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거리는데 끈적끈적한 문어다리 같은 것이 철버덕 얼굴 위에 떨어져서 목을 감는다. 길상은 징그러운 환각에 머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이상한 환각과 더불어 육체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같다. 사지에 감각이 돌아온다. 손을 뻗쳐 어둠 속을 더듬더듬 더듬는다. 자리끼를 더듬다 말고 길상은 일어서서 전등을 켠다. 부신눈에 흰버섯 같은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작은 얼굴 큰 얼굴 두 개의 얼굴은 푸른 산돌 틈새서 솟아난 흰 버섯. 아내와 둘째아들, 생후육개월 된 윤국(允國)의 잠든 얼굴이다. 어둠이 눈부신 밝음으로 변했는데 어미와 어린것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첫아이 때도 그러했었다. 아이가 젖을 많이 빠는 요즘의 서희는 업어가도 모르게깊은 잠에 빠진다. 또 많이 잤다. 길상은 자리끼를 찾던 생각을잊어버리고 어린것과 아내 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본다. 유모 젖을먹여라 했었지만 기여 제 젖을 먹이는 서희다. 길상은 두 개의 얼굴말고 유모 곁에서 꼼짝 않고 잠들었을 큰아들 환국(還國)이를 생각한다. - P168

허리를 구부려 어린것의 볼을 쓸어주고 전등을 끈 뒤 길상은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의 공허, 공허 속에 어둠이 스며오고, 가득히 스며오고 밤의 침묵이 모난 짐짝처럼 창자를 타고 내려간다. 모서리에 찔리는 통증과 더불어마음바닥에 짐짝이 가라앉는다. 밤인가, 아니 신새벽이다. 물먹은듯 별들이 희미하게 하얗게 깜박거린다. 초가을의 냉기가 옷깃 사이로 기어든다. 가난하다. 허기지게 마음이 가난하다. 길상은 안마당을 돌아나간다. 옛날 최참판댁 안마당을 걸어가는 착각이 든다. 오소소 떨며 신새벽 안마당을 건너서 사랑에 군불을 때러 가던 소년. 그 동안 과연 세월은 흘렀는가. 흘러갔는가.  - P169

세월에서 터득한 판단이 그의 경풍을 잠재운 것이다. 판단, 서희의 소망과 서희의 가진 것 그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이상 길상은 길상 자신을 잃을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회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시초, 치열한 소망과 기득권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최서희는 기왕의 자리에서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게에 최서희는 눌리어 떠나질 못했다. 그 무게는 소망과 가치관의 약화와 반비례하여 가중되어왔다. 이제 무게는 완벽하다. 그렇다.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상에 상전 아씨를 싣고 말고삐를 잡으며 가는 하인이 아니고서는 돌아가지 못할 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희에게 그것은 처절하고 절대절명의 판단이다. 아이 둘이 아비의 옷깃을 잡아주리니그 희망에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애소하지 못하는 것도 그 판단 때문이다. 파아랗게 질렸던 서희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평정으로 돌아간다.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 P213

경찰서에 가자는 것은 진심이 아니었으며 애를 먹이자는 것이었는데 인력거에서 서희가 내려섰다.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이 잠잠해진다. 옥색 자미사의 춘추 두루마기, 미색 장갑을 끼었고 순백색 치맛자락이 물결친다. 고독과 고뇌와 멍에를 쓴 불행한 여인 천부의 미모는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은 아닐 성싶다. 자신의 미모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는 가엾은 천치가 아니면은 그 행복이 환상일 따름이요 기만일 뿐이다. 여자의 미모는 타인의 행복이다. 행복하리라 오해하는 뭇 사람들에게 바수어서 나누어주는, 가령 지금의 이런 경우다. 서희에게 집중되는 뭇 시선들은 바어서 나누어가진 일순의 작은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과 흥미와 동경과, 자아, 그러면은 다음 어떠한 광경이 벌어져서 구경꾼들을 흡족하게 해줄 것인가. 미인은 노상 무대 위의 희극배우요 익살꾼은 무대 위의 광대다. - P216

햇빛이 서편 창가에 두 줄기 비쳐들어 그 빛 속에서 시끄럽게 먼지가 날고 있었으며 이따금 풀쑥풀쑥 기어든 담배연기가 맴을 돌고 있었다. 겨울날에 모처럼 스며든 햇빛이건만 암울한 사람들 마음을 더욱더 암울하게 할 뿐이다. 방에는 주름살투성이의 한층 얼굴이 길어진 영팔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탄 공노인은 담뱃대를 털기가 무섭게 누가 담뱃대로 뒤꼭지를후려치기라도 할 듯 재빠르게 새 담배를 넣어서 불을 붙였고, 그것을 무한정 연기가 나든 안 나든 입에 물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방학이어서 학교를 쉬고 있는 두메도 와서 함께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안방, 월선이 누워 있는 방을 지키는 사람은 방씨였다. 이러기를 벌써 사흘, 월선은 기름 떨어진 호롱의 심지처럼 기름 아닌심지를 태우고 있는 그런 상태, 죽음은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기보다 이미 사신(死神)은 머리맡에 와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잦아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두메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하마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나간 채 기척이 없는 홍이 걱정을 하고 기회를잡은 두메가 벌떡 일어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두메는 부엌을 들여다본다. - P285

