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에서 얼마나 많은 측면을 벗겨내면 더 이상 그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아니게 될까? 어떤 것이 더 이상 그 자체가아니라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은 언제일까? 의미가 해체되거나 정의가 계속 확장되다가 아예 거덜 나버리는 것은 언제일까? 장미농장 견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한 기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색색의 장미 꽃다발이 담긴 원통형 투명 용기 수백 개가긴 철제 탁자 위에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얼마나 오래가는지 시험 중이었고, 각각의 이름이 꽃다발 앞쪽 표찰에 적혀 있었다. 마치 공식 만찬의 좌석 배정표와도 같았다.  - P285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곳에 부재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천장 낮은 방 안에 있는 수천 송이 장미꽃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향기란 일종의 목소리, 꽃이 말하는 방식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그것을 "공중에 감도는 애무"
라고 했다. ‘꽃으로 마음을 전하라는데, 이 꽃들은 벙어리였다.
물론 온실에는 향기가 나는 노란 장미들이 심긴 줄도 있었지만,
이 꽃들 역시 겉모습과 지속성을 위해 가꾸어진 것이었고, 그 두가지야말로 그것들을 수익 상품이 되게 해주는 것이었다(종종 장미는 연약하다고 생각되지만, 다른 꽃들에 비해 오래가는 꽃이다. 다른 많은꽃들은 너무나 섬세하고 단명하여 대량 생산이나 해외 수출이 불가능하다).
향기는 일부러 교배되지도 않았지만, 굳이 찾는 이도 없었다. - P286

하지만 장미에 향기가 없다는 것은 그 견학이 불편했던이유들 중에 사소한 편에 속했다. 온실 다음에는 작업장을 둘러보았는데, 온실에서 들여온 장미들을 포장된 꽃다발로 만들어내보내는 드넓고 썰렁한 공간이었다. 어떤 꽃다발들에는 이미 바다 건너 멀리 있는 슈퍼마켓의 이름과 가격이 찍힌 라벨이 붙어있었다. 그것은 장미농장이라기보다, 장미라는 제품을 생산하는공장이었다. 바닥은 축축했고, 잎사귀와 가시 달린 줄기, 꽃잎들이 널려 있었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젊고 동작이 빨랐으며 고무장화를 신고 회색 작업용 점프슈트나 구호가 찍힌 작업용 셔츠를입고 있었다. 고무장갑을 착용한 이들도 있었다.
싸늘한 공기 속에서 150명쯤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날이 겪는 시련에 틈입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들의 상사와함께 있다는 것은 마치 내가 그 시스템을 용인하고 나 자신도 관리자들과 한편이 되어 위협적이고 억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너무 바삐 돌 - P287

장미는 흙에서 재배되었지만, 꽃다발은 여느 대량 생산제품과 마찬가지로 생산 라인 위에서 조립되었다. 남자들이 장미가 실린 큰 수레를 밀고 작업장 안을 돌아다녔고, 다른 남녀 노동자들이 직사각형 망사천에 싸인 장미들을 가져다가 색깔과 줄기의 길이 등 기준에 따라 분류한 후에 방의 길이만 한 괴물 빗처럼생긴 일종의 틀에 실었다. 장미들은 빗살 사이로 추려졌고,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노동자들이 장미를 한 번에 몇 송이씩 꺼내 다발로 모으고 특성과 유사성에 따라 추린 다음 모든 봉오리들―활짝 핀 것은 없고 늘 봉오리뿐이었다―이 나란하도록 묶고 줄기들을 같은 길이로 잘라냈다. 잎사귀들을 떼어내는 작업을 하는사람들도 있었고, 양동이에 물을 담아 완성된 꽃다발을 냉장실로 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방은 냉동 직전의 온도로, 그곳에서 선적을 위해 분류되는 것이었다. 어떤 꽃다발들은 실제로컨베이어벨트 포드 자동차 공장의 상징과도 같은 구조물에실리기도 했다. - P288

베아트리스가 지적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노동자들을연구하는 엔지니어들이 투입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작업 교대조 중 누가 화장실에 몇번 갔는지, 또 누가 꽃을 집어 드는 데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등을 일일이 기록했다. 그 모든 정보는 노동자들에게 생산성을 높이고 행동의 자유를 최소화하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작업장은 우리가 선샤인부케에서 보았듯이 현대화되었고, 노동자들은 온종일 한 가지 일만 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광대하고 끊임없이 돌아가는기계의 부속이 되었으며, 기계가 점점 빨라질수록 노동자 각자는30년 전에 하던 것의 몇 배나 되는 일을 해야만 했다. - P290

