져야만 했다. 인생 자체가 스탠드업 공연이라는 음모적이고 불경한 암시 같은 것! - P95

멜론

우리가 보기에 멜론은, 어딘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가뭄 같은 과일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계곡이나 흙먼지 날리는 갈라진 들판을지나가다 멜론을 발견하면, 오아시스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심정으로 그걸 먹었다. 맛은 기가 막히고 지친 심신을 달래줬지만,
사실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멜론은 자르기도 전에 물기 어린 단내를 풍긴다. 그 안에 담긴 한없이 진한 내음. 하지만 갈증을 해소하려면 어떤 예리한 기운이 필요하다. 차라리 레몬이 낫다.
작고 녹색을 띨 때라면 멜론이 젊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 하지만이 과일은 묘하게도 순식간에 나이를 초월해 버린다. 아이의 눈에비친 어머니처럼, 껍질에 난 흠집ㅡ흠집이 없는 경우는 없다-은사마귀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점 같다. 다른 과일의 경우처럼 오래 됐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그 멜론이 개성을 지녔으며, 늘 그래왔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 P107

이걸 한번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겉모양만 보고는 속을 거의 짐작할 수 없다. 자르는 순간까지 결코 드러나지 않는, 녹색으로살짝 방향을 튼 그 진한 오렌지색을 가운데 빈 구멍에 가득한 씨.
옅은 불꽃 같으면서도 촉촉한 색깔의 그 씨앗들이 한데 뭉쳐 매달린모습 앞에서는 제아무리 뚜렷한 질서의식도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구석구석 반짝이지 않는 데가 없다.
멜론의 맛에는 어둠과 햇살이 모두 담겨 있었다. 결코 함께 존재하지 못했을 상반된 것들을 기적처럼 한데 합쳐 놓았다. - P108

복숭아

우리가 먹던 복숭아는 햇볕에 검게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뻘건검은색이지만, 붉은 기운보다는 검은색이 더 짙었다. 시뻘겋게 달컸다가 꺼내 식히는 중이어서 여전히 뜨겁다는 경계심을 갖기 어려운 쇠의 검은색. 말편자 같은 복숭아.
검은색이 전체적으로 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늘이 졌던 부분은 희끔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늘을 드리웠던 나뭇잎들이 제 색을 슬쩍슬쩍 칠한 것처럼 녹색이 살짝 감돌았다.
우리 때에는 유럽의 부잣집 여자들이 얼굴과 몸을 복숭아처럼 희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집시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복숭아는 한 손에 꽉 차게 큰 것에서부터 당구공만큼 작은 것까지크기가 상당히 다양했다. 작은 것의 껍질은 더 섬세하기 때문에 살 - P108

이 짓무르거나 너무 익을 경우 보일 듯 말 듯 주름이 잡히는 경향이있었다.
그 주름을 보면 검게 그을린 팔뚝에서 접히는 중간 부분의 따뜻한피부가 연상되곤 했다.
속에는 씨가 있는데 질감은 짙은 나무껍질 같고, 모양새는 제멋대로인 게 꼭 운석 같다.
이런 야생의 복숭아는 신이 도둑들을 위해 만든 과일이었다. - P109

자두

해마다 8월이면 우리는 자두가 나오길 기다렸다. 실망스러울 때도맡았다. 덜 익었거나 섬유질이 많거나 거의 말라붙었거나, 그렇지않으면 지나치게 무르거나 물컹거렸다. 한입 베어 물 가치조차 없는 것도 많았는데, 만져만 봐도 적당한 온도가 아니라는 걸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섭씨나 화씨로는 잴 수 없는 온도, 햇빛에 둘러싸인 어떤 시원함의 온도, 어린 사내아이가 꽉 쥔 주먹의온도,
그 아이는 여덟 살에서 열 살 반 사이, 사춘기에 짓눌리기 전에 독립심을 키워 가는 나이다. 아이가 손에 자두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한입 베어 물면, 과일의 혀는 쏜살같이 목 뒤로 넘어가고 아이는 그것의 약속을 삼킨다.
무슨 약속일까? 아직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이제 곧 아이가 이름을 붙이게 될 뭔가에 대한 약속, 아이가 느끼는 달콤함은 더 이상설탕의 맛이 아니고, 계속 자라나는 가지, 끝이 없는 것만 같은 그것 - P109

