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무들마다 가득히 새들이 깃들였다. 대지는 어둠 속으로잠겨들기 전에 천천히 숨을 내쉰다. 잠시 후 첫번째 별이 뜨면 밤의장막이 이 세계의 무대 위로 내릴 것이다. 대낮의 찬란하던 제신神)은 그들 날마다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리라. 그러나 또 다른 신들이 찾아올 것이다. 더 많은 어둠을 위하여 그네들 황폐한 얼굴들이그 사이에 대지의 심장 속에서 태어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모래 위에 끊임없이 와서 부서지는 파도가 황금빛꽃가루들이 넘실대는 저 공간을 건너 나에게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 들판, 침묵, 이 땅의 향기, 이 모든 향기로운 생명으로 내 전신이 가득 차고 나는 이 세계의 벌써 금빛으로 익은 과일을 깨물며, 그 달고도 강렬한 과즙이 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미칠 듯한 감동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다.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 이어지게하는 저 화합과 침묵이 중요할 따름이다. 나는 그 사랑을 오직 나혼자서만 누리려고 탐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태양과 바다로부터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 P-1

세상에는 정신 그 자체를 부정하는 하나의 진리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정신이 사멸하는 곳이 있다. 내가 제밀라에 갔을 때 그곳에는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또 다른얘기다.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인즉 그곳에는 무겁고 틈새 하나 없는 거대한 침묵이 어떤 저울의 균형과도 같은 그 무엇이 지배하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새들의 비명, 구멍이 세 개 뚫린 피리의 고즈넉한 소리, 염소들이 바스락거리며 발을 옮겨놓는 소리, 하늘에서울려오는 어렴풋한 소음, 그 하나하나가 다 그 장소의 침묵과 황폐함을 만들어내는 소리들이었다. 이따금씩 무언가 메마르게 탁 부딪는 소리,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는데 그것은 바로 돌들 사이에 가만히 엎드려 있던 어떤 새 한 마리가 문득 날아오르는 기척이었다. 밟아가는 길 하나하나, 허물어진 집터들 가운데로 난 오솔길들, 번쩍거리는 돌기둥 밑에 포석으로 덮인 대로(大), 언덕배기 위 개선문과 사원 사이에 있는 거대한 고대 광장, 이 모두가 제밀라를 사방으 - P-1

로 경계 짓고 있는 협곡들로 인도한다. 이러고 보면 제밀라는 끝없는 하늘 아래 숨김없이 뒤집어 펴 보이는 트럼프의 패나 다름없다.
하루 해가 점차로 흘러가고 산들이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더 커진것같이 보임에 따라 우리는 그곳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서돌들과 침묵의 얼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제밀라의 언덕에는•바람이 분다. 바람과 태양이 분간할 수 없도록 하나로 뒤엉키고 그로 인하여 폐허와 빛이 한데 뒤섞이는 그 엄청난 혼잡 속에서 무엇•인가가 다듬어져가지고는 인간에게 사멸한 도시의 고독과 침묵과더불어 인간의 정체를 측정할 수 있는 절도를 부여한다. - P-1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그저 지나가다가발길을 멈추거나 거쳐 가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다른 어느 곳으로 인도해주지 아니하며 어느 고장을 향하여 트여 있지도 않다. 그곳은 다만 갔다가 되돌아오게 마련인 곳이다. 그 사멸한 도시는 길고 꼬불꼬불한 어떤 길의 끝에 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제밀라가 곧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에 그 길은 더욱 멀게 여겨진다 마침내 드높은 산들 사이에 푹 파묻힌 빛바랜 어느 언덕배기에 마치 백골들의 숲과도 같은 누르스름한 그 잔해가 솟아나 보이게되면 제밀라는 오로지 단 하나 우리를 세계의 고동치는 심장부로인도해줄 수 있는 저 사랑과 인내의 교훈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을•핀다. 거기 몇 그루 나무들과 마른 풀잎 가운데서 제밀라는 천박한 찬미와 눈요깃거리만 찾는 호기심, 혹은 희망의 유희와 맞서서 저의 모든 산들과 저의 모든 돌들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
저 삭막한 찬란함 속에서 우리는 진종일 헤매고 다녔다. 하오의 - P-1

