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김구용


나는
시들어 떨어진 꽃에서
어느 아기 어머니를 보았다.
그 꺼칠한 길에
이상한 해무리가 떠 있었다.

몸은 괴로움을
영양화하는 공장이었으나
분명한 생각의 경치이며
실은 비를 맞고 있었다,
책임 없는 아름다움을
누구나 감상하듯이.

힘드는 목숨일 바에야
흠 없는 말씀은
자동기가 낳은 상품 정도라고나 할까.
다리 밑에서 더러운
사람들은 정을 나눈다.

가을 나무는
어느 아버지,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나라 없는 포로의 행렬이
다시 떠난 뒤에도.......



구용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1966년이자 내 나이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아버지가 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어느 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하릴없이 누워 있는 나에게 말했다. ˝남섭아, 바늘에 실 좀 끼워다오.˝ 남섭은 내 이름이 아니다. 당시의 내나이가 되기 전에 비참한 정황에서 죽었던, 어머니의 동생이자 내외삼촌의 이름이다.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어머니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삼촌과 내가 뒤섞이는 이 인접성,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환유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완벽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환유는 결여된은유다. 어머니의 결여와 세상의 결여가 내 결여 속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아버지가 된다. 어디엔가 정신적인 우주가 있다면 그것이발휘될 수 있는 터전은 나의 결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문학의 입장에서 매우 행복한 시대였다.
한 작가가 쓰는 한 줄의 글은 그를 감옥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었고 그의 손톱을 뽑게 할 수도 있었으며, 때로는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이 정황은 물론 처참한 것이었지만, 작가는 자신의 글이 그가 내내 희망하던 세계의 건설에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이바지하고있으며, 인간의 미래를 위한 기획에 벌써 깊숙이 개입하고 있음을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고 그는 헛일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비단 민중과 민족의 기치 아래 전선을 형성했던 작가들에게만 해당되는말은 아니다. 순수주의자라고 지칭되었건 모더니스트라고 분류되었건 간에 문학 그 자체의 가치를 받들었던 작가들도 역사에 대해 - P214

서뿐만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근본적이고 가장 과격한 반항자들이라고 자신들을 규정할 때, 자신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 가치부여의원기를 바로 이 거친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는 없었기때문이다. 또한 이는 작가들과 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인 감시자이고 또한 모든 사람이 그감시의 잠재적인 희생자인 정황에서, 한 시민이 소설 한 권을 사고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 이르지 못한 사회와 경험하지 못한 행복에 대한 신조의 표명이었으며, 누군가 제 손톱을 뽑으려 할 때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일이기도했다. 작가와 독자의 유대는 강했고, 글쓰기와 독서 상호간의 기대지평은 그만큼 넓었다. - P215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러나라고 말하자) 감춰진 것이건 비어 있는 것이건, 인간 의식이 책임져야 할 몫인 1인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해체론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주체가 소멸됨으로써 비어 있는 이 자리는 타자의 자리이며, 무의식의 자리이며,
기호 대신 말의 자리이며, 제도 대신 자연의 자리이며, 문화적으로주변인의 자리이며, 정치경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자리이다. 물 - P220

론 이것은 그 논자들의 주장일뿐 실제상황은 아니다. 실제로 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를 해체한다고 말하는 그 해체의 주체들이다. 이 해체 작업이 벌써 어떻게 거대한 장치가 되고, 얼마나견고한 제도의 성이 되어 있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벌써 관행태가 되어 있다. (문학이 허위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바로 이 관행태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제는 바르트가 아니라 바르트 이후의 바르트들이며, 푸코가 아니라 푸코 이후의 푸코들이며,
데리다가 아니라 데리다 이후의 데리다들이다. 이 ‘이후의 들‘들은인간의 분별력에 대한 신뢰를 비웃는 신자유주의적 기술파시즘과공고하게 결속되어, 날마다 이미지-환상을 생산하고, 모든 인간적시간을 토막냄으로써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끊어놓는다. - P221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반해체의 작업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저 해체의 작업과 제도 속에서 그 최초의 의도와 이후의 장치들을 구분해내는 일로부터 우선 시작할 것이다. 관행의피안을 상정한다는 것, 그것은 문학이 늘 하던 일이다. 이 일은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고, 독서 대중의 시선을 끌기도 어려울 것이다. 문학은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타자가 될 것이다. 그 성찰과 반성의 노력으로 모든 속도와 맹목의 제동장치로 기능한다는 것, 그것은 문학이 늘 하던 일이다. 이 기술파시즘의 시대에, 이 이미지-환상의 시대에, 문학은 늘 하던 일을 영예 없이 그렇게 계속함으로써자기 존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 P221

나는
시들어 떨어진 꽃에서
어느 아기 어머니를 보았다.
그 꺼칠한 길에
이상한 해무리가 떠 있었다.

몸은 괴로움을
영양화하는 공장이었으나
분명한 생각의 경치이며
실은 비를 맞고 있었다,
책임 없는 아름다움을
누구나 감상하듯이. - P225

힘드는 목숨일 바에야
흠 없는 말씀은
자동기가 낳은 상품 정도라고나 할까.
다리 밑에서 더러운
사람들은 정을 나눈다.

가을 나무는
어느 아버지,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나라 없는 포로의 행렬이
다시 떠난 뒤에도....... - P226

「어느 날」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품위 있는 말과 자연스런 리듬,
잘 만들어진 은유와 지혜로운 결구는 아무리 고통스런 삶이라도하나의 풍경으로 보이게 하겠지만, 이 흠 없는 말씀이 "다리 밑에서" 나누는 "더러운 사람들의 정만 하겠는가. "나라 없는 포로의 행렬은 바람에 불려가는 낙엽들이겠지만, 또한 만물의 아버지인 시인이 안아 들여 합당한 표현을 만들어주어야 할 타자들이기도 하다. 주지주의와는 관계없이, 선비였던 구용 시인은 시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산문시들을 빌려 언어적 측면에서건 사상적 측면에서건 온갖 모색을 다 하면서도, 정작 운문의 형태를 갖춘시에서는 가능한 한 온건하게 말하려고 애쓴다. 식민지 시대에 뒤 - P226

이어 전란을 겪었던 나라에서 아버지 되기의 책임이 그렇게 막중했던 것이다.
구용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1966년이자 내 나이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아버지가 되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어느 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하릴없이 누워 있는 나에게 말했다. "남섭아, 바늘에 실 좀 끼워다오." 남섭은 내 이름이 아니다. 당시의 내나이가 되기 전에 비참한 정황에서 죽었던, 어머니의 동생이자 내외삼촌의 이름이다.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어머니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삼촌과 내가 뒤섞이는 이 인접성,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환유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순수하고 완벽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환유는 결여된은유다. 어머니의 결여와 세상의 결여가 내 결여 속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아버지가 된다. 어디엔가 정신적인 우주가 있다면 그것이발휘될 수 있는 터전은 나의 결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P227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쓸 때, 그에게는 분명히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이 있었으며 높은 지혜의 체득을 향한 한 선사의 희구가 있었다. 시집에서 줄곧 님을 그리워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를 빌리고있던 그에게 또한 한 연인의 열정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님의 침묵의 ‘작가적 의도‘에 관해 말하려 한다면 이 염원과 희구와열정의 어느 한쪽도 제쳐놓을 수 없다. 시인이 애국시를 쓰려 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연인이었으며, 오도시를 쓰는 선사로서도 민 - P231

족의 암담한 현실에서 초탈할 수 없었으며, 연애시의 어조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는 무애의 정신적 경지를 구하는 수도자로 남아 있었다. 시인이 무엇을 의도했건, 이 마음속의 다른 힘들이 끼어 들어와 『님의 침묵』을 그 의도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시집에는 타고르의 독서에서 얻은 새로운 시에 대한 개념이 있고, 불경의 강설을 통해 익숙해진 문체가있으며, 근대문물에 대한 시인 나름의 이해가 있으며, 당시의 우리말이 놓인 형편이 있고, 시인이 염두에 둔 독자들의 정신상태가 있다. 이 모든 사정은, 저 염원과 희구와 열망과 함께, 시인의 의도가
‘님의 침묵』이라는 또 하나의 의도로 ‘생산되는 조건이었다. 어떤냉정한 작가도 이 사정과 힘들이 자기 작품에 개입하는 양과 방법과 계기를 완전히 결정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근면한 연구자도 이 조건들이 작품의 여러 층위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밑바닥까지 파헤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복잡성이론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문학으로 실천된 복잡성이다. - P232

