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 편지 3


새벽 다섯시면
수유리 옹달샘 표주박 속에
드맑게 드맑게 넘치고 있는 사람
드맑게 넘치다가
아침 나그네 목 축여주고
머나먼 마을로 떠나고 있는 사람
머나먼 마을로 떠나다가
인천 만석동이나 온양에 이르러
한많은 사람들 발을 적시기도 하고
어린 물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거대한 들판을 가로질러
까마득한 포구로 떠나고 있는 사람

떠날 수 없는 것들 뒤에 두고
바람처럼 깃발처럼 떠나고 있는 사람
아흐, 떠나면서 떠나면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 - P107

소외
- 편지 4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 P108

고백
- 편지 6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 P110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편지 10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 P115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P116




고향집 떠난 지 십수 년 흘러 어머니, 스무 번도 더 이삿짐을 꾸린 뒤 가상하게도 이 땅에 제 집이 마련되었습니다 경기도 안산에 마련한 이 집, 서른일곱의 나이에 가진 이 집, 열쇠를 가진 지 두 해가 넘도록 아직 변변한 집들이 한번 못 하고 동당거려온 이 집에 어머니, 오늘은 크낙한 고요와 청명이 찾아오고, 구석구석 청소를 끝낸 후 저 들판 마주하여 마음을 비워내니, 간절한 사람, 어머니가 이 집에 들어서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가 이 집을 돌아보는 꿈을 꿉니다
공부방 둘러보고 이부자리 만져보고 유리창 
활짝 열어 햇빛 들여오시며 이제 네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해거름녘 정물처럼 웃으시는 당신, 그 얼굴 그리워 몸서리칩니다 그 얼굴 보고 싶어 가슴 두근거립니다
왜 그닥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불현듯 상경하신 지난 가을, 얘야, 이승길 마지막 나들이다 네가 사는 문지방 넘어보고 싶구나 왜 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바쁘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저에게 그냥 탈진한 사람처럼 손 흔들며 그래 내년 봄에 다시 오마 해놓고선 정작 꽃삼월엔 아주 가시다니요 이게 살아 있는 날들의 아둔함인가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못이 되어 박힙니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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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 해방의 문학에 부쳐


치맛자락 휘날리며 휘날리며
우리 서로 봇물을 트자
옷고름과 옷고름을 이어주며
우리 봇물을 투자
할머니의 노동을 어루만지고
어머니의 보습을 씻어주던
차랑차랑한 봇물을 이제 트자
벙어리 삼 년 세월 봇물을 투자
귀머거리 삼 년 세월 봇물을 트자
눈먼 삼 년 세월 봇물을 트자
달빛 쏟아지는 봇물을 트자
할머니는 밥이 아니다
어머니는 떡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한반도 덮고 남을 봇물을 터서
석삼년 말라터진 전답을 일으키자
일곱삼년 가뭄든 강산을 적시자

오랫동안 홀로 어둡던 벗이여
막막한 꿈길을 맴돌던 봇물,
- P93

스스로 넘치는 봇물을 터서
제멋대로 치솟은 장벽을 허물고
제멋대로 들어앉은 빙산을 넘어가자
오천 년 이 땅을 좀먹는 암벽,
억압의 암반에 굴착기를 내리고
사랑의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캄캄한 수맥에 커단 빛을 내리자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라
백보다 더 좋은 만의 얼굴이어라
형제여, 자매여,
마침내 우리 서로 자유의 물꼬를 열어
구구구구 구구구구
비둘기떼 날아와 하늘을 덮게 하자
끼룩끼룩 끼룩끼룩
갈매기떼 날아와 수평선을 덮게 하자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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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다는 일어섰다. 찬하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따라서 나왔다. 집 밖에까지 나왔는데 계속 찬하는 오가다를 따라가는것이었다. 한길로 나왔을 때 전차 탈 생각을 않고 오가다는 걸었으며 찬하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걷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전차, 움직이는 모든 것에 비스듬히 석양이 걸려 그림자는 동쪽으로 늘어져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그림자를 쫓아가고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그림자에 쫓기며 간다. 도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무성영화같이 움직이는 것만 보인다. 두 사나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쫓기고 쫓는 차이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석양 탓일까, 개인의 선택 탓일까. 두 사내는 길을 건넜다. 서구풍의 건물, 끽다점 앞에서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커피나 한잔 마시고 헤어집시다."
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끽다점 안에는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병대」였다. 하얀 에이프런에 하얀 모자를 쓴 웨이트리스는 그런대로 신선해 보기가 좋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이들에게 사실 말이란 별 필요가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묘하지만 이들에게는 화해 비슷한 것이었고보다는 신뢰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악수를 하고 이들은헤어졌다.
이튿날 점심을 끝내고 차 한잔을 마신 찬하는 곧바로 서재에 들어가지 않았다. 거실 창가에 서서 뜰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리코는 소파에 앉아서 레이스를 뜨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방은 조용했다. 조찬하의 집은 건평이 오십 평 가량, 화양(和洋) 절충의 단층 건물이었다. 정원은 넓은 편이지만 나무가 너무 - P180

