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부정과 비리가 알려져도 그를 비롯해 그의 세력들이 하나같이 오만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고 오히려 화를 내는 꼴을 보면서, 저들이 장기 집권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배경이 아니라면 이렇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저렇게까지 안하무인일 수가 있을까 의심을 했고 그래서 ‘계엄을 생각하는 것 같다‘고 무심코 말하고 다니면서도 나는그것이 내가 겪은 불행에서 비롯된 불안이기를, 타인의 기록에서 내 기억으로 이동한 기우이기를, 방정이기를 바랐는데.


오후 여덟시 오십팔분
단편 원고를 이어 썼다.
김보리가 상심한 채 퇴근해 돌아왔다. 회사 
동료에게이번 계엄의 위법성을 설명하다가 이유를 모르게 언짢아졌다고 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했다고 한다. 말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벼워지고 하 - P43

찮아지는 것 같았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한다. 나도 겪곤하니까. 그 무서운 일을.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 사람의 무언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그 일을.

김보리도 나도 건강이 좋지 못하다.
입술과 눈과 위장에 번진 염증 때문에 소염제, 항생제, 해열 진통제, 소화제를 계속 먹고 있다.
새벽에 자려고 누웠다가 숨을 쉴 수 없어 엎드려 있었다.


12월 16일 오후 11:03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의 말을 지난 뉴스에서 보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게 정치의 출발"
깊은 모욕감. - P43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네시 삼십구분
광주는 어떻게 견뎠을까. 1980년 이후로 
그 혐오와 오욕을, 타지의 이웃을 어떻게 견뎠을까.

어제 일기를 정리하지 않았다.
메모로만 떠도는 기억들.
하루에 일어난 일을 당일에 기록하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요즘은 늘 어제 일기를 쓴다. - P44

이 말과 얼굴이 생각나 걷다가 울었다. 내게도 그 얼굴이 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물을 나눠주며 말하다가 울음이 터진 그처럼 내게도, 불시에 그 밤이 떠오르면 생생하게 그렇게 갈라지는 얼굴이.
그와 내가 같은 날 刀에 베였다.
우리뿐일까.

사는 곳도 이름도 얼굴도 다른 이 많은 사람이, 그 밤에 다 같이 베였다. 국민의힘이 2016년 탄핵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호소할 일인가.

계엄 이후로 보름이 넘었다.
보름 만에 윤석열의 지지율이 계엄 전과 같은 24퍼센트에 도달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와중에 지난 12월 6일, 음력으로는 11월 6일, 육십간지로 풀면 갑진년 병자월  - P46

갑진일, 청룡을 뜻한다는 ‘갑진‘이 둘이나 있는 날에 장어56킬로그램이 용산에 반입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걸 멍하니 읽었다.

그래도 이제 좀 차분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렌 네미톱스키의 뜨거운 피(빛소굴 2023)를 오랜만에 몰입해 읽었다.
처음엔 좀 심심하고 무료한 소설이라고 느꼈는데 끝까지 읽고 다시 읽으니 전혀 다른 농도의 이야기가 된다. 다 읽고 두번째 읽을 때에야 비로소 열리는 책.


오후 열시 이분
한덕수 권한대행이 양곡법 등 여섯개 법안을 거부했다.
그가 이 법안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윤석열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지가 지금은 너무나 중요한 조짐이고 지표였는데. 윤석열을 탄핵시키고 헌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분명 부정적 조짐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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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7-15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라지기(대통령)를 새로 뽑았습니다만,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여러 장관 후보자 뒷모습을 하나하나 보자니, 우두머리만 갈아치운다고 해서는 하나도 안 바뀔 이 나라 민낯이지 싶습니다. 더구나 예전에 ‘아픈이(피해자)’한테 ‘피해호소인’이라는 뜬금없는 이름을 붙이면서 놀리던 분들이, 이제는 장관이 되고 싶어서 갑자기 “심심한 사과”라고 하는 일본말을 스스럼없이 들려주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느 쪽에 있건 하나같이 눈을 못 뜬 채 사는구나 싶고요.

우리가 옳고 아름답고 참하게 바라보며 살아가려면, ‘선택적 분노’가 아닌 ‘제대로 짚고 따지는 까칠한 눈’을 뜰 줄 알 노릇이지 싶습니다.
 

