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백성들인데 그런 말은 좀체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경찰관 아니면은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소이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있다는 선일여관에 대해서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는 떠났다. 삼월말의 철도 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 차기 때문에 봄은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환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었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實證)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P179
정윤이나 숙희는 삼호실 환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환자 쪽에서 불만이 많아 광태를 부리기 때문인데, 박의사 역시 이색적인 환자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의사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복종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매달리는 눈빛, 심약한 미소, 혹은 겁먹은 반항, 그러나 삼호실의 환자만은 의사의 권위 같은 것은 서푼짜리도 못되었고 당당하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수틀리면 행패부리겠다는 늘 그런 자세인데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적에도 입에서는 계속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왔고 눈물을 흘릴적에도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시위요 저주요 협박이었다. 신에게조차 날 살려내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아집을, 그러나 박의사는 그 앞에서 서글프게 웃고 만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윤과 숙희는 번번이 끔찍스럽다고들했다. "삼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숙희에게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박의사는 회전의자를빙그르르 돌리며 "내일이라도 퇴원하는 것은 무방하니까 가족이 잘 설득해보슈." "그렇게 하겠습니다." - P200
임이네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비바리의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쉰다. "오오냐!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동 땅에 그놈의 인사 살아 있는 동안은 내 저승차사 애목을 물고라도 안 죽을라 캤더마는,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늘 밑에 낯짝 치키들고 댕길긴가 어디 두고보아라!" "어머니!" 보연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홍이는 잠자코 입원실을 나간다. "상의아버지! 상의아버지!" 보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홍이는 급히 나간다. 이삼 년 동안, 만 이 년인데, 그 동안 임이네는 병으로 굿을 쳤다. 며느리를 두고 안 들어올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 하여 굿을하고 보연이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했다.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 좋다는 한의는 다 찾아다니며 법석을 피웠다. 심지어는 새끼 낳은 고양이의 안태까지 뺏어다가날것으로 먹었을 지경이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도 지나놓고 보면 홍이가 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급성복막염도 아닌데 방금 죽어가듯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홍이는 걸으면서, 입원하던 그날 어미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 어깨를 물어뜯던 이빨의 섬찟함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어깻죽지의 남아 있는 아픔과 함께. - P203
그것은 연학이도 느낀 일이다. 철통 같은 비밀, 비밀의 조직, 그것이 아무리 철통 같은 비밀이라 하여도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려면 그만한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그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한번의 폭발마다 조직은 늙어가고 줄어드는데 보충이 없다는 것이다. 줄어들고 늙어가는 만큼 폭발력도 줄어들고 늙어갈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요 환이 머리 하나의 정열로 이끌기엔 지리산은 이미 무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다 막연히 느끼고있다. 환이를 기다리는 마음도 마무리짓거나 아니면 큰 변동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옆으로 퍼져나가야지, 느리게 앞뒤 재는 것이 이제는 안묵힌다. 그거를 형평사운동을 함서 깨달은 긴데 서울서 온 젊은 사람들 얘기를 들을 것 겉으믄 지주와 소작인들이 변동된 때문에, 자작농이 줄고 지주도 줄고 대신 수가 적어진 지주는 땅이 자꾸 넓어지는데, 그 적어진 지주에 왜놈들이 또 끼여든다는 게야. 그뿐인가. 왜놈의 농민들이 합류하게 된께 간신히 소작 자리를 거머잡은 축이 움직이겠나? 쥐꼬리만한 소작지나마 빼앗기고 농촌에서 떨리나간 사람들의 갈 곳이 어딘가. 만주, 일본, 그리고 꾸역꾸역 몰려가는 곳이 도시 공장인데 움직일 수도 있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라 하더마. 일리가 있는 것 걷기도 하고 모릴 것 걷기도하고, 독립운동하고는 우떻게 되는 긴지. 우리 생각을 어떻게 고치야 하는 건지. 다만 이제 동학으론 안 된다. 자리도 없고 사람도 없다. 동학은 낡고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도 무너져가고 있는 기라." - P219