많아 다소 빡빡했다. 수령이 꽤 되는 소나무가 네댓 그루, 서상목(瑞祥)인 매화와 남천(南天燭)도 오래된 나무 같았다. 단풍나무, 향나무, 주목 등 정원수는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놓여 있는 정원석에 공간은 대부분 자갈을 깐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단층집이 푹 묻혀버린 듯 눈에 띄질 않았다. 수목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중류에서 상류층이 대부분인 이 동네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당당한 저택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을것이다. 찬하의 처 노리코는 결혼할 때 적잖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집은 서울서 보내온 돈으로 마련한 것이다. 노리코가 적잖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친정 혼다게(本田家)가 부유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동시에 이들의 결혼을 축복했다는 뜻도 된다.
찬하가 노리코를 처음 만난 것은 혼다 교수의 연구실에서다. 그때찬하는 연구실의 조수로, 장래가 보장된 것도 희망도 없이 막연한상태로 그냥 머문다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닌 암담한 시기였다. 형과 명희의 결혼으로 입은 상처도 생생할 무렵이었다.  - P181

혼다 교수의 질녀였던 노리코는 이 근처까지 왔다가 인사차 들렀다고 했다. 연록색 원피스에 갈색의 모자, 구두를 신고 지갑보다 조금 큰 황금색 백을 들고 있었다. 체격도 늘씬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혼다 교수는 두 사람을 소개했고 그 후 이들은 가끔 긴자 끽다점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영화도 함께 보았으며 음악회, 그림전람회 같은 곳에도 가곤 하여 교제는 꽤 깊어졌던 것이다. 좋은땅에서 한껏 햇볕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란 식물처럼 노리코는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독특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오차노미즈여학교를 거쳐 여자대학 국문과를 나온 그는 수준급의 교양과 지식을 구비했으며 자발적이거나 개성이라기보다 주위 환경이 그를 개방적 여성으로 만들었으며, 다분히 외향적인 것이기는 하지만새로운 서구식 물결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사촌 자매들이 권하는대로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골프를 치러 다니기도 했고 화려한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며 더러는 새로운 여성을 표방하는 강연회 같은 곳에 가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일본 - P181

의 종래 여자처럼 꿇어앉아서 바닥에 손을 짚고 절을 하며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셨습니까, 하고 남편을 대하지는 않았다. 결혼 전과다름없는 생활 태도였는데 그것은 노리코의 의사였다기보다 찬하가 전적으로 그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구김살이 없고 천착하고 집요한 성미가 아닌 노리코는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남편도자유롭게 놔두는 것에 대하여 일말의 의혹도 없었다. 상황이 복잡하고 상황에 대응하는 내적인 것이 섬세한 데다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찬하에게 노리코는 편안한 존재였으며 구김살 없는 그의 성품을 사랑했다. 노리코는 물론 찬하를 사랑했다. 대단히 깊이 사랑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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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세에 풍월 읊는 그 따위 소리 하면 뭘 해. 그러면 한반도는 조선인이 일본에 갖다바쳤단 말인가? 왜놈 마음대로 한 짓이아니란 말인가? 집안이 불바단데 들판의 볏가리 챙기러 뛰어나가는 꼴이군."
유인성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선우일의 말이나 분노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었다. 흑룡강을 넘고 우수리강을 넘고 어쩌고하는 말은 당소 황당했을지 모르지만, 간도가 우리 민족의 원한이 사무쳐 있는 곳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지난날, 용정촌 상의학교의 젊은 교사였던 송장환은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쓰러뜨려 삼국을 통일하여 팔백 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는 통일의 대가로 요동 일대의 우리 영토와 영토 내의 수많은 우리 백성을 잃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인들 속에 우리가 잃은 조상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간도도 옛날에는 우리 땅이었고 가시덤불과 울창한 수림을 낫으로 헤치고 도끼로 찍어내어 용정촌을 만든 것도 우리들의 부모님이 아니었던가ㅡ - P111

