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통섭》은 내가 읽은 번역서 중 번역자의 문화(적) 번역, 문제의식, 열정이 가장 잘 표현된 책이다. 융합 혹은 통섭을논할 때 번역자인 최재천 교수와 장대익 교수 이야기를 빠뜨릴수 없을 것이다. 번역은 다른 사회와 나의 현장(Local)을 동시에읽어내는 작업인데 이 책은 그 노고가 역력히 보인다. 번역자들은 몸부림쳤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회에서 《통섭>은 ‘최재천의책‘으로 더 유명해졌다. 나역시 통섭(統攝)이 ‘consilience‘의가장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른 표현을 제안해본다. 바로 ‘섭(攝)‘이다. 섭은 ‘당기다‘ ‘거느리다‘ ‘다스리다‘ 등 통섭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뜻을 - P44

담고 있다. 손(手) 하나와 귀(耳) 세 개가 결합한 ‘‘의 생김새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중 섭)은 소곤거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귓속말을 뜻한다. 그러므로여기에 ‘手‘를 결합해야 한다.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귀에 손을 대어 ‘끌어들이는‘ 일이 통섭인 것이다. 여기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는 소수자의 목소리, 가시화되지 못한 진실, 보이지 않는 현실, 특정한 시각에서만 발명(‘발견‘이 아니다)되는 사실 등으로해석 가능하므로 ‘‘섭"은 멋진 글자가 아닐 수 없다. - P45

여전히 윌슨의 《통섭》에는 명문이 즐비하다. 융합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다음이 아닐까. "과학 이론은 반례들에 직면하면 폐기되도록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이왕 틀린 것이라면, 빨리 폐기되면 될수록 좋다. ‘실수는 빨리 할수록 좋다‘라는 격언은 과학적 실천에서도 하나의 규칙이다. 과학자들도 자신이 만든 구조물과 사랑에 빠지고는 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아니었다. 불행히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평생을 헛수고하는 과학자들도 있다.....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 P47

선구안은 지식 전반, 국가 경영, 사회의 성숙, 개인의 인생 등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비유다. 비슷한 말로는 판단력, 안목, 착목, 문제의식, 질문이 있다. 공동체의 운명은 지도자와 구성원들의 선구안에 달려 있다. 타석의 선수가 매번 공을판단하듯 스트라이크존은 앎과 삶의 범위를 상징한다. 인생은거창하지 않다. 일상이다. 지식은 일상의 매 순간 필요한 수많은 양식(樣式糧) 중 하나일뿐이다. ‘학자‘도 다르지 않다. - P49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와 고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고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해서 난민을 반대하고 박근혜 씨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를 설득할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의 현실은 당면한 볼 카운트에 있다. 지식은 ‘야구장‘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존‘에서 요구된다. 얇은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타자의 포지션에서 시작된다. - P54

야구에서 1루수는 오가는 공을 가장 많이 상대하는 포지션이다. 야구 인생의 끝자락에서 가난한 구단에 겨우 입단한 그에게 ‘1루수‘는 경기장에서 주어진 포지션을 넘어 생계 수단이자 운명이다. 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서나 1루수인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그의 포지션은 다양할 수 있다. 내가 많이 권하는 책,
<가만한 당신>의 저자 최윤필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요컨대 나는 국적 · 지역·성·젠더 · 학력 차별의 양지에서 살았다. - P55

"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 이 말은 ‘네 주제(능력, 형편, 조・・・・)를 파악하라‘거나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는 건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삶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될 때 공동체는 위험해진다. - P59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 쉽지 않은 포지션이다. 이들은 남성 사회에서도 여성 사회에서도 배척당하기 쉽다. 그래서 R. W. 코넬 같은남성성 연구자는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받기도 했다. 다른성별의 몸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성별은 역지사지가어렵다. 자신의 자리(地)가 포지션이라면 이를 인식하거나 이동하는 과정이 역지(易地), 포지셔닝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기득권자는 자신이 손해 보는 역지사지가 싫고, 피억압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인식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고달프다. - P60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실상 자기 커뮤니티로의 커밍인(coming in)이다. 팬데믹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수다. 그러나 집(home)은 안전한가?
집(부동산)이 있는가? 탈코르셋 운동(외모주의 반대 운동)은 백번옳지만 중년 여성, 장애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에게도 같은 의미일까? 지독한 위치성을 인식하는 일,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 P61

자연,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중요한 성격으로 여겨졌던 합리성은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지구 곳곳에서 여전히 멈추지 않는 홀로코스트는 이성의 예외 상태(공기)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로서 이성의 실현이다. 전쟁은 기획된다. 이를테면 가정 폭력, 성폭력 가해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후 여성주의, 현상학, 인류학 등은 인간에 대한 연구 주제를 몸으로 이동시켰다. 모든 개인은 ‘몸‘이다. 그 몸은 사회적이다(mindful body, social body). 마음은 몸의 ‘일부‘다. 마음이 몸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죽음을 맞는다. 사회적 몸으로서 인간개념은 개인과 구조의 이분법을 반박한다. 구조는 개인에게 큰영향을 끼치지만 개인의 대응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이 같은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자유주의 모두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융합의 산물이다. - P73