그들 뒤에서는 한 여자가-우리는 그녀를 ‘스케이터‘라 불렀는데 그 꽃들을 집어서 개수를 세고 꼬리표를 붙여 가져갔고요. 하지만 그건 한 사람이 온종일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기만 해야 한다는 거예요. 회사가 들어선 후 생겨난 문제들 중 또 한 가지가 그거였어요. 같은 기능의 반복으로 인한 직업병 말이에요. 꽃을 자를 때 가위를 써야했던 것처럼, 그 작업장의 여자들은 꽃을 추려야 했고, 활액낭염,
건염, 회전근개 증후군 등을 얻게 되었어요."
베아트리스 자신도 열두 해 동안이나 꽃을 자른 끝에 팔에 통증을 얻게 되었다. "일반 보건의에게 갔더니 몇 가지 질문을하고 검사를 하더군요. 결국, 꽃 일 때문에 수근골증후군과 건염이 생겼다는 진단이었어요."  - P291

문제는 단지 인간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네 여자는 화훼산업에 소비되는 물이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물 부족을 겪고 있어요. 꽃은 60퍼센트가 물이라는 걸 기억해야지요. 꽃 한송이를 사도 60퍼센트는 물이고 40퍼센트만 고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수출하는 건 엄청난 양의 물이지요. 게다가 사람들은 보고타의 사바나 지역은 공기가 맑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거짓말이에요. 이 사바나 지역과 인근 지자체들의 공기는 고도로 오염되어 있어요. 60년 동안 누적된 화학물질과 살균제 때문이지요. 이 살균제 때문에 나비는 물론이고 다른 곤충들과 벌레들, 여기 살던 수많은 곤충들이 죽었어요.
다시 말해 화훼 산업의 문제는 사회 문제이자 노동 문제일 뿐 아니라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화훼 산업에서는사회, 노동과 관련된 쟁점들이 중요하고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도 그와 관련된 거지만, 환경적인 측면도 끔찍해요. 그것은 물을고갈시키고, 동식물과 공기와 모든 것을 망쳐버렸어요." - P292

장미의 추악함은 그런 식으로 생산된다는 데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 점을 간과한다는 데 있을까? 장미는 어떤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라는, 일종의 거짓말이 되었는가? 그것들은 이제 기만의 징표, 실제 생산 여건보다 외관상의 아름다움을표하는 일종의 기만이 아닌가? 오웰의 작품 상당 부분은 다양한 종류의 추악함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가 추악하다고 본 것은그가 아름답다고 본 것의 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이었다. - P293

오웰에게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너무나 많은 것이 언어에있었다. 그는 모든 계약의 핵심이 되는 계약으로서의 언어에 열정적으로 투신했다. 말들은 그것들이 묘사하는 것―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이념이든ㅡ과의 신뢰할 만한 관계 속에 존재해야했다. (양가성, 애매성, 혼동, 엇갈리는 시각, 믿을 만한 정보의 결여 등에 맞닥뜨린다 해도 그런 정황 자체에 대해 정직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주제가 명확하지 않을 때에도 명확할 수 있다. 가령 그가 카탈루냐 찬가』에서 자신은몇몇 상황의 진실을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본 것을 보고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말할 때처럼 말이다.) 깨진 계약을 가리키는 다른 말은거짓말이다. - P295

거짓말은 앎과 연결의 능력을 잠식한다. 앎을 차단하거나왜곡함으로써, 또는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거짓말쟁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박탈한다. 정확한 정보는 공적이고 정치적인삶에 참여하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기 주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상황을 알기 위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데 말이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는 것과 거짓말의 희생자가 아는 것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 거짓말에 넘어가는 사람 내지 사람들은 전적으로 믿을 수도, 혼란에빠질 수도, 의심할 수도 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기만당하고있음을 알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만의 본질이나 그것이은폐하려 하는 바에 대해서는 알 수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권위주의자들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뻔히 거짓말인 줄 아는 것에동조하게끔 종용하며, 또 다른 이들을 기만할 수도 있을 마지못한 공모자들로 만든다. 아는 것은 힘이니, 앎의 공평한 분배는 다른 여러 형태의 평등과 불가분이다. 사실을 알 공평한 권리가 없이는 의사결정에서 공평한 능력을 가질 수 없다. - P296