-12월 10일 화요일 오후 아홉시 구분
오전에 집수리 기술자가 젊은 수습생을 데리고 왔다. 세면대 수도를 새것으로 바꿔 달았다. 조용하고 꼼꼼하게 일하는 기술자였다. 약속을 바꾼 것은 내 쪽인데 늦게 와 미안하다며 품삯을 덜 받겠다고 했다. 그러지 마시라고, 내 아버지도 기술자라서 품삯은 깎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삼만원이나 덜 받았다.
현관에서 배웅하는데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토요일에 결과가 실망스러워서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현관에 붙은 손팻말을 본 것 같았다. 자기는 처음엔 홧김에 계엄을 선포한 줄 알았는데 매일 나오는 뉴스를 보니 너무 무섭다고 했다. 보통 일이 아니라고. 그렇죠, 무섭죠, 보통 일이 아니죠. 실망했다는 말을 하기는 싫어서 그냥 웃었다. 또 가죠뭐.

쓰기와 읽기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 유튜브에 접속하면 누군가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음악 대신 뉴스를 틀어두고 원고를 본다. 집중이 어려우니 - P24

까 집중을 해야지,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한다.
저녁엔 퇴근하는 김보리를 마중 나간 김에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다. 매운 양념에 비빈 콩나물을 먹고 싶어서비빔메밀을 먹었다. 국수를 먹으면서 랩이 터진 것처럼 욕을 했다. 매국과 내란의 얼굴들, 파렴치며 몰염치가 그네들힘이다. 꼴도 보기 싫다, 곱게 늙어서 더 징그러운 폭력들, 샹, 샹. ‘국가‘와 ‘나라‘를 주제로 열렬히 말하고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보수인가 싶었다. 이 계엄을 옹호하는 입장들을 ‘보수‘라 칭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봉건,
내란, 위헌 중에 골라봐.
"국민들께서도 추운 거리에서 밤을 새우며 탄핵을 외치는데, 저희도 따뜻한 곳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불어민주당 중진 의원 다섯명이 윤석열의 탄핵과 체포를 촉구하며 8일부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국회 앞을 떠나지 못하는 시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취지는 알겠으나 동의할 수 없다. 뉴스를 읽으며 답답해 가슴을 쳤 - P25

다. 국회에 머물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무사가 지금얼마나 중요한가. 당신들만 바라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단식으로 스스로의 몸을 축내는 호소는 저 봉건+내란+위헌 세력에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의 고통에 움직이는 일 없는 이들이니까. 그러니 부디 따뜻한 곳에 있으라. 잘 먹고 잘 자며 스스로를 잘 보살펴달라. - P26

2024년 12월 13일 오후 1:25
독재로 가기 위한 전쟁.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영영 이별할 사건을
오로지
자신들의 범죄를 덮고 사적인 원한을 해소하고 권력을 영영 유지하기 위해서.

‘내란성 위염‘이라는 말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510명이 "윤석열의 퇴진이 국민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길"이라며 어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나도 문득문득 견디기가 어렵다. 계엄 직후만 해도 충동적으로 계엄을 저질렀을 거라는 추측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계엄이었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어제 오늘 사이엔HID 정보사령부 특임대 요원을 동원해 각 분야의 요인을 납치, - P28

암살하려 했다는 제보가 있었고, 군을 움직여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를 국지전을 획책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서 세계대전 발발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화가 난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속이 뒤집힌다. 남의 삶을 조금도아낄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삶을 다 무너뜨릴 막강한 힘을 가졌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럴 수 있을까. 군대를 동원해 사람들 목숨을 이런저런 전선으로 내모는 계획을 세우면서, 사람을 납치해 고문하고 없애라 명령하면서, 수많은 목숨이며 삶을 전쟁에 쓸어 넣을 계획을 세우면서, 그 머리와 가슴에 ‘사람‘이 없을수 있을까. 자신 말고 누구도 피 흘리는 생명체로 보지 않는 마음으로는 그게 될 것이다. 타인의 삶과 고통에 닿는감각이 발달하지 않은 삶, 그럴 의지도 없는 마음으로는 그럴 수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것도 사람, 악귀나 악마 아니고 사람, 내게도 있는 싹. "사람이 하는 일"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주문을 외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한다.
가슴이 답답해 밤 산책을 나섰다가 전광훈 연설을 틀 - P29

어두고 골목을 돌아다니는 노인을 보았다. 삼십분 걷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골목에서 한번 더 마주쳤다. 그 목소리와•말을 뿌리며 돌아다니는 게 그의 산책 목적일까. 어쩌면 나름 거룩한 목적, 선교나 구국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누군가를 죽여,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사이비의 연설은 어쩌다 그노인의 기도이자 신념이 되었을까.

