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참, 좋. 다.
잘 만들었다.
잘 만든 책을 만나서... 책장을 넘기는 내내
행복해졌다.
오래, 자주 볼 책을 만났다.

사울 레이터 재단은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진실이란, 사울이 슬라이드 하나하나의 존재가치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는 종이 위에 형태와 선이인화되어야만 가치가 생긴다고 보지 않았다. 사울은언제나 모든 슬라이드를 신중히 살폈으므로, 우리도그렇게 했다. 사울이 원했을 방향을 고민하며 편집작업에 몰두했다. ‘레이터 스타일‘의 상징이 된 사진들을떠올리며 사울의 고유한 미감이 드러나는 사진들을주로 선별했지만, 특이하고 급진적이며 위트 넘치는그의 실험 정신을 따라 의외의 사진들도 추렸다.
우리는 몇몇 특별 손님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사울의 사진을 영사해 보여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그의 사진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에 눈을 떴다.
환등기를 통해 보는 사진은 인화된 사진을 감상하는것과는 사뭇 다른 색다르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이책에 실린 76장의 사진은 사울의 시적인 감각을 여실히 증명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저 그 사진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 P16

레이터는 뉴욕 로몽 에디션스의 대표 필리프
‘로봇에게 인화를 의뢰했다. 로몽은 2014년 레이터추모 행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몸이 살짝 굽은 사람하나가 어깨에 카메라를 둘러 메고 얼굴에는 장난기어린 웃음을 띤 채 조용히 스튜디오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시바크롬 필름을 인화하겠다고 했지요. 그는 별것 아닌 일처럼 말했지만, 거장의 필름을 인화지에 옮기게 되었기에 나는 커다란 희열을 느꼈습니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라앉은 색채와 그윽함을지닌 사진들이었어요. 강렬한 독창성, 추상과 구상의 상호작용, 여운과 반향, 뉴욕 거리의 일상적 분위기와 날씨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파편적이고 기발한 구성 속에서 색들이 서로 대화하고, 면과 면이 교차하고, 그러면서도 슬라이드 하나하나가 애쓰지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죠. 이 모든 것은 분명히화가의 시선으로 포착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관찰력이 유달리 뛰어난 산책자가 느긋하게 돌아다니던 와중에 즉흥적으로 발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 P71

얼리 컬러의 성공은 레이터의 삶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수십 년간 불안정했던 수입도 안정을 찾았다. 하워드 그린버그 갤러리에서는 레이터의 작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1996년부터 2013년까지 이 갤러리에서 레이터를 담당했던 사울레이터 재단 대표 마깃 어브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울과 함께 일했던 시절에 그는 대체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일년에 팔리는 작품 수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정말로 미미한 수준이었죠. 전시회가 열리면 신문에 기사가 실렸고 호평이들려왔지만, 장기적으로 이렇다 할 보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그의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컬러 사진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한순간에 인정받는 모습을 보는 건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 P74

그의 사진에는 ‘불일치‘한 매력이 도사리고 있다. 클래식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옛날 자동차, 미드센추리패션 뿌연 색감은 지나간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순간, 먼 미래의 한순간을 상상하게 한다. 2002년 유대인 박물관 강연에서 레이터는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 지금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머나먼 곳에서 온 것처럼 낯설어 보일 겁니다. 따라서, 참 재미있게도, 시간은 사진작가의 편입니다." - P74