말하기와 듣기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개인도 덜 아프고 사회도 건강하다. 이것이 사회 윤리, 공중 보건으로서 상담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게 말하는 행동은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일‘과 같다는 인식,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의 결과는우울과 자살의 사회다. 외로운 침묵, 말하기를 포기한 불신, 소통을 대신하는 물리적 폭력……. ‘환자‘의 말에 사로잡힌 ‘의사‘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내담자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좋은 사람은 타인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한다. - P81

하지만 서민의 입장에서는 재벌만큼이나 부자였고 재벌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부패했다. 그런데 재벌을 비판한 공으로 진보라는 명예와 함께 정권에 입성했다. 그 택시 기사는 세상을 알았다.
역사 발전을 가능케 하는 적대와 긴장이 사라진 시대에 기후위기가 겹쳤다. 이제 일자리는 사라질 것이고 몸 아프고 나이든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계속될 것이다. 비참하고 고난이 가득한 삶이 확실한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파국은 굉음을 내며 등장하지 않는다. 흐느끼는 소리라면 슬픔이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 부자와 동일시를 넘어 과시로 내지르는 ‘플렉스‘는 파국보다 더 비극적이다. - P91

말은 ‘나의 마르크스주의는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 (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잠깐의 판단중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삶은 자기 진화의 과정이지 시비를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식을 하나의 고정된 정보로 여기는 이들은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알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를 가르친다‘. - P98

다른 사람의 몸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삶은 몸들의 개별적 화학이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요즘은 의학의 도움으로 생사에도 외부가 개입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 한 가지, 공부뿐이다. 취업이 안 되는 시대라면 공부를 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아니다. 공부는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에게 망치질을 당하고 불에 녹아 쇳물이 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하며 내 몸에 기(技)와 예(藝)를 새기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개체다. 사랑하는 이가 아플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입시 코디‘를 고용해도 안 되는 공부는 안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타인이라는 별개의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폭력과 고문이 인문학(humanities)의 주된 주제여야 하는 이유다. - P102

주변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 P102

이 문제에 관한 한, 공부처럼 좋은 예도 없을 것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이 없다.
공동체를 꾸리거나 도(道)을 맺는 것이 함께 공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제도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학교, 배타적인 연애, 가족 제도는 제도권 안에서 가능한 대표적인 공부 모임이다.
반면 개인이 조직하고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공부 모임이나제도로부터 자유로운, 두 사람만의 관계인 도반이 있다. 공부에필요한 적대는 일대일 관계이므로 도반은 두 사람이어야 한다.
세 사람이면 대화가 흩어진다. 도반이 ‘유사 연애‘의 모습을 띠는 이유는 검열 없이 대화가 오가고 상대방의 뇌에 출/입할 수있을 만큼 둘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P103

동무(同舞)는 독무(獨舞)가 전제되어야 한다. 운이 좋으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 많은 이들이 그 어감 때문에 융합이 무언가를 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만의 몸이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 P104

융합은 먼저 내 몸에서 일어나고 그 다음에 공동체나 도반에서 일어난다. 혼자 공부하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한다. 굶으면서 공부할 수는 없으므로 최소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걸을 수 있는 거리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얼마의 교통비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큰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가방도 필요 없다.
자료를 읽고 조사하면서 필요한 부분은 본인 메일로 보내면 된다. 이런 방식의 공부를 권한다. 누구든 어느 한 분야에도 관심없는 사람은 없다. 본인의 생계를 전문적 지식으로 발전시킬 수있으면 더욱 좋다.
스스로 융합된 몸이 되어야 다른 융합도 가능하다. 그리고그러는 편이 바람직하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지속적인 생산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는 공동체나 도반이 무슨 소용인가. - P105

말할 것도 없이 팬데믹은 인류에 대한 지구의 복수다. 자본가와 발전지상주의자들은 재난이 자기 턱밑에 오더라도 ‘노아의 쪽배‘까지 부술 태세다.
과학 기술에 관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논쟁 방식은 장단점나열이다(예를 들어 ‘세탁기로 여성의 노동이 줄어들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핵심은 인간의 삶과 환경의 변화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지금 은행은 희망퇴직자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과학 기술의 최대 성과는 실업이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는 79억 명이다. 반면 케냐에서는 지구에 홀로 남은 단 한 마리의 하얀 기린이 발견되었다고한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체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후 위기는 인간 활동의
‘불가피한 부작용‘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언제까지 방역 시대를 살 것인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분명히 할시기가 왔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어야한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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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깊이 상처 입었다. 우리는 부활이 아닌 갱생(다시 태어남)을 원한다. -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1991년)의 일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allbeen injured, profoundly. We require regeneration‘, not rebirth‘ and thepossibilities for our reconstitution include the utopian dream of the hope fora monstrous world without gender." 작은 따옴표는 필자.