초장에는 거의 느껴질까 말까 하던 바람이 점차로 시간이 감에 따라 거세어지면서 풍경을 온통 가득 채워가고 있는 듯했다. 바람은멀리 동쪽으로 난 산들 사이의 협곡으로부터 일어나서 지평선 깊숙한 곳에서 달려와가지고는 돌들과 햇빛 한가운데에 폭포처럼 쏟아졌다가 솟구치는 것이었다. 쉴 사이도 없이 바람은 폐허 전체를 가르며 힘차게 불고 돌과 흙의 원곡(圓) 속에서 핑핑 도는가 하면비바람에 얽은 돌무더기를 뒤덮고 돌기둥 하나하나를 그 숨결로 휩싸 안다가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린 광장 위에 와서 끊임없는 비명소리를 내면서 퍼지는 것이었다. 내 몸은 돛대처럼 바람에 우지끈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위의 환경에 시달려 얼굴은 초췌해지고 눈은 불타는 듯하며 입술은 덜덜 떨리며 살가죽은 바싹말라 내 것 같지도 않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전에는 나는 바로 이살가죽에서 세계가 써놓은 필적을 판독하곤 했었다. 세계는 저의 여름 숨결로 살가죽을 데워주거나 된서리의 모진 이빨로 깨물면서거기에다가 저의 다사로운 애정이나 분노의 표시를 해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바람에 휘둘리고 한 시간이 넘도록 시달린 채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정신이 얼떨떨해지다 보니 나는 그만 내 몸이 그리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게되었다. 물살에 씻겨 반드러워진 조약돌처럼 나는 영혼 깊숙이에까지 바람에 씻겨 윤이 나도록 닳아버렸다. 나는 나를 허공에 떠 있게만드는 그 힘을 처음에는 약간, 나중에는 더 많이 닮아갔다. 마침내내 피의 고동과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심장의 엄청나고 요란한고동소리를 분간할 수 없게 되면서 나는 바로 그 힘 자체가 되는 것 - P-1

이었다. 바람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열화 같은 전라의 이미지에 따라 나를 다듬어가고 있었다. 덧없이 지나가며 나를 포옹하는 바이었다. 바람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열화 같은 전라의 이미지에람은 숱한 돌들 중의 어느 돌이 되어버린 듯한 나에게 여름 하늘 속에서 있는 하나의 돌기둥이나 한 그루 올리브나무의 고독을 옮겨주고 있었다.
이 치열한 햇빛과 바람의 목욕은 나의 모든 생명력을 다 소진시켜갔다. 내 속에는 겨우 저 스쳐 지나가는 날개소리, 저 신음소리를 내는 생명, 정신의 처 가냘픈 반항뿐. 곧 세상의 사방에 흩어지고기억도 흐려지고 나 자신도 망각해버린 채 나는 곧 저 바람이 된다. 바람 속에서 나는 저 돌기둥이며 저 아치며 만지면 따뜻한 저 포석이며 황량한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빛바랜 산들이다. 나는 한 번도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리를 유지함과 동시에 내가세계 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이토록 절실히 느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나는 현존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놀라운 느낌을 갖게하는 것은 내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마치 종신징역을 받은 사람처럼 ㅡ이리하여 그에게는 모든 것이오직 현재일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일 역시 다른 모든 날들과 마찬가지일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현존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더 이상 아무것도 미래에 대하여 기대할 것이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풍경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천박한 풍경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고장 전체에 걸쳐서, 나의 것이아니라 이 고장 자체의 것인 그 무엇, 우리들에게 공통된 죽음의 맛 - P-1

과도 같은 그 무엇을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비낀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돌기둥들 사이에는 불안한 분위기가 마치 상처받은 새들처럼 대기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자리에 들어앉는 저 삭막한 명(明) 불안감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싹튼다. 그러나 고요함이 그 살아 있는 가슴을 덮어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지혜의 전부다. 하룻날이 흘러가고 하늘에서 내리는잿가루에 덮여서 소리와 빛이 숨을 죽여감에 따라 나 스스로에게버림받은 나는 나의 내부에서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저 은근한힘들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을 느꼈다.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미래라든가 더 잘 되고 싶다든가출세라든가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마음의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다음에는 또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이 내게는 즐겁지 않다. 내게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門)과도 같은 것이다. 죽음이란 그저 내딛어야 할 한 발짝 발걸음이 아니라 끔찍하고 추악한 모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들이 내게 제안하는 것은 기껏 다 인간에게서 그의 생명 자체의 무게를 덜어주겠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제밀라의 하늘 높이 커다란 새들이 무겁게 나는 것을 눈앞에 보고 있노라면 내가 요구하고내가 얻어내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생명의 어떤 무게라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수동적인 정열 속에 송두리째 자신을 맡길 것.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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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사에서의 결혼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香草)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내린 슈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락 말락 하더니 이윽고 확고하고 육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벌써 바닷가로 가슴을 열고 있는 마을을 지나 우리는 도착한다. 노랗고 푸른 세계로 들어가면 알제리의 여름의 대지가 향기 자욱하고 매콤한 숨결로 우리를 맞이한다. 도처에 장밋빛 부겐빌레아 꽃이 빌라들의 담 너머로 피어오른다. 뜰 안에는 아직 희미한 붉은빛 - P-1