마킷과 나는 2020년 1월 9일 도쿄 분카무라미술관에서 열린 <영원히 사울 레이터> 전시회 개막전에 참석해 전시를 감상했다. 관람객들이 슬라이드를 보는 모습 또한 지켜보았다. 마깃이 책 도입부에서 고백했듯이, 사울의 사후에 그의 사진을 발굴해 세상에 선보인다는 것에 대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사진들이 모든 의심을 잠재울 만큼 강력하며, 앞서 발표된 초기 작품과 궤를 같이한다고 믿었다. 아울러 레이터 아카이브의 관리인으로서 그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 특권이자 임무라고 생각했다. 사울은 무언가를 미리 계획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 유산에 대해서는 넌지시 언급하기도 했는데, 2008년 슈타이들에서 출간한 책 사울 레이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내 아카이브 탐사를 후원하고, 최고의 사진들을 마저 편집해줄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 P122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회고전 <영원히 사울레이터는 계획보다 훨씬 이른 2020년 2월에 막을내렸다. 마킷과 나는 고향인 미국 북동부에서 전 세계와마찬가지로 길고도 당혹스러운 휴지기를 견뎌야 했다.
마침내 우울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손을건넨 것은 슬라이드 프로젝트였다. 지금 여러분이 들고있는 이 책을 위해 열심히 작업에 매진하면서, 우리는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울의 작품을 아끼는 열렬한 팬으로서 그의 사진을 실컷, 느긋하게 감상했다.
일상의 평범함을 포착한 그의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은다른 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얻기도 했다.
자신이 살던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최고의 작품을남긴 사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에요. 아무 데도 안 가고도 내가 해낸 일을 봐요!" 달라진 세상에서 마깃과 나는 더는 새로운 영감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이제 - P122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거닐던 사울을 추억하며 기쁨에 잠긴다. 그의 사진 속에서 영원한 세상의 한조각으로 남은 익명의 영혼들과 그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이들이 미처 몰랐을 사울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른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하는 초월적이고 어쩌면 덧없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해준 사울에게 커다란 감사를 느낀다. 이 책을 통해 수십 년간 깊이 묻혀 있던 76장의 보물 같은 사진을 세상과 나누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
- P122

사울레이터

1923년 피츠버그의 독실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랍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받았지만 1946년 화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에 정착했다. 이후 30년가까이 패션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며 <하퍼스 바자》, 《엘르》, 《에스콰이어》 등에사진을 게재했다. 1940년대 말부터 컬러 사진을 찍었으며, 그가 살던 맨해튼 거리와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필름에 담았다. 2006년 첫 사진집 「얼리 컬러 (Steidl)』가출간되며 그의 사진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다채로운 색감을 지닌 그의 사진들은현재 ‘컬러 사진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는다. 2013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깃 어브


사울 레이터 재단의 설립자이자 대표, 1996년부터 사울 레이터가 사망한 2013년까지 하워드 그린버그 갤러리에서 그를 담당했고 레이터를 도와 아카이브를정리했다. 슈타이들에서 출간된 「얼리 컬러와 사울레이터: 나의 방에서Saul Leiter: Inmy room』 등 레이터의 사진집을 도맡아 작업하기도 했다. 2013년 발표된 다큐멘터리<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를 공동 제작했다. 2020년 도쿄 분카무라미술관에서 열린 <영원히 사울 레이터> 전시회 기획을 도왔다. 남편 마이클 파릴로와함께 레이터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관리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레이터가 생전에머물렀던 뉴욕 이스트빌리지 스튜디오에 마련되었다.

마이클 파릴로


사울 레이터 재단의 부이사장, 2015년 재단에 합류했으며, 20년 넘게 편집자이자음악 및 라이프스타일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영원히 사울레이터(小学館), 사울레이터의 모든 것(靑舍), 『여행하는 눈 뉴욕Travel Eye: New York』(Louis Vuitton), 사울레이터: 나의 방에서」 등 레이터의 책들을 작업했다. 2016년 발표된 단편영화 <보는것은 등한시된 노력이다. 사울 레이터 재단Seeing Is a Neglected Enterprisez The Saul LeiterFoundation>의 총제작자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깃 어브와 함께 레이터 작품의 디지털 카탈로그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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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기억의 기술을 고안한 사람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다. 그는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두 소년이 찾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갔고, 그 직후 땅이 흔들려 저택이 무너졌을 때홀로 목숨을 건졌다. 이미 자취를 감춘 두 소년이 그가 시에서종종 예찬한 쌍둥이 정령임을 그는 알아보았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시모니데스에게 파도처럼 사람들이 밀려왔다. 죽은자의 흩어진 몸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혹은 적어도, 그가있었음을 확인해달라고. 그가 있었어야만, 그를 애도할 수 있기 때문에. - P47

