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안지 30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몇 년 전11월의 어느 날까지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의사들의 명령에 따라 건강회복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집에서 안정을 취해야 했는데, 그날은 내가 쓴 책에 대해 다른 작가와대담을 하기 위해 런던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는 기차에 타고 있었다. 마침 11월 2일, 내 고향에서는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Día deLos Muertos, 즉 망자들의 날이었다. 이웃들은 그 전해에 죽은 이들을 위해 제단을 마련하고 촛불과 음식, 천수국, 고인의 사진이나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들을 차려놓았다.  - P11

하지만 나는 런던의 킹스크로스 역을 떠나 북쪽으로 달리는 아침 기차에서 차창 밖으로 런던의 밀집한 시가지가 멀어져가고 건물들이 점차 낮아지고 띄엄띄엄해져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기차가 농지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하자, 풀을 뜯는 양 떼나 소, 밀밭, 잎진 나무 같은 것들이 창백한 겨울 하늘 아래서도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여행길에 해야 할 일, 아니 탐색 과제가 하나 있었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인다큐멘터리 제작자 샘 그린 Sam Green을 위해 나무 몇 그루 (아마도콕스 오렌지 피핀 사과나무나 몇몇 다른 유실수들)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와 나는 여러 해 전부터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를, 그리고좀 더 빈번하게는 메일을 주고받아왔다. 우리 둘 다 나무를 사랑했고, 언젠가 그가 나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든가 아니면둘이서 어떤 식으로든 힘을 합쳐 나무를 위해 모종의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리라는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다. - P12

샘은 2009년 동생이 죽은 후 힘든 한 해를 보내며 나무에서 위로와 기쁨을 발견한 터였고, 내 생각에 우리는 둘 다 나무가주는 굳건한 지속성의 느낌을 사랑했던 것 같다. 나는 여러 종류의 참나무가 월계수나 칠엽수와 어우러져 있는 캘리포니아의 구릉진 지형에서 자랐다. 내가 어렸을 때 알던 많은 나무들은 지금가 보아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내가 그렇게 달라지는 동안 나무들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자란 카운티의 반대쪽 끝에 뮤어우즈가 있었다. 그 일대의 다른 지역이 다 벌목된 후에도, 그곳의 유명한 레드우드 숲에는 노거수老巨樹들이 건재했다. 키가200피트(61미터)나 되는 침엽수들이 안개 낀 날이면 공기에서 습기를 빨아들이고 마치 소낙비와도 같은 것을 땅에 뿌렸다. 그런소낙비는 노천이 아니라 침엽수가 천장을 이룬 곳에서만 내리는것이다. - P13

내가 영국에 가기 전, 그해 여름 샘이 시내에 돌아와 있었을 때, 우리는 메리 엘런 플레전트Mary Ellen Pleasant가 샌프란시스코에 심은 나무들을 구경하러 갔다. 플레전트는 1812년경에 노예로 태어난 흑인 여성으로, 지하철도의 주역으로 활동하다 인권운동가가 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엘리트 금권정치에서도 일을했던 인물이다. 그녀가 죽은 지 100년도 더 지나, 그녀가 심은 유칼립투스 나무들 아래 서 있노라니, 나무들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과거의 산증인처럼 느껴졌다. 그 나무들은 그녀의 인생 드라마 일부가 일어난 목조 저택보다 더 오래 살아 있었다. 너무나 넓게 가지를 펼쳐 보도를 가로막았고, 주위의 건물 대부분보다 더높이 솟아올랐다. 잿빛황갈색으로 벗어지는 껍질이 그 둥치를휘돌아 올랐고, 낫 모양의 잎들이 보도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서는 바람이 속살거렸다. 나무들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없는 방식으로 과거를 소환해준다. 여기 땅에 나무를 심고 보살피던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지만, 그녀의 생전에 살아 있던나무들은 우리의 생애 동안에도 살아 있고, 어쩌면 우리가 떠난다음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나무들은 시간의 형태를 바꿔놓는다. - P15

모스크바에는 차르 시대에 심긴 나무들이 있다. 러시아혁명이 진행 중이던 여러 해 동안에도 그 나무들은 자라며 가을이면 잎을 떨구었고 겨우내 굳건히 섰다가 봄이면 꽃을 피웠다. 스탈린 시대의 숙청과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과 기근을, 냉전과 글라스노스트와 소비에트연방의 와해를 겪는 동안에도 여름이면 방문객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었고, 스탈린 찬미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부상하던 가을에도 잎을 떨구었다. 그리고 푸틴과샘과 나보다, 그 11월 아침 나와 함께 기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나무들은 우리 자신의 덧없음과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을 지속성을 상기시키면서, 풍경속에서 보호자이자 증인처럼 의연히 서 있었다. - P16