의 부용화가 꽃잎을 열고 크림처럼 두툼한 차향(茶香) 장미와 길고푸른 붓꽃의 섬세한 꽃잎이 흐드러진다. 돌은 모두 뜨겁게 단다. 미나리아재비꽃빛 버스에서 우리가 내릴 즈음 푸줏간 고기장수들은빨간 자동차를 타고 와서 아침 행상을 돌고 요란한 나팔을 불며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항구의 왼쪽으로는 마른 돌계단이 유향나무와 금작화들 사이의 폐허로 인도한다. 길은 조그만 등대 앞을 지나서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간다. 벌써부터 그 등대 밑에서는 보라, 노랑, 빨강꽃들 자욱한 살진 식물들이, 요란한 입맞춤 소리를 내면서 바다가 핥아대는 첫번째 바위들 쪽으로 내려 뻗으면서 자란다. 부드러운 바람 속,
얼굴의 한쪽 뺨만을 데워주는 햇빛을 받으며 서서 우리는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주름살 하나 없는 바다를, 그 바다의 빛나는 치열(齒列)이 짓는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폐허의 왕국 속으로아주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관객이 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 P-1

몇 걸음을 옮기면 압생트가 목구멍을 할퀸다. 그것들의 회색빛솜털이 끝간 데 없이 폐허를 뒤덮고 있다. 압생트의 정수(精髓)가 열기 속에서 발효하고 땅에서부터 태양까지 하늘도 취하여 휘청거리게 할 알코올이 이 세상 온누리에 걸쳐 피어오른다. 우리는 사랑과 욕정을 만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 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굳이 이곳에 혼자 있으려고 애쓰지않는다. 나는 흔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이곳에 찾아오 - P-1

곤 했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사랑의 얼굴이 지어 보이는 맑은 미소를 읽어보곤 했다. 여기에 오면 나는 질서나 절도 따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버린다.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이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금 돌들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패를 이제는 다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와 있다. 탕녀(蕩女)인 딸들의 귀향을 위하여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놓았다. 고대(古代) 광장의 포석들 사이로 향일성(向日性) 식물은 붉고 흰 머리통을 쳐들어 올리고, 붉은 제라늄들은 옛적엔 가옥이요 사원이요 공공 광장이던 자리에 그들의 붉은 피를 쏟아 붓는다. 많은 지식을 쌓아 어떤 이들은신에 이르게 되듯이 기나긴 세월의 풍상으로 이 폐허는 어머니의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에야 마침내 과거가 폐허를 떠나버렸으니,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 P-1

압생트들을 뭉개어 비비며, 폐허를 껴안고 애무하며, 나의 숨결을 세계의 저 소용돌이치는 입김과 맞추어보려고 애쓰며 보낸 시간이 얼마인가! 야생의 향기와 졸음을 몰고 오는 풀벌레들의 연주 속에 파묻혀서 나는 열기로 숨막힐 듯한 저 하늘의 지탱하기 어려운 장엄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연다. 본연의 자기가 되는 것, 자신의 심오한 척도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슈누아 언덕의 저 단단한 등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가슴은 어떤 이상한 확신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나는 숨 - P-1

쉬는 방법을 배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었다. 저 사원에 오르면 원주들이 태양의 운행을 가늠해주고, 그곳에서는마을이 온통 그 희고 발그레한 벽들과 초록빛 베란다들과 함께 굽어보이므로 내가 언덕을 하나씩 하나씩 기어오를 때마다 새로운 보상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는 것이었다. 동쪽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 역시 그러하였다. 성당에는 이제 오직 벽들만 남아 있을 뿐 그성당 주위에는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땅속에서 파내놓은 석관棺)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간신히 보일락 말락 밖으로 파내져 있는 것이어서 여전히 한 모서리는 땅속에 묻혀있다. 옛날엔 그 석관들에 죽은 자들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지금은 샐비어와 향꽃무우가 그 속에서 자란다. 생트 살자 대성당은 기독교의 사원이었다. 그러나 빈틈으로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들에게 전해오는 것은 소나무와 시프레가 무성한 언덕들, 혹은 약 20미터에 걸쳐 그 하얀 강아지들을 뒹굴게 하고 있는 바다 이세계의 음악뿐이다. 생트 살자를 떠받들고 있는 언덕은 그 등성이가편편해서 옛 사원의 돌기둥들 사이로 바람은 더욱 드넓게 분다. 아침 햇살 아래 위대한 행복이 누리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구태여 신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딱한 사람들이다. 여기서는신들이 잠자리가 되고 하루 해의 흐름 속에서 그 눈금 노릇을 한다.
"여기에 붉은 것이, 푸른 것이, 초록빛 나는 것이 있구나. 이것은 바다, 산, 꽃들이구나."라고 나는 쓰고 읽는다. 코밑에다 유향나무 열매들을 으스러뜨려 문지르는 것이 이토록 좋다고 말하면 될 것을구태여 디오니소스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땅 위에 살 - P-1