무너진 저택의 폐허에 서서, 시모니데스는 죽은자들이 있었던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자리에 연회의 주최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사랑하는 이가, 저기 맞은편 술잔이깨어진 자리에는 호탕한 웃음을 웃던 이가, 뭉개진 빵 앞에 조용했던 이가, 포크가 나뒹구는 곳에 대화를 이끌던 이가, 꽃잎떨어진 자리에 고개 끄덕이던 이가, 저기 저기 있었던 이가,
있었노라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따라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들었고, 있었던 이가 없어진 것을 마침내 받아들이고 울었다. - P47

우리가이 되는 순간이야그날 시모니데스는 공간에많은 순간을 장면으로 기억하는과제 장면이 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어 허다한미해져도 장면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었는데왼쪽 뺨으로 겨울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언제고 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게 된했던 가련한 인류는 가능한 한 많은 순간을 장면으로 만들어야 했고, 존재의 관념을 도울 반한 공간씩 제품들을 받아에게가야 했다. 그것이 시인의 기억술이다. - P48

그리고 이때 기억은 애도를 위한것이다. 장례에 영정 사진이 필요한 까닭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사진 속 얼굴을 마주할 때 실감한다. 당신이없어졌다는 것을 사진에 대고 절한 뒤 몇 개의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길어낸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당신이 있었던 장면들을 당신이 있었던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폐허가 된 연회장의 흩어진 잔해를 밟고, 그것이나마 남기려 최초의 정물화를 그렸을 먼 옛날의 화가처럼. 첫 번째 사진가처럼. - P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확증하는 것은 그 숲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눈앞에 사물이 없더라도 정물화를 그릴 순 있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이 사진이 남아있을리 없다. 나는 디지털 시대의 허다한 조작 가능성을 외면하고, 거기 틈입할폭력의 위험만은 잊지 않은 채, 다만 바르트를 따라 조금은 옛날에 서서, 경외하듯이 말을 쓴다. 사진의 근본은 그 대상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방 - 의 어둠을 선회하여, 너무도 명백한 것, 그리하여 환하고아픈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바르트가 밝은방』을 쓴 이유다. - P65

사진 속에서는 무언가 작은 구멍 앞에 포즈를 취했고 거기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


사진 앞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다.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문장 앞에서도 믿지 않는 것을 그리고 이 믿음에 슬픔이 스민다. 있었다. 라는 저 판명한 사실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마치영원히 있을 것처럼 그때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과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살아 있더라도, 우리가 손을 잡고 있더라도이는 마찬가지다. 당신의 사진을 볼 때, 나는 당신이 죽을것을동시에 본다. 어느 미래에, 당신이 죽어 없을 것이라고, 사진은끝없이 말하고 있다. - P66

제라르 와이즈먼의 책 『세기의 오브제』는 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지나간 20세기를 상징할 만한 단 하나의 오브제를 꼽는다면 무엇일까. 먼 미래와 교신하며 오늘 모더니티의 끝자락에선 우리가 봉투에 찍을 인장은 뭘까. 로켓, 원자력, 코카콜라병, 피카소가 그린 아이의 초상, 실타래 모양의 염색체, 페니실린정, 풍선껌, 텔레비전, 달에서 본 지구, 아니, 무언가를 헛되어 칭송하는 프로파간다를 제외한다면, 마침내 와이즈먼이채택하는 답변은 이것이다. 20세기,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시대의 오브제, 폐허. - P157