오웰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약 여든 편의 에세이를 이 사회주의 주간지에 기고했는데, 이에세이는 4월 26일에 「브레이 본당 신부를 위한 한마디A Good Wordfor the Vicar of Bray」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버크셔 교회 묘지에 있는 한그루 주목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오래전에그 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진 본당신부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거기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며 종횡무진하는 대가적인 솜씨를보여준다. 문제의 신부는 종교전쟁에서 거듭 입장을 바꾼 정치적변절자로 유명한데,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달아나야 했던 시기에도 그 변절 덕분에 나무처럼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웰은 그 신부에 대해 이렇게 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후, 그에게서 남은 것이라고는 우스꽝스러운 노래와 아름다운 나무 한그루뿐이다. 이 나무는 대대로 사람들의 눈을 쉬게 해왔으니, 그가 정치적 변절로 초래했을 어떤 악영향도 상쇄하고 남았음에 틀림없다." - P17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나무를 심는 것, 특히 오래가는 단단한 나무를 심는 것은 돈도 수고도 별로 들이지 않고 후세에 해줄 수 있는 선물이다. 만일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당신이 선악간에 행한 다른 어떤 일이 갖는 가시적 효과보다도 훨씬 오래갈 것이다." 그러고는 10년 전에 자신이 심은 값싼 장미들과 유실수들에 대해, 그리고 얼마 전에 그것들을 다시 찾아 자신이 후세에 남길 조촐한 식물학적 기여를 바라보았던 일에 대해 들려준다. "유실수 한그루와 장미 한 그루는 죽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잘 자라고 있다. 도합 유실수 다섯 그루에 장미가 일곱 그루, 그리고 구스베리 덤불이 둘인데, 다해서 12 하고도 6펜스밖에 들지 않았다. 이 식물들에는 별다른 일거리도 따르지 않았고, 애초에 들인액수 이상의 비용도 전혀 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름도 따로 준 일이 없었다. 그저 이따금 주변 농장의 말들이 울타리 밖에 멈춰 섰다 지나갈 때면 양동이를 들고 나가 주워 담아 온 것이 전부였다." - P18

그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1903년 6월 25일,
즉 보어전쟁 직후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춘기가 되었으며(열한 살 때 쓴 애국적인 시가 그가 처음 공개 지면에 발표한 글이었다), 러시아혁명과 아일랜드독립전쟁이 1920년대까지, 즉 그의 성년기 초입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참사의 조짐들이 고조되어가는 것을 지켜본, 그리고1937년에는 스페인내전에서 싸운 사람 중 하나였다. 독일군의 공습 동안 런던에 살았으며, 살던 집이 폭격당해 길거리에 나앉았고, 1945년에는 ‘냉전cold war‘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말년에는 냉전과 핵 병기고가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1950년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 P19

나는 나무 심기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오웰 독본The Orwell Reader」이라는 제목의 큼직하고 볼썽사나운 페이퍼백으로 읽었다. 책장 모서리가 수없이 접힌 그 책은 내가 스무 살 무렵 한 중고서점에서 싸게 사서 여러 해를 두고 뒤져가며 샅샅이 읽은 것이었다. 그 책을 통해 나는 그의 에세이스트로서의 문체와 어조를, 다른 작가들이나 정치나 언어나 글쓰기에 대한 견해들을 알게 되었다. 워낙 젊었을 때 탐독한 책이라 나 또한 에세이스트가되어가는 암중모색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족했다. 1945년에 발표된 우화 『동물농장」은 어린 시절에 만났는데, 처음에는그것을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충실한 말) 복서의 죽음을 슬퍼했을 뿐 그것이 러시아혁명이 스탈린주의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알레고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 P20

「1984』는 10대 때 처음 읽었고, 그가 스페인내전을 몸소겪고 쓴 카탈루냐 찬가를 알게 된 것은 20대 때였다. 이 책은 내두 번째 책인 야만의 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자기편의 단점들에 대한 정직성과 동시에 충성심을 보여주는 표본이자, 개인적 경험과 의심이나 불편 같은 속내를 정치적 서사로만들어가는 법을, 다시 말해 크고 역사적인 것 안에서 사소하고주관적인 내면을 다루는 법을 보여준 본보기였다. 그는 내게 가장 중요한 문학적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였지만,  - P20

