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 대답을 찾아낼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나는 그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 P12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고, 종내에는 스스로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물 외의 어떤 것도 먹으려 하지 않는 주인공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사실상 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와 인혜 자매는 소리 없이 비명을지르며, 악몽과 부서짐의 순간들을 통과해 마침내 함께있다. 이 소설의 세계 속에서 영혜가 끝까지 살아 있기를바랐으므로 마지막 장면은 앰뷸런스 안이다.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 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그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 - P13

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이 소설에서, 오랫동안죽음의 그림자와 싸워왔던 주인공은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 힘을다해 배로 기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번째 장편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말을 잃은 여자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각자의 침묵과 어둠속에서 고독하게 나아가다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소설을쓰는 동안 나는 촉각적 순간들에 집중하고 싶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손톱을 바싹 깎은 여자의 손이 남자의 손바닥에 몇 개의 단어를 쓰는 장면을 향해 이 소설은 느린속력으로 전진한다. 영원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 - P14

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부분을 들여다보는 것-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다음의 소설을 상상했다. 「희랍어 시간』을 출간한 후 찾아온 2012년의 봄이었다. 빛과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P15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5월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 P18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 P19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나는 그 망자들에게,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싶었기에, 당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곳이었던 상무관에서 첫장면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다섯 살의 소년 동호가 시신 - P20

들 위로 흰 천을 덮고 촛불을 밝힌다.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같은 해 6월에 꿈을 꾸었다. 성근 눈이 내리는 벌판을걷는 꿈이었다. 벌판 가득 수천수만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고, 하나하나의 나무 뒤쪽마다 무덤의 봉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에 물이 밟혀 뒤를 돌아보자,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에서부터 바다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다 이 무덤들을썼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래쪽 무덤들의 뼈들은 모두 쓸려가버린 것 아닐까. 위쪽 무덤들의 뼈들이라도 옮겨야 하는 것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지금. 하지만 어 - P22

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에게는 삽도 없는데, 벌써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 아직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이 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기록한 뒤에는 이것이 다음 소설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어떤 소설일지 아직 알지 못한 채 그 꿈에서 뻔어 나갈 법한 몇 개의 이야기를 앞머리만 썼다 지우기를반복하다가, 2017년 12월부터 이 년여 동안 제주도에 월세방을 얻어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바람과 빛과 눈비가 매 순간 강렬한 제주의 날씨를 느끼며 숲과 바닷가와 마을 길을 걷는 동안 소설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지는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며, 언어로치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잔혹한 세부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간 『작별하지 않는다』를출간한 것은, 검은 나무들과 밀려오는 바다의 꿈을 꾼 아침으로부터 약 칠 년이 지났을 때였다. - P23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몇 권의 공책들에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

역사 속에서의 인간과 우주 속에서의 인간.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이 소설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의 여정이 화자인 경하가 서울에서부터 제주 중산간에 있는 인선의집까지 한 마리 새를 구하기 위해 폭설을 뚫고 가는 횡의길이라면, 2부는 그녀와 인선이 함께 인간의 밤 아래로 - P24

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시간으로, 심해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의 길이다. 마지막 3부에서 두 사람이 그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밝힌다.
친구인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넘겼다가 다시 건네받듯함께 끌고 가는 소설이지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진짜주인공은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 장례를 치르고자 싸워온 사람,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사람, 고통을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 평생에 걸쳐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와 온도로 끓고 있던 그녀의•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묻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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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 산 지 다섯 해가 지났다.
풀밭의 살림을 일궈 풀과 산다.

풀은 연하게 소생하고, 힘줄처럼 억세지고
가을에는 노래를 짓는다.
깡마른 얼굴로 눈보라가 지나가는 걸 본다.
나는 풀 아래에서 일어나고 풀 아래에 눕는다.

풀은 울고, 웃는다.
풀은 어디로부터 와 이 세계를 푸르게 흔드나.

어느 날은 앞이 캄캄한 안개 같고,
어느 날은 막돌 같은 내게
풀이 있으니, 풀이 되었으니
반딧불이 같은
시혼(詩魂)은 날아와 살아라.