길상을 몹시 닮은 환국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하며 상현은 쓸쓸하게 웃는다. 양반? 뭐 말라죽은 게 양반이냐! 지금, 눈앞에는 그 옛날 하인이었던 사내의 자식이 어느 귀공자 못지않게 슬기를 가득 채운 눈망울을 빛내며 앉아 있는 것이다. 아비에 대한숭배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비, 한치의 의혹도 없는 강하고 또강한 핏줄의 연결, 저 슬기로운 눈망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질 않는가.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한 것이 인사(人事)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길상의 얼굴과 안방에앉아 있을 명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또 환국이 아비를 못 보는 형편과 하동서 아비를 못 보는 아들 형제의형편이 같지 않음을, 그것은 깊은 패배, 비애를 몰고 온다. ‘내가 아빈가? 내가 한 여자의 지아비란 말인가? 참으로 거미줄같은 인연이로고‘ - P260
한숨을 내쉰다. 용이의 밤 치는 손은 더욱 빨라진다. 그는 자리에서 뜨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것이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그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 P279
석이는 독길 쪽으로는 가지 않고 강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곧장 걷는다. 걷다가 돌아본다. 유난스럽게 하얀 모래밭을 마치 거미처럼, 게처럼 봉기는 기어가고 있었다. ‘저 늙은이, 나한테 등짝 맞은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할 거라‘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까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휘번덕인다. 밤에도 쉬지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석이는 야무네와 용이 기다릴 것을 생각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아비 정한조가 낚시질하던 낚시터까지, 그곳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 P314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愛憎)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여장을 다 꾸려놓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에 열리지 않을 벽을 두드려본들 모.슨 소용인가. 눈을 감은 채 환이 싱긋이 웃는다. 여러 해 전부터 진달래꽃의 여인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고리를벗어 시체를 싸고 묘향산 골짜기에 묻어버린 여자, 묻고 나서,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 바람인 것이며,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있는가고, 환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의 그 밤하늘.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 P371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걷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 쓰러지면은 꿈속에서 오열하였고 꿈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처음에는 번번이 꿈속에서 울었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리고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꿈속의 울음을 잊었고 여자도 잊었다. 지금은 꿈속도 아니요 진달래의 눈보라, 붉은 빗줄기, 구름 바다의 환각도아닌데 이는 눈을 감은 채 오열한다. 눈물도 아니 흘리고 몸짓도 아니 하면서 이는 통곡하는 것이다. 만주 벌판 마적단에 사로잡혀 두목의 두호를 받으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우스꽝스런 세월, 상해(上海)거리를 아편쟁이 거지처럼 헤매던 세월이며, 포부 - P371
는 있었으나 그 세월은 이미 가을이었다. 풀도 시들고 열매도 거두어들여버린 황막한 가을이었다. 연해주를 건너가 권필응을 만났을때 환이는 더욱더 짙게 가을을 느꼈다. 권필응의 주름진 얼굴에서지난날 보았던 이동진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 수많은 독립투사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운명의 그늘이 권필응만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없는데 발바닥 몇 치, 안좌할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할 때 냉엄한 것은 인심 탓이 아니다. 망명의 풍상은 눈물을 마르게 하고 사정(私情)은 누구나가 죽이고왔으니 말이다. - P372
서참봉댁에서 나오는데 임명빈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머리통을 땅속으로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두 손을 활짝 쳐들고 그 압력을 떠밀고 싶은 충동, 이민족(異民族)의 힘이 얼마나 비정한가를 가슴 저리게 실감한다. 은행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형무소로 달려가는 초라한영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 땅내나라에서 어찌하여 숨도 한번 크게 못 쉬는 행랑아범의 신세가 되었더란 말인가.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시시각각 주변을 살펴야하는 마음의 무게는 질병치고도 가장 무서운 질병인 것만 같은생각이 든다. ‘이러다간 다 미치겠다‘ 미쳐 있기보다 미칠 것을 예감하는 고통, 그런 뜻에서 차라리 옥에 갇힌 사람, 뛰는 사람, 목적이 멀더라도 목적을 향해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 편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까.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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