그것은 미래를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그뿐 아니라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된 이듬해에도 여전히어느 정도 신뢰를 걸 만한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었다. "사과나무도 100년은 너끈히 산다. 그러니까 내가1936년에 심은 콕스 사과나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을것이다. 참나무나 너도밤나무는 수백 년을 살면서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후에야 마침내 목재로 켜질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조림 사업으로 사회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할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반사회적인 행동을할 때마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다가, 적당한 계절이 오면 땅에 도토리를 하나쯤 묻어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 에세이는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사소한 것에서 중대한 것으로 이 경우에는 한 그루 사과나무에서 과오에 대한 보상과후세를 위한 유증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그의 작품에서 흔히 나타나는 글쓰기 방식을 잘 보여준다. - P21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 과일나무들이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집 내부는 하얀 석고 벽에 어두운빛깔의 목재로 되어 있었고, 지붕이 낮은 작은 방들이 보기 좋고아늑했다. 내가 오웰과 관련지어 떠올림 직한 어떤 것보다도 그랬다. 그가 집에 대해 말한 것은 대체로 암울하게 들렸으니 1936년에는 가스, 전기, 실내 화장실 같은 현대적 설비도 없었을 테고,
이엉을 얹은 지붕도 당시에는 양철 지붕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그 집에 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레이엄은 내게오웰이 서재로 쓰던 부엌 옆방과 당시 가게 역할을 하던돈과그레이엄은 거실로 쓰는―그다음 방 사이의 나지막한 출입구를보여주었다. 키 큰 오웰은 매번 고개를 숙였든가 아니면 상인방에머리를 찧었을 것이었다. 문에는 몇 개의 틈새를 내어 작업 중에도 손님이 들어오는지 볼 수 있게 해놓았다. - P25

정원의 나무들은 없어졌지만, 나이절을 만나고 나무 그루터기를 돌아보고 사진들을 보고 나자, 그들은 오웰이 심은 장미들은 아마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화들짝놀랐고, 과일나무에 대한 실망이 갑자기 흥분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관심이 일었다. 우리는 다시 정원으로 나갔고, 그곳에는 그11월의 날에도 멋대로 자란 커다란 장미 두 그루가 꽃을 피우고있었다. 한 그루에는 연분홍 꽃봉오리가 조금 벌어져 있었고, 다른 한 그루에는 거의 새먼핑크 빛깔의 꽃이 피었는데, 꽃잎들의밑동은 금빛이었다. 따져보면 여든 살은 되었을 이 나무들은 왕 - P25

성하게 살아 있었다. 이 살아 있는 나무들을 심은 살아 있는 손(과삽질)의 주인은 그 여든 해 중 처음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지만말이다. 그레이엄의 말로는 장미들이 워낙 많이 피어서 오웰이 임차를 끝낸 후 1948년에 그 집을 샀던 교사 에스더 브룩스는 그 장미를 마을 축제의 입장권으로 썼다고 한다. 1983년에 그녀는 오웰이 심은 알버틴 장미가 "정원의 영광"이며 "아직도 핀다"는 기록을 남겼다. 5그의 장미들은 1939년 11월에도 피고 있었으며, 오웰은 그의 가사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은 패랭이꽃들을 거둬내고, 바람에 쓰러진 국화들을 세워 묶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 오후에많은 것을 하기가 힘들다. 국화는 지금이 한창인데, 대개 어두운적갈색이고, 몇 그루는 보기 흉한 보라색과 흰색이 섞인 것이라패어버려야겠다. 장미나무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려 한다. 그러지않으면 이제 정원에는 꽃이 없어질 것이다. - P26

갯개미취 철도 지났고, 일부는 패어버렸다." 그를 알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세상을떠났지만, 그 장미들은 오웰을 포함하는 일종의 사에쿨룸이다.
나는 문득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 에세이의 살아 있는 잔재와 마주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그에 대한내 오래된 생각들을 새롭게 해주었다.
두 그루 장미가 그에 대해, 또 장미와 과일나무에 관한 오래전의 에세이에 대해, 그리고 지속성과 후세에 대해 갖는 관계의 직접성이 나를 기쁨으로 들뜨게 했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 - P26

와 프로파간다에 대한 선견지명으로, 불유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것으로, 건조한 산문체와 굴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로 유명하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장미를 심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나 공리주의자, 실용주의자나 또 아니면 그저 실제적인 사람이 과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과일나무는 가시적인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산물 물론 그 이상이지만을 내니 말이다. 하지만 장미 한 그루를 또는 그가1936년에 복구한 이 정원의 경우처럼 일곱 그루를, 그리고 나중에는 더 많이 심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 P27