며 이 사물들을 본 사람은 행복하여라." 라는 이 해묵은 찬가를 노래한 것은 데메테르 신이었던가? 그런 신 따위는 나중에 자유스럽게생각하리라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아 이 교훈을 어찌잊겠는가? 엘레우시스의 성제(聖)에 있어서도 오직 바라보는 것이면 그만이었다. 여기서조차도 나는 이 세계에 흡족할 만큼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전라의 몸이 되어 아직 대지의정수로 향기가 배어 있는 몸을 풍덩 바닷물에 던져 땅의 정기를 바다에 씻어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 전부터 땅과 바다가 입술과입술을 마주하고 열망하던 포옹을 나의 피부 위에서 맺어주어야 한다. 물속에 들어오면 돌연한 전율, 차디차고 캄캄한 끈끈이의 용솟음, 그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속으로 빠져든다. 콧물이 흐르고 입 안은 쓰디쓰다 ㅡ수영을 하면 바닷물 밖으로 물이 번질거리는 두팔이 솟아나와 햇빛 속에 금빛으로 물들고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며다시 수면을 친다. 나의 몸 위에 물이 재빨리 미끄러지며 내 두 다리는 물결을 수선스럽게 소유한다ㅡ그리고 문득 아득해진다.
기슭에 나오면 모래 위에 처박히듯 쓰러져 세계의 한 발치로 버림받은 바 되어 살과 뼈의 무거움 속으로 되돌아온다. 햇빛에 어리둥절해진 채 가뭇가뭇 내 두 팔에 눈을 던지면 물이 미끄러지면서 드러나는 물기 걷힌 살갗 위에 금빛의 솜털과 소금가루.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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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이 어두운 방에서 ㅡ갑자기 낯설어진 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ㅡ이 돌연한 잠 깨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다. 모든 것이, 내게 낯익은 존재 하나 없이. 이 상처를 아물게 해줄 곳 하나 없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몸짓, 이 미소는 무엇과 어울리는 것인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ㅡ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방인.


이방인, 내게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기다릴 것, 그리고 아무것도 에누리하지 말 것. 적어도 침묵과 창조를 완전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할 것. 그 밖의 것은 모두, 그 밖의 것은 모두, 어떤 일이 생기건 상관없다. 《작가수첩 1), 232쪽) - P-1

알베르 카뮈의 세계는 삶의 기쁨과 죽음의 전망, 빛과 가난, 왕국과 적지(謫地), 긍정과 부정 등 ‘안과 겉‘의 양면이 언제나 맞물려 공존하는 세계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은폐하거나 제외하거나 부정하려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삶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어둡고 비극적인 또 다른 면을 뚜렷하게 의식했다. 삶의 종점인 희망 없는 죽음은 그로 하여금 세상만사의 무의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방인》은 바로 이 허무감의 표현인 동시에 이 허무감 앞에서의 반항을 말해준다.
"우리들 각자는 최대한의 삶과 경험을 쌓아가지만 결국 그 경험의 무용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고 만다. 무용함의 감정이야말로 그 경험의 가장 심오한 표현인 것이다." 20대 초반이었던 1934~1935년 겨울에 이미 카뮈는 친구 막스 폴 푸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렇다고 해서 비관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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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그때처럼



내가 입고 싶은 저 비단옷은 어느 록 가수가 입었던 가죽옷과 비슷해
감옥과 감옥 사이를 돌며 북과 기타를 울리며
노래하던 록 가수는 아마도 내 고향 비단 시장에 오면
비슷한 공연을 하면서 울지도 몰라

비단이 얼마나 많은 폭력 속에서 지어낸 피륙인지
누에는 알고 있을 거야
이제는 자연에서 혼자 사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저누에들은
어떻게 저 폭력을 참아내었을까
그래서 비단은 저렇게 곱게 차곡차곡 지층처럼 시장한가운데
누워 있는 걸까