내 저작 중 상당 부분은 목소리의 불평등에, 즉 성과 젠더에 관한폭력이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일부 음성들을 침묵시킴으로써 자행되어왔던가에 관심을 촉구해왔다. 침묵을 강제하기위해 흔히 위협과 폭력이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체계적인 저평가도 행해져왔으니, 그런 음성들은 신뢰할 수 없고, 말할 자격도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으며, 우리의 삶이 어떤 종류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장소들에는 들어올 가치조차없는 것으로 묘사되어왔다.
한 사회에서 일부 음성들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실제로용인되고 장려되는 어떤 것을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취급함으로써 사회가 그것에 공식적으로 반대할 수 있게 만든다.  - P297

오웰의 가장 의미심장한 맹점 중 하나는 젠더에 관해, 결혼과 가정이어떻게 권위주의 체제의 축소판이 될 수 있는지, 진실을 탄압하고 강자를 보호하는 거짓을 선포하기에 이르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관행은 일터와 학교(그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권위주의에 대해서는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에서, 공적 생활에서, 그리고 사생활에서는법과 관습과 문화에 의해 강화되는 부분들에서 복제된다. 그는 그런 불평등을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전략적으로 망각했던 세대에속했다. 이후로 우리는 그런 불평등을 인식하기 위해 애써왔다.
적어도, 우리 중 일부는 그래왔다. 옛 질서와 그것이 포함하는 탄압 및 배척을 보존하기 위해 역시 힘써 투쟁해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 P297

그러나 기만은 행동뿐 아니라 신념에도 작용하므로 좀 더 미묘한 통제를 가져온다." "거짓말은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거짓말쟁이에게 일종의 방패가 되며, 허위를 유포함으로써 검이 된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도 중요하지만, 권력을 가진 이들이 휘두르는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은 그 자체로 파괴력을 갖는다. 강자들의 거짓말 속에서 살도록 강요되다 보면 서사에 대한 자신의 힘을 결여한 채 살게 되며, 종국에 가서는일체의 것에 대한 힘을 상실하게 된다. 권위주의자들은 진실과사실과 역사를 무찔러야 할 경쟁 체제로 본다. - P299

오웰의 작가로서의 삶은 위선과 회피에 대한 통상적인혐오와 함께 시작되었다. 스페인전쟁은 이를 첨예화하여 정치적 삶에서 거짓이 갖는 위력에 초점을 맞추게 했고, 이런 경향은1940년대의 에세이들과 동물농장」, 그리고 아마도 제도적 기만에 관한 20세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책일 1984에서 점차 강해진다. 스페인전쟁에서 프로파간다의 세례를 받은 것이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서, 적으로 추정되는 편뿐 아니라 자기편 안에서도부패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의 편이란 이른바 자유 세계 내의 좌익이요 인텔리겐치아였는데, 당시 그들은 스탈린의 소련이라는 극단적인 거짓말로이루어진 독재와 전 세계의 전초 기지들 및 지지자들을 묵인하고 있었다.  - P299

결국 전체주의하에서는 거짓말로 이루어진 체제가 그 치하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 및 언어에서 진실과 정확성을 찾기를 포기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정신 상태를 파탄에 이르게 한다. 때로 이것은 지적 굴복, 믿기 편리한 모든 것을 기꺼이 믿으려는 주눅 든 순응성, 때로는 냉소주의,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는 태도, 모든 것이 다 똑같이 썩었다는 단언등의 형태를 취한다. 한나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유명하다.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민은 확신에 찬 나치나 확신에 찬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즉 경험의 현실성),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즉 사유의 기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사람들이다." 그 구분을 찾아내어 기록하는 것이 오웰의 주된 과업중 하나였으니, 아렌트의 말을 뒤집어 전체주의의 강력한 적은 사실과 허구 사이,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에 열정적이고 분 - P301

명한 자, 자신의 경험의 현실성과 그것을 증언하는 능력 위에 서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와 오웰은 각기 전체주의의 기원』과 1984에서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아렌트는 1951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전체주의가 낳는 외로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기 생각의파트너인 자신에 대한 신뢰와 도대체 경험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필요한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잃어버린다. 자아와 세계,
생각과 경험의 능력이 동시에 상실되었다." 오웰은 1946년의 문학 예방」이라는 에세이에서 거짓말이란 "전체주의에 필수적인요소이며, 강제노동수용소와 비밀경찰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해도 여전히 존속할 무엇"이라고 쓴다. "전체주의적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과 사실과 역사에 대한 권력도 갖는 것이며 꿈과 생각과 감정을 무시하고 그것들에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 P302