나는 30년도 더 전에 처음 읽은 그 에세이 속의 장미들에대해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장미라니, 오웰에 대해 내가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던 전통적인 시각을 접고 그를 더 깊이 알아보라는 초대와도 같았다. 그 장미들은 그가 어떤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이자, 즐거움과아름다움이, 계량 가능한 실제적 결과가 없는 시간들이, 정의와진실과 인권과 세상을 변혁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어떤 사람의 삶에, 어쩌면 모든 사람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 P27

오웰에 대해서는 많은 전기가 나와 있고, 이 책을 쓰는 데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서가의 전기 칸에 한 권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한 작가가 몇 그루 장미를 심었다는 그행위를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 뻗어나가는 일련의 탐구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단 장미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장미는식물 왕국의 일원이자 특별한 종류의 꽃으로, 시에서부터 소비산업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방대한 인간적 반응들을 불러일으켜왔다. 장미는 널리 퍼져 있는 야생식물 내지 다양한 종의 식물을 가리키는 동시에, 널리 재배되고 매년 새로운 품종들이 만들어지는 원예식물이다. 후자의 경우 장미는 큰 산업이기도 하다. - P29

장미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그러다 보니 사실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다. 중세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가 보편 탐구에서 장미를 예로 든 것을 비롯해 모터니스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장미는 장미는 장미다Rose is a rose is a rose"에 이르기까지, 장미는 더 큰 어떤 것을 말하는데 원용되어왔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가 한 말이있는데, 그 취지인즉슨 모든 것이 몸을 상징하듯이 몸도 다른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서구 세계에서의 장미에 대해서도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로서 장미는 안 쓰이는 데가없어서 여성용 속옷에서부터 묘비에 이르기까지 판에 박힌 듯 장미가 그려지니, 그야말로 ‘월페이퍼‘라 할 만하다. 실물 장미도 구애, 결혼, 장례, 생일, 그 밖의 여러 계제에 등장하여, 기쁨과 슬픔과 상실과 희망과 승리와 즐거움을 말해준다. 2020년 여름 흑인인권운동의 지도자이자 국회의원이던 존 루이스 John Lewis가 죽자, 그의 관이 마차에 실려 앨라배마 다리를 건넜는데, 그 다리는그가 항의 시위로 도보 행진을 하다가 주 경찰관들에게 죽도록몰매를 맞은 곳이었다. 그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당시뿌려졌던 피를 상징하는 붉은장미 꽃잎이 흩뿌려졌다. - P30

장미는 지상 어디에서도 인간의 주식은 아니지만, 중세에는 장미 꽃잎이 들어가는 요리법도 있었고, 장미 열매(로즈힙)는 여전히 차나 그 밖의 탕제를 만드는 데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식품성(오웰의 아내 아일린 오쇼네시 블레어EileenO Shaughnessy Blair가 거기서 일했다)은 수입 식량, 특히 감귤류가 끊어지자 국민에게 비타민 C를 공급하기 위해 로즈힙을 채집하는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42년 무렵에는 200톤에 상당하는 1억3400만 개의 로즈힙이 채집되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은 시럽으로 만들어졌지만, 식품성에서는 수제 로즈힙 마멀레이드 요리법을 개발했으며, 이것은 독일에서 여전히 흔한 식품이라고 한다.
장미는 물론 향수와 향유를 만드는 데도 쓰인다. - P35

지난 몇 세기 동안 재배자들은 그런 형태를 다양화했고,
그래서 오늘날에는 수천가지 다양한 장미가 있다. 오래된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백장미(알바 로즈) 등에서부터 잡종 티 로즈의 무수한 변종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거대한 것까지 있는 캐비지 로즈, 한 줄기에 한 송이만 피는 것에서부터 여러 송이가 모여 피는 것, 관목에서 덩굴, 순백에서 자주와 보라의 수많은 색조들, 그리고 온갖 색조의 진흥과 분홍과 빨강과 노랑의 장미가 있으며, 향기도 달콤하다, 짜릿하다, 새콤하다, 과일향이다, 몰약 같다, 사향 같다 등등 다양하다. 장식으로서도 장미꽃은 생명 그 자체를 나타낸다. 다산성, 필멸성, 무상함, 사치, 그 모든 것으로 장미는 우리의 예술과 의례와 언어에 들어와 있다. - P36