난 한때 시인들이 록 가수였으면 했어
어쩔 수 없잖아 시인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월 스트리트, 증권 판매상이 그 일을 하니? - P-1

어미를 죽인 자
아이를 죽인 자
현금을 강탈한 자
강간한 자
외국인을 살해한 자
이 모든 것이 당신 탓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십자가를 긋던
수많은 성도들을 위해

저 많은 협곡을 돌아
저 많은 태풍을 뚫고 집에 돌아와
겨우 잠이 든 시인이
이 세계가 멸망의 긴 길을 나설 때
마지막 연설을 인류에게 했으면 했어

인류!
사랑해
울지 마! 하고

따뜻한 이마를 가진 계절을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별처럼
나는 아직도 안개처럼 뜨건하지만 속은 차디찬 발을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냥 말해보는 거야

적혈구가 백혈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 P-1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차곡차곡 접혀진 고운 것들 사이로
폭력이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것처럼
폭력이 짧게 시선을 우리에게 주면서
고백의 단어들을 피륙 사이에 구겨 넣는 것처럼 - P-1

거짓말의 기록


나, 태어났어
추위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먼지들을 모아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지
태어났을 뿐이었어, 누군가 나를 자라게 했어

아직 꽃술을 열어보지 못한 꽃들이 성교를 하느라 바쁜 들판에 누워
아직 단 한 번도 새끼를 낳아보지 않은 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비에게도 잠자리에게도 덜 익은 빛을 보여줘라고 공기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어
나와 자연은 사실혼 관계
법정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늦게사 알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저 암소가 일찍이 나에게 수유를 한 어머니라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 P-1

하늘에 있는 공들에게도 내 수유의 어머니.
그 고깃덩어리가 걸린 정육점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어
공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까? 인간을 수유하는 암소들을 생산하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을 알까,
저것 봐, 아이가 불어대는 풍선 어떤 포유류의 방광이 하늘로 가서
먼 들판을 은은하게 비추어대는 하늘의 공이 되네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그 말을 듣기 위해 춤을 추러 가는 아이들에게
나, 태어났어, 라고 말해봐, 말해봐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댈거야

피가 솟구치는 숨겨진 샘이 있다거나
죽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한다거나
그리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믿는다거나 하는
엄숙하게 웃기는 나날 동안 - P-1

나, 태어났어
아퍼,라고 말하면 너무나 아파서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지
안개 붕대를 감고 누워 컴컴하게 웃고 있었으면 했어 - P-1

눈동자


죽은 이들 봄 무렵이면 돌아와 혼자 들판을 걷다 새로 돋은 작은 풀의 몸을 만지면서 죽은 이들의 눈동자 자꾸자꾸 풀의 푸른 피부 속으로 들어가다 마치 숲이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되어 그 눈동자 커다란 검은 호수가 되어 검은 호수가 작은 풀끝이 되어 나를 자꾸 바라보고 있는데 내버려두었다네, 죽은 이들이 자꾸 나를 바라보는데,
그것도 나의 생애였는데

그 숲에는 작은 나무 집이 하나 있었다 집 앞 닫혀진 문 앞까지 걸어갔다 집 안은 아직 겨울이었고 결혼 대신 시를 신랑 삼았던 여성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저녁 식사에 올려진 양의 눈동자, 이방의 종교처럼 접시에 올려진양의 눈동자, 여성 시인을 신부 삼은 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를 쓴다, 애인아, 이 저녁에 나는 당신의 눈동자를 차마 먹지 못해 눈동자를, 적노라,라고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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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1883-1924).
프라하의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후 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
작품을 집필했다.
환상적인 분위기와 고독과 소외라는 주제가 작품의 특징이다. 
대표작으로『변신』, 『심판』등이있다. - P-1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철갑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침대에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들어 보니 아치형의 각질 부분들로 나누어진,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이불은 배의 높은 부위에가까스로 걸쳐져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애처로울 정도로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하릴없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는 
생각했다. 이게 꿈은 아니었다. 좀 작기는 해도 사람이 살기에 손색이 없는 그의 방은 낯익은 사면의 벽에 조용히 둘러싸여 있었다. 풀어헤쳐 놓은 옷감 견본 모음집이 펼쳐져 있는 탁자위에는 ㅡ잠자는 출장 영업 사원이었다 ㅡ그가 얼마전-에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잡지에서 오려 내 아기자기한 금 - P-1