님의 침묵』은 우리 문학에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 식민지 치하에서 주눅 든 우리말의 정서적 역량을 높인 이 시집은 음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도 준동하는 정신의 한 활기를 늘 다시 증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기획한 최초의 의도에 방향이 다른 여러 의지와 힘들이 개입하여 그 의도 이상의 의도를 만들어낸 과정자체가 우리 문학으로서는 어디에 비할 데 없이 중요한 경험이다.
『님의 침묵』은 여러 관점에서 늘 새롭게 해석되고 있지만, 그 해석들은 따로 놀지 않고 서로 엇물리거나 감싼다. 이 점은 만해가 독립운동가로도 선사로도 연인으로도 한 인간의 성의를 다함으로써, - P232

자기 자신을 그 의지와 힘들이 서로 북돋으며 성장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음을 또한 증명한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이 성의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최초에부여하려 했던 의도의 성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작품이 항상 그최초의 의도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작품이 발휘하는 힘은 그 최초의 성의로 환원된다. 어떤 변주에 따라, 높은 지혜에의 희구가 되고 좋은 세상을 향한 비원이 되고 순결한 사랑의 열정이 되는 이 절대적인 성의의 기운은 ‘님의 침묵』의 페이지 하나하나를 꿰뚫는다. 성의는 끊이지 않으나 그것이 어디에 닿을지는알기 어렵다. 거기에 닿는 길은 멀고도 멀지만, 거기서 만나려 했던 것을 이름 짓고 그려내는 일이 또 어렵다. 마음은 그 어려움만큼 깊어진다.  - P233

절대라는 말은 인간의 정신으로 온전하게 상상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현상과 존재를 단순하게 표현하기 위해 끌어 붙이는 말이지만,
그 현상이나 존재 자체는 모든 복잡성 이론의 시발점이 된다. 어느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어느 것‘에해당하는 것을 모두 열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짐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어느 것들‘은 ‘어떤 것‘을 무한하게 나타내고 무한하게 가린다. 그래서 짐작할 수 없었던 ‘어느 것‘ 하나가 모든 논리를 공론으로 돌리고 모든 계산을 무위에 빠지게 한다. 바라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저 거룩한 님 앞에서 만해의 이별은 ‘어느 것들‘
의 조건이 다 파악되지 않는 자리에서 그리운 ‘어떤 것‘을 말하고 - P241

내다보는 알레고리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을 무한하게 드러내면서 가리는 ‘어느 것들‘이 차례차례 그리고 동시에 들어오는 괄호다. 이 괄호는, 절대라는 말이 그렇듯이, 정신의 자유로움과 감정의섬세함과 감각의 깊이를 촉구하는 명령과 다른 것이 아니다. 만해는 님과 이별의 개념으로 서투르지만 서투름을 늘 다시 원통하게여기는 말로 끝없이 쓰이게 될끝없이 저 괄호를 메우게 될 시를 지시한다. - P242

자연에 대한 언급이 없는 소월의 시는 거의 없다. 『진달래꽃‘에서는 시구 몇 개만 건너면 자연을 만나게 되고, 또 그 자연이 시의 음조 속에 끼어들거나 젖어드는 방식은 적절하다기보다 차라리 감쪽같아서 특별히 ‘자연‘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늘 거기있는 길섶의 풀잎처럼 지나쳐버릴 정도다. 그에게서 자연이 주제인지 배경인지를 따지는 일이 그만큼 부질없기도 하다. 그의 정한은 자연과 구별되지 않으며, 하나하나의 감정은 자연에서부터 배어 나와 다시 자연 속으로 스며든다.  - P243

문법이 깊이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소원은 늘 자연을 말했지만 자연으로 풍경을 만들지는 않았다.
어느 이론가가 말한 것처럼 현대 의식은 풍경의 발견 이후에만 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 환경 속에 확산되면서, 또는 환경이 정신속에 삼투하면서, 자아가 자연을 통해 생각하고, 자연이 자아를 대신해서 생각하는 것도 현대적 지각의 하나이다. 우리가 현대 예술의 가장 고양된 열정을 믿는다면 그 지각이야말로 본질적으로 현대적이다. 김소월의 자연은 민요적 자연이 아니다. - P252

김기림에게바치는 짧은 인사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비극은 부끄러운 일과도 마찬가지로 영예롭게 여겨질 일까지도 자주 죄가 된다는 데 있을것이다. 믿고 살아온 정신의 터전이 비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새로운 터전을 제 의지로 일궈낼 수도 없는 사정에서는, 순박한 삶작은 몽매함의 표현이 되고, 고매한 이상의 추구조차도 도피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명랑한 활기도 제 처지를 망각한 사람의 경박함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저와 제 주변을 황폐하게 하는 우울한 정신으로 제사지를 절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절이 불리할수록 어떤 단안이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건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 P253

식민지의 모더니스트는 기선이면서 동시에 세관이다. 바다와 나비」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P260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이 작품을 두고 ‘순진무구하고 철없는 지식인‘이니 ‘냉혹한 현실‘이니 하는 말은 사실 부질없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감‘이란 말도 따지고보면 부질없다. 문학적 모험이건 다른 모험이건 모험가는 순진하거나 철이 없어서 모험하는 것이다. 누가 콜럼버스에게 대서양의 넓이를 일러주었는가, 모험가에게 그가 헤쳐가려는 바다의 수심은 아무도 "일러준 일이 없는 깊이가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깊이일 뿐이다. 흰나비는 바다를 "청무우밭인가" 여겼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낯익은 세계를 찾아갔던 것이다. 비극은 거기 있다.  - P261

식민지적 자기 검열의 가장 큰 비극은 거기,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해답을 다른 어떤 사람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물론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는 말은 그가 공주는 아니라는 말도 된다. 시인은 자신의 실패를 엄살 섞어서 말하지만, 이 엄살에는 나도 할 만큼은 했다는속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엄살 위에 청백이 선명하게 대조되는그림 하나를 보여준다. 이 아름답고 처절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자기 뒤에 다른 어떤 사람이 이 실패를 두려워 말고 저 난바다로나아가기를 바란다.
우리가 알려고 애쓰는 것을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벌써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기림의 도움이 크다. 우리는 김기림에게 고개 숙여 절하며 그를 위로할 수 있다. - P261

윤동주는 난해한 시인이 아니다. 그는 모국어를 늘 순탄하게 운용하고, 그때에나 지금에나 이 나라 사람들을 충동하여 시를 쓰고 싶게 만드는 다정하고도 날카로운 정서를 손에 잡힐 듯이 구체적으로 노래하였다. 기독교적 주제의 시들이 전통적 한국 정서와 약간의 거리를 지닌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이들 시 역시 종교적 성향이 다르고 성서적 지식이 빈약한 독자들에게도 인간과 세계에대한 실존적 고뇌라는 보편적 측면에서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그의 좋은 시-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수록된 대부분의 시들과 다른 여러 편의 시들이 여기 해당한다―에는 거기 표현된 생각과 마음의 상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 - P284

한 성찰을 요청하는 시구들이 늘 하나씩 들어 있다. 이 강연은 이들 시구를 다시 상기하고, 가능한 한 그것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이다.
윤동주는 시에서 자주 하나의 모순을 돌출해내고 대개의 경우그 모순으로 시의 결구를 삼는다. 그의 시에서 시적 서정이 예민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때이다. 이 모순은 논리적 서투름이나 비약의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한 정신이 논리의 경계에까지 철저하게 추론을 이끌어나간 끝에 더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한 궁지에 이르러,
그 논리체계 자체를 다시 검토하여 그 논리의 피안을 바라보는 사고의 결과이다.
- P285

윤동주는 자신의 심정에 진실하였고, 배움에 진실하였으며, 자신의 시대 앞에서 진실하였다. 이 진실의 끝에서 그는 한 세계 안에서 다른 세계가 열리는 아이러니를 발견하였으며, 그 모순의 순간을 정성스럽게 구조화하였다. 그가 시에서 넓고 깊은 지식을 나열한 것도 아니고, 시구와 시어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계산하여 쓴것도 아니지만, 그의 시에서 뛰어난 지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실의 끝에 이르려는 이 노력이 자주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의 끝에서 하나의 모순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모순을자기 사고의 터전으로 삼는다는 것은 주어진 진실을 자유롭게 비평하고, 그 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검토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에 이 자유 비평과 자기검토의 힘으로 거의 유일하게 변증법적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있는 성장과 발전의 시를 썼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한때 세력을떨쳤던 지성주의 내지 주지주의의 시들이 공소함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윤동주의 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 P295

김수영의 시어를 그의 현실 인식과 결부시키는 일은 새삼스럽지만 그만큼 정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김수영이 현실에 천착하였다는 말은 부족하다. 그는 현실만 보았고, 그것도 매우좁은 현실에만 천착했다. 그는 단 한 편의 여행시도 쓰지 않았으며, 자연 경관에 관한 길고 깊은 관상보다 그에게 더 낯선 것은 없다. 그의 시는 종로를 비롯한 서울 거리와 그 외곽 동네들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양계장을 경영하였지만 그것은 가내공업이나진배없었고, 곁들여 채마밭을 일구기도 하였지만 거기에 지속적인정성을 바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농사꾼이 바라보듯, 다시 말해서 그의 시대에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듯, 바라 - P299