지난 세기는 우리에게 폐허를 남겼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뜻하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진 자리가남았다는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서서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시모니데스가 기억을 길어내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했다. 조각난 그릇일지라도 제자리에 놓인, 잘린 손가락일지라도 제자리에 남은, 장소가 있어야했다. 폐허가 없다면 기억의 기술도 작동할 수 없다. 연회도 사람들도 지진조차도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을 시인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치의 마지막 전략이었다.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지우는 것. - P157

그리하여 다시, 폐허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와이즈먼은 묻는다.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오브제로 무엇이 남아 있나, 그것은 어쩌면 "결코 기억될 수 없으나 스스로를 잊히게 두지도 않는 10 무언가가 아닐까. 과거의 사물이 아닌, 기억의 말이 아닌, 폐허의 일이 아닌 무언가 가스실이 스민 잔영, 우리를 둘러싼 죽음의 풍경들, 지금 모두의 몸에 침투해 잔존하는그 허다한 홀로코스트, 어떤 예술 속에서 이따금 현재적으로반짝이고 있는 무언가 지워졌으나 지워지지 않는 폐허보다 덜 남은. 침묵하는. - P158

프랑스어로 ‘당신이 집에 도착하면 눈이 그쳤을 것‘이라고 할 때 ‘그치다‘라는동사는 전미래 시제로 쓰입니다. 전미래. 미래보다 하나 앞선 미래.
도착한 미래에서 이미 되바꿀 수 없는 과거.


저는 지금 당신이 죽은 미래에 있습니다. 언제나 과거형인 가혹한 그 소식을이미 들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고 침묵하고 울고 무너지고 울지 않고 웃지 않고이제는 근근이 살아가지만 도리 없이 영영 없어진 채로, 미래에서 당신에게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 이렇게 씁니다.


삶이란 피차 사라지는 것들을 떠나보내며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당신이 떠난 후에저는 비로소 그것을 견딜 수 없어졌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진 다음,
사람은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 비로소 아득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라져 제가 슬픈 것은 차마 생을 지속하기가 이토록버거운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예고도 없이 떠오르는 고통들이 있지요. 한때의 선연한 아픔, 그때 그 추위,
너무도 육체적인 공포, 절망으로 멈춘 심장 길을 걷다 문득 되살아나는 그것들을당신도 느끼셨습니까. 당신의 몸에게도 그 고통이 언제나 거듭 현재적이었습니까.
그럼에도 그것을 형언할 수 없었습니까. 그 깊은 구멍을 아셨습니까.


그러나 당신, 그 구멍 안에, 우리의 사랑도 있었습니까. 오늘 저의 슬픔이증명하고 있는, 그리하여 분명 존재했던 우리의 사랑이 지금도 현재적으로되돌아옵니까. 당신에게도.


이 책은 그러니까 감히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실린 사진들을 저는 어느 과거에 누군가의 전미래에 찍었습니다.
삶의 모양을 알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떠돌다 장면을 발견하면 그에항복하듯, 실패하듯 셔터를 눌렀습니다. 두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갖고 오고 싶었습니다. 미래로 없는 당신에게로, 이 답장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집에 도착하면 눈이 그쳤을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지금 눈이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은 집에 도착할 것이고,
그 전에 눈이 왔다가 그칠 것입니다. 눈이 왔을 것입니다. 눈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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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 테오필 고티에, 《모팽 양》

뮤즈가 오기를 기다리는 오늘 밤
내 모든 것이 한 가닥 실에 걸려 있다.
내가 아끼는 젊음, 자유, 영광, 이 모든 것이
플루트를 든 그녀 앞에서 사라지니.

보라! 그녀가 온다 (...) 베일을 뒤로 젖히고,
나를 고요하고 야멸차게 내려다보면서.
내가 묻는다. ‘당신인가요, 단테가 《신곡》의 ‘지옥편‘을
받아쓰게 한 이가? 그녀가 답한다. ‘맞아요.‘

- 안나 아흐마토바, <뮤즈>>

마침내 그들이 한껏 격앙되어 그대를 찢어발겼을 때
너의 소리는 사자들과 암벽들 속에서, 나무들과 새들 속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대는 거기서 지금도 노래하고 있노라.

