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소설들은 작가의 뜻에 따라서 인물이며 사건이며 정황이 설정되고 존중되다가 그 운명까지도 규정된다. 그런데 『土地는 이와다르니 사람만이 아니라 나는 새와 기는 짐승이며 이름없는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가지고있는 ‘생명의 길‘을 그 생명의 이치에 좇아 조심스럽게 따라가주고 있을 뿐이다. 지극한 생명존중의 사상이다. 이 극진한 생명사상에 의하여 바위를 만나면 밑으로 스며드는 개울이 되고 산을 만나면 품에 안고 감아도는 강물이 되다가 이윽고는 대해(海)로 나아가는 朴景利 선생의「土地』를 가리켜, 진정한 대하소설(小說)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진실로 여기에 있음인저.

金聖東 作家 - P-1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간수의 눈을 뒤통수에 느끼며 서희는 형무소를 나왔다. ‘일순간만 같은 길상과의 대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바라본 짧은 시간, 목이타던 시간, 만남은 빗방울이었던가. 언제나 그랬었지만 사막을 걷듯 서희는 언덕길을 내려온다. 일체를 차단하고 만 높은 담벽, 붉은 벽돌의 담벽과 서대문 종점의 우중충한 풍경은 인생의 종말같이 서회 마음을 눌러지른다. 이곳의 풍경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늘 잿빛이었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죄인들 가족의 마음과 같이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빛이 있다면 그것은 재소자의 건강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옥색 명주 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겨울을 어찌 날꼬?‘ - P11

남편에 대하여 원망과 존경도 없었다. 그리움도 없었다. 다만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절대적인 관계, 현재의 상황만이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온다. 서희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남편의 눈빛을 생각한다. 눈에 담긴 빛의 함량(含量)은 어느 만큼이든가. 그것은 생명력을 측량해보는 것이기도 했다. 잘 견디고 있는가. 잘 견디어낼 것인가. 길상의 눈빛은 서희 자신의 눈빛이었다. 그쪽에서 빛나면 이쪽도 빛이 난다. 그쪽에서 못 견디면 이쪽에서도 못 견딘다.
종점에 종을 땡땡 울리며 전차가 온다. 전차는 멎고 그곳에서 을씨년스런 조선의 백성들이 쏟아져내린다. 암석으로 깎아지른 산둥성이의 가난한 주민들도 있겠지만 형무소를 찾는 어두운 얼굴들이더욱 많으리라. 잿빛 산과 언덕 위를 흐르는 흰 구름, 서희 입에서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 P12

존경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석이도 안다. 그러나 석이 마음속에는 반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투하고는 다른 감정이다. 기화를 깊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그쪽에서 잘랐다. 그것은 사내의 의지였는지 모른다. 기생의 처지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발길을 끊었을 때도 그러려니 무심하던 그때의 기화도 상기된다. 만일 서의돈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뜻을 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마찬가지로 기화는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석이는 생각한다. 명문의 후예들, 선비의후예들, 그들에게 애정이란 이른바 풍류에 불과한 것이었을 테니까. 또 기화는 기생이었으니까. 풍류와 기생의 당연한 결과였는지모른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의돈은 기화에게 미쳤다.
바로 그 미친 상태에서도 발길을 끊었던 서의돈의 냉정함에 석이는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통틀어 양반들의 냉정함이요 기생이나 서민들에 대한 근본적 모멸이기 때문에 석이는 서의돈에 대하여 순수한 존경을 바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서의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석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기화를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교 교사와 기생, 일가의 가장과 기생, 어떤 시기가 닥치면 자신도 결별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진실을 희생해야 하는것은 모순이다. 하물며 평정을 위해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모순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며.... 약자를 희생시켜온 것이 대부분의 도리가아니었더란 말인가? 사내답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두고 사내답다 해오지 않았던가?‘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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