보지 않는다. 「거대한 뿌리가 증언하듯 그의 마음속에도 전통의깊은 뿌리가 분명하게 존재하였지만, 자신이 체험한 현실을 그 정서의 전통에 끌어다 붙이는 일은 그에게 금지된 것이나 같았다. 자연에 대한 감정은 어디서나 민족 감정과 엇물려 있기 마련인데, 그렇기에 더욱 이 감정은 「병풍」에서 말하듯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인 "설움"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땅에 떨어진 눈은 겨울 산촌의 아늑한 풍경과 연결되지 않았고, 봄에 돋는 새싹은친구의 사무실이 사무실인 것만큼만 새싹이었다. 그는 눈과 새싹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처럼 눈이라고, 새싹이라고 말했다. - P300

시가 현실을 발견한다는 말은 현실이 지니고 있는 시적 힘을 발견한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이는 용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이해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할 수 없이 메마른 현실에서어떻게 준동하는 힘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힘이 거기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 한들 거기서 어떤 감동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현대시인‘으로서 첨단의 노래" (서시」)를 부르려 한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김수영과 같은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박수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현실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수근도 전후 독재치하의 가난한 현실에 밀착하여, 근근하게 살아가는 농민과 소상인들의 삶을 그렸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 화가의 음울하면서도 아늑한 회색 톤과 양식화된 기하학적 선은 보는 눈을 매혹시켜, 현실을 세월의 먼지 속에 가려진 먼 옛날의 풍경처럼 바라보게 한다.
현실은 예술적 기억술의 세계로 바뀐다. 같은 시대와 그 이후까지, - P301

박수근의 회화에서 사물의 형태를 정돈하고 평면화하는 기하학적 선, 혹은 김현승의 시에서 사물을 결정화(化)하는 이미지를김수영에게서는 그 순결한 말이 대신한다. 김수영만큼 관념적인시, 정확히 말해서 관념을 설파하고 관념 아래 숨는 시를 증오했던사람도 드물다. 만들어진 관념을 사물에 들씌우는 일은 사물을 모욕하는 일이며, 현실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생각의 싹을 막아버리는 포기 행위의 일종이다. 정서의 안일한 장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을 앞세우는 일이 없는 김수영의 언어는 그 의미를 바로 그 자리에서 손색없이 드러내는 그 성질에 의하여 벌써 어떤 사물, 어떤 현상을 절대적으로 지시하는 관념어의 가치와 자격을 얻는다. - P303

필연성의 고리에 붙잡히지 않는다. 길들여진 언어의 정서적 후원도, 명쾌한 이론의 안전한 권력도 바라지 않았던 김수영은 현실의언어로 현실을 진솔하면서도 절박하게 그리는 가운데 다른 삶을전망하고 끌어당기는 알레고리를 바로 이 삶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현실을 사는 것으로 다른 삶을 실천하였으며, 이 삶의 그림으로현실의 밖을 그렸다. 그는 현실을 직설하였지만, 그가 맨땅에 내던진 말에는 심정의 특별한 깊이가 아닌 것이 없고, 위대한 용기가아닌 것이 없고, 영원한 활력이 아닌 것이 없다. 진정한 초월이 거기 있으며, 김수영의 진정한 현대성이 거기 있다. - P310

김수영은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으며, 이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상의 대화와 나날의 일기, 신문기사와 술자리의 흥분된 토론에서 거두어들인 것같은 시의 말들은 하나같이 사물의 속내를 짚어 그것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이 맺는 관계를 예민하게 드러내고, 어떤 의문을, 어떤 욕망을, 어떤 성찰을, 어떤 전망을 거기서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유례없이 강력한 시정을 형성했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현실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를 추출하고, 현실을 시로 끌어올리는 이 능력은 곧바로 우리 문학에서 모더니즘과 사실주의를 연결시키는 힘이 되었다. - P310

김수영은 우리 시에서 지적인 것의 개념과 용도를 바꾸었다. 그는 알려진 지식체계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의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한 번 사물 앞에서 놀라고, 그 놀라움을 저지혜의 말로 위무하는 절차, 다시 말해서 발견과 정돈의 기승전결은 그의 시에 없다. 마찬가지로평론가가 알아서 말하게 될 것을 미리 써놓는 식의 암묵적 공모의시 쓰기가 그에게 용서될 수는 없었다.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시 쓰기‘의 본뜻도 거기 있다. 지식체계에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탈주의 모험을 감행하는 그의 시가 말끔하고 지적으로 숙련된 외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현대시의 한쪽을 오랫동안지배해온 지성주의 현대파들은 시 속에 혼란의 장소인 몸의 노출을 바라지 않았다. - P311

김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모험을 모험의 지식으로 뒤쫓는 모험가들, 저 아류 모험가들의 안전한 모험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인들은 한때 자신들을 ‘미래‘라고 부르려하였다. 미래파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그 말이 빈말은 아니다. 시가 미래를 전망하는 지점은 현실이 은유적 힘을 얻는알레고리적 계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김수영이 보기에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날에 사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도시의 피로"에서 배운다. 그들은 현실이 가볍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로 현실을 움직일 수 있다고믿는다. 그것은 김수영의 능력이었으며, 시의 능력이다. - P314

이문숙은 좋은 시인이다. 과장하지 않고도 아주 좋은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시에 깊은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을까. 필경 그 이유는 그가 지닌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터인데, 이 말은 그가 자신을 널리 알리는 데에 서툴렀다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음은 오히려 그의 선택이다. 이문숙은 마치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제쳐두고 시 쓰기를 선택하듯이 이 알려지지 않음을 선택했다. 고통 속에 잊힌 사람으로서의 그 조건이 없다면 아마 그의 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문숙의 이 선택은 그의 시에 관해 말을 하려는 사람의 태도까지 규정한다. 알려지지 않으려는 그의 시에는 당연히 날카로운 방법도 우쭐거리는 주제도 없다. - P428

이영광은 유비적으로 사고하는 시인이다. 그는 세상의 사물이 제마음의 한 표정이거나 제가 지녀야 할 심정의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과 제 본성을 함께 보고 싶어 한다. 이는 그가 견고한 삶을 처음부터 원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그 견고함을 쉽게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다른 여러 젊은 시인들이나 인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해답이 늘 뒤로 연기되는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삶의 단단함을 확인해줄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확실한 근거와 연결되어 있고제 입에서 나오는 낱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의미에 닿아 있기를바라지만, 그의 작업과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토대 위에 얹혀 있어, 견고한 의지를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자주 그 진실성을 의심하 - P450

게 한다. 삶이 중간지대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것은 최초의 순결한의지가 죄와 부정으로 왜곡되어 제 길을 올곧게 짚어가지 않았거나, 최소한 자신과 세상에 바쳐야 할 성의가 여전히 부족함을 어쩔수 없이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 의식 같은 것이 생겨나는것도 아마 이때일 것이다. 그것은 있는 것이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니라, 있는 것이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를 묻게 되면서 시작될 터이다.
한 인간의 유비적 사고는 그에게 불확실한 것들 너머에서 확실한 것을 엿보게 하고, 그의 신산한 삶을 어떤 거룩하거나 순결한뜻에 연결시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본성을 왜곡과 부정으로부터 복성시키는 계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유비적 사고가 사람을 항상행복하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때가 더 많다.  - P451

시 쓰기에도 독서의 시 쓰기가 있고 해석의 시 쓰기가있다. 어떤 시인은 제 말의 끝에 이르러서야 제가 무슨 말을 하고있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다른 시인은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나 말할 것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연출하며 말한다. 이영광은 지긋지긋한 슬픔」의 어느 대목에서 "나는 닐니리 통합으로 시를 훔쳤다"고 문득 고백한다. 훔쳤다는 말이야 빈말이겠지만, "닐니리 통밥"에는 내용이 없지 않다. 동밥은 연출하는 시 쓰기의 존재방식이다. 명민한 그는 어쩌면 유비적 사고에 천착할 때부터 그 파산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알고도 모르는 척 찾아 헤매었던 것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해서 시가 바닥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제 아는 것이 없는 자로 현실 앞에 서게 될 것이며, 현실을 소박하고 용감하게 말하는가운데, 무엇을 유비한다는 생각도 없이, 무엇을 유비할 겨를도 없이, 전혀 다른 수준의 유비에 도달하기도할 것이다. 시는 아는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상징은 모르는 것에 대한 말이다. 이 말을 사족으로 붙인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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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노래라고 흔히 말하지만, 시가 글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시가 그저 노래일 때부터, 시 짓는 일이말에 매듭을 지어 붙이려는 기이한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것 같다. ‘‘라는 한자만 해도 그렇다. 왼쪽의 ‘말씀 언(言)‘은 예나지금이나 말이라는 뜻이지만, 오른쪽의 ‘절사(寺)는 원래 관청을가리키는 글자였다고 한다. 이 글자를 다시 분해하면 ‘선비 사(士)‘
와 ‘마디 촌(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글을 아는 사람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일을 하는 곳이 관청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詩‘는 여기에 말씀 언(言)이 하나 더 붙었으니, 글을 아는 사람들이 말에 매듭 - P136