오, 그대 잃어버린 신이여! 그대 영원한 흔적이여!
증오가 그대를 찢어발기고 산산조각 내버렸기에
우리는 이제 듣는 자이자 자연의 입이 되었노라.

–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제1부, 26

그래서 어리석은 얼간이들이 이빨을 쑤시고 여자들 위를 올라타는동안 이 시인은 자신의 슬픔을 그토록 황홀하게 노래하는 걸까? 불쌍한 광대여! 이보다 더 터무니없고, 아이러니하고, 괴상한 일이 있을까? (…) 시인도 성직자, 전사, 영웅, 성자들처럼 만국의 저속한 사업가들의 기분을 돋우는 우울한 박물관 전시품 대열에 합류하게 될까?

- 어빙 레이턴, 《태양을 위해 붉은 원단을) 서문

‘내가 문학의 제단에 데려온 돈의 뮤즈를 말하는 걸세. 이보게, 그 굴레에 코를 꿰이면 안 되네! 그 끔찍한 옥빛 굴레가 자네 인생을 끌고다닐 거야!‘

-헨리제임스, 《대가의 교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존 키츠의 말입니다. 여기에 삼단논법을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진리가 아름다움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수 있다면, 아름다움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지지한다, 아니 낭만주의 시대를 정점으로 간헐적으로 지지해왔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서 미를 숭상해야 한다. 예술보다 아름다움(넓게 해석했을 때)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 보면 심지어 도덕적 차원을 외면하는 미학에도 그만의 도덕적 차원이 있다는 결론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완벽한 예술 표현의추구가 예술가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목표를 추구해야 하느냐는 것이죠." - P114

이 전통에 자신을 자리매김하쇼.
내가 작가가 되었을 무렵엔 여성 작가, 특히 여성 시인이 되면얼마나 고약한 일을 겪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메인 그리어도 정성을 들여 집필한 자신의 저서 《단정치 못한 시빌들》을통해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여성 시인들의 슬픈 인생사와 암울한 죽음에 대해 설명했지요. 에밀리 디킨슨의 은둔 생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고립된 삶,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마약 중독과 거식증, 샬롯 뮤의 자살, 실비아 플라스의 이어진 자살, 앤 섹스턴의 또 이어진 자살 솟구치는 피는 시다." 실비아 플라스는 목숨을 끊기 10일 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건 없다." 상상력의 여사제는 결국 바닥의 붉은 웅덩이에서 생을 마감할 운명인 걸까요?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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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식탁에 앉자 한 손님이 돌아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신랑이 신부에게 말했다. "이봐요, 내 사랑, 아는 이야기 없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뭐라도 들려줘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면 꿈 얘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 그림형제 수집 <강도 신랑>

좋든 나쁘든 모든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아니면 이야기의 일부를 조작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으면,
건너뛰어 다른 이야기를 택하기 바란다.

-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이제 그는 상상 속에서또 다른 행성을 오른다
이 세상을 카메라의 시점으로 한눈에 하나도 빠짐없이 더 잘 보기 위해 매번 울리는 영감어린 찰칵 소리,
이곳의 이야기, 이곳의 속임수, 이곳의 흔적 없음,
이것을, 이것을 그는 책에 쓰고 싶어 한다!

- A. M. 클라인, <풍경으로서의 시인의 초상>

이름을 짓는 행위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위대하고 엄숙한 위로다.

- 엘리아스 카네티 (파리의 교통

나는 무엇 때문에 제정신인 사람이 허구에 매달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만약 그것이 글쓰기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때로 하는 말처럼 애들 장난같은 공상의 연장이라면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것을, 그것만을, 오직 그것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그 일을 자전거로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만큼이나 이성적이라 여기는 것을 말이다.