사라져간 민족의 영광을 강조하고 물거품이 된 개척 정신을 애통해했던 송장환, 그의 비분은 나라를 빼앗긴 약자의 부질없는 감상이라 할 수 있겠고, 선우일 역시 약자의 허세로 볼 수 있을지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연의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자신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도덕이기도 하다. 한말(韓末), 일본이 조선을 먹어들어올 무렵, 의병 봉기에 이어 오늘 현재까지 과히 민족의대이동이라 할 만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버리고 남부여대, 이주해갔고 항쟁의 터전으로 부상된 곳, 조선 민족에게는 서사시적무대이며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혈흔이 점철된 그곳 간도의 땅을 선우일이 말한 대로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넘겨준 것은 일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음으로써 그 땅은 청국으로 넘어갔다. 말하자면 일본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 - P111

하여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간도를 중국 땅으로 확정지으면서 일본이 얻어낸 것은 일본 영사관 내지 영사관 분관을 설치하는 일이었고 장차 청국의 길장철도(吉長鐵道)를 연길(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회령의 조선 철도와 연락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사관 설치는 ‘조선 독립군을 색출 탄압하는 합법적 본거지가될 것이며 철도의 연결은 병력과 군수품의 신속한 이송을 위한 장차의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동 일대가 한민족의 고토였다는 것은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밀리고 밀어붙이는 끊임없는 판도의 변화 속에서도 여진족은 금(金)과 후금(靑)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기까지 대체로 한민족의 지배, 혹은 영향권 속에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 국가에 둘러싸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만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충지였으며, 어쩌면 반만년 역사에 단일 민족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여 존속해왔던 조선은 만주라는 완충 지대의 덕분인지 모른다. 한민족과 중국, 몽고의 각축장이기도 했던, 그러나 대청제국이 성립되고 만주는 중국을 정복한 대제국으로 부상함으로써 완충 지대는 간도 지방으로 좁혀지고 고정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사정 또한 매우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 P112

간도 지방에 할거했던 오란가이족(兀良哈族)과 충돌이 있어 사십여 호의 부족을 이끌고 돈화(敦化) 방면으로 도주한 건주여직(建州女直)의 간타리족(幹朶里族)에서 청의 시조 누루하치가 나왔다 하여 그들 발생의 영지(靈地)를 보존한다는 의지와 그밖에 정복한 타부족이 월경하여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것을 방지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고 해서 1628년 청의 태종(太宗)은 간도를 비워놓고 피차 사월(私越)하는 것을 엄단한다. 그것을 제시하여 조선의 인조(仁祖)와의 사이에 협약을 맺은 것인데 소위 간광(間曠) 지대로서 봉금(封禁)한 것이다. 강약이 부동하여 조선은 불평등 협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조선에서도 권리는 있었다. 이쪽에서 그 땅으로 넘어가면 아니 될 일이나 그쪽 역시 농부들이 넘어와 주거를 마련할때 조선은 청에 통보하여 그들을 철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땅, 국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여도 굶주린 쌍방의 백성들이 옥 - P112