을 붙이는 것이 바로 시라는 말이 될 법하다. 이런 옹색한 글자풀이를 하지 않더라도 노래에는 원래부터 가락과 장단이 있으니, 그노랫말에 매듭을 붙인다는 것이 놀라운 일일 수 없다.
시는 원래 노래이고, 결국 노래이지만, 그리고 그 가락과 장단은자연과 생명의 리듬을 어떤 상상력에 따라 다시 재현한 것이라고하지만, 자연이나 생명에는 우리가 노래에서 감지하는 것과 같은그런 확실한 매듭이 없다. 말하자면 노래의, 또는 시의 매듭은 자연과 생명 그대로의 매듭이 아니라, 거기에서 추상된 매듭이다. 추상은 물론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해에 관해 아는 것이 없지만, 태양이라고 하는 하나의 총체에서 그 둥근 형태,지상을 향해 끝없이 쏟아지는 그 밝은 빛과 뜨거운 열기, 그 밝은빛 속에 들어 있는 흑점 등등 이런 성질들을 추상해내고는, 해에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온갖 지식들이 그렇게 구성된다. 문명은 그 자체가 매듭이다.  - P137

한 섬의 보리를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직선의 밭고랑을 파야 하는가. 페이로더의그 유연한 운동 뒤에는 얼마나 많은 마디와 매듭이 있는가. 철이든다는 것은 철을 안다는 것이고, 철은 시간의 매듭이다. 그래서철이 든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매듭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나 이 추상의 매듭을 만들고 가정한다. 소리에 매듭을주어 악(樂)이라고 일컫고, 인간의 행동에 절도를 가정하며 예(禮)를강요한다. 이 매듭들의 그물망 위에서 질서 잡히고 평화로운 세계하나가 성립한다. 하늘은 그 매듭에 따라 비를 내리고 바람을 불어준다. 하늘은 만물을 생장시키고, 인간도 거기 함께 울력하여 제 삶을 도모한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가. 노래는 얼마나 조화로운가. - P137

그러나 비는 항상 그 매듭에 맞춰 내리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항상 그 매듭과 조화를 이루며 부는 것이 아니다. 가뭄과 홍수가번갈아 찾아오고, 태풍은 삶의 뿌리를 뒤엎는다. 때로는 강이 마르고 땅이 갈라진다. 인간세계도 다르지 않다. 가뭄의 뒤 끝은 물론풍년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예로도 다스릴 수 없는 무뢰배가 있으며, 전란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매듭은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그 매듭이 교란될 때마다, 저무정한 침묵의 세계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부딪치고 살아야 하는 생명의 본디 모습이 드러난다. 석굴암에 들어서면, 온화한 자태와 사려 깊은 얼굴로 의연하게 앉아 있는 대불을 먼저 볼 수 있지만, 그좌대에는 사지를 비틀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존재들이 새겨져 있다. 세상의 지혜 하나를 들어 올리는 일이 그렇게 처절하다는 말일까. 고통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고요하게 앉아 있는 부처가 마치 조각배처럼 보인다.  - P138

위로 지혜를 구하고 밑으로 중생을 제도하는그 위의가 아무리 장엄해도 그것이 풍랑 치는 바다 위에 뜬 일엽편주의 사유에 불과하다고 하면 불경한 말이되겠지만, 몸의 욕구가맑은 지혜가 되기보다는 불투명한 파도가 되는 우리에게는 그것이또한 사실이다. 인간이 만든 매듭의 그물이 아무리 넓고 촘촘하다한들 내 몸도 세상도 그 매듭으로는 무엇 하나 감당할 수는 없는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매듭이 포기되지는 않는다. 매듭이 자기를 반성하는일은 드물다. 매듭은 매듭을 부른다. 실패한 매듭일수록 저 자신을존속시키기 위해 더 많은 매듭을 부르고, 다른 매듭과 끊어지지 않는 연결 고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결국은 자연도 생명도 사람도 - P138

다 없어지고 매듭만 남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매듭은 자연과 사물을 간명하게 보려는 방법이었는데, 거꾸로 매듭이 모든 것을 가리는 형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듭을 이겨내기 위한답시고 더 촘촘한 매듭을 만든다. 옛날 태권브이 같은 로봇 영화에서 로봇의 횡포를 막기 위해 더 큰 로봇을 만드는 어리석음과 다를 것이 없다.
쾌적한 장식으로서의 말을 넘어서는 시, 노래를 넘어서는 음악은 매듭 밖에서 매듭을 바라본다. 말과 소리의 매듭이 아무리 아름다운 비단을 짜더라도 시와 음악은 그 비단 자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지나간다. 말과 노래의 매듭이 낭랑하게 울릴 때, 그 영롱한 음조는 시인이 꿈꾸던 것을 단지 암시할 뿐이다. 인간의 매듭이 애초에 기획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할 세계, 그 음조의 순간에 얼핏 본세계는 육체와 함께 지상의 모든 제약을 벗어버릴 때만, 이를테면죽음 뒤에서만 보게 될 어떤 빛과 같다. - P139

아름다운 유리구슬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으나 그것이 제 꿈의 빛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고이내 싫증을 내며 구슬을 댓돌에 내던지는 아이처럼 시인은 매듭을 만드는 순간 그 매듭을 쓸어버린다. 시인이 쓰는 시는 그가 얼핏 보았던 저 빛에 대한 한 차례의 기념일 뿐이다. 그는 매듭을 만들면서 매듭을 파괴한다. 그는 매듭을 딛고 매듭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능한 것은 또 하나의 매듭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래서 시는, 좋은 시일수록, 실패담의 형식을 지닐수밖에 없을 것이다. - P139

김수영은 어느 평문에서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시인을 특별히 치켜세우는 말도 아니고 비평가를 폄하하는 말도 아니다. 현실이 아무리 지리멸렬해도 그 속에서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지극히 사소한 움직임에서도 변화의 모든 기미를 알아내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는 사람만이 그와 동일한 노력에 대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시인은 이 현실 속에 다른 현실을 언어로 만들어낼 뿐아니라 그 현실을 스스로 체험한다. 비평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도 그것이다. - P141

비유, 은유, 상징, 이미지, 운율, 선율, 시는 이런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은유나 선율이 곧 시를 만들지는 않는다. 비유를 비유라고 말하고 이미지를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이미 만들어진 다음의 일, 어쩌면 그 힘을 거의 잃었을 때의 일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그는 자기 언어를 은유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현실이며 그는 그 현실을 산다. 이를테면 이성복은 남해 금산」의 첫대목에서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라고 읊는다.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풀어놓으면 아마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다. ‘사랑하던 한 여자를 잃고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 여자는 돌이 된내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질이 다르고 기운이 다르다. 풀어놓은 글에서 ‘돌처럼 굳어졌다‘거나 ‘그 여자가 굳어진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는 말은 절망과 불모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사적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 P142

반면에 이성복의 돌은 현실의 돌이다. 그는 이 시를 쓰면서 정말로 돌속에 묻혀있는 여자를 보고 있으며, 자신이 그 돌 속에 진정으로 들어갔다고생각한다. 풀어놓은 말은 절망과 불모에 대한 낡은 수사법 하나를제시하지만, 이성복의 시는 절망과 불모 그 자체인 바윗덩이 하나를 우리 앞에 세워놓는다.
**비평가의 말도 마찬가지다. 풀어놓은 말의 수준에서이 시를 이해하는 비평가의 말과 시의 수준에서 이 시를 이해하는 비평가의말은 다를 것이다. 전자는 이 시의 시상을 일반적 감정의 하나로환원시킬 것이며 그 수사에 이미 알려진 이름을 붙일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돌이 하나의 감정으로 되는, 또는 감정이 하나의 돌로 - P142

되는 특별한 순간을 여러 일반적 감정 위로 들어 올릴 것이며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힘을 자신의 언어체험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시가 비평에 영합할 때 대중에 영합하는 것 못지않게 위험하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비평가가 자기시에 대해하게 될 말을 미리계산하는 방식의 시 쓰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에는 유행하는주제가 있으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이 있다. 앞뒤를분란하게 꿰맞추는 지적 구조가 있고, 한쪽 눈을 깜박거리며 언어를 약간 비틀어놓는 득의의 순간이 있다. 이때 시속의 사물들은,
허영쟁이 까마귀와 간교한 여우가 등장하는 이솝 우화처럼, 제각기 어떤 관념을 떠맡고 있다. 그 관념은 우주를 끌어안을 만큼 큰것일수록 더 좋다. 또한 거기에는 미시령 꼭대기에서 그넷줄을 놓아버리고 동해 푸른 물에 빠져든다는 식의 유아적 상상력이 있다. - P143

