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운무(雲) 속에 부유하듯 아이의 형체는 있는데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 어쩌면 뚜렷하지 않은 아이의 형체, 그것은 기화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였는지 모른다.
"유섭이는 지금 북경에 있지요. 내가 데리고 있다가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아이가 좀 유약한 편이지만머리가 좋고 학자형이라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상현은 그 말을 귓가에 흘려듣는다.
"내게는 그 애 하나 건져낼 힘밖에 없었지요."
무거운 바퀴가 가슴 위를 지나가는 것 같다. 다리가 뻣뻣하게 저려오는 것 같다. 뜨거운 것이 상현의 눈앞을 가린다. 죄의식이 괴물같이 달려든다. 어머니를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그러나 상현은 버렸다기보다 그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들은 뿌리를 가진 식물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그들은 존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은 늘 아픔보다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그들 생각을 안 하려는 것이었다. 기화에게도 그랬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화, 그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에 대한 기분이 그러했었다. 타인같이 연관이 없고 모르는 존재로 치부하려고 했었다. 한데 사태처럼 무너져서 덮쳐씌우는 아픔과 연민을 상현은 이 순간 감당을 못한다. 상현은 자기 자신 속에 부성애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을해본 일이 없다. 부성애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찌르는 이 감정은 부성애하고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짙다. - P269

방학을 며칠 앞두고 동경서 서울로 간 환국이는 어머니와 합류하여 서대문 형무소의 아버지 길상과 면회를 했다. 동대(東大)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법과를 지망하여 조도전(早稻田)예과에 입학한 환국이는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와 첫 면회를 했었고 여름 방학 귀국길에, 그러니까 두번째 면회를 한 셈이다. 삭막한 그 거리, 붉은 담벽에 여름 태양이 튀고 걸레처럼 후줄근해진사람들이 오가던 그곳, 옥중에 있는 사람도 물론 그러했겠지만 어머니와는 또 다르게 환국은 형무소의 철문을 나서면서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절대적인 존재, 환국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독립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환국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핏줄의 부름이며 어릴 적에 뇌리에 박혀버린 그 모습, 그 음성이 절대적인것이다. 그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한층 강하게, 굳게 각인된 것처럼마음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체취 같은것을 환국은 느낀다.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 바람 부는 음지에서 환국이는 오돌오돌 떨듯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손 한번 마주잡아볼 수 없던 그 짧은 시간, 갈증이 난다. 혀끝이 굳어진 듯 할말을 못하고 오열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던 그 짧은시간, 아버지의 눈동자만이 심장을 태우는 것 같았던 짧은 시간이었다. - P285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전에 머문흰새 한 마리.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는, 그때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환국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두 손 위에 눈을 떨어뜨린다. 창백한 손이다. 창백한 손에, 푸른정맥이 내비치는 투명한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샛파란 비취 반지에 눈이 머문다. 물방울 같은 짙은 녹색의 보석이 흰 모시 치마 위에서 어머니의 성품같이 고귀하게 보인다고 환국은 생각한다. 푸른수전과 흰새 한 마리, 눈물의 응결 같은 푸른 보석과 어머니의 하얀 모시옷. 환국은 눈길을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손 안에 물이흘러버리듯 만남의 그 격렬한 시간은 가고 없다. 차창 밖의 시시각각 날아가버리는 연변 풍경 같은 것인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다시 맞이하는 풍경, 철로 양켠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듯 석축이계속된다. 청회색의 그 돌 빛깔에서 어찌 갑자기 아버지의 가슴팍을 느끼는 걸까. 레일을 구르는 기차 바퀴 소리는 간단없이 정확하게 울린다. 그 바퀴 소리를 한꺼번에 잡아젖힐 수는 없는 것일까.
세월이 그냥 주렁주렁 끌려와서 당장에라도 옥문이 활짝 열려질수는 없을까. - P286

유창한 일본말, 거칠 것 없이 내어뿜던독침과도 같은 말이며 호탕한 웃음, 그는 완전히 강자였었다. 붙잡히면 놓여날 것 같지 않았던 질기고 거센 분위기, 숨도 쉬지 않고나락으로 몰아붙일 것 같은 집요함.
‘잘했다! 천안서 내리기를, 아암 잘한 일이고말고‘
김두수는 세상 참 우습구먼, 했었다. 아닌게아니라 세상 참 우습다. 악당과 악당이, 묵은 인연이 얽힌 악당과 악당이 하필이면 기차속 마주보는 좌석에서 해후를 했다는 것은 신기하기보다 우스운일이다. 조준구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실상 두 사내는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 미칠 필요도 없는 범위에 있는 인간들이다. 다만그들은 스치고 갔을 뿐이며 부산까지 동행했다 하더라도 스치는관계에서 끝날 인간들인 것이다. 유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무슨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위에 긴 여행이요, 여행의 목적도 좋았던 것이 아니어서 김두수는 짜증을 달래보았을 뿐이며언동의 잔인함은 그의 일상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길 없는 이들은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 P326

사람들은 밤을 보내기 위하여 이런저런, 깊은 생각 없이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나이를 봐서는 더 살아야겠지만 호상이라 할 수 있는 상가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오랜 병고 때문에 용이 머지않아 죽을 것이란 사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병고말고는 용이 만년이 비교적 풍파 없이 조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 가슴에 못질을 한 일도 없었으며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어딘지 도인(道人)같이 표표했던 그의 일상은 사람들에게 병고로 빚은 음산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 P398

민족의식 없이, 거의 동족같이 상종해온 오가다 지로, 그의 결점까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보아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동생같이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했던 오가다가 갑자기 흉물같이 압도해온다. 송충이같이 징그러운 존재로 의식을 점령해온다. 이민족, 정복자, 거대한 발바닥으로 강산을 깡그리 밟아 뭉개는 괴물. 인성은 머리를 흔든다. 그런 악몽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듯이. 누이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맺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결혼을 아니 하겠다는 인실의 감정 그 자체 때문에 오가다는 돌연 괴물로 변신한 것이다. 판단이나이해나 사려가 끼여들 여지 없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가조차 떠오르지 않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만이 아우성이다. 남자들은 더러일본 여자와 관계를 맺었고 인성도 그런 사내들을 몇 보아왔다. 물론 바람직한 일로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격렬한 치욕과 혐오감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저 북만주 땅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병(兵)에게 능욕당한 조선의 여인들이 자결로써 생을 결산한 사건들은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는데.
한동안 오누이는 대좌한 채 침묵을 지킨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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