2025년 5월
문태준 

작약꽃 피면


작약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듯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레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 P12




풀을 뽑으러 와서
풀을 뽑지는 않고

보고 듣는
풀의 춤
풀의 말

이러하나 저러하나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수줍어하며
그러하다는
풀의 춤
풀의 말

기쁜 햇살에게도
반걸음
바람에도
반걸음

풀을 뽑으러 와서
차마 풀을 뽑지는 못하고 - P13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굼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속에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 P14

귤꽃


내 몸은 귤꽃만했지
울음도 미성(美聲)을 지녔었지
어머니는 내 배냇저고리를 개켜 옷장 깊숙한 데에 넣어두셨지
언젠가 옷장을 열어 보이며 말씀하셨지 
얘야, 이 깨끗한 옷을 잊지 마렴 - P15

제비는 내게 말하네


사월이 되어 제비는 그제 내 집에도 돌아왔네
제비는 돌아와서 말하네
당신의 처마를 다시 빌려주세요
제비는 오늘 내게 말하네
처마 아래 목우(木牛)처럼 서 있는 내게 
말하네
당신의 부서진 걸 고치세요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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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경숙의 글쓰기를 두고 가슴에서 퍼내듯 쓴다고 하는 것은 그런 정황을 전하려는 것이며, 다른 작품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되풀이해 읽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같은 연유일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의 누에넌 시절 초기작으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모습을 그리려고 애쓰던 무렵의 작품이다.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려고 평소에 잘 알던 농부 가족을 한 명씩 따로 마흔 번 이상 그리면서 인물의 표정들을 익혔다. 다섯 명의 농부가족이 등불 아래 식탁에 둘러앉아 찐 감자를 먹고 있는 저녁식사 자리의 광경은 이 무렵 고흐의 특징이던 회색과 갈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고 고흐는 아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신경숙의 단편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디킨스와 밀레와 에밀 졸라에 심취해 있던 그 무렵 반 고흐의 인민적 열정에서는 ‘비켜서‘ 있으나, 결국은 사위어가는 말년의 아버지를 간병하는 화자의 기억을 통하여 세상살이의 회한과 연민을 그려낸다.
- P64

 처음 읽으면서는 그냥 지나쳤던 아슬아슬한 복선들을 다시 읽으면서 확인한다. 남편은 그녀가 읽은 추리소설의 남편처럼 연쇄살인범일지도 설마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관계의 가장 압축된 상징이 부부라면 서로는 서로의 피사체일 뿐이다. 각자의 존재는 상대에게 투영된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또다른 자기를 간직한다. 따라서 내가 알고있다고 여기는 ‘너‘는 ‘바라보는 거리‘가 만든다. 결론적으로 「빈집」은 매우 치밀하고 냉정한 작품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끔찍한 존재의 고독을 무심한 듯 드러내고 있다.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고 대학까지 가르치고 취직해서 분가시켰던 어느날, 김인숙이 나와 통화를 하다가 "이젠 시집가야겠어요"라고 농담처럼 던진 말이 쓸쓸하게 귓전에 남아 있다. 이 단편소설을 읽으니 그가 엄마로서뿐만이 아니라 작가로서도 이미 고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92

1980년대의 급진적인 혁명의 열기는 또한 맞춤하게 베를린장벽붕괴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급속하게 냉각된다. 이들 분열의 갈등은 변혁운동의 주체가 이제는 냉정히 승인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역사적 진실의 진전이란 언제나 지상의 시간적 제약 때문에 의미를 부여했던 기호와 따로 떨어져서 뒤늦게 체험된다. ‘그러한 시차에 둔감한 모든 진보의 기획은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지된 시간의 다른 이름인 역사의 종착점을 향해 눈먼 질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깨달음은 뒤늦게 오지 않던가. 지상의 무상한 시간을 견디고서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는 것들을 알아보는 그 기억의 힘을 결코 버릴수 없다는 것이, 공지영의 단편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의 주제이기도할 것이다.

어디선가 듣고 그럴듯하다고 여겨온 이야기가 있다. 장님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두려워서 마당 밖으로는 절대로 나가지 않고방안이나 익숙한 공간에 머물러 있고, 또다른 하나는 낯선 장소나 건물속을 과감히 돌아다니는 부류다. 그래서 후자는 무수히 부딪치고 넘어지고를 거듭하여 무릎과 정강이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다. 작가로 치면 공지영이 그런 이가 아닐까.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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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 P40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P41

가재미 2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 P42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집으로 돌아오다 - P43

가재미 3.
ㅡ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 P44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지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 P45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 P64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P65

꽃이 핀다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이면 좋다 - P80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날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평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 P114

시인의 말

헤어졌다 만났다 다시 헤어졌다.
손 놓고 맞잡는 사이
손마디가 굵어졌다.
그것을 오늘은 본다.

울퉁불퉁한 뼈 같은 시여,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구나.

2006년 여름 행신동에서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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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慕
ㅡ물의 안쪽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齒)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볕처럼 살다 갔으면
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
내가 예전엔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 P11

수련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 P12

바깥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력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 P20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 P21

극빈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들라고 내준 무릎이 - P22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P23

벌레詩社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亭子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올 한올 다 끄집어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 P26

묽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 P32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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