- 메이비스 갤런트, <선집> 서문

굴 속에 깊숙한 굴 속에,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자리하기. 그리고 오직 글쓰기만이 구원해주리라는 것을 깨닫기. 책에 대해 손톱만큼의 주제도 생각도 없이 있는 것, 이는 다시 한 번 책 앞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광활한 백지. 잠재적 상태의 책, 무 앞에 자리 잡기, 살아 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무언가, 너무나 끔찍해 이겨내기 힘든 무언가 앞에 있기.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먼저 특별할 것 없는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는 작가이자 독자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학자도 아니고 문학 이론가도 아니다. 이책에 그런 개념들이 조금이라도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보통 작가들이 취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 방식이란, 갈까마귀가 하는 짓을 떠올리면 된다. 반짝거리는 물건들을훔쳐서 둥지를 마구잡이로 쌓아올리는 것 말이다. - P18

식민지는 진부한 틀을 초월할 정신적 에너지가 부족한데(…) 이런에너지가 부족한 건 자신을 충분히 믿지 못해서다. (...) 이들은 아주근사한 장소를 자국의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국경 너머 어딘가 발전 가능성을 넘어서는 어딘가로 설정한다. (…) 위대한 예술은예술가와 관객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의 삶에 대해 열렬하고 유별나게 공통의 관심을 보일 때 자라난다.

- E. K. 브라운, 《캐나다 문학의 문제》(1943)‘

시인 5백 명이 몰려들 만큼 거액의 상금이 걸린 시 쓰기 대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 그들을 한데 모으면 전형적인 캐나다시인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 5백 편을 모두읽고 나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한 세 사람 정도가 뭘 좀 할 줄 안다는것, 그러니까 시를 전문적으로 쓸 줄 안다는 것이다. (...) 이 세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운율은 그럴 듯하나 핵심적인 은유 하나 없는 2백편의 시와, 운율이 있다 해도 절뚝거리는 3백 편의 시를 만나게 된다. (...) 이 수많은 시들 사이에 광인이 쓴, 재치 있고 기묘하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서너 편의 시들도 끼여 있다. (...) 5백 편의 캐나다 시인에 대한 이런 분석은 나를 우울감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나라의 풀뿌리 시인, 시를 애호하는 독자, 감수성 풍부한 보통 시민을 대표하는데, 그 누구도 전혀 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제임스 리니, <캐나다 시인의 곤경》(1957) 

캐나다 시인은 언어 (다른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의 모든 양식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자신이 그 언어 양식들과 경쟁하고 있다는치명적인 인식이 부족하다.

- 밀턴 윌슨, 《기타 캐나다인들과 그 후》(1958)‘

나는 독자이면서 작가도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책을 사서글을 쓰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쓰기도 했는데, 시작은 호기로웠으나금세 글에 맥이 빠지자 엄벌이라도 처하는 양 종이를 찢어내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나는 공책 표지만 남을 때까지 찢고 쓰기를반복했다. 그런 뒤 공책을 또 사서 전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같은 주기가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었다. 흥분했다가 좌절했다가, 흥분했다가 좌절했다가.

- 앨리스 먼로, <코테스 섬>(1999) 

너는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 마태복음 6장 3~4절

정열과 환희의 시인들이여,
지상에 영혼을 남겨두었구나!
새로운 곳에서 이중으로 살면서,
천상에도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 존 키츠, <정열과 환희의 시인들이여>

너는 지킬의 손을, 너는 하이드의 손을 가졌구나.

- 그웬돌린 매큐언〈손과 히로시마

비정상적으로 관찰을 강조하는 것은 관계를 몹시회피한다는 것을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해, 타인의 삶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동일시하는 동시에,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리를 두는 것을 뜻한다. (...) 멀찍이떨어져 있는 것과 완전히 연루돼 있는 것 사이의 긴장, 그것이 작가를 만든다.

- 네이딘 고디머, <선집> 중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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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메리 매케이 선생님에게.