내일 다섯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탄핵 표결이 네시로 앞당겨졌다.
조금 더 일찍 이동하기로 했다.
계엄 이후로 매일 날씨를 확인한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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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그 밤이 살아서 돌아왔다.
경악과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아치던...
믿을 건 TV밖에 없는 것처럼 TV앞을 떠나지못하고 국회로 달려가는 이들을 조마조마 바라보던 시간들이... 황정은을 통해 되살아난다. 천. 천. 히 읽어야겠다.

12월 3일 화요일 오후 다섯시 사십오분
세면대 밸브에서 물새는 걸 발견했다.
집수리 기술자에게 연락하니 다른 집 일을 보고 있어 바로 방문하기가 어렵다며 내가 직접 조치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었다. 내일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단편을 이어 썼다. 한달 뒤 마감엔 탈 없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책상 근처가 춥다. 손가락을 덥히려고 커피를 세잔째 마시고 있다. 어젯밤엔 의성어가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괴로워하는 꿈을 꾸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잠시 뒤져본 흔적일까.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 민음사 2020을 읽기 시작했다.  - P9

도입부에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묘사된 이선 프롬의 고독과 고립에 마음 아팠다. 눈과 고독, 고립된 삶. 내가 아는 겨울을 닮은 이야기들에 마음이 흔들린다. 이번 겨울엔 소설을 많이 읽고 싶다.
번역서 두권을 주문하는 김에 귤을 샀다. 지난달에 백두대간수목원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도 곧 원고로 정리해야 한다. 오늘은 원고지 다섯매를 썼는데 밤에 한번 더보면서 다듬고 싶다.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 P10

12월 4일 수요일 오전 아홉시 십사분
김보리는 출근했다.
네시간쯤 잤을까. 새벽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나도 잤다. 짧은 잠.

오후 열한시 구분
낮에 비상시국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국회 앞으로 갔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몸이 떨렸다.
집수리 기술자에게 연락했다. 오늘 갑자기 외출할 일이생겼다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 주로 다시 약속을 받았다.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로 나가 국회 정문을 통과했다. 날이 맑고 문이 열려 있고 사람들이 아무런 저지 없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평화롭고 선명해 보여 현실 같지 않았다.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국회 계단을 향해 갔다. 사람이 이미 많이 모여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해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다. 국회의사당이 등 뒤에 있었다. - P11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걸 오늘 알았다.)   12월19일 부기

계단을 오르기 전에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 일행이 꼭대기쯤에도 모여 있었나보다. 사회를 맡은 김성회 의원이 맨 뒷자리 사람들에게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플래카드를 내려달라고 말했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 플래카드를 읽으며 배려와 협조를 부탁하는 태도는 우아했지만 그의 지적 이후로 계단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앞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고 뒤쪽을 향해 평화롭게 하자고 쏘아붙이는 사람이 있었다. 고함과 비웃음이 오갔다. 성난 표정으로 돌아보는 앞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평화롭게 하자고 거듭 소리 지르는 그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외치다가 뒤쪽을 향한 말로 들릴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말투로 평화를 요구할까. 수많은 시민을 담은 이 자리가 왜 저 정도 입장과 말을 담지 못할까. 화가 났다. 사람들이 싫었다.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계속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이게 뭐지, 생각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사 - P12

방이 선명해 보였는데 마음이 곤죽이었다. 나만 그랬을까. 모두가 곤두선 마음.
국회의원이든 시민이든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 절박하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나도 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의 탄핵과 구속을 간절히 바라며 서 있었지만, 윤석열과 그가 초래한 국가 상태를 묘사하려고 ‘정상‘과 ‘비정상‘을 반복해 말하는 몇몇 연설은 집중해 듣기가 어려웠다. 이사회의 정상성 기준으로 불편과 부당을 겪는 사람들, 소수자들도 여기 있는데 별 조심성 없이 그 말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선 자리가 따끔했고, 뒤쪽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불편함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래도 되는 시간일까. 2016년 광화문에서 한 생각을 2024년 국회 앞에서도했다.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꼈다.