그는 계속 말한다.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역사란 배우기보다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란 사실상 신정 국가이며, 그 지배계급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실수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야만 한다. 이런저런 실수를 없었던 것으로, 이런저런 허구적인 승리를 실제로 일어났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심심찮게 과거 사건들을 새로 짜 맞출 필요가 생긴다.. 전체주의는 사실상 과거를 계속 변조할 것을, 결국에 가서는 객관적 진
실의 존재 자체를 믿지 말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전체주의는 거짓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 P302

언어의 문제요 스토리텔링의 문제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 언어를가지고 싸워야 한다. 즉 체제가 조작할 수 없는 역사의 언어, 현상황을 폭로하는 독립된 언론, 진술의 근거를 요구하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개념과 원리를 발견하고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사상의 언어, 언어로써 만든계약에 대한 존중 등으로 말이다. 관계들을 떠받치고 외로움을몰아내는 사랑과 우정의 언어로, 경험의 미세한 음영과 뜻밖의배열을 포착하는 시의 언어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그것들을안전하게 행할 자유와 그런 일들이 위험할 때에도 감행할 용기를요구한다. - P303

오웰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전체주의로 타락하기 위해 꼭 전체주의 국가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이 우세한 것만으로도 일종의 독이 퍼져, 문학적 목적으로 쓸수 없는 주제들이 차례로 생겨난다. 강요된 정설때로는 두 가지 정설이 있는 곳에서는 좋은 글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한다."5좋은 글은 자유, 특히 진실을 말할 자유에서 나온다. 최선의 상태에서 말은 사물을 드러내며 선명히 보여준다. 최악의 상태에서는그 반대가 된다. 오웰은 1946년의 또 다른 에세이 정치와 영어」에서 그 문제를 다루어 이렇게 쓴다. "과장된 문체는 그 자체로일종의 완곡어법이다. 다량의 라틴어 단어들은 사실 위에 부드러운 눈처럼 내려 윤곽을 희미하게 하고 세부들을 덮어버린다." - P303

「정치와 영어」는 너무 헐겁고, 엉성하고, 막연하고, 우회적이고, 회피적인 언어를 비판한다. 1984는 너무 옥죄는, 어휘도 함의도 너무 제한적인 언어, 어떤 단어들은 말살되고 또 어떤단어들에서는 풍부한 환기적 의미들이 소거된 언어를 묘사한다.
그 중간 어디쯤에, 명료하지만 환기력이 풍부한 언어의 가능성이있다. 그 언어 안에서 말하고 글 쓰는 이의 모색은 듣거나 읽는 이의 모색을 촉구할 것이며, 언어에는 다소 야생적인 무엇이 있어서그 야생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이 겹쳐질 것이다. 그 전일성, 그 준수된 계약들, 연결하고 힘을 주고 해방하고 조명하는 말들의 사용을 통해 온전케 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나 그 자신의 작가로서의 노력에서나 그가 가장 신봉하고 또 가장 경하했던 아름다움이다. - P306

그런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흔히 시사하는 시각적 미려함과 반드시 비슷할 필요가 없다. 1946년 에세이 나는왜 쓰는가는 그런 문제 전반을 다룬 글이다. 글을 쓰는 몇 가지동기 중 하나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다. "외부 세계의 - P306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들과 그 적절한 배열12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미치는영향이나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과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발견하는 즐거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놓쳐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 그도 젊었을 때는 "결말이 불행하고, 자세한 묘사와 매혹적인 비유로 가득한, 그리고 어느 정도 소리를 위해 택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구절이 가득한, 거창한 자연주의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화려함에대한 애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면, 따분한책들을 쓰고 화려한 문구나 의미 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나허튼소리에 빠져 있었던 것은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있던 때였다." - P307

윤리적 목적이 심미적 수단을 첨예하게 한다는 점을 그는분명히 한다. 그를 무의미에서 구해낸 것은 정치였다. "평화로운시대였다면 나는 장식적이거나 그저 묘사적인 책들을 썼을지도,그리고 내 정치적 방향성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을지도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종의 시사 논설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사 논설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심미적 요구나 즐거움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하게하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 P307