내 책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수학, 미술, 음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룬 책이라는 평가다. 이 책은 세 사람에 관한 책이 전혀 아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안병서 옮김, 까치, 2017. (번역서 초판은 1999년, 원저는 1979년에 발행됨).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어야 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장춘익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 교육실천 20년을 만나다》, 탁선미·조한진희 외 9명 지음,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 엮음, 곰출판, 2022. - P9

이 책은 모든 지식이 이미 융합의 산물임을 상기한다. 이 책은 또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해 자신이 아는 바를 어떻게 연결할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어떻게‘는 글쓴이의 가치관과 위치, 당파성, 이동, 다시 태어남 따위를 의미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왜 쓰는가"와 동격의 물음이다. 나의 삶과 글쓰기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나의 글쓰기 태도는 어떤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가.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같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나는 이른바 ‘맨스플레인‘이 불편하다기보다 쓸모가 적다고주장해 왔다. 가르치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더큰 문제는 그 ‘맨스플레인‘에 가르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언어가 - P10

쓸모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를모든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 교육은 그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맥락 없이 반복하고 가르친다. 공부가 사유 방식을 배우는 과정, 창조의 과정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불행은 바로 옆에 있다. 교육이 고용과 연결되지 않으며 실업이 만성화된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동기도 흥미도없는 공부는 학교를 붕괴시키고 폭력을 낳는다. 정권을 초월해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스펙 비리에 우리는 지쳤다.
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아니라 가치관이다. ‘정의로운 가치에 맞지 않는 융합이라면,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지구 파괴에 쓰일 융합이라면, 모든 정보를 끌어모으는 박식(薄)한누더기 공부가 융합이라면, 그런융합이왜필요한가. 무조건적인 융합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 P11

왜 필요한 지식이 논의되고 생산되지 못하는가. ‘여성‘, 서울 지역 밖에 사는 이들, 몸이 아픈 사람, 나이 든 사람,
외로운 사람, 계급의 양극화가 교육 기회 박탈로 이어진 이들.
직장 생활이 힘든 사람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분단 체제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족주의에 매인 사람들………. 우리 사회 그누구도 여기에 속하지않는 이는 없다. - P12

우리는 모욕당했을 때 자기를 보호할 언어, 더 나아가 더 나은삶을 설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 대체불가능한 언어가 필요하다. 대안적 언어는 ‘내로남불‘ 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
대립적인(counter) 상황이 아닌데 대립으로 문제를 풀려니 해결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특징이 된 엉뚱한대립 구도나 이분법은 큰 문제이고, 이 문제에 약자들이 대응하는 양상이 우려스럽다. 특히 약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3

 여성 혐오에 저항한다고해서 남성을 혐오한다? 우선 여성이 ‘구사할 수 있는 혐오 언설‘과 남성의 그것은 양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시작부터 지는게임이다. 그것도 닮고 싶지 않은 이들과 같아지는, 추하게 지는 게임이다. 예를 들어 남녀 임금 비율이 100:66 안팎인 사회에서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주장이 호소력을 얻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은 사회 전체가 젠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젠더를 설명하는 것이지 ‘남혐‘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다. - P13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 - P13

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한국의 어느 예술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번 큰 상을 타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작은 세계에서 조그맣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도, 작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듯하다.
1700만 명이 본 영화 <명량>과 1만 명도 안 보는, 아니 소개되지도 못하는 영화는 아예 다른 장르다. 만드는 방식이 다르고 다루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이
‘보편적인 독자‘를 초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내 글은 당파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그 또한 쓸 이유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융합으로 ‘대응‘해 왔고 이 책에서독자들과 공유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 P14

공부에는 왕도가 있다. 물론 그 왕도는 지름길이 아니다. 왕도는 공부 방식과 태도, 동기와 관련되어 있다. 글쓰기에도 왕도가 있다. 내 생각에 글쓰기는 공부보다 좀 더 복잡하다. 장르도 다양하고 쓰는 행위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읽기나 생각하기라기보다는 ‘쓰기‘라고 답할 것이다. 공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쓰는 과정을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왕도가 있다면, 역시 요령이나 기술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 P14

돈이든 명예는 자기실현이든 고통의 승화추구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쓰기는 왜 쓰는가에 따른‘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 P15

글쓰기는 내가 내 몸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런 글쓰기의 핵심적인 방법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융합‘이다. 나는 이제까지 나름대로는 융합 글쓰기를 지향했지만, 이 책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싶다.
가장 큰 이유는 ‘융합‘ 표현이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데그 뜻이 모호한 데다 최소한의 합의도 되어 있지 않아서 융합개념을 둘러싼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 있다. 물론 이미 다양한관련서들이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나의 소견일 뿐이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있다. 융합은 흔히 말하는 "학문 간 대화, 통합(統合), 절충, 비교 더하기, 혼합・・・・・・ "이 아니다. - P15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밖에 없다. ‘칼이냐펜이냐‘ 논쟁은 끝났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지구에 봉사해야 한다. 융합의 의미를 빨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제주가 변방이 아니고 남쪽에서 보면 한반도의 관문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논리를 강정 마을에 군사 기지를 세우려는 미국과 한국 국방부가 ‘가져갔다‘. 그들도 강정이 "세계의 관문"이 - P16