대회가 끝나고 잔디 마당 곁을 지날 때 앞서 걷는 사람의 코트에 붙은 낙엽을 보았다. 작은 단풍잎들. 털어줘야할까, 하지만 예뻐서 아까웠다. 망설이기만 했다. "털어드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예뻐서 아까워요." 다른 이가 그에 - P13

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기뻤다. 내게 예쁜 것이 그에게도 예뻤다는 게. 웃었다. 간밤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어졌다.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은 오늘 여의도에서 시국대회를 마친 뒤 대통령 탄핵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 P14

12월 5일 목요일 오후 세시 이십구분
원고를 보다가 헬기 소리를 듣고 놀라 베란다로 나갔다.
파주에서 서울 방향으로 날아가는 군용 헬기를 보았다.
그거 한대인지, 더 있는지를 알려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눈물이 터졌다.
원고로 돌아갈 수 없어 일기로 들어왔다.
오늘 뭔가를 쓸 수 있을까.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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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멀리서 바라보는 산동네는 아름답다
언덕을 기어 올라간 집들은 당당하기 성곽 같고
집들을 반쯤 덮은 붉은 장미는 멀리까지 향기를 뿜는다
밤이면 창문마다 별들이 매달리겠지
새벽이면 기우뚱 마을 뒤로 초승달이 지고

골목에 나뒹구는 헌 옷가지가 낯익고
담 너머로 넘어오는 된장 냄새가 반갑다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랫소리가 정답다
개짖는 사이사이 숨죽인 시비까지 귀에 익어

들어가 걸어보면 산동네는 더 아름답다
멀리서도 아름답고 가까이서도 아름답다 - P54

허공


해 지고 날 어두워지니 길이 보인다
밝은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잡초만 어지럽게 자라고
잡초 속에 풀벌레가 숨죽인 길이 보인다

달과 별이 없어 더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잡초도 풀벌레도 잠들어 더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머지않아 내 그림자만 길게 드리울
마침내 그것마저 사라지고 없을
내가 휘적휘적 걸어갈 허공이 보인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허공이 보인다 - P69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는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어
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있다
구석구석 그 소리가 닿을 적마다
우리들의 몸은 전율하고 절규하다가
드디어는 그것을 따라
통째로 밖으로 빠져나온다
한순간 높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폭죽처럼 터져 지상으로 쏟아져

새파란 풀밭에
조각조각 꽃이 되어 흩어진다

해가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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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마을은 강이 있는 산골 마을, 산을 그려주며 내려온 눈송이들이 강으로 간다. 검은 바위 위에도 새들이 지나다니는 마른 풀잎 사이에도 뒤꼍 감나무 꼭대기 까치집에도 홀로사는 산골 사람들의 지붕 위에도 눈이 오는데, 문태준의 시를읽는다. 시집을 다 읽고 눈 오는 마을을 한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 또 시집을 읽고 눈 그친 마을을 한바퀴 돌아도 자꾸 생각이 끊기고 말문이 막혔다. 해가 지고 어둠이 오고, 어둠 속으로 눈발이, 그리고 내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나는 눈보라가 치는 꿈속을 뛰쳐나와 새의 빈 둥지를 우러러밤처럼 울었어요"(「이별」), 태준아, 나는 울기 싫다.
김용택 시인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 P10

첫 기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살이나 되었을까

별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 P11

음색(音色)


시월에는
물드는 잎사귀마다 음색이 있어요

봄과 여름의 물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빛의 이글루인 보름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섞여 있던 초록들은 누구의 헛간으로 갔을까요

나는 갈대의 흰 얼굴 속에 있었어요
마른 잎에서는 나의 눈을 보았어요

얇고 고요한 물, 꺾인 꽃대, 물에 잠기는 석양
그리고 그 곁엔
간병인인 시월 - P12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것을 올려놓지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 P18

봄산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산은 못 견뎌라
봄산은 못 견뎌라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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