시인은 항상 순진무구하다. 그는 모든 사물에서 생의 이치를 보며,그 이치를 경구로 다듬는다. 그에게는 자연과 생명의 이치를 말하는 사물이 있을 뿐 정작 사물은 없다. 따라서 자연도 생명도 없다.
시가 비평에 영합하는 이유는 시인의 타락에 있기보다 비평의 무능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비평가가 어디선가 보고 외워둔 말들을 풀어놓기 좋은 시, 자신의 명민함을 스스로 확인하기 좋을 것처럼 보이는 시, 그래서 결국은 어떤 시론으로 환언하기에 편안한시만을 주목할 때, 시가 알려진 주제와 어법, 벌써 질서 잡힌 형식의 상징과 은유, 낯익은 이미지의 순열조합에 갇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평가에게 적절한 미끼를 주는 시와 그 미끼를 물고거창한 시론을 설파하는 비평의 관계는 짜고 치는 고스톱과 다를 바가 없다. - P143

시가 모험이라면 비평도 모험이다. 비평은 시와 더불어 안온하지만 비열한 이 삶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려고 애써야 한다.
김수영은 「절망」이라고 이름 붙은 수 편의 시 가운데 하나에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것처럼"이라고 썼다. 이 시구는 아름답다. 낱말과 선율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분석하기 좋게 짜맞춘 지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암담함을 말하면서 암담한현실을 충전된 언어로 들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충전된 언어에서 발휘되는 힘이 바로 현실 위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현실이며,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라고 말할 때의 그 딴 곳의 바람에 해당한다. 비평은 시와 더불어 그 힘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 P144

문학적 글쓰기는 그 구체적 개별성을 통해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압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를 새롭게 바라보는 법과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는 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문학적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이기도 하며, 문학이 주어진 이론으로 환원될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기도 하다. 비평도 과학적 분석처럼 "하나의 구조와 하나의 이야기"를 고생스럽게 펼치고 전개하지만, 저자신이 허물어질 지점에서 그렇게 한다. 제비평의 위상을 묻는 질문은 종종 비평이 그 권력과 지도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 비평은 지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도는 비평가가 작가에게 ‘당신이라면 저 형언할 수 없는 것‘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하는 데서 그쳐야 할 것 같다. - P150

모국어의 위반은 외국어의 위반이며, 모국어의 타자는 외국어의 타자이다. 그래서 적어도 문학의 관점에서 세계화는 바로 이 타자들의 세계화이다. 문학적 세계화의 주체는 바로 이 어두운 희망들의 몫이다. 문학이 어떤 진보의 도구라면 이 진보성은 오히려 진보라고 헛되게 이름 붙여진 것들의 맹목적 속도를 저 지체하는 타자들의 발목 잡기로 제어하는 데 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문학은 늘하던 일을 계속할 것인데, 다만 내향적 행복이고 절망이었던 것,
외로운 자아들의 편안함이었던 것을 다른 세상의 낯섦과 교환하는일에 좀더 역점이 주어질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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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진이정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중에서














  일부러 산수유꽃을 보러 산수유 마을에 간 적이 있다. 마을 골목이나 언덕에나 나이 먹은 산수유들이 무리 지어 넘실넘실 피어서 서로 눈 맞춤하고 있었다. 하필 눈이 폴폴 날리고 지리산은 눈을 하얗게이고 있는 이른 봄날이었다. 그날, 비로소 알았다. 산수유의 노랑은 겸손한 색이었다. 그 무엇이든 그 누구이든 어우러지게 만드는 색이었다. 마음 안으로 스며드는 색이었다. 그 후로 겸손한 노랑은 끌림이다. 산수유꽃 빛깔을 닮은 얇은 시집이 왔다. 표지색부터 겸손해서 더욱 처연한 슬픔이 가득한 故진이정시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가 복간되었다. 이 시집을 끌고 다니는 며칠 동안 시인을 꿈꾸는 친구의 따끈따끈한 산문집과 동행했다.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김해서 산문) 세미콜론(2022)]이다.

  세상은 마침 모든 색상들이 절정을 이루는 늦가을이다. 즐겨듣는 라디오에서는 아침마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나날이 진해지는 은행잎의 노랑이, 세월호의 노랑과 우리들의 대통령의 노랑과 겹쳐지고 이태원과 더해져서 아득하게 먹먹한 노랑이 되고 있었다. 파랑이 약간 입혀진 산수유의 노랑이 올 시월의 "두 번째 봄"을 서럽게,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무책임한 어른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작아진다.

  책 얘기로 돌아가서 솔직히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탓인지 젊은 작가들의 책은 조심스럽다. 소설들은 더러 읽기도 하고 그것보다 더 더러 뭐라고 끄적거리기도 하지만 산문집에는 어떤 덧붙이기도 주저한다. 사실 덧붙일 말이 궁색하다. 단지 나이만 더 먹었다 뿐이지 이 작가들의 성찰이나 시선은 한참 윗길이어서 늙은 나를 서늘하게 만든다. 새삼 내 나이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읽는 동안은 나이를 잊었고 읽고 나서는 내 나이가 부끄럽다. 이래저래 창피하고 부끄러운 11월을 맞았다.

  "사실, 이 작가를 안다. 아니 이 작가의 아빠를 안다." 이렇게 적고 보니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모르는 쪽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블로그의 오랜 이웃인데 어렸을 때 '토비'라 불리던 이 친구의 동시와 근황을 가끔 올리셨다. 하여 더욱 조심스럽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

  비키지 않는 것.

  나는 내 자리를 알아요.


  책은 저렇게 시작된다.

  저 문장들로 나는 이 책을 읽고 뭐라고 뭐라고 쓰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내 자리를 알"아도 "비키지 않는 것"의 용기를 아는 작가에게는 어떤 말들도, 어떤 후기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 책은 이태원과 무관한데도 결국은 무관하지 않다. 저 문장이 콕 박혀온다. 이것이 글의 힘은 아닐까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면서도 세상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시를 흠모하여 시로 다져진 내 감각이 무엇으로든 세상에 쓰일 수 있음을, 그것으로도 이 한 몸을 지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들어가는 녀석에게.

에세이, 인터뷰를 비롯한 잡지 기사, 주얼리나 향기 제품 설명글, 책 큐레이션 등. 시로 터득한 나만의 화법과 관점으로 일을 해나갔고, 차츰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살고도 여태 굶어 죽지 않은 이유다. 사부작사부작 다양한 작업을 했고, 대단히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버티는 힘이 존재한다. 그 사실만으로 자긍심을 되찾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일은 일이고 시는 시니까. 시인은 어떤 상태일 뿐 직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내 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몸으로 전환되었다.

- P65

상상하는 것. 어쩌면 상상력이 밥 먹여준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상상력은 밥 대신 미래를 짓는다. 오늘이라는 토양 위에 내일의 태양빛을 불러오도록 한다. 그 빛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한다. 그리하여 살게끔 한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연루된 다음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이 예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이어지는 삶은 우리가 이어갈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는 그렇게 쓰인다는 것을 망각할 리 없다. - P66

다정함과 섬세함에 대한 나름의 고찰은 다음과 같다. 다정한 사람들은 리액션이 좋다. 경험상 이들은 무드나 환경에 약하고 상대방의 감정과 표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만큼 감정 기복도 심하고 표정 변화도 크게 드러난다. 누군가 울 때 같이 우는 사람이 딱 ‘다정‘ 유형.

반면, 섬세한 사람은 순간순간의 리액션이 크지 않더라도 기억력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 사람과 어떤 식당에서 어떤 농담을 나눴는지, 그 사람은 머리가 아플 때 어떤 약을 먹고 어떻게 쉬는지, 그 사람은 평소에 귀걸이를 빼서 어디에 두는지 등등, 대상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잊지 않았다는 것이 어떻게든 행동에서 티가 난다. - P106, 107

주변에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많다. 허술하긴 해도 내가 분류한 이 유형을 참고해 그들을 관찰하는 것은 오랫동안 흥미로울 것 같다. 다정한 사람들의 입매와 눈빛, 눈썹과 고개의 방향, 허리를 숙이는 방식. 그리고 섬세한 사람들의 행동과 그 곁의 장면들. 나비 같고 나무 같은 사람들이다. 사랑스럽고 성실한 내 사람들.

섬세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풍경 위에서 다정한 사람들이여, 내내 행복하기를! - P110, 111

좋은 것을 다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언어에 현혹되지 말자. 좋은 것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 으쓱하는 사진에도 휘둘리지 말자. 그것들이 독점한 가치는 사실 우리 안에도 있다. 고유한 빛을 머금은 채.