뒤이어 내 오랜 신조가 되어준 문장들이 나온다. "하지만나는 책을 쓰는 일도, 그저 좀 긴 잡지 기사를 쓰는 일도, 그것이또한 심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정치인의 눈에는 무관하게 보일 대목들이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살아서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줄곧 산문 형식에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땅의 표면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들과 쓸데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무관하게 보일 만한 것이란 일련의 즐거움들과 개인적인 열심들이다. 마치 ‘빵과 장미‘에서 장미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이란 많은 사물에 대한 폭넓고 길들여지지 않은 흥미, 특히 뒤이은 문장에 나오는 땅의 표면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일 터이다.) - P308

명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성 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것들 가운데서 비로소 대상이 진실하게 재현될 수 있고, 앎이 민주화되고, 사람들이 힘을 얻고, 문들이 열리고, 정보가 자유롭게이동하고, 계약들이 준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글은 그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글에서 흘러나오는 것에서도 아름답다.
오웰의 작품에는 더 인습적인 종류의 아름다움 버마의 숲에서영국의 초원에 이르는 자연 경관, 그 모든 꽃들과 두꺼비의 황금빛 눈알에 이르기까지도 있다. 하지만 윤리와 심미성이 별개가아닌 이 아름다움, 진실과 전일성의 언어적 아름다움이야말로그가 자신의 글쓰기에서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은 언어와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 한 공동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온전함이요 유대감으로 작용한다. - P309

1321936년, 한 젊은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10년 후, 더 지치고더 현명해진 남자는 더 야심 찬 규모로 또 다른 정원 만들기에 착수했다. 잉글랜드 남부 웰링턴의 작은 정원과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주라섬의 작은 농장으로 발전한 정원 사이 10년 동안, 그의 인생은 여러 차례 달라졌고 작가로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많이 초췌해졌다.  - P313

BBC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존 모리스 John Morris는 그가
"샤르트르 대성당 전면의 인물상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키가크고 여윈 그에게는 수척한 고딕적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자주웃었지만, 가만있을 때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돌에 새겨져 갖그에은 풍상을 겪은 중세 성인의 잿빛 금욕주의가 느껴졌다.
게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숱 많고 뻣센 머리칼과 특이한 눈빛이었다. 다정함과 열광이 뒤섞인 그 눈빛은 그가 보통 사람들보다더 많은 것을 보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실제로 그랬다)." 그가쌕쌕거리며 숨 쉬던 것, 그리고 조금만 힘들어도 지쳐버리던 것을회고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육신은 그랬다. - P314

1946년의 오웰은 감탄할 만하다. 아일린의 죽음을 전후하여, 1943년 3월에는 이미 홀몸이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1946년 5월에는 누나가 죽었다. 그 자신의 건강도 악화일로였고,
슬픔과 탈진에 빠져들 만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많은 글을 썼고계획들을 잔뜩 갖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당시 붙인 제목으로 유럽의 마지막 인간The Last Man in Europe」이라는 야심만만한 소설을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브리튼의 섬들 중 가장 외진 헤브리디스 제도의 주라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1944년 여름에 잠깐 그 섬에 간 적이 있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그는 "저널리즘에 깔려 죽을 것만 같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영웅 - P316

적인 속도로 에세이와 서평을 써냈고, 그해 겨울과 봄에는 때로일주일에 네 편을 쓰기도 했다.
그 무렵 쓴 글 중에 일상적인 안락함과 즐거움을 구가하는 몇 편의 에세이가 있다. 이것들은 1945년 말부터, 그가 저널리즘을 접고 장차 1984」라는 제목을 갖게 될 소설을 시작하기 위해 주라섬으로 이주한 1946년 5월 사이에 쓰인 글들이다. 이에세이들에 대해서는 실제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일에 치인 작가에게 그 가정적이고 목가적인 주제들은 그다지 자료를 읽거나 달리조사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몽상이라고나 할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가볍게 취급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쓰게 될 묵직한 소설에도 그 가벼운 에세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 P317