"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부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16)에서 발췌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상점 주인, 기술자, 우편 업무를 보거나 실업 급여를 타려고 줄을선 사람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빙고 홀, 술집, 튀김 - P11

가게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ㅡ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학교로 갔고 엄마들은 고개를 숙이고 빨랫줄로 달려가는 데 이제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아예 빨래를 내다 걸 생각조차안 했고 해지기 전에 셔츠 한 장이라도 말릴 수 있으리란 기대도 안 했다.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 P12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빈주먹만도 못했다고 말할사람도 있을 것이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다. 미시즈 윌슨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큰 집에 혼자 사는 개신교도였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줬다. - P15

펄롱은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멀리 보이는 강을 바라보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했다. 떠돌이 개가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을 찾고, 튀김 봉지와 빈 깡통이 비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구르고, 느지막이 술집에서 나온 남자들이 비틀비틀 집으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때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질 때면 펄롱은 긴장했다. 펄롱은 자기 딸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남자들의 세계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벌써 길에서 딸들한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이 있었다. 펄롱은 마음 한편이 공연히 긴장될 때가 많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 P22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 P22

뉴로스에서는 조선소가 문을 닫았고 강 건너에 있는 큰비료 공장 앨버트로스에서는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했다. 베넷에서는 열한 명을 해고했고 아일린이 근무했던 아주 오래된 회사 그레이브스 앤드 컴퍼니도 문을 닫았다. 경매업자는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다며, 에스키모에게 얼음을 파는 편이 쉽겠다고 말했다. 석탄 야적장 근처에서 꽃집을 하는 미스 케니는 널빤지로 가게 창문을 덮어버렸다. 어느날 저녁 펄롱의 일꾼 중 한 명에게 못질하는 동안 합판을 좀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P24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 P29

가끔 까만 머리카락에 눈빛이 똘망똘망한 딸들이 작은마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여자들이 힘과 욕구와 사회적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겁내는 건 그럴 만하지만, 사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였다. 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하고, 밤에 꿈으로 꾸고, 속마음을 읽었다. 펄롱은 결혼해서 같이 살던중 아일린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아일린의 기개와 시퍼런 직감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 P32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 P36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식탁에 앉아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P44

뜬금없이, 기술학교에서 나와 여름에 버섯공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출근 첫날,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버섯을 땄음에도 손이 더뎌 다른 사람들 작업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침내 라인 끝에 다다랐을 때는 땀이 흐르고있었다. 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았는데, 거기에서 벌써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 P44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 P53

구불구불한 도로에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없어서 펄롱은 우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다. 그 길로 가다가 또 우회전했더니 길이 더 좁아졌다. 또 한 번 우회전을 해서 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건초 창고를 지나다가 짧은 목끈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숫염소 한 마리를 보았고 곧이어 조끼를 입은 노인이 길가에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수 있다네." - P54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 말이 틀렸다는 게 아냐."
"틀리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너무 속이 물러. 그래서 그래.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생기면 다 나눠 주고-"
"오늘 뭣 때문에 화난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무슨 어려움 말야?"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당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아일린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 - P56

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거기 있는 애들은 세상에 돌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거야. 그 애들 부모는 애들을 멋대로 풀어놨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모른 척 등을 돌려버렸겠지. 자식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무심해서는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 안 들어?" 펄롱이 아일린을 쳐다보았다. "그랬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P57

차가 수녀원에 가까워지면서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펄롱은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현관문 앞을 지난 다음 후진으로 건물 옆을 따라 석탄 광까지 가서 시동을 껐다. 펄롱은 졸린 상태로 차에서 내려 멀리 주목과 산울타리, 성모상이 있는 작은 동굴을 보았다. 성모는 발치에 놓인 조화造花가 실망스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높은 창에서 흘 - P66