자기 삶의 서사를 단단하게 쌓아가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사랑의 고유함을 공부하는 사람. 그리하여 그 사랑 한가운데 기어코 들어가 젖어보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타자를 ‘이해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작가, 그런 에디터로 성장할 수 있을까.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내가 의지해야 하는 존재도 우리다. 서로 다른, 긁힌 자국투성이의, 미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우리.

우리가 지킬 삶은 우리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 P269, 270

유월, 시 쓰기 참 좋은 계절이야. 쓰고 있어도 시가 그리워져. 때론 밉기도 해. 벽을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래. 네가 날 자주 미워했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겠지. 나도 네가 날 미워해서 네가 미웠어. 이젠 그저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구나. 장마가 오기 전까지,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겨울이 되기 전까지, 다음 해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다음 해, 다다음 해, 언제 까지든. - P305

책은 저렇게 끝맺는다. 시인을 꿈꾸는 작가 '김해서'의 책은 기승전詩이다.

그래서 '다정'이라면 '한 다정'하면서도 궁극의 '섬세한 유형'의 나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를 작가를 위해 찾아 읽는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시를 좋아한다. 자주 찾아 읽는다. 새로운 시인을 만나기도 하고 읽었던 시집을 또 읽기도 한다. 보따리 같은 가방 안에는 언제나 두 권의 책이 있다. 아침에 필이 꽂히는 시집 한 권, 읽고 있는 책 한 권. 시는 특히 버스에서 읽기 좋다. 시 한 편이 나를 훌쩍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찰나'는 언제나 황홀하다. 시를 버리지 않으면 시는 멀리 있지 않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 사이에 '우주'가 있고 '詩'가 있다.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에는 이미 빼곡한 답장들과 시들이 범람하고 있다. 받아 적기만 하면 되겠다. '시인'이 되려고 '일상'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하루하루가 이미 '시'다. 주변을 향한 다정하고도 섬세한 시선이 세상을 품고 있기에 그의 시들은 따뜻하다. '사람'이 살아있는 '시인 김해서'의 시집을 가방 안에서 설레며 꺼내는 버스 안의 나를 상상해 본다. 기분이 좋다. 유쾌해지는 긴 편지를 한 통 받은 느낌이다. 이 글은 부끄러운 답장이다.

마지막으로 황현산 선생의 글을 덧붙여둔다. 시인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시는 승인하고 구성하고 조직할 수있으며, 거부하고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부는 승인의마지막 패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으로 다시 확인되는 것은노래의 존재다. 분석의식에서 떠날 수 없는 시는 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만)그 세계의 전문가다. 시는 순진하면서도 순진하지 않아서, 자유와평등을 완전하게 누리고 생명이 모욕받지 않는, 풍요로운 세계가실현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세계가 존재할 수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불행의 끝까지 가게 하는, 어떤 불행의 말이라도 그 말을 시 되게 하는, 고양된 감정을 그 세계가 아니라면어디서 얻어올 것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다른 어떤 말로 진보주의를 정의할 것인가,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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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시는 승인하고 구성하고 조직할 수있으며, 거부하고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부는 승인의마지막 패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으로 다시 확인되는 것은노래의 존재다. 분석의식에서 떠날 수 없는 시는 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만)그 세계의 전문가다. 시는 순진하면서도 순진하지 않아서, 자유와평등을 완전하게 누리고 생명이 모욕받지 않는, 풍요로운 세계가실현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세계가 존재할 수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불행의 끝까지 가게 하는, 어떤 불행의 말이라도 그 말을 시 되게 하는, 고양된 감정을 그 세계가 아니라면어디서 얻어올 것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다른 어떤 말로 진보주의를 정의할 것인가,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 - P6

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 쉴 수 있는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P7

바타유는 잘 알려진 그의 저서 ‘에로티즘』에서 에로티즘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효과에 관해 이렇게 쓴다. "이내적 체험은 내가 추측으로는 느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원칙적으로 이 체힘은 그 밑바닥에서 어떤 종류의 ‘자아감(感)‘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 기본 감정은 ‘자의식‘이 아니다.
자의식은 사물에 대한 의식의 결과로, 명백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자아감은 필연적으로 그 감정을 느끼는 자가 불연속성 속에 갇혀 고립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 P17

위에 솟아오를 "교향악"이바타유에게서도, 랭보에게서도, 이 내적 체험을 위해 우선 중요한 것은 육체이다. 그러나 바타유에게서는 자아의 고립감을 깨뜨리는 성적 환상의 관점에서나 생식을 통한 지속성 유지의 관점에서나 고찰해야 할 것은 오직 육체에 국한되지만, 시인인 랭보에게서는 육체적·감각적 착란"의 밑바탕에 말이 있다. "사색의 개화"
는 줄곧 말의 이치에 의지하고, 그 결과인 "미지"는 말에 의해 표현된다. 말은 육체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되는 자‘의 육체이다. 서정의 주체에 관해 말하기위해서는 이 육체와 말에 대해 말해야 한다. - P20

의식의 실제 텍스트가 다를 뿐이다. 몸의 텍스트가다른 것일 수 없다고 믿는 주체의 환상이 있을 뿐이다. 랭보가 고문하려던 것은 사실 몸이 아니다. 감각을 착란하면서 그가 원하는 것은 의식 주체가 몸에서 읽으려는 읽은, 또는 읽었다고 믿는 텍스트를 거부하고 파괴하려는 것이다. 주체는 세계라고 부르는 거대한 몸에 둘러싸여 있으며, 한편으로는 제 시선으로 그 거대한 육체를 끌어안는다. 주체가 이 세계의 육체와 소통하는 것은 그에게 부속된 육체를 통해서이다. 내가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손가락 끝으로 세계와 만난다. 오래된 자판은 내 손가락을 알아본다. 글을 쓸 때 내 주체는 이 손가락이며 자판이고, 자판이 놓여있는 책상이다. 책상까지 연결된 나의 몸은 또 다른 몸과 만난다.
보는 자이며 보이는 자인 주체는 자기 시선의 주체이면서, 타자의시선에 주제가 된다. 게다가 나와 손가락과 자판과 책상의 관계에서처럼 주체와 주제의 경계는 모호하다.  - P22

중요한 것은 감각적형상과 모험의 구체적 개별성이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은유의 기능과 환유의 기능일 텐데, 이때 환유는 그 기능의 관점에서만 본다면은유와 구별되는 다른 기능이 아니다. 그 동시적 기능 속에서 은유는 환유의 확장된 외연이며 환유는 은유의 구체적 실현이다. 전통적으로 보편적 아날로지의 상징체계에 종속되어 거기서 원관념을빌려와야 했던 은유는 이제 환유의 개별적 모험의 도움으로 천상의 일을 인간세계로 끌어내리고, 환유는 그 고립에서 벗어나 제 안에 묶여 있던 은유의 힘을 발휘하여 한 세상사의 보편적 구조에 접근한다. 문학적 글쓰기에서 주체와 타자가 역전하는 것도 이때이다. 은유와 환유의 동시적 기능화는 보편적 표상으로서의 주체와구체적으로 운동하는 타자의 대질이며 그 상호 간섭이자 자리바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질과 간섭, 이 자리바꿈보다 더 정치적인 것은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일이며, 문학적 자율성의 원칙이 거기 있다. - P47

우리가 역사를 믿는다면, 아니 최소한의 변화라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저 폐쇄된 자율성이 문학의 목표일 수는 없다. 자율성은 목표의 원칙이 아니라 방법의 원칙이다. 최초의 의도에 따른 문학의 자율성은 낡고 억압적인 관념을 전도하는 방법이며,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방법이며, 우리 존재의 집인 언어에 대해 가장거룩한 개념을 돌출하려는 방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말하기 위한 비범한 방법이다. 내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말하기로 결정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자유로워야한다. 무엇에 대한 진실은 무엇에 대한 자유이다. 문학은 자율성으로 그 자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의 자율성은 그 이름으로가 아니라 그 실천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천한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실천하려는 것에 의해서도, 실천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고립과 증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긍지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 P49

이 일이 쉽지 않았다는것은 우리의 현대시사가 말해준다.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벗어나게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서구편향‘ 따위의 말은 이제 통용될 수 없으며, 해체니 일탈이니 하는무의미한 말로 그들의 작업이 환원될 수도 없다. 좋은 시는 어느땅 어느 곳에서나 쓰이고 있지만, 이 풍성한 동력을 편향되게 휩쓸어갈 물결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어떤 물결도 벌써 우리의 물결이다. 젊은 시인들이 두려워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어두운 안개 속에서 정처 없이 쏠리는 뒷공론들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고 내뱉는 말들은 얼마나 위험한가. 내가 시 세 편을 거의 췌언에가깝게 분석한 것도 그 때문이다. - P68