의 맛이다. 그것은 아이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어떤 몸에 달려있다. 그 몸에는 세 개의 팔다리가 더 있고 목과 발목이 있으며, 소년의 몸과 비슷하다. 단지 뒤집혀 있을 뿐. 가지의 구석구석으로 수액이 끊임없이 흐른다. 아이는 잇새에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이가 소녀나무라고 부르는, 이름 없는 하얀 나무의 수액.
자두 백 개 중에 하나만이라도 이런 느낌을 되살려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P110

체리

체리에는 다른 어떤 과일에서도 볼 수 없는 발효의 풍미가 있었다.
갓 딴 체리는 햇볕이 가미된 효모의 맛이 났고, 그 맛은 유난히 반짝이는 껍질의 윤기와 서로 보완이 됐다.
체리를 먹으면 딴 지 한 시간밖에 안 된 것이라 해도 그 자체의 썩은 맛이 섞여 있다. 체리의 금색이나 붉은색 속에는 늘 갈색의기미가 어려 있다. 살이 물러져서 해체되어 들어갈 색.
체리가 청량감을 주는 까닭은 순수함 때문ㅡ사과처럼―이 아니라, 발효에서 일어나는 기포가 혀를 살짝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살짝 간질이기 때문이다.
크기가 작고 과육이 가벼우며 껍질이 얇기 때문에 체리의 씨는 늘어딘가 느닷없는 느낌이었다. 체리를 먹으면서 씨를 예감하기란 어려웠다. 씨를 뱉어 놓고 보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과육과 그다지상관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내 몸의 침전물. 체리를 먹음으로써 만들어진 불가사의한 침전물처럼 느껴졌다. 체리 한 알을 먹을 때마 - P110

다 체리의 이빨을 하나씩 뱉어냈다.
얼굴의 나머지 부분하고 확실히 다른 입술과 체리는 그 윤기와 말창거리는 것까지 똑같다. 껍질은 둘 다 액상의 피부 같다. 모세관의표면, 우리의 기억이 옳은지, 아니면 죽은 이들이 과장을 하는 건지확인을 해 보라. 체리를 입 안에 넣고, 아직 씹지는 말고, 잠깐 동안그것의 밀도, 그것의 부드러움과 탱글탱글함이, 그걸 물고 있는 입술과 얼마나 완벽하게 일치하는지를 느껴 보라. - P111

큐치

짙고, 작고, 타원형이며, 길이가 사람의 눈동자 정도 되는 자두의 일종. 가을이 되면 잘 익어 나뭇잎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큐치.
익으면 거무스름한 보라색이 되지만, 씻을 때 손가락으로 문질러닦지 않으면 표면에 과분(果粉)이 남는다. 푸르스름한 나무 연기 색깔의 과분. 이 두 가지 색을 보면 우리는 물에 가라앉는 것과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동시에 생각났다.
노르스름하니 옅은 녹색의 과육은 달콤하면서도 시큼해서 깔쭉깔쭉한 톱니의 느낌이 난다. 자잘한 톱날을 혀로 슬며시 문지르는것 같은. 큐치는 자두처럼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이 나무는 늘 집 가까이에 심었다. 겨울에 창밖을 내다보면 작은새들이 먹이를 찾아 매일같이 몰려와서 이 가지 위에 깃을 쳤다. 콩새, 울새, 박새, 참새 떼에다 먹이를 뺏어 먹는 까치 한 마리도 가끔끼어 있었다. 다시 봄이 오고 꽃들이 막 피어날 무렵이면 그 작은 새들이 큐치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부르곤 했다. - P111

이게 노래의 과일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큐치를 통에가득 담아 발효시켜서 만드는 놀이라는 슬리보비츠, 그러니까 일종의 자두 브랜디를 불법으로 담가 마셨다. 그리고 기포가 뽀글뽀글올라오는 이 술 한 잔을 마시면 예외 없이 사랑의 노래, 고독과 인고의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 P112