박 액자에 끼워 넣은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림에는 모자를 쓰고 모피 목도리를 두른 숙녀가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향해 팔뚝을 온통 가리는 묵직한 모피 토시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레고르는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우중충한 날씨에 그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울적해졌다. 창문의 함석판을 후드득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들려왔다. <잠을 약간 더 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죄다 잊어버리는 게 어떨까?> 하고 그는 생각했으나 이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버릇이 있었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그런 자세로 누울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아무리 뒤척여 보아도 번번이 흔들거리며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운 자세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는 한 백 번쯤 그런 일을 시도해보았고, 멋대로 버둥거리는 다리들을 보지 않으려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다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가볍고 빼근한 통증을 옆구리에서 느끼기 시작했을 때야 비로소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아아, 원 세상에> 그는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이나 다녀야하다니.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업무상 스트레스가훨씬 더 심하다. 게다가 여행하다 보면 골치 아픈 일들이한두 가지가 아니야. 기차를 제대로 갈아타려고 신경 써야 - P-1

하는 일,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상대가 늘 바뀌는 탓에 결코 지속될 수도 없고 진실해질 수도 없는 만남 따위들. 이 모든 것을 왜 악마가 잡아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는 배 위쪽이 약간 가려운 것을 느꼈다. 머리를 더 잘쳐들 수 있도록 그는 등으로 몸을 밀면서 느릿느릿 침대기둥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근질거리는 부위를발견했다. 그곳에는 뭔지 알 수 없는 깨알같이 작은 흰 반점들이 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리 하나를 내밀어 그 부위를 건드려 보려고 했지만, 이내 다리를 움츠리고 말았다. 다리가 그곳에 닿자마자 온몸에 오싹하는 소름이 돋았기때문이었다.
그는 미끄러지며 다시 이전 자세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 > 그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아주 멍청해진단 말이야. 잘만큼 푹 자야하는데. 다른 출장 영업사원들은 하렘의 여자들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가령 주문받은 물건을 장부에 기입하려고 오전 중에 여관에 돌아와 보면 그 작자들은 그제야 일어나 앉아 아침을들고있지 않은가. 만일 내가 사장 앞에서 그러다간 당장 쫓겨나고 말 거야. 하기야 그러는 편이 나에게는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지. 그동안 부모를 생각해서 꾹 참아 왔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사표를 던지고, 사장 앞으로 걸어 나가 가슴에 묻어 두었던 생각을 그에게 다 털어놓았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사장은 틀림없이 책상에서 굴러떨어졌을 거야! - P-1

책상 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직원에게 말하는꼬락서니는 참 별나기도 하지. 게다가 사장은 귀가 어두워직원들은 그에게 바짝 다가가서 말해야 해. 그렇다고 아직희망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야. 언젠가 내가 돈을 제법모아 부모님이 그에게 진 빚을 다 갚게 되면 ㅡ아직 한 5.
6년 걸리겠지ㅡ 꼭 그렇게 하고 말거야. 그러면 일생일대의 전기가 마련되겠지. 다섯 시면 기차가 떠나니까 지금당장은 물론 일어나는 일이 급선무야.>
그러고서 그는 서랍장 위에서 재깍거리며 가고 있는 자명종 시계 쪽을 건너다보았다. <아이고, 하느님 맙소사!)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벌써 여섯 시 반이 아닌가. 시곗바늘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30분을 지나 벌써 45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 자명종이울리지 않은 것이 아닐까? 네 시에 정확히 맞추어져 있는게 침대에서도 보였다. 자명종이 울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온 방안을 뒤흔들 정도로 요란한 그 소리를듣고도 마냥 편히 잠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긴 편히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런 만큼 깊은 잠에빠져든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다음 기차는 7시에 있었다. 그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부리나케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견본 모음집은 아직 꾸려 놓지도 않았다. 그런데다가 기분이 별로 상쾌하지 않았고 몸도 그리 거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 P-1

그 기차를 잡아탄다 해도 사장의 불호령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환 녀석이 다섯 시 기차에 맞추어 대기하고 있다가 그가 타지 않은 사실을 진작 일러바쳤을 테니까. 사장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그는 줏대도 사리 분별도 없는 너석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몸이 아프다고 알리면 어떨까? 하지만 이는 지극히 곤혹스러운 일이고 수상쩍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레고르는 회사에 5년간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의료보험 조합의 의사를 대동하고 나타나, 게으른 아들을 두었다고 부모님을 질책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의사의 소견을빌려 어떤 핑계를 대도 묵살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의사가보기에는 아주 건강하면서도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이 경우에 그의 견해가 아주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레고르는 잠을 오래 자고도 여분으로 좀 남아있는 졸린 기운 말고는 사실 몸의 컨디션이 아주 좋았고, 유달리 왕성한식욕마저 느꼈다.
침대에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하고 이 
모든 생각에 잠겨 있을 때-이때 바야흐로 6시 45분을 알리는자명종 소리가 울렸다 그의 침대 머리맡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레고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P-1