토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청이 쇠퇴기에 들면서 간도지방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 그 틈을 타서, 또 흉년을 맞이하여 많은 유민들이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1881년 청은 도문강(圖門江) 동북의 간광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워 미리 조선에게 통고하고 시찰을 한 바, 많은 조선 백성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해서 청은 변발하고 그들 복색에 따를 것이며 그들 정교에 복종 아니 하는 조선 백성은 간광지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은 그들 요구에 불응했고, 많은 유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것은 심히 난감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동북경략사(東北經略使)였던 어윤중(允中)이 종성의 사람, 김우식(金寓軾)으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게 하고 정계비(定界碑)와 토문강(土門江)의 원류를 규명하게 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리하여 토문과 도문은 별개의 것으로서, 정계비에 씌어진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松花에 이르는 것이므로 철수해야 할 조선 유민은 토문강 밖에 있는사람에 한할 것이며 도문강 밖의 유민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선은 청에다 제기했던 것이다.  - P113

말하자면 국경 분쟁이 시작된것이다. 1885년 두 나라는, 청의 가원계(賈元柱)·진영(秦瑛), 조선의 이중하(李重夏)·조창식(趙昌植)이 마주앉아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그들은 정계비에 씌어진 강 이름의 차이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아니하다가 실지를 답사하고 산천의 형세를 살핀 뒤 당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그들은 물러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차 삼차로, 담판은 속개되어 청은 협박으로 밀고 나왔으나 이중하는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좁힐 수는 없다 하여 강경히 맞섰던 것이다. 간도 내에 거주하는 유민 중 조선인이 십만이요 청인이 삼만, 십대 삼이었지만 그간 대국의 세를 믿고 청인의 핍박을 조선 백성은 겪어야 했고 그 고초는 오죽했겠는가. 끊임없이 변발과 복색의 변경을 강요당하며 그러지 아니할 때 땅을 몰수당하는 등, 군과 경찰이 그들 수중에 있는 만큼 소수 청인들의 횡포는 격심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빗발 같은 간도 유민들의 보호 - P113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이범윤(李範允)을 시찰원으로 파견하였고이범윤은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 정부의 허가를 무시한 채 사포대(E)를 조직하여 청에 대항했다. 이범윤은 노일전쟁 때 러시아에 가담했는데 그것은 북청사변(北淸事變) 때, 러시아가 진주했을때 청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 백성들 경향에 따라 한 짓이며 그 역시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을 밀어내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전하게 되자 이범윤은 노령으로 잠적했던 것이다.
간도의 사정은 대강 이상으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러면 만보산사건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북 지방, 길림성의 장춘(長春)에서 서북방 삼십 킬로 지점에 있는 만보산 부근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의 충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일 관헌(中日官憲)의 무력 충돌이라 해야 옳고, 더 정확하게는 무력 충돌이기보다 쌍방간의 시위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측 농민 한 사람이 약간의부상을 입었을 뿐 쌍방간에 사상자는 없었다.  - P114

그런데 어찌하여 이사건은 그렇게 엄청난 것으로 발전했고 국내 중국인 학살로 격화되었는가, 그러면 간도협약 이후의 간도 사정은 어떠한가. 한마디로말하여 간도의 백만을 헤아린다는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쿠션 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때리는 효과를 얻으려 했고 일본은 조선인을 방패 삼아 밀고 나간다 할 수있었으니까. 조선인의 대부분이 소작농과 고용의 입장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 할의 소작료, 전수입의 일할 오부가 공과금,
팔부의 비싼 이자, 게다가 일본 경찰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 백성들, 착취는 중국이, 탄압은 일본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간도 주민 자체가 완강한 저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찰권은 강화되고 일본 경찰권의 강화에 불안을 느끼는 중국은 조선독립운동을 저지하려 들었고 일본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는 만큼조선인을 앞세워 토지 매수를 공작하고 중국은 또 불안하여 토지매매는커녕 토지상조권(土地商租權)에 대해서조차 창구를 닫아버리는 현상,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이탈을 절대로 승인 아니 하는가 - P114

하면 중국은 귀화해야 땅을 준다. 해서 이중 국적자는 늘어났고 따라서 조선인은 이중의 탄압에 신음해야 했다. 그리고 배일 민족운동은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나타났는데 물론 일본의 앞잡이가 조선인에게 없지 않았으나 동북 정권의 일본을 업으려던 지난날의 행적이 있고 팽배해오는 배일 민족운동은 그들에게 일말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그 칼끝을 조선인 배척운동으로 돌려왔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단순한 민족 배외운동으로 흐르기 쉬운 존재였기에 결과적으로 관민 모두가 합세하여 쫓기는, 상처입은 짐승 한 마리를 일본과 함께 몰아붙였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인이 조선인을 몰아붙이면 그럴수록 좋다. 독립운동의 지반이 없어지는 것이 우선 좋고 중국이 가혹해지면 그럴수록 조선인이 일본에 기대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 P115