문학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언어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자주 언어를 목표로 삼기까지 하기에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더 이성적이다. 문학은 가진 바 수단을 다하여 미지의 것을 파헤쳐 그 현상 하나하나를 말로 표현하려고 애쓰며, 혼란을 정리하고 분석하여 거기에 언어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실제로는 모르는 것임을 폭로하고, 그래서 질서를 혼란으로 전복하는 것도 문학의 일이다. 오만한 성급한질서가 반성하지 않는 현실의 우둔함을 더욱 두텁게 할 때, 자각된 모름과 품 넓은 혼란이 명석성에 이르는 길을 더욱 넓힐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학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이미지도 그 가치는 양면적이다. 이미지는 한편으로 혼란과 미지에 언어의 초벌 그림을 그려주어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근한 얼굴을 낯선 얼굴로 바꿔놓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미지가 가장 아름다운 것도 그때이다. - P71

사실, 말이 사물을 유연하면서도 명확하고 깨끗하게 지시하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순수 언어에 대한 시의 소망은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는 언어에 이른다. 그러나 이 부정은 사물의 깊은 속내를 말로다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현실 속에 ‘숨은 신들‘이 (다시 말해서타자들이) 저마다 제 말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쳐 말하고 다시고쳐 말하려는 노력과 그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부정의 언어, 곧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는 언어이다. 모든 주체가 타자가 되고, 그 모든 타자가 또다시 주체가 된다고 믿는 희망이 이 언어의 기획 속에 들어 있다. 시는 꿈과 현실이,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작은 나와 큰 나가, 비루한 사물과 너그러운 말이, 불모의 현실과 생산하는 현실이 갈등하기를 그치는 자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다고 믿는다. 시의 길이거기 있다기보다는 시가 그 길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 P75

어떤 언어의 찌꺼기도 없이 순결하게 태어날 음악이태로나마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도, 어떤 초월적인 힘의 은총이나 개입이 아니라, 역시 인간의 실천이다. 순수시가 지향하는 침묵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관상하려는 조치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거기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극진한 노력과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끝없이 확인하는언어적 노력이다. 이 점에서, 순수시가 시의 이상일 수는 없어도,
순수시의 이상이 시의 이상이자 모든 윤리적 기획의 이상인 것은확실하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시범한다. 탈출과 해방의 상승의지와 그 강도에 비례하여 더욱 강화되는 현실 분석의 악마적의식이 현실에 내재하는 초극의 가능성에서 서로 만날 때, 아직 걷히지 않은 저 베일이 존재하는 것의 시적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현실이 또 하나의 현실과 겹쳐 나타나는 이 알레고리의 공간을 어떤방식으로든 포함하지 않는 시는 없다. - P83

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시는 승인하고 구성하고 조직할 수있으며, 거부하고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부는 승인의마지막 패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으로 다시 확인되는 것은노래의 존재다. 분석의식에서 떠날 수 없는 시는 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만)그 세계의 전문가다. 시는 순진하면서도 순진하지 않아서, 자유와평등을 완전하게 누리고 생명이 모욕받지 않는, 풍요로운 세계가실현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세계가 존재할 수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불행의 끝까지 가게 하는, 어떤 불행의 말이라도 그 말을 시 되게 하는, 고양된 감정을 그 세계가 아니라면어디서 얻어올 것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다른 어떤 말로 진보주의를 정의할 것인가,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 P85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대면할 때 그 말의 결을 깨뜨리는 균열을경험하게 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도 함께 만나게 된다. 우리의 짧은 논의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모국어 속의 외국어성‘을정의한다면, 그것은 말이 그 일상성에서 벗어나려는 내재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국어로부터 외국어성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말이 제시하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맥락을 다양하고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이 성격과 능력이 두 언어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하고, 번역에 시적 성격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면, 우리의 심층의식과 외부 사물이 깊이 조응하는 자리에 모국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조응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탈과 흠결에 크게 의지하는 번역은 기형도의 사랑없는 글쓰기와 닮은 점이 있다는 점도 덧붙여 말해야겠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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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내가 바라보이는 야산의 공동묘지 위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쫑쫑 땋아 내린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가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울다 지쳐 넋을 잃고 멀리 들판의 아지랑이 너머로 아른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씩 그녀는 사랑하는 이라도 어루만지듯 정겨운 손길로 무덤을 어루만졌다. 봄에 구례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녀의 일과는 이 무덤가를 찾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 어쩌면 앞으로는 어머니를 못 찾아 올란가 모르것소. 나 일본으로 갈라요. 일본 가서 고학이라도 할라요. 일본 가는 증명 벌라고 호적등본도 떼다 놨소. 할머니한테 말도 일러놨고...... 어머니, 내일 또 올게요." - P105

그녀가 아무리 쌀쌀맞게 대해도 시집오기 전부터 그녀를 알았다는 남편 최규복지극정성이었다. 호리호리한 키에 거무잡잡한 얼굴의 최규복은 장난기가많아서 언제나 웃음을 몰고 다녔다. 유달리 식성이 까다로운 시할머니가밥상을 물려놓고 맘에 안 들어 인상을 쓰고 있으면 할머니 앞에서 곱새을 추고 여자 치마를 둘러 입고 한바탕 난리를 치러서 기어이 할머니를 웃기고 마는 최규복이었다. 베틀을 못 이겨 하는 그녀를 밀쳐내고 자기 솜씨를 한번 보여주겠다며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해준 것도 남편이었다. 곯아떨어졌다가 간혹 눈을 떠보면 남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의팔다리를 주무르고 있기도 했다.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괜찮은 사람일 뿐, 자기의 삶과 관계된 사람이고 집이라는 생각은 좀체 들지 않았다. 온몸의 힘을 모아 간신히 가마솥 뚜껑을 열어 밥을 푸다가도 불현듯 한숨이 나왔다. 내가 왜 여기서 밥이나 푸고 앉아 있을꼬. 공부를 하러 가야하는데……….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건가. 밥 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나 하며 사는 것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거미줄에 걸린 나방은 최후의 힘까지 짜내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죽는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느껴졌다. - P114

떠나기 전날 밤, 남편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살아가기 힘들 것이오. 바보같이 나 기다리지 말고, 몇 해 기다려서오지 않거든 다른 사람 찾아가오. 내가 가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어질 텐데………. 당장 당신 외가로가 있으려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간다고 그녀의 삶이 달라질 리없었다. 남편이 떠난다는 애절한 슬픔도 없었고, 정말 다시 못 올 길을 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시 어디 다녀오겠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담담했다. 다음날 구례읍 경찰서 앞에서 징병 떠나는 사람들의 환송식이 열렸다. 말이 환송식이지 조선 사람 치고 남의 전쟁터로 끌려가는 자식과남편을 환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봄햇살은 유난히 화사하고, 수십개의 깃발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가득 안고 펄럭였다. 출정식이 끝나고 남편이 잠시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어제 저녁 같지 않게 남편은 평소의 당당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 P115

"우리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근데 우리가 언제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자라고 공부도 못했고, 부뚜막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딸자식은 딴 집 식구니 입이나 줄이자고 철도 안 든 나이에 시집을 가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친정에서나 시집에서나 태어나면서부터 종처럼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여자들이 남자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받으려면 봉건적 잔재와 계급을 타파해야 합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합니다." - P123

49년 3월 20일경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도 서서히 봄이 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낼까 난감하기만 했던 겨울이 어느새 봄기운에 쫓겨 가고 있었다.
유격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봄은 가장 즐거운 소식이었다. 여전히 폭설이 내리는 날도 있었지만, 눈이 내려도 양지쪽은 하루만 지나면 질퍽하게녹았다. 그녀의 아이도 따스한 봄빛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잘 나오지도 않는 젖을 두 손으로 다부지게 움켜쥐고 빨아대는 아이를 가만히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편하게 집에서살던 때라면 최씨문중 종손이니 떠들썩한 돌잔치라도 치렀으련만 잔치는커녕 언젠지도 모르고 돌이 지났고, 굶기를 다반사로 했던 아이였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작은 이빨이 돋으면서 칭얼거리기도 하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꺄르륵 꺄르륵 숨이 넘어가도록 잘 웃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의 웃음을 봐도 암담할 뿐이었다.  - P149

그게 바로 적들의 본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무엇을 할 것인가?
그녀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단단하고 매서워졌다. 키가 작아 동생을없으면 동생의 다리가 땅에 질질 끌리던 어린 시절 종이가 없어 검정 숯으로 벽이란 벽마다 잔뜩 글씨를 썼다가 두들겨 맞던 여자, 공부가 하고싶어 일본으로 가려다 아버지에게 들켜 강제로 시집을 가야 했던 여자,
시집가기 싫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던 그 여자는 이제 자신의 삶을 갉아먹던 모든 족쇄를 끊고 당당한 인민의 전사로 우뚝 서가고 있었다. - P152