1936년 4월 2일,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두어 달 전에 오웰은 웰링턴에 막 도착하여 집을 빌리고 정원을 손질하고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해 봄을 전후한 두 차례 여행을 통해 그는 정치에 눈을 뜨고 정치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 나아가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작가로 성장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월링턴 집은 그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다른 어떤 주소보다도 오래유지하는 주소가 되었고, 시골의 정원 있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주로 작가로서 생계를 꾸리며 산다는, 그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되는 곳이기도 했다. - P37

1927년 그는건강 악화를 이유로 공식적으로 그곳을 떠났고, 다시 돌아가기를거부했다. 13년 후에 그는 자신의 버마 시절 직무에 대해 이렇게말했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둔 것은 그곳 기후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고 또 막연하게나마 이미 책을 쓸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주된 이유는 갈수록 협잡으로 여기게 된 제국주의에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그런 문학적 야심과 당시프랑스의 저렴한 물가가 귀국 직후 파리로 간 이유였겠지만, 한편으로 그는 부모가 원하는 상류 지향이 아니라 하류 지향의 삶을살기로 결심한 터였다. 스스로 가난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보낸 시절에 대한속죄이자, 자라면서 멀리하도록 배운 계층들에 동참하려는 결의였다. - P39

그가 머물렀던 다른 곳들, 즉 고달팠던 예비학교, 이튼스쿨, 버마, 파리, 그리고 내전기의 스페인, 극빈 시절과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런던, 그리고 그가 말년에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에 비하면, 윌링턴은 그다지 주목받지못했다. 버마, 파리, 런던, 스페인이 모두 그의 책의 배경이 되었던것도 사실이고, 내가 그 가을 장미들을 만난 후로 그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거듭 만나게 된 오웰의 면모들과 더 잘 어울리는 것도사실이다. 이런 책들은 그의 정치적 참여, 동년배들일부와의 조화롭지 못한 관계, 프로파간다와 전체주의가 어떻게 상생하며 인 - P40

권과 자유를 위협하는가에 대한 드문 통찰력, 그리고 마침내 마혼여섯의 나이에 그의 목숨을 앗아갈 호흡기 질환 등을 강조한다. 그중에는 「오웰, 한 세대의 겨울 양심Orwell: Wintry Conscience ofa Generation이라는 제목도 있었다. 하나같이 그를 잿빛으로 근엄하고 우울하게 그린 책들이었다. - P41

어쩌면 현재와 장래의 기괴함과 잠복해 있는 위험에 대한끈질기고 철저한 검토야말로 그의 특징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그가 본 것이 곧 그인 양, 또는 그것이 그가 본 전부인 양규정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장미를 보고 놀란 후에 다시 그의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러면서 정치적 기괴함에 대한 냉철한 시각과 균형을 이루는 듯한 또 다른 시각들을 지닌 오웰을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얼마나 즐거움에 대해 말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아늑함이라고 부를 만한 가정적 편안함의다양한 형태로부터 외설적인 그림엽서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미국 아동 서적들과 디킨스 같은 영국 작가들의 "좋은 악서들",
그 밖에도 수많은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물, 식물, 꽃, 자연경관, 정원 일, 전원 등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의 책들 곳곳에서ㅡ「1984」에서도 ‘골든 컨트리‘에 대한 서정적 환기, 그 빛과 나무들과 목장과 새들의 노래, 자유와 해방의 느낌에 이르기까지 다시 나타난다. - P41

다. 오웰은 후자에 속했던 것 같다. 그는 여러 면에서 군인처럼 엄격하게 살았고, 신체적 불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신체적 한계를 무릅쓰고 자신을 몰아세우다 몸져누웠고, 그래도 몇 번이고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때때로 만나게 되는 딸기에 손을 뻗치곤 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생물학적여건에 대한 반항아요 사회적 여건에 대한 반항아였다. 이 두 가지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결점 없는 인물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그녀의 생전에 마땅히 그래야 했던 만큼 다정하지도 충실하지도 못했던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도 자기 계급과 인종과 국적과 성별과 이성애와 시대에 고유한 편견 중 일부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초기에 발표한 작품들과 편지들에서는 그런 편견에서 우러난 경멸과 조롱이 강하게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날을 세움으로써 자기 입지를 확보하는듯한 태도는 그가 작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좀 더 자신감이 생기고 너그러워지면서 차츰 사라졌다. - P44