이날 밤 서희는 길상이 들어오기를 고대하였다. 새벽녘까지 잠을이루지 못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길상은 사랑에서 올라오질 않았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도 지나고 길상은 손님과 함께 하얼빈에 볼일이 있어 떠났다는 전갈이다.
"이럴 수가?"
도사리고서 밤을 꼬박이 밝힌 서희는 노했다. 격노한 것이다. 서회가 남편 길상에게 이렇게 노해보기는 처음이다. 안절부절 어떻게해볼 수도 없는 마음, 서희는 이불을 깔고 드러눕고 말았다. 아이들을 멀리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구 울었다. 인척이라며 큰절까지시킨 손님에 대한 짙은 의혹을 풀어주지도 않고 떠난 것도 괘씸하고 분하였으나 행선지가 하얼빈이라는 데도 쌓이고 쌓인 감정이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실컷 울고 난 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서희는 안정을 찾는다. 냉정해지니까 왜 울고 왜 그토록 노하였는지 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님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기로 그것은 종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자신과 길상의 생활인 것이 깨달아진다.
‘인척이면 인척인가 보다 생각하면 될 거 아닌가. 그이도 모든 것정리하고 할일이 없어지니 손님 뫼시고 하얼빈으로 갈 수도 있는일.‘
결국 눈을 감아주기로 결심한다. 자리를 치우라 이르고 세수를한 서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불러들여 놀아주는 것이다. 더욱 자상하게 깊은 애정을 기울이며 오로지 아이들에게만 열중한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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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중국의 기악가 사광은 자기 귀를 더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한다. 인간의 간사한 눈이 신음(神音)과 신운(神韻)을 감득하는 일에 번번이 방해물 푼수임을 일찍이 깨달은 극기(克己)의 자해(自害)이다. 참다운 예술의길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고사(故事)가 아닐 수없다.
먼 사광이 아니더라도 朴景利 선생을 볼 때 나는 너무 작품을 쉽게 쓰지 않나 하는 자책감에 빠질때가 많다. 『土地」를 두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선생께서 이때껏 일상으로 지켜나온 철저 (徹低)극한 창작 자세에서 분명히 자기 눈을 무수히 찌르고, 찌른 만큼 또 무수히 스스로 장님이 되는 사광의 면모를 볼 수가 있어 진정한 예술가의,
빼어난 문학인의 한 전형으로서 서슴지 않고 나는 朴景利 선생을 꼽는다.

——尹興吉作家 - P-1

"글쎄올시다. 원한이 깊을수록 뱀처럼 지혜로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럴 법한 말이긴 하나.....?"
하고는 공노인 말을 뚝 끊었다. 행여 환이가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겁내는 표정이 되어서. 왜 공노인은 별안간 환이를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그 자신 의식하지 못한 일이나 그것은 상민의 피, 공노인 내부에 흐르고 있는 상민의 피 탓이다. 김개주의 아들이라는 확신때문이다. 저 준수한 젊은이가 김개주의 아들이라니 김개주는 영웅이다. 상민의 영웅이다. 이조 오백 년을 들어엎으려던 그를 사람들은 살인귀라 하였다. 압제자의 목을 추풍낙엽같이 날려버린 살인자, 살인귀건 흡혈귀건 아무래도 좋았다. 뭣이건 그는 핍박받아온 백성들 가슴에 등불로 살아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서울로 압송한데 반하여 김개주는 위험인물이라 하여 체포 즉시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 위험시한 만큼 상민들 가슴에는 낙인처럼 뜨겁게 남아 있는 풍운아 김개주, 그 반역의 피를 지금 눈앞에 있는 아들에게서 본다. 반역의 피는 모든 상민들의 피다. 양반댁 유부녀를 데리고 달아난 것도 반역의 피 때문이다. 반역의 피는 억압된 상민들의 진실이요 소망이다. 수백 수천 년의 소망이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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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서 돌아온 혜관은 서둘러 채비를 차리고 떠났다. 윤도집도 사랑을 비운 채 출타중이었고 집안은 쥐죽은 듯 괴괴했다. 석이는 낡은 갓이 걸려 있는 벽을 쳐다보며 혼자 생각에 잠긴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 했으니 해야겄지마는 어매는 아아들 데리고우찌 살 긴고...... 내가 나와부리믄 어매는 품을 더 들어야 할 긴데‘
속이 쓰라리다. 그러나 혜관과 윤도집이 자기를 인정해주었다는 느낌은 상당히 강렬한 것이었다. 어젯저녁 상면을 했을 때 
"우리가 선을 볼라 했더니 정한조 아들이 우리 선을 보러 온 모양이라. 허허헛...... 그만하면 되었구먼."
그 순간 석이는 이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리라 작정했던 것이다. 석이는 민감하게 느꼈다. 두 사람이 다 평범치 않으며 그 말도 평범하게 지나쳐버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고 - P188