러나온 빛이 닿은 자리에는 서리가 반짝였다.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표면에 불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어딘가에서 「아데스테 피델레스」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옆 건물인 세인트마거릿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학생들일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집에 가지 않았으려나?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 직업학교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수녀들이 아침 미사 전에 연습하는 건가?
펄롱은 잠시 서서 노래를 들으며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솟았고 하늘에서는 작은 별이 점점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는 동안 가장 밝은 별이 순간 칠판 위 분필 선 같은 자취를 남기며 떨어져 사라졌다.
또 다른 별은 다 타버린 것처럼 서서히 희미해졌다. - P67

한참 뒤 위층 커튼이 움직이더니 어린아이가 밖을 내다봤다.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99

펄롱은 대화에 끼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다른 생각을 했고 상상에 빠졌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들이 더왔고,긴의자에서 옆으로 이동한 펄롱은 거울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자기 모습을 똑바로 보며 네드와 닮은 데가 있는지 찾았다.
닮은 데가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윌슨네 집에 있던 여자가 둘이 친척이라고 여겨 닮았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고 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 P110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게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다.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P111

펄롱은 어렵지 않게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언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부럽기도 했다.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펄롱은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고 다시 한번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펄롱은 이미 여러 차례머릿속으로 그곳에 가서 신부님을만나는 상상을 해봤고 그들도 이미 다 안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시즈 케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다 한통속이야. - P117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날을, 수십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 P119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ㅡ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 P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 P120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P121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입니다.
1996년에야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 시설에서 은폐·감금·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적게 잡으면 만 명이고, 3만 명이 더 정확한 수치일 것입니다.
막달레나 세탁소의 기록은 대부분 파기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접근 불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일한 여자와 아이들 가운데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거나 노역을 인정받은 이는 - P123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여자가 아기를 잃었습니다. 목숨을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제대로 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곳 모자 보호소에서 죽거나 다른 곳으로 입양된 아기가 몇천 명이나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2021년 초모자 보호소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었던 18개시설에서만 9,000명의 아이들이 사망했습니다. 2014년 역사가 캐서린 콜리스는 골웨이 카운티에 있는 투엄 보호소에서 1925년에서 1961년 사이에 796 명의 아기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이 시설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습니다. 정부에서는 막달레나 세탁소에 대해 아무런 사죄의뜻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엔다 케니 총리가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 P124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이 소설의 첫 문단이다. 첫 문단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해 클레어 키건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 P127

"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P128

독자가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전체 이야기를 알고 나면첫 문단이 적절하게 느껴지고 이어질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 P128

그런 한편 이 짧은 소설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내지 않고 암시하고자 한 부분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고 빙산의 일각 같은 이 글을 과연 어떻게 옮겨야 할지 난감했다. 이 짧은 소설은 차라리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했다.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클레어 키건은 무수한 의미를 압축해 언어의 표면 안으로 감추고 말할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한다.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번, 네 번 읽었을 때야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역을 하기 위해 이 책을 무수히 읽으면서 내가 알게된 것을 번역에 설명하듯 담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그랬다가는 클레어 키건이 의도한 대로 삼가고 억누름으로써 깊은 진동과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 되지 못할 터였다. - P129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120쪽)의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언어가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구조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도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위태롭다. 1985년 아일랜드 작은 도시에 사는 빌 펄롱같은 사람들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24) 살아야지,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22쪽). 하루벌어 하루를 버틸 수 있으면 다행이고, 조금이라도 남겨서 앞날의 재앙에 대비할 수 있으면 기적이다. 다른 사람에게동전 한 닢, 마음 한켠이라도 내주는 것도 사치인지 모르다 - P130

소설의 중심인물인 빌 펄롱의 내면에도 차마 하지 못한사소한 일들,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한 모호한 말들이 꽉차서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지경이다. 수녀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너무 크고, 그 안의 어떤 존재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너무 작은 존재라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펄롱에게 뒤에서 작고 소박한 사랑밖에 줄 수 없었던 네드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 것 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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