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로 기억의 기술을 고안한 사람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다. 그는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두 소년이 찾는다는 소식에 밖으로 나갔고, 그 직후 땅이 흔들려 저택이 무너졌을 때홀로 목숨을 건졌다. 이미 자취를 감춘 두 소년이 그가 시에서종종 예찬한 쌍둥이 정령임을 그는 알아보았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시모니데스에게 파도처럼 사람들이 밀려왔다. 죽은자의 흩어진 몸을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혹은 적어도, 그가있었음을 확인해달라고. 그가 있었어야만, 그를 애도할 수 있기 때문에. - P47

무너진 저택의 폐허에 서서, 시모니데스는 죽은자들이 있었던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자리에 연회의 주최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사랑하는 이가, 저기 맞은편 술잔이깨어진 자리에는 호탕한 웃음을 웃던 이가, 뭉개진 빵 앞에 조용했던 이가, 포크가 나뒹구는 곳에 대화를 이끌던 이가, 꽃잎떨어진 자리에 고개 끄덕이던 이가, 저기 저기 있었던 이가,
있었노라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따라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들었고, 있었던 이가 없어진 것을 마침내 받아들이고 울었다. - P47

우리가이 되는 순간이야그날 시모니데스는 공간에많은 순간을 장면으로 기억하는과제 장면이 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어 허다한미해져도 장면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었는데왼쪽 뺨으로 겨울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언제고 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게 된했던 가련한 인류는 가능한 한 많은 순간을 장면으로 만들어야 했고, 존재의 관념을 도울 반한 공간씩 제품들을 받아에게가야 했다. 그것이 시인의 기억술이다. - P48

그리고 이때 기억은 애도를 위한것이다. 장례에 영정 사진이 필요한 까닭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사진 속 얼굴을 마주할 때 실감한다. 당신이없어졌다는 것을 사진에 대고 절한 뒤 몇 개의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길어낸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당신이 있었던 장면들을 당신이 있었던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폐허가 된 연회장의 흩어진 잔해를 밟고, 그것이나마 남기려 최초의 정물화를 그렸을 먼 옛날의 화가처럼. 첫 번째 사진가처럼. - P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확증하는 것은 그 숲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눈앞에 사물이 없더라도 정물화를 그릴 순 있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이 사진이 남아있을리 없다. 나는 디지털 시대의 허다한 조작 가능성을 외면하고, 거기 틈입할폭력의 위험만은 잊지 않은 채, 다만 바르트를 따라 조금은 옛날에 서서, 경외하듯이 말을 쓴다. 사진의 근본은 그 대상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방 - 의 어둠을 선회하여, 너무도 명백한 것, 그리하여 환하고아픈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바르트가 밝은방』을 쓴 이유다. - P65

사진 속에서는 무언가 작은 구멍 앞에 포즈를 취했고 거기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


사진 앞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다. 어떤 그림 앞에서, 어떤문장 앞에서도 믿지 않는 것을 그리고 이 믿음에 슬픔이 스민다. 있었다. 라는 저 판명한 사실은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마치영원히 있을 것처럼 그때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과 너무도 가깝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살아 있더라도, 우리가 손을 잡고 있더라도이는 마찬가지다. 당신의 사진을 볼 때, 나는 당신이 죽을것을동시에 본다. 어느 미래에, 당신이 죽어 없을 것이라고, 사진은끝없이 말하고 있다. - P66

제라르 와이즈먼의 책 『세기의 오브제』는 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지나간 20세기를 상징할 만한 단 하나의 오브제를 꼽는다면 무엇일까. 먼 미래와 교신하며 오늘 모더니티의 끝자락에선 우리가 봉투에 찍을 인장은 뭘까. 로켓, 원자력, 코카콜라병, 피카소가 그린 아이의 초상, 실타래 모양의 염색체, 페니실린정, 풍선껌, 텔레비전, 달에서 본 지구, 아니, 무언가를 헛되어 칭송하는 프로파간다를 제외한다면, 마침내 와이즈먼이채택하는 답변은 이것이다. 20세기,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시대의 오브제, 폐허. - P157

지난 세기는 우리에게 폐허를 남겼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뜻하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진 자리가남았다는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서서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시모니데스가 기억을 길어내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했다. 조각난 그릇일지라도 제자리에 놓인, 잘린 손가락일지라도 제자리에 남은, 장소가 있어야했다. 폐허가 없다면 기억의 기술도 작동할 수 없다. 연회도 사람들도 지진조차도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을 시인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나치의 마지막 전략이었다.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지우는 것. - P157

그리하여 다시, 폐허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와이즈먼은 묻는다.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오브제로 무엇이 남아 있나, 그것은 어쩌면 "결코 기억될 수 없으나 스스로를 잊히게 두지도 않는 10 무언가가 아닐까. 과거의 사물이 아닌, 기억의 말이 아닌, 폐허의 일이 아닌 무언가 가스실이 스민 잔영, 우리를 둘러싼 죽음의 풍경들, 지금 모두의 몸에 침투해 잔존하는그 허다한 홀로코스트, 어떤 예술 속에서 이따금 현재적으로반짝이고 있는 무언가 지워졌으나 지워지지 않는 폐허보다 덜 남은. 침묵하는. - P158

프랑스어로 ‘당신이 집에 도착하면 눈이 그쳤을 것‘이라고 할 때 ‘그치다‘라는동사는 전미래 시제로 쓰입니다. 전미래. 미래보다 하나 앞선 미래.
도착한 미래에서 이미 되바꿀 수 없는 과거.


저는 지금 당신이 죽은 미래에 있습니다. 언제나 과거형인 가혹한 그 소식을이미 들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고 침묵하고 울고 무너지고 울지 않고 웃지 않고이제는 근근이 살아가지만 도리 없이 영영 없어진 채로, 미래에서 당신에게이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 이렇게 씁니다.


삶이란 피차 사라지는 것들을 떠나보내며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당신이 떠난 후에저는 비로소 그것을 견딜 수 없어졌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진 다음,
사람은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 비로소 아득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라져 제가 슬픈 것은 차마 생을 지속하기가 이토록버거운 것은, 당신이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예고도 없이 떠오르는 고통들이 있지요. 한때의 선연한 아픔, 그때 그 추위,
너무도 육체적인 공포, 절망으로 멈춘 심장 길을 걷다 문득 되살아나는 그것들을당신도 느끼셨습니까. 당신의 몸에게도 그 고통이 언제나 거듭 현재적이었습니까.
그럼에도 그것을 형언할 수 없었습니까. 그 깊은 구멍을 아셨습니까.


그러나 당신, 그 구멍 안에, 우리의 사랑도 있었습니까. 오늘 저의 슬픔이증명하고 있는, 그리하여 분명 존재했던 우리의 사랑이 지금도 현재적으로되돌아옵니까. 당신에게도.


이 책은 그러니까 감히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실린 사진들을 저는 어느 과거에 누군가의 전미래에 찍었습니다.
삶의 모양을 알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저 떠돌다 장면을 발견하면 그에항복하듯, 실패하듯 셔터를 눌렀습니다. 두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갖고 오고 싶었습니다. 미래로 없는 당신에게로, 이 답장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집에 도착하면 눈이 그쳤을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지금 눈이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은 집에 도착할 것이고,
그 전에 눈이 왔다가 그칠 것입니다. 눈이 왔을 것입니다. 눈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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