생각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안다면 옳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선 복종하는 것이 또 당연한 일로 석이는판단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은 큰일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그 큰일을 위해 가는 것은 동시에 아비 원혼을 위로하는 것임을, 석이는뚜렷하게 자각한다. 뻐근하게 양어깨를 누지르는 것 같은 짐의 무게를 느낀다. 그 짐을 지고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앞으로 가리라결의한다. 어미의 가랑잎같이 야윈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손등에 피딱지가 앉았던 누이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등잔불 밑에서 물레를 돌리던 젊은날의 어미 얼굴이 스치고 간다. 낚싯대를 메고 나가면서 석아 니도 따라갈라나 하던 아비 모습이 스치고 간다. - P189

지신지신 걸어가며 혜관이 묻고 응칠이 대꾸한다. 그들 뒤를 따라가는 기화는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여전히 떨려오고 때론 머릿속이 화끈 달아올라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기도 하다. 오목한 뒤뜰이 있는 별채의 사랑 비슷해 보이는 방은 사람이 거처한흔적이 없는데 훈훈하고 따스했다. 한참을 기다렸건만 바깥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혜관과 기화는 무서운 침묵으로 빠져들어간다. 이때 서희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활자 하나하나는 선명하게눈에 보였지만 뜻은 모른 채 다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응칠이가 사십 넘어 뵈는 중과 이십 안팎의 어여쁜 여자가 경상도에서 찾아왔다 했을 때 서희는 혜관과 봉순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직감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성명도 알아보지 않고 거래를 올리는 응칠의 실수를 나무랄 겨를이 없었다. 실상은 직감이 강렬했다기보다 한순간 감정이 강렬했었다 하는 게 옳을 성싶다. 엉겁결에 별채에 안내하라 일러놓고 서희는 읽던 신문을 들여다본 채 생각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봉순아! 부르며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전혀 없었다 할 수는 없다. 봉순아! 하고.
‘내가 이만 일로 마음이 약해져? 봉순이가 누구야? 내 곁에서 시중들던 아이 아니냐?"
그리운 정을 손아귀 속에서 뭉개버린다. 서희에게 그것은 어려운 - P291

일은 아니었다. 확고부동한 권위 의식이 잠시 동안 거칠었던 숨결을 잠재워준다.
‘봉순이...... 하인하고 혼인을 했다 해서 최서희가 아닌 거는 아니야. 나는 최서희다! 최참판댁 유일무이한 핏줄이야. 이곳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나를 바라본다. 고향 사람들은 힐난의 표정으로 내 얼굴을 외면한다. 모두들 나를 격하(格下)하려 들고 있다. 봉순이 그 아이는 더욱더 그러하겠구나. 최참판네 가문이 시궁창에 던져졌다 생각할 게 아니냐? 시녀였던 그 아이가 사모하던 하인이 지금은 내 남편이야‘
서희는 웃는다.
‘그도 내 편에서 애걸복걸한 혼인이라면? 모멸의 시선 속에서 그러나 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게야. 나는 손상당하지 않어! 최참판 가문은 손상되지 않는단 말이야! 알겠느냐? 나는 지키는 게야. 최서희의 권위를. 최참판 가문의 권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게야. 영광도 재물도,‘ - P292

매번 뇌어보는 말이었으나 길상은 한 달에 적어도 한두 번은 상무로 회령에 오게 된다. 매번 고통을 느끼고 오지 말까부다 마음속으로 되면서, 굳이 싫다면 얼마 전에 채용한 서기를 보낼 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자신이 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설까. 행여 옥이네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까. 만나서 어쩌겠다는 건가. 돈이나 몇백 원 집어주면, 그러면은 편한 잠을 잘 수도 있고 꿈에 보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부부,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날갯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동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는데 그래도 서로 사이에 폭은 남아 있는것이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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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입구에 씌어지기 시작, 이제 1990년대입구를 넘어선 오늘에까지 민족의 근현대사를넉넉하고도 깊이있게 펼쳐가고 있는 朴景利씨의「土地」는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욕과 삶에의 강렬한 회원에 뿌리를 내리고서, 19세기 후반부터 불행한 식민지 전기간에 걸친 우리 민족사(民族史)를 다루고 있다. 사람답게 사는 문제를 포함한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민족의 구체적 생활사(生活史) 속에서 풀어 헤치고 있는「土地는 한 작가의 정신적 노력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실증해주고 있다.