라며 관광과 군 기지를 결합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같은 말이지만 이해관계, 발화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융합의 다른 이름은 인문학 자체다. 흔히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유목적 사유,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융합은 이미 작동하고 있는 삶과 지식 생산의 원리인데,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고, 대학, 기업, 시민사회, 종교단체 등 많은 커뮤니티에서 화두처럼 자리잡았다. 통섭(通攝)*, 융합(融合), 다(多)학제적·간(間)학문적 자율전공,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이견은 없다. - P17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때, 말문이 막힐 때, 표현할 언어를찾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곤란은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나의 경우 글을 잘 쓰고 못쓰고‘는 관심사가 - P18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쓰는 것이 관건이다.
글이 내 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래서 ‘잡념‘이 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이런 순간이 가장 괴롭다.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rebirth)‘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regeneration)‘을 할 수있을까. - P19

 장애인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대, 여성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결을 고민할 때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횡단의 정치가 가장 적절하다. 그리고 여기엔 이미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축적한 지식이 있다. 하지만 남성도 여성도, 여성이 쓴 ‘학문적인 글은 잘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목적이 분명한 편이다. 당연히 내가 쓴 글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즉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글은 폐기한다. 그리고 되도록 그 판단은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쓴 글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처럼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 연민은 글쓰기뿐만 아니라삶도 최악으로 이끈다. - P23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인문학 책은 팔리지 않는 세상이지만, 이 책이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작은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미한 연결의 흔적이라도 남기기를, 개인의 독서 취향을 정치학으로 발진(發)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 P23

를…………. 말도 안 되는 과욕이 이 책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여정 (journey), 변화(meta-morphosis), 프레임 조정(framing), 변환(transform), 횡단(trans-verse), 문턱 넘어서기(閔値, threshold), 경계선 안팎 넘나들기(bordering), 협상(tuning), 직면(facing), 온몸의 재구성(사지의재조합, re-membering), 거리낌 없는 수용(embracing), 매사를다시 생각하기 (rethinking),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 (re-flection)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 P24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수호‘처럼 기이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이 말의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는 수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유의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자유(free from~)‘ 인가에 따라의미가 달라진다.
경쟁 사회, 소음과 먼지, 신분차별, 타인의 시선, 돈, 피곤한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극복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 대개는 투쟁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 - P28

반면 개인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이다.
나 역시 일 안 하고, 여행하고, 은둔하면서 책만 읽으며 내 맘대로 살고 싶지만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꿈만 꾼다. 소신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신대로 살려면 역설적으로 소신이 없어도 되는 삶,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한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노후에 비참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중대한 상실과 결핍을 극복하면서까지 소신을 내거는 이들은 드물다. 대개 소신발언)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중산층의관념이다. - P29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를 외친다. 자기가 누구라는 사실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도 불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대답은 한 가지다.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 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 P33

‘여성학 강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의 여러 직업 중 하나다. 여성주의는 내 부분적 가치관이다. 하지만 나를 ‘여성주의를온몸에 뒤집어쓴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여성학 강사는강의하는 내용 특성상 신체적·정치적으로 고된 직업이다.
지난 25년 동안 대학, 시민사회, 노동조합, 여성주의 모임,
기업 등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면서 내가 겪은 사연에 해석을더하면 책 몇 권이 나올 것이다. 대개 경험한 나조차 믿을 수 없는 희비극들이다. 심호흡으로 분노를 조절한 후 간단히 말하면모욕과 호기심이 주를 이룬다. 화학, 법학 같은 주제를 다룰 때와 달리 말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강의 내용이 페미니즘일 때 세상에 없던 일이 일어난다. - P34

 애초부터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先除,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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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떤 사회인가. 나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가 아니라한국이 가장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한국에 관심이없고, 한국은 일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내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일은 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나붙은 ‘공산당(共産)‘ 포스터였고, 둘째가 자판기였다. 물론 일본 공산당은 망한 지 오래고, 재일 교포와 오키나와인들과 연대하기를거부하고 자본가들에게 고용을 부탁하러 다니는 ‘단체‘다.
자판기는 몇 미터 간격으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다닥다닥,
거리의 가로수보다 많은 것 같았다. 음료, 담배, 라면, 인스턴트식품은 기본이고 여고생이 입던 팬티 냄새가 사라지지 않도록캔에 봉인한 섹스 관련 상품을 파는 자판기도 있다. 일본은 ‘한때‘ 전자 제품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빵, 치즈, 잉어, 옷감, 디자인, 와인, 종이, 두부, 국수(麵), 건축, 음악, 다신(多神), 화장품,
그리고 세습, 서브컬처의 사회이기도 하다. - P193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를 꿈꾸었고 실현했다. 유럽 문화에 정통한 인문학자가 수두룩하다. 탈아입구를 실현한 정도가 아니라 일찍이 메이지 유신을 시작으로 해서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하고, 세계 제패를 기획해 미국,
중국과 전쟁을 치렀다. ‘작은 나라(倭)‘가 아니다. 노벨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1950년대에 이미 ‘성취했다‘.
일본의 문학, 인문학, 역사학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이들은 남을 침략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연구했고 이미정상(頂上) 국가 또는 정상(常) 국가를 경험했다. 그래서 한국의 지식인처럼 식민지 콤플렉스에 시달리거나 ‘나라 만들기‘에열중하기보다 지금 당장, 자국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 모든 담론이 되어야한다(should be)"이다. 현재는 지나가고 있는데, 오지 않을 미래를 설계한다. 자본주의와 발전주의, 민주주의가 같은 의미로 쓰인다(대표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대신한 스마트폰 사용이 그것이다). - P195