마치 한결같이 작용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몰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지배인이 와 있는데도 간밤에 풀어헤쳐 놓아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먼저 아버지를 쳐다본 다음 그레고르 쪽으로 두어 걸음 걸어가더니 치마가 사방으로 쫙 펴지는 가운데 그 속에 푹 쓰러져 버렸다. 얼굴은 가슴에 푹 파묻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방 안으로 도로 밀어 넣으려는듯 적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는 거실 안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는 억센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꺼이꺼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이제 그레고르는 거실로 나가지 않고 단단히 빗장을 걸어 잠근 문짝의 안쪽에 기대어 섰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 위로는 다른 사람들을 건너다보기 위해 옆으로 기울인 머리가 보였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길 건너편으로 마주 바라보고 있고 끝이보이지 않는 짙은 회색 건물의 일부분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병원이었다. 그 건물의 전면에는 벽을 뚫고 창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었다. 아직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눈에 보일 정도로굵다란 빗방울들이 땅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식탁위에는 아침 식사에 쓰인 그릇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세끼 식사 중에 아침 식사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P-1

오히려 그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이젠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며 그레고르를 앞으로 몰아댔다. 그레고르의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느덧 아버지 한 사람이 혼자서 내는 목소리가 더 이상 아닌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정말 더는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문 안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몸 한쪽이 들리면서 그의 몸 전체가 문 입구에 비스듬히 걸리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옆구리가 쏠리는 바람에 심한 상처를 입게되어, 하얀문에 보기 흉한 얼룩이 남게 되었다. 이내 그의 몸이 문에 꽉 끼게 되어, 혼자 힘으로는 더는 꼼짝달싹할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한쪽 다리들은 바르르 떨며 허공에 걸려 있었고, 다른 쪽 다리들은 바닥에 짓눌려 욱실욱실 아파왔다. 그때 아버지가 뒤에서 그를 힘껏 걷어차는 바람에 그는 이제 그야말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방안 깊숙이 날아가버렸다. 아버지가 지팡이로 문을 쾅 닫고 나자 드디어 사방이 조용해졌다. - P-1

밤늦게야 거실의 불이 꺼졌다. 그로 보아 부모님과 여동생은 밤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제사람 모두 지금 조심조심 발끝으로 걸으며 멀어져 가는 소리가또렷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도 그레고르의 방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그는 이제 어떻게 자신의 생활을 새로 꾸려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곰곰 생각해 볼 시간을넉넉히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속절없이 납작 엎드려있지 않을 수 없는 높다랗고 휑한방이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는통 알수 없었다. 그가 무려 5년 동안이나 살아온 자신의 방이건만. 그는 반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린 뒤, 왠지 알 수 없는 가벼운 수치심마저 느끼며 소파 밑으로 급히 기어 들어갔다. 등이 약간눌리고 고개도 이젠 쳐들 수 없었지만 금세 마음이 편안해졌다. 딱 하나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이제 그의 몸이 너무넓적해서 소파 밑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그곳에서 지냈다. 그동안 때로는 얕은 잠에 들었다가 배가 고픈 나머지 몇 번이고 놀라 벌떡 잠이깨기도 했고, 때로는 걱정에 사로잡히거나 막연한 희망을품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의 결과 우선은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 P-1

그 때문에 그레고르도 당분간은 방바닥에 그대로 있기로 했다. 특히 벽이나 천장으로 도망치면 특별한 악의가 있는 걸로 아버지가 곡해할까 봐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이렇게 달리는 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 그는 무수히 많이 다리를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폐가 그리 튼튼한 편은 아니었던 관계로 벌써부터 눈에 띄게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달렸고, 달리는 일에 온 힘을 쏟느라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게다가 머리마저 흐리멍덩해져서 이렇게 거실 바닥을 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구원책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벽으로 달아날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잊고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곳의 거실 벽들은 톱니와 레이스장식으로 가득 찬, 정교하게 세공된 가구들로 가로박혀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 바로 그의 곁으로 휙 하고 가게 던진 무슨 물체가 떨어지더니 그의 앞으로 떼구루루굴러왔다. 그건 사과였다. 곧이어 두 번째 사과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레고르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계속 달아나 봐야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버지는 사과로 그에게 폭탄 세례를 퍼붓기로 작심한 모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찬장 위의 과일 접시에서 사과를 몇 개 꺼내 주머니에 가득 채운 다음, 제대로 겨냥하지도 않고 사과들을 하나씩 던져 댔다. - P-1