-金允植 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P-1

"제발 그렇기나 됐이믄, 원통한 말을 어느 곳에 가서 으흐흣. 내 그렇기 되는 날이믄 머리털을 뽑아서 신이라도 으흐흣..."
석이네는 또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 운다.
"김훈장 헹펜이 젤 딱한 모양이고... 아무튼지간에 그렇기 알고접던 소식을 들었는데 우째 이리 가심에 구멍이 펑 뚫린 것맨치로 앉아도 그렇고 서도 그렇고 갈 바를 잡을 수가 없는지 모르겠소?"
들은 얘기는 다 털어놨고 눈물도 다 짜냈건만 허하기론 마찬가지, 기화는 멀거니 석이네를 바라보고 석이네는 또 우두커니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시원할 것 같지만 시원치가 않다. 희망이 잡힐 것같지만 손바닥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남편은 영원히 잠들어 깨어날 리 없고 날아가버린 길상이 품에 돌아올 리 없다. 방에 마주보고 앉은 사람은 봉순이 아닌 기생 기화와 오동지 섣달에도 빨래품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홀어미, 웃음도 말도 허공에 먼지되어 날아갔다.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심을 먹은 뒤
"김서방댁이 죽었다 캅니다."
풀쑥 말을 꺼내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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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위어서 서희의 눈동자는 커다랗고 한결 짙어진 눈시울은 눈가장자리에 병적인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얇고 부드러운 입술도 다소 푸르스럼한 것 같다. 그러나 병적인 음영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여러 시선이 서희에게 집중된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할것없이 모두 두려운 눈으로 서희를 바라본다. 숨이 막히고 고뇌스러우며 탄식하게 되는, 아무튼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용정 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뿌린 여자이던가, 전설과 같은 얘기들, 어떻게 하여 저 흑요석(黑曜石) 같은 눈동자의 어린 여자는 어마어마한 그 재산을 삼사 년 동안 쌓아올렸을까. 기적이다. 그 기적을 상징하는 것이 독특한 그의 용모다. 기품과 요기(妖氣)와 교만과 총명의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여자. 서희의 시선은 일순도 머문 곳이 없었다. 길상에게조차 단 일별을 허용치 않고 마차에 오른다. 털을 바닥에 깐 작은 단화, 역두에 선 사람들이 마지막 본 것은 서희의 그 귀여운 구둣발이었다. - P383

이상한 일이다. 순간적인 심리 변화라는 것은. 서희는 거짓 없이 말했던 것이다. 사실 당초부터 서희에게는 경쟁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얼굴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따위는, 그런 것을 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려는가. 서희가 거짓 없이 말했다는 것은 길상이 이 여자와 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 때문이야. 서희는 속으로 뇌이며 눈길을 여자도 목도리도 아닌 곳으로 옮긴다. 서희가 알기로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것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들은,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앙입매다. 거짓말은 마옵소꽝이. 어째 모르겠습니까. 생각으 해보옵소. 어째 새총각으 처지 알라까지 따른 가스집과 혼인하겠슴? 사람으 괄시하면 앙이 됩매다. 누귀 그 말을 믿겠소꽝이? 그러잖애도 그분이 도와준 돈을 갚겠다아 그 일념으로 밤 새워가문서리 바느질으 하는 기요." - P405

‘고아 같다. 뭐 언제는 내가 고아 아니었었나? 그렇지만 더욱더 고아 같다.‘
못에 매달린 목도리를 보았을 때 서희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놓고 길상에게 고통을 주리니 생각했었다. 길상이 자기를 낯선 여관에다 내버려두고 여자 집을 찾아간 행위가 애정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 그 무자비한 감정을 무엇이 풀어놨다. 풀린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희는 스스로, 자기 자신마저 질곡에서 풀어버린 것이다. 용정에 쌓아 올려놓은 자기 성으로 돌아간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나 그끈질긴 숙원과 원한에 사무친 보복심과 잠들 수 없는 자긍을 내어버린 자유, 무겁고 숨막히는 철갑을 벗어버린 자유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다 버리고 어디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바람에날려가는 나뭇잎같이 왜 슬프고 외로운지, 고아의 느낌이 가슴을저미는지 서희는 알 수가 없다. 덮어놓고 걷는다. 하늘 끝까지 내처걸어갈 것처럼 걷는다. 여관과는 사뭇 방향이 다른 것도 개의치 않는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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