오래전 내게 그토록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이 패기 있는 에세이, 내가 웰링턴의 시골집을 찾아가 그곳에 피어 있는 장미를보고 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던 그 글은 홀아비가 된 한 남자가결혼해 살던 곳을 정리하고 그 시절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돌아갔던 여행의 결과물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최근에 나는 전에 살던 시골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흐뭇한 놀라움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좋은 일을 했다는 느낌으로-내가 거의 10년 전에 심은 것이 어떻게 자랐는가를 보았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그 방문이 예상했던 만큼 고통스럽지는않았다고 묵은 편지들을 발견했을 때 말고는썼다. 길을따라 거닐다가 "우리가 도롱뇽을 잡곤 하던, 폐기된 작은 저수지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평소처럼 올챙이들이 생기고 있더군요."
또 한 문단 다음에서는, 주라섬에서의 삶을 기대하며 훨씬 더 웅장한 바다와 바다짐승을 묘사한다.  - P327

다시 시작한 가사 일기에는 런던과 누나 마조리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갔던 노팅엄에서, 거기서 내처 스페인내전 시절의 친구 집에 들렀던 에든버러 근처에서, 그리고 돌아온 주라섬에서본 꽃들이 묘사되어 있다. 5월 22일 그는 주라섬으로 돌아가는 길에 뉴캐슬 근처에 있는 아일린의 무덤을 돌아보러 갔었다. "E의무덤 위 폴리앤서 장미들은 뿌리를 잘 내렸다. 꽃다지, 패랭이꽃,
바위취, 일종의 양골담초, 돌나물, 석죽, 그런 것들을 심었다. 모종들의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고 있었으니 잘 살아날것이다." 그것은 오웰의 생애에서 가장 마음 아픈 장면 중 하나였을 것이다. 홀아비가 되어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서, 흐리고 비 내리는 날, 젊은 아내의 무덤 앞에 쭈그리고서 땅을 파고 꽃을 심는 그의 모습이란. - P328

소설가이자 열정적인 나비수집가였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는 회고록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나비가 얼마나 눈에 안 뜨이는지 놀라울 정도다"라면서, 산길을 내려오는 한 도보 여행자에게 나비를 보았느냐고물었던 때를 회고한다. "그는 ‘아니요‘라고, 조금 전 우리가 나비떼 속에서 즐거워하던 길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사람은 보려는것만 보는 법이다. 오웰의 시골집에서 장미를 본 후 그의 다른 작품들을 뒤지다가, 나는 이미 여러 번 읽은 소설로 되돌아갔다.
뜻깊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옛 친구를 다시 방문하는 것과도 같다.  - P335

자신이 그렇게 달라졌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다시만나보면, 어떤 책들은 더 자라고 어떤 책들은 시들어버린다. 묻는 질문이 달라지기 때문에 돌아오는 대답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에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1984」에 얼마나 많은 싱싱함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들은위험에 처해 있고 스치듯 덧없고 오염되어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존재한다. 1984』는 주로 빅브라더, 사상경찰, 메모리 홀, 뉴스피크, 고문 등등 극도의 전체주의적 양상들로 기억되는 소설이다.
실제로 책이 나왔을 때 책에서 가장 새롭고 놀라운 점도 그런 것들이었고, 그런 것들은 오웰과 그의 주인공이 중요하게 여기는에 대한 위협으로 제시되었다. - P336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는 1984가 왜 흔히 생각하는 것 같은 디스토피아가 아닌가에 대해 또 다르게 설명한다.
2003년 《가디언》에 실은 글에서 그녀는 "오웰은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라는 비난을 들어왔다. 개인은 가망이 없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당의 잔혹하고 전체주의적인 장화가 인간의 얼굴을 영원히짓밟는 미래를 그려 보였다는 것이다"라면서, 책의 마지막 부분,
즉 부록으로 실린 뉴스피크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근거로 삼아 - P344

16긍정적인 독해를 제시한다. "뉴스피크에 관한 에세이는 표준 영어로, 3인칭 과거시제로 쓰였다. 이는 체제가 무너졌고, 그 언어와인간의 독자성이 살아남았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뉴스피크에관한 에세이를 누가 썼든 간에 1984의 세계는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오웰은 흔히 평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 정신의 회복탄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시녀 이야기 (1985)의 학술적인 말투의 후기에서도 이런 장치를 차용하여 그 세계의 체제 역시 붕괴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공포는 영원하지 않아도 된다. 소련은 1991년에 붕괴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수천만 명의 죽음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파괴를 초래했고, 그 잔혹함의 일부는 현재의 러시아 정부에도 존속하고 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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