그의 글은 때로 총기에 넘치고 대체로 유용하며 선견지명으로 유명하다.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한데, 그 아름다움이란 예쁨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글에도 편견과 맹점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는 비록 어떤 면에서는 그리 본받을 만하지 못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용감하고 헌신적이었다. 그는 영국적인 것을 사랑하는 동시에 대영제국과 제국주의를 - P44

혐오했으며,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약자와 외부인을 위해 나섰으며, 그가 인권과 자유를 옹호한 방식은 여전히유효하다. - P45

그는 1984』의 이런 문장들로 엄청나게 유명해지게 된다.
"미래의 모습이 보고 싶다면, 인간의 얼굴을 짓밟는 장화books 발을 상상해보게. 영원히 말일세." 그는 1946년부터 언어의 사용과 오용에 대한 이런 문장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정치적 언· 거짓말이 진실처럼 들리게 하고 살인을 존경받을 만하게 만들며 헛바람을 견고해 보이게끔 하도록 고안되었다. 그는 냉소에 능했고, 잭부츠jackboots(군용장화)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것에 대해 은근한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던1944년의 이런 문장은 그 일례이다. "신문 기자에게 잭부츠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러면 그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래도그는 여전히 잭부츠 얘기를 한다." - P46

지만 조금씩 정리가그의 글에는 흉측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종종 공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취재차 독일에 갔던 그는 보행자용 다리 근처에서 시신을 하나 발견했다. 그 다리는 슈투트가르트를 지나가는 강에 놓인 다리들 가운데 끝까지 폭파되지 않은몇 개 중 하나였다. "죽은 독일 병사 한 명이 계단 발치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굴은 밀랍처럼 노랬다. 가슴에는 누군가가 놓아둔라일락 한 다발이 있었다. 사방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던 무렵이었다." 4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그림 같은 장면이다. 노란 얼굴과 라일락, 죽음과 삶, 봄의 생기와 전쟁의 참상. - P47

만일 오웰의 작품을 파고든다면, 꽃과 즐거움과 자연에 대한 수많은 문장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문장들을 읽노라면흑백 초상화가 총천연색으로 살아나고, 그런 대목들을 찾다 보면 그의 마지막 걸작인 1984」조차 인상이 달라진다. 그런 문장들은 정치적 분석보다 호소력이나 예지력이 덜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름대로의 시정과 힘과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자연 자체가 엄청나게 정치적인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상상하고 자연과 상호 반응하고 자연에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이 정치적인데, 그의 시대에는 이 점이 별로 인식되지 않았다. - P48

감정은 신체적인 두려움과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또한 이념과 참여와 문화로부터도 생겨난다.
1946년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오웰은 바로 그 점에 대해 말한다. "내 작품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누구든 알아차릴 것이다. 내 글은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일 때도본격 정치인이 본다면 엉뚱하다고 여길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습득한 세계관을 완전히버릴 수 없으며 버리고 싶지도 않다. 살아 건재하는 한, 나는 산문문체에 매력을 느끼고, 이 세상을 사랑하며, 구체적인 대상들과쓸모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얻기를 계속할 것이다. 내 이런 면을 억누르려 해도 소용없다. 문제는 내 안에 깊이 자리한 좋고 싫음을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들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 P49

가운데 문장에서 느끼고feel, 사랑하고 love, 얻는다 take라는 동사들로 연이어 표출되는 소신이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그사랑과 즐거움의 대상에 대해 극히 구체적이다. 그가 그런 현상들에 많은 시간을 바쳤고 거기서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는 것은그 자신의 글이 보여주는 바이지만, 그에 관한 책이나 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인상은 대개 전혀 딴판이다. 그는 꽃과 함께 많은시간을 보냈으며, 전원에서나 전혀 전원적이지 못한 환경에서나꽃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4년, 수년째 폭격당해온 런던에 살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폭격 맞은 자리에 풍성하게 피어나는, 분홍 - P49

꽃이 피는 잡초"의 이름을 아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 무렵 시인 루스 피터Ruth Pitter가 그를 방문하기 위해 상경했고, 그녀는 오랜 후에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당시런던에서는 살 수 없는 두 가지를 갖고 갔다. 하나는 에식스주의어머니 집에서 딴 먹음직한 포도 한 송이였고, 다른 하나는 붉은장미 한 송이로, 둘 다 드문 보물이었다. 나는 그가 감탄과 기쁨이가득한 얼굴로 포도를 받아들던 모습, 그리고 앙상한 손으로 장미를 감싸며 일종의 경의가 담긴 기쁨으로 그 향기를 맡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뚜렷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 P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