일본의 현재를 살펴보는 것은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소중한예술가 혹은 윤리적인 예술가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자기사회를 직면하고 고민을 담되, 그 상황이나 인물을 대상화하지않고 껴안는다. 이것이 그의 영화가 지닌 소구력이며, 관객은그가 재현하는 특정한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좀도둑가족>에서 가난한 일본인을 그렸다고 해서, 일본을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하거나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는다. - P197

한다.
이 책의 ‘위대한 업적‘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실체(entity)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국가를몸에 비유한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국가는 관계와 제도이지 주권, 영토, 국민의 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 내 모든영토는 평등하지 않다. 모든 국민도 평등하지 않다. 어디가 국가인가? 서울? 전라도 완도? 경상도 언양? 누가 국민인가? 여성? 장애인? 영토나 국민 개념은 가정해서 상정한 것이지실제가 아니다. 다만 특정지역이 국가로 대표될 뿐이다. 어느때는 서울이 어느 때는 독도가 어느 때는 한라산이・・・・・.
주권은 어떠한가. ‘국가의 영혼‘이라는 주권은 하나(singularity)가 아니다. 나는 식량주권, 검역 주권에는 찬성하지만 군사 주권에는 회의적이다.  - P201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에 ‘도‘ 도달하지 못한 사회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한 존경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여기서 내가 반민특위 역사를 들먹이며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윤리적이지 않다. 윤리적인 국가는 보훈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경의를 표하는 일은 공동체 유지와 후세대 교육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서 국가의 모순이 발생한다. 정상 국가는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몸으로 재현되지만, 실제 정상 국가는 외적과 투쟁을거쳐 쟁취한 공동체이므로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이용사(傷勇士)‘나 장애인의 몸이 정상 국가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거의 없다. - P205

인간의 역사에서 기차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본인프라이자 근대성을 상징한다. 기차는 물자 수송과 인간의 이동,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차 시간은 정확해야 한다. 승객은제시간에 기차에 승차해야 한다. 10초도 늦어서는 안 된다. 출발 시간에 늦어 역 부근부터 숨이 차도록 달리는 사람들. 우리자신도 경험했다. 비행기의 연발과 연착은 흔한 일이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다. 기차를 놓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은 아직하늘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지상은 장악했다. 기차 시간의 정확성은 한 사회의 발전과 기술, 질서를 의미한다. 에릭 홉스봄도적었듯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제시간에 왔다." (나중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 - P209

지금도 "하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인간의 의지는 질주하는 자본주의 구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생은 해도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특히 높은 이유는이 진실을 너무 빨리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인생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인간의 의지, 불굴의의지,
‘그놈의 의지・・・・・…. 나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과 사회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는 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홀로코스트, 하나의 질서만 유일한 진리가 되는 보편성(uni/versal)의 폭력이 실제로 실현된 대량 학살이다. 프리모 레비의시 기차는 슬프다>는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첫째 연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더 슬픈 게 있을까?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 P210

MB 시대의 정신을 체화한 ‘MB 캐릭터‘는 이 영화의 최고 악역(김의성)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생존자다. 문제는 그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MB 시대의 대표적 모델은 전 경찰청장 조현오다. 그가 저지른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등은 MB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MB는 그런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사건들은 조현오 개인의 과잉충성의 결과였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굳이 비윤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능력주의 사회다. 그러나 이들은 실력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편으로는 극도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살 - P216

아간다. 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인생의 낭비다.
이 시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부끄러움 없는 사람의 활기(氣)는 그 자체로 흉기다. 한마디로 지금 이곳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정의는커녕 의리마저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평범한 사람도오염된다. 오염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 사회를 기차 안에 압축해 두고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조현오‘가 된다.
다시 쓴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지 않으면생존할 수 없는 과정을 그린 몸서리쳐지는 영화다. 다른 선택은없다. 오염의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 P217

이중 삼중의 노동으로 힘겹기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와 그들의 차이를 글로 썼다. 그래서 그들에게 수많은 나 같은 이들의 존재를드러내고, 차이를 규정하는 주체가 되고 싶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니까.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의 타자이며, 나의 글쓰기 대상이니까. 그들이 없다면, 나는 글을 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기질과 가치관, 계급, 성별 등의 이유로 나는 궤도 안의 주류로 살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타자임을 선택했다. 누가 어떻게 규정했든 간에 나는 나의 타자성을 사랑한다. 내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사실이다. 모든 다름은 공동체의 진실을 드러낸다. - P220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인류와 지구를 해방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방하라. 팬데믹 시대의 구원은 우리 모두 ‘섬싱(something)‘이 되고자 했던의지를 버리고, 자연의 일부인 ‘낫싱(nothing)‘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갈팡질팡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의지가 부끄러울 뿐이다. - P221