조그만 빨간 사과들은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 이리저리 나뒹굴며 서로맞부딪쳤다. 약하게 날아온 사과 하나가 그레고르의 등을살짝 스치고 지나갔지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미끄러지며굴러떨어졌다. 반면에 바로 뒤이어 날아온 사과는 그레고르의 등에 정통으로 박히고 말았다. 자리를 옮기면 깜짝놀랄 만큼 믿을 수 없는 통증이 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레고르는 몸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마치 못 박힌 듯 꼼짝할 수 없다는 기분과, 모든 감각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만 그 자리에 쭉 뻗어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자기 방의 문이 확열리더니 비명을 지르는 여동생 앞으로 어머니가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오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기절한 어머니가 숨쉬기 편하도록 여동생이 옷을 벗겨 놓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냅다 달려가는 도중에 끈이 풀린 속치마들이 바닥으로 하나둘 흘러내렸다. 이윽고 어머니는 그 치마들에 걸려 비트적거리며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어 그를 껴안으면서, 아버지와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더니ㅡ하지만 그러는 중에 그레고르의 시력이 벌써 가물가물해지고있었다 ㅡ두 손으로 아버지의 뒷머리를 부여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그레고르를 살려 달라고. - P-1

그레고르는 이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쩌다 차려놓은 음식 옆을 지나다가 장난삼아 한입 깨물기도 했지만 몇 시간 동안이나 그대로 물고 있다가 대개는 다시 뱉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의 방이 달라진 게 슬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바로 방의 변화에 순응하게되었다. 식구들은 마땅히 다른 곳에 둘 수 없는 물건들을 이곳에 갖다 두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 그런 물건들이 이곳에 자꾸 쌓이게 되었다. 집의 방 한 개를 세 명의 하숙인에게 세를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진지해 보이는 이 신사들은 그레고르가 언젠가 문틈으로 내다본 바에 따르면 세 명 모두 털보였다 지나칠 정도로 정리 정돈에 신경을 썼다. 자기들 방 말고도, 이제 이 집에 살게 된 처지였으므로 집안 구석구석, 그러므로 특히 부엌의 청결 문제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이들은 쓸데없는 물건들이나 더러운 잡동사니를 보면 도저히 참지를 못했다. 그것 말고도 이들 세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쓰던 살림살이를 갖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물건들이 필요 없게 되었는데, 그것들을 팔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내다버릴 수도 없었다. 이런 물건들이 죄다 그레고르의 방으로-옮겨졌다. 그런 것 중에는 부엌에서 쓰던 재 담는 통과 쓰레기통도 있었다. - P-1

아버지는 두 손으로 허공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안락의자로 비틀비틀 걸어가더니 그곳에 푹 쓰러져 버렸다. 그는보통 때처럼 몸을 쭉 펴고 저녁잠을 자는 듯이 보였지만, 머리를 계속 심하게 끄덕이는 모습으로 봐서 결코 잠을 자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레고르는 그때까지 계속 하숙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켰던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감에다 너무 많이 굶주린 탓에 몸이 탈진했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들 곧 자신 때문에 폭발하여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두려움을 확실히 느끼며 다음 순간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릎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이 그녀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무릎에서 스르르 홀러내리며 꽈당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그는 그 소리에도 눈조차 꿈쩍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은 이렇게 말하고 손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서곡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안되겠어요.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전깨달았어요. 저런 괴물을 오빠의 이름으로 부를 순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우리는 그동안 저것을 돌보고 참아 내기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봤어요. 우리를 조금이라도 비난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 P-1

그레고르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어두운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내 그는 자신이 이제 더는 꼼짝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게 의아하게 생각되기는커녕 오히려 지금까지 정말이지 이런 가다란 다리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기분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비록 온몸이 아프기는 했지만 점차 약해지다가 결국 씻은 듯이 사라질 것 같았다. 등에 박혀 썩어 버린 사과며 부드러운 먼지같은걸로 완전히 뒤덮인 그 주변의 염증 부위도 어느덧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가족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감동과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가 사라져야한다는 생각은 여동생보다 아마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다. 이렇게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 탑시계에서 새벽 세 시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의 세상이 온통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아직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고꾸라졌고, 그의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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