중국은 분쟁의 씨로 보기 때문에 조선인을 내몰려 하고 이런 사정에서 중국인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 지배인이 만보산 부근의 토지 삼백 헥타르를 지주 열두 명으로부터 십년 계약으로 빌려 그것을 아홉 사람의 조선인에게 빌려주었고 이들 빌린 사람은 이백여 명의조선인을 동원하고 개간에 착수했는데 개간 비용의 삼천원은 일본 영사관 감독하에 있는 조선인민회 금융부(朝鮮人民會金融部)에서 조달하였고 수전(田)의 설계, 씨앗 구십 석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南滿鐵道株式會社)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애당초 문제가 있었던 공작으로 보아야 옳고 지주와 중간에 땅을 빌린 자와또다시 조선인이 빌리는 이 과정에서 계약상의 하자도 있었으며,
그러나 무엇보다 수로 개설로 인근의 다른 농토에 침수 위험이 있다는 것이 분쟁 발단의 가장 큰 이유였다. 중국 농민들은 일을 막으려 했고 조선 농민은 강행하려 했고 중국 공안국에서 사람이 나오게 되고 일본 영사관에서 압력을 넣고 아홉 명의 조선인 개간 당사자가 체포되는가 하면 다시 영사관 경찰에서 출동하고, 일은 확대일로로 치달아 무장한 쌍방 경찰, 보안대가 대치하고 이쪽저쪽농민들이 대치하고, 위기촉발의 상태로까지 갔던 것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러나 쌍방간에 중국인 농부가 약간의 부상을 했을 - P115

뿐 사상자는 없었고, 결국 일본의 압도적 무력 하에 공사는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면에서 억울했던 것은 중국 농민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7월 2일 『조선일보』 호외로 만보산사건은 조선 국내로 비화되었다. 일본 기관에서 흘린 허위 자료를 받은장춘 주재의 기자가 본사에 타전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가난한내 동포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강조한 그 보도는 순식간에 민족 감정을 자극했던 것이다. 7월 3일에 벌써 인천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시작되었고 서울, 가장 격렬했던 곳은 평양이었다. 연이어 부산• 신의주 · 원산, 학살된 중국인 백이십칠 명, 부상자 삼백구십삼 명, 물적 손해는 이백오십만 원에 이른다 했다. 이러는 동안 일본 경찰은 방관했고 또는 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보산사건이 파급되어 국내에서 일어났던 폭풍은 일본이 면밀하게 짜낸 각본 때문이었다. 칠월을 넘기고 팔월을넘기고 구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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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을 타고 나는 사람이 있다면, 朴景利 선생님의 업은 土地다. 선생님이 업에 가위눌려 신음하고,
좌절하고, 거부하고, 끌어안는 20년 세월을멀리서 가까이서 느끼면서 나는 그 업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土地가 잘 안 써지는 괴로운 긴날 선생님은 손이부르트도록 텃밭을 매며 뜨거운 흙과 땀에 치유되어 그 업에 새롭게 도전하곤 했다. 선생님은 처절하게 업과 싸워서 마침내 이긴 『土地의 한 영원한 주인공이다.