국가 내부에서 모든 사람이 국민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국민이기보다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지방 사람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뿐이다. 이봉합은 일상적으로 찢어지고 다시 꿰매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터져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고 주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나라의 사정은 식민지배와 함께 찾아온 자신도 모를 운명의비극을 맞았지만, 구한말 개인들의 사정은 모두 달랐다. 바로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 P226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는 데 일본인의 도움을 받으면 ‘친일 행적‘이고 그런 인물을 다루면 ‘친일 영화‘인가? 당시 남성 지식인대부분은 일본에서 공부했다.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여성은 민족의 주체가 아니라민족을 재현하는 대상일때만 유용하다. 유관순은 종종 ‘열사‘
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봉창 열사‘에 비해서는 그 경우가 훨씬적다. 거의 대부분 ‘유관순 누나‘로 불린다. (나는 "유관순 언니"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남성이 "레즈비언이세요?"라고 물었다.) - P228

박경원과 비슷한 시대를 산 마리 퀴리는 첫 노벨상을 수상한뒤에도, 남편 연구실에서 더부살이했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여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첫 여성 회원이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연구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자들 때문에 정문을 이용하지 못하고 청소부용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나사(NASA)의 프로젝트에 선발된
"‘흑인‘ 여성 과학자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히든 피겨스>(2016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당시는 무려 1960년대, 우리는 미국 사회의 합리성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 P229

개인의 삶도 복잡한데, 국제정세가 얽혀 있는 나라를 되찾는 일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원인츠 파농은 민족 해방투쟁 (독립운동)은 빼앗기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탈식민주의, 즉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은 과거에 식민 지배를 겪은 국가들이 형식상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가해국에 대한 피해 의식, 동일시 욕망, 경쟁심, 원한 등에 시달리고있는 상태를 말한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장 웃긴‘
사례가 ‘코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s)‘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정체성인가? 같은 주인을 모신 나라들의 운동 경기? - P230

문이 열리고 내면의 모순이 드러나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충돌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하기는커녕, 나 자신에게조차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이랬다저랬다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보호하고자하고 뭉개버리고진심을 말하지 않는 한편, 누가 자기 진심을 읽으려고 하면 상대가마음에 드는 가장 위쪽 상태만 드러내고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의식의 수풀 안에 감춘다- 애나 번스 - P231

구한말의 공포와 혼란, 식민지,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현대사를 지배하는 주된 문화는 피해 의식이다. 이 피해 의식은다양한 모습으로 한국 사회를 변주해 왔다. 서구를 따라잡아야한다는 추격 발전(catch-up development)의 원동력이었으며, 극단적 반공 · 반일 · 반미 의식의 근원이었다. 부국강병과 정상 국가 건설은 진보와 보수를 불문한 강박이었고, 기후 위기로 지구가 몰락할 이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팬데믹 시대에도 근대 국가의 정상성을 꿈꾸고 있다. - P239

한국과 일본 관계에서 한국의 위치와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서 한국의 위치가 완전히 다름에도, 이 장면은 베트남전 증언자와 일본군 위안부의 만남으로, (무조건) 양심과 저항의 연대처럼 언뜻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베트남인에게 한국인의 피해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한국의 양심‘을 두 나라에서 동시에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 시민 사회의 단면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닐까. 한국의 군 위안부 운동의 ‘성공‘은 피해자를 선별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규제하는 규범적인 피해자 양산과 부패와 연결되어 있고, 이는 이용수 님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 P241

이글 서두에 인용한 이야기는 나의 고통을 대변한다. 내가생각하는 페미니즘은 기존의 정치적 대립 구도가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진상 규명이나 진실보다는 누가 협상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지, 누구의 관심사가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지, 누구의 이득이 표명되지 않는지, 누구의 진실이 발언되거나 인정되지 않는지, 우리가 놓치고있는 진실을 찾아내려 한다. - P244

베트남전의 한국인 학살을 겪고 이를 증언한 이들은 돈을 받으면 안 되는가? 선물이든 돈이든 사례하지 않는다면 이중 착취 아닌가? 그들이 왜 한국인의 양심과 진상 규명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해야 하는가. 돈을 받으면 순수한 증언이 아닌가?
이후 한국인의 만행이 베트남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되었을 때, 증언들은 여러 요소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돈, 선물을 넘어 사회적 압력, 한국인과 친분 관계… 이것은 나쁜현상이 아니라 필연적인 논쟁거리다. 증언사가 기록 문서만큼이나 난제인 이유다.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 P245