옆에 딸린 야트막한 컵 모양의 공간-직경 사 미터 - 으로 기어들어가 보니 불규칙하게 출렁이는 한쪽 벽에 빨간색으로 곰 세 마리가 그려져 있다. 몇 만 년 뒤에나 전해질 동화처럼 아빠 곰, 엄마 곰.
그리고 아기 곰이 쪼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곰 세 마리와 그 뒤로보이는 조그만 아이벡스 두 마리. 화가는 깜빡이는 횃불의 불빛으로 바위와 대화를 나눴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곰이 앞으로걸어갈 때 앞발에 엄청난 체중을 실어 휘젓는 듯한 느낌을 제대로살려냈다. 갈라진 균열은 아이벡스의 등과 딱 들어맞는다. 화가는자신이 그리는 동물들을 속속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은어둠 속에서도 그것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바위는 화가에게 동물들-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이 그 속에 있으므로 손가락에 빨간 물감을 칠해서 그걸 바위의 표면으로, 얇은 막 같은 그표면으로 불러내어 바위에 몸을 비비고 냄새를 묻히게 할 수 있다고말해 주었다. - P136

그들은 얼마나 자주 이 동굴을 찾았을까? 화가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을까? 대답이 없다. 그저 위험과 생존, 두려움과보호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것을 추억에 담아 가기 위해 이곳에 왔을 거라는 추측으로 만족해야 할까?
어느 시대건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일까?
쇼베 동굴에 그려진 대부분의 동물들은 맹수지만, 그림에는 두려움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존경심, 그렇다. 우정 어린, 친밀한 존경심, 그리고 그것은 여기 그려진 모든 동물의 이미지 속에서인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즐거이 드러난 존재.
이곳의 모든 동물들은 인간 안에서 안온하다. 이상한 조합이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다. - P137

쇼베 동굴의 특징은 이곳이 봉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만 년전에 동굴 입구-널찍하고 빛이 스며드는-의 천장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1994년까지, 화가들이 마주했던 어둠이 왜냐하면 어둠은그들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부터 들어와서 그들이 남긴 모든 것을 묻어 보존했다.
석순과 종유석은 계속 자랐다. 몇몇 곳에서는 방해석이 백내장처럼 세밀한 부분들을 덮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표현의 비범한 신선함은 대체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즉시성은 선형적인 시간감각을 방해한다. - P139

서쪽으로 가는 몇 무리의 동물들. 그 속에, 멀리 있는 거대한 동물들과 닿아 있는, 아주 작게 그려진, 가까운 동물들.
건기에 불을 제대로 놓으면 순식간에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그걸지켜보고 있으면 공기가 쏠려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크로마뇽인들의 그림은 가장자리를 중시하지 않았다. 흘러야 하는 곳에서 흐르고, 가라앉고, 덮어씌우고, 이미 그곳에 있는 이미지를 가라앉히고, 그러면서 싣고 가는 것의 비례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크로마뇽인들은 어떤 상상의 공간에서 살았던 걸까?
유목민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경험에종속된다. 지나가 버린 것, 또는 기다리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 P140

사냥을 하는 쪽이든 사냥을 당하는 쪽이든 생존의 전제조건은 잘숨는 것이다. 목숨은 은신처를 찾아내는 데 달렸다. 모든 것이 숨는다. 사라진 것은 숨어 버린 것이다. 빈자리 - 죽은 이의 부재처럼ㅡ는 버림받은 느낌이 아닌 상실의 느낌을 안겨 준다. 죽은 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 P141

타일러 선생님은 이차대전 직후 오십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가스난로인지 집이 다 타 버린 화재인지, 아니면 문을 닫은 채 차고 안에서 시동을 켜 놓은 자동차 사고인지와 관련이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는데, 체계적이고 깔끔하고, 퉁명스러우리만치 숫기가 없었으며,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무심하게 또는 부주의하게 죽어 버렸다는 또는 생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는 - 인상을 풍겼기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것들은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
저희는 곧 떠날 거예요. 그의 팔꿈치께에 선 키르케가 나지막하게말한다. 차가 커서 선생님의 짐을 실을 자리도 넉넉하답니다. - P156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바르샤바와 모스크바를 잇는 대로를 따라동쪽으로 가고 있다. 양쪽 다 통행량이 많다. 몇 년만 지나면 여기는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길은 수많은 숲의 언저리를 스쳐 가거나 관통한다. 여름의 빛이 녹색을 띠고, 가문비나무 줄기가 높이 자랄수록 깃털 같은 오렌지색으로 변하는 북쪽의 숲들. 새들에게 붉은 가문비나무의 꼭대기는 물고기들에게 산호가 갖는 의미와 같다. - P160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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