張明秀 한국일보 편집위원 - P-1

사건이 난 뒤 열흘이 지났으나 경찰은 범인의 흔적조차 찾아내질 못하였다. 온통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마 어디서 쾅! 하고 터질지 모르는 소리를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이도시의 사람들, 그러나 열흘을 넘기면서 긴장은 풀리기 시작했고사람들은 즐거움에 가슴이 뿌듯해져갔다. 어디서나 그 사건은 화제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끼리 눈과 눈이 마주치면 눈으로 이야기하였고 귓속말로 몸짓으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들리지 않는 함성은 차츰차츰 도시를 휩쓸어가고 있었다. 추상적이던 가정부(政府), 상해에 있다는 우리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존재를 실감하면서 무기력해진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희망의 빛을보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조국. 그 조국이 내게로 올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남녀노소 빈부와 계급의 차이 없이 누구나 가슴 떨리는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보다 더 가증스러운 배신자, 반역자, 한겨레의 뿌리에서 나온 친일파 앞잡이들에 대한 응징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만일에 어느 누가 거리에 군자금모금함을 내놓았다면 이 순간만은 사람들 마음이 가락지 비녀 다뽑아넣었을 것이며, 지게꾼 노점상 죽 팔던 노파까지 하루벌이를 - P11

다 털어넣었을 것이다. 윤국이도 걸핏하면 남강 모래밭으로 달려나가 데굴데굴 굴렀다. 몸이 가려운 강아지처럼 굴렀다. 구르면서
‘아버지다! 아버지가 다 꾸미신 일이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모든 것 다 알 것 같았다. 알 것같아서 피가 끓었다. 그 자신도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며 진주의 집을 수색한 것은 물론 평사리까지 형사대가 파견되어 집안을 뒤졌고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했다. 형사가 넌지시 관련되지 않았는가 말했을 때 길상은 물끄러미 형사를 바라보며
"그만한 돈 만들려면 우리도 어려운 처지는 아닌데 뭐가 답답하여 남의 집에 가서 강도질을 했겠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어쨌다는 거요. 나는 석 달 가까이 이곳에 와서정양하고 있었는데 내 혼백이 가서 그 짓을 했단 말씀이오?"
"댁은 피해가 없질 않소. 그들보다 댁의 재력이 월등한데 이상하지 않느냐 그 말이오." - P12

"글쎄올시다. 왜 우리집은 털지 않았는가, 이상하긴 이상하군요. 감옥살일 했다고 봐준 겐가?"
"이보시요! 혁명지사 왜 이러시오!"
"왜 이러시오?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정말 왜 이러시오? 현금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가졌을 터이고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온들 뭐가 나오겠소"
"......"
"누가 압니까? 요 다음엔 우리집에 화살이 꽂힐지. 하룻밤에 두집 털기도 벅찬 일, 세 집이나 털 수는 없었을게요."
"당신은 재미있어 하는군. 뭐가 그리 신이 나오!"
"그러면 악을 쓰리까? 그것 다 해본 것이오. 무고하다고 악을 써본들 생떼 쓰고 나오면 별수없더군. 사람의 기만 넘고 명대로 살지도 못하겠더군."
그러고도 듣기 거북한 얘기가 한동안 서로간에 오고갔으나 형사는 꼬리를 잡지 못한 채 떠났다. 혐의가 있고 없고 간에 범인을 잡 - P12

지 못하여 노심초사,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경찰이 길상의 전력(前歷)을 감안하면 그를 진주까지 구인(拘引)하여 조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분히 친일적으로 보여지는 서희의 존재, 평소 음으로 양으로 돈을 뿌려놨던 것이 이럴 경우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애꿎은 두 서기, 그러니까 이도영 집의 서기와 김두만 집의 서기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거의 병신이 되다시피 고문을 당하였고 다급한 나머지 덮어놓고 이름들을 입에 올려 무관한 사람들이곤욕을 치러야 했었다. 아무튼 두 명의 서기는 파멸이었다. 전쟁에 부상한 병사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그것은 비참한 희생이었다. 그동안 김두만은 만나는 사람마다 내 돈 강탈해간 놈들 잽히기만 해봐라! 칼로 배애지를 푹 찔러 직이지 그냥 두나 하고 욕을 했다. 어느놈이든 턱아리를 놀렸기 때문에 돈 있는 줄 알고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운수 불길하여 손해가 크다는 정도의 위로를 하던 사람들도 차츰 그를 피하게 되었고, 흥분하는 김두만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발길을 돌리곤 했다. 별수없이 그도 욕을 안 하게 되었지만 경찰이 내통했다는 의심을 그에게 전혀 갖지 않는 것을 알고는 빼앗긴 돈이 아까워혼자 꿍꿍 않았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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