한국 사회(정대협)는 "돈을 받으면, 순결한 민족의 피해자가아니라 매춘 여성이 된다"고 피해 여성들을 억압했고, 여기에문제를 제기하는 연구자나 운동가는 매장, 아니 그 이상의 차마 말할 수조차 없는 억압을 당했다. 인생을 ‘날린‘ 이들도 많다는 의미다. 연구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사회운동은 피해자를 담보 삼는 반인권적 행위로 타락했다. 정대협 관계 인사들의 돈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성역화되어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사회운동이 아직까지도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구조는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기억의 연대‘는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자는 강박이 아니다. 매우 당파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각자의 자리를 알고, 차이를 인정하는 기억의 경합이다. 피해사건이 나의 일상이 아닌 이상, 기억 투쟁은 가능하지 않다. - P247

이 작품이 가장 위쪽의 상태만 드러냈다고 평가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기억의 전쟁>이
‘착한 작품‘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도전하는 텍스트가 되기를바란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고 자기위치성에 근거하여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이 한국인의 양심의 증거가 되는것이다.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폭발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무엇을 몰랐던가, 무엇을 숨겼는가를 아는 실마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전쟁>이 그 실마리다. 두려운 실마리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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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생물학처럼 오해받는 학문도 없을 것이다. 생물학은본질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다. 진화론에 기반한 생물학은 글자그대로, 생물과 환경(문화)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생명체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적응과 조화가 핵심 원리지, 약육강식이 아니다. 생물은 자신의 생활 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며, 생존 환경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한다는 것이다. 환경과 상호 작용에 성공한 생명체가 생존이라는 자연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이 같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서 확신시킨 사람이 다윈이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P164

나이가 들면 "나는 뭘 하며 살았나", "그래도 너는 뭔가 이룬게 있잖아" 같은 대화가 오간다. 가장 성숙하지 못한 접근은 나이 듦에 대한 타자화다. 나이가 들면 경험, 성숙, 세월의 멋, 지혜 등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이나 반대로 노추(老醜), 노욕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나 ‘곱게 늙음‘에 대한 강박과 칭찬이 난무한다. 나이 듦에 대한 타자화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특정 연령대에 대한 임의적 규정이다. 앞에 적은 특성들은 개인차일 뿐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곱게 나이 들어야한다"는 말이 싫었다. 일단 돈과 건강, 외모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얘기인 데다, ‘곱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이 든사람의 정당한 분노는 ‘곱지 않다‘. 그들의 ‘지나친 의욕도 거북하다. - P165

지금 인간이 자신과 지구를 살리는 길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가 주장하는 탈성장만이 답이다. 내겐서울의 강남 좌파든 강남 우파, 열심히 사는 부자들의 인생이최악이다. 이들은 자연 파괴를 가족 단위로 세습한다. 인간의존재 의미는 사회적 성취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도리, 자연과의관계에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진한다?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여기서 역사는 발전주의에 기반한 근대 역사주의의 산물이지, 사실이 아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다. 이제 혁명은 질주하는 자본주의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여야 한다. ‘무의미한 인생‘이야말로 ‘없는 우리‘의 최고 무기다.  - P167

나는 마지막 장면-죽음에서설레기까지 했다. 이 선택은 자유주의적 발생도 아니고 강제도아니다. 장남이 부모를 업고 산에 오르는데, 부모를 그렇게 할수 없어서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남성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여성 노인은 득도한 듯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세뇌‘ 때문이다. 에고가 공포를 가져온다. 가볍고 조용한 죽음. 인간의 존엄, 죽음의 철학에 관한 최고의 영화다. 역대 칸에서 상을 받은 영화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 P170

발명 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동기는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논의해야 할문제의 핵심은, 핵무기든 다이너마이트든 콘돔이든 SNS는 이모든 ‘오브제‘가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을 들겠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했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시대다. - P175

몇 년 전에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 중에 내 친구까지 있다고전해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않은 사람들에게는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으로 SNS에 글을 쓰는사람과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 낸 사람의 삶과 인생(人生苦)는 같지 않다. 그런데도 SNS 문화는 후자는기득권자이므로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는 글을 쓰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 P176

이전 시대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종이 신문보다 인터넷이,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추상적 개인(individual)인 인간이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위 70억명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저항하는 것이지 개인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 - P177

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털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발화의 능력도 바로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말)나 ‘오뎅‘ (세월호 희생자를 비하하는 말)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보여준다. - P178

홍석재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 P180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중우(衆愚)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 P181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코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 (타인에 비친)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P182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지금으로서는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트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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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마다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지구 멸망이나 홀로코스트를 맞더라도,
사랑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힘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이 최고의 힘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그러나 내겐 너무 아프고 부담스러운-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 P126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내가 가장 동일시한 인물은 작품속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원작자다. 이 영화는 감독과 출연을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원작에 빚지고 있다. 20년 동안 링 위에서 컷맨(cut man, 복싱 선수가 경기 중피가 나면 응급처치를 해주는 스태프)으로 일한 소설가는 흔치 않다. 원작을 쓴 제리 보이드(JerryBoyd, 1930~2002, 필명 F. X. 툴)는 생년월일이 불명일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단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실린 소설집 《불타는 로프(Rope Burns)》(2000년)가 그가 생전에 남긴 단 한 권의 작품이다.
투우사, 택시 운전사, 술집 주인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40년간 혼 - P126