낯선 능선에 홀로 서서 어디로가야할지 막막하게 서 있던 그녀는 그곳에서 제일 가까운 화엄사골에 있을 광의면당을 찾기 위해 무조건 동쪽을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으니 무작정 해 뜨는방향만 보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의 눈에 띌까봐 그녀는 좋을 길을 버리고 아사리 구멍(가시덩굴이나 잡목이 꽉 들어찬 숲을 헤치면서 능선을 몇 개 넘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작은 소릿길이 나왔다. 아무래도 산사람들이 다니는 길 같아 그 길을 따라 걷던 그녀는 무심코 앞을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십 미터 앞이 온통 누랬다. 기백 명이 넘어 보이는 토벌대의 누런 군복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그녀는 이미 산비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P155

단오 이전에는 아무 풀이나 먹어도 독이 없다던 간부들의 말이 생각나냇가에 비죽비죽 고개를 내미는 고사리밥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참꽃(진달래)을 따먹기도 하고 닥치는대로 나물을 뜯어먹으며 최대한 쌀을 아꼈지만, 이십 일이 지나자 가져온 식량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사나흘간은나물만 한 솥씩 삶아 배를 채우거나 물로 끼니를 때웠다. 나물이 독했는지 계속 설사를 하는 바람에 탈진상태가 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처참한굶주림이 계속되었다.
쌀이 떨어진 지 열흘이 지나도 연락원은 오지 않았다. 이제는 나물이고 물이고 입에 닿기만 하면 소태처럼 써서 아무것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손발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차츰 눈이 어두워지고 힘차게 들려오던 물소리도 가물가물 멀어져갔다. 아이는 기를 쓰고 젖만 빨아댔다. - P158

하부는 상부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제일의 철칙이던 빨치산에게 구례군당의 조직적인 하극상 사건은 도당 전체에 한바탕 회오리를 몰아왔다.
구례군당을 지도하던 백운산 특각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의 명령을 어긴 전원을 총살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은 문제의 원인도 모른 채 원칙을 어겼다고 해서 무조건 총살할 수는 없다는 다수의 뜻에 따라 조사단이 파견되고 신오동 및 몇몇 지도부의 반당적인 행위가 샅샅이 밝혀져 그들이 제명되거나 부서이동을 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막을 내렸다. 전남도당에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내부 사건이었다. - P164

뒤돌아볼 경황도 없이 최정호의 뒤를 따랐다. 어디를 어떻게 해서 토벌대가 겹겹이 둘러싼 뱀사골 능선을 빠져나왔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다음날 피아골 군당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다래덩굴 아래서의 그 숨막히던 기억만, 그 다래덩굴 아래만 그녀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아이가 죽었다는 걸 그녀는실감할 수 없었다. 슬픔도 서러움도 없었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밑도 끝도 없는 막막함만이 아이를 낳으려고 쫓겨난 빈집을 찾아가던 날매섭게 휘몰아치던 눈보라처럼 오랫동안 그녀를 휘감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가 죽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항상 아이를 추스르던 버릇으로어깨를 으쓱하다 보면 등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나 정겹게 등을 짓누르던 아이의 무게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이가 아무데도 없음을, 그녀의 등에도 품에도 다른 어디에도없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 P172

아이를 낳던 날 방구들을 파내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난날부터 내쫓겼던 아이, 죽는 날까지 울음 한번 시원하게 터뜨려보지 못하고 쫓겨 다니던 아이, 네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어미는 되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질긴 운명과 슬픈 이별을 강요하는가. 어미는 그것을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이 땅의 모든 어미가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야 말 테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는 날 어미는 네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테다.
네가 큰 소리로 맑은 웃음을 터뜨려도 입을 막지 않고, 같이 웃으며 힘차고 뜨겁게 너를 안아줄 테다. 여기서 쓰러지는 건 아이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내색하지않아도 아이를 잃은 충격은 역시 컸던 모양인지 뱀사골에서 좀 좋아지던건강이 다시 나빠졌다. 당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예전처럼 다른 동지들의 짐만 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일꾼으로, 아니 아이까지 두 몫의 일꾼으로 이제는 제 할 일을 다하는 투사가 되어야 했다. - P173

성원 전체가 보급투쟁을 갔는데 그날 오후까지 살아 있는 게 확인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박종하의형박정하도 바구리봉부근에서 적에게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박춘산도 여기서 죽고, 그를 따라입산했던 여동생 박정숙도 며칠 뒤 전사했다. 부대 사람들 모두 어두운얼굴이었다. 하기는 더 이상 병력을 보충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니 전남도당의 최후가 머지않은 셈이었다. 그날 바구리봉에 걸린 태양도, 노을도유난히 붉었다. 동지들이 흘린 핏빛처럼. - P186

해방의 그날까지 우리가 살아있다면 그때쯤엔 웃으며 오늘을 기억할 수 있겠지. 어쩌면 혁명사업이란 소태 같은 것이 아닌가. 쓰디쓰지만 먹고 나면 몸에 좋은 것. 쓰디쓴 날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해방은 기어코, 기어코 오고야 말 테지. 그러나 살아서 그 서글픈 추억을 되씹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좋은 추억이 되겠다던 김선우도,
영원히 잊지 않겠다던 오금일도 54년 빨치산 최후의 무렵에 적과 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람 좋은 미소만 띠고 있던 구례의 ‘각시순사‘ 김병추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소태처럼 쓰디쓴 혁명의 물결에그들은 하나뿐인 생명까지 던져버린 것이다. - P190

고민이 있어 보이는 대원에게 일부러다가가서 말을 들어주기도 하고, 상담한 내용은 상부에 건의하여 반영하기도 했다. 자신의 활동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일이 아주 좋았다. 이현상이 처음 했던 말대로 정말 그녀의 역할은 어머니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현상은 아이를 잃고 난 그녀의 마음을 그렇게 달래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로서는 입산한 지 두해가 다 되어가지만 아이 때문에 체계적인 조직생활을 해보지 못하다가처음으로 구체적인 자기 임무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당에 대한 죄책감도 아이에 대한 죄책감도 차츰 엷어져갔다. 너무 바빠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 P197

그 후로도 남편은 그녀가 하는 일마다 불쑥 나타나서 무슨 트집을 잡아서든 그녀에게 경고를 내리기 일쑤였고, 행군이라도 하는 날이면 가장 무거운 짐을 그녀에게 맡기곤 했다. 오기가 치솟아 그녀도 두말없이 남편이가져온 짐을 짊어졌는데 당연히 맨 나중에 처지기 마련이었다. 대열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리나케 걷다 보면 남편이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나면 짐을 받아줄 생각도않고 자기 혼자 앞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또 처지면 말없이 기다리고, 보다 못한 박종하가 가끔씩 그녀의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도 못마땅한 기색으로 보거나 달려와서 말리는 남편이었다. - P200

한 달이 지났다. 몸이 약해 늘 비실거리던 그녀도 이제는 웬만한 남자못지않게 행군을 하고 보초도 설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남편의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현상의 그 말없는 웃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조금씩 그녀를 단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그녀를진정한 혁명가의 길로 한 걸음씩 이끌기 위해 더 큰 사랑을 선택한 것이었다. 남편의 사랑에 비하면 그녀의 사랑은 얼마나 협소한 것이었는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동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 앞에서 난생 처음으로 온몸이 떨리는 흥분을 맛보았던 자신의 가슴속에는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불만과 동시에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적인 것으로 보는 세상의 편견이 숨어 있었음을 그녀는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은 그런 기대가 배신당한 아픔의 표현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이 자신의 실수를 눈감아주고 약한 자신을 보호해주길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곧그녀를 영원히 나약한 여자로, 남자의 종속물로 만드는 함정일 뿐이었다.
남편은 그녀를 자기의 아내로만 본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한길에서 살아갈동지로,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대우한 것이었다. - P201

이제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대열에서 뒤떨어지지 않고, 보초도 제법 노련하게 설 수 있게 된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남편 역시 자신만큼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걸 알았다. 남편의 사랑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남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솟구쳤다.
남편이 징병에 끌려갈 때 솔문에 매달려 휘날리는 일장기를 보고 착잡해했던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남편이 살아 돌아왔을 때 반가웠던 것도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어쩔 수 없이 함께 보낸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길들여진 정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 P201

낯설고 재미없던 세상이 그녀 곁으로 쑥쑥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남이쳐놓은 거미줄에 걸려 바둥대는 것 같던 지난날의 삶도 이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소박당한 채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밤마다 이야기책으로 외로움을 달래야 했던 어머니의 삶도, 그 어머니를버려야 했던 아버지, 여자니까 일본글 같은 것 배울 필요 없다며 결혼하기 싫어서 머리까지 잘라버린 그녀를 한 달 만에 시집보낸 그 아버지의삶도 이제 그녀는 흐르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하는 것조차 싫어 서둘러 시집보낸 딸이 남편과 함께 더 새로운 공부를 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 줄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아버지가 준 최고의 선물은 그러고 보면 서둘러서 지금의 남편에게시집보내준 것이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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