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형 만나기 전에 나를 따라가는 거다. 구경하러 가자는 것만은아니야 뭐 그렇다고 우리랑 같이 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 하자는대로"
"그렇지만."
길상은 한복의 눈을 똑바로 본다.
‘우짜믄 저렇게도 눈이 깊으까‘
한복의 가슴에 서늘한 것이 와닿는 것만 같다. 범치 못할 위엄과 덮쳐씌우는 것 같은 압력, 평범한 대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 한복의주변을 몇 겹씩이나 감아올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당장에라도 자기 몸뚱이가 낚싯대에 걸려서 올라온 잉어같이 파닥거릴 것만같다.
"그곳에 가면 너는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다. 너의 형을 네 마음속에서지우기 위해서도 거복이를 만나기 전에," - P296

길상은 허름한 양복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었다.
"담배 피우나?"
"안 피웁니다."
손등에 대고 톡톡 치다가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집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확실히 길상은 많이 변했다. 평사리 마을에서 보고 처음 만나는 한복에게는 한 번의 변화겠으나 길상의 변화는 두 번이다. 얼마간 냉소적이며 비꼬였고 자기 모순 속에 허우적거리던 용정서의 전반기에 비하면, 그런 모순과 갈등과 열등감은말끔히 헐리어지고 없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때로는 나약했던 면도 없어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은 힘이었다.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힘, 한복은 바로 그 힘에 압도당하고 있는것이다. 화살같이 돌아가고 싶어한 마음의 위축을 느낀 것이다. 힘이라고 집어내진 못하였지만 깊은 눈이라 했는데 그 눈의 깊이는사색에서 오는 깊이는 아니었다. 의지로써 뛰어넘고 시련을 극복한후에 오는 깊이, 의지의 깊이, 그것은 힘이었다. 그리고 포용할 수 - P296

있는 넓이였다. 평범한 대화에 격렬하지 않은 어조는 격렬한 감성, 추상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온 그 두 가지의 융화, 현실과의 융화였던 것 같았다. 기름기 없이 바삭바삭해 보이는 얼굴에 가끔 지나가는 미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형님은 가족들 보고 싶은 생각 안 합니까?"
한복은 길상을 쳐다보다가 뇌듯 물었다.
"보고 싶지. 안 보고 싶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그러나 참을 만하다. 고생은 안 하고 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 같으믄,"
"너 같으면 돌아가겠나?"
"하기는 내일 일을 누가 아냐. 안 돌아간다고 장담하는 것도 우습지, 허허헛....." - P297

"어릴 적부터, 예, 어, 어릴 적부터 그랬지요"
"두수가 그렇다는 것을 물건 생각하듯 해야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의외로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 형제니까 어렵겠지만 나하고너하고는 다르다. 그렇게 갈라놓고 보아 이번 여행은 너에게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한결 마음이 편할 거다."
길상은 밝게 웃었다. 웃음은 화려했다. 햇빛 아래 보는 그의 얼굴이 만주 벌판의 바람과 눈과 끝없이 오가는 행로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키가 껑충하니 커 보였다. 머잖아 등이 좀 굳어질지도 모른다. 한복은 새삼스럽게 그러한 길상의 모습에 다정한 것을 느꼈다. - P299

"최참판댁 사위라서?"
"안 그렇십니까?"
"어떻게 된 사위냐."
"......"
"가난한 것도 답답하고 사람의 대우를 못 받는 것도 답답하다. 너는 그 두 가지에서 다 답답한 사람이다."
"예. 두 가지가 다아, 답답할 정도가 아니지요."
"우선은 내 나라가 남의 치하에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많은 것을 착취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는다. 내 것 주고 빌어먹는 격이지."
"나는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부터 개돼지보다 못했었소."
"그 말 할 줄 알았다."
"누굴 탓하는 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탓을 보고 원망하겠십니까. 사람 대접 못 받는다고 해서 나는 아우성도 칠 수 없었습니다. 통곡도 못해보았십니다. 할 수 없었지요.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이니께. 형님, 나는 이대로가 좋십니다. 문둥이는 문둥이니까요. 문둥인 줄 알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기지요. 형님도 용정인가 거기서 비슷한 말씀 하지 않았소? 거복이형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나보고 가겠소."
"형님."
"내가 두만강을 넘을 때 무신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번의 심부름은 살인자인 아버지와 매국노인 형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을했지요." - P303

"한복이 이놈아!"
별안간 소리를 지른다.
"사내자식이... 누가 너더러 일하라 했냐! 하면 좋겠지......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데. 그러나 아무도 너 목덜밀 잡고 끌어내지는 않아. 마음이 가야 발이 가고...... 크게는 독립이다. 크게는 말이야. 그러나 옛날로 돌아가자는 독립은 아닌 게야. 두메산골에 가서 나뭇짐을 지더라도 가난하고 사람의 대접을 못 받는 이치를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두 사나이는 결투라도 벌이듯 어둠 속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목에서 소용돌이칠 뿐, 해돋는 시각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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