자서 글을 썼다. 이 책 이전까지 그의 글은 모두 출판사로부터거절당했다. 첫 책이 출간되고 2년 후에 그는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나는 알코올과 노숙, 중노동과 글쓰기를함께하면서 69세에 첫 소설집을 낸 소설가가 감히 부럽다. 그의삶은 고달팠지만 그가 쓴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고 영원으로 남았다.
이 영화에는 명장면, 명대사가 넘치는데, 거의 메타포다. 이영화는 이스트우드가 쓴 인생과 고통에 관한 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가 왜 공화당원인지 진정 이해하게 되었다. 항상나 자신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 어떤 부위는 맞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복싱에서 중요한 것은 자세라는 것・・・・・ - P127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해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사건,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오늘 만날 수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거나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상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 P134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친구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 - P135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더러운 커튼이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무슨 일 있니?" "건강해라."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그만 주무세요."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상처도 두 배로 커질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 P137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먼저 말하는 것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 P141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중년들과 중년의 배우와 동일시한 나는 이 드라마의 모든 장면이 다 부드럽게 흘러갔다. 제주도가 배경이고 다양한 연령대가 나오지만 내게 이 작품의 주제는 ‘나이 듦‘이었기 때문이다. 노희경 작가, 이정은 배우, 엄정화배우의 ‘인간적 고민‘을 나는 알 것 같다. 연령은 계급, 젠더와함께 중요한 사회구성 요소로, 모든 분야에서 노소(老少)에 따른 ‘우선권‘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의 전쟁터다. 나이는 다른 사회 구조와 다르게 어려도, 어중간해도, 늙어도‘ 맥락에 따라 차별받는다. 그래서 모두가 피해자라고 싸운다.
- P145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삶은 기존의읽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P148

토박이 제주 사람들은 주로 그들끼리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 "우리 집 귤이 제일 맛있다!" 제주도(濟州島)는 섬 전체가 하나의 산(한라산)이다. 산 전체에 도심, 해변, 중산간(中山間), 정글도 있고 습지도있다. 제주는 하나의 섬이자 산이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라는 얘기는 섬의 일부에서 섬의 일부인 ‘꼭대기‘
가 가장 잘 보이는가 하는 문제다. 내부에서 어느 내부가 가장잘 보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 P150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임종 경험이 많다. 그래서 내세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날 선 얼치기 유물론자지만,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않을 때가 있다. 인생이 한 번이라는 사실은 너무 불공평하다.
이럴 때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윤여정 배우의 ‘말씀‘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지인들은 "지금부터라도 그렇게(영화처럼) 살라"고 한다. 더 화가 난다. 나는 아직은퇴 자금이 없으며, 여행할 체력이 안 되고, 연애가 성립(?)된적이 없다. 내세에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으로태어난다는 믿음 없이는, 현실을 버틸 수 없는 세상이다. - P156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이들.
조혼과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내전 상황의 물 없는 마을, 굶고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젊은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하는 이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상황부터 그렇다. 내가여성운동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92년 미군의 잔인한 폭력으로 숨진 윤금이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
내 또래였다.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었다. 충격과 슬픔이 나를 압도했다. 그저 나는 그와는 다른환경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 P157

‘제2의 성‘인 여성의 삶은 원래 시민인 남성보다 사회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근대화는 어쨌든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 자본주의의 변화는 여성 개인의 노력보다 생년(生年)이 삶을 결정해 왔다. "시절을 잘만나서" 나는 내 어머니보다는 나의 의지로 살았고, 내 어머니는 외할머니보다는 오래 그리고 ‘배운 여성‘으로 사셨다. 개인의 노력보다 시대적 조건이 여성의 삶을 좌우했다. 아무리 행복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해도 여성들의 삶이 이전 시대보다 ‘나은 상황임은 분명하다(물론 성차별이 나아졌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 P157

그러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극중 영옥(한지민)은 바다를 좋아한다. 거기서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는 평생을 돌봐야 하는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영희(정은혜)가 없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그는언니를 홀로 부양해야 했다. 몸에 철근을 두른 듯한 부담감과그래서 바다에서는 혼자인 해방감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한다.
그는 울먹이며 연인에게 말한다. "억울해. 왜 나한테 저런 언니가 있는지. 억울해. 왜 우리 부모님은 착하지도 않은 나한테 저런 애를 버려두고 가셨는지. 억울해.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저렇게 태어난 영희는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렇다. 내세를바라는 게 아니라 이러한 태도가 정의다.  - P158

당대는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혁명도,
개혁도, 민주주의도 없다. 나는 티모테 샬라메나 아미 해머(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 출신이다)가 아니다. 유물론자인 나의태도는 내세를 기도하기보다 현실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어려운 처지인 사람들과 상부상조,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 남부유럽의 햇살은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보기로 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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